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쓰러지듯 잠든 산호를 안아 꼼꼼히 씻겨준 후에는 나란히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은 나른하게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폭발적으로 일렁이던 오메가의 페로몬은 알파와의 교합으로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일상적인 주기에 의한 히트 사이클이 아닌 만큼 광폭했던 페로몬은 빠르게 진정되었다.
“…….”
그래도 산호는 몇 번 몸을 뒤척였다. 가끔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고, 가끔은 힘겨운 듯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산호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시우는 모로 누워 산호를 안아주었다. 아기처럼 웅크린 채 잠이 든 산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고, 가끔 세게 끌어안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때에는 아프지 않게 귓바퀴를 물었다. 오똑한 콧방울에 입술을 대기도 했다. 제게 닿은 시우의 입술이 간지러워 산호의 미간이 좁혀지면, 킥킥 웃으며 손끝으로 찌푸려진 미간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제법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
의식적으로 제어하지 않은 페로몬이 넘실댔다. 오메가를 품에 안아 자연스럽게 새어 나오는 페로몬을 제어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따뜻한 흙 향을 머금은 페로몬은 상냥하게 산호의 몸을 도닥였고, 그럴 때마다 산호는 부드럽게 숨을 내뱉곤 했다. 깊은 잠에 빠져있었지만, 자신을 보듬는 손길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수차례 쓸어 넘긴 머리카락이 다시금 눈썹 아래로 떨어졌다. 까맣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하얀 피부 위에 차르르 떨어져 기묘한 빛을 냈다. 이 애는 온통 하얗고, 온통 까맸다. 그렇지 않으면 수줍은 붉은 기를 띄거나.
“…인형 같다.”
시우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놀라운 감각이었다. 날카롭게 심장을 베는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게 보듬는 듯한 감각. 물밀듯이 밀려들어 온 지난 1년의 기억은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며 시우의 마음을 들쑤셔 놓았다. 언제부터였지? 이 애를 볼 때 언제부터 이런 마음을 품게 됐을까. 기억이 온전히 돌아온 지금에도, 이 마음의 시작점만큼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문득 소중한 이 애에게 손끝 하나 대는 것조차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불과 몇 시간 전 흥분한 자신이 흉포한 성기를 이 애의 몸 안에 밀어 넣은 것을 떠올리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지금도 세게 끌어안고 싶은 자신의 본능적인 욕구가 조금 파렴치하게 느껴졌다.
겁먹은 아이처럼 시우는 살며시 몸을 뒤로 물렸다. 조금 거리를 벌리고 나니 오밀조밀한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달싹 달라붙어 있을 때에는 조각지어 보이던 기다란 속눈썹이나, 오똑한 콧방울, 살 오른 과일 같은 입술이 한데 어우러져 눈에 띄는 것이다. 시우는 난처한 듯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아, 너무… 예쁘다.
자신을 품에 안고 끊임없이 온기를 나누어주던 몸이 살짝 멀어진 것을 느낀 탓인지 산호가 몸을 뒤척였다. 미간이 좁아지는가 싶더니 눈꺼풀이 살며시 들어 올려졌다. 아직 잠기운이 묻은 까만 눈동자가 시우를 향했다.
“…….”
“…….”
“…….”
잠시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내 나른한 표정으로 시우가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안녕.”
표정만큼이나 나른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새벽의 해가 창문을 통해 푸르스름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산호는 그대로 시우를 말가니 바라보았다.
“잘 잤어?”
“…….”
“너 오래 잠들어 있었어.”
“…….”
“히트는 이제 끝난-.”
산호가 대뜸 손을 뻗어 시우의 뺨을 쿡 찔렀다.
“이거 꿈이에요?”
엉뚱한 소리에 시우는 다시금 웃었다. 휘어진 눈꼬리가 조금 더 깊이 패였다.
“꿈 아닌데.”
“정말, 정말 기억 돌아왔어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저를 빤히 바라보는 산호를 보며 시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곧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산호의 시선이 점차 일그러지고 있었다. 마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절망과 닮은 표정이 산호의 얼굴에 떠올랐다.
“내 기억 돌아와서 싫어?”
태연한 척 장난스럽게 던진 물음에도 산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휜 시우의 눈꼬리는 웃음 지어져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점차 퍼져나갔다. 시우는 눈썹을 잘게 찌푸렸다.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기억해내라고 했으면서.”
“…….”
