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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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대 자유게시판
익명 (14:36)
어제 ㅈㅅㅇ 본 사람? ㅈㅅㅇ가 누구 안고 차에 태웠다는데 그거 ㅂㅅㅎ 맞음?
익명1 (14:36)
ㅇㅇ ㅂㅅㅎ맞음. 나 봄.
익명2 (14:37)
ㅈㅅㅇ가 누구임? ㅂㅅㅎ는 또 누구?
ㄴ익명6 (14:41)
ㅈㅣㄴㅅㅣㅇㅜ / ㅂㅐㄱㅅㅏㄴㅎㅗ
ㄴ익명2 (14:42)
헐 그 선배가 왜?
익명3 (1437)
나도 봤음.. 개놀램. 미친새끼가 앵겨서 쪽쪽 빨고 있던데.
익명4 (14:39)
으악 더러워 시발
익명5 (14:40)
아픈거 같던데
ㄴ익명4 (14:41)
아프긴 시밬ㅋㅋㅋㅋㅋㅋㅋ 걍 발정났던데
ㄴ익명5 (14:43)
제대로 보긴 함? 아파서 병원데려가는 걸로 보였음
ㄴ익명4 (14:44)
너 백산호임?
익명6 (14:40)
진짜 씹걸레가 따로 없었음 솔직히 그 선배도 이해 안감
ㄴ익명1 (14:45)
근데 그 선배 워낙 천사병이라 아무한테나 다 잘해주긴 함. 내생각엔 ㅂㅅㅎ가 뭔 개수작 부린거 같음. 걔 오메가잖아.
ㄴ익명3 (14:45)
아닠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그렇지 모가지 빨고 있는데 그걸 냅둠?
ㄴ익명1 (14:46)
백산호 맛탱이가서 페로몬 폴폴 풍기던데? 그리고 그 선배 알파일걸? 오메가가 페로몬으로 꼬시면 알파가 안넘어가는 게 더 이상함
ㄴ익명7 (14:46)
222222 페로몬으로 꼬시면 부처도 넘어감
ㄴ익명6 (14:47)
페로몬을 니가 어떻게 아는데? 니도 오메가냐?
ㄴ익명1 (14:48)
나 알파임 솔직히 어제 걔 거의 박아달라고 애원하는 수준이었음
ㄴ익명7 (14:50)
그럼뭐햌ㅋㅋㅋㅋㅋ 선배는 꿈쩍도 안하던데 지혼자 안달나서 쮸룹쪾쪾쪽 드러운새끼
익명7 (14:40)
어 차에 태우고 출발하는 거 까지 봄 사진도 찍음
익명8 (14:41)
(사진)
증거ㅇㅇ
ㄴ익명9 (14:53)
씨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익명5 (14:53)
눈풀린거 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익명10 (14:53)
야 근데 쟤 카메라 보는 거 아님?
ㄴ익명8 (14:54)
헐 씨발?
익명11 (14:56)
백산호 원래 진시우 호시탐탐 노렸었음 존나 착한척하고 불쌍한척 하면서ㅇㅇ 나 같은 학부라 아는데 원래 그 선배 진짜 착해가지고 다 잘해준단 말임? 근데 백산호가 그거 이용하는거
ㄴ익명12 (14:56)
ㅇㄱㄹㅇ
ㄴ익명3 (14:58)
넘어가는게 호구아니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익명11 (14:58)
아니 넘어간게 아니고 그냥 잘해주는 거지 ㅂㅅ아
ㄴ익명5 (14:59)
그 선배 원래 다 잘해주는 거 아는데 걔한테 유독 잘해주기는 함 솔직히 둘이 그렇고 그런사이 맞는 거 같음
ㄴ익명7 (15:01)
진시우가 뭐가 아쉬워서 백산호랑ㅋㅋㅋㅋㅋㅋㅋㅋ 막말로 진시우가 오메가 필요했으면 연예인급 줄세울 수 있는데 뭐하러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그 형이 오메가나 따고 다닐 사람은 아님
[야 진시우가 무슨 성자라도 되는 줄…]
붕대가 감긴 손으로 핸드폰을 터치하는 것이 영 불편한지 동현은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손놀림이 빠르지 못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씨이팔. 잇새로 연신 욕을 뱉으며 학교 익명 커뮤니티 게시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액정을 톡톡 누르는 얼굴에 비열한 표정이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소품 창고를 떠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다수의 아이들이 몰려있는 오픈 메시지 창이 밤새도록 시끄러웠다. 이제 학교 커뮤니티에도 어제의 일이 올랐으니 소문은 점점 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개중에는 황당한 추측과 원색적인 비난도 섞여 있을 것이다. 동현이 느물느물 웃으며 아랫입술을 축축하게 핥았다.
그때, 커다란 손이 동현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뭐야?”
자신이 한창 텍스트를 쓰고 있던 핸드폰 액정을 가린 커다란 손을 바라본 동현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홱 올렸다.
“동현아.”
제 핸드폰을 가린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동현이 헙, 숨을 들이마셨다. 동현의 키에 맞추어 허리를 살짝 굽힌 채 가까이 다가선 시우가 동현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가느다란 눈꼬리가 그림처럼 곱게 휘었다. 그러나 따뜻한 밤색 눈동자가 얼핏 붉은 이채를 띤 것 같았다. 동현이 화들짝 놀라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 어… 서, 선배.”
너무 당황해서일까 동현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시우는 여상히 손을 뒤로 물려 주머니에 꽂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눈에 매달린 웃음은 그대로였다.
“바빠?”
시우는 동현이 침을 꼴깍 삼키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동현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일 정도였다.
“그, 네. 수업이….”
“수업 방금 끝났는데.”
“그러니까… 다음 수업….”
“응. 다음 수업.”
시우가 한 걸음 동현에게로 다가섰다. 동현이 다시금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지만, 스스로 복도 벽에 내몰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시우가 입을 뗐다.
“커뮤니티에 글 쓰느라 바쁜가 봐.”
히익, 비슷한 소리를 내며 동현이 어깨를 크게 떨었다. 시우는 동현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지만, 동현은 마치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핸드폰을 툭 떨구었다. 핸드폰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몇몇의 시선이 시우와 동현을 향해 쏟아졌다. 삽시간에 복도가 조용해진 것을 보니 비단 몇몇의 시선은 아닌 모양이었지만.
“동현아. 나 물어볼 거 있어.”
“무, 무슨.”
“그거 어디서 났어?”
동현이 입을 헤 벌렸다. 시우가 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눈치챈 듯한 표정이었다. 당혹스러움이 빠르게 동현의 얼굴을 물들였다. 담담한 목소리로 시우가 말을 이었다.
“그거 뭔지 알고 그랬어?”
“…무슨, 얘기하는지 전혀 모르….”
“담배형 페로몬제인지 알고 준 거야?”
시우의 손이 훌쩍 올라가자 동현이 으악,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시우는 동현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렸을 뿐이었다.
“왜 그랬어?”
“…….”
“큰일 날 뻔했거든, 어제.”
“…….”
“너 때문에.”
