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시우는 닫힌 침실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산호가 조금 늦게 일어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가기 전, 얼굴이라도 보고 갈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결국 산호는 어젯밤 늦은 식사를 마치지 못했다. 시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산호는 마지못해 숟가락을 움직이던 손을 우뚝 멈추어 보았다. 시우는 반찬 투정하는 어린아이 보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말없이 식사를 물려주었다. 자꾸만 산호의 마른 팔목과 가는 목덜미로 시선이 움직였다. 너무 말랐는데… 든든하게 식사를 챙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시우를, 산호는 속도 모르고 말가니 웃으며 바라보았다. 시우도 가만히 마주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산호가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침실 문이 열리지 않은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시우는 손목의 시계를 흘끗 바라보곤, 마지막으로 침실 문을 확인하듯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었을 때 시우가 없는 것을 보면, 산호도 시우가 학교에 갔다는 사실쯤은 금방 눈치챌 것이다. 말없이 출발해도 괜찮겠지.
시우가 막 신발을 신으려는 찰나, 침실 문이 달칵 열렸다.
“선배. 같이 가요.”
말끔히 옷을 차려입은 산호가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꾹 닫힌 문 너머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까. 산호의 얼굴이 반듯했다. 시우가 당황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일어나 있었어?”
“네.”
태연하게 시우의 옆으로 다가와 하얀 운동화에 발을 밀어 넣는 산호를 시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산호야, 뭐해?”
“학교 가려고요.”
시우가 눈썹을 조금 더 깊게 찌푸리며 산호를 바라보자, 산호는 말간 얼굴로 시우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저도 갈래요, 학교.”
후, 얕은 한숨이 터졌다.
“백산호,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
“회사 가서는 손 다치고, 먼저 자라는 말도 안 듣고, 저녁도 안 먹고. 학교 쉬라는 말도 안 듣는 거야?”
산호의 입술이 옴칠 다물렸다. 비죽 기울어진 입술로 조그만 목소리를 냈다.
“…선배도 내 말 안 들으면서.”
“내가 언제.”
“맨날… 다른 오메가 냄새 묻혀 오고….”
하, 시우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기분 좋은 웃음으로 바뀌었다. 시우는 눈살을 찌푸린 채로 입꼬리를 둥글게 말았다. 비죽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산호를 향해서였다. 눈앞의 이 애가 신기했다. 엉뚱하기도 하고, 대담하기도 하고. 때론 부끄러워하면서 온통 제멋대로였다. 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가 투정을 부리면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와, 진짜 한 마디를 안 진다, 백산호.”
“…그래서 싫어요?”
푸흡, 시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눈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응, 미워. 엄청.”
“그래도… 저 학교 가고 싶은데… 선배 혼자 가는 거 싫단….”
눈치를 보듯 흘끔 눈을 올려 뜨는 산호를 향해 시우가 항복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같이 가.”
산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시우는 둥글게 호를 그린 입술을 가만히 말아 물었다. 잘 웃어주지 않는 이 애의 웃는 얼굴만으로도 이 애의 말을 들어주는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이 피어올랐다.
***
학교 주차장에 주차를 할 때부터 집요한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운전석, 그리고 조수석. 시우와 산호가 차례로 내리자 음습한 시선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더러는 고개를 쭉 빼고 노골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산호가 담배형 페로몬제를 피웠던 날,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이 제법 많다는 것은 시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산호가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했었는데.
“…….”
산호는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러니 그날 제 스스로의 모습이 어땠는지, 그 모습 덕에 어떤 식으로 소문이 부풀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쏟아지는 시선쯤이야, 시우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산호는 조금 달랐다. 무척 불편할 수도 있고, 실제로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호는 호텔 안에만 있는 것이 영 답답한 모양이었다. 어제 회사에 데려가면서도 생각했지만, 시우는 이게 옳은 판단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산호는 시우의 옆에 달싹 붙어 움직였다. 연신 시우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맑게 빛났다. 다른 학생들이 저와 시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순수하게 시우와 함께 있는 것이 기쁘다는 듯한 태도였다. 정말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묘한 불안감을 자아냈다.
“선배, 저 교양 수업인데.”
단과대 앞에서 산호가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산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른 건물을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무심코 걸음을 떼던 시우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
시우의 팔 소매를 쥐고 있던 산호의 손이 스르르 떨어졌다. 부모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머뭇대는 모습이었다. 시우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응. 수업 잘 듣고 와.”
“네.”
“수업 끝나면….”
시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 애를 너무 과잉보호 하고 있는 걸까. 산호가 어린애도 아닌데. 무엇보다도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 시우는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음, 수업 끝나면 점심 먹자.”
산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하는 목소리도 제법 밝았다. 시우는 멀어지는 산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산호의 발걸음을 바라보며 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우의 수업은 한 시간가량의 짧은 강의였다. 고작 60분 남짓의 시간이 무척이나 지루했다. 시우는 강의실 가장 뒷자리에 앉아 턱을 괸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단조로운 교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맺혔다. 그러나 의미 없는 음의 나열일 뿐이었다. 도리어 뇌리에 박혀오는 건 다른 아이들의 소리죽인 속삭임이었다.
“존나 뻔뻔하더라.”
“어, 나 완전 어이 없어가지고.”
“거머리처럼 찰싹 붙어서 걸어오는 거 봤지. 무슨 사귀는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뻔뻔하게 얼굴 치켜들고.”
“솔직히 나는….”
시우 선배도 이해 안 가. 더욱 낮춘 목소리였지만, 똑똑히 귀에 들려왔다. 시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바라본 채였다.
“…….”
학교에 저와 산호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인혜가 귀띔을 해 준 이후로는 확신했다. 저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예전보다 농도 짙은 호기심을 띄는 것도, 조롱이 섞이기 시작한 것도 알았다. 그리고 거기에 안쓰러운 기색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것 까지. 턱을 괸 손끝으로 시우는 자신의 뺨을 톡 톡 두드렸다.
“…….”
내가 왜 안쓰러운 걸까. 내가 왜 이해가 가지 않을까. 난 오히려 소문을 퍼트리고 부풀리는 너희가 이해되지 않는데. 유달리 산호에게 적대적인 시선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로 오메가에게 편견 어린 시선이 쏟아지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산호에게는 유난히 더 그런 듯싶었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지.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할게요. 과제는 다음 주까지 서버에 올려놓으시면 됩니다.”
교수의 말을 끝으로 수업이 마무리됐다. 인사를 마친 학생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우 역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껄끄러운 마음이 미진하게 남아있었지만, 이내 털어버렸다. 색안경을 낀 시선이나 소문은 시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핸드폰을 슬쩍 확인하고는 산호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우는 학생회관 앞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시계를 계속 확인한다고 해서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도 아닌데, 수도 없이 흘끗 시계를 내려다보길 반복했다. 마침내 멀리서 하얀 얼굴이 비죽 솟은 것을 보자, 시우는 빙그레 웃으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산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산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있었다.
“선배!”
조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호가 시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급히 걸어온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살짝 달아오른 뺨으로 숨을 골랐다. 유난히 햇살이 밝게 내려앉았다. 시우는 눈이 부신 듯 살짝 찌푸린 눈으로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수업 잘 들었어?”
산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그만 머리가 크게 움직이자, 시우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반짝반짝한 눈과 홍조가 오른 뺨. 영락없이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 같다. 시우가 웃으며 고갯짓으로 학생회관을 가리켰다.
“점심 먹어야지.”
“어… 여기서 먹어요?”
산호가 조금 당황스러운 듯 묻자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다른 거 먹으러 갈까?”
“아뇨, 그건 아닌데… 선배도 이런 거 먹는 줄 몰랐어요.”
엉뚱하다는 듯 시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게 뭔데?”
산호가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오물댔다.
“어… 그러니까… 선배는 되게 좋은 것만 드실 줄 알았는데….”
맑게 웃음을 지으며 시우가 산호의 손목을 쥐었다.
“응, 나 좋은 것만 먹는데. 이거 좋은 거야. 우리 학교 영양사 선생님들 다 훌륭하단 말야.”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산호가 더욱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시우는 큭큭 웃으며 부드럽게 산호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깔끔하고 넓은 학생회관 내부로 들어서며 장난스레 말했다.
“여기서 제일 좋은 걸로 사줄게. 산호 너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마침내 산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 좋게 발걸음을 떼며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수업 시간에 들었던 불쾌한 언담은 사소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불쾌한 마음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시우가 말한 학생회관에서 제일 좋은 것이란, 특식이 포함된 학식이었다. 오늘의 특식은 불고기 볶음이었다. 시우는 유쾌한 기분으로 배식구 앞에 나란히 줄지어 선 학생들 사이에 섰다. 시우의 앞에 선 산호가 연신 시우를 돌아보았다.
