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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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비행기는 인천 국제 공항에서 출발하여 런던 히스로 공항으로 향하는 L348편 입니다. 승객 여러분의 편안한 여행을 위해…]
지환은 넓은 비즈니스 석에 앉아 몸을 이완시켰다. 티켓이 꼽힌 여권을 슈트케이스에 찔러 넣은 후에는 가만히 깍지 낀 손을 무릎 위로 올렸다. 나른함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손님. 벨트 착용해 주시겠습니까.”
단정한 유니폼 차림의 승무원이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을 건네 왔다. 지환은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이 벨트를 채우는 것을 확인하자, 승무원은 상냥하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
벨트를 채우는 것마저 잊을 정도로 마음이 떠 있었나. 지환은 짧게 한숨을 뱉으며 손바닥만 한 창문 너머 넓게 펼쳐진 활주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
지금 그는 런던 근교의 작은 마을로 향하는 길이었다. 3개월 전, 진시우와 백산호가 떠났던 바로 그 길이었다.
진시우의 사고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한 달간 진시우가 세웠던 모든 계획을 송두리째 무너트리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들 그것을 예상했을까. 지환은 시우가 기어이 자신을 뿌리치고 백산호를 향해 달려가던 뒷모습을 기억했다. 그건 마치 필름의 프레임처럼 조각 지어져 뇌리에 깊숙이 새겨졌다. 쾅. 커다란 굉음과 끼이익, 헛바퀴를 도는 타이어의 마찰음. 백산호를 품에 안은 시우의 몸이 아스팔트 위를 거칠게 구르는 모습. 그 모습은 무척이나 끔찍한 악몽 같았다.
‘자네도 당분간 쉬는 게 좋겠군. 적어도 시우가 깨어날 때까지는.’
시우가 병원으로 실려 간 이후, 진태석 회장은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지환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그의 말에 수긍했다. 자신이 그를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마냥 쉴 수도 없었다. 언젠가 시우가 자신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으므로.
‘조금 어려운 부탁일 수도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어요?’
그날 시우의 나직한 목소리를 지환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혹시 시우는 이 상황을 예상했던 걸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 혹은 백산호가 곤궁에 처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사실, 이제 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 약속했고,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진시우의 부탁대로 백산호를 보살펴야 한다는 그 사실만이.
그러나 백산호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켰고, 종내에는 감정이 모두 빠져나간 인형처럼 생기를 잃었다. 안쓰러웠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백산호를 향한 지환의 양가감정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못하고 팽팽하게 당겨졌다. 하지만 지환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마음을 품던, 둘의 얽힌 인연은 절대 끊어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백산호에게 시우와 얽히지 말라고 충고했던 건, 일종의 심술에 불과했다.
‘감정적 각인입니다.’
자신의 부탁으로 백산호를 돌보았던 시우의 주치의 김 교수는 간단히 설명했다. 그 간단한 단어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였다.
‘감정적 각인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각인과 달라요. 물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감정에 의해 연결된 것이기 때문에 훨씬 더 강력한 속박입니다. 그래서 매우 드문 일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사님과 백산호의 감정적 각인을 확신하시는 겁니까?’
‘네.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히 재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판단에 의문을 품어서가 아니었다. 김 교수는 잠시의 시간을 둔 뒤, 지환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신파극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외부적인 요인으로 둘을 떨어트려 놓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쌍둥이 한 쪽이 아프면 다른 한 쪽도 아프다는 낭설을 들은 적이 있으실 테죠. 그건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감정적 각인의 경우 다릅니다. 실제로 감정적 각인으로 엮인 둘은 감정 뿐 아니라 신체적 반응도 교감하게 마련입니다.’
‘그 말은.’
‘백산호 씨가 깨어났다는 건, 이사님께서도 결국에 깨어나실 거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이사님께서 깨어나시지 못할 거였다면, 백산호 씨 역시 무사했을 리 없어요.’
판타지 같은 이야기였다. 지환은 말없이 김 교수를 바라보았다.
‘회장님께도 말씀드릴 겁니다. 아무리 회장님이라도, 이런 종류의 속박을 막으실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 별수 없었다. 진시우가 사랑하는 사람은 백산호였다. 백산호가 진시우의 하나뿐인 오메가였다.