동현이 쥐새끼처럼 연신 제 위에 올라간 시우의 커다란 손과 웃는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를 내려다보며 시우는 다시금 고개를 갸웃했다. 냉소가 가슴 가득 차올랐다. 아니, 냉소라기엔 활활 타는 감정이었다. 이 감정을 가라앉힐 방법은 요원했다. 이 자리에서 동현의 목을 거칠게 쥔다 한들 가라앉을 리 없는 감정이었다. 시우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
모서리 부분의 액정에 실금이 가 있었다. 흙바닥을 구르던 산호의 낡은 핸드폰, 액정이 산산이 부서진 핸드폰이 그 위로 겹쳐 보이는 듯했다. 시우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동현에게 내밀었다.
“액정 깨진 것 같은데.”
“괘, 괜찮…아요.”
“응.”
시우는 동현의 어깨에 올린 손에 살짝 힘을 주곤 이내 손을 거두었다.
“계속 괜찮아야 될 텐데. 그치.”
시우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빠르게 굳어갔다.
***
빨간 불이 들어오자 차가 부드럽게 멈춰섰다. 시우는 거치대 위의 핸드폰을 툭 터치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두어 번의 연결음이 들리고 단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네, 이사님.
“…….”
달싹이려던 입술을 꾸욱 다문 채로 시우가 전방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찌푸려지지는 않았지만, 몹시도 차가운 눈빛이었다. 핸드폰 너머 정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죄송합니다.
시우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
아버지 진 회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침부터 식사 자리에 불러 진 회장이 시우에게 건넨 이야기는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 회장이 산호의 존재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어제 일은 김 교수님을 통해 들으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불법 유통되는 마약이다 보니 마음에 걸리신 모양입니다.
김 교수는 산호에게 페로몬 해독제와 진정제를 처방했던 시우의 주치의였다. 시우가 예상한 대답이었다. 김 교수를 부른 건 급박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시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 다른 부분은…
“아니에요, 괜찮아요.”
-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으냐는 물음의 주체는 시우 자신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진 회장을 향한 말이었다. 시우는 깨물린 입술을 끌어당겨 픽 웃었다.
“정 실장님.”
- 네, 이사님.
“조금 어려운 부탁일 수도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어요?”
- ……네, 말씀하십시오.
“결국에는 제가 가질 거예요. JR, 전부.”
- ……
“저 좀 도와주세요.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 ……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죠.”
정 실장이라면, 지금 시우가 하는 말의 저의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 부탁이 정 실장 입장에서는 퍽 난처한 것이겠지만, 결국 정 실장은 시우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 네, 알겠습니다.
시우의 입에서 자조 섞인 웃음이 튀어나왔다. 손 안의 카드를 쥐고 배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우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입을 뗐다.
“그 알선책 위치 파악해주세요.”
반짝, 초록불이 들어왔다. 액셀을 밟자 부우웅, 차가 출발했다.
***
드르륵,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양손에 봉투를 든 채 시우가 룸 안으로 들어섰다. 침실 안에서 다급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기울여 안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산호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선배.”
시우의 것이 분명한 크루넥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깨선이 아래로 축 내려와 있어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입은 것 같아 보였다. 문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시우가 짧게 웃자 산호가 아, 하며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조금 뻔한 핑계였다. 시우는 웃는 낯으로 커다란 봉투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응. 그래서 가져왔어. 네 옷.”
산호가 주춤거리면서 봉투를 받아들었다. 언젠가 프라이빗 쇼룸에서 잔뜩 안겨주었던 옷이 아닌 새로운 옷들이었다. 캐주얼한 후드, 면 티셔츠, 조거팬츠. 그리고 단정한 슬랙스와 셔츠들까지. 산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시우는 대수롭지 않게 다른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건 저녁.”
시우가 테이블 위에 정갈한 팩을 내려놓는 것을 산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지런히 놓인 죽에서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시우는 산호가 조심스레 죽을 떠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가까지 숟가락을 들고 호호 부는 입술이 동그랗게 모아졌다. 마치 모이를 쪼는 아기새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웃는 것을 눈치챘는지 산호가 시우를 돌아보았다. 시우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태연히 손을 움직였다.
“맛있다.”
“…네.”
“왜, 별로야?”
시우의 눈썹이 살짝 쳐지자 산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엄청 맛있어요.”
다급한 대답에 시우가 큭 웃음을 터트렸다. 곱게 조각난 갈빗살을 산호의 숟가락 위에 올려주곤 눈짓했다.
“응. 많이 먹어.”
산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즐거운 기분이었다. 같이 밥을 먹고 있을 뿐인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신기했다. 하루 종일 가슴을 뒤덮었던 감정은 한낱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문득 제 손짓을 산호가 빤히 눈으로 좇고 있음을 깨닫곤 시우는 빙긋 웃어 보였다. 자신이 무엇을 먹는지 기억하려는 듯 미간까지 좁힌 채 바라보고 있는 산호가 조금 엉뚱해 보였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의미 없이 TV를 켰다. 산호가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자, 시우는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대학생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JR에 속한 시우의 지분이 일정량을 차지하는 만큼 처리해야 할 일이 없지 않은 탓이었다. 태블릿을 바라보는 동안 두 통의 전화가 연이어 왔다. 시우는 부르르 떨리는 액정을 흘끗 바라보고는 액정이 보이지 않도록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전화 오는데.”
산호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시우가 태블릿에서 눈을 들어 산호를 마주 보았다. 곧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안 받아도 괜찮아.”
정확히 말하면 산호 네 앞에서 받을 수 있는 전화가 아니라서, 라는 의미였지만. 산호는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제법 늦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우는 소파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태블릿을 올려두었다.
씻겠다는 말을 남기곤 시우는 잠자코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시우가 들어오기 전 산호가 먼저 샤워를 한 모양인지 욕실 안에 익숙한 어메니티 향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 사이로 그 사이로 습기 먹은 단내가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시우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별안간 심장이 쿵쿵 고동치는 기분이었다.
“…….”
다소 느릿한 손길로 샤워헤드 레버를 올렸다. 와르르 물이 쏟아지는 것을 그대로 맞으며 잠시 서 있었다. 뱃속에 묵직하게 가라앉은 것이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
혼자 있기 싫다는 산호의 말에 대뜸 충동적으로 함께 있어 주겠다고 대답해버린 자신이 이제 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단전에 고이기 시작한 흥분을 애써 외면하며 시우는 고개를 탈탈 흔들었다.
시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산호는 미동 없이 소파 위에 앉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시선은 스크린을 향해 있는데, 특별히 무언가를 감상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시우가 짙은 그레이 컬러 가운 스트랩을 묶으며 소파 앞으로 다가가자 산호가 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키가 높은 시우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올리며 산호가 입을 열었다.
“저기, 선배.”
무언가를 고심한 듯한 말투였다. 시우가 응? 하고 대답하자 산호가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도… 학교 안 가면 안 돼요?”
시우의 눈썹이 잠시 찌푸려졌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전 안 가잖아요, 학교.”
엉뚱한 대답이었다. 시우가 엉뚱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고는 산호의 옆 소파의 빈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어깨에 걸쳐진 타월에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똑똑 스미는 것이 느껴졌다.
“넌 아프니까 쉬는 거잖아.”
