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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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는 그대로 방 안에 머물렀다. 한 번 시우를 잔뜩 경계하며 나갔다 돌아온 것이 전부였다. 음식 트레이를 들고 들어오는 산호를, 시우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탈력감이 몰려왔고, 그보다 더 큰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가려는 시도 자체가 두려웠다. 일부러 계단에서 구를 만큼 산호는 절박했다. 또 자신이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산호가 어떤 행동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산호는… 자신이 다치면 시우가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대로 시우가 도망쳐버리면 어쩌려고 그런 위험한 짓을 했을까.
꼼짝없이 소파에 앉아 산호를 바라보던 시우는 소파 헤드에 머리를 눕히며 눈을 감았다.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눈을 감은 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부드럽고 묵직한 촉감에 눈을 살며시 뜨자, 산호가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밥 먹어요.”
깃털처럼 가볍게 안쪽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길은 야릇하다기보다는 장난스러웠다. 시우가 미동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확인하자 산호는 가볍게 웃었다.
“얼른요. 약속했잖아요. 밥 먹는 거 지켜보기로.”
시우가 천천히 허리를 세우자, 산호도 몸을 바로 세웠다.
“억제제 가져다준 거 아니잖아.”
“애초에 러트도 아니었잖아요.”
쓸모없는 논쟁이었다. 시우가 한숨을 쉬자 산호가 시우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 주었다.
“이거 선배가 좋아하던 거잖아요.”
윤기나는 샤리와 그 위에 먹음직스럽게 올라와 있는 회. 시우는 고급스러운 눈앞의 음식을 바라보며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를 빤히 바라보는 산호를 보니 거부하기도 쉽지 않았다.
“……같이 먹어.”
시우의 말이 엉뚱하다고 생각했는지, 산호가 눈을 동그랗게 올려 떴다. 그러더니 푸흡, 하고 웃는다.
“됐어요. 전 괜찮….”
“그럼 나도 안 먹어.”
흡사 어린애 같은 투정이었다. 산호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속내를 파악하려는 듯 시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같이 먹어요.”
시우가 산호에게 가만히 자신의 젓가락을 내밀었다. 그러나 산호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요. 먹여주세요.”
“…….”
“같이 먹자고 한 건 선배예요.”
조금 기가 막혔다. 하지만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자신이 더 기가 막혔다. 시우는 가만히 스시 하나를 들어 산호에게로 내밀었다. 산호의 눈꼬리가 기분 좋게 휘었다. 주춤거리면서 입을 살짝 벌리는 것이 부끄러워하는 듯도 보였다. 입 안으로 넣어준 스시를 오물오물 씹으며 산호의 눈꼬리는 더욱 휘었다.
그래, 예전에도 보았다. 이 애가 통통해진 볼로, 꼭 다문 입술로 오물오물 이 음식을 씹던 모습을.
“선배가 좋아할 만해요. 여전히 맛있네.”
“…….”
“선배도 얼른 먹어요.”
시우는 잠자코 산호가 잡아끄는 대로 스시 한 조각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때요? 입에 맞아요?”
“…….”
“어? 별로예요?”
“…….”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 음식 선배가 좋아했….”
“맛있어.”
시우가 조그맣게 대답하자, 산호가 활짝 웃었다. 응, 다행이에요. 오밀조밀하게 놓인 음식과 시우를 번갈아 바라보는 산호의 작은 얼굴. 그 얼굴을 시우는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도 믿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음식은 맛이 있었다. 기계적으로 씹고 삼켰던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시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산호는 정성스레 시우의 손 붕대와 발의 거즈를 갈아주었다. 시우가 거절하려고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입술을 앙 다문 채로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결국엔 산호가 원하는 대로 될 터였다. 시우는 산호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소파에 앉았다.
