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내려앉은 거리는 평온했다. 익숙한 아침 시간, 여유로운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았다. 거리 끄트머리에서 커다란 리트리버 한 마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오는 레트리버의 황금색 털은 잘 손질되어 있어 차르르한 윤기를 머금었다. 활짝 웃기라도 하는 듯 해맑은 표정이었다.
레트리버의 몸줄을 쥔 사람은 키가 크고 늘씬한 젊은 여자였다. 어깨 근처까지 살짝 어두운 블론드 머리카락이 내려와 있었다. 산책을 나온 듯 짧은 스트링 쇼츠와 어깨 한쪽이 드러날 만큼 루즈한 운동복 상의 차림이었다. 몹시 건강해 보이는 미인이었다.
컹컹. 레트리버가 인사하듯 짖었다. 파란 지붕의 작은 집 앞에서였다. 낮은 담장 너머 아기자기한 정원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원에는 하얀 테이블과 하얀 의자가 있었는데, 테이블 앞에는 두 명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컹컹 짖는 레트리버의 울음을 듣고 키가 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하얀 피부와 색이 옅은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였다.
“앨리?”
시우는 레트리버와 함께 산책하는 여자를 향해 눈꼬리를 둥글게 휘어 보였다. 여자 역시 시우를 발견한 모양인지 커다랗게 손을 흔들었다. 다정하게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던 시우의 시선이 잠시간 제 앞에 앉아있는 산호에게로 향했다. 산호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강아지의 울음소리도, 앨리라고 불린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살짝 시선을 내리 깐 채 마시던 커피잔을 탁, 아래로 내려놓았다.
시우는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다시금 시선을 올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산책하는 중이에요?”
“네. 버디가 나가자고 떼를 쓰는 바람에요.”
여자의 목소리는 쾌활했지만, 어딘가 수줍은 기색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산호의 고개가 살며시 움직였다. 어깨 너머로 상대를 확인하려는 듯, 작은 움직임에 불과했다. 산호의 기척을 눈치챈 시우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응, 그래요. 좋은 하루 보내요.”
조금 서두르는 기색으로 시우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산호의 시야각에 걸린 그녀는 또렷하지는 않지만, 살짝 입술을 깨무는 것 같았다. 건강한 구릿빛 피부에 살며시 홍조가 올랐다. 산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앞에 앉은 시우를 바라보았다.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쫓던 시우가 마침내 산호의 시선이 저에게 향한 것을 눈치채고는 산호를 마주 보았다. 슬쩍 찌푸려졌던 시우의 눈가가 다시 둥글게 휘어졌다.
“아. 회사 가기 싫다.”
산호가 멀끔히 시우를 바라보았다. 최근 시우는 여러 가지 일로 바쁜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JR 영국지사 설립이 코앞으로 다가온 터라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다. 어찌되 었든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의 재계에 적응하는 것도 꽤 시간이 걸릴 터였다.
산호가 아무 말 없이 저를 바라보고만 있자, 시우가 큭 웃음을 터트리며 산호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가지 말라고 해주면 안 돼?”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요?”
여상한 대답에 시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도 그렇네. 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아달라는 듯 양팔을 쭉 펼친다. 산호는 시우를 빤히 바라보더니 살며시 일어나 시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늘은 더 떨어져 있기 싫어서.”
오늘만? 나는 늘 그런데. 하지만 산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시우가 JR 영국 지사의 일로 바쁜 것처럼, 산호 역시 제법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영국에서의 생활이 예상보다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아, 한국에서 마치지 못한 공부를 이어가기로 마음먹은 까닭이었다. 해외로 대학을 편입하는 일은 어렵다기보다는 번거로운 일에 속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물론 시우가 조금 손을 써준다면 금세 처리될 일이었지만, 산호는 직접 제 손으로 편입 절차를 밟고 싶었다. 다양한 서류들이 필요했고, 각종 시험 성적도 필요했다. 평범한 학생 신분으로 공부에 매진하는 일상이 나쁘지 않았다.
산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근처의 작은 공립 도서관이었다. 한국의 도서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세월이 묻어있는 종이의 냄새도 좋았다. 산호는 본래도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잠시간 손에서 놓았던 공부를 하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때로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 가벼운 소설이나 논문을 읽는 일들까지도 모두 좋았다.
오늘도 그랬다.