산호가 불고기 볶음을 배식 받고 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시우가 냉큼 산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시우는 눈꼬리를 휘며 배식 담당자에게 조금 더 주실 수 있겠느냐 물었다. 산호의 식판을 시선으로 가리키면서였다. 배식을 하던 중년 여성은 푸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호는 제 식판 위에 더해지는 수북한 불고기 볶음을 바라보곤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지는 것을 보니 당황한 게 분명했다. 시우가 킥킥 터지는 웃음을 꾹 참으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거 다 먹어야 돼. 음식 남기면 벌 받아. 산호가 무어라 항변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시우는 모르는 체하며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다. 물론, 입가에는 둥그런 미소가 남아있었다.
한창 점심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라, 학생회관에는 빈자리가 많지 않았다. 용케 좋은 자리를 찾아낸 산호가 시우를 향해 눈짓하며 자리에 앉았다. 시우가 빙그레 웃으며 산호를 따라 움직였다. 사실, 학생들이 많은 학생회관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산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다행한 일이었다. 산호의 맞은편에 앉은 채 시우가 산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백산호.”
“네?”
“너 진짜 그거 다 먹어야 돼.”
산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착하다. 시우가 산호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북적한 학생회관에서 평범한 식사를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이 무척이나 기꺼웠다.
산호는 정말 제 말처럼 제법 싹싹하게 식사를 했다. 손이 부지런히 움직였고, 하얀 쌀밥이 동그랗게 숟가락 위에 오르기도 했다. 시우는 열심히 입을 오물대는 산호를 바라보며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둥글게 쌀밥이 올라간 숟가락 위에 반찬을 얹어주면 이 애는 당황한 얼굴로 시우를 바라볼 것이다. 그 얼굴을 보는 것도 참 즐거울 텐데. 제 손이 멈춘 것도 모르고 시우가 상상을 하며 픽 웃고 있을 때, 산호는 식사를 마친 듯 젓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다 먹었어?”
“네, 배불러요.”
“물 가져다줄게.”
시우가 몸을 반쯤 일으키자 산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제가….”
“아냐, 앉아있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산호를 억지로 앉히며 시우는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자외선 살균기 안의 스테인리스 컵 두 잔을 꺼내 물을 가득 채우면서도 시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룽져 있었다. 찰랑찰랑하게 컵을 채우고 몸을 돌려세웠을 때 연신 미소가 올라 있던 시우의 입가가 천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
시우와 산호가 앉아있던 테이블 앞에 몇 명의 학생들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식판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반납을 하러 가려는 모양인가 싶었지만, 품새를 보아하니 그저 지나가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산호의 주변을 맴도는 쪽에 가까웠다. 한 명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그의 얼굴에 다분히 조롱이 섞인 웃음이 떠올라 있는 것을 확인하자, 시우의 눈가가 빠르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시우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공사 친다며. 능력도 좋다?”
일부러 성질을 돋우려는 의도가 명백한 목소리였다. 낄낄거리는 웃음이 주변에서 터져 나왔지만, 반듯이 앉은 산호는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야, 간도 크다. 보통은 누울 자리 보고 다리를 뻗지 않나. JR을 건드리네, 백산호가.”
“그러게. 보통은 구멍가게 사장 아들이어도 쫄려서 대뜸 모가지부터 빨지는 못하지 않냐.”
조롱 섞인 험담이 한 차례 쏟아졌다. 남자애 하나가 어이쿠, 과장된 소리를 하며 친구들 틈 사이를 비집고 움직였다. 산호의 어깨를 툭 치는 모습이 몹시도 치졸했다. 의도는 뻔했다. 자신의 의도를 숨기려는 노력도 없이 남자애가 들었던 식판이 산호의 머리 위로 기울어졌다. 슬로우모션처럼 그 모습이 시우의 눈에 새겨졌다.
“아…!”
식판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먹다 남은 국과 잔반이 우수수 쏟아졌다. 시우가 산호를 황급히 뒤로 당기며 팔로 감싸 안았다. 미세한 간발의 차이였다. 산호의 몸이 뒤로 쑥 물러나고 쏟아진 음식은 고스란히 시우의 어깨와 팔뚝으로 쏟아졌다.
“시우… 선배?”
일부러 식판을 엎은 남자애의 눈이 동전만큼 커다래졌다. 시우는 황급히 산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더럽혀진 자신의 어깨에는 한 톨의 관심도 없었다. 남자애만큼이나 산호의 눈이 크게 뜨인 채였다.
“괜찮아?”
“선배… 어깨….”
“안 튀었어?”
산호의 얼굴과 어깨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시우의 등 뒤에서 잔뜩 소리를 죽인 목소리가 웅얼대며 들려왔다. 진짜네. 백산호 건드리면 진시우가 가만히 안 둔다면서. 소문 진짜잖아. 시우가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식판을 엎은 남자애는 갑작스레 나타난 시우의 등장에 몹시 놀란 듯 보였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미약한 환희가 발광하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값싼 흥분이 남자애의 얼굴에 역력히 떠올랐다. 시우의 눈썹이 가쁘게 찌푸려졌다.
“선배, 선배가 갑자기….”
남자애는 더듬거리면서도 신이 난 목소리로 중얼댔다. 시우는 여전히 더럽혀진 제 어깨는 확인하지도 않은 채 남자애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뭐 하는 거야?”
되도 않는 핑계를 웅얼거리던 남자애는 답지 않게 싸늘한 시우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길쭉하게 찢어졌던 남자애의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어갔다.
“…네, 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아… 그게, 저, 실수로….”
남자애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시우는 아득 이를 깨물었다. 잘 아는 학생이 아니었다. 같은 학부생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흐릿한 인상이었다. 동현과 어울리는 것을 몇 번 본적이 있는 정도였다.
“실수.”
시우가 타인에게 화를 내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있다고 해도 무척 가까운 사이에나 벌어지는 일이었다.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 그만한 감정 소모를 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분노의 발열점이 갑작스레 낮아지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속에서 무언가 왈칵 끓어올랐다.
“있잖아, 나 조금 화나려고 해.”
시우의 말에 남자애는 눈을 끔뻑이며 입을 헤 벌렸다. 늘 상냥한 모습의 시우만 보아왔던 남자애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위협적일만 했다. 남자애의 눈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실수로 그랬어? 정말로?”
“그, 그러니까….”
“아니잖아. 너 일부러 그랬잖아.”
“죄송해요. 그게… 일부러는 진짜 아닌데….”
“나 거짓말 싫어해.”
시우가 성큼 한 걸음 다가서자, 남자애가 딸꾹질을 했다. 끕, 남자애의 가슴이 튀어 오르고 안색이 파리하게 식어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흥밋거리를 물은 주변의 시선이 가차 없이 쏟아졌다. 고개를 쭉 빼고 지켜보는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이 상황이 불쾌한 소문에 불을 지필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건 아무 관심 없었다.
“네가.”
“…….”
“네가 이거 일부러 쏟았잖아.”
“…….”
“일부러, 산호 머리 위에 쏟으려고 했잖아. 네가.”
남자애가 끕, 끕 소리를 연달아 내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차갑게 식은 시우의 얼굴과 어딘가 붉은빛을 띠는 것 같은 눈동자까지 모두 낯선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걸까? 더러운 오메가한테 식판을 엎을 뻔 했다는 게? 진시우가 이렇게 잡아먹을 듯 몰아붙일 만큼 그렇게 잘못한 일인 걸까?
“왜 그랬어?”
“선, 배….”
“산호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아니, 선배 그게….”
“산호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시우의 손이 남자애를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시우의 커다란 손은 남자애의 어깨 위에 올라갈 뿐이었지만, 몹시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남자애의 어깨에 시우의 손이 얹혀지자, 누군가 시우의 손목을 덥썩 잡아 왔다.
“야, 야, 진시우.”
시우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저를 잡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구경이라도 난 듯 둘러싼 학생들 틈을 제치고 나타난 그는, 시우의 동기이자 친구인 승현이었다. 제법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얼굴에 잠시나마 붉은빛이 감돌았던 시우의 눈동자가 다시 따뜻한 밤색을 띠기 시작했다. 승현이 얕게 한숨을 내쉬며 시우의 손을 놓아주었다.
“야, 여긴 애들도 많은데….”
시우를 타박하듯 중얼거린 승현은 홱 몸을 돌려 여전히 딸꾹질을 하고 있는 남자애를 바라보았다. 잔뜩 구겨진 인상으로 남자애에게 거칠게 입을 열었다.
“너네 빨리 가.”
“아, 으… 네.”
“한 번만 더 남 괴롭히고 그래. 고등학교 일진도 아니고 쪽팔린 줄 알아야지.”