깨진 접시 조각을 쥐었던 손바닥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산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상처를 바라보고는 꼼꼼히 소독약을 올렸다. 이거, 꿰매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시우를 올려다보는 눈이 울상이었다. 전 바느질 잘 못하거든요. 시우가 손을 비틀어 빼려고 하자 산호가 힘을 주어 시우의 손을 고정했다. 뭐, 살은 원래 가만히 두면 붙는 거랬어요. 다시금 붕대를 감는 손길이 사뭇 정성스러웠다.
발의 상처는 정말 별것 아니었다. 산호도 이번에는 소독약과 연고만 발라줄 뿐, 거즈를 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많이 아픈 건 아니죠? 고개를 갸웃하며 묻기에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호가 안도한 표정으로 웃었다.
시우가 침대에 눕자, 산호가 달칵 침실의 불을 껐다. 가만히 방을 나서는 것을 보니 씻으려는 모양이었다. 보살핌을 받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두컴컴한 침실 천장을 바라보며 시우는 눈을 깜빡였다.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동공이 거무스름한 윤곽을 그려냈다. 새하얀 천장과 천장에 매달린 전등을 바라보며 생각을 더듬었다. 지금 자신의 마음에 대해.
“…….”
지금 난 무슨 마음인 걸까. 시우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는 곳에 갇혀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가능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시우의 기분은 분명 나쁜 쪽은 아니었다. 어쩌면 좋은 것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 한 침대에 눕는 것이 본래 기분 좋은 일이던가? 이 상황을 잊을 만큼? 깜빡이던 눈꺼풀이 점차 무르게 움직였다. 하루간 온통 긴장되었던 몸에 졸음이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침대의 매트리스에 탄성이 느껴졌다. 설핏 잠이 든 상태에서 시우는 팔을 뻗어 옆을 더듬었다. 방금 씻고 온 게 분명한 뽀송한 몸이 손끝에 닿았다. 매끄러운 피부 결을 만지는 건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시우의 뻗은 팔을 부드럽게 끄는가 싶더니, 그 위에 자그마한 머리가 기대어졌다. 머리카락이 스치자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잘 자요, 선배.”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며 산호가 조용히 속삭였다. 자신의 팔을 베고 누운 산호. 그리고 그런 산호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단향. 무심결에 산호의 허리를 끌어안으려는 듯 시우의 손이 뻗어졌다. 허공에서 우뚝 멈춘 손이 움찔했지만, 그 손이 산호의 허리를 감는 일은 없었다.
“…….”
너도, 잘 자. 머릿속으로 읊조렸다. 감금당한 사람이, 감금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언제까지 이 애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있을지, 언제까지 이 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은 욕구를 견딜 수 있을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
10살의 여름. 시우는 정원이 딸린 마당에서 잔디 위에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며 놀고 있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은 시시하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시우가 가장 아끼는 소방차 모형이었다. 제법 정교해서 꼭 진짜 소방차를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기다란 소방차의 사다리를 쭉 뽑는 순간, 시우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무릎을 굽혀 앉은 채 시우는 제 앞에 선 이를 올려다보았다.
‘…어, 안녕.’
처음 보는 아이였다. 키는 시우보다 작았고, 나이도 시우보다 어릴 것 같았다. 동그랗고 통통한 볼에 옅은 홍조가 올라있었다. 피부가 무척이나 희어서 더욱 도드라지는 것 같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시우가 인사를 건넸지만, 그 아이는 고개만 갸웃할 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놀러 왔어?’
도리도리.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신기한 것을 구경하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시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우가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누구야? 누구랑 왔어?’
시우가 궁금한 듯 묻자 아이는 손을 들어 정문을 가리켰다. 커다란 정문에는 사용인 두어 명이 나와 있었고, 부모님의 비서 역시 서 있었다. 그리고 어떤 여자가 그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저 아줌마랑 같이 왔어?’
아이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가 빙그레 웃었다.
‘같이 놀래?’