시우가 이르게 집을 나선 이후로 산호는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어제까지 읽었던 에세이를 오늘은 도서관에 반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떼던 중이었다. 그런 산호의 걸음이 멈추어 선 건, 시내의 작은 꽃집 앞에서였다.
“…….”
번화한 대도시의 시내와 달리 작고 아기자기한 정취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이었다. 넓은 차양 아래 큼지막한 버킷이 놓여있고, 안에는 붉은 꽃잎의 생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키가 커다란 화분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앞에는 덩치 큰 레트리버 한 마리가 나른하게 엎드려 있었다. 무료하게 눈을 끔뻑이던 레트리버는 멀리서 걸어오는 산호를 발견하더니 금세 눈을 크게 떴다.
컹, 컹.
반가운 이를 발견한 것처럼 레트리버가 번쩍 몸을 일으켰다. 활짝 웃는 듯한 얼굴로 단숨에 산호의 앞으로 달려와 꼬리를 흔들기 시작한다. 만져달라는 듯 저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이 반짝였다. 산호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았다.
“안녕.”
한쪽 손에 안았던 책을 무릎 위에 올리곤 레트리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황금색 털이 몹시도 부드러웠다. 레트리버는 기분 좋게 고갯짓을 하며 푸룽, 푸르릉 우는 소리를 냈다.
“버디? 어디 갔니, 버디?”
그때 꽃집에서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뛰쳐나왔다. 문지기처럼 문 앞에서 버티고 있던 강아지가 사라져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산호의 쓰다듬을 받는 레트리버를 발견하곤 곧 안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자의 얼굴이 난데없이 달아올랐다.
“어… 죄송해요. 놀라셨어요?”
꽃을 다듬는 정원용 가위를 앞치마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여자가 다가왔다. 조금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산호에게 말을 건넨다. 무릎을 굽힌 채 앉아있던 산호가 고개를 올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뇨, 괜찮아요.”
“버디가 사람을 워낙 좋아해서요. 그래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들지는 않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가 싶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여자의 얼굴이 달아오른 건 당황함 때문이 아니라 수줍음 때문인 모양이었다. 산호는 말없이 책을 들고 무릎을 펴 일어섰다. 레트리버는 멀어지는 산호의 손길이 아쉬운 듯 다리에 뺨을 부벼왔다.
“어머, 버디가 너무 좋아하네요.”
“아.”
“그새 버디랑 친구 되셨나 보다.”
여자는 수줍어하면서도 연이어 말을 걸어왔다. 산호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아닌데.”
산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농담을 던진 여자에 비해 다소 건조한 대답이었다. 당황한 듯한 여자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도 않은 흉내를 내며 말을 이었다.
“아… 그, 사실 저 그쪽 누군지 알아요.”
그러더니 제법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시우 룸메이트 맞으시죠?”
산호 역시 처음부터 여자를 알아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귀여운 레트리버를 먼저 알아보았다. 근래 시우와 산호의 집 근처에서 산책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더랬다. 볼 때마다 레트리버의 주인이 시우와 반갑게 인사를 하던 모습도 정확히 기억했다. 이름이… 엘레나?
“룸메이트?”
“파란 지붕에 정원 있는… 그 집에 사시는 분 아니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산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시우랑은 인연이 조금 있어서요. 영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웠거든요.”
“…….”
“저희 예전에도 마주친 적 있는데, 혹시 기억하세요? 시우랑 같이….”
산호는 이렇다 할 표정이 떠오르지 않은 얼굴로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여자는 자신 혼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 죄송해요. 바쁘실 지도 모르는데 제가 말이 많았네요.”
“…….”
“다음에 또 뵈었으면 좋겠어요.”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이 다름없이 발그레했다. 산호 역시 여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레트리버 버디가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듯 낑낑거렸지만, 여자는 덩치 큰 강아지를 어르고 달래 길을 비켜주었다. 산호는 마지막으로 버디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걸음을 뗐다.
컹, 컹.
등 뒤에서 버디의 울음소리가 인사를 하듯 들려왔다. 안녕, 다음에 또 만나. 마치 그렇게 인사라도 하는 양 맑은 울음소리였다. 그래, 안녕. 그런데 어쩌지. 널 또 보고 싶지는 않은데.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네 주인을. 조금 더 정확히는 선배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사람을.