남자애에게 승현의 말은 오히려 달가운 것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황급히 자리를 떴다. 많은 학생들 앞에서 꼬리를 말았다는 사실이 창피할 터였다. 그들이 자리를 뜨자 승현이 시우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너 괜찮냐?”
승현의 시선이 더럽혀진 시우의 어깨에 머물렀다. 시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제야 제 어깨를 흘끗 바라보았다. 시우가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승현이 또 한 번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사람 많은 데서 애를 왜 잡으려고 해… 사고 나는 줄 알았잖아.”
너답지 않게 화는. 승현이 중얼거리며 뒷말을 덧붙였다. 시우가 승현을 마주 보며 여상히 대답했다.
“잔반 뒤집어썼는데 화내는 게 이상한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봐. 너 좀 예민하다니까. 승현은 천천히 시우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정확히는 시우의 다른 쪽 옷 소매를 쥔 불안한 얼굴의 산호를 향해. 시우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승현의 표정에 묘한 빛이 잠시 떠올랐다 곧 가라앉았다.
“진시우, 너 요즘 되게 이상한 거 알지.”
“뭐가.”
“예민하잖아. 원래 너는 이런 거에 화내기는커녕….”
승현이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즘 너 소문도 얼마나….”
소문이라는 말에 시우의 눈썹이 가파르게 구겨졌다. 승현은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됐어. 소문 같은 게 뭐 대수라고. 난 그냥 너 걱정돼서 그래.”
“…….”
“야, 야. 됐어. 다음에 술이나 한 잔 하자.”
시우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너 병원이든 의무실이든 가야 할 것 같은데. 그거 뜨겁지 않았어?”
축축하게 젖은 시우의 옷을 바라보며 승현이 메스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내 어깨를 털며 승현은 몸을 돌려세웠다.
“나 스터디 간다. 전화할게.”
마지막으로 시우의 뒤에 서 있는 산호를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진 승현은 그대로 훌쩍 자리를 떴다.
“…….”
단번에 끓어올랐던 분노가 비누 거품처럼 사그러드는 것이 시우 스스로도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짜증스럽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승현이 저지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선배.”
더럽혀진 어깨가 아닌 반대쪽 소매가 슬그머니 당겨졌다. 시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산호야.”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시우가 입을 열자, 산호가 안도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선배 괜찮아요?”
단정한 눈썹이 아래로 축 처져있었다. 방금 전까지 분노가 치밀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일순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시우가 과장을 섞어 울상을 지어 보였다.
“아니, 안 괜찮아.”
“어디가요? 데인 거예요? 봐봐요.”
산호가 시우의 옷자락을 와락 붙잡자, 시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응, 데인 것 같은데. 따가워.”
“아, 어떡….”
산호가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승현이 자리를 뜨면서 웅성이며 모였던 학생들도 제법 흩어졌지만, 아직도 흥미로운 눈으로 둘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기는 했다. 산호는 입술을 슬쩍 깨물며 다시 시우를 바라보았다.
“선배, 옷 갈아입고 병원 가요.”
다급한 산호의 말에 시우가 픽 웃었다. 시우가 뒤집어쓴 건 팔팔 끓는 찌개 같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뜨겁긴 했지만,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보다는 잔반을 뒤집어썼다는 불쾌감이 더 컸다. 다행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산호가 뒤집어쓰는 것보다, 제가 뒤집어쓰는 편이 더 나았으니까.
“괜찮아.”
“아니, 그래도….”
“진짜야, 괜찮아.”
걱정에 눈썹이 찌푸려진 산호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시우가 변명하듯 웃었다.
“음, 그래도 옷은 갈아입어야겠다.”
“…….”
“수업 듣고 있을래? 옷 갈아입고 데리러 올 테니까-.”
“같이 가요.”
산호가 냉큼 시우의 손을 잡아 왔다. 갑작스레 쥐어진 손에 조금 당황한 시우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산호를 바라보았다.
“그냥 같이 가요.”
“너 수업 남았….”
“학교 가지 말라고 했던 건 선배잖아요. 수업 하나 빼먹는 게 뭐 어때서.”
시우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음, 목울대를 울리며 고민하던 시우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자리를 정리하고 학생회관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밝은 햇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둘의 복잡한 마음과는 무척이나 다르게.
***
도착한 곳은 JR 호텔이 아닌 시우의 오피스텔이었다. 시우가 샤워를 하고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는 동안, 산호는 널찍한 거실에서 바깥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텔과 마찬가지로 고층에 위치한 시우의 집은 무척 유려한 전망을 자랑했다. 어둠이 깔리고 도시 곳곳에 불빛이 켜지면 훌륭한 야경을 볼 수 있을 터였다. 잔잔하게 흐르는 한강을 빤히 바라보며 산호는 차가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둘만 있어야 했어. 다른 너저분한 시선이 깔린 곳에 선배를 두어서는 안 됐는데.
저에게 잔반을 뒤집어씌우려 했던 얼간이는 상관없었다. 시우 선배 왜 저래…? 선배 요즘 진짜 이상해… 중요한 건 웅성거리는 이들의 입에 시우가 올랐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것에 달라붙는 시선은 불쾌하다. 관심이 다글다글 뭉쳐 있을수록, 더 불쾌했다. 선배는 내 건데. 왜 내 것을 함부로 쳐다보고, 말을 얹는 거지? 그리고 시우의 손목을 잡았던 남자. 그도 같은 학부 선배였다. 승현이라고 했던가. 본래 시우와 잘 어울렸던 사이였음을 산호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우의 손을 잡는 건 견딜 수 없었다. 산호는 입술을 세게 짓물었다. 등 뒤에서 어떤 인기척이 느껴졌다. 산호는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산호야.”
“선배.”
“가자. 호텔 데려다줄게.”
시우는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산호를 마주 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산호의 얼굴이 조금 이상해 보였다. 시우가 다소 난처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어, 그냥 여기 있고 싶어?”
산호의 고개가 작게 좌우로 움직였다. 혹시 이 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아무리 넓고 편한 곳이라도 자신의 집만큼 편하지는 않을 테니까. 시우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산호가 먼저 입을 뗐다.
“선배 우리 다른 데 가면 안 돼요?”
다른 데?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의문을 담은 시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산호가 풀이 죽은 듯 주춤주춤 말을 이었다.
“멀리 안 가도 되는데… 그냥 바람 쐬러 가고 싶어요.”
“응? 지금?”
“바다 같은데요. 아무도 없는데.”
시우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바다? 조금 엉뚱한 얘기였다. 잠시 고민하는 듯했던 시우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강릉에 별장 있어. 바다 바로 앞.”
“아.”
“그런데 지금 바로 가도 될지 모르겠다. 묵은지 오래돼서 지저분할 텐데.”
산호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괜찮아요. 전 그냥 차에서 자도 괜찮아요. 아니 길에서 자도 괜찮….”
시우가 엉뚱하다는 듯 픽 웃었다.
“차에서 어떻게 자. 안돼, 불편해서.”
“안 불편해요. 저는 그냥….”
선배만 옆에 있으면 돼요. 시우는 뒷말을 삼키는 산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시우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찬찬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그냥 무작정 가자. 강릉이던 어디든 발 닿는 대로.”
“무작정…이요?”
“응, 아무 생각 없이. 가서 생각하지 뭐.”
곰곰이 생각하던 산호는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시우는 정말 아무런 계획 없이 출발할 셈이었다. 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에 어떤 장소를 지정하지도 않은 채 무작정 시동을 걸었다. 그래도 방향은 정해야 하지 않나. 산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우를 바라보았다.
“우리 어디로 가요?”
시우는 빙그레 웃으며 산호의 안전벨트를 채워주곤 대답했다.
“나도 몰라.”
“어…그러면….”
“그냥 신호 떨어지는 대로 갈 건데.”
산호의 동그란 눈이 가감 없이 깜빡이자 시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봐야 한국일 텐데, 뭐 어때. 걱정돼?”
“그렇다기보다는.”
“나랑 같이 있는데 왜 걱정해.”
액셀을 밟자 차가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색 세단이 유유히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주차장 끝에 고요히 서 있던 커다란 리무진에 번쩍 미등이 들어왔다. 산호와 함께 움직이던 시우의 시선이 닿지 않은 구석이었다. 사실, 시우는 주차장 안을 둘러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 옆에 선 오메가에게 온 정신이 팔려있었을 테니. 자신의 아버지 진 회장의 차량이 구석에서 저를 지켜보는 것도 모른 채.
리무진 내부에 은은한 불빛이 올랐다. 뒷좌석에 앉은 장년의 남자는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꼬아 올라진 무릎 위를 큰 손이 덮었다. 손끝이 톡, 톡 움직였다. 남자는 방금 전 아들의 차가 지나간 주차장의 입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
무작정 움직이겠다는 시우의 말은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갈림길이 나오면 산호에게 어디로 가고 싶어? 묻고는 산호가 대답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렇다 보니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오는 데에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자동차 전용 도로에 들어서고 나서야 시원하게 달릴 수 있었다. 시간을 꽤 소요한 터라, 해는 이미 지평선 끄트머리에 걸려있었다. 어둠이 빠르게 가라앉는 중이었다.
