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긴 눈 너머로 흐릿한 영상이 홱홱 지나갔다. 캠퍼스, 연못 앞, 번화한 대학로의 거리, 꽃집이나 카페. 기억나지 않는 장면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시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걸까. 수마가 해일처럼 밀려온 건, 산호가 자리를 벗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비틀거리듯 침대에 앉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흐릿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을, 그것도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을 과도하게 뒤집어쓰고 치받는 욕구를 해소하지 못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지독한 수마는 일종의 반작용이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자신의 손에 붕대가 감겨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산호를 벽에 밀치면서 부딪힌 손이었다. 산호의 머리를 감싸 안은 건 순간적인 행동이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법 세게 부딪힌 것도 사실이었다. 뼈에 이상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욱신거리는 통증은 미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손에서 눈을 뗀 후 돌아본 산호의 침대는 텅 비어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텅 비어있는 건 아니었다. 곱게 개어진 시트 위에 네모반듯한 트레이가 올려져 있었다. 트레이에는 방금 전 두고 간 듯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죽과, 라벨 없는 생수병, 그리고 소주잔 정도 크기의 투명 플라스틱 컵이 놓여있었다. 연한 하늘색 알약 두 개가 컵 안에 담겨져 있었다.
‘누워있어요. 약 가져다줄 테니까.’
이게 산호가 말했던 약일까. 그렇다면 페로몬 진정제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걸 먹어도 되는 걸까? 확신할 순 없었다. 시우는 붕대가 감긴 손으로 눈썹 뼈를 꾹꾹 누르며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
정갈하게 담긴 죽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문득 식사를 한지 제법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기가 질 법도 한데,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시우는 가만히 플라스틱 컵을 들어 하늘색 알약을 손바닥 위에 올려 보았다. 시우가 복용하던 페로몬 진정제와 생김새가 달랐다.
페로몬제의 종류는 다양했다. 강도나 복용법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알약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고, 가루약이나 물에 타 먹는 물약도 있었다. 의료용이 아닌 보조제까지 따진다면 수는 더 많았다. 기다란 포에 담긴 겔이나, 젤리 형태는 물론, 암암리에 거래되는 독한 담배형까지. 시우는 한동안 손바닥 위의 알약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플라스틱 컵 안으로 약을 툭 떨어트렸다.
결국 시우가 트레이 위에서 선택한 건 고작 생수 한 병이었다. 두어 모금 물을 넘기고 나자, 자신이 몹시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한 모금을 더 마신 후에야 시우는 자신이 묶인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손바닥만 한 창문에 붉은 하늘이 비쳤다. 아마도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곳에 갇힌지 얼마나 된 거지? 하루는 꼬박 넘긴 걸까? 여전히 이질적인 발목의 족쇄와, 족쇄에 이어진 쇠사슬을 망연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을 가둔 건 산호가 분명했다.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산호를 알고 있었나?
저를 유혹하던 산호의 행동과 드문드문 흘린 말을 떠올리면 자신과 산호는 관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잃어버린 기억 어딘가에 감금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영상들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캠퍼스. 단과대 앞. 정돈이 잘 되어있는 연못가. 그 앞 벤치에 말가니 앉아있는 산호. 누구에게 물어뜯기기라도 한 듯 부르튼 입술. 그리고 담배.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다시금 수마가 거세게 덮쳐오고 있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손바닥만 한 창문 밖은 이미 새까만 어둠이 깔려 있었다. 달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지 어스름한 빛이 네모난 창문의 모양을 그려냈다.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옆의 침대 위에 놓인 트레이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샌드위치 두 조각과 과일, 그리고 마찬가지로 투명한 컵에 든 알약이었다. 생수 역시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목이 견딜 수 없이 까끌거렸다. 지독한 갈증을 느끼며 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세히 보니 투명한 컵 안에 든 약이 바뀌어 있었다. 타원형 하늘색 알약이 아닌, 원형의 하얀 알약. 시우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생수만 두어 모금 들이켰을 뿐이다. 시우는 다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붕대가 감긴 손이 참을 수 없이 욱신거렸다.
***
부드러운 깃털이 다정하게 손을 어루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기분이 좋아지는 손길이어서 시우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누워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가까스로 눈꺼풀을 밀어 올리니, 자신이 누운 침대 아래 누군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 어릿하게 보인다. 그는 시트 위에 올려져 있는 시우의 손에 새로운 붕대를 감고 있는 중이었다.
“너…!”
시우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붕대가 감긴 손으로 저를 만지던 손목을 우악스럽게 말아 쥐었다. 큰 손이 갑작스레 저를 움켜쥐는데도 그는, 산호는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깼어요?”
“뭐 하는 거야.”
산호의 눈길이 아래를 향했다. 제 손목을 잡은 시우의 손을 바라보고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보면 모르나.”
태연한 목소리. 시우는 벌컥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누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얘기 좀 해.”
산호가 시우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어 뺐다.
“밥은 왜 안 먹어요?”
하긴, 이 상황에서 밥이 넘어가면 그건 그거대로 웃기겠네. 산호가 작게 덧붙이더니, 옆에 놓인 트레이를 끌어왔다. 트레이 위에는 새로운 식사가 올려져 있었다. 잘게 썬 비프스테이크와 봉긋하게 부푼 빵, 그리고 가니시로 곁들인 야채였다. 마찬가지로 투명한 컵에 담긴 약 역시 바뀌어 있었다. 이번엔 노란색 알약이었다.
“그래도 먹어요.”
“…생각 없어.”
“단식 투쟁해요? 알파는 튼튼하니까, 이런 거 안 먹어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삐뚜름한 미소를 띤 얼굴로 산호가 시우를 바라보았다. 뻣뻣하게 굳은 시우의 얼굴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산호는 트레이를 시우의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데요.”
투명한 컵에 담긴 노란색 알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우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이유가 있잖아.”
“무슨 이유?”
“나한테 이러는 이유.”
“…….”
“네가 나를 가둔 이유.”
내가 선배를 가둔 이유… 산호가 시우의 말을 곱씹듯 읊조렸다. 픽, 작은 웃음이 샜다. 시우를 올려다보는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이렇게 해요.”
“…무슨.”
“이거 다 먹으면 선배 질문에 대답해줄게요.”
산호가 재촉하듯 턱짓으로 트레이를 가리켰다. 시우는 말없이 먹음직스러운 트레이 위의 음식을 바라보았다.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빨리요.”
산호가 한 번 더 재촉했다. 시우는 천천히 젓가락을 쥐었다.
“…….”
음식은 맛있었다. 아니, 맛있었을 것이다. 스테이크의 굽기는 적당했고, 가니시로 곁들인 야채도 훌륭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사실, 맛을 느끼는 감각이 퇴화한 걸까 싶을 정도로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기계적으로 씹고 삼킬 뿐이었다.
시우가 조용히 식사를 하는 동안 산호는 여전히 침대 아래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시우를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입가에 잔 미소가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펴기도 했다. 시우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듯 보였다. 즐거워 보이는 것도 같고, 애처로워 보이는 것도 같았다.
마침내 시우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산호가 투명한 컵을 내밀었다. 알약이 담긴 컵이었다.
“이것도.”
“…….”
“먹어요, 얼른.”