***
시우는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 돌아왔다. 산호 역시 귀가한지 얼마 되지 않은 터였다. 산호는 소파에 앉아 읽어 내려가던 책을 내리곤 빠꼼 열린 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우는 웃는 얼굴로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산호가 가만히 일어나 시우에게로 다가갔다. 시우의 손이 등 뒤로 숨겨져 있었다.
“안녕.”
시우가 허리를 가볍게 숙여 산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투정하듯 왼쪽 뺨을 들이민다. 산호는 조금 머뭇대다가 시우의 하얀 뺨에 입술을 슬쩍 가져다 댔다. 통통한 입술이 뺨에 쿡 찍히자 시우가 방긋 웃었다.
“이건, 선물.”
어설프게 등 뒤로 숨겨두었던 손이 불쑥 앞으로 내밀어졌다. 붉은 꽃잎의 꽃이 하얀 유선지와 붉은 공단 리본으로 단정하게 묶여있었다. 산호는 꽃과 시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예쁘지.”
말없이 꽃다발을 받아든다. 여전히 꽃과 시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였다. 곱게 휘어져 있던 시우의 눈가가 차츰 완만해졌다.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예상한 건 아닐 테지만, 덤덤하다 못해 밋밋한 반응을 보이는 산호가 의아한 탓이었다.
“응? 마음에 안 들어?”
붉은색 꽃잎을 손끝으로 조물대던 산호는 눈을 올려 시우를 마주 보았다. 산호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예뻐요.”
완만해지던 시우의 눈가가 다시 휘었다. 입꼬리도 부드럽게 끌어올려졌다. 산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쁜데… 안 예뻐요.”
에쁜데, 안 예뻐? 무슨 말이지? 시우가 어떤 대답이나 물음을 던지기도 전, 산호가 예고도 없이 대뜸 시우의 목덜미를 세게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꽃다발을 쥔 채 목덜미를 끌어안은 터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시우 역시 산호가 갑자기 안겨 오는 바람에 다소 놀란 듯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나 이내 다정하게 산호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산호가 먼저 시우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키스보다 가벼운, 하지만 버드키스 보다는 조금 무거운 입맞춤이었다. 혀끝으로 시우의 아랫입술을 꾹 누르듯 핥더니 이내 살끔히 멀어진다.
“선배. 꽃 사오지 마요.”
“응?”
불퉁한 목소리를 내는 산호를 마주 보며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웃음이 묻어있었지만, 의아하다는 듯 눈썹은 잘게 찌푸려져 있었다.
“꽃 싫어? 아닌데. 백산호는 꽃 안 싫어했는데, 원래.”
“응. 안 싫었는데, 음, 그랬는데… 이제 싫어질 것 같아요.”
갑자기 왜? 엉뚱하다는 듯 웃는 시우에게 산호가 다시 입술을 마주 댔다. 조금 더 깊게 키스한다. 짧게 혀가 엉키고 풀어지는 사이, 산호의 허리를 안은 시우의 손에 지긋이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백산호 화났다. 그치.”
“…….”
“왜 화났을까.”
“화 안 났어요.”
“아니야, 화났는데, 뭘.”
산호의 허리를 번쩍 들듯이 안은 시우가 현관을 벗어나 안으로 들어섰다. 답싹 달라붙은 두 개의 몸이 뒤뚱뒤뚱 거실 안으로 움직였다. 마침내 산호를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히자, 시우가 산호의 아래 무릎을 대고 앉았다.
“속상해. 기분 좋게 해주려고 사온 건데. 나 실패했어?”
시우가 산호의 무릎에 뺨을 기대고 눈을 올려 떴다. 산호가 시우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저 꽃이 싫어서요.”
레트리버가 엎드린 꽃집 앞, 커다란 버킷이 있었다. 붉은 꽃잎의 생화가 가득 담긴 버킷이었다.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우가 이내 큰 손을 뻗어 산호의 뺨을 감쌌다.
“응. 그럼 꽃 말고 다른 거 해줄게. 네가 싫어하는 건 안 해.”
산호는 소파 위에 꽃다발을 가만히 내려두었다. 제 뺨에 올라온 시우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듯 얹는다.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두 손의 약지에 끼워져 있었다.
