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색 문 너머 널따란 룸이 산호를 맞이했다. 디귿자 형태의 커다란 소파가 늘어서 있었고, 공간을 메우는 테이블도 있었다. 아이스 버킷과 고가의 위스키가 줄지어 놓여있었지만, 워낙에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지라 어딘가 단출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룸 안은 비어있었다. 산호는 넓은 공간에 우뚝 선 채 가만히 숨을 골랐다. 심장이 불안함을 대변하듯 쿵쿵 뛰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쩌면 길었는지 모르지만, 체감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등 뒤에서 황금색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자, 산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
장년의 남자가 룸 안으로 들어섰다. 고가의 슈트 차림인 그는 무척 단정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음에도 상대를 압도하는 위압감이 풍겼다. 그리고 그 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정확히는 제가 애타게 만나고 싶어 하는 이를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와 퍽 닮아있었다.
장년의 남자가 산호를 지나쳐 룸 안쪽으로 걸어갔다. 가장 널따란 상석의 자리에 자연스레 앉은 그는 산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앉거라.”
그의 목소리는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비해 무척이나 가벼웠다. 산호를 바라보는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산호는 경계의 빛을 띠운 채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간 산호를 마주 보고 있던 그가 눈짓으로 커다란 소파 자리를 가리켰다. 망설이듯 주춤대던 산호는 천천히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상석의 그와 멀리 떨어진 자리였다.
“오랜만이구나.”
처음 건넸던 말처럼 가벼운 말씨였다. 오랜만이라는 인사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산호가 대답 없이 입술을 물자, 그가 변명하듯 이어 말했다.
“아주 오래전에 우리 만난 일이 있는데.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의 목소리는 짐짓 다정했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산호의 어깨가 기울었다. 그에게서 조금 더 멀어지려는 듯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고? 이 사람을? 이 사람은 분명 선배의… 산호가 여전히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그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리도 아니지. 네가 무척 어릴 때였으니까. 오래전, 네 어미가 너를 데리고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
“나는 아들의 말동무를 해 줄 오메가를 찾던 중이었다. 또래 아이가 좋을 듯싶어 어린 오메가를 찾았었지. 그 소식을 들은 네 어미가 너를 데리고 왔었어.”
산호의 눈꼬리가 가늘게 비틀렸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자신을 팔아버리기 위해 발품을 팔았던 부잣집 중 하나였을까.
“그때 널 보고 참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이었지만, 네 어미가 말한 대로 우성 오메가답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아들놈 옆에 가 페로몬을 풍기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
“몹시 불쾌하더군.”
비죽 솟은 가시가 불시에 상처를 찌른 듯, 산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남자는 여전히 변함없이 태연한 표정과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참으로 불쾌했다. 네 어미는 천박했지. 돈에 제 아들을 팔겠다는 생각부터가 그랬다.”
“천박한 건 어머니지, 제가 아니잖아요.”
산호의 반항적인 대답에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어린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아들놈 앞에서 페로몬을 흘리는 행동이야, 어려서 잘 몰랐다손 치자꾸나. 오히려 저를 팔아먹으려는 어미를 둔 네가 가엽다면 가여울 수 있다. 하지만 너를 만난 이후에 알파로 발현한 아들을 보니, 네 존재가 몹시 거슬리더구나.”
“알파로 발현을 했다…고요?”
“드물지만 상호작용에 의해 형질인으로 발현되는 경우도 있다더군. 너와 내 아들이 그런 경우인지 알 길은 없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너를 앞세운 네 어미가 어떤 추잡한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지. 차고 넘치는 돈이야 원하는 만큼 부어준다 한들, 무슨 문제겠니.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야. 네 어미 같은 이들은 더욱 그렇다.”
“말했잖아요. 어머니랑 저는-.”
“문제가 생길 싹은 미리 자르는 것이 좋단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속뜻은 무척이나 냉정했다. 산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너를 만난 이후에 아들놈이 알파로 발현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애초에 너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었다. 마주칠 기회조차 없도록 정계건 재계건, 네 어미가 손을 뻗지 못하도록 막아두었지.”