허리를 굽혀 소방차 모형을 들어 보였다. 또래의 남자애들 중 이 소방차 모형을 싫어하는 아이는 없었다. 다들 눈을 반짝이며 만져보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이 아이는 모형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저 시우만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왜? 이거 별로야? 멋있는데.’
시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이가 손을 뻗어 시우의 뺨을 쿡 찔러왔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깜짝 놀란 시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이가 시우를 따라 고개를 갸웃했다.
‘예뻐서.’
처음 듣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예쁘다니. 뭐가?
‘너 되게 예뻐.’
시우에게 낯선 칭찬은 아니었다. 종종 들어왔던 말이었다. 그래도 자신은 남자니까, 예쁘다는 말보다 멋지다는 말이 더 좋긴 했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 역시 기분 나쁜 말은 아니니까. 시우는 픽 웃었다.
‘네가 더 예뻐. 도자기 인형 같아.’
‘도자기 인형?’
‘어. 하얗고 매끄럽고, 아무튼 되게 예쁜 거 있어.’
아이는 시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새까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한테서.’
‘응?’
‘되게 좋은 냄새 나.’
그리고 다음 날, 시우는 알파로 발현했다. 우성이었다.
***
주치의는 지금 시우가 가장 최근의 것이거나, 크게 스트레스를 준 일에 대한 기억을 잃은 것이라고 설명했었다. 십여 년 전 알파로 발현했던 날의 기억은 오롯이 가지고 있었다. 어떤 아이가 집에 찾아왔었고, 그 아이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아니었는데, 그다음 날 알파로 발현했던 터라, 그 일이 뇌리에 새겨진 모양이었다. 어렴풋이 그 아이에게서 아주 좋은 냄새가 났었던 기억이 났다. 무슨… 냄새였더라? 그 아이가 나에게 좋은 냄새가 난다고 말해주어서, 나도 너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말해주려 했었는데. 결국 그 말을 해주었는지, 해주지 못했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했다.
시우는 가만히 눈을 떴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팔을 베고 누운 산호였다. 아기처럼 몸을 웅크린 채 옅은 숨을 쉬고 있었다. 산호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
시우는 움직임 없이 눈만 깜빡였다. 잠든 산호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잠든 산호를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무척 모순된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새삼 산호의 이목구비가 무척이나 예쁘다는 생각이 스쳤다. 자그마한 얼굴이 오밀조밀했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느낌이라기보다는 청순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때로는 더 색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왜 진작 오메가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을 잃은 지금에야 눈치채지 못했지만 원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산호를 알던 과거의 진시우는.
“…….”
한 번만 안아볼까. 그냥 미친 척, 잠결에 뒤척이다 닿은 것처럼 안아볼까. 산호를 품에 안으면 어떤 기분일까. 처음 페로몬에 홀려 산호를 안았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지? 끔찍하게 달콤했던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시우는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눈을 길게 감았다.
산호와 맞닿아 있는 부분은 뺨을 대고 있는 팔 뿐이었지만, 그곳에서부터 간지러운 감각이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갈증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견디는 건 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
성기가 꿈틀대며 맥동했다. 아침이면 으레 일어나는 평범한 생리현상이 아니었다. 시우는 흥분감이 저를 천천히 잡아먹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정말 단단히 미친 걸까. 이렇게 평온하게 자고 있는 이 애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어서 일어나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선배?”
그때 산호가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한쪽 눈이 빠끔 뜨이고 눈을 찌르는 햇빛에 눈썹이 찌푸려진다. 그러나 곧 시우를 바라보고는 산호는 입꼬리를 둥글게 휘었다.
“잘 잤….”
잠에서 깨어나면서 느른히 이완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오메가의 페로몬이 살짝 새어 나왔다. 마치 하품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산호는 곧바로 페로몬을 갈무리했지만,
“선배?”
이미 상황은 어떤 분기를 지난 후였다.