“엄청 무섭게, 기억을 찾거나 아니면 널 임….”
찌푸린 눈썹이 조금 더 깊어졌다. 아래로 불끈 피가 몰리는 감각에 시우는 난처한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임신시켜 달라고 했던 게 누군데.”
“그건.”
“그건?”
산호의 입이 다시 다물렸다. 산호의 귓바퀴 역시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시우는 픽 웃음소리를 냈다.
“백산호, 거짓말 엄청 많이 한다.”
“제가 무슨….”
“첫날에 같이 갇힌 척 했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척.”
“…….”
“몰래 물에 약도 타고. 비타민제로 눈속임까지 하면서.”
“…….”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저는.”
“아, 일부러 헛디뎌서 계단도 굴렀지. 겁도 없이.”
그 순간이 떠오르자 시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어졌다. 살짝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손을 뻗어 산호의 옆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계단 모서리에 찢어진 상처 위를 아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이건 아무래도 혼나야겠다.”
“그땐 선배가-.”
시우는 비죽인 입술을 산호에게로 가져다 댔다. 말간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살짝 힘을 주어 산호의 아랫입술을 콕 깨물곤 몸을 물렸다.
“안돼, 혼나야 돼. 엄청 많이 혼나야 돼, 너.”
산호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무구한 얼굴이 황당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서 시우는 하, 헛웃음을 쳤다.
“산호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줄 수 있다고 했었잖아, 내가. 기억나?”
“…네.”
“그럼 너도 내가 원하는 거 해줘야지.”
언젠가처럼 당연한 듯 등가교환에 대해 이야기했다. 산호가 한쪽 눈썹을 얕게 찌푸리며 시우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거 뭐였는지 기억해?”
“…아르바이트 하지 말라고.”
단편적인 대답이었다. 시우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음, 그것도 맞긴 한데… 그거 말고.”
“그거 말고?”
시우는 가만히 팔을 뻗어 산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간격을 벌렸던 몸이 다시 가까워졌다.
“아무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산호 너조차도 너를 함부로 대하는 거, 싫어.”
“…….”
“어떻게 함부로 다칠 생각을 해. 응?”
“…….”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나 사랑한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왜 내가 바라는 거, 그거 하나를 못 해줘.”
책망하는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산호의 입술이 와락 깨물렸다. 편편하게 펴졌던 시우의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큰 손으로 산호의 뺨을 감싸고 엄지로 아랫입술을 살며시 눌렀다. 이 애가 입술을 짓물을 때마다 잇새에 깨물리는 여린 피부가 안쓰러웠다. 물리적인 힘에 의해 입술을 탁 놓은 산호는 눈을 아래로 내린 채 시선을 피했다.
“산호야.”
“…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기억을 잃은 사이,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줘.”
산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내리깔린 시선도 움직이지 않았다. 옴폭 패인 산호의 기립근을 따라 천천히 손을 미끄러트리며 시우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말해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옴폭한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아이를 어르는 것 같기도 했고, 연인을 만지는 것 같기도 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손짓에 산호의 허리가 가볍게 떨렸다. 한참이나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내렸던 산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나른하지만 끊임없이 산호의 몸을 더듬던 시우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움직임을 멈춘 손은 곧 넓게 펼쳐져 산호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곤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네. 아무 일도.”
시우의 손에 힘이 더 실렸다. 산호가 제 품 안으로 안겨오자, 심장이 쿵쿵 박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운 압박감에 산호는 다시 몸을 떨었다.
“아무 일도 없는 네가, 어떻게. 왜. 나를 가둬.”
“…선배.”
“이렇게 조금만 만져도 바르르 떨 만큼 겁먹으면서, 어떻게 날 가뒀어.”
하체가 가까이 마주 닿았다. 단단한 자신의 허벅지에 말랑한 산호의 살결이 비벼졌다.
“말해, 산호야.”
“정말로, 아무 일도….”
“아버지랑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줘.”
시우의 말에 산호의 몸이 일순 긴장했다. 진 회장의 이야기를 시우가 먼저 꺼내리라 예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빳빳하게 긴장된 몸을 시우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아버지를 잘 알아.”
“…….”
“박규철 실장이 약을 구해주고 있었다면, 아버지의 지시를 받은 거겠지.”
조용히 말을 잇는 시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시우의 가슴께에 닿아있던 산호의 손이 살며시 주먹 쥐어졌다.