“이러다 우리 정말 길에서 자야 될지도 모르겠다.”
시우가 변명하듯 콧잔등을 찌푸리며 웃었다.
“전 그것도 좋은데….”
산호의 목소리가 제법 진심을 담은 것이어서, 시우는 난데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하하, 웃고는 고개를 기울여 산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쭉 가다가 마음에 드는 데 있으면 말해. 내려서 바람 쐬자.”
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디를 가도 상관없었다. 바다든, 산이든, 쓰레기가 쌓인 외진 곳이든. 같이 있는 게 중요하니까. 오직 단둘이서만. 전방을 바라보는 시우의 눈에 산호의 눈빛이 맺히지 못한 건 어쩌면 다행한 일이었다. 핸들을 쥔 채 시우는 빙그레 웃었다.
한 시간 정도 더 달렸을까, 고지대로 올라가는 도로가 이어졌다. 얼핏 지나친 간판을 보니 산속에 캠핑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돈되었던 도로가 점차 조잡해졌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를 지나 흙길이 이어졌다. 타이어에 흙 알갱이가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우는 미등을 켠 채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어둠이 가라앉고 난 후의 산길은 위험할 만치 새카맸다. 커다란 나무 앞에 다다라서야 시우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별그림 캠핑장>
다소 낡은 간판에 적힌 캠핑장 이름이 묘하게 낭만적이었다. 시우는 산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무 늦어서 여기서 자야될 것 같은데.”
“전 좋아요. 정말로.”
시우가 빙긋 웃으며 산호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관리인 있는지 보고 올게.”
차의 미등을 켜 둔 채로 시우는 운전석에서 내려섰다.
캠핑장은 무척이나 작았다. 평일인 탓인지 캠핑장을 이용하는 이들도 없었다. 관리실을 찾은 시우는 사정을 설명했다. 예약을 하지 않았지만 묵어갈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젊은 관리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계획 없이 와서, 그냥 차만 세워 놓을게요. 차에서 자도 괜찮아요. 그러나 관리인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장비를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낡긴 했지만, 그럭저럭 둘이 잘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라면이나 물 같은 건 매점에서도 구할 수 있다는 말도 함께. 시우는 관리인의 친절한 호의를 받아들였다.
관리인의 말처럼 텐트는 낡고 좁다랬다. 그래도 좋았다. 산호는 시우가 텐트의 폴대를 펴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저도 도와드릴 수 있는데. 산호가 웅얼거리며 말하자, 시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응, 도와줘. 식사 담당해줄래? 시우는 희미하게 불이 켜진 관리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라면 같은 거 파는 것 같던데. 시우의 말에 산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생각 없이 출발한 것 치고 나쁘지 않은 종착지였다. 관리인이 빌려준 장비는 작은 텐트와 캠핑 의자 두 개, 휴대용 버너와 냄비 등 식기 세트가 전부였지만, 그럭저럭 쓸 만했다. 아니, 충분했다. 낡은 냄비를 버너 위에 올리고 라면을 끓이는 산호의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시우는 킥킥 웃으며 잔뜩 집중한 산호의 얼굴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라면은 맛있었다. 흔한 김치도 없이 라면과 즉석밥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훌륭했다. 조금 쌀쌀한 날씨 외에는 완벽한 밤이었다. 시우는 자신의 카디건을 벗어 산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막 설거지를 마치고 온 산호는 어색하게 시우의 카디건을 여몄다.
캠핑 의자에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별그림 캠핑장>이라는 이름답게 검은 하늘에 무수한 별이 콕콕 박혀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예뻤다. 높은 고지대이기 때문일까, 공기도 몹시 맑았다. 한동안 나른하게 앉아있던 시우가 고개를 슬쩍 돌려 산호를 바라보았다. 시우와 달리 산호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우가 빙긋 웃으며 자신의 의자를 산호의 곁으로 가까이 끌어왔다.
“산호야.”
“네?”
“나 재미있는 얘기 해줘.”
산호가 슬쩍 눈썹을 늘어뜨리며 시우를 바라보았다. 나른한 표정을 지었던 시우의 눈꼬리가 반달 모양을 그리며 휘어졌다. 산호는 가만히 입술을 물었다.
“다른 사람 얘기 말고, 산호 네 얘기.”
“제 얘기….”
점점이 별이 박힌 하늘을 바라보며 산호는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산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가족 없어요.”
아, 시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두운 이야기를 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정작 산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무감했다. 오히려 덤덤하고 건조했다.
“엄마가 저 스무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거든요. 지금 사는 집이 저한테 남은 전부예요. 빚이 없는 게 다행일 정도예요.”
“아, 미안해.”
“아니에요. 전 엄마 없는 게 더 좋아요.”
“…….”
“엄마는 저 팔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거든요.”
시우의 눈썹이 잘게 찌푸려졌다. 팔다니. 무척이나 불쾌한 얘기였다. 그러나 시우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형적이고 메스꺼운 일이지만, 오메가에게는 제법 흔한 일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오메가는 괄시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높은 값어치를 가지고 있었다. 오메가 클럽에서 웃돈을 주고 어린 오메가를 사들이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악취미를 가진 자산가에게 팔려 가는 일도 더러 있었다. 미성년자인 산호를 산호의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휘둘렀을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저는 아주 어릴 때 발현해서… 10살도 되기 전에 팔려갈 뻔 했어요. 여덟 살 때였나. 엄청 부잣집이었는데 거기는 이상한 데는 아니었어요. 잡다한 심부름 해주고 하는 뭐, 그런 거.”
“…….”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은 안 나요. 그래도 엄청엄청 커다란 집이었던 건 기억나요. 어린 눈에도 진짜 부잣집이구나 싶었거든요. 엄마도 여기는 아주 부잣집이고 대우도 좋을 거라고, 그러니까 꼭 마음에 들게 행동해서 들어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어요. 왜 남의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잘 이해는 안 갔지만….”
“…….”
“그래도 저 그 집 진짜 가고 싶었어요. 부잣집이고, 대우가 좋고, 이런 거 말고 다른 이유 때문에.”
“무슨 이유였는데?”
“거기서 되게 예쁜 애를 만났거든요. 또래 남자애.”
“응.”
“엄청 예쁘고, 냄새도 너무 좋았어요. 그 애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 집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밤에 기도도 하고 그랬는데.”
“그랬는데?”
“모르겠어요. 그 집 어른들은 제가 마음에 안 들었나 봐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갔다는 얘기 들었을 때, 엄마가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몰라요. 엄청 많이 맞았어요. 저 같은 건 쓸모 없다고 하면서.”
시우는 가만히 입술을 물었다. 웅크리고 앉은 작은 아이가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가슴 한 구석이 쿡쿡 쑤셔왔다. 그건 고통과 닮은 감각이었다.
“엄마는 그 뒤로도 여기저기 알아봤던 모양인데, 어디도 저를 데려가겠다는 곳은 없었어요. 처음 봤을 때는 마음에 들어 하다가도, 나중엔 꼭 거절하는 식이었거든요. 그럴 때마다 엄마한테 맞는 게 일상이었어요. 우성 오메가면서 사람 홀릴 줄도 모른다고… 차라리 그냥 클럽에 팔아버지리 생각한 적도 많았어요.”
산호가 고개를 돌려 시우를 바라보았다. 찌푸려진 시우의 미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호는 살며시 손을 올렸다.
“지금 선배 얼굴 되게 무서워요.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고 있어요?”
산호의 손끝이 찌푸려진 시우의 눈썹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음… 화나서.”
“왜요?”
“몰라. 그냥 화나.”
너무너무. 산호의 입술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작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원래 오메가들은 다 이래요. 그래도 전 장학금 받고 좋은 학교 갔잖아요. 상관없어요, 옛날 일. 이제 엄마도 없고.”
산호의 손이 천천히 멀어졌다. 미간에 닿았던 온기가 멀어지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멀어지는 산호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시우는 숨을 고르며 인내했다. 이 애를 만지고 싶은 건 자신의 욕심에 불과했다. 시우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양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고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산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네 얘기 들으니까… 나도 생각나는 거 있어.”
“뭔데요?”
시우는 눈썹 끄트머리를 살며시 매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어릴 때, 어떤 애를 만났는데.”
“…….”
“그 애가 왜 우리 집에 왔는지 모르겠어.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불쑥 나타났거든.”
“…….”
“그런데 그 애한테 좋은 냄새가 났던 게 기억이 나서.”