엄밀히 말하면 억지로 쉬게 하는 거지만. 산호의 입이 옴칠 다물렸다. 조금은 뾰로통해 보이는 표정이어서 시우는 눈을 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튼튼해서 쉬면 안 돼.”
“그래도….”
우물거리는 목소리였다. 아,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시우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혹시 여기 답답해?”
하루뿐이었지만, 온종일 실내에만 있었으니 답답할 수도 있을 터다.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산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 답답해요. 편해요.”
시우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나가도 괜찮아. 내가 널 가둔 것도 아닌데.”
가둬도 되는데… 산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잘 듣지 못한 듯 시우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산호는 또 한 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이번에는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정확히 들었다. 흐음, 목울대를 울리며 시우가 산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회사 갈까?”
“회사? 학교가 아니라요?”
음, 학교는… 시우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에도 어색한 변명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응. 회사.”
산호가 잠시 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갈색 눈동자가 따뜻하게 깜빡이는 것을 바라보던 산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회사 갈래요.”
“그래. 내일부터 회사 같이 가자. 인턴이니까 일주일에 두 번. 괜찮지?”
드디어 산호의 얼굴에 미소가 올랐다. ‘같이’ 가자는 말에 미소가 떠올랐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분명히 액정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놓았던 핸드폰이 다시금 위를 향해 놓여있는 것을 눈치챘지만, 시우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
분주할 것 없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시우는 왜인지 서둘러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시우와 산호가 함께 머무는 JR 호텔의 시크릿 룸 응접실 소파는 웬만한 침대보다 넓었다. 잠자리가 불편할 리 없건만, 공연히 몸이 찌뿌둥한 느낌이었다.
침실 안에 이어진 드레스 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호가 옷을 갈아입는 모양이었다. 시우는 슈트의 커프스 버튼을 채우며 침실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선배.”
산호가 조금은 멋쩍은 얼굴로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빳빳한 슬랙스와 하얀 셔츠 차림이었다.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까만 머리카락이 유달리 돋보였다. 시우가 기분 좋게 눈꼬리를 휘었다.
“아침은 회사에서 먹자.”
“어, 저는 아침 안 먹어도 되는데.”
“안돼. 나는 안 먹어도 너는 먹어야지.”
“…왜….”
“너 너무 말라서 안돼.”
시우가 짐짓 단호하게 대답하고는 산호의 셔츠 깃을 손끝으로 톡톡 쓰다듬었다. 매무새를 확인하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더니 빙긋 웃는다.
“갈까?”
크게 생각 없는 아침 메뉴에 대해 말을 건네며 문을 열었다. 새빨간 융단이 깔린 복도. 산호는 한쪽 끝에 초록 불이 들어온 비상구 계단과 반대편에 있는 커다란 엘리베이터를 흘끗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전자음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왔다. 산호의 하얀 운동화와 시우의 까만 구두가 박자를 맞추어 걸었다.
***
“와! 이사님!”
채광이 좋은 사무실 유리문을 밀어 열자, 조막만 한 얼굴의 여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윤주… 산호의 입술이 보이지 않게 달싹였다. 함께 회식을 했던 날, 시우는 산호에게 그녀의 이름을 말해주었었다. 시우에게는 기억에 남지도 않을 만큼 사소한 일일 테지만.
“안녕하세요.”
시우가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시우가 무척이나 반가운지 윤주가 냉큼 시우의 팔짱을 끼어왔다. 방글방글 웃으며 시우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산호를 바라보곤 다시 한번 웃었다.
“산호 씨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산호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표정이 무척 어색했는데, 그것이 조금 귀여워 보였다. 시우가 웃음대신 큼, 소리를 내며 윤주에게 잡힌 팔을 살며시 빼어냈다. 그리곤 산호와 사무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인턴십 전인 건 알지만… 그래도 잘 부탁드려요.”
주변에서 산발적으로 대답이 터져 나왔다. 남자 직원 하나가 다가와 산호에게 반갑게 말을 붙여왔다. 빈자리로 산호를 안내하며 두런두런 말을 건네는 모습이 퍽 살가웠다. 시우는 남직원과 산호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사님, 오늘도 안 나오시면 저 진짜 집 찾아갈 뻔했어요.”
윤주가 장난을 가득 섞어 뾰로통한 목소리를 냈다. 시우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친근하게 팔을 잡아 이끈다.
"주주총회 이후에 확인하실 서류가 조금 있어서요. 급한 건 아니지만….”
“네, 어제 확인했어요.”
“아, 정말? 그중에 조금 까다로운 게….”
윤주는 어린아이처럼 시우의 팔을 잡아끌며 안쪽 시우의 개인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반투명한 유리로 분리되어 있는 개인실 문이 닫히자, 산호가 유리 너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우와 윤주의 그림자가 아른아른 비쳤다. 잘은 모르지만 가까이 붙어있는 것 같았다.
“산호 씨는 여기 인트라넷부터… 산호 씨?”
산호가 앞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말을 걸어오던 남자 직원이 의아하다는 듯 산호를 불렀다. 아, 산호가 낮게 탄성을 뱉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남자 직원은 소탈하게 웃으며 산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긴장 안 하셔도 괜찮아요. 일단은 인트라넷 접속하셔서 살펴보고 계세요. 어차피 처음엔 정신없을 테니까, 대충 어떤 업무가 주를 이루는지 파악만 해도 좋아요.”
“네, 감사합니다.”
산호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반투명한 유리벽. 그리고 그 안에 어른거리는 두 사람의 그림자. 산호는 피가 배일 정도로 입술을 거칠게 짓씹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는 예상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시우는 어쩐 일인지 좀처럼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태블릿 액정에 빼곡히 떠오른 글자들이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우는 미간을 살짝 좁히곤 손끝으로 책상 위를 톡 톡 두드렸다. 반투명한 유리로 사무실과 분리되어있는 자신의 개인실에 불만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독립적인 사무공간이라면 누구나 좋아하게 마련이니까. 시우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유리벽 너머를 흘끗 바라보았다. 벌써 수차례 유리벽 너머를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였다.
잘하고 있는지 궁금한데.
어색하게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을 그 애의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시우는 그 애가 곧잘 해낼 거라고 확신했다. 공부도 잘하고 눈치도 빠르니까. 물론 직원들과도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을 터다. 시우가 속한 기획 2팀은 무척이나 분위기가 좋은 편이었다. 팀원들도 대체로 살가운 성격에다가 모난 구석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 애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면 기꺼이 반길 수밖에 없을 테지.
“……음.”
시우는 미간을 좁힌 채로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차라도 마셔야겠다는 뻔한 핑계를 떠올렸다. 사무실의 풍경이 자신의 생각과는 사뭇 다를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였다.
산호는 사무실 안쪽에 위치한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커다란 유리벽에 바짝 붙은 테이블은 성인 남자의 허리보다 조금 더 높이 올라오는 입식 테이블이었는데, 그 위에는 커다란 커피머신과 식기류가 줄지어 있었다. 직원들이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은은한 파스텔 컬러의 머그잔이 한 톨의 먼지도 없이 줄지어 쌓여 있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산호는 물끄러미 커피머신을 바라보았다.
“…….”
