Chapter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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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복도가 제법 소란스러웠다. 방금 전, 수업이 끝난 탓에 강의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로 복도는 북적였다. 시우는 저에게 반갑게 알은체를 해오는 아이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던 중이었다.
“아…!”
후배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누군가 시우의 어깨를 툭 밀치듯 치고 지나쳤다. 시우의 옆에 서 있던 동기 승현이 시우를 밀친 누군가를 확인하자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큰 목소리를 냈다.
“야, 너 눈 제대로 안 뜨고 다녀?”
방금 전 시우를 밀친 남학생이 몸을 돌려 승현을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에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애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승현에게 사과하듯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나한테 하지 말고 얘한테 해. 성의도 없이.”
승현이 험악한 표정으로 남자애를 윽박질렀다. 평소 쾌활하고 후배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내는 승현답지 않게 적대적인 태도였다. 시우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조승현, 나 괜찮-.”
“죄송합니다.”
남자애가 시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무색의 표정. 승현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남자애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바로 자리를 떴다. 시우가 눈꼬리를 찌푸리며 승현을 바라보았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사람 많으니까 실수로 부딪힐 수도 있지.”
시우를 마주하자 구겨졌던 승현의 인상이 슬그머니 풀어졌다. 하지만 승현의 얼굴에는 아직도 얕은 혐오가 배어있었다.
“시우 너 쟤 몰라?”
시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학생들 틈바구니로 사라졌는지 그 애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승현이 한숨을 쉬듯 입을 열었다.
“하긴, 넌 모를 수도 있겠네. 아버지 회사 때문에 지난 학기에 학교 잘 안 나왔잖아.”
“응?”
“쟤 되게 유명한 애거든. 산호라고.”
유명하다고? 남자애치고 선이 가늘고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애였다. 글쎄, 평범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시우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승현이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알아서 좋을 것도 없는 얘기야. 쟤 남자한테 몸 팔아서 돈 번대.”
원색적인 비난에 시우의 눈가가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승현이 고개를 털며 이어 말했다.
“몰라, 소문이긴 한데… 확실히 쟤 분위기가 좀.”
“조승현, 이상한 소문 믿지 마.”
“어, 그래그래.”
승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인군자 같은 진시우한테 내가 무슨 얘기를 하겠냐.
“오메가라는 소문도 있고….”
시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승현이 손을 털레털레 흔들었다. 그래, 알았어. 안 믿어 그런 거. 승현의 반응에 시우는 음, 목울대를 울리며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오메가라고…? 여전히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승현의 말대로 시우가 학교에 온 건 제법 오랜만이었다. 아버지의 회사에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도통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웬만하면 평범한 학생들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싶은 게 시우의 욕심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은 완고했다.
승현은 교양 수업을 듣기 위해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시우의 다음 수업은 한 시간 정도 뒤에 있었다. 시우는 발걸음이 닿는 대로 캠퍼스를 걸었다.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구석에 있는 연못가에 도착했다.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는 연못가는 시우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했다.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다. 늘 앉던 벤치를 향해 걷는데, 이미 누군가 그곳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
오도카니 앉은 뒷모습이 조금 낯익었다. 아까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던 그 애였다. 다른 곳으로 갈까. 시우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오메가라는 소문도 있고… 승현의 말이 맴돈다. 시우는 잠시 그 애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오메가. 익히 아는 단어였다.
대학에 와서 시우는 알파라는 자신의 형질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굳이 알릴 필요는 없으니까. 알파라는 것이 알려지면 호기심과 선망의 대상이 될 테고, 개중에는 적잖이 날을 세운 시선도 끼어있게 마련이었다. 그러잖아도 제 주변엔 시선이 몰리곤 했다. 구태여 보탤 이유는 없었다.
“…….”
편견의 시선은 형질인들에게 그림자 같은 것이지만, 알파보다 오메가에게 더욱 가혹했다. 알파보다 수가 더 적어서도 있겠지만, 오메가라는 형질 자체가 유구하게 편견을 받아온 탓이 더 컸다.
오메가는 발정기가 오면 아무나 붙잡고 가랑이를 벌린다더라. 좆만 달리면 개한테도 다리를 벌리는 게 오메가라던데. 오메가가 발정기인 히트 사이클을 혹독하게 겪는 것은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대중의 색안경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 때문일까, 비형질인들에게 남성 오메가를 향한 편견은 더 심했다. 어쩌면 그래서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오메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유무를 떠나 험한 시선을 받아왔을 그 애에게.
“안녕.”
시우는 천천히 벤치로 다가갔다. 그 애는 다가오는 시우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조금 움찔했지만, 이내 시우를 말간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시우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
그러나 곧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애의 입술이 누군가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발갛게 부르터 있었다. 방금 전, 복도에서만 해도 이런 상처를 달고 있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앉아도 돼?”
이미 시우는 그 애의 옆에 앉은 채였다.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는 시우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 애는 곧 아무런 말 없이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까만 그 애의 동공에 연못가의 조성이 오밀조밀하게 비쳤다.
“그새 다쳤나.”
“…….”
“입술.”
그 애가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시우를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선배가 무척 경계스러운 모양이었다. 시우는 빙그레 웃었다.
“아까 복도에서는 안 그랬-.”
“진시우 선배.”
시우의 말을 뚝 끊고 그 애가 입을 열었다. 시우는 여전히 눈꼬리를 곱게 휘며 남자애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 아나본데.”
“유명하잖아요. 선배.”
그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시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애가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이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학교를 모두 통틀어 시우를 모르는 사람이 더 적을 테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진시우, JR그룹 회장의 외아들. JR그룹은 대체로 매스컴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고, 외부에 그들의 내밀한 사정을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인가 매스컴에 시우의 얼굴이 노출되었던 건, JR그룹이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이기 때문이었다.
“나 여기 좋아해.”
시우가 그 애를 따라 연못가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여기 사람도 없고, 혼자 시간 보내기 좋아서-.”
“선배.”
이번에도 그 애는 차갑게 시우의 말을 끊었다.
“저 잘 모르시잖아요. 친한 척하시는 거 별로예요.”
무덤덤한 말투였다. 하지만 시우는 알 수 있었다. 저 덤덤함을 가장한 말투는 사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운 방어 기제일 뿐이라는 걸. 응, 잘 모르지. 그럼 이제 알아가면 되잖아. 왜인지는 모르지만, 난 꼭 그러고 싶은데. 시우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 애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
시우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애는 또다시 훌쩍 자리를 떴다.