그래, 싫은 건 아니었다. 시우가 해주는 건 무엇이든 좋다. 커다란 레트리버도, 생생하고 향기로운 붉은색 꽃다발도 싫은 건 아니었다. 싫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
영국의 하늘은 우중충했다. 때로는 무척이나 맑고 포근했다가,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우중충한 무채색을 띠는 것이다. 오늘은 날이 좋지 않아 외출을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산호는 커다란 창문 너머 자신들의 집 정원을 바라보았다. 혹시 비가 오려나. 장대 같은 비는 아니더라도 으슬으슬한 안개비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창고에 채워 넣은 식재료가 제법 떨어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시우와 산호는 때로 외식을 즐기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직접 요리를 해 먹곤 했다. 물론, 요리는 시우가 아닌 산호가 했다. 곰곰이 저녁에 대해 생각하던 산호는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단한 식사빵과 육류를 사오면 좋을 것 같다. 시우가 좋아하는 와인을 곁들인다면 더 좋을 테고.
“…….”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확인하니, 저녁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산호는 소파 위에 걸쳐두었던 시우의 커다란 카디건에 팔을 꿰어 넣었다. 부드러운 흙내음이 포근하게 몸을 감싸는 기분이었다.
자그마한 동네가 대체로 그렇듯, 머지않은 곳에 시내가 위치했다. 사실 시내라고 말하기에는 소소한 편이었다. 근방에서 가장 큰 마켓과 상점이 밀집한 곳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 우선 와인을 사고 베이커리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산호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평소 같았다면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을, 길 건너의 작은 꽃집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레트리버는 꽃집 앞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우중충한 날씨에 레트리버 버디 역시 조금 침울한 모양이었다. 느른하게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반듯이 세운 채 얌전히 앉아있다. 활짝 웃는 듯한 얼굴도 오늘은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하지만, 눈길을 끈 건, 침울해 보이는 버디가 아니었다. 꽃집의 상호명이 시트지로 발라진 커다란 유리창 너머 익숙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곧은 어깨를 가진, 저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낀 사람 말이다.
“선배?”
산호가 초점을 맞추려는 듯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꽃집 안에는 여러 화분들이 있었고, 푸르른 이파리들이 군데군데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시우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 역시 커다란 이파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우가 웃어주고 있을, 잘 보이지 않는 상대가 누구일는지 짐작이 갔다.
“…….”
시우가 상대의 말을 귀담아듣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빙그레 웃는다. 무언가를 꺼내오려는 듯, 커다란 플랜테리어에 가려져 있던 상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그 여자였다.
낑낑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있던 버디가 길 건너 산호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침울했던 버디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길을 건너 단박에 달려오려는 듯 버디가 몸을 일으켜 세우자, 산호는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좁은 길이었다. 그래도 위험한데. 산호는 저도 모르게 버디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버디가 건너오기 전, 자신이 먼저 길을 건너 그에게 다가갔다.
“너.”
크룽, 킁, 킁.
“함부로 길 건너고 그러면 위험해.”
버디가 허리를 숙인 산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킁킁댔다. 곧이어 컹! 하고 짖는다. 반가워! 우리 또 만났네! 혀를 내밀고 킁킁대는 버디의 얼굴이 해맑았다.
“응. 나도 반가워.”
산호가 버디의 귓가를 살며시 긁어주었다.
“그런데 안 반가워. 다시 보고 싶지 않았거든, 사실.”
산호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버디가 산호의 손바닥에 연신 촉촉한 코를 부비댔다. 딸랑, 차임벨 소리가 들려왔다. 산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산호?”
버디가 짖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는 거리를 내다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시우일 거라고 생각은 못 했지만. 한 손에 작은 화분을 안은 채 유리문을 열어 연 시우가 조금은 놀란 눈으로 산호를 바라보았다.
“어머!”
이어 블론드의 여자도 꽃집 밖으로 몸을 불쑥 내밀었다. 시우의 어깨 너머로 놀란 시선을 보내온다. 그녀 역시 산호를 또 마주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산호가 천천히 허리를 세워 일어서자, 버디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산호의 다리에 뺨을 부벼왔다.
“어디 가던 길이었어? 안 그래도 연락….”
“선배.”
산호가 대뜸 시우의 빈 손목을 쥐었다. 저를 바라보는 시우의 눈빛은 일견 놀란 듯 보였지만, 산호는 그것이 놀라움이 아닌 당혹스러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 난처한 눈빛이. 난처해? 왜. 왜 난처한데.
“왜 벌써 왔어요? 오늘 저녁 시간에 겨우 맞춰서 올 거라고 했잖아.”
“아.”