머그컵 하나를 쥐고 커피머신 추출구 아래 가만히 올려두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려던 손끝이 잠시 멈칫했다. 감정이 모두 빠져나간 듯한 텅 빈 눈동자에 의미 없이 반짝이는 기계의 불빛이 어룽졌다.
“산호 씨?”
역시나 반투명한 유리로 분리된 파티션을 지나 윤주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머신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산호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던 윤주가 이내 까르르 웃었다.
“커피 드시려고요?”
“…….”
“어떻게 쓰는지 모르셨구나.”
산호의 옆으로 다가온 윤주는 전원 버튼을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건 전원 버튼. 지금은 불 들어와 있으니까 켜져 있는 거고요.”
“…….”
“이 작은 머그컵 그려진 버튼은 추출 버튼이에요. 컵 1개는 원샷, 컵 2개는 투샷.”
“…….”
“진하게 드실 거예요?”
윤주가 종알종알 말을 늘어놓는 동안에도 머신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산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면 투샷으로 내릴게요. 이렇게 누르면.”
위이잉, 소리와 함께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곱게 크레마가 올라온 커피가 머그잔 안으로 쪼로로 떨어졌다.
“아이스로 드실 거면 여기 아래쪽에 제빙기 있어요. 따뜻하게 드실 거면 정수기에서….”
“따뜻한 걸로 마실게요.”
윤주는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온수를 머그잔 안에 채웠다. 옅어지는 커피 크레마를 바라보던 산호가 고개를 슬쩍 돌려 윤주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산호의 텅 빈 눈동자에 담긴 것은, 이제 윤주의 밝은 얼굴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산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윤주가 눈썹을 올리며 입꼬리를 둥글게 말았다. 마치 왜요? 하고 묻는 것처럼.
“…윤주 씨.”
“어, 제 이름 아시네요?”
악의 없이 순수한 미소가 윤주의 얼굴에 가득했다. 산호는 윤주가 내미는 머그잔을 천천히 받아들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랑 친해요?”
산호에게 머그잔을 넘겨주고 자유로워진 제 손끝으로 입술을 톡톡 치며 윤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짝 시선이 위쪽을 향한 것을 보니 산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곧 윤주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시우 말이구나.”
“…시우?”
“네.”
윤주가 개구지게 웃으면서 반투명의 유리 파티션 너머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사님 이름 막 부른다고 이르시면 안 돼요. 특히 부장님 앞에서는요. 저 혼나요.”
배시시 웃으며 윤주가 이어 말했다.
“우리 동갑이거든요. 시우랑 저요. 저는 일을 일찍 시작했….”
우리… 산호가 곱씹듯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말을 늘어놓던 윤주가 불현듯 멈칫했다. 저를 바라보는 산호의 얼굴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낀 탓이었다.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은 무색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새하얀 피부와 까만 머리카락의 조화가 어딘가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산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선배 좋아해요?”
이번에도 윤주는 잠시 멈칫했다. 당황한 듯한 윤주의 얼굴에는 분명 어떤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산호는 윤주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의 빛깔을 확신했다. 곧 대수로움을 가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하죠. 저희 팀에 이사님 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아악!”
산호의 손에 들려있던 머그컵이 앞으로 홱 기울며 윤주의 블라우스 앞으로 커피가 와락 쏟아졌다. 머그컵 손잡이에 걸려있던 산호의 손가락이 부자연스럽게 기울었다. 곧 머그컵은 산호의 손을 떠나 바닥으로 떨어져 쩡그렁 소리를 냈다.
“아아악!”
얇은 블라우스를 모조리 적신 윤주는 황급히 몸을 앞으로 숙였지만, 이미 뜨거운 커피가 가슴을 한가득 적신 상태였다. 닦을 것을 찾아 황급히 자리를 뜨는 윤주의 뒷모습을 산호는 빤히 바라보았다. 파티션 너머 윤주가 울먹이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그리고, 어떤 발걸음.
듣고 싶은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뱉는 것이 들려왔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커피, 쏟, 아… 어떡해….”
산호가 파티션 너머 사무실을 바라보았을 때, 막 개인 집무실에서 나온 시우가 자신의 슈트 재킷을 벗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우는 자신의 재킷으로 윤주의 블라우스를 가려주고 있었다. 얇은 블라우스, 안 그래도 몸매를 강조하는 작은 블라우스가 액체에 젖어 속옷이 훤히 비쳐 보이는 까닭이었다. 정작 윤주는 그것보다 뜨거운 커피에 데인 고통이 더욱 급한 모양이었지만. 시우가 걱정스레 허리를 굽히고 윤주를 바라보았다.
“의무실 가요. 빨리. 화상 입었을지도 모르잖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윤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호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았다. 반투명한 파티션이 몸을 가려주었다.
“…….”
바닥에 흥건히 쏟아진 커피를 빤히 바라보았다. 산산조각 난 머그컵의 잔해가 커피로 인해 얼룩덜룩했다. 산호는 날을 세운 잔해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산호의 손끝이 날카로운 조각에 닿았다. 손 끝에 힘을 주어 꾸욱 눌렀다. 손끝의 살점을 가르며 날카로운 조각이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조그맣게 맺혔던 핏방울은 산호가 손끝에 힘을 줄수록 점점 몸집을 부풀려갔다. 짙은 갈색의 액체 위로 검붉은 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산호, 어디에 있어요?”
시우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산호는 날카로운 조각 끝에서 손을 떼어냈다. 놀랍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미 손끝은 깊게 베인 후였다.
“산호야.”
시우가 파티션 너머로 걸어왔다. 무릎을 굽혀 앉은 산호를 바라보곤 금세 산산조각 난 머그컵과 붉은 피가 섞여 들어간 커피 얼룩을 확인했다. 시우의 눈썹이 가파르게 찌푸려졌다. 시우가 황급히 몸을 숙여왔다.
“너 괜찮…!”
산호의 손을 성급하게 잡아 올렸다. 벌어진 상처 끝에서 피가 굵은 방울을 만들어내며 똑똑 떨어졌다. 시우가 테이블 위의 냅킨으로 재빠르게 산호의 상처를 감싸 쥐었다. 산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는 품새가 성급했다. 뻣뻣하게 서 있는 직원들을 둘러보며 시우가 말했다.
“저희 의무실 다녀올게요.”
“어머. 산호 씨도 다쳤어요? 머그컵 깨면서 그랬구나.”
직원들이 걱정스러운 듯 산호와 시우를 바라 보았다. 시우는 산호의 어깨를 당겨 안고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의무실은 건물 2층에 위치했다. JR 직원들을 위해 구비된 유치원과 미용실, 헬스장 등을 지나쳐 웬만한 병원보다 커다란 의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데스크에 앉아있던 직원이 시우와 산호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이사님. 오늘 2팀 무슨 일….”
“손 다쳐서요. 선생님 어디 계세요?”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굳게 닫힌 진료실을 향해 직원의 시선이 움직이자, 시우의 눈썹이 더욱 잘게 좁혀졌다. 한숨을 쉬듯 훅, 숨을 뱉은 시우가 직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독약이랑 붕대 준비해 주실 수 있을까요? 피가 너무 많이 나는데.”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눈에는 산호의 상처가 아주 응급한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입술을 깨물며 초조해하는 시우와는 달리. 그러나 그는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네. 그럼 이쪽에서….”