런던의 공항은 무채색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하루의 대부분이 우중충한 색을 띠는 영국의 하늘. 하필이면 백산호와 함께 진 회장의 눈을 피할 곳으로 영국을 선택한 시우의 선택이 의아할 때도 있었다. 진시우는 따뜻한 사람이었고, 그는 그늘보다 밝은 햇볕 아래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니까.
입국장에 들어서자, 단번에 저를 맞으러 나온 이가 눈에 띄었다. 유럽인들 사이에서 홀로 섞여 있는 동양인이라서가 아니라, 유달리 유려한 그의 외견 때문이었다. 큰 키와 넓고 곧은 어깨.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몸은 여유를 머금고 있었고, 색이 연한 머리카락과 작고 하얀 얼굴은 해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환은 그를 향해 가볍게 눈짓하며 걸음을 뗐다. 무척 반가웠지만, 건조한 자신의 표정이 반가운 마음을 모두 드러내지는 못할 터였다.
“정 실장님.”
지환이 시우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시우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우애 깊은 형제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지환은 조금 뻣뻣하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쥐었다.
“이사님. 나와 계셨….”
“그냥 시우라고 부르세요.”
“…….”
“직함 내려놓은 지가 언젠데.”
어릴 때처럼요. 그림처럼 휘어지는 시우의 눈꼬리를, 지환은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입을 꾹 다문다. 여전히 웃음을 담은 얼굴로 시우가 지환의 캐리어 손잡이를 쥐었다.
“가요.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주차장에 세워진 시우의 차는 크림색 소형 세단이었다. 언제나 덩치가 큰 까만 세단에 오르던 시우와 어울리지 않는 차였다. 시우는 지환이 손을 뻗기도 전, 제가 먼저 트렁크에 그의 캐리어를 실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산호가 이 차를 마음에 들어 해서요.”
지환은 아무런 말없이 트렁크 문을 닫는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빙긋 웃으며 운전석으로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달칵, 운전석 문을 열고 차 안으로 올라타자, 지환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그를 향해 우뚝 섰다.
“타세요.”
“운전… 직접 하시는 겁니까?”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 본 기억이 전무했다. 꼼짝하지 않고 자리에 선 지환을 바라보며 시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러더니 다시금 호를 그리며 휜다.
“정 실장님 여기선 운전 못하잖아. 국제 면허 있어요?”
“국제면허 가지고 있습니다만.”
시우는 픽 웃었다. 그리곤 대답 없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괜찮으니 조수석에 오르라는 의미였다. 지환은 잠시 머뭇했지만, 이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조수석에 다른 사람 태우는 거 싫어하는데.”
조수석 문이 닫히자 시우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네?”
“아.”
또 한 번 변명을 담은 웃음이 퍼져나갔다.
“산호가 제 옆에 누구 태우는 거 싫어해요. 실장님 산호한테 혼날지도 모르겠는데. 아니, 내가 혼나려나.”
지환이 망연히 시우를 바라보자, 시우가 작게 목울대를 울리며 다시 웃었다.
“그러니까 벨트는 스스로 채우세요. 벨트까지 채워줬다간 저 오늘 저녁은 꼼짝없이 굶을 테니까.”
퍽 간지러운 말이었다. 이곳에서 진시우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크림색 차는 유연하게 도로 위를 굴러갔다. 런던이 아니고 근교로 향하는 길이라, 제법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우는 손목의 시계를 흘끗 바라보았고,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기울이기도 했다. 입가에 떠올라있는 미소가, 저를 기다리는 사람을 한시라도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완연히 드러냈다. 지환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 어느덧 런던을 빠져나왔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환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사님. JR 영국지사는 내달 말 결정될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마음을 정하신 듯합니다.”
앞을 바라보던 시우는 가볍게 눈썹을 위로 올리며 대답했다.
“내달 말? 생각보다 빠른데.”
빠른 걸까. 아니, 어쩌면 늦은 것인지도 모르지. 진태석 회장은 백산호의 거래에 응할 때부터 지금을 예상했는지도 모르니까.
“올해 말 정도로 예상했는데,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것 없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응. 아버지는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는 거 질색하시는 분이시니까.”
음, 목울대를 울리던 시우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 벌써 일하기 싫은데요. 이사직 복직 조금 더 늦추면 안 되나.”
