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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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산호를 다시 만난 건 다음 날, 단과대의 복도에서였다. 멀리서 걸어올 때부터 시우는 그 애가 산호인 것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숙인 채 걸어오던 산호는 시우의 바로 앞에 설 때까지 시우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산호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
“…….”
입을 열어 인사하는 대신 시우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가벼운 눈인사. 명백히 자신을 향한 알은체라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산호는 차가운 얼굴로 시우를 지나쳤다. 산호가 냉랭하게 자신을 지나치자, 시우는 천천히 미소를 지웠다. 역시 내가 불편한가. 하긴 그렇겠지.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치부를 알게 된 사람을 미워한다. 그게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적의를 품는 경우는 허다했다. 그럼, 나 이제 저 애의 미움을 받게 된 건가. 시우는 살짝 인상을 구겼다.
뭐, 어쩔 수 없지.
이후 산호를 만난 건 몇 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산호는 누가 보아도 명백히 시우를 피하는 듯 보였고, 시우 역시 산호에게 따로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구태여 불편해 보이는 산호를 붙잡고 말을 붙일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러갔다.
***
“오늘 전부 참석하는 걸로 알게요.”
수업을 마친 교수가 강단 위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강의실 안에 다소 투정 어린 웅성거림이 퍼졌다.
“새로 온 조교님 인사하는 자리니까, 잠깐이라도 모두 얼굴 비추는 게 좋겠어요.”
인원이 많은 경영학부는 전 학부생이 한꺼번에 모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지금처럼 전공 교수가 나서서 자리를 만들지 않는 한. 이런 경우는 1년에 한 번 정도, 혹은 2년에 한 번 정도뿐이었다. 과대표에게 약속 장소와 인원 등을 이야기하며 교수는 자리를 떴다.
“너 차 가져왔잖아.”
옆자리에 앉은 승현이 시우를 툭 치며 물었다. 응. 시우가 눈썹 뼈 부근을 꾹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이 말을 이었다.
“대리 불러야겠네. 근데 오늘 모이는 술집 근처에 주차할 데가 있으려나.”
“아.”
학교에 주차를 해 놓아도 되겠지만, 술자리가 끝나면 돌아오는 것이 제법 귀찮을 것이다. 시우는 핸드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를 검색했다. 승현이 전공 책을 챙기며 부산스럽게 자리를 정리하는 사이, 뚜르르 신호음이 이어지고 금세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이사님.
시우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정 실장님, 바쁘실 텐데 미안해요. 학교로 와서 제 차 가지고 가실 수 있어요? 오늘 저녁에 약속이 생겨서.”
-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댁 앞에 가져다 놓으면 되겠습니까?
부모님의 비서이자, 시우의 가족 전반적인 일을 담당하는 그는 좀체로 사적인 이유를 묻는 법이 없었다.
“네, 오피스텔 앞에.”
- 약속 끝나시는 시간 맞춰서 모시러 가겠습니다.
시우가 눈썹을 슬쩍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뇨, 택시 타고 들어갈게요. 고마워요.”
시우는 승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술자리에 도착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 지하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술집 전체를 예약한 것인지 학부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학생들이 시우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시우 역시 마주 웃었다. 교수가 웃으며 다가오기에 시우는 허리를 깍듯이 숙이며 인사했다.
“시우는 내 옆자리에 앉을래?”
인상 좋은 교수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시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네, 대답하곤 자리에 앉았다. 기다랗게 줄지은 테이블 끝에, 새까만 머리통이 비죽 솟은 것이 눈에 띄었다.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도 아닌데, 그곳만 외따로 떨어진 듯 별리된 느낌이었다. 하얀 얼굴에 무표정을 띠운 산호는,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했던 이 자리가 무척이나 불편한 모양이었다.
“…….”
잠시간 산호를 바라보았지만, 시우는 곧 말을 붙여오는 교수를 향해 몸을 숙이며 가볍게 웃었다. 교수가 시우의 잔에 찰랑찰랑하게 술을 따라주었다.
강제적으로 학부생을 모아놓은 자리라며 불평을 터트렸던 학생들은, 몇 잔의 술이 돌자 유쾌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교수가 눈치 있게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는 더 그랬다.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돌렸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와르르 터져 나왔다. 시우 역시 동기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 먼저 간다.”
시우가 방금 마신 술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승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우의 팔을 와락 잡았다.
“어디 가?”
얼굴이 불그스름하니 열이 올라있었다. 제법 취한 모양인지 승현의 발음이 어눌했다. 시우가 웃으며 승현의 팔을 풀었다.
“집.”
“내일 토요일인데 왜 벌써 가아….”
맞아요, 선배랑 술 마시고 싶어 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앞자리에 앉은 후배들도 종알종알 말을 얹었다. 시우는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내일 일찍 일 있어.”
“회사?”
승현이 짐짓 삐진 체를 하며 묻자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랑 약속. 승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러면 또 잡을 수가 없지. 과장된 한탄조로 웅얼댔다.
그때, 테이블 끝에서 와하하,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시우가 웃음이 터진 곳을 바라보자, 손 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산호가 보였다. 산호의 근처에는 그의 동기로 보이는 남자애들 서넛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낄낄대고 있었다.
“씨발, 내가 뭐랬어. 얘 이거 마신다고 했잖아.”
“에이 씨, 어떤 병신이 물이랑 소주를 헷갈릴 줄 알았냐.”
“얘는 헷갈렸잖아.”
산호가 거의 바닥을 보인 잔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으며 눈을 매섭게 올려 떴다. 소주잔이 아닌 물잔이었다. 투명한 피부가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게 거리를 둔 시우의 눈에도 보일 지경이었다.
“왜 그래? 화났어?”
바로 옆에 앉은 남자애가 느물느물한 말투로 웃었다. 장난이잖아. 몸을 살짝 산호 쪽으로 기운 것이 영 눈에 거슬린다. 산호 역시 남자애의 접촉이 불쾌한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승현이 시우를 붙잡았던 것처럼 남자애 역시 산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디 가?”
“놔.”
“어차피 술 마셨는데 그냥 마시고 가.”
“놓으라고.”
산호가 남자애의 팔을 뿌리쳤다. 그 손길이 생각보다 거칠어서 남자애의 몸이 순간 휘청했다. 이미 술에 취한 자신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남자애는 산호를 향해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씨발, 왜 밀고 지랄-.”
산호는 말없이 가방을 들어 올렸다. 팩 몸을 돌리는데, 급하게 들이켠 술이 취기를 돋우는지 몸을 휘청였다. 그 모습에 남자애들이 다시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오메가는 술 취하면 꼴린다던데, 진짜 그래?”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저급했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산호는 몸을 틀었지만 한 걸음밖에 떼지 못했다. 어지럼증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그거 뭐라 그러냐, 히트 사이클인가 그거. 생물 시간에 배우잖아.”
“생물 시간이랜다. 짐승이냐.”
테이블을 짚은 채 산호가 남자애를 노려보며 고개를 홱 들었다. 얼굴에 뽀얗게 홍조가 올라 있었다.