얇은 침대 베드가 나란히 줄지은 장소였다. 병원 응급실을 작게 축소해 놓은 듯한 곳이었다. 시우가 산호를 베드에 앉히곤 바퀴가 달린 동그란 의자를 끌어와 산호의 앞에 앉았다. 산호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선배.”
시우는 대답도 없이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직원이 가져다준 스테인리스 트레이를 무릎 위에 올리고 그 위의 빨간 아이오딘을 솜뭉치 위에 떨어트렸다. 둥그렇게 뭉쳐진 솜뭉치를 핀셋으로 쥐곤 산호의 손끝에 그것을 올렸다. 빨간 소독약이 상처 사이로 촘촘히 스며들었다. 무척이나 따가울 텐데도 산호는 무감한 얼굴이었다. 산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선배.”
“…응.”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산호는 시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약… 저한테만 발라주는 거예요?”
시우가 손을 멈추고 산호를 마주보았다. 엉뚱한 질문이었다. 울컥 치밀었던 화가 다소 누그러드는 것을 느끼며 시우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이런 거… 약 발라주고 이러는 거요. 저한테만 하는 거예요?”
다친 손보다 시우의 대답이 더 중요하다는 듯 저를 애타게 바라보는 산호의 표정에 시우가 마침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조심스레 소독약을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을 때에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다치지 마.”
“대답 왜 안 해줘요?”
“…….”
“저한테만 하는 거 맞냐구요.”
시우가 다시 픽 웃었다.
“네가 자꾸 다쳐오니까 대답하기 싫어.”
“…….”
“산호야. 다치지 마. 응?”
“…….”
“회사 데려온 거 후회되잖아.”
시우를 바라보던 산호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시우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저도… 후회돼요. 그냥 둘만 있어야 했는데.”
시우는 산호에게 붕대까지 꼼꼼히 감아준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텔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해주었지만, 산호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선배랑 같이 퇴근하고 싶어요.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었다. 시우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산호의 상처는 조금 이상했다. 무척 깊게 베인 것은 분명한데 면적이 넓지 않았다. 조각난 유리로 일부러 살을 후벼 판 것처럼 좁고 깊은 상처였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시우는 이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건 다행히도 그 애가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니까. 집중이 되지 않아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짚고 있을 때 개인 집무실의 유리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이사님.”
파리한 안색의 윤주가 머뭇대며 안으로 들어섰다. 시우가 아, 하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윤주는 품이 커다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현장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입는 짙은 네이비 컬러의 작업복이었다. 아마도 젖은 셔츠를 벗고 임시방편으로 빌려 입은 모양이었다. 윤주는 시우의 재킷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이거….”
“아. 상처는요. 괜찮아요?”
자신의 슈트 재킷을 받아들며 시우가 윤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이 울었던 모양인지 눈가가 잔뜩 짓물러있었다. 초롱초롱했던 커다란 눈도 어딘가 흐릿했다. 눈꺼풀 역시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윤주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화상 때문에….”
“네.”
“큰 병원 가보라고 하셔서요… 휴, 흉터 남을 수도 있다고.”
윤주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들었다. 흉터가 남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무척이나 속상했을 터였다. 시우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응. 바로 병원 가요. 괜찮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윤주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나 곧 주춤거리며 다시 시우를 향해 돌아섰다. 시우가 의아한 눈으로 윤주를 바라보자, 윤주는 더욱 머뭇거리는 모양새로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저, 이사님….”
“응.”
“산호… 씨랑 친해요?”
시우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눈가에 떠올랐던 의아함은 미약한 불쾌감으로 얼룩졌다. 시우의 눈가가 비틀리는 것을 본 모양인지, 윤주가 눈에 뜨일 정도로 흠칫 몸을 떨었다.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천진했던 눈동자가 불안함으로 흔들렸다.
“아, 아니에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서둘러 개인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윤주의 뒷모습을 시우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조금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윤주는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걱정스러운 직원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어색하게 웃어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텅 비어있는 산호의 자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윤주는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안도감이 섞인 숨이었다.
다급히 물건을 챙긴 윤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원에 가야 해서 먼저 들어가 보려구요. 직원들은 윤주의 말에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주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엘리베이터 앞에 선 후에야 윤주는 긴장된 어깨를 이완시킬 수 있었다. 쓰라린 살갗의 고통이 조금 가라앉자, 더 큰 감정이 윤주를 뒤엎었다. 그건 공포였다. 물론, 확신할 순 없었다. 하지만 윤주는 자신이 분명히 보았다고 생각했다. 새까맣고 텅 빈 눈동자 안에 떠오른 어떤 빛에 대해서. 하얀 얼굴과 뚜렷이 대비되는 까만 눈동자. 다시 발끝부터 소름이 끼쳐왔다.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때 등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주의 가녀린 어깨가 파득 튀었다. 몸을 돌려세우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뒷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간신히 뻣뻣하게 몸을 돌려세운 윤주는, 제 앞에 멀끔히 선 새까만 눈동자를 다시금 마주했다.
“아… 산호 씨….”
“괜찮은 거예요?”
“…네, 그….”
윤주가 머뭇댔다. 산호는 여상한 표정으로 윤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단조로운 산호의 목소리가 사과를 전했다. 윤주는 뻣뻣하게 웃으며 고개를 억지로 끄덕여보았다. 대답을 뱉는 입술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 니에요. 괜찮….”
“…….”
“산호 씨가 일부러 그런 것, 도 아, 닌….”
말을 잇지 못하고 윤주는 입을 다물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싶었다. 산호 씨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아니었다. 확실히 그건 의도적이었다. 부자연스럽게 기울던 머그컵의 움직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 더욱 부자연스럽게 뻗었던 손가락의 각도까지. 기다란 손끝에 걸려있던 머그컵이 작위적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정말 보았을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데.
윤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크게 방망이질 쳤다.
뻣뻣한 윤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윤주는 산호가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닌가. 시우와 함께 있을 때 웃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회식 때에도 어쩌면… 시우가 산호의 술잔을 모두 빼앗아 먹을 때, 이 애도 웃지 않았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의 미소는 지금의 미소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산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아주 옅은 것이었지만, 무척이나 싸늘했다. 산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부러, 음. 일부러 그랬어도 어쩔 수 없잖아요.”
작은 목소리가 또박또박 울려 퍼졌다. 윤주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흉터 안 남으셔야 할 텐데.”
“…아. 네.”
산호의 입술이 무어라 달싹였다. 이내 산호가 가볍게 웃었다.
“진심이에요. 정말로.”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리는 전자음 소리가 울렸다. 윤주는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며 몹시 안도한 표정으로 산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희미하게 웃고 있던 산호의 입매가 다시 뻣뻣하게 굳어갔다.
흉터 안 남았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남으면… 그걸 볼 때마다 네가 선배를 떠올릴 테니까.
윤주가 건넨 슈트 재킷을 걸치려던 시우는 문득 눈썹을 찌푸렸다. 강하지는 않지만, 윤주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밴 탓이었다. 시우는 재킷을 성의 없이 의자에 걸고는 반투명한 유리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윤주가 사무실을 빠져나간 후 얼마지 나지 않아 사무실 안으로 하얀 그림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아른거리는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시우는 그것이 산호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얀 얼굴, 하얀 셔츠, 그리고 새까만 머리카락. 뻣뻣했던 시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부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무척 익숙한 이름이었다. 시우는 사무적으로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정 실장님.”