“아버지는 이유 없이 널 돕지 않았을 거야. 분명히 너한테 대가를 얻어갔을 거야.”
주먹 쥐어진 손에 힘이 실렸다. 마디가 새하얘진 산호의 손을 내려다보며 시우는 가만히 그 손을 풀어냈다. 손등 마디를 쓰다듬는 시우를 향해 산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무슨 시간.”
“내가 선배랑 함께할 수 있는 시간.”
“…….”
“제가 가진 건 그거밖에 없었어요. 선배랑 함께하려면, 내가 가진 거 전부 줄 수밖에 없었다고.”
그게 무슨… 시우는 쓰다듬던 산호의 손을 시선 높이로 끌어올렸다. 손가락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며 산호를 바라보았다.
“…또 너를 대가로 걸고 아버지랑 내기라도 했어?"
“내기가 아니라… 거래에요.”
볼 안쪽 점막을 씹으며 산호는 시우의 시선을 피했다. 시우는 자신의 입술에 산호의 손 끝을 문지르며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시간.”
그리고 어떤 기억이 이어졌다. 필름처럼 도로록 감긴 기억은 3개월 전, 자신의 약혼식 날로 되돌아갔다.
‘…시간이라.’
‘네. 저는 시간만 있으면 돼요, 아버지.’
아버지 진 회장의 집무실에서였다. 그날 자신은 약혼식장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높다란 JR건물의 가장 깊숙한 곳.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했었다.
***
[3개월 전]
“이사님.”
JR 건물 앞에 차를 세운 정 실장이 룸미러 너머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네, 실장님.”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시우는 정 실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차 문을 열었다. 지금의 걸음이 앞으로의 일을 결정지을 거라는 사실을 시우는 알고 있었다.
“어… 이사…님?”
본사 로비에 들어서자 인포데스크에 서 있던 직원이 시우를 알아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전, 그의 약혼식 현장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참이었다. 갑작스런 비공개 결정이 전해지기 무섭게 때를 맞추어 나타난 시우의 모습은 그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직원을 향해 시우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 뵈러 왔어요.”
“아, 그게….”
진태석 회장 부자의 불화설은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직원은 시우의 등장에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시우는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극소수의 관계자만이 오를 수 있는 커다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몹시 차분했다. 한 달간 이 계획을 세우면서 불안함으로 점철되었던 마음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라앉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커다란 집무실 문 앞에서 시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인포데스크에서 벌써 자신의 소식을 올린 것인지, 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비서들이 보이지 않았다. 시우는 흘끗 텅 비어있는 데스크를 바라보고는 커다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우는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 네가 날 만나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커다란 창가 앞에 앉아있던 진 회장이 말했다. 시우는 말없이 아버지를 응시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으나, 곧 아버지의 커다란 데스크를 향해 발을 뗐다. 진 회장은 여유롭게 깍지를 끼곤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이었음에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태산처럼 큰 인물이었다. 때로는 그런 아버지가 두려웠고, 언제나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지키고 싶은 이를 향한 열망보다 큰 것은 없었다.
“매스컴을 통제하는 게 꽤 까다로우실 텐데. 죄송해요.”
“걱정해주니 고맙구나.”
가벼운 어투였다. 그러나 그는 곧 낮은 목소리로 음울하게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이렇게 될 거라는 거, 모르셨어요?”
“예상했다.”
진 회장은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제 몸을 기댔다. 마찰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의자가 출렁였다.
“그래. 애비 등에 칼을 꽂은 심정이 어떠니. 통쾌하기라도 한게야?”
“아뇨. 아파요, 무척.”
그러나 시우는 아버지를 마주 보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가 먼저 산호한테 칼을 들이댔으니까.”
“칼을 들이댔다.”
진 회장은 단호한 표정의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허리를 곧추세워 아들을 향해 몸을 숙여왔다.
“시우야. 기회를 주마. 마지막 기회다.”
“…….”
“믿지 않겠지만, 나는 그 애가 마음에 든다.”
“…….”
“강단 있는 아이더구나. 내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그 애에게 기회를 줬다. 내기를 했지.”
“내기?”
“그날 클럽에서.”
시우의 눈썹이 살짝 비틀렸다. 외설적이다 못해 천박한 옷을 입고 눈을 가린 산호가 제 몸을 더듬었던 날. 몸을 파는 창부처럼 자신을 안아달라고 애원하던 목소리는 두려움에 가득 절어있었다. 시우는 일렁이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곧 도착할 손님의 마음을 얻으면, 그 애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했다.”