어린 날의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가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산호를 데려가겠다는 곳은 없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어린 우성 오메가는 무척이나 귀했을 텐데도. 처음에는 마음에 들어 하다가도 늘 난처한 얼굴로 거절하던 사람들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때마다 저를 원망하던 무서운 어머니의 얼굴까지. 산호가 고개를 들자, 그는 산호를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사실 오랫동안 널 잊고 있었다. 가진 거라곤 오메가 아들 하나뿐인 천박한 여자보다 중요한 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한데 이렇게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그때 조금 더 신경을 쓸 것을 그랬구나.”
남자가 변명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때도 지금도, 무척이나 불쾌하단다. 네가 내 아들 시우의 옆에 있는 것이.”
그의 어투는 오히려 미안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를 마주 보며 산호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어릴 적 기억이 퍼즐 조각처럼 맞추어졌다. 캠핑장에서 시우가 했던 말들, 그리고 어린 자신의 기억. 그건 햇빛이 가득 들어오던 정원과 소방차 모형을 가지고 놀고 있던 예쁜 아이에 대한 기억이었다. 무척이나 기분 좋았던 그 애의 냄새. 그 애가… 선배였어.
“…어머니…는 이제 없잖아요.”
“그래, 들었다. 4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지.”
“천박한 제 어머니가 싫어서 저를 떨쳐낸 거라면, 지금 저를 미워할 이유는 없는 거잖아요.”
남자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할 때 시우의 버릇과 닮아 있었다. 그와 시우가 한 핏줄이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산호는 입술을 세게 짓물었다.
“일종의 예감 같은 것이라고 해두자꾸나. 그리고 보통 내 예감은 잘 맞는 편이란다. 보렴. 보잘것없는 오메가 하나 때문에 추문에 휩싸이고, 더러운 잔반을 뒤집어쓰고, 별 볼 일 없는 범죄자에게 칼까지 맞는 것을 보면… 널 미워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니.”
피가 배일 만큼 입술을 세게 짓물었던 산호의 잇새로 픽, 웃음이 샜다. 산호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날 미워하든 미워하지 않든 관심 없어요. 당신은 선배가 아니잖아. 그리고 선배도 당신 소유물이 아닌데.”
그는 다시금 웃었다. 조금 더 길게. 진심으로 유쾌하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몸을 살짝 앞으로 숙여 산호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문제는, 내게 시우와 네가 만나지 못하게 할 힘이 있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무슨 권리로-.”
“참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당돌하게도.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널 마음에 들어 했을 텐데. 안타깝구나.”
“이런 걸 보고 재미있다고 해요?”
그는 산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가라앉은 적막은 길지 못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는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골목에 CCTV가 있었던 것, 알고 있니?”
“…….”
“거기엔 시우가 그 범죄자의 팔다리를 모두 으깨놓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사실 정당방위로 보기엔 조금 과하지 않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
“CCTV에 소리까지 기록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지. 시우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말이다. 누가 보아도 알파를 유혹하는 오메가를 위해서 그런 멍청한 일을 할 리 없는 아이인데. 그래서 구순을 분석해달라고 따로 의뢰했다. 시우가 나타나기 전 너와 그 범죄자가 나누었던 대화를 대충 복원하는 데 성공했지.”
“…그래서요.”
“네가 페로몬을 푼 이유가 시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산호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가치를 가늠하는 상인의 눈빛과 흡사했다. 산호의 존재를 거슬려 하면서도 동시에 흥미로운 것이 분명했다.
“양주철 실장에게 말했던 것처럼, 정말 시우를 위해서 손가락 하나, 장기 하나 떼는 것쯤 아무렇지 않게 감수할 수 있는 게냐?”
산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의 어투가 무척 기묘했다. 무엇이 궁금한 걸까. 자신을 시험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그러나 곧 산호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의 진위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답은 하나였다.
“다 할 수 있어요. 전.”
“다.”
“전부 다. 선배랑 같이 있는 게 제 전부에요. 그러니까 뭐든지 할 수 있다고요. 그게 무슨 짓이 됐더라도.”