“백산호 눈 좀 봐라. 무서워 죽겠다.”
“산호야.”
커다란 손이 산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시우가 산호에게 몸을 붙이며 한 걸음 내딛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시우를 보곤 산호가 놀란 듯 눈을 움찔 떴다. 사실, 놀란 건 이 자리의 남자애들도 마찬가지였다. 테이블이 일순 조용해졌다. 떨어진 테이블 앞에서 입을 벙긋 벌린 승현도 산호를 안은 시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갈….”
“그래, 가자. 나도 지금 갈 거야.”
산호의 어눌해진 말을 툭 끊으며 시우가 말했다. 다소 차가운 말투였다.
“…이거 놔요.”
산호가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가까이 선 시우에게 밖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시우는 산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감싸 안은 산호의 어깨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우리 먼저 갈게.”
시우가 아래로 내리뜬 눈으로 남자애들 스윽 훑어보았다. 그리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승현을 향해 인사했다. 승현은 당황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는 산호를 이끌고 좁다란 계단을 오르며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말아 쥐었다. 통화 목록에서 어렵지 않게 찾은 번호를 재차 연결했다.
- 네, 이사…
“저 데리러 오세요, 정 실장님.”
핸드폰 너머 목소리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 불쑥 말을 끊은 시우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조금 정신이 없어서.”
- 네, 이사님. 지금 모시러 가겠습니다.
“학교 앞 번화가에요. 사거리 편의점 앞에 서 있을게요.”
-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급히 마신 술이 취기를 가파르게 돋우었는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산호를, 시우는 짜증스레 내려다보았다. 어깨를 감싼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최대한 빨리 오세요.”
시우의 차는 금방 도착했다. 검은색 세단이 부드럽게 사거리 앞에 서자, 시우는 뒷좌석 문을 열고 산호를 조심스레 앉혔다. 대체 뭘 얼마나 마셨길래… 인상을 찌푸리곤 문을 달칵 닫자, 룸미러에 비친 반듯한 인상의 30대 남자가 눈인사를 해왔다. 시우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바쁘실 텐데.”
“괜찮습니다. 댁으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아뇨. K동으로 가주세요.”
시우의 오피스텔과는 영 다른 주소지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망설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승차감이 무척이나 좋았지만, 산호의 몸은 작은 움직임에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내 푹 숙여진 고개가 시우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하.”
시우가 기가 막힌다는 듯 눈썹을 잘게 찌푸렸다.
테이블에서 일어날 때만 해도 산호는 조금 어지러운 듯 보였었다. 어깨를 감싸 쥐고 술집을 빠져나올 때는 걸음이 흐트러진 것 같았고, 사거리 앞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몸을 가누지 못했다.
동기들이 술을 물인 양 속여 산호가 그것을 마신 것은 대충 눈치챘다. 물인 줄 알았을 테니까 발칵발칵 마셨을 테고. 급히 술을 들이켜면 금세 취기가 오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렇게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밖에서 술 못 마시게 해야겠는데. 시우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시우의 차가 몇 주 전에 들어섰던 골목으로 다시 들어섰다. 시우는 자신이 주차를 했던 부근 즈음에서 차를 세워달라 부탁했다.
“차 부탁해요. 오피스텔에 주차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사님께서는 어떻게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내일 오전에 회장님과-.”
시우가 산호의 옆구리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으며 대답했다.
“택시 탈게요. 걱정 마세요.”
남자, 정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뒷좌석 문을 닫으려던 시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시선이 드문드문 놓여진 골목길의 가로등을 차례로 짚었다. 시우는 다시 차 안으로 몸을 숙여 정 실장을 바라보았다.
“정 실장님.”
“네, 이사님.”
“여기가 무슨 구였죠? J구?”
“네, J구 입니다.”
음, 시우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김택진 의원님 지역구던가.”
“네, 맞습니다.”
“김 의원님께 내일 전화 해주세요. 여기 가로등 좀 늘려달라고.”
“가로등…이요.”
“네, 밤에 혼자 다니기 너무 위험하잖아, 여기.”
정 실장이 잠시간 시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전화하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고맙습니다.”
시우는 차 문을 탁 닫았다.
처음 보는 알파를 만났던 가로등 아래까지는 무리 없이 걸었다. 골목이 거미줄처럼 촘촘해서 복잡하기는 했지만, 시우는 그 곳을 정확히 기억해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산호의 집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몇 번이고 어깨를 흔들어 보았지만, 산호는 응, 응, 아이같이 대답할 뿐, 정확히 주소를 말하지 못했다. 옆구리를 감쌌던 손은 무게에 밀려 아래로 내려와 허리를 감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 담벼락에 산호를 기대에 세우곤 시우가 산호의 양 어깨를 잡았다.
“산호야.”
“…으응.”
“집 어느 쪽이야.”
“…응?”
“집.”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듯 흔들자 산호의 눈이 갸름하게 떠졌다. 동공의 초점이 흐렸다.
“…집?”
“응. 산호 네 집.”
산호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손을 가까스로 들어 위쪽을 가리킨다.
“저기 위?”
“…응. 파란색… 대문….”
그리고는 곧 까무룩 입을 닫는다. 기대어진 담벼락에서 주르르 미끄러질 것 같아 시우는 산호를 앞으로 끌어안았다. 가까스로 다시 벽에 기대 세운 후에야 산호를 등에 업을 수 있었다. 시우의 목덜미에 산호의 뺨이 기대어졌다. 산호의 양팔이 비죽 시우의 어깨에 걸쳐졌다. 시우는 한숨을 내쉬곤 걸음을 떼었다.
“파란색… 대문.”
파란색 대문이란 건, 사실 대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낡고 허름한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것을 대문이라고 부르던가? 이렇다 할 잠금도 없이 열리는 문틈 사이로 들어서자, 시멘트가 발라진 자그마한 마당과 반투명한 유리문이 나왔다.
“…하, 이게.”
문고리에 열쇠 구멍이 있기는 했지만, 잠금장치라고는 고작 그것 하나뿐이었다. 이건 성인 남자가 힘을 조금만 주어 비틀면 금세 풀어질 만한 것이었다. 시우가 눈썹을 좁히며 산호를 받치지 않은 손으로 문고리를 비틀자, 아니나 다를까, 문은 금세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
왠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좁다란 현관에 산호의 것으로 보이는 운동화 몇 켤레가 놓여 있었고, 손바닥만 한 방 안은 깨끗했지만 을씨년스러웠다. 곱게 개어 놓은 이부자리가 눈에 보여, 시우는 그곳에 산호를 얌전히 눕혔다. 자리를 펴고 이불을 산호에게 덮어주고 나서야 시우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분명히 혼자 사는 집이었다. 산호 외에 다른 사람의 흔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시우가 난처한 듯 방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산호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왜 그래? 속 안 좋아?”
숙취해소 음료라도 사 왔어야 했을까. 골목으로 올라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편의점까지 거리가 제법 되었다. 시우는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물이라도 따라주면… 시우의 허리쯤밖에 오지 않는 미니 냉장고가 눈에 들어와, 그리로 향하는데 순간 묵직한 안개 같은 것이 시우를 감쌌다.