“…….”
“절박한 이를 다루는 건 쉬운 일이야. 그 애는 절박했어. 그래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게다. 어리석은 판단을 한 아이가 어떻게 나를 이길 수 있겠니.”
진 회장이 자신의 턱 끝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시우야.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다. 그 애를-.”
아버지를 향해 살짝 아래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우는 아버지의 말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아버지. 기회를 드리는 건 저예요.”
“…….”
“아버지가 졌어요. 산호와의 내기.”
“무슨 의미냐.”
“손님의 마음을 얻으면 그 애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하셨다면서요.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시는 분인 거,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애초에 아버지가 이기지 못할 내기였어.”
진 회장은 살며시 미간을 좁히며 시우를 바라보았다. 턱 끝을 매만지던 손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그 애를 사랑하기라도 하느냐고 물으셨었죠.”
시우는 조용히 말했다.
“네, 맞아요. 사랑해요.”
진 회장의 미간이 조금 더 깊이 패였다. 제 아들을 바라보는 눈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역시 무수한 질풍을 겪고 있을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시우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김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김 교수는 오래도록 시우를 담당해온 주치의였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대화에 오르자 진 회장은 눈썹을 조금 치켜올렸다.
“아버지도 들으셨을지 모르겠어요. 감정적 각인이란 거.”
“…….”
“제가 발현하던 날. 아니, 그 전날. 정원에서 어떤 아이를 만났어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또래의 작은 아이였어. 무척이나 예쁜.”
“…….”
“그 애가 산호라는 거, 알고 있어요.”
“…….”
“산호를 만나서 제가 발현하게 된 거라면요. 발현에 영향을 준 사람을 다시 만나고, 그 사람에게 마음을 전부 주게 된다면.”
시우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미소였지만, 확신이 가득 담겨있었다.
“감정적 각인이 새겨진다고 하던데.”
“…그건.”
“네, 그건 물리적인 각인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구속력이에요. 일종의 속박이나 감금처럼. 절대로, 아무도 끊을 수 없는 구속이요.”
시우는 커다란 데스크에 양 손을 얹어 아버지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아버지, 제가 필요한 건 시간이에요.”
“…시간이라.”
“네, 저는 시간만 있으면 돼요, 아버지. 아버지를 설득할 시간.”
진 회장은 저를 향해 올곧게 시선을 던지는 제 아들을, 조금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아버지도 산호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 애는 내 오메가고, 내가 그 애의 알파니까.”
“만일 네가 끝까지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어쩔 테냐.”
시우는 한숨을 쉬듯 웃었다. 굽혔던 허리를 반듯이 세우며 가볍게 말했다.
“평생 그 애와 함께 있겠죠.”
시우는 아버지를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인사였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 역시, 결국 산호를 인정하게 될 거라고 시우는 확신했다.
“…아버지.”
“…….”
“저를 욕심쟁이로 키우셨어요.”
“무슨 소리냐.”
“전 아무것도 잃기 싫어요. 내 짝도, 가족도.”
“…….”
“그리고 전 자신 있어요. 아무것도 잃지 않을 자신.”
***
[마지막, 현재]
“일주일.”
시우의 무거운 목소리에도 산호는 입을 다물었다. 시우는 입을 다문 채 모로 누운 산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산호는 아무 말도,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시우는 알 수 있었다. 이 애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고작 이 일주일이 네 목숨값보다 귀했어?”
“…….”
“…어떻게.”
“…….”
“어떻게, 왜.”
자신 역시 다른 말을 얹지 않았지만, 산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애닳아하고 있는지를. 아니, 정말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을 텐데.
“…….”
그러나 결국 자신의 실수였다. 오롯이 자신의 잘못이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 애가 널따란 흙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기다릴 수 있도록 말해주었어야 했다. 주변의 모두가 진시우는 백산호를 선택할 리 없다고 조롱해도, 믿지 않도록. 흔들리지 않도록 말해주었어야 했다. 아무런 설명도, 믿음도 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환멸이 가슴 가득 퍼졌다.
이 애는 처음부터 그랬다. 겁이 많고, 아무도 믿지 못했다. 호의를 담아 다가가도 가시를 비죽 세우고 경계했었다. 여린 속살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그런 이 애가… 그동안 어떻게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었을까.