- 이사님, 통화 괜찮으십니까?
시우가 눈을 올려 유리 너머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통화가 괜찮은지 묻는 것은 주변을 물려달라는 의미였다. 산호가 자리에 앉은 후로, 사무실은 미동 없이 고요한 듯 보였다. 시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 오메가 알선책 위치 확인했습니다.
“아.”
- P 클럽입니다.
시우의 눈썹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P 클럽은 오메가 클럽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곳이었다. 선별된 이들을 위한 고급스러운 클럽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알맹이는 싸구려 사창가보다 더욱 악독하고 교활했다. 시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 불쾌하시면 따로 자리를 만들어도…
“아뇨.”
시우가 찌푸려진 자신의 미간을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8시 이전에 자리 뜨면 다시 연락주세요.”
통화가 끊기자 시우는 손목시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곧 퇴근 시간이었다. 오늘은 산호와 함께 저녁을 먹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닫자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산호에게 살갑게 자리를 안내했던 남자 직원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시우가 고개를 숙이며 마주 인사하곤 산호를 돌아보았다. 산호는 자리에 앉아 시우를 빤히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시우가 빙그레 웃으며 산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네.”
“네가 고집부린 대로 같이 퇴근 해야지.”
산호가 시선을 내리며 머뭇댔다. 붕대가 감긴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는 산호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올라 있었다. 시우는 모르는 체하며 태연하게 산호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빨리.”
시우의 재촉에 산호가 서둘러 가방 안으로 소지품을 밀어 넣었다. 손바닥만 한 수첩, 핸드폰. 그리고 작은 약통. 단출한 짐이 가방 안에 담기자 산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두르는 산호의 모습을 보곤 시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
두 사람의 어깨가 나란히 섰다. 아침처럼 하얀 운동화와 까만 구두가 박자를 맞추어 걸었다.
검은색 세단이 JR 호텔 앞으로 매끄럽게 움직였다. 호화로운 정문 앞에 차를 멈추어 세운 시우는 천천히 산호의 벨트를 풀어주었다. 달칵, 조수석 문을 열려던 산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시우를 바라보았다.
“선배?”
“…산호야.”
난처한 웃음이 시우의 얼굴 위에 떠올랐다. 산호가 원하는 대로 같이 퇴근하기 위해 구태여 호텔까지 함께 왔다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했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뗀 산호가 시우를 마주 보았다. 입이 앙다물어졌다.
“나 오늘 가야 할 곳이 있어서.”
“…….”
“먼저 올라가 있을래?”
“…….”
“저녁은 준비해달라고 말해놓을게.”
입을 앙다물고 있던 산호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어디 가는데요?”
시우의 눈꼬리가 조금 더 휘어졌다.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난처한 기색은 더욱 만연했다.
“음, 일이 있어서.”
“그게 뭔데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한 산호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그 얼굴이 또다시 엉뚱해 보였다. 시우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 궁금해?”
“네.”
“뭐가 그렇게-.”
“선배에 대한 건 다 궁금해요.”
내 거잖아. 산호의 입술이 가만히 다물리는 것을 바라보며 시우가 천천히 대답했다. 몹시 다정한 목소리였다.
“음, 그럼… 지금은 말고, 다음에 꼭 알려줄게.”
“정말…이죠?”
“응. 정말.”
산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칵,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섰다. 지이잉,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자 시우가 허리를 숙여 산호를 올려다보았다. 둥글게 휜 눈꼬리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산호는 말없이 어깨에 맨 가방끈을 꾹 쥐며 다정한 눈을 마주 보았다. 곧 부드러운 배기음 소리와 함께 검은색 세단이 출발했다. 넓은 호텔 앞 도로를 빠져나가는 차의 뒷모습을 보며 산호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
커다란 스피커에서 음파의 진동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음악 소리가 쏟아졌다. P 클럽 지하에 위치한 홀이였다. 고급스러운 룸이 늘어진 상층과는 달리 지하의 라운지는 제법 캐주얼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불쾌하기는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방에 자욱하게 깔린 페로몬의 잔재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애써 불쾌한 표정을 지운 채 시우는 라운지를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었다.
“어, 저거 진시우 아니야?”
“그 새끼가 여기를 왜 와?”
P 클럽은 악명 높은 재벌가의 자제들이 수시로 방문하는 곳이었다. 개 중 시우를 알아본 몇몇이 노골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시우가 이런 곳을 무척이나 혐오하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는 무척 흥미로운 일일 터였다. 숨기려는 기색 없이 시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것은 예사였고, 어깨를 쥐려는 듯 다가오는 이들도 있었다. 시우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라운지 끝에 위치한 바를 향해 걷는 내내 난잡한 페로몬 못지않게 불쾌한 시선이 끈덕지게 시우에게 달라붙었다. 저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 시우는 바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정확히는 낄낄 웃고 있는 덩치 큰 남자의 앞에.
“…….”
덩치 큰 남자가 제 앞에 선 시우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이건 또 뭐-.”
우뚝 선 시우를 향하는 남자의 시선이 불쑥 위로 올랐다. 시우의 눈높이가 한 뼘은 더 높은 탓이었다. 상대를 확인한 남자의 표정이 빠르게 변화했다. 처음엔 놀라움, 그리고 당황함. 다시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흥분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남자의 입이 삐뚜름하게 벌어졌다.
“어라, 이 새끼 백산호 구해주는 그 선배님이잖아. 학교 선배님.”
“…….”
“내가 찾아가고 싶어도 못 찾아가서 속상했는데. 제 발로 찾아와 주니까 고마운데?”
빈들거리는 목소리가 한없이 가벼웠다. 시우는 표정을 지운 얼굴로 남자를 무감히 바라보았다. 남자가 익살스레 시우의 팔을 팔꿈치로 치는 흉내를 냈다. 폼새만 보면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서슴없는 행동이었다. 시우가 불쾌한 듯 눈썹을 깊이 찌푸렸다. 남자가 삐뚤게 벌어진 입가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야, 여기 역하지 않냐? 오메가들 발정나서 흘리는 냄새 때문에.”
“…….”
“나갈래? 담배나 한 대 피게.”
“…….”
“뭔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너도 할 얘기 있어서 왔을 거 아냐.”
남자는 낄낄거리며 바 뒤편을 가리켰다. 스태프가 사용하는 듯한 비상구 문이 빠끔 열려있었다.
비상구 문과 이어진 곳은 클럽 뒤편의 구석진 골목이었다. 화려한 곳의 이면이 늘 그러하듯 이곳 역시 더럽고 협소했다. 검은 쓰레기봉투가 켜켜이 쌓여있고, 담배꽁초가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굴곡진 아스팔트 위, 깨어진 술병과 쏟아진 액체들이 번쩍였다. 네온사인 아래 화려하게 빛나는 것이 몹시도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우리 선배님도 담배 하시나?”
남자가 주머니 속에서 민둥한 담뱃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상표가 새겨져 있지 않은 허연 담뱃갑 안에 빼곡히 들어찬 얇은 담배 한 개비를 집어 올린다. 시우에게 그것을 선뜻 내밀며 남자가 비죽 웃었다.