“…아.”
산호의 페로몬이었다. 술에 취해 잠들었으니 페로몬을 제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 산호가 느끼는 대로 통제 없이 흘러나오는 것일 터다. 농밀한 페로몬이었다. 마치 몸이 잔뜩 달아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시우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진짜로… 밖에서 술 못 마시게 해야겠는데.
페로몬에 반응한 심장이 쿵, 크게 울렸다. 재빨리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다행히 500mL짜리 생수병이 보였다. 시우는 그것을 산호의 머리맡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
살끔 벌어진 산호의 입술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 사이로 색색 쏟아지는 숨까지. 시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고 싶은 듯 손을 뻗었다가, 다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잠든 애한테 무슨… 오메가의 페로몬에 더 반응하기 전 어서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 상쾌한 공기가 폐부로 밀려들었다. 문틈으로 여전히 산호의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견딜 만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시우는 천천히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심지어 우성이었어?”
아침에 약속이 있었다. 산호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고, 잠드는 것까지 확인했으니 이제 돌아가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
형질인 이라면 이 근처를 지나가면서 저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무방비하게 흐트러진 오메가의 페로몬은 알파에게 좋은 먹잇감이니까. 조금만 힘주어 열면 열리는 문 안에서 색색 잠들어 있는 오메가는 굶주린 맹수들이 지나가는 길목 위의 상처 입은 사슴이나 다름없었다. 시우는 다시 한번 시계를 흘끗 바라보았다.
“…아버지 화내시겠는데.”
스스로도 자신의 선택이 기가 막힌지 시우는 픽 웃었다.
***
여자는 식탁에 앉아 누런 고지서를 신경질적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노오란 보리차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점점 여자의 눈이 혼탁해지고, 양 광대뼈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아이는 한동안 거실에서 동화책을 읽으며 여자의 눈치를 보았다. 마침내 여자가 픽, 고꾸라져 식탁에 엎드렸을 때 천천히 여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상하게 알싸한 향이 났다.
‘…….’
사실 목이 말랐다. 여자가 연신 들이켜던 보리차가 물컵에 반쯤 남아있었다. 까치발을 뜨고 식탁에 놓인 컵을 쥐었다. 왜인지 여자가 깨면 혼이 날 것 같아 조심스레 보리차를 들이켰다. 한 모금 마신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분명 보리차 같은 색인데… 몹시도 쓰고, 몹시도 뜨거운 액체였다.
쨍그랑.
놀란 아이가 물컵을 떨어트렸다. 그 소리에 놀란 건 아이뿐만은 아니었다. 고꾸라져있던 여자가 홱 고개를 치켜들더니, 아이와 깨진 물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황을 이해한 듯 여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멍청한 게! 이게 뭔 줄 알고 마시는 거야?’
철썩, 여자의 마디진 손이 마른 아이의 작은 등을 후려쳤다. 아이는 깜짝 놀라고 몹시 아팠지만, 앙앙대며 울지도 못했다. 불이라도 삼킨 듯 속이 뜨거웠다. 하지만 활활 타는 속보다 저를 사납게 노려보는 여자가 더 무서웠다. 아이의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알파 하나 꼬여내지 못하는 반푼이 주제에. 이젠 별….’
잔뜩 꼬인 발음으로 아무런 말이나 지껄이던 여자는, 문득 새삼스럽다는 듯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열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이렇게 예쁜데, 왜 대갓집 어른들은 널 선택하지 않는 걸까.’
여자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진 것 같아, 아이는 눈치를 보며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예쁜 산호.’
‘…….’
‘산호도 사랑받고 싶지, 그렇지?’
아이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이리 오렴.’
여자는 간혹 기분이 좋을 때 아이를 안아주곤 했다. 여자의 기분이 언제 좋을지 알 수 없어, 아이는 늘 여자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지금 저를 안아주려는 것을 보니 여자의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이가 깨진 물컵을 피해 여자를 향해 다가가자 여자가 아이를 다정히 품에 안아주었다.
‘사랑받고 싶을 땐 말이지, 산호야.’
‘응.’
‘옷이라도 벗고 다리라도 벌리는 거야. 알겠니?’
여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이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만 기억할 뿐이었다.
***
산호는 깨어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온몸이 뻐근했다. 머릿속이 쾅쾅 울린다. 기억 속으로 애써 밀어버린 어릴 적 꿈을 꾼 탓에 몹시도 불쾌했다.
술, 술이 문제였다. 산호는 애초에 술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아주 어릴 적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한 잔만 마셔도 몸이 달아오르고 어지럼증이 쏟아졌다. 억지로 참석한 학부생 모임에서도 끝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었다. 질 나쁜 동기들이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지만 않았어도… 술자리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방금 전의 꿈과는 달리 몹시도 흐릿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인상을 구기며 산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부엌에 서 있던 시우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 벌써 일어났어?”
산호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멀거니 선 너른 어깨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못 볼 것을 본 것 마냥 눈을 부비는 산호를 보며 시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놀랄 만도 하겠지. 어제 일이 전부 다 기억나는 건 아닐 테니까.
“더 잘 줄 알았는데.”
“…….”
“조금만 기다릴래? 아직 다 안 됐거든.”
뭐가? 산호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지만 시우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한창 고군분투 중인 냄비를 향해서였다.
“선배…가, 왜….”
산호는 이 상황이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우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게.”
사실 지금은 그것보다 이쪽이 더 급했다. 냄비 안에서 맹탕처럼 끓고 있는 해괴망측한 음식이. 산호가 바스락거리며 일어났다. 제 등 뒤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시우는 조금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이게… 아, 처음 해보는 거라.”
시우의 어깨 너머 선 산호가 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 정체 모를 음식을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여기서 뭐 하시는….”
시우가 여전히 난처한 얼굴로 콧잔등을 찌푸렸다.
“너 해장해야 할 것 같아서.”
“…해장이요?”
산호가 망연히 시우의 말을 따라 했다. 시우는 여전히 나무 주걱으로 냄비를 저으며 고개를 갸웃하는 중이었다.
“보기엔 쉬워 보였는데… 막상 해 보니까 어렵네.”
낡은 가스레인지 옆에는 시우가 포스팅을 띄워 놓은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나의 해장 비법, 계란죽 :: 왕간단 자취요리> 조리과정이 세세하게 적힌 블로그 레시피 포스팅이었다. 시우가 연신 핸드폰 액정과 냄비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냉장고에 먹을 게 별로 없어서 편의점에서 사 온 걸로 급하게 하다 보니까.”
변명의 빛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물을 너무 많이 넣었나 봐.”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시우를 보며 산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조금 민망한 마음에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시우가 산호를 돌아보았다. 사실 정갈하게 음식 차려놓고, 네가 일어나면 짠, 하고 주고 싶었거든. 아플 때 머리맡에서 식은땀을 닦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칭얼거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을 주는 일인지 나도 잘 아니까. 내가 너에게 그런 거 해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그러나 웃음꽃이 피었던 시우의 얼굴은 산호의 얼굴을 마주하곤 차츰 잦아들었다.