시우가 콧잔등을 잘게 찌푸리며 변명하듯 웃었다.
“약속 하나가 취소돼서. 그것 때문에 내일-.”
“그럼 왜 말을 안 해줬는데.”
목소리에 날이 섰다. 말허리가 잘린 시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산호를 멀끔히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하지만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이어졌다. 별안간 버디가 컹컹 짖었다. 다행이랄까, 시우가 시선을 물려 뒤를 바라보자, 시우의 등 뒤에 서 있던 여자가 서둘러 앞으로 걸어 나왔다. 버디를 달래며 시우와 산호를 조심스레 번갈아본다.
“앨리, 이만 가볼게요.”
여자는 아… 짧게 읊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는 살짝 고개를 마주 끄덕이고는 산호의 어깨를 감쌌다. 입을 열어 무언가 말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사려고 했던 와인도, 식사빵도, 육류도 사지 못했다. 거뭇한 하늘 아래 이어지는 작은 길을 나란히 걸었다. 시우는 어깨를 감쌌던 손을 내려 산호의 손에 깍지를 끼어왔다. 길지 않은 거리를 걷는 동안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린 건, 집 앞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말문을 먼저 연 건 시우였다.
“차가 고장 났어.”
“네?”
“응. 갑자기 도로변에서 차가 고장 나서. 엔진 쪽 문제. 아, 걱정하지 마. 다친 거 아니야.”
시우는 오로지 산호가 ‘예쁘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지금의 크림색 차를 골랐다. 관리도 어렵고 고장도 잦은 클래식카였다. 산호는 차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말했지만, 시우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산호의 눈에 예쁜 게 자신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어찌 되었든 차에 제법 손이 많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잔고장이 잦은 게 그 이유였다. 때로는 오늘처럼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멈추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약속은 취소했어. 움직이기 번거로울 것 같아서.”
“…….”
“그래도 괜찮아. 가끔 이렇게 걷는 것도 좋아. 날씨가 좋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산호가 고개를 비스듬히 올려 시우를 바라보았다.
“백산호. 왜 화났는지 말 안 할 거야?”
“…….”
“얼마 전부터 화났던데.”
“아니라고 했잖아요.”
“거짓말 안 하기로 약속했는데, 우리.”
산호가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약간의 원망을 담은 눈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화가 난 게 아니라.”
“아니라.”
“불쾌한 거예요.”
시우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썹을 찌푸렸다.
“선배가 불쾌한 게 아니라, 그냥. 그냥 선배한테 달라붙는 다른 시선이 불쾌한 거라구요.”
시우의 눈썹이 조금 치켜 올라갔다. 무슨… 산호는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대로 옴칠 입을 다물었다. 시우 역시 말없이 걸음을 뗐다. 자그마한 정원을 지나 그들의 집 현관문을 열고 나서야 시우는 작은 화분을 아래에 내려두곤 산호의 양 어깨를 쥐었다. 저를 바라보게끔 산호를 돌려세운 시우가 산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산호야.”
“…….”
“누가. 누가 날 보는데.”
“…….”
산호는 여전히 입을 꼭 다물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제가 속이 좁은 사람으로 보일까 걱정스럽다거나, 쓸데없이 감정이 상하게 될까 두렵다거나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그냥 싫었다. 입에 올리게 될 이야기를 듣는, 그 짧은 순간일지라도 시우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는 게 싫었을 뿐이다.
시우가 살며시 산호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쪽, 마찰음 소리도 나지 않는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시우는 휘어진 눈으로 산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백산호, 욕심쟁이.”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리고는 한 번 더 입술을 부딪친다.
“나 가진 거 엄청 많은 사람인데, 욕심쟁이 내 짝을 만족시키기엔 영 부족한가 봐.”
“그게 아니라…!”
시우가 빙그레 웃었다. 달래주는 듯한 미소였지만, 울컥 원망이 쏟아졌다. 산호가 눈을 살며시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게 왜 욕심이야.”
“응?”
“다른 사람 시선에 선배를 나누는 거 싫어요. 좋아하는 거, 사랑하는 거 나누기 싫은 게 왜 욕심인데요.”
어떻게 나눠 그걸. 시우가 두어 번 눈을 끔뻑였다. 대답을 찾지 못한 듯 잠시간 산호를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응. 욕심 아니야. 미안해, 내가 잘못 말했어.”
“…….”
“싫어해도 돼.”