시우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시우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뒤로 물렸다. 침실 벽에 등을 쿵 찧을 때까지 뒷걸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산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은 거두지 못했다. 몸은 뒤로 물리고 있었지만, 산호를 바라보는 눈은 당장에라도 산호에게 달려들 것 마냥 이글거렸다.
“…왜 그래요?”
아주 잠시였지만, 오메가의 페로몬을 들이마신 게 문제였다. 찰랑찰랑한 물컵에 단 한 방울의 물이라도 더 들어차면 물이 와르르 넘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나가.”
“갑자기 왜 그러는데요.”
“빨리. 지금 당장.”
“갑자기 무슨 소릴-.”
결과적으로 시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러트, 온 것 같아.”
산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황으로 얼룩진 눈이 시우를 향했다. 시우의 상태가 이상한 것은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꾹꾹 눌러 참고 있지만, 미처 누르지 못한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산호 역시 난폭한 페로몬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눈썹을 찌푸렸다.
“러트… 확실해요?”
하지만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한 번 터져 나오기 시작한 페로몬이 조금 더 몸집을 부풀렸다. 예민한 오메가의 몸이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리 없었다. 산호가 입술을 깨물며 시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뒤로 물렸던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시우를 향해 다가오며 산호가 조용히 말했다.
“선배.”
“지금, 나, 가라고 했잖아.”
“나 안아요.”
“…하.”
마침내 벽에 기댄 시우의 앞에 다다른다. 산호가 시우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이었다. 안아주세요. 괜찮으니까. 커다란 손으로 얼굴 한쪽을 덮은 채 인상을 가득 찌푸리고 있는 시우는 상처 입은 짐승 같아 보였다. 다친 짐승은 오히려 경계하고 털을 세운다. 지금 시우의 모습이 그것과 퍽 닮아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나를 안으면 되니까. 산호가 다친 짐승을 달래듯이 손을 뻗었다.
위로 뻗은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색이 옅은 시우의 머리카락이 산호의 손가락 사이에 부드럽게 감겼다. 거친 숨소리가 산호의 손목에 여과 없이 닿는다. 산호가 부드럽게 시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을수록 시우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흐읏.”
부드럽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산호의 손을, 시우가 얼굴을 덮었던 손으로 거칠게 잡아챘다. 커다란 손아귀에 잡힌 손은 곧 발갛게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시우는 그대로 그 손을 잡아당겨 산호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탄탄한 팔에 산호의 허리가 감겼다. 하체가 달싹 붙자, 오메가 역시 예민하게 반응했다. 허리를 바르르 떨며 산호가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흣, 선…배.”
“…억제제… 가져와.”
“전 괜찮….”
“아니, 억제제 가져와.”
“선배.”
시우가 허리를 감지 않은 손을 천천히 내려 산호의 상의 속으로 밀어 넣었다. 판판한 배 위에 시우의 커다란 손이 올랐다. 부드러운 손길인 것 같기도, 무척 난폭한 손길인 것 같기도 했다. 골반을 쓸고 배꼽 아래 납작한 아랫배를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으며 시우가 눈썹을 찌푸린다. 짐승이 짝짓기 상대를 몰아붙이듯이 시우가 산호의 귓바퀴를 아득 씹었다.
“하으…!”
“억, 제제 없으면 너 다쳐.”
“으읏… 괜찮, 다니까요.”
배 위를 지분거리던 손길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자신이 잇자국을 낸 귓바퀴를 혀끝으로 핥아 올리며 시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자궁 망가지고 싶은 거 아니면, 빨리.”
“…하응…으!”
허리를 감았던 손이 기립근을 따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본격적인 러트가 시작되면, 접촉한 오메가 역시 흐무러질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달아오른 산호의 이성이 빠르게 휘발되고 있었다.
“괜찮…아. 망…가져도.”
산호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시우가 다시 산호의 귓바퀴를 잘근 씹었다. 이번엔 조금 약하게, 간지러울 정도로. 하지만 묵직하게 배 위에 얹은 손은 아랫배를 꾸욱 누른다. 요동치는 아기집을 손으로 쥐기라도 할 듯이.