그 애, 산호는 시우의 기대와는 달리 눈가를 붉힌 채 입술을 세게 짓물고 있었다.
“…산호야.”
“진시우 선배님.
“…….”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시우가 열심히 휘젓던 나무 주걱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산호야.”
“뭐하냐고.”
“…….”
“씨발, 지금 여기서 뭐 하냐고요!”
바락 소리를 지르는 산호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었다. 시우의 입술이 가만히 다물렸다. 산호가 바락 소리를 지른 것처럼, 시우 역시 조금은 울컥했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감정을 내비치어서는 안됐다.
“너 걱정돼서.”
산호가 매섭게 시우를 노려보았다. 자신에게 뜻 모를 호의를 베푸는 상대가 무척이나 껄끄럽고, 무섭고, 의아한 것이 분명했다. 울분과 자기혐오가 다글다글 뭉친 시선을 마주하며 시우는 가만히 산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자꾸 저한테 왜 이러시는데요.”
“…….”
“왜 이러냐고, 나한테.”
“…….”
“네, 저 오메가에요. 소문 듣고 선배도 궁금했어요? 그래서 근처 맴돌다 보니까 진짜 오메가인 거 알아채서 흥미 좀 생겼어요?”
그건 시우에게 쏟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향한 분노에 조금 더 가까웠다. 시우는 표정을 무너뜨리지는 않았지만,
“아, 혹시 선배도 나랑 자고 싶어요?”
산호의 말에 눈썹을 잘게 찌푸렸다.
“알파들이 바라는 거 그거밖에 없잖아. 선배가 바라는 것도 그거에요? 선배 같은 사람도 그래요?”
짙은 한숨이 쏟아졌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넌더리가 났다.
“그래요, 자요. 까짓거 뭐 어려운 거라고.”
한 번 자고 나면 관심 끊겠지. 뻔해. 산호가 구겨진 셔츠 단추 하나를 툭 푸르며 사납게 말했다. 시우가 눈꼬리를 구기며 제 셔츠 단추를 푸르는 산호의 손을 거칠게 잡아챘다.
“백산호.”
“대체 나한테 뭘 바라고 이러는데!”
사랑받지 못하고 큰 어린아이의 울음이었다. 시우는 거칠게 쥐었던 산호의 손을 천천히 풀었다. 한숨이 샜지만, 그보다는 저에게 잡혀 발긋해진 손에 더 마음이 쓰였다. 아팠어? 미안해. 허리를 살짝 숙이고 산호의 어깨를 감싸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난 너랑 절대로 안 자. 절대로 안 그럴 거야.”
“…….”
“손 안 댈게. 약속해.”
“……왜 자꾸….”
“너 아니어도 난 이렇게 할 거야.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산호가 천천히 시우를 마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다시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시우가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러니까… 경계하지 마.”
“…….”
“선배가 후배한테 이 정도도 못 해줘?”
그때 냄비에서 와르르, 끓는 소리가 나며 내용물이 넘쳐흘렀다. 시우가 홱 몸을 돌려 가스레인지 레버를 황급히 돌렸다. 어색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다시 시우가 산호를 바라보았을 때, 산호는 눈꼬리를 바르르 떨며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우는 멋쩍게 웃었다.
“우리 그냥… 배달시킬까?”
***
핸드폰을 쥐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시우의 손이 멈칫했다. 이런 일에 사람을 부르는 것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시우는 머뭇대다 처음으로 배달 어플을 다운받았다. 산호는 가만히 앉아 시우가 어설프게 배달 어플을 다운 받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기 배달 잘 안 와요.”
“응?”
시우가 산호를 돌아보자, 산호는 조금 부끄러운지 발긋해진 제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웅얼거렸다. 여기까진 배달 오는 게 불편해서… 아무튼 배달되는 데 별로 없을 거예요. 핸드폰 액정을 슥슥 스크롤 하던 시우가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서 먹자.”
“네?”
날씨도 좋으니까, 조금은 걸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시우가 산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영차, 과장된 소리를 내며 산호를 자리에서 일으킨다. 얼떨결에 시우를 따라 일어선 산호는, 시우가 이끄는 대로 신발을 구겨 신었다.
실제로 날씨는 무척이나 좋았다. 밤에는 스산하기 짝이 없었던 골목길이 햇볕 아래에서 보니 제법 고즈넉하고 분위기가 좋았다. 야트막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시우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너희 집 문, 잠금장치 바꿔야 할 것 같던데.”
산호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시우를 바라보자, 시우가 눈썹을 좁히며 산호를 마주 보았다. 나무라는 눈빛이었다.
“저건 너무 위험해서 안 돼.”
성큼성큼 걷는 시우를 따라 종종걸음을 옮기며 산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우는 저를 따라오는 산호를 보곤 픽 웃더니 입을 열었다.
“철물점 가면 그런 거 팔지 않나. 잠금장치 같은 거.”
산호는 반걸음 앞서 걸어가는 시우의 넓은 어깨를 빤히 바라보았다.
식당이 있는 큰길까지 나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시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산호에게 뭐 먹고 싶어? 하고 물었다. 산호가 대답 없이 입을 다물고 있자, 시우가 산호의 손을 냉큼 잡았다. 그럼 나 먹고 싶은 걸로 고를 거야. 앞서 걸으며 말한다. 그러나 시우는 몇 번이나 산호에게 무엇이 먹고 싶은지 재차 물은 후에야 마침내 식당 하나를 골라 안으로 들어섰다.
평범한 백반집이었다. 낡은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시우는 여러 번 눈썹을 찌푸렸다.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정확히는 산호가 무엇을 먹고 싶어 할지 몰라 고민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산호가 김치찌개 2인분을 시키고 나서야 시우는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어색하게 눈꼬리를 접어 웃자, 산호가 그런 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편의점에서 같은 아이스크림 두 개를 샀다. 산호는 생각 없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시우는 막무가내였다. 내가 먹고 싶어서. 알잖아, 나 혼자 먹는 거 싫어해. 억지로 산호의 입술에 꼭지를 딴 초코맛 쭈쭈바를 물려주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산호를 바라보았다. 당황해하면서도 오물오물 아이스크림을 무는 산호의 얼굴이 햇볕 아래 해사하게 빛났다. 시우는 기분 좋게 웃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기분이 유쾌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란히 걸어 도착한 곳은 철물점이었다. 사실, 조금 헤맸다. 산호는 제 스스로 철물점을 찾아가 본 적이 없다고 했고, 시우 역시 처음 오는 동네의 철물점이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지도 어플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제법 걸은 후에야, 좁다란 철물점 하나를 발견했다.
철물점은 좁고 긴 형태였다. 마치 신비 상점에 들어온 여행자 마냥 시우가 눈을 밝히며 철물점 안을 둘러보았다. 산호는 어색하게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시우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사이 시우는 철물점 주인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안전하다는 잠금장치 대여섯 개를 비교한 후에야 하나를 선택했다.
“이거 안전한 거 맞죠?”