시우는 오래도록 말 없는 산호를, 그 역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
“…….”
무지근한 침묵이었다. 침묵을 깬 건 바스락거리는 침대 시트 소리였다. 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몸짓에 침대 시트가 구겨지고, 품에 안았던 산호가 스르르 멀어졌다. 저를 품에서 떼어놓은 시우를 올려다보고 싶은 듯, 산호의 속눈썹이 움찔 떠는 것을 보았지만, 시우는 그저 가만히 일어설 뿐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쩌면 훨씬 오래전에 이 애에게 해주었어야 할 일이었다.
“산호야.”
침대 아래로 내려선 후에야 시우는 산호를 불러보았다. 산호의 콧방울에 언뜻 불그스름한 빛이 비쳤다. 눈시울도 붉은 기를 머금었다. 시우는 팔을 뻗어 부드럽게 산호의 어깨를 잡았다.
“…….”
다정했지만, 단호했다. 시우의 손길에 억지로 일으켜진 상체를 바로 세우자, 산호의 두 다리가 침대 아래로 비죽 내려왔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로 산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시우는 산호의 아래 양 무릎을 굽혀 앉았다.
“나 부탁 있어.”
“…부탁이요?”
“응. 부탁. 들어줄 거야?”
시우를 마주하기 힘든 듯 계속 아래를 바라보던 산호의 시선이 마침내 위로 들어 올려졌다. 시우는 살짝 눈을 접어 웃었다.
“뭔…데요.”
시우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침실과 이어진 드레스룸 안을 가리키는 고갯짓이었다. 산호의 눈이 의아한 듯 드레스룸 안을 향했다.
“나, 네가 내 옷 입은 거 보고 싶어.”
엉뚱한 부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보니 분명히 그랬다. 조금 멋쩍은 부탁인데. 시우는 입술 안쪽 점막을 씹으며 눈꼬리를 더욱 휘었다.
“저기 내 옷 있잖아. 슈트.”
산호를 밀치고 룸을 빠져나가 비상구 계단을 밟을 때, 그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때엔 왜 자신의 옷이 이곳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기억한다. 산호는 여전히 의아한 눈으로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어줘. 빨리. 응?”
응석을 부리듯 속삭였다. 산호는 눈썹을 조금 찌푸렸지만,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는 산호를 향해 배시시 웃어보였다.
자신의 드레스셔츠를 입은 산호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하의를 입기에는 곤란했는지, 셔츠만을 걸친 차림새였다. 전라의 몸을 감싼 자신의 커다란 드레스셔츠는, 산호가 클럽에서 입었던 야살스러운 홀복보다 더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산호가 부끄러운지 반쯤 가려진 허벅지 아래로 셔츠를 끝단을 조심스레 당겼다. 시우는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시우의 웃음을 본 산호가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이상…하잖아요. 선배 옷 너무 커서.”
“응. 엄청 크다.”
“왜 입으라고 한 건데요?”
맨살을 드러낸 허벅지 위에 시우가 살며시 제 턱을 기대고 산호를 올려다보았다.
“남친 셔츠 몰라?”
산호의 얼굴이 조금 구겨졌다.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선배 같은 사람도 그런 거 좋아해요?”
“나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그거야.”
산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옴칠 다물린 입술이 새초롬해 보여서 시우는 픽 웃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은 벗겨진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음. 여기 피 묻었다.”
드레스셔츠 손목 자락에는 검붉은 피가 보기 흉하게 물들어 있었다. 계단에서 구른 산호를 안아 일으킬 때 묻은 것이 분명했다. 가슴께에도 똑똑 떨어진 핏방울이 묻어있었다. 시우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다 벗고 있는 것보다 더 야해.”
산호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산호는 조금 비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벗을래요.”
시우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턱이 아닌 뺨을 허벅지에 대며 산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벗는다고?”
“…아.”
“다 벗고 뭐 하려고.”
달아오른 뺨이 조금 더 발갛게 익었다. 음란한 말을 서슴없이 담았던 이 애가 짓궂은 놀림에 부끄러워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응? 말해봐. 다 벗고 뭐 하려고.”
“…왜 그래요, 자꾸.”
시우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으응,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안고 싶다.”
뺨에 닿은 산호의 허벅지가 파득 떨렸다. 맨질거리는 살결에 쪽쪽 입술을 찍으며 시우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또 하고 싶어.”
“…….”