시우가 눈썹을 찌푸리며 산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젓거나, 먹지 않겠다는 부정의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명백한 거부의 의사였다. 산호 역시 이를 깨달았는지 컵을 내려놓고 트레이를 침대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샐쭉하게 입을 비죽이며 라벨 없는 생수병을 내민다.
시우가 굳은 얼굴로 생수병과 산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산호가 한 번 더 손을 내밀었다. 결국 작은 한숨을 쉬며 병을 받아들었다. 한 모금 물을 삼키자, 산호가 병을 건네받아 트레이 옆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이제 대답해.”
시우가 산호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산호는 한쪽 눈을 찡긋하듯 웃더니 태연하게 대답했다.
“뭘?”
“대답해 준다고 했잖아.”
“다 먹으면 대답해 준다고 했잖아요. 약 안 먹었잖아, 선배.”
키득키득 웃으며 산호는 시우의 무릎 위에 제 머리를 천천히 기대왔다. 도자기 인형같이 자그마한 머리가 단단한 허벅지 위에 닿았다. 까만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지고, 그 사이로 산호가 시우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둥글게 말았다.
“이상해요. 이렇게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뭐가 문제에요?”
오물거리는 입술의 감촉이 침대 시트를 사이에 두고도 확연히 느껴졌다. 시우가 허탈한 표정으로 산호를 내려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뭐가 말이 안 돼.”
장난치듯 대답을 이어가는 산호를 일으켜 세우려 시우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산호의 어깨에 시우의 손이 닿기도 전, 산호가 먼저 시우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곤 커다란 손을 제 뺨 위에 살며시 가져다 댄다. 손의 온기를 느끼려는 듯 길게 눈을 감는 것을 보았다. 눈꺼풀이 잘게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고, 시우 역시 매끄러운 뺨의 감촉을 느꼈다. 손가락 사이로 한 줄기 흐르는 물방울의 감촉까지 선명했다.
젖은 속눈썹을 올려 뜨며 산호가 시우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 누운 채로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도 밥 먹었으니까, 하나는 말해줄게요.”
“…….”
“저 약 비타민이에요.”
비타민… 이라고? 시우의 눈가가 움찔했다.
“진짜 약은.”
텅, 소리와 함께 가만히 세워두었던 생수병이 고꾸라졌다. 생수병 안에 담긴 물이 꼴꼴꼴 흘러내렸다.
“물에 탔거든요.”
산호의 뺨에 올라간 손끝이 움찔 떨었다. 시우의 손 등을 덮은 산호의 손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약 안 먹을 줄 알았어.”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듯한 어지러움이 엄습했다. 얽혀드는 산호의 손을 뿌리치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허리를 바로 세운 산호가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제정신인 선배를 어떻게 제압하겠어요. 안 그래요?”
“너, 이게…!”
“그래도 선배한테는 약이 잘 안 듣나 봐요. 이거 코끼리도 재우는 약인데, 선배가 생각보다 자주 깨더라고요. 역시 우성이라 그런가.”
시우가 비틀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철그럭 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몹시도 거슬렸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신이 점차 아득해져 갔다. 그래, 졸음이 밀려올 때 계속 이런 기분이었다. 바닥이 없는 아래로 한없이 끌어당겨지는 기분. 이대로 툭 쓰러져 눈을 감고 싶은 나른함. 하지만, 이렇게 또다시 쓰러지듯 잠들 순 없었다.
시우의 시야에 산호가 내려놓은 트레이가 들어왔다. 방금 전 시우가 음식을 비운 세라믹 접시. 시우는 단번에 접시를 들어 침대 프레임 위로 거세게 내리쳤다. 쩡, 하는 거친 파열음과 함께 깨어진 접시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선배!”
깜짝 놀란 산호가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시우가 조금 더 빨랐다. 부서진 접시 조각을 손바닥 안에 꾸욱 말아 쥐었다. 날이 선 조각의 단면이 시우의 손바닥을 사정없이 가르며 파고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놔요!”
붕대를 감은 쪽 손이었다. 하얀 붕대가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고, 꾸욱 쥔 시우의 주먹 끝에서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어떤….”
“그거 놔요. 놓으라고! 놔!!!!”
산호가 시우의 주먹을 풀기 위해 다급히 손을 쥐었지만, 힘으로 시우를 이길 수 없었다. 이를 아득 깨문 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자해를 하고 있는 시우를, 산호가 와락 노려보았다. 발긋해진 눈에 원망이 다글다글 뭉쳐있었다.
“그냥 진정제란 말야!”
산호가 바락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까무룩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똑, 똑,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입술을 콱 깨물며 산호가 습기로 어룽진 눈을 매섭게 올려 떴다.
“그냥 페로몬 진정제랑 수면제라구요.”
“…….”
“그러니까, 제발 그것 좀 놔요. 제발.”
꾹 쥐어졌던 시우의 손이 점차 느슨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씨발… 왜요, 내가 선배한테 독이라도 먹였을까 봐?”
피에 절은 접시 조각이 툭, 바닥으로 떨어지며 얄팍한 파열음을 냈다.
“선배 죽일 생각이었으면 벌써 죽였어. 이딴 소꿉장난 하지도 않았을-.”
“산호야.”
자신이 흘린 피 웅덩이를 밟으며 시우가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너… 누구야?”
“…….”
“말해. 네가 누군지.”
산호는 대답 없이 찢어진 시우의 손바닥을 제 손 위에 올렸다. 소중한 것을 보듬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생살 찢으면서 정신 차리려고 노력해도 소용없어요. 결국 잠들 테니까.”
“네가 누군지 말해줘. 내가-.”
“얌전히 잠들면 조금 더 편한 곳으로 옮겨줄게요.”
산호는 시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여긴 조금 살벌하잖아. 정신병원도 아니고. 그치. 맞아요, 여긴 선배도 불쾌할 거야.”
엉망으로 찢어진 붕대와 그 사이로 벌어진 시우의 상처를 바라보며 산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선배 손까지 묶어두게 하지 마요.”
산호의 목소리가 무척 슬프게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
습기 먹은 단내가 아지랑이처럼 시우의 몸을 감쌌다. 약기운이 돌아 몽롱한 와중에도 시우는 자신을 감싼 페로몬을 느낄 수 있었다. 섬세하게 시우의 몸을 훑는 페로몬은 성감을 돋우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보살핌의 느낌이 더 강했다. 상처 입은 알파에게 오메가의 페로몬이 때론 치료제로 작용하곤 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베였던 자신의 손바닥을 펼치는 손길이 어릿하게 느껴졌다. 차갑고 축축한 솜뭉치가 상처를 보듬었고, 그 위로 부드러운 천이 감싸졌다. 따뜻한 온기였다.
몇 번인가 몸이 덜컹거리는 것을 느꼈다. 바퀴 달린 침대를 끄는 것처럼 드르륵, 거리는 마찰음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물속에서 들려오는 소음인 마냥 웅웅거리고 미세한 것이었다. 불편함을 느끼는 게 당연할 텐데, 왜인지 불편하기는커녕 포근했다.
시우가 애써 가늘게 눈을 뜨니 조막만한 얼굴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은 깨지 마요. 작게 속삭인 것일지, 아니면 자신에게만 작게 들리는 것일지 모를 목소리가 울렸다. 곧 기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시우의 눈가를 쓸었다. 시우는 손길을 따라 다시 눈을 감았다.