“여기에 내 아이 품고 싶은 거, 아니었어?”
선배의 아이… 나와 선배의…
산호가 힘겹게 눈을 올려 떴다. 시우는 가늘게 눈을 내리뜨고 산호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산호 역시 모르지 않았다. 몸을 가까이 붙이고 있었지만, 어루만지는 것 외에 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시우가 자신의 욕구를 필사적으로 참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 금 가져 와. 억제제.”
무척이나 버거운 듯 허리에 감겨있던 시우의 손이 탁, 풀어졌다. 애써 산호를 밀어내는 손길이 무거웠다. 산호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시우를 바라보며 몸을 물리던 산호가, 침실 문가에 다다라서야 몸을 틀었다. 침실 밖으로 몸이 빠져나간 순간, 시우가 다급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쾅.
“선배!”
침실의 문이 거칠게 닫혔다. 제 앞에서 쾅 닫히는 문을 망연히 바라보는 산호의 얼굴이 새하얬다. 시우가 더듬거리며 문고리의 잠금까지 걸자, 산호가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선배! 뭐하는 거예요?!!!”
어금니를 깨물며 시우가 문에 이마를 기댔다. 거친 숨이 마구 쏟아졌다. 잠시 산호와 몸을 맞대고 있던 짧은 시간동안 겨우 눌러 참았던 페로몬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어쩌려는 건데!!!”
충실한 욕망이 원하는 대로 당장이라도 이 문을 열어젖히면, 저 애는…
“…떨, 어져 있어.”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손길이 다급했다. 시우가 밭은 숨을 뱉으며 몸을 돌려세웠다. 문에 등을 기대고 주르르 주저앉는다.
“선배!!!”
“억제제… 못 기다릴 거야.”
문을 두드리던 손길이 잦아들었다. 산호 역시 시우의 의도를 파악했다.
억제제를 먹는다 한들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빠르게 약물이 흡수된다고 해도 30분 정도는 걸릴 것이고, 시우는 그간의 시간을 견딜 자신이 없는 것이다.
“문 열어요. 당장.”
크윽, 신음을 삼키며 시우는 눈을 감았다.
“씨발, 선배! 문 열라고!!!”
“산호, 야.”
“선배.”
“부탁이니까… 멀리 떨어져 있어.”
그래야, 내가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으니까. 뒷말을 씹으며 시우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제발 문 열어요.”
“너한테… 결국 너한테 손대고 말 거야.”
쾅, 다시 한 번 문이 거세게 흔들렸다. 무슨 상관인데! 그냥 나를 이용해, 그러면 되잖아!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아득 깨물며 시우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안돼, 너를… 너를 다치게 할 거야. 흥분한 내가, 이성을 잃은 내가, 네 안의 장기를 찢어발길 만큼 쑤시고 박아댈 거야. 멈추지 못할 거야. 내가 너를 잡아먹고 말 거야.
이성을 잃은 알파가 어떤 식으로 오메가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지 시우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갇힌 후로 해소하지 못한 욕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난폭했다. 지금 자신은 발정한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너를, 너를 이런 식으로 안지 않을 거야. 나는 너를…
쿵쿵 울리는 머리를 끌어안으며 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러트사이클이 올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우가 했던 거짓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오메가의 페로몬에 노출되면 일시적으로 주기가 당겨지기도 한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닌, 노출된 페로몬의 영향으로 찾아오는 러트는 일반적인 러트보다 더욱 알파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자신은 무척이나 위험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간이 짧다는 것쯤일까.
일반적인 러트는 2~3일 정도 지속됐지만, 이런 경우라면 하루 남짓 지속될 터였다. 물론 욕구와 고통은 시간에 반비례하여 더욱 클 테지만.
“선배, 제발….”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과 알파의 러트 사이클은 기본적으로 다른 구조였다. 하지만 주체가 느끼는 고통은 비등했다. 산호는 억제제 없이,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고 사이클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었다.