“암만. 이거는 코끼리가 와서 들이박아도 안 열리는 거여.”
철물점 주인이 허세를 섞어 말을 늘어놓자 시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철물점에서 나올 때에는 전동 드릴과 다른 장비들까지 손에 들린 채였다.
다시 골목길을 따라 집으로 올라오는 길은, 내려오는 길 보다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파란색 대문을 넘어 좁은 시멘트 바닥의 마당 안으로 들어선 시우는 사 온 잠금장치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문고리 뜯어야 할 것 같아.”
시우가 허름한 문고리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허락을 구하듯 말하자, 산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냄비 한가득 이상한 음식을 만든 이 부잣집 도련님이 이런 험한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왜?”
시우가 미심쩍은 산호의 눈빛을 느꼈는지 슬그머니 인상을 찌푸리며 산호를 바라보았다. 산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왜, 내가 이거 못할 것 같아서 그래?”
산호는 누가 봐도 단박에 네, 대답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간신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산호의 표정이 조금 귀여워서 시우는 픽 웃었다. 나 이런 거 잘하는데. 이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내가 이거 갈아주면, 너 내 소원 하나 들어줘.”
“…소원이요?”
“응.”
시우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탄탄한 팔 근육이 힘을 받아 도드라졌다.
“무슨… 소원인데요.”
음, 시우가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빙그레 웃는다.
“있어, 그런 거.”
시우가 힘을 주어 문고리를 돌리자, 퍽, 하는 마찰음과 함께 문고리가 허무할 만큼 쉽게 툭 떨어졌다. 시우가 황당하다는 듯 부서진 문고리를 바라보며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이거 봐. 힘 조금만 줘도 이렇게 망가지는데.”
“그거야 선배가 알파니까!”
알파가 다른 이들에 비해 완력이 센 건 사실이었다. 시우는 살짝 짜증스럽게 떨어진 문고리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걸.”
시우는 능숙하게 잠금장치를 문에 달기 시작했다. 위이잉, 전동 드릴이 돌아가고 단단한 잠금장치가 금세 문 위에 고정됐다. 요리는 그렇게 못하면서, 이런 건 왜 잘하는 거지. 시우의 등 근육이 잘게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산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산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무척 복잡해 보였다.
“끝.”
시우가 전동 드릴을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틀어 산호를 바라보았다. 빙긋 웃으며 허리를 숙이고 장비들을 케이스에 담는다.
“이제 소원 들어줘.”
케이스를 탁 닫으면서 둥그렇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조금 더 끌어올린 시우가, 짓궂게 다시 웃었다.
“아냐, 아껴 놨다가 다음에 얘기할래.”
팔뚝까지 걷어 올린 팔의 단단한 근육을 바라보던 산호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
문의 잠금장치까지 달고 나니 시간이 제법 지나있었다. 산호와 늦은 아침을 함께 먹었고, 또다시 늦은 점심시간이 다가온 셈이었다. 점심까지 사주고 싶은데… 시우는 손목의 시계를 흘끗 내려다보며 아쉬운 듯 웃었다. 지금도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산호와 헤어져 자신의 오피스텔이 아닌 본가로 향하며 시우는 다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늦어도 이런 차림으로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었다. 잠금장치를 다는 동안 걷어 올렸던 블레이저의 소매 부분이 구깃하게 주름지어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시우는 픽 웃었다.
커다란 서재 문 앞에 다다라 시우는 단정히 갈아입은 셔츠의 손목 부근 매무새를 다듬었다. 가볍게 노크하자, 안쪽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시우는 고개를 숙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커다란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써 내려가던 지긋한 장년의 남자가 눈만 슬쩍 올려 시우를 바라보더니, 고풍스러운 가죽 소파를 향해 턱짓을 했다.
“앉아라.”
“네.”
시우가 널찍한 소파 위에 앉자, 시우의 아버지인 진 회장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왔다. 따뜻한 미소가 어려 있었지만, 꽤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애비랑 약속한 조찬도 취소하고. 많이 바빴나 보구나.”
“죄송합니다. 일이….”
“그래, 이 교수한테 들었다.”
학부 모임을 주최한 교수가 아버지의 입에 오르자, 시우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네 나이 때엔 또래들이랑 어울리는 게 흠은 아니지.”
“죄송합니다.”
진 회장이 손을 저었다. 시우를 바라보는 눈빛이 인자했다.
“괜찮아. 곧 졸업하고 나면 정신없어질 테니.”
“…네.”
“김 의원한테 부탁한 게 있다지?”
시우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별 대단하지도 않은 일이 그새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시우는 곧 표정을 풀고 아버지, 진 회장을 바라보았다.
“네, 후배 집 근처가 너무 위험해 보여서요.”
천천히 상석 소파에 앉은 진 회장은 무릎 위의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래. 김 의원 지역구에 재개발 지구가 많아서 그럴 수 있을 게다.”
시우가 웃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에 재선 의원들과 자리가 하나 있는데.”
“…네.”
“김 의원이 오랜만에 네 얼굴 보고 싶다는구나. 네 부탁 듣고 나서 이때다 싶었는지.”
시우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욕심 많은 노인네들이 하는 짓이란 뻔했다. 시우가 살짝 고개를 치켜들며 진 회장을 바라보았다.
“네, 오랜만에 뵙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래. 잘 생각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진 회장이 말을 이었다.
“내일모레 C클럽이다. 정 실장한테 말해뒀다.”
C클럽은 국내에서 가장 큰 오메가 클럽이었다. 악질적인 밑바닥 오메가 클럽과는 질이 달랐지만, 애초에 오메가 클럽이라는 곳 자체가 기형적인 구조일 수밖에 없었다. 시우가 이번에는 참지 않고 눈썹을 찌푸렸다. 진 회장이 시우의 표정을 눈치챘는지 나무라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그런 자리 싫어하는 거 이 애비도 잘 알지.”
“…….”
“그래도 잠시 앉아 있다가 가거라.”
“…네, 그럴게요. 아버지.”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 회장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시우는 서재를 빠져나왔다. 시우가 자리를 뜬 이후에도 진 회장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무릎 위의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진 회장의 고개가 슬쩍 들렸을 때, 서재 문이 다시 열리고 30대 정도의 단정한 남자가 조용히 들어섰다. 시우가 앉았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진 회장이 남자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정 실장.”
“예, 회장님.”
“진 이사 주변 애들 좀 알아와.”
“예.”
“…특히 그 애는 더 자세히 알아보고.”
진 회장이 묘하게 웃음을 띤 입매를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주말을 보내고 학교로 가는 것이 제법 유쾌한 기분이었다. 시우는 파란색 대문 앞에 서서 발끝을 땅에 톡톡 두드리는 중이었다. 질 좋은 가죽 로퍼가 거친 흙바닥에 콩콩 찍혔다. 슬랙스에 손을 찔러 넣어도 보고, 팔짱을 끼어도 보고, 기지개를 켜듯 양 손을 앞으로 쭉 뻗어보기도 했다. 왜 아직도 안 나오지. 손목시계를 다섯 번째 들여다보았을 때, 철컥, 시우가 손수 달아놓은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산호야.”