그가 또 한 번 웃었다. 산호를 빤히 바라보며 그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한동안 입을 다문 그를 보며 산호가 불안함에 주먹을 꾹 쥐었을 때, 그의 품에서 작은 진동이 울렸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잠시간 액정을 바라보았다. 그가 액정을 바라보는 사이 연달아 불빛이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메시지가 연속해서 도착하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마침내 그는 산호를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떠냐. 나와 내기를 하자꾸나. 내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면 나도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마.”
“…무슨….”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손님이 지금 도착했다고 하는데… 그 손님 때문에 무척 골치가 아픈 참이야. 이 손님을 네가 유혹해 볼 수 있겠니?”
“갑자기 무슨… 제가 왜-.”
“그는 알파다. 오메가의 정의를 이런 식으로 내리고 싶지는 않다만… 난 어쭙잖은 알파 하나 유혹하지 못하는 오메가를 내 아들 곁에 두고 싶지는 않다. 또 네가 시우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말은.”
산호의 고개가 바로 들렸다.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그 손님이라는 사람을 유혹하면 선배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뜻이에요?”
그가 살짝 기울인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시는 거죠. 거짓말 아니죠.”
그의 눈이 잠시 커지더니 곧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느슨하게 이완된 몸으로 그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거짓말만큼은 하지 않는다. 그건 믿어도 좋아.”
“분명히 약속한 거예요.”
“다만 너도 약속해주어야 한다. 이 손님을 유혹하지 못하면, 내가 널 어떻게 하더라도 받아들이기로.”
“어떻게 한다는 게 무슨-.”
“가장 쉬운 방법은 이 클럽에 널 소속시키는 것이겠지. 페로몬제에 찌들어 살긴 하겠지만, 이 클럽 정도면 꽤 호화롭게 살 수 있을게다. 그렇지 않다면 뒷골목 창부로 만들어 버리는 방법도 있겠고.”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라 카트에 담는 것만큼의 가벼움. 그 가벼움이 무척이나 섬뜩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오메가를 망가뜨리는 방법으로는 그런 쪽이 가장 확실하니까. 공연히 인정을 베푼다고 물리적으로 떼어놓는 것보다 훨씬 낫지. 멀리 바다 건너 보낸다 해도 네가 숨통이 붙어있는 한 부득불 다시 시우의 앞에 나타날 수도 있지 않겠니. 그렇다고 널 죽이기엔.”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 건 불쾌한 일이지.”
무릎 위에 놓인 산호의 주먹이 잘게 떨렸다. 그의 말이 단순한 허풍이거나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클럽이나 사창가에 팔아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여의치 않는다면 죽이는 것까지 불사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산호는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다.
다시는 시우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만일 그의 말처럼 클럽에 남겨지거나 뒷골목의 창부가 된다면… 그런 자신을 시우가 본다면. 그는 무어라 할까. 여태까지처럼 다정하게 자신을 바라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곁을 허락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산호가 두려운 것은 오로지 그것이었다. 산호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말 믿을게요.”
“믿어주니 고맙구나.”
“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선배 옆에 남을 거예요.”
그는 산호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곧 그는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커다란 황금색 문이 달칵 열렸다. 유니폼을 입은 클럽의 직원이 조용히 룸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직원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산호를 향해있었다.
“지금은 네 행색이 조금 초라하니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 행색이야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움 되지 않겠니.”
산호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내하려는 듯 제 앞에 선 직원을 향해 몸을 돌려세우며 산호가 말했다. 여태껏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호칭이었다.
“회장님도.”
“응?”
“회장님도 준비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못마땅하더라도 결국에 인정해주실 수밖에 없을테니까.”
두렵지만, 망설임 없이 걸음을 떼며 산호는 단호히 시선을 올렸다. 산호의 말에 놀란 듯 커진 그의 눈동자가 잦아들며 다시 웃음이 터지는 것을 들으면서였다.