시우의 페로몬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전에 없이 광분한 페로몬의 발광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손끝이 잘게 떨리고,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기분이었다. 형질을 연구하는 학계에서는 더러 이 현상을 ‘폭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늘 억제제를 먹으며 주기적으로 러트를 보내온 시우에게 이 선명한 욕구는 일종의 폭력이었다.
“흐읏.”
성기가 아랫배에 닿을 만큼 꼿꼿이 섰다. 여전히 이를 깨물며 시우는 자신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체액에 젖은 귀두는 이미 번들번들했다. 힘줄이 불끈 돋은 성기가 흡사 흉기처럼 꺼덕였다. 거칠게 성기를 쓸면서 시우는 눈썹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으윽.”
문 너머 산호의 기척이 느껴졌다. 더이상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지만, 시우와 마찬가지로 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굳게 문이 닫혀있는 이상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직감으로 알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두터운 문의 두께가 공간을 가르고 있다곤 해도, 가까운 거리에 산호가 있다는 사실은 시우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성기를 쥔 손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산호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수음했다. 산호를 떠올리며 하는 두 번째 수음이었다. 기다란 손이 자신의 성기를 감싸고 관능적으로 흔드는 상상. 그 손이 자신의 체액으로 흠뻑 더럽혀지는 상상은 시우의 이성을 순식간에 잡아먹었다. 어쩌면 산호의 입술을 동굴처럼 벌려 그 안에 성기를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산호는 발간 혀를 내여 성기의 아랫기둥을 핥고 입술을 옴츠려 귀두를 빠듯하게 조일 것이다. 따뜻하고 축축한 점막에 사정없이 귀두를 비벼대는 상상, 그리고 작은 머리가 앞뒤로 움직이며 그것을 빨아올리는 상상. 참지 못하고 성기를 쾅, 박아 넣으면 좁은 목구멍이 짜릿하게 그것을 조일 터다. 그러면 산호는 살짝 찌푸려진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겠지.
“크으읏.”
눈가는 발갛게 짓무르고, 어쩌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눈가가 축축하게 젖은 산호를 바라보며 자신은 산호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헤집을 것이다. 자신의 성기를 물어 불룩해진 산호의 볼, 그리고 자신이 쏟아낸 정액이 산호의 얼굴로 후드드 쏟아진다. 붉은 입술에, 기다란 속눈썹에 백탁액을 매달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산호의 얼굴이 선명했다. 선배, 더요. 더 더럽혀주세요. 천박한 말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청순한 얼굴로.
시우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문 채 자신의 머리를 뒤로 젖혀 문에 쿵, 쿵 찧어댔다.
누군가를 상상하며 욕구를 쏟아내는 행위는 엄청난 배덕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상대가 산호라는 사실이 더욱 성감에 불을 지핀다.
내가 이렇게 상상으로라도 너를 범하면, 나 역시 그 새끼들이랑 다를 게 뭐가 있어.
그러나 발정한 알파의 욕구는 이성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 상상 속에서 흐트러진 얼굴로 개처럼 엎드린 산호의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자신의 탄탄한 가슴이 산호의 등에 닿고, 커다란 손이 꼿꼿하게 솟은 산호의 유두를 사정없이 비튼다. 손톱으로 꾸욱 누르면, 하악 새된 신음이 터질 것이다. 고개를 젖히고 입을 벌리면서. 그러면 고개를 틀어 입술을 타고 흐르는 타액을 빨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엉망으로 흐트러진 입술 새에 성기를 밀어 넣듯 손가락을 넣어 희롱할 수도 있겠지. 제 아래 구멍처럼 빠끔대는 사랑스러운 입 안에.