가방을 어깨에 메곤 방금 문을 나선 산호가 고개를 돌렸다. 빠끔 열린 파란색 대문 너머 멀끔히 서 있는 시우를 발견하자 산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시우 선배?”
시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웃었다.
“선배 여기 왜….”
“학교 가야지.”
산호는 당황한 얼굴로 대문을 넘어 들어오는 시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학교 가야 하는데 왜 여기 계시는 건데요.”
시우가 눈짓으로 산호의 손끝이 걸쳐진 문의 잠금장치를 바라보았다.
“내 작품 잘 있나 보러왔는데.”
작품…? 산호가 방금 자신이 채운 잠금장치를 바라보았다. 이런 걸 보고 작품이라고 해? 황당하다는 듯 찌푸려지는 눈을 보며 시우가 큭, 소리 내어 웃었다.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진짜 이거 잘 있나 보러왔어.”
햇살 아래 맑게 퍼지는 시우의 미소가 소년의 것처럼 화사했다. 산호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왜 자꾸… 저렇게 웃는 거야.
“봤으니까 이제 됐어. 학교 가자.”
잠금장치에 시우의 시선이 머문 건 1초 남짓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시우는 산호의 손목을 쥐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잔잔한 흙냄새가 났다. 따뜻한 햇볕 아래 건조되는 따뜻한 흙냄새. 그리고 그 흙이 품은 나무에 커다란 열매라도 맺힌 듯 달콤한 과일 냄새가 따뜻한 흙냄새 사이로 섞여 들었다. 시우는 기분 좋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학교에 도착해 시우가 주차를 할 때까지 산호는 불안한 듯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우와 같이 등교하는 것을 누군가 볼까 봐 무척이나 마음이 쓰이는 듯했다. 이 애도 늘 불편한 시선의 주인공이 되어 왔을 터다. 원치 않는 시선을 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시우도 알고 있었다. 최대한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늘 주차하던 단과대의 주차장이 아닌, 멀리 떨어진 교직원 주차장에 차를 댔다. 시우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자, 마침 문고리를 쥐려던 산호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어서 내리라는 듯 시우가 빙그레 웃었다.
사실, 멀리 주차를 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교정을 걸어 단과대로 향하는 사이, 진득한 시선이 계속 달라붙는 것을 시우도 느낄 수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 담긴 시선들과, 시우를 향한 호의적인 시선, 그리고 그와 반대로 불쾌한 시선들이 차례로 쏟아졌다. 시우의 입꼬리는 가볍게 웃고 있었지만, 살짝 눈가가 뒤틀렸다. 이거, 조금… 불쾌한데.
강의실에 도착해서야 시우는 산호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수업 열심히 들어. 산호가 뻣뻣하게 고개를 숙일 때, 누군가 시우의 어깨를 턱, 잡아 왔다.
“진시우!”
승현이었다. 승현은 시우와 함께 강의실에 들어온 산호에게 잠깐 시선을 보내기는 했지만, 곧 무덤덤하게 시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승현까지 자리에 앉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다른 동기가 몸을 뒤로 물리며 시우에게 말을 걸었다.
“그날 집에 잘 갔냐?”
학부 모임이 있었던 날을 말하는 것일 터다. 시우가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언제까지 마셨어?”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였다. 눈치 없는 동기 하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야, 그날 우리 4차까지 가고 난리도 아니었어.”
“어, 조승현 이 새끼 완전히 취해가지고.”
큭큭 웃으며 동기들이 말을 이었다.
“근데, 시우 너 그날 왜 쟤랑 같이….”
먼저 말을 꺼냈던 동기의 시선이 강의실 건너편에 홀로 앉은 산호를 향했다. 약간의 호기심과 명백한 조롱이 담기 시선이었다. 시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승현이 대뜸 선수를 쳐왔다.
“진시우가 술 취한 애들 데려다 주는 거 하루 이틀이야?”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하긴, 그건 그래. 시우가 집에 안 데려다준 애가 없지. 동기도 이내 다른 화젯거리로 관심을 돌리는 듯했다. 야, 이 교수님 진짜 센스있지 않으시냐. 그날도 깔끔하게 딱 30분 자리 앉아 있다가 일어서시는 거 봐.
강의실 안은 제법 소란스러웠지만, 산호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유달리 또렷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시우가 집에 안 데려다 준 애가 없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시우의 잔웃음 소리도 생생했다. 산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응시하다가 이내 조금 놀란 듯 자신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책의 한 페이지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방금 자신의 손에 의해 거칠게 구겨진 것이었다.
***
진 회장이 미리 언질을 주었던 의원들과의 약속일은 금방 찾아왔다. 약속 장소로 모셔다드린다는 정 실장의 권유를 사양하고 시우는 직접 차를 몰아 움직였다. 유흥가가 밀집한 강남의 거리.
“이사님은 술 더 안 드세요?”
자리에 앉은지 30분도 되지 않아 여러 번 술이 돌았다. 지금 시우의 옆에 앉은 남자도 제법 취기가 오른 모양이었다.
“네, 저는 그만.”
낭창한 몸짓의 그 남자는 클럽에 소속된 오메가였다. 그가 시우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애교 있게 웃었다. 시우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그를 살며시 밀어냈다.
“이사님 심심하시겠다.”
그가 노골적으로 페로몬을 살며시 흘리며 시우를 바라보곤 배시시 웃는다. 제법 취한 듯 보이는 의원 하나가 둘의 모습을 보곤 껄껄 웃으며 손짓을 했다.
“네가 이사님 기분 좋게 해드려야지. 안 그래?”
분위기를 맞추려는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시우는 애써 희미하게 미소만 띠울 뿐이었다. 입을 열고 싶지도, 말을 얹고 싶지도 않았다. 솔직한 말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속이 울렁거릴 만큼 역겨웠다.
시우는 오메가 클럽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방문해야 하는 일이 오늘처럼 더러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곳을 무척이나 혐오했다. 형질이던, 권력이던, 무언가를 앞세워 타인을 누르는 행위는 불쾌하다. 아버지 진 회장이 이곳에 자신을 보낸 것은 어느 정도 의도적인 것이다. 시우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군림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때론 무자비하게 누군가를 밟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 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조금 전 취기가 오른 의원이 시우의 팔을 덥썩 잡아 왔다.
“아이고, 우리 젊은 애기 이사님, 어디 가십니까.”
잠시 그를 빤히 내려다보던 시우는 곧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꾸욱 내리눌렀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형질인들이었다. 부드럽게 웃는 시우의 주변으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희미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젊은 애기 데리고 이런 데에 오셔야 되겠습니까, 김 의원님.”
여전히 시우는 웃고 있었지만, 어깨를 잡힌 남자의 표정은 파리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눈알이 데구루루 움직였다.
“오랜만에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마침내 그가 시우에게 어깨를 잡힌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시우가 손을 떼고 조용히 말했다. 여전히 예의 바른 목소리였지만, 룸 안에 있는 서너 명의 오메가가 다소 겁먹은 눈초리로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우는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를 떴다.