***
병원에 비치된 슬리퍼는 얇고 허술했다. 클럽가를 향해 바삐 내딛는 시우의 걸음에 슬리퍼는 벌써 여럿 꺾여 만신창이였다. 덕분에 아스팔트에 이리저리 쓸린 발은 잔뜩 생채기로 뒤덮였다. 환자복 위에 대충 걸친 카디건 역시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화려한 클럽가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시우를 향해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시선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P클럽 앞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랬다. 덩치가 큰 가드가 시우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으나 막아서지는 않았다. 어두운 지하 계단을 향해 시우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시끄러운 음악이 쾅쾅 울리는 라운지에서 인파를 제치며 정신없이 걷는데 누군가 시우의 어깨를 잡아 왔다.
“진시우 이사님.”
처음엔 저를 알아본 클럽의 손님이라고 생각했다. 어깨를 쥐는 손길을 털며 무시하려던 시우의 걸음이 천천히 멈추었다. 등 뒤에 가까이 선 남자에게서 옅은 알파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시우가 몸을 돌리자 블랙 슈트를 입은 남자가 반듯이 서 있었다.
“진시우 이사님, 백산호 씨 때문에 오신 겁니까.”
남자의 입에서 산호의 이름이 나오자 시우는 찌푸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인상의 그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는 라운지 끝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쪽으로 옮기시죠. 여기는 시끄러워 대화가 힘들 겁니다.”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입 모양으로 내용을 읽어낸 시우는 어깨에 얹혀진 그의 손을 떨치며 라운지 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뜸 나타난 이 알파의 페로몬이 불쾌했다.
“경황없이 이렇게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박규철 비서실장입니다.”
라운지 끝에 다다르자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고개를 숙인 그를 시우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비서실장? JR의 비서실은 정지환 실장의 팀이 유일했다. 적어도 아버지가 정 실장을 배제하고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는.
“얼마 전부터 회장님을 모시게-.”
“산호 어딨습니까.”
그의 말을 자르며 시우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곧 낮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이곳에 계신 것 알고 계십니까?”
“산호 어디에 있는지 말해요.”
“회장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말해요. 당장.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규철은 사무적인 눈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시받은 대로 움직일 뿐이다. 시우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근거 없는 불쾌함을 자아냈다. 그가 이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겠습니다.”
규철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호가 올랐던 그 엘리베이터, 클럽의 상층부와 연결되는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황금색 문 앞에서 규철은 시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묵직하게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던 시우는 이내 숨을 들이마시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 불쾌했던 알파의 옅은 페로몬 역시 차단되었다.
시우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크고 화려한 룸 안은 지나칠 만큼 고요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올라있는 위스키와 아이스 버킷이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시우는 저를 올려다보는 상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너에게 이렇게 실망을 한 적이 없었다.”
넓은 소파의 상석에 앉은 아버지 진 회장은 긴 다리를 꼰 채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VIP 병실에서 마주친 모습 그대로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하지만 그건 진 회장 뿐은 아니었다. 빳빳하게 굳은 얼굴로 시우가 말했다.
“저 역시 그래요, 아버지.”
“기어이 이 애비를 악역으로 만들겠다는 게로구나.”
“이 일에 왜 악역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네가 그것을 모른다는 게 얼마나 문제인지 모르는 게냐.”
시우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테이블 앞,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얼굴이 그답지 않게 냉정했다.
“산호 건드리지 마세요.”
“이 애비는 정말 이해할 수 없구나. 그 애가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뭘까.”
“분명히 말했어요. 건드리지 마세요.”
진 회장의 입가가 갸름하게 벌어지는 것을 보며 시우는 말을 이었다.
“이유 같은 것 없어요. 그리고 이유가 있다고 하면요. 그땐 그 이유를 없애실 거잖아요.”
진 회장이 짧게 웃었다. 번득이는 눈까지 미처 번지지 못한 웃음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아직 애비가 누구인지 잊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아버지.”
“네가 고작 오메가 하나에 이렇게까지 애비를 실망시킬 줄은 몰랐다. 유감이야.”
“오메가 아닙니다. 그 애의 이름은 백산호고, 저는 그 애를.”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 시우를, 진 회장은 재미있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계속 말해보거라. 그 애를.”
“…….”
“그 애를 사랑하기라도 해?”