산호는 슬쩍 시선을 내렸다. 엇나간 시선을 책망이라도 하듯 시우가 산호의 턱을 쥐곤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또다시 입술을 쪽 부딪쳤다.
“그래도 항상 좋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
“…….”
“나도 싫어. 다른 사람이 너 보는 거, 너 보고 싶어서 강아지 산책시킨다는 핑계로 우리 집 주변 맴도는 거, 너만 보면 얼굴 붉히는 거, 너 좋아하는 거.”
산호가 눈을 올려 떴다. 시우가 으, 앓는 소리를 내더니 산호를 세게 끌어안았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꽉 끌어안더니 이내 부드럽게 산호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청 예쁜 여자가 너 좋다고 하니까, 막 화가 나더라고. 막, 질투 나고. 속도 끓고.”
“네?”
산호가 몸을 물려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려는 듯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시우는 양팔에 더욱 힘을 주어 산호를 품 안에 가두었다. 등을 꾹꾹 쓸어내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얼굴 보여주면 반칙이야. 진짜 내가 너 가둬놓을지도 몰라. 산호 네가 했던 것보다 더 지독하게.”
목울대를 울리듯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산호의 귓가에 울렸다. 시우의 품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움찔대던 산호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대신 제 손을 올려 시우의 등을 마주 안았다.
“그랬으면 좋겠다.”
산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대자, 시우가 큭 웃음을 터트렸다. 산호는 다시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래도 항상 좋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으으, 시우가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으스러트릴 듯 산호를 꽉 끌어안았다. 씹어먹고 싶다, 내 짝. 퍽 간지러운 목소리였다.
***
앨리가 이곳 런던 근교로 옮겨온 것은 2년 전 즈음의 일이었다. 본래 노팅힐에서 조부모의 꽃집 운영을 돕던 그녀는, 언젠가 자신만의 꽃집을 가지고 싶다는 꿈을 품었었다. 사고로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앨리를 보살펴온 조부모는 늘 앨리의 꿈을 응원했고, 결국 앨리는 조부모의 도움을 받아 이곳 런던에 작은 꽃집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꽃집을 운영하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꽃은 마치 식재료처럼 신선도가 중요했고, 섬세한 손길도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노동력도 필수였다. 도와주는 이 없이 혈혈단신 감당하기에 벅찬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대체로는 즐거웠다. 몸은 피곤해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앨리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앨리의 조부모가 가장 좋아하는 퍼넌큘레이트 꽃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비좁은 꽃집 내부에 자리를 마련하기 힘들어 외부의 커다란 버킷에 꽃을 가득 담아두었다. 때로는 길을 걷던 행인들이 이름 모를 들풀의 수수함에 끌려 한 아름씩 사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날도 비슷했다. 조부모와 연배가 비슷한 노부부가 장미를 곁들여 퍼넌큘레이트 꽃을 잔뜩 품에 안고 돌아갔다. 앨리는 무척 기쁜 마음으로 버킷에 담아둔 하얀 들꽃을 들여다보았다.
“아.”
오래도록 허리를 굽히고 있던 탓에 몸이 뻐근했다. 기지개라도 켤 요량으로 허리를 쭉 편 순간, 좁은 거리를 걷던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어머, 죄송….”
부딪힐 뻔한 사람은 키가 훌쩍 크고 어깨가 넓은 동양인이었다. 무척 유려한 외모의 그는, 놀랍게도 앨리가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조금 키가 작은 하얀 피부와 까만 머리칼을 가진 남자와 함께 있었다.
“앨리?”
앨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조부모의 꽃집에 종종 들르던 손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기억은 어렴풋했지만, 그의 이름이 시우, 그 비슷한 발음이라고 했던 것 같다. 무척 다정다감한 성격의 손님이라 앨리도 그녀의 조부모도 그를 좋아했었다.
“맙소사, 시우에요?”
“앨리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자신의 기억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듯, 시우가 몹시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눈꼬리가 활짝 휘어있었다. 조부모의 꽃집에서도 느꼈지만, 시우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남자였다. 밝고 따듯한, 그리고 다정한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오래 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움이 샘솟았다.
“나도 그래요. 런던도 아니고, 여기서 만날 줄이야.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요?”
“아.”
시우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음, 당분간 여기에 머물 것 같아요. 얼마나 머물지는 모르겠지만.”