아무리 같은 형질인이라고 해도 의도적으로 페로몬을 풀거나, 일부러 형질인임을 밝히지 않는다면 서로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때로 의사 표현을 위해, 혹은 존재감의 과시를 위해 페로몬을 푸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어지간히 공격적인 상황이 아니고서야 벌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 애의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고 해도, 그 애가 원하지 않았다면 시우는 그 애가 정말 오메가인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루의 마지막 수업이 끝난 참이었다. 동기인 승현은 일이 있다며 먼저 집으로 돌아갔고, 시우 역시 이제 귀가하면 될 터였다. 평범한 하루의, 평범한 마무리였다. 그렇게 될 뻔했다.
차키를 쥐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단과대 뒤편의 주차장은 높다란 건물에 가려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당연히 인적도 드물었다. 그곳에 줄 지어 있는 벤치도 늘 서늘한 편이어서 대부분은 텅 비어있곤 했다.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가던 시우의 눈에 벤치 부근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들어왔다.
“어디 숨었나 했더니.”
“…놔요.”
“입술 씹고 도망가서 여기 숨어있었어?”
두 명이었다. 그늘진 단과대학의 건물에 바짝 붙어있는 그 둘은 확실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싸우는 건가. 시우는 생각 없이 스마트키로 차 문을 열다가, 곧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금 둘의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놔, 이 변태 새끼야.”
둘 중 작은 쪽이 눈에 익었다. 이 애를… 오늘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씨발 변태는 무슨. 변태는 너잖아, 이 오메가 새끼야.”
“입 닥치-.”
“오메가는 아무한테나 다리 벌린다며.”
나한테도 벌려봐. 오메가 구멍 맛 궁금하니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지저분한 대화였다. 그냥 지나치기엔 내용이 너무 지나치게 더러웠다. 시우는 건물 외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더럽게.”
그 애의 앞섶을 쥔 남자가 거칠게 그것을 흔들었다. 그 애의 어깨가 남자의 손길에 잘게 흔들렸다. 하얀 얼굴에 매서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 애도 아주 작은 건 아니었지만, 남자의 덩치는 평균보다 큰 편이었다. 남자의 손이 위를 향해 들리는 순간, 시우가 남자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뭐 하는 거야.”
남자는 저를 잡은 상대를 홱 돌아보았다. 짜증이 서린 얼굴이 순간 움찔 떨었다. 진시우? 시우의 눈썹이 위로 치켜뜨였다. 이 새끼도 날 아나본데. 기분 더럽게.
“나 알아?”
남자가 얼핏 너 모르는 새끼가 어딨어, 같은 말을 중얼댔다. 시우는 남자의 팔을 탁 놓으며 고갯짓으로 바깥 방향을 가리켰다.
“가. 지저분하게 굴지 말고.”
“…씹, 네가 무슨 상관…!”
“가.”
시우의 말은 간결했지만,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트릴 뿐, 반박하지는 못했다. 페로몬까지 풀어 제압할 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형질인도 아니었을 테고. 남자는 거칠게 시우의 어깨를 밀치며 자리를 떴다. 시우가 가만히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얼핏 들은 대화 내용으로 보건대, 상황이 대충 짐작이 갔다. 오메가들이 당하는 편견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다시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저 남자도 이 애가 오메가라는 소문을 들었을 테고, 생각 없이 이 애에게 손을 댄 것일 테다. 오메가한테는 그래도 된다는 저열한 생각을 가지고.
“너 괜찮….”
시우가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자, 그 애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뾰족하게 세워 시우를 노려보았다. 난데없이 나타나 저를 도와준 시우가, 마치 저를 공격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 적대적인 표정이었다. 시우가 천천히 입을 다물며 손을 내렸다. 어떤 종류이던 관심이 싫은 거겠지. 지긋지긋할 것이다. 시우 역시 원치 않는 관심이 얼마나 넌덜머리 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문득 발치에 어지럽게 떨어진 김밥이 눈에 들어왔다.
편의점에서 파는 인스턴트 김밥. 껍질이 뜯어지고 반쯤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 애가 먹던 것인 모양이었다. 아, 그러니까… 사람들 눈을 피해서 이곳에서… 작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만큼 뻔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약간 짜증이 치밀었다.
“제 일에 상관하지 마세요.”
시우가 자신이 먹던 김밥을 내려다보는 것을 보곤, 그 애가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옷깃이 방금 일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구깃하게 뭉쳐있으면서도 그 애의 표정은 매서웠다. 그게 무언가 시우의 마음을 건드렸다. 도랑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누군가 도와주러 다가가면 잔뜩 털을 세우고 하악질하는 아기 고양이를 보는 기분과 비슷할까. 시우가 눈을 내리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싫은데.”
시우의 대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 애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무슨.”
시우가 그 애의 구겨진 옷깃을 손으로 툭툭 털어주었다. 여전히 구깃한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조금은 매무새가 다듬어진다. 시우가 옷태를 가늠하듯 고개를 갸웃하며 그 애의 옷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 지금 배고프거든.”
무척 엉뚱한 소리였다. 이 상황에서 배가 고프다니. 그 애의 표정이 다시금 살짝 찌푸려졌다. 시우는 그 애의 팔을 잡았다. 너무 강하지 않게, 하지만 단호하게.
“나랑 밥 먹으러 가자.”
시우가 그 애의 팔을 이끌자, 그 애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시우의 팔을 뿌리쳤다. 물론 시우는 그 애의 팔을 놔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뿌리쳐지지 않는 시우의 팔을 따라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 애가 말했다.
“제가 왜 선배랑 밥을-.”
그 애를 이끌고 시우가 성큼 걸음을 뗐다.
“말했잖아. 지금 배고프다고.”
“그러니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냐구요.”
“나 혼자 밥 먹는 거 싫어해.”
하,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시우의 뒤쪽에서 터졌다. 돌아보진 않았지만, 그 애가 짓고 있을 표정이 눈에 그려져 시우는 작게 웃었다.
“배는 고픈데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게 저랑 무슨 상관…!”
“방금 내가 너 도와줬잖아. 이제 네가 갚아야지.”