“또 꽉 끌어안고 엉망으로 만들고 싶어. “
“그만해요….”
“이렇게 예쁜 걸 그동안 어떻게 참았지. 너무 맛있-.”
“선배!”
노골적인 단어가 부끄러운지 산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시우는 킥킥 웃으며 산호의 동그란 무릎에 길게 키스했다. 그리곤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음, 그 전에.”
뭘 하기 전에…? 산호가 슬쩍 찌푸린 눈으로 시우를 내려다보았다. 시우는 태연하게 손을 뻗어 산호가 들고 온 자신의 슈트 재킷을 쥐었다.
“이거.”
짙은 네이비 컬러의 슈트 재킷은 팔오금에 살짝 주름이 지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근사했다. 품이 넓은 재킷을 산호의 어깨 위에 살며시 걸쳐주었다. 제 어깨를 감싼 재킷을 내려다보던 산호는 또다시 올망한 눈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주머니 확인해봐. 오른쪽.”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의 산호에게 시우가 말했다. 산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시우의 말대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주머니 안쪽을 헤집었다. 그리고 이내 손끝에 무언가 걸렸는지 산호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
“…….”
그건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였다. 밋밋한 표면에 쌀알만 한 크기의 작은 다이아가 콕 박힌 반지. 산호는 조심스레 반지를 들곤 그것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거….”
산호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호텔 앞에서 시우를 불렀을 때, 저를 돌아보지 않는 야속한 뒷모습을 바라봤을 때, 산호는 이 반지를 분명히 보았었다. 시우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 분명 약혼자인 재일을 부축하던 손에 끼워져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저 약혼반지인 줄 알았다. 자신을 선택할 리 없는 알파가 자신이 아닌, 그와 어울리는 오메가를 만나 약혼을 하고, 그 증표로 나누어 가진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거 산호 네 건데.”
산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콧잔등을 살짝 찌푸리며 웃어 보였다.
“나 지금 너무 형편없지. 그래도 나 꾸며 놓으면 지금보다 더 멋있어.”
“…아닌데. 지금도 멋있…는데.”
찌푸려진 콧잔등이 잘게 주름지어졌다.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주고 싶지 않았어, 산호야.”
시우는 변명하듯 호를 그린 제 입술을 깨물었다. 다정한 눈으로 산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멋있게 전해주려고 계획도 많이 세웠었단 말야. 네가 반하지 않고는 못 버티게끔, 정말 멋있게.”
하, 얕은 숨이 산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시우를 응시하며 산호가 말했다.
“무슨 계획이었는데요.”
응? 시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산호의 허벅지에 다시금 뺨을 기댔다. 엎드린 모양새로 커다란 손을 들어 허벅지 위에 검지 손끝을 가져다 댔다. 기다란 손끝은 허벅지 위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천천히.
“비행기에서 주면 어떨까 했었어. 너랑 같이 떠나려고 준비한 게 있었거든. 하늘 위에서 주면 좋지 않을까. 지중해 위 상공이면 더 낭만적일 것 같아서.”
산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우는 산호를 살며시 올려다보곤 웃었다. 몽글몽글한 구름을 그리며 허벅지를 매만지던 손이 조금 더 범위를 넓혀갔다.
“어, 별론가.”
“…….”
“그럼… 노팅힐 거리 꽃집. 정말 작은 꽃집이 있는데,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이거든. 런던에 갈 일이 있으면 종종 갔었어. 다른 데에선 잘 볼 수 없는 들꽃도 많아서 좋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
“그 노부부처럼 평생 나랑 함께 있자고 말하면 멋질 것 같아서.”
꽃 그림을 그리듯 시우의 손이 움직였다. 어린아이가 서투르게 그리는 꽃처럼 손끝을 둥글려 서너 개의 꽃잎을 그려 넣는다.
“음… 이것도 별로야?”
“…….”
“산호 네 키만큼 높이 꽃으로 채워줄 수도 있는데.”
“…….”
“응, 알았어. 그럼….”
산호의 허벅지 위에 그려지는 그림은 점점 더 범위를 넓혀갔다. 작은 동산이 그려지고, 그 위에 꽃들이 그려졌다. 허벅지의 여린 안쪽 살 까지 손이 닿았다.
“그럼, 크지 않은 집을 사서. 거기에 정원을 만들고 테이블을 두는 거야.”