이다음으로 눈을 뜬 건, 한참이 지난 후 커다란 침대 위에서였다.
“…….”
얇은 매트의 간이침대 같았던 하얀 방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침대였다. 애초에 방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호화로운 호텔의 스위트룸과 흡사해보였다. 바닥에는 푹신한 러그가 깔려있고, 시우가 누웠던 침대는 풀 사이즈에 탄성이 무척이나 좋은 것이었다. 침대 맞은편으로 커다란 액자가 걸려있었는데, 액자에 담긴 건 추상화였다.
“…….”
빨간색 물감이 중첩되어 있는 그림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이것도 잃어버린 기억 속에 남아있는 걸까? 시우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30시간 남짓이었지만 발목에 무거운 족쇄를 차고 있었던 터라, 무척이나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낯설은 무게감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목을 거머쥐었던 족쇄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묶여있지 않았다. 시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더듬었다. 혹시, 다른 무언가가 있나? 그러나 시우를 옭아매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시우는 다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자신이 잠들었던 방은 침실인 모양이었다. 방문 밖으로 커다란 응접실이 이어졌고, 그곳엔 널따란 소파와 스크린, 그리고 사무용 책상까지 보기 좋게 정돈되어 있었다. 취식을 할 수 있는 공간만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말 호텔의 스위트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문.
이 공간과 밖을 이어주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사실 시우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묶인 것을 풀어주었으니, 문이 열릴 리 없었다. 안쪽에서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문 옆에 붙어있는 작은 지문인식 장치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시우는 천천히 소파에 주저앉았다.
“…….”
몹시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 공간은 낯이 익다 못해 편안하게 느껴졌다. 일종의 안정감. 이곳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가 뭐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 중에 미미하게 남아있던 습기 먹은 단내가 폐부로 밀려들어 왔다. 산호의 흔적이리라. 시우는 눈을 감고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미 공기 중으로 희석되어 옅어진 향을 못내 아쉬운 듯 음미했다.
지금 내가, 아쉽…다고 생각했나?
시우가 눈을 번뜩 떴다. 살짝 미간을 좁힌 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움직여 방문 하나를 열자 커다란 욕실이 들어왔다. 시우의 미간이 조금 더 좁혀졌다. 나는 이곳이 욕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찌푸린 얼굴로 욕실 안으로 들어서자 말끔한 대리석 벽에 걸린 가운이 보였다. 짙은 그레이 컬러의 가운. 그 아래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속옷과 수건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옆의 진열장에는 친숙한 어메니티가 주르르 놓여있었다.
욕실의 한쪽 벽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새삼스러웠다. 한쪽 손에 감긴 붕대를 잠시간 내려다보았다. 깊게 베었으니 당분간 물에 닿으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시우는 천천히 옷을 벗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적당한 온도의 물이 샤워헤드에서 쏴아아 쏟아졌다. 따뜻한 물을 맞으며 한동안 서 있던 시우는 문득 자신이 발기한 사실을 깨달았다. 솔직하고 왕성한 신체 반응이 기가 막힌지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고작, 그 옅은 향을 들이마신 것으로 이렇게…
“…하.”
단전에 고인 욕구가 천천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시우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말아 쥐었다. 성기가 손안에 감기자 빠르게 부피를 키워갔다. 단단하게 심지가 선 것은 이내 희미하게 맥동하며 자극에 반응했다.
“아….”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위로, 다시 아래로. 귀두 끝에 포피가 몰렸다가, 다시 아래로 쓸려 내려가는 단순한 동작은 뭉근한 쾌감을 자아냈다. 하지만, 이것으론 부족했다.
엄지손가락으로 귀두를 둥글게 둥글리자 체액이 질금 흘렀다. 샤워헤드에서 떨어지는 물의 수증기와 척척한 습도가 흥분을 더욱 고조시켰다. 측, 츠윽, 소리가 났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손이 조금씩 더 빨라졌다.
“하아, 아….”
하얀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을 떠올렸다. 희고 매끄러운 얼굴. 그리고 새카만 머리카락. 맑은 피부 안에서 핏물이 차오른 듯한 입술. 그 입술은 살끔히 벌어져 혀를 내었고, 그것은 시우의 입 안을 유영했었다. 밭은 숨을 내뱉으면서. 달콤한 타액을 흘리면서. 시우의 손이 갈급한 마냥 움직였다.
맨살이 닿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하체를 문지르던 감각은 황홀했었다. 허리를 밀어 넣으면 가는 두 다리가 활짝 열렸다. 그 사이에 난폭하게 자신을 박아 넣는 모습을 떠올렸다. 수줍게 닫혀있는 구멍이 자신의 성기를 오물오물 씹어 먹는 상상. 뜨거운 내벽의 조임과 그 사이에서 흘러나올 달콤한 애액.
“으읏.”
밭은 숨을 몰아쉬며 시우는 파정했다.
급하게 끓어올랐던 쾌락이 최고점에 다다르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사정했지만, 억지로 끌어낸 쾌감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으론 부족했다. 시우는 자신의 손에 엉겨 붙은 유백색의 정액을 내려다보며 숨을 내쉬었다. 허억, 헉. 거칠게 터지는 자신의 숨이 짐승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애를 생각하며 자위했다.
시우는 직감했다. 그 애를 안고 싶어. 페로몬의 끌림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애가 안고 싶은 거야. 그런데… 언제부터…? 조그만 그 애의 향이라도 삼킬 수 있을까 싶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더이상은 그 달콤한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
한 번 봇물이 터진 상상은 꾸물꾸물 끝도 없이 새어 나왔다. 시우는 소파 위에 앉아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고 이마를 짚었다. 샤워 후에 걸쳐 입은 짙은 그레이 컬러 가운이 벌어지며 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자신의 가슴을 핥는 입술을 상상했다.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지저분한 생각을 떨쳐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각난 생각을 끼워 맞추려 노력해도, 결국에는 산호에 대한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산호의 벗은 몸. 하얀 다리. 벌어지는 입술. 흐무러지는 눈가. 그리고 봉긋하게 솟은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벌리고 그 안에 성기를 밀어 넣는 자기 자신을 상상했다.
“…하.”
이성이 막아내지 못하는 음습한 상상은 계속해서 치달았다. 상상이 몸집을 부풀릴 때마다 시우의 성기에 힘이 실렸다. 미처 제어하지 못한 페로몬이 울컥 쏟아진다. 시우는 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진짜… 미쳤나.”
눈을 감으며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탄성이 좋은 소파는 포근하게 시우의 몸을 감쌌지만, 조금도 편하지 않았다. 괴물 같은 죄책감이 시우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난폭한 성욕은 죄책감을 잡아먹었다.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달칵거리는 소리에 시우가 고개를 틀어 문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몇 개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듯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제서야 빠끔 열린 문 사이로 산호가 들어섰다.
빳빳한 재질의 하얀 티셔츠를 입고 네이비색 팬츠 차림의 산호는 트레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일어났네요.”
산호가 소파 앞 테이블에 트레이를 올려두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트레이에 담긴 음식을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음식을 담은 식기는 모두 플라스틱 재질로 바뀌어 있었다. 시우가 산호의 손짓을 눈으로 좇자, 그것을 느낀 산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시우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빤히-.”
산호가 문득 말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선배 페로몬 풀었었어요?”