그 애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시우가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반달처럼 예쁜 웃음이 시우의 눈가에 떠올라 있었다.
“너한테 사라고 안 해. 그러니까 먹어, 밥. 나랑.”
그 애의 입술이 가만히 다물렸다.
널찍한 시우의 차 조수석에 올라타면서도 그 애는 조금 머뭇댔다. 시우는 모른 척 태연하게 차 문을 닫았고, 운전석 위로 올랐다. 그 애가 입술을 깨물며 앞을 바라보았다. 시우가 픽 웃으며 그 애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그 애가 깜짝 놀란 듯 어깨를 파득 떨었다. 또다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시우는 안전벨트를 끌어와 채워주었다.
“벨트.”
그 애가 눈꼬리를 찌푸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갑자기…하지 마요.”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혼잣말인지.
“뭘?”
시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짐짓 모르는 체했다. 그 애는 여전히 입술을 깨물며 앞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기분이 유쾌했다. 부드럽게 액셀을 밟자, 차가 우우웅, 출발했다.
깨물린 그 애의 입술은 풀릴 줄을 몰랐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 애는 이 차에 올라탄 것 자체를 단단히 후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계속 옴팡지게 찌푸리고 있는 눈썹도 그랬고, 놓지 않고 꾸욱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데, 부르튼 입술을 계속 깨물고 있으면 아프지 않나? 시우는 룸미러로 그 애의 입술을 흘끗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멀리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그냥 인근에 있는 고깃집에 데려갈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누가 봐도 잔뜩 경계하고 있는 모습에 조금 골리고 싶어져 마음을 바꾸었다. 시우는 익숙한 길을 따라 시원스레 액셀을 밟았다.
도착한 곳은 시우가 자주 방문하는 서울 외곽의 일식집이었다. 고급스러운 마당이 펼쳐져 있고, 운치 있는 시시오도시도 있었다. 시우가 차에서 내려 제법 안면 있는 발렛 기사에게 차 키를 건네주고 있을 때, 그 애가 주춤거리며 차에서 내려왔다. 그 애는 이런 곳으로 식사를 하러 올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친절한 종업원이 나서서 둘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길게 늘어진 복도를 따라, 안쪽 가장 깊숙한 룸에 도착했다. 시우가 빙긋 웃으며 종업원에게 인사했다. 식사는 원래 하시던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시우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친구가 몸이 조금 안 좋아서.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세요. 그 애가 시우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시우는 그 애의 시선을 못 본 체했다.
자리에 앉은 그 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주변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 반,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은 마음 반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복잡한 그 애의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시우는 또다시 픽 웃었다. 가볍게 말을 걸어볼까, 하는 찰나 음식이 줄지어 도착했다. 두 명의 종업원이 바삐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올렸다.
윤기나는 샤리와 그 위에 소담히 올려진 회는 두툼했다. 얌전히 자신의 앞에 한 피스씩 놓인 음식을 빤히 바라보던 그 애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웃으며 그 애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런 건 너무 비싼….”
그 애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입을 떼고 보니 자신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애초에 서울 외곽에 이 정도 크기의 고급스러운 식당이라면 비싸지 않을 리가. 자신의 말이 창피했는지 입을 콱 다문다. 그 애의 귓바퀴가 살짝 발긋하게 달아오른 것이 시우의 눈에 들어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시우가 큭,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
그 애가 홱 눈을 올려뜨며 시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면 뭘 해, 귀는 더 빨개졌는데. 큼, 목을 가다듬으며 시우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 하루종일 이거 먹고 싶었어.”
“그럼 혼자…!”
발끈 입을 열었던 그 애는 다시 입을 옴칠 다물었다. 이런 아늑한 룸에서 식사를 할 거라면, 혼자든 여럿이든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애초에 오픈된 공간도 아닌데. 혼자 밥 먹는 것을 싫어한다는 건 핑계가 분명했다. 그 애는 분통이 터지는 듯 시우를 노려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너 때문에 이거 먹는 거 아니야.”
“알아요.”
차가운 목소리로 그 애가 대답하자, 시우가 다시 큭, 하고 웃었다.
“응, 그러니까 불평하지 말고 먹어.”
시우가 젓가락으로 그 애의 텅 빈 손을 가리켰다. 어서 젓가락을 쥐라는 의미였다. 그 애는 짙은 붉은색으로 옻칠 된 젓가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그것을 쥔다. 그 애가 조심스럽게 스시를 들어 올리는 것을 시우는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맛있어할까. 입에 맞았으면 좋겠는데.
“…….”
그 애가 말없이 음식을 오물오물 씹었다. 잠시지만 놀란 듯 눈이 크게 뜨였다. 다시 무표정하게 식는 얼굴을 시우는 빤히 바라보았다. 아, 다행히 입에 맞나 본데. 하얗고 동그란 볼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곤 시우도 젓가락을 움직였다. 젓가락을 쥔 그 애의 손등에 생채기가 난 것이 눈에 들어와 잠시 눈썹을 찌푸렸지만, 금세 곧게 펴졌다.
식사를 하는 동안 시우도, 그 애도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짧게 오고 간 대화도 대부분 시우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 애는 마지못해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내용도 별다를 것은 없었다. 그 애가 시우보다 2학번 아래라는 것, 그리고 같은 경영학부라는 것. 경영학부의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시우가 그 애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물며 학교에 자주 참석하지 못하는 시우라면.
마침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티슈로 입가를 닦은 시우가 그 애를 바라보며 말했다.
“집에 가자. 태워다줄게.”
그 애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차에 오를 때에도 그 애는 다소 머뭇댔다. 조금 답답하기도 하고, 조금 짜증스럽기도 해서 시우는 픽 웃고 말았다. 얼른. 시우가 채근하며 눈짓으로 차를 가리키자, 그 애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차에 올랐다. 다시 복작한 서울의 한복판에 다다랐을 즈음, 시우가 내비게이션을 터치하며 그 애를 바라보았다.
“집 주소.”
“…….”
“어디쯤인지 말해봐.”
그 애가 결심한 듯 고개를 돌려 시우를 바라보았다. 무슨 대단한 결정이라도 내린 양 표정이 단호했다.
“그냥 버스 정류장에서 세워주세요.”
내비게이션을 터치하던 시우의 손이 일순 멈췄다. 정지 신호에 걸린 차를 멈추며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버스 정류장.”