꽃이 핀 동산 위에 작은 집이 그려졌다. 동그란 테이블까지 그려 넣고는 시우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오늘 같은 일요일이면 더 좋겠다. 여유로우니까. 내가 만든 요리를 직접 네 입에 넣어주면서, 평생 내가 만든 요리 같이 먹자고 고백하면….”
아. 시우가 손끝에 살짝 힘을 주자 부드러운 살결이 쿡 눌렸다. 하얀 허벅지가 폭신한 스펀지처럼 굴곡을 만들어냈다.
“이건… 정말 별로겠다.”
맹탕같이 끓어오르던 계란죽이 떠올라 시우는 픽 웃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산호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시우는 시무룩한 어린아이처럼 눈썹을 늘어뜨리며 산호의 허벅지 위에 뺨을 작게 문질렀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반려동물처럼.
“백산호 꼬시기 너무 어렵다. 쉽게 안 넘어오네.”
“…….”
“어려워, 백산호.”
반지를 매만지고 있던 산호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자그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시우가 더 어려워.”
응? 산호의 얼굴을 바로보기 위해 시우는 고개를 기울였다. 색이 옅은 머리카락이 움직이며 간지럽게 마찰했다.
“선배가 더 어렵다고.”
“내가? 아닌데.”
“아무한테나 잘해주잖아요, 선배는. 누구한테나 다.”
작았던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다.
“아무나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고, 아무나 다치면 괜찮냐고 물어주고, 아무나 인사해도 웃으면서… 씨발, 예쁘게 웃으면서 인사해주잖아.”
허벅지 위에 그림을 그리던 손이 불쑥 들렸다. 욕설을 뱉은 입술을 책망하듯 톡 치자, 산호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누가 누구더러 어렵대. 자기가 더, 훨씬 더 어려우면서. 선배가 훨씬 더 어렵다고.”
시우는 허리를 세우고 일어섰다. 무릎은 여전히 바닥에 닿아있었지만, 허리를 세운 탓에 산호와 엇비슷하게 시선이 맞추어졌다. 찌푸린 산호의 미간을 손끝으로 편편하게 문지르며 시우가 말했다.
“똑똑한 백산호.”
“뭐가요. 뭐가 똑똑해.”
“어려운 거 단번에 풀었잖아. 그러니까 똑똑하지.”
“무슨 소리예요?”
시우는 산호의 손에 들려있는 반지를 가만히 받아들었다. 그리곤 산호의 손을 잡아 가까이 이끌었다. 손에 꼭 들어맞는 반지가 산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졌다.
“산호야, 정말 많이, 많이 좋아해.”
“…….”
“너무 좋아해. 너만 좋아해.”
“…거짓말.”
“아냐, 자꾸자꾸 너만 좋아할게. 계속계속 더 많이 좋아할게.”
“거짓말 하지 마요.”
시우가 잘게 눈썹을 찌푸리며 산호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원망스럽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왜 자꾸 거짓말이라고 해?”
산호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산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지며 시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할래.”
“뭘….”
“이번엔 내가 널 가둘 거야.”
까만 눈동자가 놀란 듯 시우를 향했다. 시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산호 네가, 내 말을 믿을 때까지 가둬 놓을 거야.”
“그게 무슨….”
“내가 너 좋아한다고 말한 거, 네가 믿어주기 전에는 안 놔줄 거야. 그전에는 너 아무 데도 못 가고 아무도 못 만나. 나만 보게 할 거고 나만 만질 거야.”
갸름하게 벌어진 산호의 입술은 할 말을 잃고 달싹이기만 할 뿐이었다. 시우는 다정한 목소리로 나긋나긋 말을 이었다.
“집 안에 가둬놓고 매일 만질 거야. 매일 아침 잠에서 깨울 때 귀찮게 뽀뽀할 거야. 그래도 안 일어나면 억지로 키스할 거야. 숨도 못 쉬게 입 안을 온통 헤집고 핥고 깨물 거야.”
“…….”
“네가 싫다고 해도 온몸에 키스할 거야.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괴롭힐 거야.”
자신의 드레스셔츠 위로 시우가 손을 올렸다. 도도록하게 솟아있을 유두 위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얇은 셔츠 너머 볼록 솟은 돌기가 만져졌다.
“여기. 예쁘게 솟은 여기, 사탕처럼 쪽쪽 빨아먹어야지.”