클럽의 기다란 복도를 걸어가며 신경질적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예의상 몇 잔의 술을 받았었다. 많이 마신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무척이나 센 독주였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운 탓에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위협을 한 것이다. 후회할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시우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클럽 밖으로 천천히 빠져나왔다.
거리는 화려했다. 환락의 거리답게 번쩍번쩍 빛나는 네온사인이 끝도 없이 빛나고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시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흐트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바깥바람을 쐬는 것이 좋으리라 판단해서였다.
이미 시우는 정 실장에게 전화를 넣은 참이었다. 사람을 시켜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다. 차에 앉아서 조금 쉬다가 들어갈 생각이었다. 운전을 할 수 없으니 기사를 불러야 하겠지만, 집안의 사람을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검은색 세단 근처에 다다랐을 때, 어디선가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
시우는 눈썹 뼈 부근을 꾹꾹 누르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환락가에는 보통 어지러운 페로몬이 잔존하는 법이다. 술집이 많은 골목에 필연적으로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엉켜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대체로는 불쾌한 향들이다. 하지만 방금 시우가 느낀 그 향은 전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시우는 눈치챘다.
“……산호?”
그 애였다. 습기 먹은 단내. 달콤하고 무르녹은 향. 살짝 찌푸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골목 끝에 하얀 얼굴의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멀거니 선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색 얇은 니트와 베이지색 팬츠 차림이었다. 너무나 수수하고 평범해서 이 환락의 거리에 홀로 동떨어진 미아 같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수수한 모습이 무척이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곳에 서 있는 것 또한 완벽한 그림이었다. 시우는 그 애를 향해 걸음을 뗐다. 조금 성급한 걸음이었다.
“산호야.”
예민하게 인기척을 느낀 산호가 몸을 홱 돌려세웠다. 생각보다 가까이 달라붙은 시우의 어깨에 살짝 이마를 부딪힌다. 산호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선배?”
상대가 시우라는 것을 확인한 산호는 여느 때 보다 더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마치 있으면 안 되는 장소에 있는 것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얼굴이 순식간에 발긋하게 달아오른다.
“여기서 뭐 해?”
“…….”
“왜 이런 데에 혼자….”
“선배야말로 여기서 뭐 하시는데요?”
산호가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시우가 이곳에 있는 것이 불쾌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마치 제 우상의 민낯을 발견한 듯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산호를 바라보았던 시우는 금세 산호의 질문에 왜 날이 섰는지 이해했다. 오메가 클럽이 즐비한 거리에서 내가 서 있는 것이 싫어서 그런 거야? 시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나 여기서 뭐 하고 있었을 것 같은데?”
산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말을 하려는 듯, 또 그만두려는 듯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일 때문에 누구 잠깐 뵙느라.”
간단하게 대답했다. 실상 그것이 전부였다. 시우의 대답에 산호가 다시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우가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산호에게 재차 물었다.
“너는.”
“…….”
“너는 여기서 뭐 하는데.”
이번에도 산호는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시우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하잖아, 이런 데. 그것도 혼자서.”
“…안… 위험해요.”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다시 한숨이 나온다. 위험했다. 오메가가, 그것도 우성 오메가가 혼자서 이런 곳을, 이런 시간에 배회하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달콤한 향을 흘리고 있으면서. 어떤 더러운 새끼가 군침을 흘릴지 모르잖아. 저도 모르는 사이 시우의 인상이 찌푸려진 모양이었다. 산호가 시우를 흘끔 바라보고는 말끝을 흐리며 웅얼댔다.
“저는… 약속이 있어서….”
“약속? 이 시간에 무슨 약속.”
이런 곳에서 무슨… 산호가 입술을 말아 무는 것을 보니,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좁은 골목길 가로등 아래서 저급해 보이는 알파가 했던 말이 차례로 떠올랐다. 연락해. 뭐, 돈 떨어지면 알아서 하겠지만. 시우가 가만히 산호를 향해 눈을 내리떴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너 내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네?”
“그거 지금 들어줘.”
산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 순진한 얼굴이 기가 막힌지 시우가 작게 웃었다. 이 애를 보면 왜 화를 낼 수 없을까. 무척 짜증스러운 상황인데도.
“무슨 소원… 인데요.”
“그 약속 취소해.”
대뜸 약속을 취소하라니, 산호가 당황한 듯 입술을 갸름하게 벌렸다. 시우가 산호의 손목을 덥썩 쥐어 끌며 말했다.
“그 약속 취소하고 나 집에 데려다 줘.”
시우에게 이끌려가며 산호가 당황한 목소리로 네? 하고 반문했다.
“나 지금 술 많이 마셨거든.”
“술이요?”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산호도 시우에게서 나는 옅은 위스키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찌푸려진 산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우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로 응, 하고 대답했다.
“너 술 마셨을 때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해장도 시켜줬잖아.”
“그거는…!”
그건 내가 부탁한 게 아니잖아요. 선배가 선배 마음대로… 산호가 웅얼거린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척하며 시우가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네가 나 데려다 줘.”
“제가 선배를 어떻게….”
“대리 부르기 전에 잠깐 차에서 쉬고 싶은데.”
어느새 검은색 세단 앞에 도착하자, 시우가 산호의 손목을 부드럽게 놓았다.
“쉬는 동안 옆에 있어 줘.”
“……옆에….”
“응. 나 깜빡 잠들면 어떡해. 이런 데서 잠들면 안 되잖아.”
시우 스스로도 핑계가 조금 궁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핑계일 뿐이니까. 시우는 가만히 차 뒷문을 열고 산호를 향해 눈짓했다.
“조금만 앉아 있다가 가.”
제법 단호한 목소리였다. 산호는 열린 뒷좌석 문과 시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결심한 듯 차 안으로 들어섰다. 시우가 그 뒤를 따랐다. 문이 달칵 닫히자, 거리의 소음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넓은 차 내부는 성인 넷도 거뜬히 탈 수 있을 정도로 쾌적했다. 시우가 시트에 등을 기대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나니 조금 더 어지러움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충동적으로 산호를 태우기는 했지만, 기실 차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고 갈 생각이었다. 눈을 가볍게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
차 안은 고요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확실히 별리된 공간에서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지금 이곳은 온전히 시우와 산호, 둘만의 공간이었다.
“……산호야.”
시우가 여전히 시트에 완전히 기댄 채로 고개만 살짝 틀어 산호를 향했다. 감았던 눈도 가늘게 떴다. 거의 반대쪽 차 문에 달싹 달라붙다시피 앉은 산호가 시우를 돌아보았다. 표정이 조금 뾰족했다.
“페로몬… 풀지 마.”
산호가 조금 당황한 듯 입술을 물었다. 미미하게 흩어지던 오메가의 페로몬이 공기 중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산호가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죄송… 해요.”
“…….”
“…….”
“…….”
“그냥… 다른 오메가 냄새 때문에.”