아직 공기 중에 시우의 페로몬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예민한 오메가가 그것을 감지한 게 분명했다. 시우는 말없이 산호를 응시했다. 심장께에서 찌르르한 울림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페로몬을 흩트릴 것 같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곤란한데. 선배 페로몬은 나한테 자극이 너무 커서.”
달싹이는 입술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주체할 수 없는 욕구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지자, 시우는 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좁혔다. 꾹 쥔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산호가 빨리 자리를 피해주기만을 바랐다. 아니지, 계속 옆에 있기를 바라는 건가?
무엇이든 간에 이건 위험했다. 시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산호야.”
태연한 얼굴로 산호는 시우를 마주 보았다.
“내보내 줘.”
시우의 말을 이미 예상했었는지, 산호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재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가족들이 날 찾을 거야.”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산호가 시우의 아래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발목에 스치는 그레이 컬러 가운의 끝단을 손으로 천천히 만지작댔다.
“가족들이 선배를 찾을 거라고?”
“그렇게 되면 넌 분명히 곤란해질-.”
“가족들이 선배를 왜 찾아.”
시우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뜻이지? 시우의 표정을 읽었는지 산호가 가볍게 웃었다.
“선배, 그 잘난 선배 가족들하고 연 끊었잖아요.”
“…….”
“왜 그랬어요?”
내가 가족들과 연을 끊었다고? 시우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갔다. 사실이었다. 시우가 입원했던 3개월의 시간 동안 시우의 부모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사무적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부모의 비서만이 단 한 번 찾아왔을 뿐이었다.
“선배가 이상해진 게 그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이상해져…?”
“뭐, 남들 눈에는 드디어 정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겠지만.”
“대체 무슨 소릴….”
“안 그래도 궁금했어요. 왜 그랬어요? 잘난 부모님 등져서 좋을 게 뭐가 있어서.”
산호는 쥐었던 가운의 끝단을 살며시 놓고 시우의 팔을 부드럽게 이끌었다.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팔을 매만지다가 붕대가 감긴 손바닥 위를 천천히 쓸었다.
“게다가 선배는 매몰차게 연 끊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희미한 미소가 산호의 얼굴 위에 떠올라 있었다. 무릎 위에 올린 자신의 손을 애정 어린 손길로 만지며 눈을 끔뻑이고 있는 모습이 그러잖아도 어지러운 시우의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시우가 입을 뗐다.
“…너도 알잖아.”
응? 하며 산호가 시우의 손끝을 바라보던 시선을 위로 끌어올렸다.
“내가 사고로 기억 잃은 거. 너도 알고 있잖아.”
“아. 그거.”
“기억… 안나. 부모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부모님을 피하려 했는지, 전부.”
산호는 다시금 웃었다. 산호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가자, 다시 심장 어디께가 찌르르 울려왔다.
“그래요. 그거 참 편리한 구실이네요.”
산호가 가볍게 시우의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사랑스러운 아기를 깨무는 것처럼 짓궂은 행동이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이번에는 아랫입술에 시우의 손끝을 문지른다. 작게 고개를 흔들며 시우의 손끝이 자신의 입술 선을 문지르도록 유도했다.
“왜? 여기 좋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여기 선배가 좋아했던 곳이잖아요.”
시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산호는 시우의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입 안 점막이 손가락을 감싸왔다. 촉촉하고 말캉한 혀에 손가락을 문지르며 시우를 올려다보는 눈가가 발그레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가고 싶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돼요.”
노골적으로 손가락을 빨면서 다소 뭉개진 발음으로 산호가 말했다.
“기억을 찾거나.”
“…….”
“날 임신시키거나.”
쭙, 소리를 내며 시우의 손끝이 산호의 입 안에서 빠져나왔다. 타액이 샌 입술 끝을 혀로 살짝 핥으며 산호가 샐쭉 웃었다.
“골라요. 뭘로 할래요?”
시우가 눈썹을 찌푸린 채로 산호를 내려다보았다. 이 애를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야…
“후자가 빠르겠죠? 맨정신에 못 하겠다면 페로몬 풀어 줄 수도 있는데.”
온전히 장난을 치는 듯한 말투였다. 좀체 격해지지 않는 흥분이 울컥 치솟는 기분이었다. 시우가 대뜸 몸을 앞으로 홱 숙여 산호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넌 지금 내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얼굴을 산호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왜 내가 반대로 하진 못할 거라고 생각해?”
갑자기 저를 거칠게 휘어잡은 시우가 당황스러웠는지 산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선배, 그게 무슨 말-.”
그러나 무슨 말이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거세게 터져 나온 알파의 페로몬이 그 대답을 대신했으니까. 순간적으로 흡, 숨을 들이마신 산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시우의 페로몬은 포근한 흙냄새와 닮았다. 한차례 비가 내리고 난 후 촉촉하게 젖은 대지가, 따뜻한 햇볕 아래 건조되면서 나는 듯한 향. 푸릇한 풀이 돋아나는 곳, 커다란 나무가 만들어낸 그늘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면, 그 바람에 흩날려올 것 같은 따뜻하고 포근한 향이었다.
“아…!”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 시우의 페로몬이었지만, 전에 없이 거칠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색정적이었다. 어깨를 사로잡힌 채 산호의 고개가 홱 젖혀졌다. 발그레해지던 눈가에 수줍은 열꽃이 피어올랐다.
“그만. 그만해요, 선배.”
산호가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시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호에게 더욱 가까이 몸을 붙여왔다. 늘 다정했던 시우의 얼굴에 날것의 짐승 같은 빛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작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울음이 들려왔다.
“하, 으읏.”
산호의 몸은 빠르게 반응했다. 심장이 크게 박동했고, 단전 아래 흥분이 빠른 속도로 고이기 시작했다. 아래가 저릿저릿했다. 정확히는 발씬대기 시작한 몸 안의 은밀한 구멍이. 척척한 애액이 스미기 시작하고, 허리가 가늘게 비틀렸다.
“선배, 제발….”
촉촉해진 눈꼬리가 붉었다. 시우를 올려다보며 산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반들거리는 입술 새로 타액이 주욱 흘렀다. 누가 보아도 자신을 안아달라고 애원하는 오메가의 모습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분명히 몸의 반응은 그랬다. 자신을 거칠게 안아주길 바라는 것. 하지만 산호의 눈은 달랐다. 새까만 눈동자에 어릿하게 비치는 것은 분명한 두려움이었다.
시우 역시 그 눈빛을 보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 시우의 손이 느슨해지자, 산호가 재빨리 팔을 뻗었다. 트레이 아래에서 무언가를 홱 낚아채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
그리고 그것을 시우에게 내리치듯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시우가 조금 더 빨랐다. 시우가 산호의 손목을 단번에 말아 쥐었다.
“…….”
“…….”
잠시간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숨소리가 가볍게 섞였다. 산호가 손에 든 것, 그것은 주사기였다. 시우의 목덜미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춘 주사기의 뾰족한 날 끝에 방울진 액체가 매달려 있었다. 시우는 그것을 흘끗 바라보고는 다시 산호를 응시했다. 평소 따뜻한 시우의 눈빛이 아니었다. 거친 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시우가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이건 또 무슨 약인데.”
“흐…읏.”
“수면제?”
“선, 배….”
“아니면, 발정제.”
“……하으으, 흑.”