“좋은 냄새요?”
“응, 엄청 기분 좋아지는 냄새. 사실 어떤 냄새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 그냥 기분 좋아지는 냄새였다는 것 정도만. 나도 너무 어릴 때였거든. 그래도 그 애 생각이 가끔 나기는 해.”
“…왜요?”
“그 애를 만나고 다음 날 발현했으니까.”
산호가 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발현 전이라서, 그 애가 형질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린 마음에 그 애가 오메가라고 생각했었나 봐. 오메가 페로몬은 다 이렇게 기분 좋은 건가? 생각했었어.”
시우가 의미 없이 피식 웃어 보였다.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마치 내밀한 속살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꽤 설레는 일이었다.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시우가 산호를 바라보았을 때, 산호는 다시금 시우에게 손을 뻗어왔다.
“…….”
“…….”
시우의 목덜미에 조심스레 손을 얹으며 산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배도 오메가 페로몬… 기분 좋아져요?”
“음, 그런 건 아닌데. 오히려 불쾌할 때가 더 많아.”
시우가 당황한 듯 웃었다. 목덜미 위에 얹혀진 산호의 손끝은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긴장이 되는 탓이었다.
“그럼 어릴 때 그 애 냄새만 기분 좋았던 거예요?”
시우가 빙그레 웃었다.
“아니, 산호 네 냄새도 좋아.”
산호의 손이 문득 멈추었다. 맥이 뛰는 곳, 정확히는 형질인의 페로몬 샘이 있는 곳을 짚었다. 손끝에 살짝 힘이 실렸다.
“선배가 다른 오메가 냄새 맡는 거… 싫어요.”
차라리 선배의 페로몬 샘이 고장 났으면 좋겠어. 다른 새끼들 페로몬 따위 아예 느끼지도 못하게. 시우가 가만히 제 목덜미에 올라온 산호의 손을 쥐어 아래로 끌어내렸다. 난처한 얼굴이지만, 따뜻한 미소는 여전했다.
“왜? 왜 싫은데.”
시우의 손에 의해 아래로 끌어내려지는 제 손을 바라보며 산호는 한동안 대답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음 순간 입을 연 산호의 말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산호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선배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글쎄. 산호 너는 해봤어?”
산호는 시우에게 잡힌 손을 여전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묘한 눈빛이었다. 산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저는 많이 했어요.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떨어져 있고 싶다는 생각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어떤데?”
“아무도 없는 데에서 선배랑 둘이 있고 싶어요.”
시우의 눈썹이 살며시 아래로 기울었다. 산호는 자신의 말이 무슨 상상을 불러일으키는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무구한 얼굴을 바라보며 시우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웃음보다는 한숨에 더 가까웠다.
“그럴까.”
“…네?”
“드라마에 그런 거 나오잖아. 돈 많은 주인공이 아무도 없는 섬 하나 사서 소중한 사람한테 선물하고, 단둘이 여행가고 그런 거. 나도 그 정도 능력은 있는데.”
애써 장난기를 머금은 목소리였다. 산호가 멀뚱히 시우를 바라보고 있자, 시우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농담이야, 그런 건….”
“전 농담 아니에요.”
시우의 말을 끊고 산호가 중얼거린 목소리는 작지만 또렷했다. 곱게 휘었던 시우의 눈꼬리가 천천히 곧아지기 시작했다. 둥글게 말려있던 입꼬리도 점차 완만해졌다. 산호는 제 손을 잡은 시우의 손끝을 만지며 시선을 내렸다.
“세달… 아니, 한 달요. 아니야, 일주일이라도 괜찮아요. 그냥 아무도 없이 선배랑만 단둘이 있고 싶어요.”
커다란 제 손안에서 꼬물꼬물 손끝을 쓰다듬는 산호의 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애는 무슨 생각일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욕구에 불을 지피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그런 말을,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나를 믿는 걸까. 시우가 손에 왈칵 힘을 주었다. 강한 악력이 제 손을 감싸자 산호가 고개를 들고 시우를 바라보았다.
“산호야, 있잖아.”
“네.”
“왜… 그런 말 하는 거야?”
“…그러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왜.”
둘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억겁의 시간만큼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먼저 입을 연 것은 시우였다.
“산호야, 나 좋아해?”
다물렸던 산호의 입술이 잇새에 짓눌렸다. 복잡한 마음이 산호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입 안 점막을 거세게 씹는 산호를 바라보며 시우의 눈썹이 가쁘게 구겨졌다. 마주잡지 않은 손이 산호의 입술을 향해 뻗어졌다. 그러나 산호는 살며시 고개를 틀었다. 시우의 손에 잡혀있던 손도 가만히 비틀어 뺐다. 일종의 거부였다. 시우는 가만히 손을 내렸다.
“…대답해야 해요?”
“…….”
“저 대답하기 싫은데.”
뻣뻣하게 굳었던 시우의 눈가가 아주 천천히 휘어지기 시작했다. 입술을 뚫고 나오는 시우의 목소리가 그 여느 때보다도 다정했다.
“그럼… 대답 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릴게. 나 기다리는 거 잘해.”
곱게 휜 시우의 눈이 산호를 나지막이 응시했다.
결국 시우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산호가 좁은 텐트에 몸을 말고 눕자 시우는 그저 품이 커다란 자신의 카디건을 덮어주고는 텐트를 빠져나왔다. 도무지 산호의 옆에 누워 잠을 청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산호의 옆이 아니라고 해서 잠이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번인가 텐트 안에서 산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 늦은 밤 누구에게 연락이 오는 걸까. 마음이 쓰였지만 시우는 잠자코 나란히 놓인 캠핑 의자에 앉았다. 산호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수한 별이 박힌 하늘은 마치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아름답고 황홀했다.
어떤 생각이 시우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산호가 대답하기 싫다고 했던 물음에 대해서.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 질문에 대해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늦은 시간에 울리는 핸드폰 알람에 마음이 쓰이는 시우 자신에 대한 생각이기도 했다. 한 번 싹을 틔운 생각은 점점 가지를 뻗어내고 잎사귀를 키워갔다. 고요한 산속의 청량한 공기가 생각의 싹을 점점 자라나게 했다.
어스름하게 해가 뜨기 시작하자, 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검색을 해보니 근방에 작은 식당이 있었다. 근방이라고 해도 왕복 한 시간은 족히 걸릴만한 위치였다. 시우는 닫힌 텐트의 입구를 잠시 바라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아침 식사를 사 오기 위해서였다.
시우가 아침 식사를 해 왔을 때, 텐트 앞 캠핑 의자에 산호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산호는 핸드폰 액정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살짝 찌푸린 얼굴이 제법 집중한 것 같았다. 방금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시우는 슬쩍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언제 일어난 걸까. 시우와 시우의 차가 사라져서 혹시 놀란 건 아닐까. 시우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산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핸드폰 액정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으며 시우를 말가니 올려다보았다.
“…선배.”
“일찍 일어났네.”
“네.”
산호의 하얀 얼굴에 물기가 남아있었다. 까만 머리카락 끝도 조금 젖어있었다. 막 세수를 마치고 나온 것처럼 말간 얼굴에 잠시 불안한 표정이 스쳤지만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빙그레 웃으며 산호의 옆에 앉았다.
“아침 사 왔는데.”
산호가 무릎 위에 얹혀진 플라스틱 용기를 바라보고는 시우를 돌아보았다. 시우가 변명하듯 웃었다.
“아침 식사는 백반밖에 안돼서. 포장도 안 된다는데 겨우 졸랐어.”
“…아.”
“근처에 식당이 거기밖에 없었거든.”
산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잘 먹을게요. 가벼운 인사에 시우의 눈꼬리가 곱게 휘어졌다.
“응, 이것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돼.”
산호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네, 다 먹을게요. 한 시간 넘는 시간을 달려 초라한 음식을 사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제법 짧았다. 출발할 때에는 아무런 계획 없이 움직여 동선이 좋지 못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달랐다. 시원하게 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산호는 차창을 열고 바람을 쐬기도 하고 눈을 끔뻑이며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시원한 바람이 산호의 까만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반듯하게 뻗은 이마가 드러나고, 볼록 솟은 입술이 둥글게 휘어지기도 했다. 핸들을 손에 쥔 채 시우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착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그러나 차는 금세 도심으로 들어섰다. 호텔 앞까지 도착하는 데에도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이 흘렀다.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운 시우는 산호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안 피곤해?”
조수석에서 내린 산호가 앞에 선 시우를 말가니 올려다보았다.
“네, 전 괜찮아요. 저보단 선배가 피곤할 것 같은데….”
“응? 아냐, 나도 괜찮은데.”
“…거짓말. 한숨도 못 잤으면서.”