“…….”
시우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우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페로몬제. 다시 시우가 눈을 올렸을 때, 따뜻한 밤색 눈동자에 네온사인이 비친 것처럼 붉은빛이 올랐다. 남자도 그것을 본 모양이었다. 어쩌면 시우가 입술로 그려낸 말을 읽었는지도 몰랐다. 남자는 느물느물 웃으며 손을 뒤로 물렸다.
“아, 이거 안 속네. 백산호는 진짜 담배인 줄 알고 껌뻑 속았다던데.”
“…역시 너구나.”
마침내 시우가 입을 열었다. 천박하게 입을 헤 벌리고 웃던 남자의 표정이 별안간 뒤틀리기 시작했다.
“크, 으흑.”
묵직한 페로몬이 공기 중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온기를 머금은 흙냄새가 몸집을 부풀렸다. 거대한 산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급격히 쏟아진 페로몬은 남자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남자가 우욱, 헛구역질을 하며 몸을 홱 숙였다. 큽, 커헉. 밭은기침을 쏟으며 남자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야, 야. 크윽. 진정해. 수, 숨막혀.”
남자가 허우적거리듯 팔을 다급히 휘저었다.
“커헉. 얘기하러 왔으면 숨통은, 틔워 놔야 할 거 아냐.”
시우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사이 서서히 페로몬이 갈무리되었다.
“양주철 실장.”
정 실장에게 건네받은 오메가 알선책의 정보에서 확인한 이름이었다. 연신 눈물을 흘리며 기침을 뱉던 남자가 시우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크윽. 내, 이름 알아?”
페로몬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자, 남자, 주철은 드디어 숨통이 트이는지 가쁘게 헐떡였다. 여전히 고통스러운 듯 허리를 굽힌 채였지만, 빈정거리는 듯한 표정이 얼굴 위에 슬그머니 떠올랐다.
“이름 알고 있는 거 불쾌해. 그래서 빨리 잊어버리고 싶거든.”
여상한 목소리로 시우가 말했다. 자신의 이름을 시우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주철의 얼굴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제 내 눈에 띄지 마. 들리지도 말고.”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산호 앞에. 다물린 입술 사이로 마지막 말이 삼켜졌다. 주철은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곧추세우며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걱정하지 마. 네 앞에는 안 나타나. 아니, 못가지.”
“…….”
“야, 지금도 무서워 죽겠어. JR 황태자시라면서. 거기다 우성알파.”
“…….”
“근데 너 말고 백산호 앞에는 얼쩡거릴 수 있단 말이지.”
시우의 눈가가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주철은 확신을 가진 게 분명했다. 천박한 목소리가 톤을 높여 울렸다.
“너한텐 접근하기 어려워도 백산호는 쉽잖아. 상식적으로. 어?”
“왜.”
“왜긴 왜야. 원래 빌런은 히어로 애인만 족치는 거 몰라?”
“그러니까 왜.”
왜 그게 산호여야 하는 건데. 주철이 씨익 웃었다.
“이거 완전히 골때리는 새끼네. 아니면 존나게 순진한 거야? 백산호 냄새 덕지덕지 달고 있으면서. 백산호 이름 나왔을 때부터 너 눈 돌아간 거 모르지.”
아랫입술을 축축이 핥으며 주철이 말을 이었다.
“원래는 백산호 적당히 굴리다가 이런 클럽에 팔아먹고 몸값이나 챙길 생각이었는데… 네가 갑자기 나타났잖아. 야, 난 할렐루야 종소리 울리는 줄 알았다? 너 같이 돈 차고 넘쳐서 벗겨 먹기 딱 좋은 놈을 어디서 건지겠냐 내가. 거기다 눈에 훤히 보이는 약점까지 달고 있는데.”
“…….”
“백산호는 그냥 도구야. 이제 중요한 건 너지. 걔 건드리면 지금처럼 네가 발작하는 거, 그게 중요하다고. 가진 거 없는 오메가 건드려서 뭐 해. 씹질밖에 더 해?”
시우를 바라보는 주철의 눈에 저열한 기대감이 반짝였다.
“그래도 걔한테 좀 고맙긴 해. 너한테 직접 손은 안 대면서 꼭지 돌게 만들 수 있게 해준 거잖아, 백산호가. 얼마나 좋아?”
작위적으로 큭큭 웃으면서 주철이 눈을 흘끔 올려 떴다. 하지만 무표정한 시우의 얼굴을 마주하자 얼핏 불안함을 느꼈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그러게 부족할 거 없는 도련님이 왜 오메가 같은 거에 홀렸어. 뭐, 백산호 그 새끼가 사람 홀리는 재주는 있긴 하지만.”
잠자코 주철의 말을 들어주던 시우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주철은 더욱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주춤대며 몸을 뒤로 물린 주철은 마침내 더러운 벽에 등을 쿵 찧었다. 주철이 지레 겁먹고 물러선 만큼 시우가 주철에게로 다가갔다. 갈무리했던 시우의 페로몬이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다. 아까만큼 위협적이지는 않아서, 이것이 의도적인 행동일지, 아니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일지 알 수 없었다.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무, 슨 착….”
시우가 주철의 두툼한 어깨에 큰 손을 올렸다. 묵직하게 올라간 손에 천천히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약점을 한참 잘못 짚은 것 같아서.”
“…….”
“왜 오메가 같은 게 나한테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해?”
힘이 들어간 손은 점점 더 주철의 어깨를 옥죄어왔다. 빗장뼈가 맞물린 어깨에서 우득, 소리가 들려왔다.
“오메가 하나 안는 건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데.”
시우가 미간을 살며시 좁히며 웃었다. 주철의 낯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잡힌 어깨가 무척이나 아픈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끕,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주철은 덤벼보지도 않고 물러날 성격이 아니었다. 입술을 세게 깨물면서 소리치듯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긴, 씨, 씨팔… 그럼 여기까지 찾아온 건 무슨…!”
희미하게 미소를 띠우고 있던 시우가 눈을 잠시 동그랗게 뜨더니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더럽고 협소한 뒷골목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천진한 웃음이었다.
“아, 이건 그냥… 거슬려서. 네가.”
“웃기지 마- 아아악!!!”
우드득 소리가 또렷이 공기를 갈랐다. 시우에게 잡힌 한쪽 어깨가 푹 꺼진 채로 주철은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악력만으로 빗장뼈가 부러질 수도 있던가? 하지만 어깨에 느껴지는 고통은 확실히 예사 것은 아니었다. 주철이 눈을 희번덕 뒤집고 비명을 내지르는 것을 시우는 태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팔다리 다 끊어 놓는 것도 어려운 건 아닌데… 그것보다 넌 혀를 뽑는 게 더 낫겠다. 네 말처럼 난 웬만한 건 다 마음대로 할 수 있거든.”
“뭐, 뭐?”
“응, 지금은 아니고 다음에.”