응? 시우가 반문하며 살며시 눈가를 비틀었다. 아, 그렇지. 오메가 클럽에서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이 잔뜩 묻었을 것이다. 달싹 달라붙어 페로몬을 흘리던 그 오메가의 향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시우에게도 느껴졌다. 시우가 말했다.
“아, 미안해. 많이 불편해?”
“…….”
“생각…을 못했네, 내가.”
“…….”
“많이 불편하면 집에….”
“아니, 괜찮아요.”
샐쭉하게 대답하는 산호를 잠시 바라보던 시우가 배시시 웃었다. 산호의 표정과 말투는 비죽한데, 내용은 영 딴판이었다. 왜? 또다시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나한테 다른 오메가 냄새나는 거 싫어?”
산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시우는 더욱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냥 다른 오메가 냄새가 싫은 거야, 아니면 나한테 다른 오메가 냄새가 밴 게 싫은 거야.”
왜 이런 짓궂은 질문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조금 황당했다. 하지만 골이 난 산호의 표정을 보면 자꾸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시우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느릿한 말이 이어졌다.
“네가 싫으면 앞으론 조심할게.”
“…….”
“네가 싫으면, 다른 오메가 냄새 안 묻히고-.”
“왜요?”
또다시 비죽 가시가 선 말투에 시우가 눈을 떴다. 마주 본 산호의 조그만 얼굴이 저를 향해 있었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무얼까,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왜 다른 오메가 냄새 안 묻힌다고 하시는 건데요. 그건 그냥 선배 마음이잖아요.”
시우가 천천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야….”
“…….”
“네가 싫어하니까.”
시우 자신도 논리적인 대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짓 또한 아니었다. 아, 생각보다 많이 취한 걸까. 시우가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누르며 산호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나 너한테 들어달라고 하고 싶은 소원 정해놨었어.”
“또 무슨-.”
“그런데, 그 소원 방금 써버렸잖아. 오늘 약속 취소하라고.”
산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곧 조그만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래서요?”
“그런데 처음 들어달라고 하려고 했던 소원… 네가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
“…….”
“그러려면 나도 네가 원하는 거 하나 더 해줘야 하니까.”
당연하다는 듯 등가교환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우를, 산호는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다른 오메가 안 만날게. 대신 너 내 소원 들어줘.”
조금은 억지스러운 말이었다. 둘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가라앉았다. 어쩌면 조금 길었을지도 모를. 머릿속이 웅웅 울리는 기분을 느끼며 시우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마침내 산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원이… 뭔데요.”
아, 들어주는 건가. 시우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었다. 천천히 입을 뗐다.
“알파들 만나고, 데이트해 주고, 그런 거… 하지 마.”
산호가 입을 다무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손이 영 무거웠다. 마치 손끝에 추를 매단 것처럼 사실, 손이 무겁지 않아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손대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대신 시우는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왜요…? 그게 선배랑 무슨 상관인데.”
시우는 다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보다 살짝 더 거친 손길이었다.
“위험하니까.”
“…….”
“그런 거, 위험해.”
“그러니까 왜요. 내가 위험하던 말든 선배가 무슨 상관이신데요.”
저 애는 언제쯤 저 뾰족한 가시를 눕혀줄까. 이제는 나랑 조금 가까워 진 거 아니었나. 아직도 내가 많이 불편한 걸까. 산호를 바라보며 시우가 눈을 깜빡였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 그 안에 자리한 따뜻한 밤색의 동공에 산호가 어릿하게 맺혔다.
“너 내 후배잖아. 아끼는 후배.”
“……후배.”
“응, 후배.”
시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산호가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세게 짓씹는 것은, 미처 보지 못한 채였다.
***
늦은 시간이었다. 인혜는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는 중이었다. 며칠째 흥미진진하게 읽던 추리소설이었는데, 오늘은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잡념이 가득한 머릿속에 얼핏 시우에 대한 생각이 스쳤다. 오늘 시우 선배 엄청 멋있었는데. 단정하지만, 또래 학생들처럼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던 그가 오늘은 똑 떨어지는 슈트를 입었었다. 어려운 약속이 있다나. 회사와 학교를 병행하다 보니 더러 이런 일이 있기는 했었다.
스리피스 슈트 차림으로 학교에 등장하면 무척 위화감이 들 법도 한데, 시우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물론 이목을 집중시키기는 했다. 하지만 진시우는 늘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연예인 좋아하는 팬도 아니고. 인혜는 작게 도리질을 쳤다.
“…….”
인혜가 시우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성적인 호감이 한 톨도 없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보다는 멋진 사람을 동경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혹은 형질인에 대한 동질감 같은 것이거나.
인혜는 시우가 알파일 거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 그건 시우의 배경 때문이 아니라, 시우가 풍기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세심하게 공을 들여 빚은 듯 유려한 외모도 그랬고, 큰 키와 잘 다듬어진 체형도 그랬다. 인혜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을 철저히 숨기고 있는 것처럼, 시우도 알파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오메가인 자신과는 다르게 귀찮은 상황을 마주하기 싫어 구태여 형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일 테지만.
그때 느닷없이 인혜의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인혜는 무심결에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액정에 뜬 알람을 보곤 이내 인상을 와락 구긴다.
“아, 또야….”
불법 메신저였다. 질 낮은 인간들이 떳떳지 못한 일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메신저. 다크웹과 마찬가지로 사법당국의 골머리를 아프게 하는 불법 네트워크였다. 이것들은 마치 컴퓨터의 바이러스처럼, 혹은 그보다 더 지독하게 핸드폰에 자동 다운로드 되곤 했다. 삭제해도 다시 다운로드되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오메가인 인혜에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무슨….”
어디서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그 루트야 헤아리자면 셀 수도 없이 많을 테니까. 암암리에 불법적으로 개인정보가 사고 팔리는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개중에 오메가의 정보는 가장 고가에 팔린다. 그렇게 팔린 정보는 지금처럼 지저분한 메시지를 뿌리는 데 사용되곤 했다.
[구인 : 오메가(남녀무관) 데이트 1회 1,000,000원 지급]
데이트 따위에 누가 백만 원이나 쓴다고. 인혜는 신경질적으로 바이러스처럼 깔린 메신저를 삭제하기 위해 핸드폰을 쥐었다. 그때,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너 H대생이지?]
인혜는 눈썹을 찌푸리며 방금 도착한 메시지를 재차 확인했다. 이 메시지를 보낸 계정은 처음 보는 계정이었다. 방금 전 지저분한 광고 메시지를 보낸 계정과 같은 것이었다.
개체 수가 얼마 되지 않는 오메가의 정보가 얼마나 세세하게 팔리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신분을 묻는 경우는 없었다. 불쾌감보다 앞서 공포감이 먼저 밀려들었다. 빨리, 빨리 신고를 해야…
[겁 먹지 마]
인혜가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메시지가 이어 도착했다.
[그냥 잡담이나 하려는 거니까]
[H대 경영학부 xx학번 백산호. 알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과 내용이었다. 연달아 메시지가 도착하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인혜의 표정이 조금씩 뻣뻣하게 굳어갔다.

আৱদ্ধ ফেৰ'মন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