시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러나 이내 산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괜찮아, 하루쯤은 아무렇지도 않아.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젯밤, 좁은 텐트의 제 옆자리가 채워지지 않은 것을 산호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편하게 잠들었으면 했는데. 둘은 나란히 호텔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몇몇의 여행객들과 슈트를 입은 이들이 호텔 안 로비에 드문드문 서 있었다. 위화감이라곤 없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른 시우는 버튼을 쿡 누른 후 산호를 향해 돌아섰다. 말을 건네려 입을 여는 순간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걸렸다. 시우의 시선이 누군가를 향해 움직였다.
“…….”
시우와 산호를 향해 다가온 이는 호텔의 컨시어지였다. 그의 걸음이 꽤 다급했다. 게다가 늘 침착했던 그의 얼굴이 초조한 듯 보였다. 불안한 시선이 시우와 산호를 차례로 훑었다.
“저, 이사님.”
약간 숨이 찬 듯 보였지만, 그는 시우를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시우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네, 무슨 일로?”
컨시어지의 얼굴에 일순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허리를 곧게 세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회장님이 와 계십니다.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버… 회장님이?”
“네. 사실 어제저녁부터 묵고 계십니다. 이사님이 일행분과 시크릿룸에 묵으신다는 걸 이미 알고 계신 터라… 이사님께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회장님께서 극구 만류하시는 바람에.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시우의 입술이 천천히 다물렸다. 어제저녁부터라면… 아버지 진 회장은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빈틈없이 짜여진 아버지의 스케줄이 몹시 빠듯하다는 것을 시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저녁 시간부터 다음 날 오후가 다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는 무척이나 이례적이었다. 긴박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시우가 황급히 산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시우에게 가깝게 당겨진 산호는 의아한 얼굴로 컨시어지와 시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우가 엘리베이터의 계기판을 흘끗 올려다보곤 산호에게 말했다.
“산호야, 먼저 올라가 있….”
그때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왔다. 산호를 향해 있던 시선이 컨시어지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산호를 잡은 시우의 손에 일순 힘이 실렸다. 본능적으로 제 등 뒤에 산호를 숨기듯 시우는 산호를 더욱 가까이 끌어왔다. 마침내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멈추고 커다란 그림자가 그들 앞에 섰다.
“시우야.”
진 회장이었다. 컨시어지가 급히 몸을 옆으로 물리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회장님. 이사님께서 방금 도착….”
진 회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하게 컨시어지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런 것 같구먼. 고맙네. 자네는 자리 좀 비켜주겠나?”
“네. 물론입니다, 회장님.”
컨시어지는 시우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다시 한번 진 회장을 향해 허리를 숙인 후 재빨리 자리를 피해주었다. 컨시어지가 인사를 건네는 짤막한 순간, 시우가 고개를 모로 기울여 산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먼저 올라가 있어.”
“저만요?”
산호는 그들 앞에 선 장년의 남자를 확인하고 싶은 듯했지만, 시우는 넓은 어깨로 산호의 시선을 막아왔다. 시우의 난처한 웃음이 대답을 대신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전자음 소리가 들리자, 산호는 시우를 잠시 올려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산호가 아무런 말 없이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스르렁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까지 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온전히 문이 닫히고 나서야 시우는 작게 숨을 뱉으며 아버지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아버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아버지를 향해 건넨 말은 대수롭지 않은 어투였다. 희미한 미소가 시우의 입가에 걸려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초조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분명 무언가를 암시했다. 진 회장 역시 시우의 초조한 마음을 눈치챘을 터였다. 그럼에도 진 회장은 아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네가 여기 있다길래 보러왔다.”
“연락 주셨으면 제가 찾아뵀을 텐데.”
“사실 네 집에 갔었는데 비어있더구나.”
“아, 그건.”
진 회장의 목소리는 책망의 기색 없이 느긋했다. 시우의 앞에 우뚝 선 그의 몸가짐도 그랬다. 시우는 넓은 호텔 로비를 훑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호텔 로비 한 가운데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아무리 JR 그룹의 총수 일가가 베일에 쌓여있다고는 하지만, 누군가는 그들을 알아볼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텐데. 시우가 입을 열려는 찰나, 진 회장이 시우의 의도를 파악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왕 시간내어 왔으니 기다리는 게 좋을 듯해서 기다렸다. 그래도 아들 얼굴은 보고 싶어서 말이지.”
“죄송해요. 제가….”
“괜찮다. 애비가 아들 기다리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진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 집도 호텔도 비우고 어디 다녀온 게냐.”
시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 진 회장은 의도가 없는 질문을 던지는 법이 없었다. 그건 아들인 시우에게 역시 마찬가지였다. 컨시어지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가슴 한가득 차올랐던 불안이, 어쩌면 훨씬 오래전부터 싹 틔웠을, 새벽 내내 캠핑장의 하늘 아래 앉아 쑥쑥 키운 불안한 생각이, 예상보다 빨리 눈앞에 실체를 드러낸 셈이었다. 시우가 천천히 대답했다.
“좀 답답해서 바람 쐬고 싶어서요.”
진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잘했구나. 요즘은 날씨도 좋고, 산은 공기가 좋지. 공기가 맑아 밤하늘도 보기 좋았겠구나.”
시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모르는 새 입 안 점막을 짓씹었다. 화려했던 어젯밤의 밤하늘을 아버지가 보기라도 한 듯, 마음이 온통 불안함으로 가득 찼다.
“요즈음 어울려 다닌다는 친구는 학교 후배라지? 가까운 사이인 모양이야. 같이 생활할 정도로.”
“네. 가까워요. 많이.”
단호한 시우의 말에 진 회장의 시선이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으로 향했다. 내내 인자하던 그의 얼굴에 순간 서늘한 빛이 올랐다.
“불편할 텐데. 알파와 오메가가 한 공간에 오래 함께 있는 건.”
엘리베이터 문을 빤히 바라보던 진 회장은 다시 아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시우야.”
얼핏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인자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다정함이 뚜렷한 위협을 암시했다.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이런 로비 한 가운데서 이야기를 건네는 상황만 보더라도. 진 회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오메가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는 게냐.”
시우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무감각해진 입술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오메가가 아니라… 산호에요. 백산호.”
진 회장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골치 아픈 일이 있는 게 맞나보구나.”
“…아닙니다.”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돈다고 하던데.”
“…….”
“네가 지저분한 소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안다. 아예 상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래도 네 이야기가 함부로 남의 입에 오르는 것을 그냥 두어선 모양새가 좋지 않아.”
“…….”
“그 소문이란 게 지저분할수록 더욱.”
“…….”
“그래서야 네가 대학까지 평범하게 졸업하도록 이 애비가 고집을 꺾어준 의미가 없지 않니.”
시우가 고개를 곧게 세웠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버지를 마주했다. 시우의 따뜻한 밤색 눈동자와 진 회장의 짙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시우가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 끼쳐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저한테 큰 의미 없어요. 대단하지도 않은 일이니까.”
진 회장은 다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안다. 암 알고말고. 마약 페로몬제를 푸는 범죄자나, 후미진 골목길을 통째로 밀어버리는 일 같은 건 별 것 아니지. 내가 알 필요도 없는 것들이야.”
“네, 그러니까-.”
“그런데 시우야.”
“…네.”
“너에게 의미 없는 일이란 게 무엇인지 조금 헷갈려서 말이다. 나는 내 아들이 오메가에 홀려 간 쓸개 다 내어주고 있다는 소문이 무척 불쾌한데, 정작 너는 그런 소문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참 이상하지 않니.”
진 회장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시우가 본능적으로 보호하듯 등 뒤로 숨겼던, 하얀 얼굴의 아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산산히 깨어진 도자기 인형과 닮은 얼굴의 그 애를.
“마치 그 오메가가 시우 너에게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아버-.”
“이 애비가 그런 착각을 할 뻔했다. 이제 애비도 늙는 모양이야.”
시우가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진 회장은 단호히 손을 들어 이를 저지했다. 빳빳하게 굳은 얼굴로 시우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가쁘게 뛰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시우 네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니까.”
“아버지, 제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진 회장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무척이나 싸늘한 미소였다. 진 회장이 아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네 반려를 찾는 것도 좋겠구나. 몇 군데 알아놓은 곳이 있으니 알고 있거라.”
“저는 절대로-“
“피곤하겠구나. 이만 가 보마.”