산호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신의 성기를 세게 짓쳐 넣고 싶었다. 퍽, 퍽,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자신의 사타구니에 난폭하게 부딪힌 산호의 엉덩이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떠올렸다. 산호는 어떤 얼굴로 울까. 벌름거리는 구멍에 기어이 성기를 밀어 넣으면, 또 그 성기가 내벽을 주욱 긁으며 빠져나갔다가 다시 세게 쿵, 쑤셔 박히면, 그러면 그 애는 어떻게 울까. 싸구려처럼 천박하게 허리를 흔들까, 아니면 애처롭게 안겨 올까.
“흣.”
짧은 신음과 함께 시우의 성기에서 퓻, 하고 정액이 쏟아졌다. 많은 양의 정액이 꿀렁꿀렁 흘러내려 바닥을 가득 적셨다. 숨을 길게 뱉으며 시우가 눈을 아래로 내려 떴다. 자신이 배출한 욕망의 덩어리가 끔찍했다. 하지만, 러트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첫 러트를 경험한 건 고등학생 때였다. 몸이 이상하게 달아올랐고, 숨이 가빠왔다. 페로몬을 제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애써 갈무리해보아도 소용없었다. 이런 게 러트인걸까. 시우가 연신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시우의 페로몬을 감지한 사용인이 다가왔다. 오래전부터 시우가 알파로 발현할 거라 기대했던 부모님이 시우를 위해 고용한 오메가였다. 그녀는 시우보다 8살 정도 많았지만, 얼굴은 몹시 앳되었다. 그녀는 물과 페로몬 억제제를 건네주며 억제제가 효과를 보일 때까지 견디기 힘들면 자신을 안아도 된다고 말했었다.
시우는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많은 알파들이 오메가를 도구처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옳지 못한 일이었다. 욕구의 배출 용도로 오메가를, 아니 사람을 이용한다는 것은. 시우는 숨을 헐떡이며 침대 위로 쓰러졌고, 억제제가 효과를 보일 때까지 몹시도 앓았었다.
그 이후로 시우는 단 한 번도, 미리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고 러트를 보내지 않았다.
침대의 시트가 피부에 닿는 느낌마저도 자극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벽을 세게 내리친 것을 제외하곤 시우는 죽은 듯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형질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는 일견 평화로운 모습으로 착각할 법도 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감은 눈은 미동이 없었고, 간혹 이를 깨물거나 눈썹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몸을 뒤척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산호는 알고 있을 것이다. 닫힌 문 너머 흉포한 페로몬이 얼마나 거세게 날뛰고 있는지를.
“…….”
산호가 근처에 있지 않기를 바랐지만, 시우는 아직도 산호가 문밖에 오도카니 앉아있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가끔 견디기 힘들 때면 미약하지만 자신을 보듬는 듯한 오메가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성이 몹시도 흐릿해서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알파와 오메가는 상호작용이었다. 서로의 이성을 무너뜨리고, 서로의 본능을 이끌어내지만, 결국에는 망가진 서로를 치유한다.
“……산호야.”
시우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문밖에 산호가 있다 해도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
하지만 시우는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걱정이 되어서일까. 자신이 산호의 영향으로 러트를 맞이한 것처럼, 산호 역시 지금 자신의 러트로 인해 히트를 맞이할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오메가는 알파보다 페로몬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악질적인 오메가 클럽에서는 일부러 오메가에게 알파의 페로몬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킨 후 욕구만 남긴 채 이성을 거세시켜 성 노리개로 삼는 경우 또한 흔했다.
형질인들은 전체 인구의 5%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5%의 세계 또한 또 하나의 세계였다. 사실상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이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쩌면 하루가 꼬박 흘러갔을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달콤한 향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한 이후로, 시우는 다시 까무룩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햇빛이 기분 좋게 뺨을 어루만졌다.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밝은 빛이 저를 부드럽게 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우는 천천히 일어났다.
“…….”
몸이 거짓말처럼 가뿐했다. 러트는 끝났다.