“그냥, 아무 데나요.”
단호한 표정을 지었던 그 애는 다시 슬그머니 시우의 시선을 피해 앞을 바라보았다. 그때 초록불이 들어왔다. 시우는 다시 액셀을 밟으며 흠, 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래, 그럼.”
안전벨트를 꾹 쥔 그 애의 손 마디가 새하얬다. 왜 저렇게 긴장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마침 버스 정류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얼핏 보니 지나가는 버스가 많지 않은, 작은 정류장인 듯 보였다. 조금 더 큰 정류장에 세워주는 게 좋을까. 새삼스럽게 고민하는 사이 차가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그 애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벨트를 달칵 푸르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
마치 로켓처럼 튀어 나가는 그 애를 빤히 바라보면서 시우가 조금 당황한 듯 웃었다. 어지간히도 불편했나 본데. 문을 쾅 닫으려는 듯 손을 뻗은 그 애가 잠시 주춤했다. 입을 달싹이는 것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 애가 조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먹었습니다.”
불퉁한 목소리였다. 인사하려고 고민했던 거였어? 시우가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웃었다.
“응, 조심히 가.”
문이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사이드 미러를 바라보니 버스 정류장을 무심히 지나친 그 애가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보통 불편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서둘러 걷는 걸음걸이는 누가 보아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시우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반대쪽 사이드 미러로 시선을 돌렸다. 공연히 밥 같이 먹자고 했나. 마음속에 웅크렸던 작은 호의가 사르르 사그라들었다.
긴 식사를 한 것도 아닌데 제법 시간이 지나있었다. 멀리 다녀온 탓이리라. 시우는 평소보다 막히는 도로를 바라보며 가죽으로 덮인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고, 몇 가지 참석해야 하는 약속도 떠올랐다. 당분간은 회사보다 학교에 더 집중할 생각이니 회사의 일을 미리 정리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핸들을 쥐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금세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사실 오피스텔보다는 펜트하우스에 더 가까웠다.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구경도 하기 어려울 법한 곳이지만, 시우의 부모님은 이런 좁다란 곳에서 자신들의 무매독자(無媒獨子)가 홀로 생활하는 것을 영 마뜩찮아 했었다.
관리인에게 주차를 부탁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로비를 향해 걸어 들어가려던 시우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
조금은 충동적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음…….”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문제지만, 시우는 사소한 일까지 아랫사람 부리듯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 영 불편했다. 게다가 이건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 상가가 늘어진 큰길까지 걷는 것이 조금 귀찮기는 해도,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우는 아직 간판에 불이 꺼지지 않은 상가로 들어섰다. 커다란 편의점 옆, 작은 약국의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고개를 꾸벅 숙인 시우가 협소한 내부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상처약 있을까요. 벽에 긁혀서 손등이 조금 까졌던데.”
백발이 성성한 약사가 안경을 슥 밀어 올리며 능숙하게 선반에서 연고를 하나 꺼내왔다. 튜브에 담긴 것이 아니라 단지형의 다소 오래된 듯한 연고였다. 시우가 멀끔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잠자코 밴드도 하나 더 얹는다.
“얼마나 까졌간?”
“심한 건 아니고, 살짝 핏방울 맺힐 정도….”
아, 하더니 말을 하나 더 얹는다.
“이거 얼굴에 발라도 되는 거예요? 입술도 조금 찢어져서.”
약사가 걱정 말라는 듯 연고 뚜껑을 톡톡 두드렸다.
“얼굴에 발라두 되는 거여. 그런데 심하게 찢어진 거 아니믄 그런 건 그냥 놔둬도 알아서 나아요.”
“아.”
“그래두 정 약 발라주구 싶으믄, 그거 발라주고 밴드도 붙이시고.”
시우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시우는 약국을 빠져나왔다.
***
오전 수업이 있었다. 샤워를 하고 짙은 그레이 컬러 가운을 걸친 채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던 시우의 눈에 어제 샀던 연고와 밴드가 들어왔다. 이게 뭐지?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아, 어제 약 샀었지, 하고 웃는다. 나설 준비를 마치고 난 후 시우는 연고와 밴드를 주머니 속으로 성의 없이 찔러 넣었다. 차에 올라 글러브 박스에 그것들을 밀어 넣고 나서는, 금세 그것들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오전 수업 시간은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과 겹치는 시간대다. 제법 도로 위에서 시간을 보낸 뒤에야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우는 평소와 다름없이 단과대 건물 뒤편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스마트키로 차 문을 잠그고 걸음을 옮기는데, 새까만 머리통이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
그 애였다. 햇볕 아래 서 있는 그 애의 피부가 유달리도 희었다. 그래서일까, 까만 머리카락이 대조되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문득 글러브 박스에 넣어둔 연고가 떠올라 시우는 성큼성큼 그 애를 향해 걸었다.
“안녕.”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목소리에 그 애가 고개를 돌려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햇볕에 찌푸려졌던 눈가가 곧아졌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금세 차가워지긴 했지만. 그 애는 입을 다물고 뻣뻣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려는데, 시우가 그 애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
“…….”
“이리 와 볼래?”
시우가 눈짓으로 주차된 자신의 차를 가리키자, 그 애의 얼굴에 익숙한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바로 어제 이곳에서 좋지 못한 일을 당할 뻔했다. 그런 곳으로, 더군다나 밀폐된 차에 가자고 하니 꺼려지는 것이 당연했다. 시우는 아차 하는 마음에 눈썹을 살짝 모으며 미안, 사과했다. 그 애의 차가운 눈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기다리라고 할까. 기다리라고 하면 도망갈 것 같은데.
“그럼,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뭐, 도망가면 어쩔 수 없고.
시우는 몸을 돌려 다시 주차된 차를 향해 걸어갔다. 조수석 문을 열고 몸을 반쯤 걸친 채 글러브 박스를 열었다.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연고 단지는 금방 눈에 띄지 않았다. 조금 짜증스럽게 글러브 박스 안을 헤치다, 결국 연고를 발견하곤 손에 쥐었다.
다시 그 애에게 돌아오는데, 그 애가 머뭇대며 발끝을 톡톡 차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자리를 떠야 할까, 아니면 얌전히 기다려야 할까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마침내 크게 한숨을 내 쉰 그 애가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시우가 아슬아슬하게 그 애의 앞에 섰다.