“이 약 맞으면 너 임신시키는 건가, 내가.”
시우의 눈이 번뜩였다.
“거짓말 하지 마.”
하으으, 숨을 내뱉으며 산호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시우를 마주했다.
“너 지금 무서워하잖아.”
“선배….”
“네가 원하는 거, 이런 거 아니잖아.”
시우가 천천히 산호의 손목을 놓았다. 느슨하게 풀리는 자신의 손목을 느끼며, 산호의 눈이 잠시 크게 뜨였다. 자신을 놓아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멈칫한 건 한순간에 불과했다. 곧바로 주삿바늘이 시우의 목덜미를 푹, 찔렀다. 콧잔등이 살짝 찌푸려졌을 뿐, 시우는 표정을 무너트리지 않고 산호를 마주 보았다.
“하아…하….”
산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약물이 빠르게 시우의 정맥으로 스미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혈액으로 섞여 든 약물은 즉각 효과를 드러냈다. 흘레 흩어졌던 시우의 페로몬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분명했다. 거칠었던 시우의 눈도 점차 빛을 잃어갔다. 시우의 팔이 아래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주사기를 뽑아 들고 숨을 할딱이며 산호는 천천히 이완되는 시우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내가 원하는 거… 선배가 직접 알아내요.”
“…산, 호.”
“기억해내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산호의 목소리에 얼핏 울음기가 묻어났다. 지금 산호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건, 비단 몸의 흥분 때문은 아닐 것이다.
“왜 선배가 반대로 페로몬 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느냐고?”
그건 아마도 뚜렷한 어떤 감정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선배는 못 하니까. 나한테 페로몬 푸는 짓 같은 거, 그런 거 못할 테니까.”
“…….”
“하나 더 말해줘요?”
산호의 팔이 천천히 아래로 떨궈졌다. 마디가 새하얘지도록 꾸욱 쥐었던 산호의 주먹에서 힘이 스르르 풀리면서, 가는 주사기가 바닥을 떼구루루 굴러갔다.
“진시우 네가 개새끼인 건 이거 때문이야.”
“…….”
“지금도 날 막을 수 있었으면서 그냥 당해주고 있잖아.”
***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또다시 차려입은 슈트가 조금은 답답해 타이에 손을 댄 참이었다.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고 있을 때, 그 애가 다가왔다. 시야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우는 알 수 있었다. 그 애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달콤한 향이 기분 좋게 폐부로 밀려들었다.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곤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려세웠다.
‘…ㅅ…호야.’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시우의 앞에 서 있는 그 애의 양손에 테이크아웃 잔이 들려있었다. 얼음이 가득 찬 아이스 아메리카노. 불쑥 내민 손에 들린 커피를 바라보면서 시우는 눈꼬리를 둥글게 휘었다. 시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기 때문일까, 그 애는 살짝 고개를 틀어 시선을 피했다. 무뚝뚝한 얼굴은 무심했지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바퀴는 영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커…피… ……세요.’
‘나… 주려…… …거야?’
그 애가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로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였다. 귀찮은 듯한 태도였지만, 시우는 기분이 좋아져 더욱 눈꼬리를 휘었다.
‘왜?’
쭉 뻗은 손이 작게 움찔했다. 피했던 시선이 마주쳤다. 몹시도 당황한 얼굴. 시우는 작게 웃으며 그 애가 내민 커피를 받아들었다.
‘그냥… 선배가… ……아 하실…줄…….’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크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시우는 대답했다. 대답…했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산호 네가 알아내면 되잖아.”
허억,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시우는 번쩍 눈을 떴다.
“…….”
커다란 침대 위였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가운은 얌전히 여며져 있었고, 시트도 가슴께까지 덮여있었다. 심장이 세게 뛰고 있었지만, 주변만큼은 고요했다. 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꿈을 꾼 걸까?
주파수가 잘 맞지 않는 라디오처럼 잡음이 섞여 드문드문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들리는 것이 적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재생된 이미지도 무성영화처럼 흐릿했다. 그 애는 누구지? 나에게 커피를 주고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던… 그러면서 귓바퀴가 달아올랐던… 방금 전에 꾼 꿈이었지만, 기억은 빠르게 말소됐다. 손 틈 사이로 물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기억의 편린도 빠르게 사라졌다. 시우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목덜미 부근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크게 상처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살짝 욱신거리는 고통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건 강하게 주삿바늘이 찔렀으니 어쩔 수 없는 후유증이리라.
침실에도, 응접실에도 산호는 보이지 않았다. 산호가 가져왔던 트레이와 음식은 치워져 있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했다. 일견 평온한 주말 아침처럼 따스한 느낌까지 감돈다. 이런 상황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면 그건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것일 터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무언가 잘못된 걸까. 시우는 천천히 커다란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침실에 걸린 기묘한 추상화 옆으로 작은 공간이 하나 더 있었다. 낮게 커튼이 내려와 있어 눈에 띄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파우더룸 형태의 짧은 복도를 지나 드레스룸으로 이어졌다. 크기에 비해 들어찬 것이 거의 없는 공간이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거울에 시우의 모습이 그대로 비추었다. 하얀 피부와 색이 옅은 머리카락, 그레이색 가운 사이로 드러난 가슴.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팬츠와 발목. 본적이 있는 모습이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익숙한 것이다. 이제는 답답할 지경인 기시감을 느끼며 시우는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장문이 눈에 밟혔다.
“…….”
장 안은 텅 비어있었다. 아니, 거의 텅 비어있었다. 단 한 벌의 옷만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짙은 푸른색의 슈트 한 벌이었다. 아주 짙은 색이라 얼핏 검은색으로 보일 법도 했는데, 빛이 반사되면서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시우는 그것을 천천히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
또, 또 지겨운 기시감이 밀려온다. 이 옷이 왜 이렇게 낯익을까. 방금 전, 꿈에서 내가 입고 있던 옷이 이거였나? 모래알처럼 남은 꿈의 기억을 억지로 끌어모았다. 그 애가 다가오기 전,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타이를 풀었었다. 얌전히 걸려있는 슈트에는 세트로 보이는 타이도 함께 걸려있었다. 조금 더 연한 푸른색의 타이. 시우는 가만히 슈트를 꺼내 들었다.
“…….”
거울에 비친 자신의 위로 슈트를 겹쳐보았다. 어깨선이 정확히 맞았다. 팔 끝선도 정확했다. 평균적인 남자들보다 어깨가 넓고 팔다리가 긴 편인 시우에게 꼭 들어맞는 것을 보면, 자신의 옷인 게 분명했다.
그런데, 내 옷이 왜 여기에 있지?
시우는 가만히 슈트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질감의 천이 물 흐르듯 가볍게 흔들렸다.
“아.”
은은하게 달콤한 향이 배어있었다.
시우는 천천히 슈트를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머리가 시켜서 한 일이라기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행동이었다. 하얀 드레스 셔츠부터 팬츠, 타이까지 꼭 들어맞는다.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신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시우는 자신의 엉뚱한 생각에 픽 웃으며 거울 앞에 다시 섰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거….”
수문을 개방한 것처럼 어떤 기억이 밀려들었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마뜩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체면을 구길 수는 없었다. 이렇게 클래식한 슈트를 차려입는 건 영 불편했다. 그리고, 그날.
‘…지…마.’