네가 또 내 앞에… 아니, 산호 앞에 나타나면. 천천히 미소가 가라앉자, 시우의 입매가 뻣뻣하게 한일자를 그렸다. 주철의 비열한 협박이, 시우의 마음속 가장 연한 속살에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을 내보여서는 안 됐다. 푹 꺼진 어깨를 쥐고 몸부림치는 주철을 얼마간 내려다보던 시우는 여상히 몸을 돌려세웠다.
***
예상보다 더 늦어진 시간이었다. 시우가 호텔 문을 밀어 열었을 때, 처음엔 TV를 틀어 놓았나 싶었다. 어떤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다가 시우가 안으로 들어서자 뚝 멈추었다.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시우는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앉아있던 산호가 살짝 홍조를 띤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선배.”
밤늦도록 시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우가 희미하게 웃으며 산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안 자고 뭐 해.”
시우의 물음에도 산호는 시우를 말끄러미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어, 아직 잘 시간은 아닌가. 저녁은….”
시우는 테이블 위에 올라있는 트레이와 그 위에 덮어진 돔 커버를 바라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저녁은 왜 안 먹었어.”
시우가 나무라듯 산호를 바라보았다.
“너 몸도 아직 안 좋고, 오늘은 다치기까지 했는데-.”
“선배한테 또 다른 오메가 냄새나요.”
대뜸 산호가 던진 말에 짐짓 화를 내려던 시우의 목소리가 일순 멈추었다. 순식간에 입장이 뒤바뀐 셈이었다. 페로몬… 아, 정말 잠깐이었는데. P 클럽 안에 머문 시간은 정말로 짧았다. 그러나 페로몬이 자욱이 깔린 곳이기 때문이었을까, 우성 오메가인 산호는 예민하게 이를 알아챘다. 시우는 어색하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아… 지금 내 기분 엉망인 게 이 페로몬 때문이었나 봐.”
“뭐가요?”
“어쩔 수 없이 뒤집어쓴 거라서.”
투정 부리듯 투덜대는 시우를 바라보며 산호가 샐쭉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시우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네 옆에 붙어있어야겠다.”
“네…?”
“음, 소독 같은 거.”
제 농담이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시우가 아이처럼 킥킥 웃었다. 산호는 살짝 기울인 얼굴로 해맑게 웃는 시우를 조금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선배.”
“응?”
“선배는 왜 나 안 안아요?”
웃음이 피었던 시우의 입꼬리가 천천히 곧아졌다. ‘안는다’는 말을 섹스로 해석한 스스로에게 당황한 탓이었다. 순간적인 반응이었다고는 해도… 원색적인 욕망 같은 것이 의도와 달리 불쑥 솟아올랐다. 산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파들은… 오메가 하나 안는 거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자조 섞인 중얼거림. 그리고 그건 몇 시간 전, 시우가 내뱉은 말과 놀랄 만큼 닮은 말이었다. 더럽고 협소한 클럽 뒤 골목을 잠시 떠올렸지만, 시우는 의도적으로 기억을 떨쳐냈다. 대신, 짓궂은 얼굴로 씨익 웃어 보였다.
“응, 어려운 거 아니지. 그래서 말인데, 산호야.”
“…네?”
“나 지금 너 안을래.”
대뜸 왜 자신을 안지 않느냐고 물었던 산호의 귓바퀴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간극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시우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눈꼬리가 활짝 휘었다. 장난기가 가득 묻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산호 너, 귀 빨개졌어. 무슨 생각 했어?”
“아, 아니… 전….”
“그런 거 말고. 우정의 포옹 같은 거.”
아. 산호가 민망한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시우는 여전히 기분 좋은 듯 킥킥 웃으며 양팔을 쭈욱 펼쳤다.
“난 너한테 손 대면 또 혼날 테니까… 네가 안겨야 돼.”
“…….”
“음, 안기는 거 싫으면 안아주면 되겠….”
시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 산호가 와락 시우의 품에 안겨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안겨 온 산호 덕에 시우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산호가 갑자기 안겨올 줄 예상하지 못한 듯, 시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한동안 놀란 얼굴로 눈꺼풀을 깜빡였지만, 시우는 곧 서서히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쭉 펼쳤던 양손을 가만히 모아 산호의 등을 마주안았다.
“진짜 소독하는 것 같다.”
“…소독이 뭐예요. 이상해.”
“그럼 정화.”
“그게 더 이상해요.”
큭큭 웃으며 시우가 산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뒷머리를 끌어안고 싶은 듯 잠시 허공에 들려진 손은 머뭇거리다 이내 신호의 등 위로 다시 올랐다. 거의 힘을 주지 않은 채 닿을 듯 말 듯 얹혀진 손이었다. 시우와 달리 산호는 파고들듯 시우의 가슴에 뺨을 묻었다. 꾸욱 쥔 주먹이 시우의 재켓을 움켜쥐었다. 투정처럼 뺨을 부벼온다.
“…….”
시우는 무척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 이건 조금… 힘든데. ‘안는다’는 산호의 말에 불쑥 솟아오른 원색적인 욕망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드려 하는 까닭이었다. 입술을 조금 더 세게 물며 시우는 눈을 끔뻑였다.
“선배.”
하지만, 곤란한 만큼 이대로 이 애를 안은 채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했다.
“지금 선배 심장 엄청 빨리 뛰는데….”
“…아.”
“그리고 엄청 세게 뛰는데….”
시우가 조금은 성급하게 몸을 물리며 산호를 내려다보았다. 떨어지기 아쉬운 듯 산호는 시우의 어깨에 뺨을 기댔지만, 하릴없이 뒤로 물러났다. 시우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 당황한 시우의 얼굴이 담겼다. 시우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이제 다른 오메가 냄새 안 나?”
“……거의요.”
시우가 다행이라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한숨을 내쉬는 시늉을 했다. 곧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저녁 다시 부탁해놓을게.”
“괜찮아요. 저 생각 없-.”
“안돼. 간단한 걸로 부탁할 테니까 먹고 있어.”
산호의 눈썹머리 앞으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가볍게 훑으며 시우가 빙그레 웃었다.
“나 씻고 나왔을 때까지 다 먹어야 돼. 알았지?”
산호는 네에, 하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우물댔다. 제 말을 잘 듣는 산호가 기특한지 시우는 유쾌하게 웃었다.
커다란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이어졌다. 산호는 다시금 도착한 저녁 식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야채가 곱게 갈린 스튜에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솔솔 풍겼다. 얕은 숨을 내뱉은 산호는 곧 시선을 틀어 테이블에 올려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핸드폰 액정에 음성 메시지의 음파 곡선이 정지된 채 떠 있었다. 잠시 액정을 바라보던 산호는 음성 메시지를 보낸 계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
바이러스처럼 깔린 불법 메신저로 연락해온 계정은 산호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아무런 텍스트 없이 전송된 하나의 음성 메시지. 몰래 녹음이라도 된 듯 음질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지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산호는 화살표 모양의 버튼을 눌렀다. 5분가량의 음성 중 끝부분이었다. 벌써 몇 번째 듣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목소리가 또 한 번 핸드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 무, 슨 착…
- 약점을 한참 잘못 짚은 것 같아서.
- ……
- 왜 오메가 같은 게 나한테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해?
- ……
- 오메가 하나 안는 건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데.
악질적인 음성은 여기서 끝이었다.

আৱদ্ধ ফেৰ'মন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