장난기 가득 묻은 목소리였다. 지환은 그의 농담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농담이기는 했지만, 시우의 말이 이해가 갔다. 진태석 회장이 JR 영국지사를 설립하는 것은 곧 시우의 이사직 복직을 의미했고, 그것은 다른 말로 시우와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필연적으로, 진시우와 백산호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한 셈이었다.
“뭐, 어쩔 수 없죠. 먹여 살려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돈 많이 벌어야지.”
“…….”
“돈 벌어오라고 바가지 긁으면 어떡해요. 나 그거 무서운데.”
킥킥 웃은 시우는 다시금 시계를 흘끗 바라보았다. 차가 근교의 작은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실장님, 부탁 하나 할게요.”
“네, 말씀하십시오.”
“산호 앞에서 아버지 이야기는 가급적 꺼내지 마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아직… 불안해 할 것 같아서.”
지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해해? 글쎄. 제 목숨을 빌미로 거래까지 제안했던 백산호가 진태석 회장을 무서워하기는 할까.
뾰족한 지붕이 늘어선 마을의 거리 위로 크림색 차가 매끄럽게 굴러갔다. 커다란 나무 뒤, 파란색 지붕을 바라보며 시우는 빙그레 웃었다.
“잘 대해주세요. 산호한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응, 걱정 안 해. 실장님은 나 걱정시키는 사람 아니니까.”
그러나 시우는 또다시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걱정이 되지. 그냥… 산호만 생각하면 모든 게 다 이래.”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진시우도 자신이 백산호와 관련된 일이라면 유별나게 걱정스러워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모르는 것 보다는 나았다. 지환은 잠자코 거리 끝 파란 지붕의 작은 집을 바라보았다.
백산호는 정원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하얀 테이블과 마찬가지로 하얀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백산호의 모습은 제법 평화로워 보였다. 본가 장식장에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도자기 인형이 문득 떠올랐다. 그 인형은 어떻게 되었더라. 산산조각 내어 없애버렸던가. 크림색 차가 차고로 들어서 움직임을 멈추자, 지환은 벨트를 풀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산호야.”
마찬가지로 운전석에 내린 시우는 웃으며 정원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의 양 팔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의자에 앉아있던 백산호가 일어서 그에게 다가왔다. 조금은 소극적인 태도로 시우의 품에 가까이 다가서자, 시우가 그를 부드럽게 안으며 이마에 키스했다. 백산호의 귓바퀴가 살짝 달아오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실장님이 구해주셨으니 잘 아시겠지만.”
시우는 트렁크에서 지환의 캐리어를 꺼내며 말했다.
“집이 조금 작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그땐.”
지환은 대뜸 입을 다물었다. 백산호의 앞에서 진 회장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집을 구하던 당시는 여러모로 상황이 복잡했다. 진 회장의 눈을 피해 으리으리한 집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평범하고 작은 집을 구했었다. 마당이 딸린 커다란 본가, 오피스텔이라고는 해도 펜트하우스에 가까운 집에만 머물렀던 시우에게 이 작은 집이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시우가 웃으며 말했다.
“계신 동안 실장님이 불편하실까 봐요.”
지환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시우는 백산호를 향해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가 시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도 우리 정원은 예쁜데.”
작은 정원을 돌아보는 시우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있었다. 마주 잡은 백산호의 손을 조그맣게 앞뒤로 흔드는 게 꼭 짓궂은 소년 같았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지환은 입을 열었다.
“이사님 어리실 때, 본가 정원이랑 많이 닮았습니다.”
아. 시우의 눈가가 조금 더 깊이 휘었다. 백산호가 조금 고개를 들어 시우를 마주 보았다. 꼭 쥔 손이 조금 더 큰 보폭으로 흔들렸다. 그 모습이 마치 신이 난 아이들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어떤 기억을 끄집어냈다. 오래전, 본가의 정원에서 보았던 기억이었다.
***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10살의 시우는 정원의 잔디 위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고 있었다. 생일선물로 받은 소방차 모형이었다. 우우웅, 입소리를 내며 자동차를 굴리다가, 퓩, 효과음을 내며 손을 멈췄다. 피융. 기다란 소방차 다리를 쭉 뽑았다.
“…….”
그때 불현듯 제 앞에 선 누군가가 햇빛을 가려왔다. 저에게 떨어진 그림자를 향해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해를 등지고 있어, 거뭇한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낯선 아이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 안녕.”