“이거.”
불쑥 내밀어진 커다란 손바닥 위의 연고를 보곤 그 애가 천천히 시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 밴드도 있었는데 그건 깜빡했다. 시우가 조그맣게 덧붙이며 웃었다.
“손등 다쳤잖아. 어제.”
“…….”
“입술도.”
시우의 얼굴이 햇볕 아래 환하게 빛났다. 그 애 만큼이나 하얀 피부, 친절하고 또 그만큼 거리가 느껴지는 호의. 그 애가 여전히 연고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발라줘?”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커다란 손이 정말 연고 뚜껑을 열려는 듯 움직이자, 그 애가 재빨리 손을 뻗어 연고를 쥐었다. 불퉁한 얼굴로 시우를 올려다보며 그 애가 말했다.
“선배가… 이걸 왜.”
“진시우!”
누군가 시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우와 그 애의 고개가 동시에 소리 난 곳을 향해 움직였다. 멀리서 승현과 두 명의 동기가 시우를 향해 유쾌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우가 웃으며 그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수업 열심히 들어.”
가볍게 인사하고 돌아서려던 시우가 아, 하며 다시 그 애를 향했다. 그 애가 말가니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나 이름 알려줘.”
“이름… 이요?”
“응, 네 이름.”
“선배도 어차피 제 이름 들었-.”
자칫 호의를 보인 상대에게 날 선 말을 끝까지 뱉을 뻔했다. 선배도 내 이름 들었잖아요. 학교에 떠도는 소문 들으면서, 내 이름도 들었을 거잖아. 다행히 뒷말은 삼켜냈다. 시우가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그 애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응, 들었어. 네 이름.”
“…….”
“근데 그건 네가 알려준 게 아니잖아.”
연고 단지를 만지작거리던 그 애가 천천히 시선을 올려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산…호요. 백산호.”
산호? 시우의 입꼬리가 조금 더 둥그렇게 말렸다. 완전히 몸을 돌려세우며 또 봐, 인사를 건넨다. 산호를 뒤로하고 미련 없이 몸을 돌린 시우는 저를 기다리는 동기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시우 너 백산호랑 아는 사이였어?”
동기 하나가 조금 의외라는 듯이 물어왔다. 시우가 응? 하더니 곧 빙그레 웃었다.
“산호. 응.”
야, 쟤… 동기가 입을 열자 승현이 동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그래? 옆구리를 찔린 동기가 눈썹을 치켜뜨자 승현이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그 모습을 시우도 보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산호… 산호? 이름이… 특이하네. 그리고 그뿐이었다. 산호의 이름은 금세 시우의 머릿속에서 흩어졌다. 강의실로 향하며 시우는 동기들과 함께 농담을 나누며 웃었다.
점심을 먹고 이어지는 수업은 전공 수업이었다. 시우는 조금 일찍 강의실에 도착했다. 선단이 높은 맨 뒷자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곳에 앉았다. 넓은 대강의실에는 시우보다 먼저 도착한 학생들이 제법 있었다. 자리에 앉은 시우를 발견하곤 후배 몇 명이 시우에게 쪼로로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배 학교 자주 오시니까 너무 좋다.”
응, 안녕. 시우가 그들에게 다정하게 웃어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번 학기는 학교 자주 오신다면서요. 맞아, 저도 들었어요. 신입생들이 다들 선배 보고 싶어서 난리에요. 밝게 떠드는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을 때, 누군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전공 수업은 학부생 대부분이 듣는 전공 수업이었다. 어떤 학생들이 이 수업에 참여했는지 교수라도 하나하나 기억하지는 못할 터다. 하지만, 누군가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이 유달리 눈에 띄는 법이다. 지금 시우에게 강의실로 들어온 산호가 그런 것처럼.
산호는 조용히 강의실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찾는 듯 구석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강의실에선 맨 앞자리가 아니고서야 교수의 시선을 받기 쉽지 않을 텐데도 산호는 마치 사각지대를 찾는 것처럼 구석진 자리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시우가 몸을 비스듬히 뒤로 물려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곤 산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산호야.”
도란도란 시우의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후배들이 고개를 홱 돌려 산호를 바라보았다. 시우가 산호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후배들은 산호가 강의실에 들어선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터였다. 반대편 끝자리로 움직이려던 산호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뻣뻣하게 시우를 돌아보았다.
“…….”
입술이 갸름하게 벌어졌다가 곧 다물린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적잖이 당황한 듯도 보였다. 시우가 웃으며 손짓했다.
“여기 앉아. 내 옆.”
시우의 앞에 서 있던 후배 하나가 어? 하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순수한 의아함은 아니었다. 명백한 악의가 섞인 목소리였다.
“선배 산호랑 아는 사이였어요?”
아예 악의를 숨길 마음이 없는 목소리였다. 시우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건넨 후배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응.”
그리곤 곧바로 산호를 향해 다시 손짓했다.
“산호야, 이리 와. 빨리.”
시선이 저에게 모이자, 산호는 더욱 뻣뻣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대로 시우의 말을 무시하는 것 보다는 시우의 말대로 곁에 앉는 것이 덜 주목받을 거라고 판단했는지, 천천히 시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시우가 웃으며 드르륵 의자를 당겨주었다.
산호가 시우의 옆자리에 앉자 기묘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후배들이 서로 눈치를 보듯 우물거리더니 금세 가벼운 인사를 하곤 자신들의 자리로 흩어졌다. 시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턱을 괸 채 강의실 칠판을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듯 앉아있던 산호가 천천히 부스럭거리며 전공 책을 꺼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전공 책을 펼치는 산호의 허리가 곧았다. 그 모습이 꽤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긴장한 듯도 보여서 시우는 웃음이 떠오르려는 것을 꾹 참았다. 아, 왜 이 애만 보면 자꾸 웃음이 나오지. 시우가 전공 책 끄트머리를 쥐곤 자신의 쪽으로 살끔 끌어당겼다. 속절없이 끌려가는 책을 보며 눈을 움찔한 산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곤 시우를 바라보았다.
“같이 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초등학생이 교과서를 같이 보자는 것도 아니고, 전공 책을 같이 보자는 건. 시우는 다시 웃었다.
“나 오늘 책 안 가져왔어.”