양손을 펼쳐보았다. 세게 주먹 쥐었던 손바닥에 반달 모양의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다른 손에 감겨있는 붕대에는 척척하게 핏물이 배어있었다. 상처가 벌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꾸욱 쥔 탓일 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큰 고통은 없었다. 쿡쿡 쑤시는 정도의 미약한 고통뿐이었다.
시우는 천천히 침실 문을 응시했다. 여전히 꾹 닫힌 채 미동 없는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철컥, 잠금이 풀어지고 문고리가 돌아가자 문틈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까만 머리카락이었다. 이어 가지런한 속눈썹과 내려앉은 눈꺼풀이 차례로 들어왔다. 문 앞에 몸을 말고 누운 산호가 색색 숨을 뱉으며 잠들어 있었다. 시우의 러트가 끝날 때까지 문 앞에 몸을 옹송그린 채 시간을 보냈을 모습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시우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 애를 정말 모르겠다.
이 애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나와 자고 싶은 걸까. 단순히 나와 몸을 섞고 싶은 걸까.
그렇다면 왜,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을까. 잠금장치는 침실 안쪽에 있었지만, 들어오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이따위 문고리 부셔서라도 들어올 수도 있을 텐데. 나를 가둘 만큼 맹목적이면서. 단순히 알파와의 섹스를 원하는 오메가의 행동이라고 보기에, 산호의 행동은 모순 투성이었다.
무언가, 조금 다른 이유가 있을…
그렇다면, 지금 나는. 나는 뭐지?
모순된 행동은 산호뿐 아니라 시우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마음속에서 자신이 애써 외면한 의문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나가려고 마음먹으면, 여기서 나갈 수 있잖아. 이 애의 얇은 목을 쥐어서라도.
시우는 잠든 산호에게 허리를 굽혀 가까이 다가갔다. 산호의 체향은 자신의 페로몬과 제법 닮았다. 산호의 페로몬이 지나치게 색기 넘친다고 한다면, 체향은 그에 반해 풋풋한 느낌에 더 가까웠다. 이제 막 살이 오르기 시작한 과일 같은 향. 베어 물면 아직은 떫은맛이 남아있을지 모를 만큼 완숙하지 않은 것. 시우의 손끝에 산호의 까만 머리칼이 닿았다.
“…….”
산호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면서 시우는 작게 숨을 내뱉었다. 어깨와 무릎 오금 아래 팔을 밀어 넣어 산호를 안아 올렸다. 무겁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그것이 조금 짜증스러웠다.
시우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누워있었던 침대 위에 산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침대의 탄력 좋은 매트리스가 기분 좋게 출렁였다.
“산호야.”
잠든 산호의 숨이 조금 가빴다. 시우는 산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널 좋아했어?”
“…….”
“우리, 무슨 사이였어?”
“…….”
“왜 내가 이렇게 너를 안고 싶은지, 그리고 그걸 왜 이렇게까지 참고 있는지.”
“…….”
“왜… 너를 안는 게 이렇게 무서운지, 기억나게 해줘.”
마치 시우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처럼 산호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까만 동공에 맺힌 초점은 흐릿했지만, 시우를 발견하고는 이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선배.”
“…응.”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거, 해봐요.”
“…….”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금 제일 마음 가는 거 해보라고.”
“…….”
“…….”
“…….”
한동안 산호를 빤히 바라보던 시우가 아주 천천히 허리를 숙여왔다. 산호의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왔다. 짧은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진다고 생각했을 때, 시우의 입술이 산호의 입술에 부드럽게 겹쳐졌다.
“…선배.”
“…….”
“나도 알고 싶어요. 선배가 날 좋아했는지.”
“…….”
“아니면 그냥 내가 불쌍했었던 건지.”
“…….”
“기억 못해도 괜찮아요.”
“…….”
“내가 다 기억하니까.”
기억.
그래, 그 기억. 시우가 사고로 잃어버린 것. 그 시작은 1년 전이었다.

আৱদ্ধ ফেৰ'মন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