아버지의 질문이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 애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은 전에 없는 울림이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던져야 했던 질문이란 걸 시우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단과대 복도에서 처음 그 애가 자신과 부딪히며 지나쳤을 때부터. 주철과 나란히 선 모습에 이성을 잃을 만큼 절망했을 때 역시 무의식적으로 피해온 질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시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굳게 이를 사리물었다.
“왜 대답하지 못하는 게냐.”
“…제가 드릴 말씀은 하나에요. 산호 건드리지 마세요.”
“네 스스로도 정의내리지 못하는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르는구나.”
“상관없어요. 휘둘려도 상관없고, 어리석어도, 병신 취급 받아도 다 상관없어.”
“…….”
“아버지, 산호 내버려 두세요. 제발.”
진 회장은 말없이 자신의 아들을 응시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인정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진심 어린 부탁이라 하더라도. 마침내 시우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도 알고 계시죠. 제가 JR을 욕심내 본 적 없다는 걸. JR은 아버지 것이니까.”
“그런데, 이제는 욕심이라도 내보겠다?”
“아뇨.”
시우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힘주어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완전히 포기할 겁니다.”
무표정했던 진 회장의 얼굴에 일순 노기가 떠올랐다. 시우의 대답을 조금도 상정하지 못한 탓이었다.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얼굴로 진 회장이 말했다.
“포기하겠다니, 무슨 의미냐.”
“말 그대로. 다 포기하고, 다 버릴 거예요. 지분도 지위도 다 버릴 각오 되어 있어요. 필요하다면, 아버지까지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말하는 게야?”
“네, 정확히요.”
거세게 말아 쥔 시우의 주먹이 잘게 떨렸다.
“가진 것 없는 오메가 하나 때문에 이 애비도, 어미도, JR도 모든 걸 다 포기하겠다.”
“그 하나만큼 중요한 건 없어요. 저한테는-.”
시우의 말을 불현듯 끊고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룸을 울리는 두드림 소리는 유달리도 크게 느껴졌다. 험악하게 일그러졌던 진 회장의 얼굴이 싸늘한 무표정으로 물들었다. 황금색 문이 열리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만큼이나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래. 네가 모든 걸 다 버리고 선택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려무나.”
***
클럽의 직원은 산호를 구석의 방으로 데려갔다. 작은 문에 비해 꽤 넓은 방이었다. 복도식으로 된 긴 구조의 방이었는데, 양 벽면에 주르륵 걸린 옷들 때문에 가로 공간이 더욱 비좁아 보였다. 앞쪽에는 커다란 거울과 메이크업 도구들이 늘어져 있었다. TV 속 연예인들의 대기실을 연상시키는 방이었다. 직원은 다소 거칠게 산호를 거울 앞으로 이끌었다.
“벗어요.”
사무적인 말투였다. 산호는 직원을 빤히 바라볼 뿐 거울 앞에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직원은 산호의 셔츠 사이로 쇄골에 감긴 붕대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 붕대는 뭡니까?”
“다쳤어요.”
“흠.”
그는 잠시 산호의 몸을 위아래로 훑더니 주르륵 늘어진 옷걸이 사이로 걸어갔다.
“뭐, 어떤 변태들은 그런 거 좋아하기도 하니까… 어차피 가려지진 않을 것 같고 아예 드러내는 게 낫겠네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직원은 옷 사이를 빠르게 짚었다. 그리곤 한 장의 셔츠를 꺼내 들었다. 아이보리색 얇은 셔츠는 물 흐르듯 매끄러웠고 잔잔한 광택이 감돌았다. 직원은 던지듯 산호에게 셔츠를 건넸다.
“이걸로 갈아입어요. 단추는 채우지 말고.”
“…….”
“아래는 좀 타이트한 게 좋겠네요.”
뒤이어 산호의 손에 밝은 베이지색 슬랙스가 쥐어졌다. 몸에 걸치기도 전이지만, 지금 저에게 건네진 옷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성적 매력을 강조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산호는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뭐해요? 옷 안 벗고.”