산호의 허리가 조금 비틀렸다. 입술이 꼭 다물려있어 신음이 새지는 않았지만 산호의 귓바퀴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시우는 산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지금처럼 야하게 허리 비틀면, 위에 올라타야지. 못 움직이게.”
그리고 그대로 산호를 풀썩 밀어 넘어트린다. 무방비하게 뒤로 넘어간 산호의 체중에 침대가 가볍게 출렁였다. 시우는 산호의 다리 사이를 제 몸으로 가르며 그 위로 올랐다. 그사이 발기한 성기가 산호의 허벅지 위를 부드럽게 압박했다.
“어딜 만져도 좋아하게끔, 매일 만져줘야겠다. 내가 손만 대도 흥분하게.”
아. 압박감에 산호가 얕은 신음을 쏟았다. 시우는 배시시 웃으며 산호가 입은 자신의 셔츠 단추 하나를 톡 풀었다. 가슴께에 위치한 단추였다.
“나중에는 먼저 빨아달라고 네 스스로 가슴 내밀게 만들 거야.”
“…선, 배… 아.”
“엄청 야하겠다. 위도 아래도 다 축축하게 젖어서 안아달라고 울면, 응, 진짜 미칠지도 몰라.”
“…하아.”
벌어진 셔츠 사이로 시우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날름 내민 혀로 가슴 사이 명치를 주욱 핥아 올리자, 산호의 허리가 바르르 떨려왔다. 시우는 성급하게 셔츠를 홱 잡아당겼다. 다소 거친 손길에 잠겨있던 단추가 통, 튕겨졌다. 조금 더 활짝 열린 셔츠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유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촉촉한 혀끝이 뾰족이 솟은 유두를 짓눌렀다.
“나만 만질 거야, 산호야.”
“으…으응.”
“너 좋아한다는 내 말 안 믿어주면, 가둬놓고 매일 이렇게 괴롭힐래.”
“하…으읏.”
혀끝으로만 톡, 톡 희롱하던 유두를 입술 전체로 물었다. 동그랗게 오므려진 입술에 삼켜진 유두가 거세게 빨렸다. 쮸웁, 쯉, 노골적인 소리가 났다. 물기를 머금고 살과 살이 질척이는 소리. 산호가 읏, 신음을 흘리며 제 가슴을 빨고 있는 시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럼… 평생, 흐읏, 안 믿어줄 거예요.”
산호가 가쁘게 숨을 뱉으며 속삭였다.
“안…믿을래. 하으… 평생 선배가 나만 가둬놓고, 나만 만지게.”
산호의 손가락이 덩굴처럼 얽혀 시우의 머리카락 사이를 온통 헤집었다. 시우가 이를 내어 유두를 살짝 긁어내리자 시우의 머리를 감싼 산호의 손끝에 더욱 힘이 실렸다. 시우는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자신의 타액으로 촉촉하게 젖은 분홍빛 유두는 탐스러운 과일 같아 보였다. 사랑스럽다는 듯 그곳에 가볍게 입술을 쪽 부딪혔다. 그리고는 제 머리에 얽힌 산호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
“응. 그래. 나 너만 보고, 너만 만질래.”
“…선, 배.”
“이제 네 옆에서 절대 안 떠나.”
시우는 맑게 웃으며 산호의 위로 제 몸을 겹쳤다. 그리곤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산호를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제 안에 온전히 가두려는 듯이.
“백산호 이제 완전히 내 거야.”
“…응, 선배, 거….”
“그러니까, 산호야.”
세게 끌어안은 산호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살며시 대곤 시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나가자.”
“…….”
“겁먹지 마, 괜찮아.”
“…선배.”
“아니, 겁먹어도 괜찮아. 내가 너 납치하는 거니까.”
시우는 다시 한번 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결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입술 위에서 살며시 미끄러졌다. 산호가 천천히 고개를 올려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산호의 얼굴이 홀연히 가까워져 오는 것을 보았다.
“네.”
산호가 시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댔다. 언제 닿았는지 모르게 금세 멀어졌지만, 탄력 있는 입술의 감촉이 아직 자신의 입술 위에 남아있었다.
“그럴게요.”
시우는 나른하게 웃어보였다. 일요일, 일주일의 마지막이었다. 자신과 산호는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이곳을 나갈 것이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을 터다. 비로소 이 아이를 제 안에 가두었으니까. 이것은 탈출이 아닌 또 다른 구속이었다. 어쩌면 더 지독하게 서로를 속박할 또 다른 구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