어두운 골목길.
어두운 골목길? 그래, 그 계단이 좁고 가파른 지하 술집 옆, 그 작은 골목길이었다. 네온사인이 좁은 골목길에 깜빡이며 비쳤다. 덩치가 큰 남자가 있었고, 다른 누군가가 그 남자에게 억지로 떠밀리며 벽에 등을 쿵, 찧었다. 다른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듯 소리를 질렀다. 다른 누군가… 그림자에 가려 흰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도와… …세…요.’
그들은 형질인들이었다. 시우 역시 알파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공격적인 다른 알파의 페로몬은 불쾌한 것이었다. 저항하는 듯한 오메가의 페로몬도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 분명 좋지 않은 일이었다.
중요한 자리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바로 움직여야 했지만, 눈앞 골목길 안쪽의 상황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덩치 큰 남자가 벽으로 떠밀린 누군가의 목덜미를 진득하게 핥았다.
‘거기… 뭐… …는…!’
덩치 큰 남자를 막기 위해 폭발적으로 페로몬을 풀었다. 우성알파의 페로몬은 위협적이다. 싫다는 상대에게 지저분하게 달라붙는 열성알파 따위가 견뎌내기 힘들 만큼. 토기가 훅 밀려왔는지, 덩치 큰 남자는 몸을 홱 물렸다. 허리가 굽어지고 우웩, 소리와 함께 숨을 뱉어냈다.
‘……져.’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확인하는 남자의 눈길이 매서웠다. 하지만 덩치 큰 남자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본래 짐승들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금방 알아채는 법이다. 그가 도망치듯 골목을 빠져나가자 시우는 벽으로 내몰린 누군가에게 허리를 숙이며 다가갔다.
‘괜……아요…?’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또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아주 잘 아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솟았다. 방금 전 꽁무니를 뺀 버러지 같은 놈을 그냥 보내주는 게 아니었다. 얌전히 쫓아내는 게 아니었어. 어금니를 으득 씹었다. 벽으로 내몰렸던 누군가가 시우를 달래듯 손을 뻗었다. 자신의 뺨 끝에 누군가의 손이 닿자, 그곳에서부터 이상한 촉감이 퍼져나갔다. 아, 지금 당장…
‘시우… 선배…?’
그때 골목 앞에서 작은 그림자가 아른댔다. 시우가 골목 끝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작달막한 여자애가 골목 안쪽 시우와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혜야.’
‘무슨…일… ……왜 산……가 선배한테….’
여자애의 눈이 동그랬다. 무척이나 놀란 듯한 얼굴. 그리고 곧 그 얼굴에 퍼지는 혐오감. 혐오의 대상은 시우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얼굴도 낯이 익었다. 누구…지?
시우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빨려 들어가듯 끌려갔던 과거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혐오감이 떠오른 여자애의 얼굴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포니테일로 긴 머리를 높게 묶은 여자애. 시우를 술자리로 불렀던, 그 여자애였다.
“인혜.”
무심결에 이름을 내뱉었다. 그리고 동시에 확신했다. 그 긴 머리의 여자애 이름은 인혜가 분명했다. 인혜가 무언가 알고 있나? 왜 그 기억 속에 인혜가 있지?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시우는 몸을 틀었다.
응접실로 나오니 산호가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양 무릎 위에 두 주먹이 올라 있었는데,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꼭 혼나는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산호에게서 다른 알파의 기척이 느껴졌다. 불쾌감이 왈칵 치솟아 주먹이 쥐어졌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던 산호가 시우의 인기척을 느낀 듯했다.
“선배, 우리 규칙이 필요할 것 같-.”
입을 열며 시선을 올린 산호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슈트 차림의 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시우는 태연하게 산호의 앞으로 다가섰다.
“-같아요.”
천천히 말을 마치며 산호가 제 앞에 우뚝 선 시우를 바라보았다.
“규칙.”
“네, 선배랑 내가 같이-.”
“일방적으로 가둬놓고 규칙이라니, 그것도 웃기지 않나.”
산호의 얼굴이 잠시 굳었지만, 금세 부드럽게 풀어졌다. 작은 미소를 띠며 시우의 손을 잡아 가까이 이끌었다. 시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하체에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선배가 여기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나랑 둘이서만.”
“…….”
“어려울 것 없어요. 페로몬 함부로 풀지 마세요. 그것만 지키면 선배가 뭘 하던 상관없으니까. 전부 다 들어줄게요.”
시우의 체향을 음미하듯이 산호가 숨을 들이마셨다. 시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부 다.”
산호가 시우의 허리를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고개를 들어 시우를 올려다본다. 샐쭉 올라간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아, 여기서 나가는 건 빼고.”
시우는 가만히 눈을 내려 저를 올려다보는 산호를 마주했다. 산호는 시우의 시선을 빤히 응시하며 샅에 뺨을 살며시 문질렀다. 처음엔 가볍기 기대왔던 것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자극을 주듯이 움직였다. 직접적인 접촉은 성감을 다시금 끌어올렸다. 시우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페로몬은 왜.”
“글쎄요, 왜일까.”
“내 페로몬이 싫은 거야, 아니면 알파의 페로몬이 싫은 거야.”
“음.”
“알파 페로몬이 싫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응? 산호가 입술 끝을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샅에 가져다 대며 시우를 바라보았다.
“지금 너한테 다른 알파 냄새나는 거 알고 있어?”
산호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가늠하듯 위로 뜨였던 눈이 금세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아, 그거. 아직도 배어있나.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린다.
“다른 알파 냄새 달고 와서 나한테 이러는 건 무슨 이유야.”
산호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끌어안았던 시우의 허리를 놓고 샅에서도 뺨을 떼어냈다. 짐짓 즐겁다는 듯이 웃은 산호가 입을 열었다.
“설마, 선배 질투해요?”
큭큭 웃으며 시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시우는 저항 없이 산호의 힘에 이끌려주었다. 산호가 이끄는 대로 그 앞에 무릎을 대고 앉으니 눈높이가 맞추어졌다. 산호가 시우의 목에 양팔을 두르며 웃었다.
“아, 기분 좋은데.”
“…….”
“선배가 안아주지 않으니까 내가 다른 알파한테 안겼을까 봐 걱정돼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짓궂게 웃는다. 시우가 산호의 팔을 가만히 풀어냈다.
“나한테 손대지 마. 내 규칙은 이거야.”
그러나 산호는 다시 시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건 안돼요.”
“네 멋대로-.”
“만지지도 못하고 지켜만 볼 거라면 뭐 하러 번거롭게 가둬놨겠어요. 죽여서 박제를 했겠지. 선배는 예쁘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시우가 다시 팔을 풀려는 듯 산호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억지로 풀어내지는 않았다. 대신 눈썹을 찌푸리며 산호를 빤히 마주 보았다.
“계속 이렇게 만지고 자극하면 네가 힘들 텐데.”
산호가 픽 웃었다.
“내가? 선배가 아니고?”
산호의 손목을 잡은 시우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래. 산호 네가.”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산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곧 러트니까.”
산호가 끌어안았던 팔을 천천히 풀어냈다. 산호의 손목을 쥐었던 시우의 손도 스르르 풀어졌다. 몸을 조금 뒤로 물리며 산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러트가 벌써 올 리 없어요.”
“어떻게 확신해.”