직원은 조금 짜증스러운 눈으로 산호를 바라보았다. 수치심으로 가득 얼룩진 산호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기가 막히다는 듯 픽 웃었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뭘 고고한 척을 해. 어차피 몸 팔아서 원하는 거 얻으려는 거면서.”
조롱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말에 단단한 결심이 섰다. 산호는 반항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몸까지도 팔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간절함은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실크 소재의 셔츠가 자꾸만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무척 얇은 재질의 셔츠는 빛을 그대로 반사해 산호의 가는 몸 선을 그대로 비추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는 것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풀어헤친 단추 사이로 하얀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산호는 주춤대며 앞섶을 그러모았지만, 직원이 짜증스레 산호의 손을 풀어냈다. 마른 하체를 빠듯하게 감싼 슬랙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내는 천박한 차림새였다.
“들어가요.”
황금색 문 앞에 선 산호를 향해 직원이 성의없이 고갯짓을 했다. 산호가 입술을 말아 물며 문고리를 쥔 순간, 직원이 문득 산호의 어깨를 답싹 쥐었다. 이어피스에 손을 대는 것을 보니 무엇인가 새로운 지시가 있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잠깐 기다려요.”
직원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곧 그는 무언가를 손에 든 채 나타났다. 그건 새까만 눈가리개였다. 산호가 입은 셔츠처럼 광택이 이는 실크 소재였지만, 훨씬 더 두꺼운 재질이었다. 직원은 가타부타 설명 없이 산호의 눈을 감싸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눈 가리잖아요. 아무래도 손님이 높은 사람인가 본데. 얼굴 못 보게 하라는 거 보니까.”
“이런 말은 없었….”
“아니면 뭐, 이런 거 좋아하는 변태일 수도 있겠네. 그래도 이 정도는 변태 축에도 못 끼니까 칭얼대지 마세요.”
새까만 천이 산호의 눈앞을 꼼꼼히 가렸다. 온 세상이 검었다.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을 정도라 산호는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직원이 산호의 어깨를 쥔 채 황금색 문을 두드렸다. 똑똑 소리가 울리고 문이 열리는 마찰음이 났다.
“…….”
직원은 말없이 산호를 이끌었다.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느 순간 직원이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산호는 어둠 속을 빤히 응시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누군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분이 원하면 페로몬 풀어도 좋아요. 어차피 만족만 시키면 되는 거니까.”
직원이 산호의 귓가에 빠르게 속삭였다. 직원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조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말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산호가 입을 열기도 전 직원은 홱 몸을 물렸다. 가벼운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
이제는 정말 저 혼자였다. 진 회장과의 내기가 시작된 셈이었다. 산호는 마른 침을 삼키며 어둠 속에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소, 손님이에요?”
허공으로 뻗어진 손끝에 무엇인가 닿았다. 생각보다 따뜻하고 단단한 가슴이었다. 버석한 면 재질 안, 상대의 심장이 박동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상대는 산호의 물음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눈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
“저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못 본 걸로 할게요.”
그러나 앞에 선 상대는 아무런 말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산호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끄는 이 없이 내딛은 걸음은 불안정했다. 살짝 발을 헛디디는 순간 상대가 산호를 잡아주듯 팔을 쥐었다.
“아.”
그런데 그 손길이 사뭇 조심스러웠다.
“고, 마워요.”
산호는 상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진 회장이 유혹해야 한다고 말했던 손님은 막연하게 나이가 많은 중년의 남자일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무섭고 고압적인 중년의 알파를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휘청이는 자신을 잡아준 상대는 산호의 예상보다 훨씬 더 젊은 것 같았고,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상상했던 것만큼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하다고 느껴질 만큼.
시우가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사람을 선배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쉽지 않을까. 덜 비참하지 않을까. 산호는 단호하게 턱을 올렸다.
“저 조금 불, 편한데… 눈 풀어주시면.”
산호의 속삭임을 들은 상대는 산호의 팔을 쥔 손에 미약하게 힘을 실었다. 반사적인 행동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작은 반응에도 산호는 움찔 떨었다. 싫은 걸까. 어쩌면 건방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산호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뇨, 죄송해요. 눈 가리고 있어도 괜찮아요. 저도 이런 거 좋….”