그럴 리가. 이렇게 커다랗고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는 대학생이 대한민국 천지에 어디 있다고. 각기 배정된 사물함 캐비닛이 왜 있는데.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시우가? 산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시우를 바라보았지만, 시우는 여전히 눈꼬리를 접어 웃고 있을 뿐이었다.
“진짜야.”
“…….”
“오늘만 보여줘.”
산호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선배가 대체 무슨 꿍꿍이지. 산호는 말없이 시우 쪽으로 끌려간 책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턱을 괸 채 산호를 바라보던 시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너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았는데.”
또 무슨 말을… 산호가 약간 짜증을 담아서 시우를 홱 바라보았다.
“어디서 봤는지 지금 생각났어.”
뾰족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산호에게, 시우는 속도 없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에 오래된 도자기 인형 하나 있거든. 진짜 오래된 건데.”
“…도자기 인형이요?”
“응. 회장… 아니, 아버지가 사업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러시아에서 구해온거라고 하던데.”
“…….”
“너 그 인형 닮았어. 웃으면 똑같을걸.”
산호의 찌푸린 눈가가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인형…? 도자기 인형… 어디선가 들어본… 시우가 산호의 표정을 보더니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 그 인형 예쁘게 생긴 인형이야. 이상한 거 아니야. 자신의 말을 오해했다고 생각하곤 두런두런 변명을 늘어놓는다. 어쩐지, 어릴 때부터 봤던 얼굴 같았거든.
그 말을 끝으로 시우는 산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곧바로 들어온 교수가 수업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호의를 담은 관심은 여기가 끝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공 책 위로 올라온 시우의 하얗고 기다란 손끝을 산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머니 속에서 꾹 쥐고 있는 연고 단지의 둥근 모서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다란 강의실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시우는 산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려 꾹 누르고는 인사 대신 눈으로 웃어 보였다. 책상과 책상 사이에 걸친 전공책을 빤히 바라보는 산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시우의 주변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아까의 후배도 있었는데, 크로스로 맨 가방끈을 작은 주먹으로 꼬옥 쥐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선배, 시우 선배.”
“응, 인혜야.”
후배가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선배 산호랑 어떻게 알아요?”
아, 또 그 얘기. 시우는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으로 후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은 학부생이잖아.”
후배, 인혜가 조금 찌푸린 눈으로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쟤랑 친하게 지내지 마세요.”
제법 단호한 목소리였다. 표정도 그랬다. 시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인혜가 시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들이 오해할까 봐서요.”
“뭘?”
인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우는 말없이 인혜를 바라보았다. 시우가 기억하기로 이 후배는 함부로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동기인 승현도 그랬고, 인혜도 그렇고, 왜 모두가 산호에게만 유달리 날을 세울까.
“쟤가 이상한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하거든요.”
“…….”
“제가 아는 사람 일이라서 잘 아는데….”
인혜는 다른 이의 험담을 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지 눈썹을 꿈틀댔다.
“쟤랑 어울리면 선배도 그…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핵심에 다다르지 못하고 이야기를 빙빙 돌리더니 결국 단호하게 입을 연다.
“쟤 오메가라 돈 받고 데이트 같은 거 해줘요. 그런 거 좋아하는 알파나 변태들한테.”
시우가 황당하다는 듯 픽 웃자, 인혜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니, 아니! 선배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아는데-.”
“응, 고마워.”
“…….”
“근데 그런 애 아니던데.”
네? 인혜가 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우는 가볍게 웃으며 인혜의 어깨를 부드럽게 톡톡 쳤다.
“착해. 그리고.”
쟤 엄청, 사람 경계해. 시우가 달래듯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자, 인혜가 긴장을 풀고 으앙, 하며 우는 소릴 냈다.
“아무튼 선배는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나 안 착해. 엄청 나빠.”
인혜가 킬킬대며 웃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뭐 그런 거예요? 이렇게 착해서 세상 어떻게 사시려고.”
대기업 회장의 외아들에게 던진 ‘착해서 세상 어떻게 사느냐’는 농담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인혜가 까르르 웃었다. 순간 시우에게 옅은 단 향이 끼쳐왔다.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북적한 학생들 틈 사이로 단 향은 흩어진 뒤였다. 시우가 앉았던 맨 끝자리, 그리고 그 옆자리까지 텅 비어있었다.
***
절차상으로는 취업계를 내야 했다. 조교실에서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돌아가는 참이었다. 캠퍼스 정문에 시우의 차가 다다랐을 즈음, 또다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애는 왜 이렇게 눈에 잘 띄는 걸까. 특별할 것 없는 애인데. 시우가 천천히 인도 쪽으로 차를 붙이며 속도를 늦췄다. 지이잉,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몸을 비스듬히 숙여 캠퍼스를 빠져나가는 시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산호야.”
무슨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던 건지, 산호는 조금 과하게 놀라며 시우의 차를 바라보았다. 열린 조수석 문과, 그 안으로 비스듬히 몸을 숙인 시우를 확인하고는 또다시 뻣뻣하게 표정을 굳힌다. 왜 나만 보면 저렇게 경계를 할까. 시우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탈래?”
“…….”
“집 데려다 줄게.”
산호는 잠시 시우를 바라본 채 우뚝 서 있었다. 뻣뻣하던 표정이 조금 풀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딱딱했다. 시우는 산호의 대답을 여유롭게 기다렸다. 그때,
“어! 시우 선배다!”
서너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차 앞에 서 있는 산호를 지나쳐 아까의 후배 셋이 허리를 숙이며 조수석 너머 시우를 바라보곤 반갑게 인사했다.
“선배, 집에 가시는 길이에요?”
“왜 이렇게 늦게 가세요! 저희는 오늘 마지막 강의 때문에….”
시우가 다소 난감한 듯 웃었지만, 곧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들도 이제 집에 가는 거야?”
네! 후배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반짝이는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는 후배들이 종알종알하며 모여있는 병아리 같아 보인다. 뭐, 눈치 없는 병아리들이지만.
“너희들도 타. 데려다 줄게.”
“와, 정말요?”
후배들이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응, 뒤로. 앞은….”
산호가… 그러나 시우는 곧 입을 다물었다.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짧은 사이, 산호는 벌써 어느만치 멀어진 후였다. 잠시 산호를 부를까 생각했지만, 시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단둘이 있는 것도 불편해하는데, 이 애들과 함께 차를 타는 건 더 불편할 테지.