“그야-,”
산호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아직은 아니에요.”
“너랑 계속 같이 있었잖아.”
알파의 발정기로 불리는 러트사이클은, 오메가의 히트사이클 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대 형질인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곤 했다. 형질이 강할수록 더욱 그랬다. 진시우는 우성 알파다. 산호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시우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억제제가 필요해.”
눈썹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던 산호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러요?”
“러트가 오면….”
“그럼 선배가 날 건드리겠지. 여긴 나밖에 없고, 나는 오메가니까. 그건 내가 바라는 일인데?”
시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높이를 맞춘 시선이 바로 산호를 향했다.
“아니잖아.”
산호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시우를 마주 보았지만, 살짝 눈꼬리가 떨려왔다.
“…뭐가요.”
“내가 페로몬 풀었을 때, 너 무서워했잖아. 겁냈잖아, 너.”
산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말문이 막힌 듯 보였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간치듯 페로몬 쏟으면 어떤 오메가가 좋아하겠어요, 안 그래요? 그리고 그건 선배가 도망가려고 그랬던 거였잖아.”
“…….”
“그건 됐어요. 이제 선배가 그럴 일 없다는 거 잘 아니까.”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산호가 과장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했잖아요. 난 선배가 그렇게 못 할거라는 거, 알고 있다고.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는 마요.”
시우는 말없이 산호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확신하는 걸까. 이 애는 나에 대해서 잘 아는 걸까. 나는 이 애의 확신처럼, 정말…
산호 역시 시우를 마주 보았다. 아무런 말 없이. 매우 잠깐인 듯, 하지만 매우 긴 듯한 시간 안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침내 산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이 졌다는 듯, 약간의 체념조를 담은 한숨이었다.
“좋아요. 억제제 가져다줄게요.”
몸을 일으키려는 시우를 산호가 잡아 왔다. 시우의 뺨에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댔다.
“대신 내가 원하는 거 들어줘요.”
자신의 뺨에 올라간 산호의 손을 잡아 내리려는 듯, 시우가 산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큰 손이 산호의 손을 잡아먹듯 덮었다.
“오늘 같이 자요.”
“무슨-.”
산호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섹스하재? 그냥 자자구요. 한 침대에서. 뭐, 섹스하면 더 좋고.”
“…….”
“밥 먹는 것도 지켜볼 거예요. 그리고 밤새 같이 있을 거예요. 어때요?”
어차피 시우에게 선택권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산호의 마음대로 될 테니까. 시우는 산호의 손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호가 빙긋 웃었다. 진심을 담은 웃음. 몹시 밝은 표정이었다. 시우와 함께 있을 시간을 기대하는 얼굴은 소풍을 눈앞에 둔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해사하고 천진했다.
“혹시 모르니까 선배가 원래 복용하던 걸로 가져올게요. C타입이었나?”
산호는 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소파 앞에 무릎을 굽힌 채 산호를 바라보던 시우도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C타입은 구하기 조금 까다롭-.”
무심결에 문 옆의 잠금장치에 손을 댔던 산호가 흠칫 놀라며 손을 떼어내려 몸을 물렸다. 그러나 등 뒤로 단단한 가슴이 가로막았다. 커다란 손이 산호의 손을 순식간에 덮어왔다. 산호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제 뒤에 바짝 붙은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열어.”
“…선배.”
“문, 열어.”
시우의 손이 억지로 산호의 손을 이끌었다. 삑, 전자음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철컥, 잠금장치가 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우가 산호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거짓말했어.”
“…선배…!”
“러트, 아직 아니야. 그냥-.”
“선배!!!”
“여기서 나가려고, 거짓말했어.”
발칵, 문이 열렸다. 시우는 재빨리 열린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문을 쾅 닫으며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빨간색 융단이 깔린 복도였다. 호텔 같은 구조였다. 여긴 정말 호텔의 스위트룸이었을까. 복도 끝에 커다란 철문이 보였다. 초록색 비상구 표지판이 빛나고 있었다. 반대쪽으로는 호화로운 엘리베이터 문이 보였다.
시우는 잠시 망설였다. 엘리베이터가 우연히 이 층에 멈춰 있다면 다행일 테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길 기다리는 동안 산호가 문을 열고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반대쪽의 비상구 문이 잠겨있다면, 이 천운 같은 기회를 놓칠 것이 분명했다.
“…….”
결국 시우는 비상구를 선택했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등 뒤에서 기계음 소리와 함께 다급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비상구 문고리를 비틀었다.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시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바로 계단을 밟았다.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뛰쳐나온 시우의 맨발에 날카로운 계단 모서리가 가느다란 생채기를 냈다.
널찍했던 복도에 비해 비상계단은 제법 좁다랬다. 지그재그로 늘어진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이곳이 어느 정도 높이일까 생각했다. 혹시 매우 높은 고층인 건 아닐까. 끝없이 아래로 늘어진 계단을 보니 틀린 추측은 아닐 것 같았다. 시우의 발밑으로 척척하게 핏물이 배어 나왔다.
선배! 산호의 목소리가 비상계단 복도를 울렸다. 벌써 산호가 계단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왜인지 자꾸만 발이 엉키는 것 같다. 위를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산호의 얼굴이 보일까 두려웠다. 조막만 한 얼굴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터였다. 숨 가쁘게 계단을 내려가는데 별안간 쿠당탕,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하, 으윽…!”
산호의 비명이 터졌다. 곧 쿵, 쿵,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다급히 저를 잡으러 계단을 내려오던 산호가 발을 헛디딘 것이 분명했다. 계단을 구르는 소리는 제법 끔찍했다. 그리고 이어진 퍽, 소리. 그 소리는 더 끔찍했다.
“…!”
시우는 걸음을 멈추고 황급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꺾어진 계단 틈으로 산호의 손목이 비죽 솟은 것을 보았다. 퍽, 하는 끔찍한 소리는 계단을 구르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힌 소리였다. 잠시 얼어붙은 것처럼 시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만일 머리를 크게 다쳤다면, 그대로 두는 것은 위험하다. 산호가 위험할지도 몰랐다.
“젠장…!”
입술을 질끈 물은 시우는 몸을 돌려 계단을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이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더이상 산호가 저를 잡으러 올 수 없다면 더더욱. 하지만, 하지만 산호가 크게 다쳤다면… 계단을 밟아 내려갈 때보다 더욱 다급히 다리를 움직였다.
“산호야!”
계단 모서리에 걸쳐져 있는 산호의 머리맡에 붉은 피 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시우가 황급히 다가가 눈을 감은 산호의 목덜미를 짚었다. 희미하지만 맥동이 있었다. 순간 안도감과 함께 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감이 밀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를 다쳤다면 함부로 몸을 움직여선 안 됐다. 그렇다고 이렇게 둘 수는 더더욱 없었다. 결국 산호를 안아 들기 위해 시우가 가까이 몸을 붙이자, 감겨있던 산호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선배.”
흐릿했지만 분명한 발음이었다. 시우가 안도하듯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미안해요, 선배. 나도 선배 속였어요.”
지지직, 잡음 같은 소리가 들리고 뒷덜미에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두 번째 느끼는 고통이었다.
“선배를 잡아야 해서, 일부러 넘어졌어요.”
속삭이듯 읊조리는 산호의 목소리를 끝으로 시우의 눈이 감겨왔다.