시우가 제 옆에 선 남자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앨리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앨리는? 여기, 앨리의 샵이에요?”
시우가 앨리의 어깨 너머 자그마한 꽃집을 바라보았다. 아기자기한 간판과 버킷에 가득 담긴 꽃들을 바라보는 눈이 몹시도 상냥했다.
“네, 2년 정도 됐어요. 이제 막 적응하고 있는 중이에요.”
“아, 너무 축하해요.”
시우가 다정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축하를 건네는 목소리에 앨리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시선은 자꾸만 시우의 곁에 선 까만 머리칼의 남자를 향해 움직이기는 했지만.
“다음에 다시 인사해요, 앨리. 다음엔 조부모님 소식도 알려줘요.”
시우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짧지만 반가웠다는 말과 함께 다음을 기약한다. 앨리도 환하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네, 또 만나요. 두 남자가 꽃집을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시우와 앨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말없이 말간 눈으로 버킷에 담긴 꽃을 바라보던 까만 머리칼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거 선배가 말하던 꽃이에요?”
시우가 응? 하며 제 곁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노팅힐 꽃집, 들꽃.”
남자를 바라보며 시우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응, 예쁘지.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뻐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
앨리는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인지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네, 예뻐요. 까만 머리칼의 남자가 뱉은 짧은 대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시우는 앨리에게 눈짓으로 다시 인사를 건네곤, 곁의 남자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앨리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당신도 꽃만큼이나 무척 예쁜데. 조금은 낯간지러운 중얼거림이 입가에 맴돌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태껏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이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첫눈에 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앨리는 버디의 산책 경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시우와 까만 머리칼의 남자가 사는 집 근처의 방향으로. 그렇다면 까만 머리칼의 남자를 더 자주 볼지도 몰랐다. 앨리는 자신이 조금 비열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시키는 일에 손쓸 도리가 없었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후로, 시우와 그 남자를 가까이에서 만날 기회는 흔치 않았다. 종종 먼 발치에서 그들을 보기는 했다. 특히 까만 머리칼의 남자는 종종 앨리의 꽃집 앞을 지나치곤 했다. 품에 책을 안은 것으로 보아 근처 도서관에 가는 길인가 싶었다.
그렇게 마주치는 것도 물론 좋았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던가.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앨리는 버디를 쓰다듬으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부탁했다. 버디, 너도 그 남자가 마음에 들 거야. 새로운 산책로도 마음에 들 거고. 괜찮지?
다행히 버디는 새로운 산책 경로를 좋아했다. 반려견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버디 역시 시우와 까만 머리칼의 남자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얌전히 종종걸음으로 걷던 버디가 꼭 파란 지붕의 집 앞에서는 컹컹 짖곤 하는 것이다. 덕분에 앨리는 시우와 몇 차례 인사를 나누었다. 시우의 곁에는 항상 까만 머리칼의 남자가 있었다.
그렇게 몇 번 산책길에 그들을 마주쳤을 때, 앨리는 처음으로 시우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여전히 앨리에게 상냥하게 웃어주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 왔지만, 분명히 곤란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시우가 꽃집을 몇 차례 찾아왔다.
“앨리.”
붉은 꽃다발을 사간 후 이틀째 되던 날이었던가, 시우가 한 번 더 앨리의 꽃집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작은 화분을 샀다. 앨리는 화분을 관리하는 방법이나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었다.
나 얼마 전에 당신과 같이 사는 그 남자를 만났어요. 처음으로 그 사람과 대화도 나누었는데, 무척 설렜어요. 시우에게 그 말을 꺼낼까 한참을 망설였다. 여지껏 시우에게 까만 머리칼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이유와 같은 이유에서 망설인 것이었다. 그들이 단순한 룸메이트 사이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 말이다.
앨리는 시우의 나지막한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시우는 앨리를 향해 난처한 듯 웃어 보였다.
“앨리. 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상한 질문 한다고 오해하지 말아줘요.”
앨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우를 마주 보았다. 자신의 예감이 다시금 가슴 속에서 부풀었다.
“산호, 좋아해요?”
산호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앨리는 단박에 그 이름이, 까만 머리칼의 남자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앨리의 표정을 바라보던 시우는 다시금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음, 우리한테 사정이 조금 있었어요.”
“네? 무슨….”