인사를 건네 보았지만 아이는 고개만 갸웃했다. 그 사이 빛에 익숙해진 시야가 아이의 얼굴을 담아냈다. 동그랗고 통통한 볼이 마치 찹쌀떡 같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아이는 시우의 인사에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너 누구야? 누구랑 왔어?”
우리집에 놀러 오는 애들은 별로 없는데. 또래의 아이들은 보통 학교에서 만나거나, 특별한 모임이 있을 때만 만났다. 대뜸 집으로 찾아온 아이가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시우는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의 손이 불쑥 가리킨 곳은 정문 앞이었다. 커다란 정문 앞,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지환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지환 형이 저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보는데.
“저 아줌마랑 같이 왔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까. 조그맣게 움직이는 고갯짓도 귀엽기는 했지만,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시우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래, 아이를 유혹하기로 마음먹었다. 또래 아이를 유혹하는 건 몹시 쉬운 일이었다. 자신에게는 멋진 소방차 모형이 있었으니까.
“같이 놀래?”
씨익 웃으며 소방차 모형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자신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라, 이상하네. 여태 소방차 모형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또래 아이는 없었다. 한 번만 만지게 해 달라는 녀석들만 다섯 명이 넘었다.
“왜? 이거 별로야? 멋있는데.”
그래서 조금 마음이 상했다. 소방차 모형이 초라하게 느껴져서가 아니라,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자신의 유혹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의아한 듯 갸우뚱 기울어진 시우의 뺨 위로 아이의 작은 손이 닿았다. 뺨을 쿡 찔리는 바람에 시우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가 시우의 흉내를 내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예뻐서.”
아, 목소리 예쁘다. 아이가 예쁘다고 말한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이의 목소리가 예쁘다는 건 분명했다. 의아해하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이가 다시 말했다.
“너 되게 예뻐.”
아닌데. 난 예쁜 게 아니라 멋있는 건데. 시우는 픽 웃었다. 이상한 애였다.
“네가 더 예뻐. 도자기 인형 같아.”
“도자기 인형?”
“어. 하얗고 매끄럽고, 아무튼 되게 예쁜 거 있어.”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 거실 장식장에 놓여있는 도자기 인형이랑 꼭 닮았다. 그 인형을 아이에게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아이가 새까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한테서.”
“응?”
“되게 좋은 냄새 나.”
“좋은 냄새…?”
“응, 흙냄새 같은 거. 따뜻한 냄새.”
흙냄새 같은 게 뭐지? 정원에서 나는 냄샌가. 가끔 정원을 관리해주시는 분이 새로운 묘목을 심기 위해 땅을 파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거 없는데. 시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이상한 아이였다.
“어?”
그때 어디선가 달큰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정원에서 나는 흙냄새를 맡으려고 숨을 들이마셔서 그런 걸까. 그렇다기엔 냄새가 조금 짙었다. 처음엔 은은하게 풍겨오던 것이 갑작스레 온몸을 휘감은 것처럼 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살결을 보드랍게 쓰다듬어 주는 기분과 비슷했다. 조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좋은 기분이었다.
“이 냄새 너한테 나는 거야?”
그 냄새는 과일 냄새였다. 그것도 이슬을 한껏 머금은 과일 냄새. 아니, 어쩌면 잔뜩 과육을 짓이긴 것인지도 모르지. 분명한 건, 무척이나 달다는 거였다. 난데없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척 가지고 싶었던 게임기를 발견했을 때에도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지는 않았었다.
“무슨 냄새?”
시우 자신이 흙냄새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이 아이도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를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무구한 눈동자가 깜빡였다. 바보네. 이렇게 진하게 나는데, 왜 모르지. 크게 한숨을 들이마시자, 폐부로 달콤한 향이 밀려들었다. 왜인지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가 싶더니 나른해지기 시작한다.
“엄청 달고, 어, 아무튼 기분 좋아지는 냄새.”
정말 기분이 좋아지는 냄새였다. 온종일 이 냄새만 맡고 싶을 정도로. 아이가 가만히 시우의 말을 따라 했다.
“기분… 좋아져?”
“응.”
고개를 끄덕인 시우는 아이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본능적으로 냄새의 근원을 찾았다. 대뜸 아이의 하얀 목덜미 위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킁킁. 강아지처럼 숨을 들이마셨다.