***
벌써 몇 번째일까. 이렇게 정신을 잃고 다시 눈을 뜨는 것이.
시우가 눈을 떴을 때, 이번에는 침대 위가 아니었다. 널찍한 소파 위였다. 깊게 파묻히듯 침대에 기대앉아있는 시우의 어깨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산호가 저에게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어깨에 기대어진 이마는 뜨거웠고, 작게 내뱉는 숨소리도 거칠었다.
“산호…!”
몸을 황급히 움직이려다 멈칫했다. 소파 앞 테이블 위에 피에 절은 수건과 비상약들이 널려있었다. 아이오딘과 작게 조각낸 솜뭉치, 핀셋, 그리고 연고와 거즈. 늘어진 솜뭉치 중 두어 개에 빨간 아이오딘이 묻어있는 것을 보니 응급처치를 한 모양이었다. 시우가 천천히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
계단을 정신없이 밟아 내려갈 때,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에 생채기가 났었다. 깊게 베인 것은 아니겠지만, 상처의 개수가 제법 되었을 것이다. 상처에 거즈가 대어져 있는 것을 보니 산호가 자신의 발을 치료한 게 분명했다. 정작 자신은…
“산호야.”
정작, 머리를 다친 자신은 얼굴을 덮은 피조차 성의 없이 닦아내기만 했을 뿐이면서.
군데군데 피가 묻어있는 산호의 얼굴이 평소보다 희었다. 심장께가 쿵쿵 울렸다. 심장 어딘가에서부터 퍼지는 기묘한 감각이 순식간에 시우를 잠식했다. 그건 분노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얼핏 고통과 닮아 있었다.
시우는 천천히 산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옆얼굴에 피가 묻은 것을 보니 아마도 관자놀이 부근이 조금 찢어진 것 같았다. 시우가 조심스레 상처를 건드리자 산호가 얇은 신음을 내뱉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선배… 일어났….”
“너 제정신이야?”
고통을 닮은 감정이 울컥 터지듯 쏟아졌다. 시우의 목소리는 의도했던 것보다 더 컸다. 큰 목소리에 산호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깊게 찌푸리며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아파요. 소리 지르지 마요.”
시우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뱉었다. 천천히 시우에게 기댔던 몸을 곧추세우면서 산호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발은요. 괜찮아요?”
머리가 찢어져 한 웅큼 피를 흘린 사람이 고작 몇 개의 생채기를 걱정하는 것이 기가 막혔다. 시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 다쳤잖아, 너…는…!”
“아, 이건 괜찮아요.”
산호가 손을 뻗어 이미 피에 흠뻑 젖은 수건을 쥐었다. 그리곤 수건으로 자신의 관지놀이 부근을 꾹꾹 누른다. 쓰라린지 인상을 살짝 구기기는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성의 없이 제 상처를 누르며 산호가 시우를 바라보았다.
“조금 찢어졌더라고요. 별것도 아닌-.”
“…하.”
시우가 한숨을 토하자, 산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다친 제 상처보다, 지금 시우의 반응이 더욱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시우는 입술을 짓씹으며 산호의 아래 양 무릎으로 섰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뻗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솜뭉치에 아이오딘을 적셨다. 산호가 시우의 손길을 빤히 바라보았다.
“머리… 크게 다쳤으면 어쩌려… 하.”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가 곧 안타까운 숨을 뱉으며 입을 다물고 만다. 시우가 핀셋으로 아이오딘을 묻힌 솜뭉치를 산호의 상처에 가져다 대었다. 산호가 수건을 쥐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손끝이 잘게 떨려왔다.
“피가 이만큼 났으면 차라리 괜찮은 거예요. 진짜 위험한 건 피도 안 나는-.”
“피가 이만큼이나 났는데 어떻게 괜찮은 거야.”
소독약이 꼼꼼히 상처를 덮자 시우가 연고를 쭈욱 짜냈다. 시우의 손끝에 묻은 연고가 산호의 상처에 조심스레 문질러졌다. 산호가 움찔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가만히 있어.”
마침내 약을 다 바른 시우가 상처에 거즈를 올리자, 그제서야 산호는 깨물었던 입술을 놓았다. 도톰한 입술에 깨물린 잇자국이 선명했다. 괜찮은 척하면서도 많이 아팠던 게 분명했다. 시우가 미간을 좁히며 잇자국이 난 산호의 아랫입술을 보듬듯이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나를 가둔 게 화나게 하려고 그런 거라면, 성공했어.”
산호가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로 마주했다.
“……왜요.”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네, 몰라요. 선배는 나한테 한 번도 먼저 말해준 적 없잖아.”
산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상처를 치료해주는 시우를 보면서 작게 움틔웠던 원망의 빛이 몸집을 부풀렸다.
“왜 화나는데요. 말해 봐요.”
“……네가 다쳤으니까.”
하, 시우의 대답에 산호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다쳤는데 왜 선배가 화가 나.”
시우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산호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자신의 말도 맞았다. 자신은 분명히 화가 났다. 그것도 아주 많이.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도 모를 감정이었다. 그런데, 왜? 산호가 스스로를 다치게 하면서까지 저를 다시 가뒀기 때문에?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했다. 선과 후가 바뀌었다. 저를 다시 가두기 위해서 속인 것이 화가 나는 게 아니었다. 이 애가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한 것이, 이 애가 그런 이유로 다친 것이 화가 나는 거야.
“선배는….”
“…….”
“내가 아니라 다른 새끼였어도 이렇게 해줬겠죠.”
“…….”
“착하니까, 누구에게나 항상 다정하니까.”
“…….”
“그러니까 다른 새끼들한테도 늘 이렇, 게….”
산호의 눈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나한테 왜 잘해줘요?”
“산호야.”
“선배 잡아 가둔 미친놈이잖아, 나. 그런데 왜 잘해주는데. 왜 상처 치료해주고, 왜 다쳤다고 화내는데, 왜.”
시우는 털썩 주저앉듯 산호의 앞에 양 무릎을 꿇은 채 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나는 화가 난 걸까. 저 애가 다친 게, 왜 이렇게 나를 화나게 만드는 걸까. 시우도 자신의 감정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선배를 가둘 게 아니라, 죽였어야 했나 봐.”
그 답은 시우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있다. 시우는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 마음에 대한 대답도, 산호의 모순된 행동에 대한 대답도 시우의 기억 속에 있다.
“너… 나 못 죽이잖아.”
“…….”
“내가 다치는 거 싫잖아, 너도. 너도 그거 못 견디잖아.”
“…….”
“산호야, 나 내보내 줘.”
시우가 바르르 떨리는 산호의 손을 살며시 거머쥐었다. 산호가 천천히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내 기억 여기서는 못 찾을 거야. 나가서….”
산호는 한동안 말없이 시우를 응시했다. 아직도 핏자국이 서린 얼굴을 닦아주고 싶었고, 눈꼬리에 촉촉하게 스며있는 눈물도 닦아주고 싶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산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나가고 싶어요?”
“내가 기억을 찾으면-.”
“또 나한테서 도망가고 싶냐고.”
“……산호야.”
“미안해요.”
자신의 손을 따스하게 덮은 시우의 손을, 산호는 거칠게 뿌리쳤다.
“안돼. 이번에는 못 놔줘요. 내 손으로 선배 보내주는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