달칵, 문이 열리고 후배들이 시우의 차에 올랐다. 감사합니다! 밝은 목소리에 시우는 빙긋 웃었다. 응, 인혜부터 데려다 줄게. 주소 말해봐. 내비게이션을 터치하는 사이 차가 서서히 굴러갔다. 차는 무덤덤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며 걷는 산호를 천천히 지나쳤다.
“진짜 감사해요, 선배.”
홀로 남은 후배가 차에서 내려 시우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우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봬요! 돌아서는 후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리고 액셀을 밟는다. 핸들에 걸쳐진 시계를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흘러있었다. 회사에 보내야 할 서류가 있는데. 오피스텔로 향하며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
입을 꾹 다물고 걸어가던 산호는 얼굴에 이렇다 할 표정을 띠지 않았었다. 시우가 말을 건넸던 것이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애초에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불편해하니 그럴 만도 했다.
“…….”
그런데 왜, 자꾸 신경이 쓰이지. 시우는 눈썹을 찌푸리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마침 붉은색 정지 신호등이 켜져 차를 멈춰 세웠다.
“…….”
시우는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리곤 후, 한숨을 내뱉고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부웅, 엔진이 발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왔던 길을 밟아 돌아가며 시우는 시계를 다시 바라보았다. 늦을 텐데.
조금 성급하게 운전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동안 시우는 인도 위의 사람들을 확인했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버스 정류장에서는 조금 속도를 늦추고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마침내 캠퍼스 정문 앞에 다다르자, 시우가 차를 멈춰 세웠다.
“하.”
자신의 행동에 조금 당황했다.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애, 산호는 벌써 집으로 돌아갔을…
“…어?”
캠퍼스 앞 버스 정류장에 정차했던 버스가 출발하자, 텅 빈 정류장 벤치에 홀로 앉은 인영이 보였다. 제법 어둑하기도 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바람에 이목구비를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시우는 그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챘다. 핸들을 돌려 차를 크게 선회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언가를 손에 꼭 쥐고 있는 인영 앞에 차가 멈춰 섰다. 다시 한번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
“산호야.”
산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가락에 꼭 쥐고 있는 연고 단지가 미등에 반짝하고 빛났다. 산호는 제 앞에 선 차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고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이었다.
“여태 안가고 뭐해.”
“…선배.”
“집에 안 가?”
“…선배가 왜….”
그렇지, 이 애도 의아할 것이다. 시우 자신도 자신이 의아하니까. 분명히 시우는 후배들을 태우고 학교를 떠났다. 의아함과 당황함으로 얼룩진 얼굴을 보고 시우는 픽 웃었다. 지금 밀려오는 감정은 분명히 안도감이었다.
“나 기다렸어?”
산호의 눈꼬리가 조그맣게 비틀렸다. 곧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닌데요.”
“맞는 것 같은데.”
시우가 여전히 웃으며 저를 바라보자, 산호는 울컥 화가 치민 모양이었다. 세게 고개를 저었다.
“선배 기다린 거 아니라고요.”
“그럼 여기서 뭐 하는데.”
입을 다무는 산호를 보며 시우가 몸을 조금 더 숙였다.
“타. 데려다 줄게.”
“싫어요. 안 타요.”
말투에 비죽비죽 가시가 섰다. 시우의 웃음이 살짝 희미해졌다. 한숨을 작게 내쉬며 시우는 시동을 껐다. 부드럽게 시동이 꺼지자, 시우는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산호를 빤히 바라보며 차에 등을 기대고 선다. 산호는 더욱 당황한 표정으로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음… 목울대를 울리던 시우가 천천히 산호의 곁으로 가 벤치 옆자리에 앉았다. 시우의 움직임을 가만히 좇던 산호가 입을 열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시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산호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너 기다리잖아.”
“무슨…!”
왈칵 입을 열었다가, 곧 숨을 고르더니 산호가 차갑게 말했다.
“여기 주차구역 아니에요.”
“응. 알아.”
“이런데다가 차 세워두면-.”
“그러게, 견인되겠다.”
하, 황당하다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시우는 여전히 산호를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네가 계속 안 타면 진짜 견인되겠는데.”
“왜 자꾸 저한테…!”
분이 나는지 산호의 눈가가 구겨졌다. 조금 발긋하게 끄트머리가 달아오른 듯도 보였다. 그러게, 왜 네가 신경이 쓰일까. 시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대신했다. 산호가 입술을 깨물며 시우를 응시했다. 비죽한 가시가 돋은 마음에 삐뚤어진 비아냥이 차올랐다.
“왜요, 선배도 제가 아무나-.”
“나 오늘은 배 안 고파.”
“…네?”
“그냥, 데려다 줄게.”
시우가 천천히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산호에게 손을 뻗으려다가 곧 아래로 내리고 만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 사이를 도로의 어지러운 차 소리가 빽빽하게 메웠다. 거친 배기음이 들린 후에, 산호가 고개를 들었다. 시우를 따라 몸을 일으킨다. 시우는 일어선 산호를 향해 빙긋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
산호가 우물거리며 말해준 주소는 시우의 오피스텔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시우가 구태여 갈 만한 동네는 아니었다. 번화가를 지나 고불고불한 골목길로 들어서자, 운전하기가 조금 불편해졌다. 대형 세단이 작달한 골목을 들어올 일이란 거의 일어나지 않으니까. 시우가 조금 난처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사이드 미러를 바라보았다. 산호는 차창 너머 가쁘게 붙은 골목길 벽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냥 내려주세요.”
“아직 조금 더 가야하잖아.”
“여기 골목길 좁아서 차 못 올라가요.”
내비게이션에 표시된 도착지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멀지는 않았다.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골목은 점점 좁아질 터였다. 산호의 말처럼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흠, 시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
“잘 가.”
산호가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후진 기어를 넣는 사이 앞으로 걸어가는 산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골목 끄트머리에 다다라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옆얼굴이 차 미등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얼핏 산호의 표정이 엉망으로 구겨진 것이 보인다.
“…….”