“여기서 나.”
다가온 시우가 조금은 갑작스러웠는지 아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시우의 입술이 가까이 닿았던 목덜미를 더듬었다. 무언가 묻은 건 아닐까 확인하는 것 같았다. 목덜미를 문질러 보았지만, 아이의 손에 묻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했다. 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고, 아이의 목덜미는 티끌 없이 새하얗기만 했으니까.
“있잖아.”
시우가 아이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응?”
“나 거기 깨물어 봐도 돼?”
제가 생각해도 자신의 부탁이 영 이상했다. 대뜸 처음 만난 아이의 살을 깨물고 싶어 한다니. 정말이지 엉뚱한 소리였다. 하지만 솔직한 말이기도 했다. 아이의 목덜미를 깨물어보고 싶었다. 엄청나게 달콤한 과일 맛이 날 것만 같았다. 이상한 일이다. 원래 과일 같은 거, 좋아하지 않는데. 아이는 시우의 부탁에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백산호! 이리와.”
그때 정문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아이를 불렀다. 조금 무섭게 생긴 그 여자는 꽤 신경질적으로 아이를 향해 손짓했다. 여자의 부름을 받은 아이는 천천히 얼굴을 굳혔다. 무표정으로 굳은 얼굴을 푹 숙인 채, 아이는 하릴없이 여자를 향해 걸음을 뗐다. 한 걸음 내디뎠을까, 아이가 문득 시우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려세웠다.
“다음에.”
“응?”
“다음에 만나면 깨물게 해줄게.”
아이는 시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여자에게로 도도도 달려갔다. 시우는 한동안 아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음에?”
다음에 언제. 내일? 아니면 모레? 아니면… 열 밤 지나서? 시우는 입술을 꼭 물고 생각했다. 아이의 손을 거칠게 잡아챈 여자가 정문을 빠져나가자,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환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곤 멀뚱히 선 시우를 발견했는지, 또박또박 다가왔다. 그는 시우에게로 허리를 조금 굽혀 말을 걸어왔다.
“도련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시우는 눈을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부모님의 비서 일을 시작한 그는, 형제가 없는 시우에게 맏형 같은 존재였다. 비서 일을 시작하면서 존칭을 꼬박 붙여주었지만, 원래는 이름으로 불렀더랬다. 가까운 사이이기에, 비밀 얘기도 잔뜩 했다. 아까 만난 애, 엄청 달콤한 냄새가 났어. 그래서 내가 그 애한테 엉뚱한 부탁을 했는데, 다음에 만나면 들어준다고 약속했어요. 형, 그 애 언제 다시 와요? 마음속에서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을, 시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냥…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욕구가 치솟았다. 시우는 저를 바라보는 지환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음, 그럼.”
“그런데, 형.”
“네, 도련님.”
“나 과일 먹고 싶어.”
“…과일? 과일 안 좋아하셨잖습니까.”
“응. 그런데 갑자기 먹고 싶어졌어.”
“이야기해 놓겠습니다. 어떤 과일이 드시고 싶으십니까?”
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환의 질문에 난데없이 말문이 턱 막힌 탓이었다.
“몰라요, 그냥….”
지환은 어렴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님이 많이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아마 과수원을 통째로 매입하자고 하실지도 모르고. 매입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 애를 생각하면서였다.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은 다시 현재로 스며들었다. 10살의 정원, 그곳에서 처음 만난 아이에 대한 기억이었다. 시우는 지환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 어릴 때 본가 정원 좋아했었어.”
“기억하십니까?”
“네, 기억해요.”
그리고는 산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산호 너도 좋아했어? 우리집 정원.”
산호는 잠시 생각을 더듬어 보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대답헀다.
“잘 기억 안 나요. 괴상하게 생긴 자동차 모형 들고 있는 애만 뚫어져라 쳐다보느라.”
응? 시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마주 잡은 손에 산호의 반지가 느껴졌다. 손끝으로 산호의 손가락 위 반지를 매만지자, 산호가 픽 웃었다. 달큼한 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기분 좋은 냄새 나.”
참으로 달콤한 속박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달콤한 속박이 평생 풀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컨파인드 페로몬, 완결>


আৱদ্ধ ফেৰ'মন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