고압적인 목소리였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고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시우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
호텔 룸 안으로 들어온 산호는 가만히 소파 위에 앉았다. 널딴란 공간이 유독 공허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혼자 들어오는 거 싫은데. 이곳뿐 아니라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산호는 방금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았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는 누굴까. 시우는 자신과 그 남자가 마주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컨시어지가 해준 이야기로 미루어볼 때 그는 시우의 아버지, 진 회장이 분명했다. 자신의 시야를 가린 시우의 어깨가 뻣뻣했었다. 산호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젯밤 도착한 메시지에서도 그 사람, 진 회장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산호는 천천히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잠금을 해제하자 메신저 어플이 액정에 떠올랐다. 어젯밤부터 수도 없이 읽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
시우가 나가고 산호 홀로 텐트에 누워있을 때였다. 연달아 몇 개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늦은 시간에 연락이 올 만한 곳은 없었다. 산호는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 메시지가 누구에게 온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짤막한 음성 메시지를 받았던 그날처럼.
“…….”
마음 같아선 메시지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낸이가 자신이 짐작한 사람이 맞다면 분명 좋은 내용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시우에 대한 불쾌한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시우는 제 옆에 있었다.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마음처럼 움직일 수는 없었다. 호기심과 불안함이 그랬다. 산호는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짤막한 음성 메시지 이후로 도착한 텍스트는, 보낸이 만큼이나 비열하고 천박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메시지는 아침에도 이어졌다. 산호가 텐트 밖으로 나왔을 때, 시우가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산호는 망설이듯 메시지로 가득 찬 액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심호흡을 하며 음성 통화버튼을 눌렀다. 일반 전화와는 다른, 조잡한 연결음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 이야, 이게 누구야. 백산호잖아.
“…….”
- 연락 올 줄 알았어. 그런 문자 받고 가만히 있기는 쉽지 않지. 안 그래?
“…….”
- 뭐야,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해야지. 왜 닥치고 있어? 내가 한 얘기가 사실인지 궁금해서 전화한 거 아니었나?
“……그래.”
산호가 조용히 대답하자, 수화기 너머 주철이 키득키득 웃었다. 산호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며 앞을 노려보았다. 마치 눈앞에 주철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매서운 눈빛이었다. 주철이 큭큭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뭐 어떤 거부터 말해주면 되려나. 네 선배 새끼가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산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주철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 너도 그 음성 들었을 거 아니야. 오메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거. 그거만 한 증거가 어디 있냐. 참고로 내 목소리 같이 들어간 녹음은 불법 아닌 거 알지? 백산호 너 낙동강 오리알 되고 싶지 않으면 잘 생각해. 어차피 그런 돈 많은 새끼들한테 너는 잠깐 데리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억울해도 어쩌겠냐, 세상이 그런걸.
“선배네 집에서 오메가 구한다는 건 무슨….”
- 아.
주철의 목소리가 한층 더 신이 난 듯 커졌다.
- 그냥 오메가 구하는 게 아니라 혼처 구하는 거라고. 왜, 오메가라고 하니까 너도 가능성 있을까 봐 그래? 미친 새끼. 지금 진시우랑 엮어주려는 게 누군 줄 알고. JR급 기업 아들놈인데.
“거짓말… 하지 마. 실제로 그렇다고 해도 네가 어떻게 그걸-.”
-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정 모르는 소리 하네. 원래 그런 얘기는 우리 같은 애들한테 제일 먼저 들어와. 상대 뒷조사는 해야 할 거 아니야. 뒤 구린 새끼면 상대가 뒷조사하기 전에 그거 숨겨야 하고. 안 그래도 진시우 짝으로 엮으려는 새끼가 좀 지저분하게 놀았던 놈이라, 입단속 해달라고 부탁받았거든. 뭐, 진짜 얼마 안 됐어. 그래서 지금 아주 빡세게 작업하고 있다는 거 아니냐.
짝… 선배의… 산호의 눈가가 잘게 떨려왔다. 그저 뱉어진 단어에 불과했지만 견딜 수 없는 불쾌감이 산호를 순식간에 잡아먹었다. 불쾌감? 아니, 이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분노라고 불리기에도 부족한 감정이었다. 산호가 대답 없이 한참을 있자, 주철이 슬그머니 입을 뗐다.
- 왜? 그 새끼 누군지 궁금해? 못 알려줄 것도 없긴 해. 근데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곧 알게 될걸. 일이 엄청 빨리 진행되는 것 같거든.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뿌릴 모양이더라고. 너도 참 기분 좋겠다. 그렇게 꼬리 살랑거려서 옆자리 꿰찬 알파 짝이 누군지 9시 뉴스로 확인하면. 그치?
주철이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꺽꺽 숨이 넘어갈 정도로 과장된 웃음이었다. 여전히 산호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주철의 웃음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가 짐짓 선심을 베푸는 목소리를 흉내 냈다.
- 알았어. 다는 아니고 조금은 알려줄게. 이름 말하면 너도 아는 외국계 대기업 차남인데, 외국물 오래 먹은 애라 좀 더럽게 놀았던 애야. 그래도 귀한 집 아들이라 그런지 앞에서 조신하게 구는 건 잘하나 보던데. 진시우 성격에 걔가 약한 척, 착한 척하면 홀라당 넘어가지 싶다?
잔뜩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걔가 그러거나 말거나, 넌 할 말 없잖아. 그게 네가 쓴 방법인데. 진시우 앞에서 약한 척, 착한 척한 거. 아니야? 걘 아예 집안끼리 나서서 맺어주려고 하니까 찰싹 달라붙겠지 뭐. 너랑은 다르게. 넌 진시우랑 같이 서 있기만 해도 더러운 소문 따라붙는 급이고, 걘 천생연분 소리 듣겠지.
“…….”
- 그러니까 백산호 너, 머리 잘 써. H대에 너랑 진시우 소문 어떻게 났는지 알고나 있어? 그 소문 더 키우는 거 일도 아니야. JR 회장이 사생활 얘기 더러운 거 딱 질색하는 성격이라 안 그래도 그런 거에 예민하다던데. 여기서 더 더럽게 소문나면 매스컴도 못 막아. 애시당초 진시우도 질색하지 않겠냐? 오메가한테 홀려서 사족 못 쓰는 병신 소리 듣는 건데. 너한테 정 떨어질 만도 하지.
“그 소문들… 네가 낸 거지.”
- 시작이 누군지 뭐가 중요해. 알아서들 더럽게 소설 잘만 쓰던데. 야, 난 깜짝 놀랐다. 너네 학교 익명게시판에 진시우랑 너랑 화장실에 떡치는 거 봤다고 개소리도 올라오던데.
산호의 입매가 빠르게 굳어갔다. 자신에 대해 무어라 말하던 관심 없었다. 하지만 시우는 달랐다. 그런 더러운 이야기를 시우가 듣는다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산호가 입을 열었다.
“너일 거라고 생각했어. 처음 소문낸 사람.”
- 뭐, 나면 어떡하려고?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해?
“죽여버리기 전에 선배 근처에서 떨어져.”
핸드폰 너머 주철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철은 진심으로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 네가 진시우 옆에서 떨어지라고 하면 내가 예, 알겠습니다. 진시우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겠습니다, 이럴 것 같냐?
“……농담하는 거 아니야. 죽일 거야, 너.”
- 이게 협박을 다 하네. 무서워 죽겠다.
주철이 낄낄 웃더니, 사뭇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산호야, 백산호. 네가 아직 뭘 모르나 본데, 이런 건 원래 거래 하는 거야. 내가 진시우 옆에서 떨어지면 넌 나한테 뭐 해줄 건데.
“…….”
- 너 내가 딴 건 몰라도 계산만큼은 철저한 거 몰라? 진시우 옆에서 떨어질 만한 걸 네가 해주면 되잖아.
“……뭐가 필요한데.”
주철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가라앉은 침묵에도 주철의 흥분이 고스란히 배어 나왔다. 산호 역시 주철의 천박한 흥분을 알아챘다. 심장이 불쾌하게 쿵쿵 뛰었다. 잠시 뒤 주철이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일단 만날까, 우리? 오랜만에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어때.
“싫은데.”
- 이야, 섭하다. 우리 얼굴 본지도 오래됐는데. 아아, 너 저번에 오메가 알바 때려치겠다고 찾아왔다가 진시우한테 들킨 거 때문에 그래? 혹시 또 들킬까봐?
“그건 네가 만나러 안 오면 강의실까지 찾아오겠다고 협박해서 그런 거였잖아.”
- 어쨌든 네 발로 나 찾아온 건 맞잖아.
주철이 경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 이것 봐. 진시우가 너한테 정떨어지게 만드는 거, 나한텐 식은 죽 먹기야. 뭐, 벌써 정떨어진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 새끼가 네 그림자만 봐도 치를 떠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좋은 말로 할 때 알아서 찾아와. 혹시 알아? 네가 뭘 해줄지 봐서 내가 진짜 진시우랑 네 앞에서 꺼져줄지도 모르잖아.
산호는 자신의 입매를 손끝으로 꾸욱 눌렀다. 텅 빈듯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산호는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나면.”