짜증이 서린 듯도 했고, 화가 난 듯도 했다. 하지만 시우의 눈에는 눈물이 어린 것처럼 보였다. 울 이유 같은 건 전혀 없는데. 그저 마음이 쓰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걸까? 후배들을 데려다 줄 때 지나쳤던 산호의 무덤덤한 표정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일그러진 산호의 얼굴 역시 못내 마음에 미진하게 남았다.
“하, 젠장.”
시우가 거칠게 차를 후진시켰다. 조금 넓은 골목이 나오자, 주차할 만한 공간이 눈에 띄었다. 허름한 천으로 덮어 씌워진 그곳은 공사 중인 폐허로 보였다. 시우는 그 앞에 엉망으로 차를 주차했다. 조금 다급하게 시동을 끄곤 차에서 빠져나왔다.
“…….”
성큼성큼 걸어가 산호가 꺾어 들어간 골목으로 몸을 틀었다. 산호는 보이지 않았다. 골목은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고, 고지대로 올라가는 경사도 있었다. 산호를 쫓아가서 뭘 어쩌려는 걸까. 뚜렷한 목적은 없었다. 그냥 산호를 쫓아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 뿐이었다. 내비게이션에 찍혀있던 방향을 곰곰이 떠올리며 시우는 골목을 따라 걸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이 희미한 불을 껌뻑이고 있었다. 이런 데는 혼자 다니기 좀 위험하지 않나. 그 애도 젊은 남자니까 무슨 일이야 생기겠냐마는.
“…….”
하지만 그 애가 정말 오메가라면 상황은 다를 것이다. 야트막하게 경사진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데,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산 끝난 거잖아요.”
“그러니까 돈 더 주겠다고.”
“필요 없다고 했잖…!”
안쪽 골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시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살며시 몸을 틀었다.
“애초에 이 짓 하겠다고 허락한 건 너야.”
“그건 그냥 만나서 밥만 먹으면 된다고 해서-.”
“순진한 척 아양 떨지 마. 누가 같이 밥만 먹겠다고 오메가한테 돈을 줘.”
스산한 가로등 아래 두 명이 가까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씹질하재? 그냥 잘난 입술 한 번 빨아보자는데-.”
시우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다가서는데, 한쪽이 다른 한쪽의 목덜미를 거칠게 쥐곤 입술을 물어뜯을 마냥 달라붙었다.
“아…!”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이 간발의 차를 두고 터져 나왔다. 알파의 페로몬은 반항하는 오메가를 찍어 누르기 위한 것이었고, 오메가의 페로몬은 위험을 감지하고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위험 신호 같은 것이었다. 시우가 입술을 짓씹으며 훅, 숨을 몰아쉬었다.
“…윽.”
시우의,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그들을 순식간에 덮쳤다. 엉겨있던 알파의 페로몬도, 오메가의 페로몬도 허공으로 천천히 흩어졌다. 시우 역시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의 페로몬을 걷어냈다. 남자가 저를 공격한 또 다른 알파를 거칠게 돌아보았다.
“뭐야?”
이거, 그날도 본 모습이잖아. 지저분하게.
시우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제 손을 들어 남자를 가로막지는 않았다. 눈을 가만히 깜빡이며 형형하게 남자를 마주볼 뿐이었다. 시우가 천천히 시선을 옮겨 산호를 바라보자, 남자가 허, 하며 웃었다.
“누가 오메가새끼 아니랄까 봐, 어디서 알파 하나 달고 왔네.”
“그게-.”
“이번에 돈 꽂아주는 새끼는 이 새끼야?”
남자가 품평하듯 시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비죽거리는 시선이 몹시 불쾌해서 한 번 더 페로몬을 풀고 싶었지만, 시우는 그저 입을 다문 채 그를 마주 보았다. 남자가 조롱 섞인 비웃음을 가득 띠곤 시우에게서 시선을 돌려 산호를 바라보았다.
“돈 많아 보이네.”
“함부로 말-.”
“하긴, 너도 이왕이면 돈도 많이 주고 저 새끼처럼 잘생긴 새끼한테 다리 벌리는 게 좋겠지.”
“씨발, 말 함부로…!”
산호가 바락 악을 쓰며 남자의 어깨를 세게 밀치자, 남자가 느물느물 웃으며 산호의 손을 떨쳐냈다. 시우가 위협적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오오, 야유하듯 소리를 내지른다.
“뭐 하는 분이길래 오메가 꽁무니나 쫓아다니실까, 이 도련님은.”
시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학교 선배.”
선배? 서언배애? 남자가 조롱조로 말을 늘이며 크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와, 백산호 이젠 학교에서도 흘리고 다니나 봐?”
“그냥, 선배.”
남자가 픽 웃었다. 어깨 너머 산호를 흘끗 바라보더니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냥 선배님께서 딴 알파 냄새 묻히고 있는 오메가 더럽다고 버리면 그때 또 연락해. 뭐, 돈 떨어지면 알아서 하겠지만.”
남자가 건들거리며 시우를 지나쳤다. 시우는 저를 지나치는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우뚝 서 있었다. 남자가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돌아 사라지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산호의 얼굴은 무척이나 파리했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에 세게 짓무른 입술만이 온통 붉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시우는 산호를 바라본 채 서 있었다.
“…혹시.”
조금은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방해했어?”
산호는 제 발끝만 노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더이상 세게 짓물을 수 없을 것 같은 입술을 더욱 세게 짓씹으면서. 시우는 그런 산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방해한 거라면 미안해.”
“…….”
“네가 싫어하는 것… 같아서.”
산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만들어낸 속눈썹의 그림자만이 파르르 떨렸다. 시우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심히 들어가.”
“…….”
“갈게.”
시우는 몸을 돌려세웠다. 등 뒤의 산호는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차에서 내려 이 골목을 올라오지 않는 것이 좋을뻔 했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올라오는 바람에 산호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지저분한 소문도 사실인 것을 알게 됐다. 그 애가, 산호가 숨기고 싶은 일이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비탈진 골목을 내려오며 가로등이 만들어낸 자신의 긴 그림자를 시우는 말없이 밟아 내려갔다. 오랜만에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느낀 탓일까, 심장이 불쾌하게 뛰고 있었다. 조금 짜증이 나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조금이 아니라, 많이.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곧 주차된 자신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시우는 말없이 차 위로 올랐다.

আৱদ্ধ ফেৰ'মনTempat cerita menjadi hidup. Temukan sekar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