“한국에서 이곳으로 온 것도 조금 복잡한 사정 때문이었거든요. 산호가 이곳에 있는 걸 가급적이면 알리고 싶지 않을 만한 사정이요. 이제 거의 마무리되긴 했지만.”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시우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앨리한테 산호를 소개해주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미안할 것까지는….”
“내 짝이거든요. 산호.”
아. 앨리는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자신의 예감이 단단한 형체를 띤 것이다. 당황한 듯 보이는 앨리를 향해 시우가 미안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여태껏 앨리에게 소개해주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
“음, 앨리가 그 애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유치하게 질투했던 것도 미안해요.”
거짓없는 웃음을 지으며 시우는 앨리를 바라보았다.
“만일 내가 오해한 거라면 정말 미안해요.”
앨리는 잠시 시우를 바라본 채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한 마음도 들었다. 이런 완벽하고 깔끔한 거절을 듣게 될 줄이야. 한동안 시우를 바라보던 앨리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애써 웃어 보였다.
“혹시나 하고 생각하기는 했어요.”
“그랬어요?”
“네, 그런 건 숨겨지는 게 아니니까.”
앨리는 화분을 시우에게 내밀며 다시금 웃어보였다. 허무하게 끝난 짝사랑에 조금 속이 쓰리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시우는 정말 멋진 남자였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셋이, 아니 버디까지 넷이 친구가 되는 건 괜찮죠?”
시우가 천천히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응, 물론이죠. 그의 대답이 마침표를 맺기도 전, 컹! 버디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산호? 시우가 유리문을 열고 나서는 모습을 앨리는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도 버디는 꽃집 앞에 나른하게 엎드려 누워있었다. 며칠 동안 날씨가 흐리더니, 오랜만에 하늘이 맑았다. 따뜻한 햇볕 아래 버디의 황금색 털이 반짝반짝 빛났다. 버디의 곁에 무릎을 굽혀 앉은 앨리는 가만히 버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버디. 고백도 하기 전에 차이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
크응. 버디가 슬그머니 눈만 올려 앨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슬프거나, 아니면 정말 불쾌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야.”
앨리는 빙그레 웃었다.
“생각보다 그렇진 않더라. 그냥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고 해야 할까.”
컹! 버디가 고개를 들고 앨리를 바라보았다. 촉촉한 코를 앨리의 손등에 문지른다. 앨리는 다시금 버디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뭐, 괜찮아.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생각하거든.”
버디를 향해 중얼거리던 앨리의 시선이 문득 제 앞에 다가온 하얀 운동화에 머물렀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선 하얀 운동화를 따라 앨리의 시선이 위로 끌어올려졌다.
“어….”
까만 머리칼의 남자, 산호라고 했던 그 남자였다. 앨리의 입이 빠끔 벌어졌다.
“안녕.”
산호가 말했다. 자신에게 하는 인사인지, 버디에게 하는 인사인지 가늠할 수 없어 앨리는 그저 눈만 끔뻑였다. 산호의 시선이 버디에게 머문 것을 보아, 버디에게 건네는 인사 같았다. 앨리는 천천히 무릎을 펴 일어섰다. 산호의 시선이 천천히 앨리를 향해 움직였다.
“사과하고 싶어서요.”
산호의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앨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사과라니, 뭘?
“아끼는 꽃일 텐데.”
“무슨….”
“얼마 전에, 여기에 가득 담았던 빨간색 꽃.”
아. 시우가 큼지막하게 포장했던 꽃을 말하는 건가? 앨리가 산호를 마주 보자 산호는 가볍게 앨리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사과를 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 꽃 버렸거든요.”
“아….”
“불쾌해서.”
산호가 하는 말을 영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산호는 여전히 덤덤한 시선으로 앨리를 마주보며 말했다.
“꽃 싫어하지 않아요. 싫어하게 될 것 같았는데, 아마도 앞으로도 싫어하지 않을 거예요.”
산호는 잠시 머뭇댔다. 이내 희미하게 웃은 그가 마지막 말을 건넸다.
“당신도 버디도 또 만났으면 좋겠어요.”
벌떡 일어선 버디가 산호를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컹! 반가운 듯 짖자, 희미했던 산호의 미소가 점차 짙어졌다. 이렇게 웃을 수도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환한 미소가 산호의 얼굴에 올랐다. 산호가 버디의 머리를 쓰다듬자, 버디가 다시 한번 컹! 짖었다. 앨리 역시 그를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컨파인드 페로몬, 후일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