산호가 미끼를 물었다는 생각에 주철이 다시금 웃어젖혔다. 느물느물한 목소리로 주철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 일단 만나서 얘기해보자고. 오늘 밤 열두 시에 P클럽으로 와.
큭, 웃은 주철이 재미있다는 투로 덧붙였다.
- 예쁘게 하고 와라. P클럽이 나중에 네 직장이 될지 어떻게 알겠냐.
주철의 비아냥에 산호는 대답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잠시 시끄럽게 공간을 메웠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처음 소파에 앉았던 자세 그대로 산호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핸드폰을 말아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만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점차 손의 떨림도 멎어갔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산호는 입술을 달싹였다.
오늘밤. 열두시. P클럽.
그때 호텔 룸의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시우가 안으로 들어섰다. 산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우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 산호는 억지로 입매를 당겨 웃어 보였다.
“선….”
“산호야.”
시우가 산호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시우답지 않게 여유가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산호를 바라보며 다름없이 웃어주었다. 끔찍하게도 예쁜 눈웃음이었다. 산호가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그려 본 웃음. 그렇기에 지금 산호는 시우의 웃음이 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안 피곤해?”
주차장에서도 시우는 같은 것을 물었었다. 조금도 피곤하지 않은데. 선배가 눈앞에 있는데 피곤할 틈이 어디 있겠어. 산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시우가 변명하듯 웃었다.
“아… 사실… 나 조금 피곤해. 산호 네 말대로.”
“아, 그럼….”
산호가 침실을 슬쩍 바라보자, 시우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피곤할 거야. 지금은 아닌 것 같아도 쉬는 게 좋아.”
“저 진짜 괜찮은데.”
“나 집에 다녀올게. 너도 혼자 쉬는 게 더 편할 거고.”
갸름하게 벌어졌던 산호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집… 잠시 잊고 있었다. 시우가 산호와 함께 머물고 있는 이 호텔은 시우의 집이 아니었다. 심지어 산호의 집도 아니었다. 시우는 이곳을 집처럼 쓰라고 말했지만, 결국에 잠시의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진시우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었다. 돌아갈, 어쩌면 돌아가야만 할.
시우가 천천히 산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민을 하듯 잠시 허공에서 머뭇댔던 손이 이번만큼은 산호의 머리에 닿은 것이었다. 시우의 따듯한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잘 쉬고 있어. 내일 연락할게.”
돌아오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물론 이건 사소한 말의 차이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산호는 보이지 않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심장을 후벼 파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
멋대로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곤 주철이 씨익 웃었다. 그는 지금 몹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제 어깨를 망가뜨린 건방진 우성 알파에게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주철은 슬그머니 다친 어깨에 손을 올려보았다. 찌르르한 고통이 신경을 건드렸다.
“하, 이건 아직도….”
부러진 빗장뼈는 아직도 온전히 아물지 못했다. 우성 알파가 한 손으로 제 빗장뼈를 으스러트렸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섬뜩한 느낌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주철도 알고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빗장뼈가 으스러지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란 걸. 그것은 아주 명백한 경고였다. 실제로 그가 입에 담은 말 역시 그렇지 않았던가.
‘팔다리 다 끊어 놓는 것도 어려운 건 아닌데… 그것보다 넌 혀를 뽑는 게 더 낫겠다.’
담이 작은 놈들이라면 그런 위협에 꼬리를 말고 도망갈 터다. 하지만 주철은 달랐다. 그는 기회만 있다면 더욱 집요하고 악착같이 그들을 물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비단 제 어깨를 망가뜨린 알파뿐 아니라, 저에게 다리를 벌려주지 않은 괘씸한 오메가까지 함께. 그 둘이 달라붙어 있는 것부터가 주철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은 주철 자신의 편이었다. 그들을 괴롭힐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다급히 걸려 온 전화를 받았을 때에만 해도 주철은 이것이 그 천운 같은 기회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좋은 혼처 자리가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상대가 만만치 않아서 말이야. 워낙 고고하신 집안이어서. 젊을 때 조금 즐긴 것 가지고도 걸고넘어질 수 있거든. 흔적 잘 지워줄 수 있지?’
늦은 밤 다급히 걸려 온 전화치고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었다. 돈 많은 집안 자제들은 이런 의뢰를 왕왕 해왔다. 그들은 온갖 마약과 페로몬제에 둘러싸여 문란하고 더러운 밤생활을 즐기다가도,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주철같이 뒷골목 사정에 빠삭한 이를 찾아와 흔적을 지워주길 바랐다. 정치적인 유세를 앞두었다거나, 지금처럼 혼사를 앞두었을 때 보통 그랬다.
그래서 처음 주철은 심드렁했다. 씨이팔, 지들이 벌려놓은 일 뒷수습이 얼마나 귀찮은지 알기나 해? 온갖 클럽을 찾아가 CCTV 같은 자료를 삭제하는 건 물론, 한 번이라도 붙어먹었던 호스트까지 일일이 찾아가 돈이든 마약이든 건네며 입단속을 시켜야 했다. 물론 그만큼 수수료가 짭짤했지만, 영 마뜩잖은 일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의뢰인이 세부적인 내용을 전달하자 주철은 곧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만만치 않은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후였다.
‘JR이거든. 거기 외아들. 걔가 조금 엉뚱해서 평범하게 사는 걸 좋아해. 모임 같은데도 얼굴 잘 안 비추고. 우성 알파에 흠잡을 데 없는 애라 침 흘리고 있는 데가 수두룩이야. 그런데 웬일로 걔가 사고를 쳤는 모양이지? 이렇게까지 급하게 혼처 구하는 거 보면. 어쨌거나 진태석 회장이 최대한 빨리 알아보라고 했다지 뭐야. 그것도 오메가로. 아무래도 그 집 외아들이 알파다 보니까 오메가랑 무슨 사고 쳤나 싶기도 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JR인데. 진짜 사돈 되는 거야 몇 년 후의 일일지는 몰라도 약혼은 바로 할 것 같아. 이거 우리 꼭 물어야 되는 거거든. 그러니까 양실장, 잘 좀 부탁해.’
주철은 아랫입술을 축축이 핥으며 재차 확인했다. JR 외아들 맞아요? 진태석 회장한테 아들 하나밖에 없는 거 확실해? 만족할만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주철은 전화를 끊었다. 교활한 미소가 입가에 한가득 떠올랐다. 주철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행동했다. 불법 메신저에 접속해 미끼를 낚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JR의 외아들이 단단히 홀려있는 오메가는 곧바로 미끼를 물었다. 오늘밤. 열 두시. P클럽.
“…흐음.”
자정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주철은 양팔을 쭈욱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어서 빨리 자정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날 군침 도는 오메가도 기대가 됐다.
백산호는 주철로서도 아까운 패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처음 저를 찾아왔을 때부터 주철은 직감했다. 먹음직스러운 페로몬을 줄줄 흘리면서도 제가 얼마나 유혹적인지 전혀 모르는 오메가. 아무도 손대지 않은 오메가는 무척이나 귀했다.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면 더더욱. 게다가 백산호는 우성 오메가였다. 어디서 이런 게 굴러들어왔을까. 잘만 꼬드기면 비싼 몸값을 챙겨 클럽에 팔아먹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 전에 제 좆물을 실컷 먹여줄 생각이었다.
고슴도치처럼 잔뜩 경계하고 있는 백산호에게 주철은 간단한 데이트를 알선해주었다. 얼뜨기 같은 알파나, 오메가를 만나보고 싶어 하는 변태들을 상대로 서너 시간 데이트를 해주는 같잖은 일이었다. 백산호는 그마저도 무척이나 끔찍해 하는 것 같았지만, 곧 돈맛을 보게 되면 달라질 거라 주철은 생각했다. 지금이야 새침한 표정으로 가시를 세우고 있어도 조금만 지나면 스스로 가랑이를 벌릴걸. 천천히 마약 페로몬제에 노출시키면 일은 더 쉬워질 터였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백산호는 주철의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았고, 정말 생계가 힘들 때 외에는 주철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주철은 조금씩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돈도 돈이지만… 저 새끼 구멍 맛도 빨리 보고 싶은데. 그렇게 주철이 조금 성급한 마음으로 산호의 집 앞에 찾아간 날, 학교 선배라는 우성 알파를 마주쳤다. 지금의 일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주철은 다시금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은 제 욕구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진시우가 백산호에게 단단히 홀려있는 것처럼, 백산호 역시 진시우에게 맹목적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오메가가 어쩌다 저에게 흥미를 느끼는 도련님을 만나 헛된 꿈을 꾸는 경우야 흔하디흔했다. 그 진부한 이야기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것도 모르고. 백산호 역시 진시우에게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공포심에 주철이 요구하는 것을 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철은 천박하게 웃었다. 여느 때보다도 시간이 지루하게 흐른다는 생각을 하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