마른 침을 삼키곤 산호는 웃었다.
“그냥 손님 원하시는 대로….”
이어지는 침묵에 산호는 서투르게 상대의 가슴을 더듬었다. 상대는 무척이나 키가 큰 모양이었다. 곧게 뻗은 어깨 역시 반듯하고 넓었다. 단단한 가슴을 더듬던 손을 조심스레 올려 어깨를 잡았다. 상대에게 매달린 듯한 자세였다. 상대의 손이 살짝 느슨해졌다. 산호가 자신에게 기댄 것에 안도라도 한 듯이.
“우리 앉을까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은 불편했다. 자신이 선 곳이 소파 근처인지, 아니면 넓은 룸 한 가운데인지조차 알 수 없으니 더욱 그랬다. 상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산호가 걸음을 뗐다. 그러나 이번에도 걸음은 불안정했다. 위태롭게 몸이 휘청이자 상대가 산호의 등을 바삐 감쌌다. 역시나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고, 마워요. 잘 안 보여서….”
“…….”
“그런데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상대의 손길은 다정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이 못내 불안했다. 이 사람을 반드시 유혹해야만 하는데. 그래야 선배를 만날 수 있는데. 산호는 다시 억지로 웃어 보였다. 자신의 웃음이 어색해 보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쓰면서, 짐짓 달콤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나 마음에 안 들어요?”
“…….”
“저 자, 잘하는데. 마음에 들게 할게요.”
조심스레 등을 감쌌던 손이 거짓말처럼 툭 떨어졌다. 따뜻한 손이 사라지자 불안한 마음이 더욱 커져만 갔다. 산호는 애타게 상대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키가 훌쩍 큰 상대를 끌어안자, 발 뒤꿈치가 살끔히 들렸다.
“저 정말로….”
목덜미를 안은 탓에 상대의 얼굴이 가까웠다. 상대의 숨소리가 산호의 뺨에 여과 없이 와 닿았다. 고개를 틀면 상대와 입술을 맞댈 수 있을 것이다. 원하지 않는 입맞춤은 끔찍했다. 아무리 보이지 않는 상대가 다정한 듯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산호는 다시금 속삭였다.
“안아주세요.”
“…….”
“네? 빨리 안아주세요. 원하시는 대로 다 해드릴게요. 서서 해도 괘, 괜찮….”
굳게 먹은 마음과는 달리 말끝이 조금 떨려와 산호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러나 곧 어색하게 굳은 입술을 풀기 위해 아랫입술을 살끔 핥았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둥굴게 말려 올라갔다. 상대의 숨소리가 조금 밭아진 것 같았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키스해도… 돼요?”
그러나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손을 올려 상대의 뺨을 감쌌다. 무척 매끄럽고 보드라운 피부가 손에 닿았다. 작은 얼굴, 부드러운 머리카락, 어쩌면 시우처럼 하얗고 옅은 머리색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정말 선배였다면. 산호는 엄지로 상대의 입술을 더듬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가까이 상대의 입술이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엄지 끝이 도톰한 입술에 닿는 순간, 커다란 손이 산호의 손을 나무라듯 홱 쥐었다.
“왜요, 싫어요?”
“…….”
“기분 좋게 해줄게요.”
제 입술을 뚫고 나온 교태 어린 목소리가 너무나도 생경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도 부족할까 두려웠다. 이런 클럽에 찾아오는 손님이라면… 조금 더 닳고 닳은 오메가를 원하지 않을까. 뻣뻣하고 어리숙하게 행동하는 저에게 흥미를 잃으면 안 됐다. 산호는 입술 점막을 살며시 깨물고는 느릿하게 숨을 뱉었다.
“손 되게 따뜻해요. 이 손으로 만져주면 저 기분 좋을 것 같은데.”
“…….”
“만져주세요. 네?”
산호는 거부하듯 제 손을 잡은 상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춤으로 이끌었다. 얇은 허리 위에 커다란 손이 타의로 감겼다. 노골적으로 상대에게 몸을 밀착했다. 하체가 가까이 닿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산호는 상대의 바지 위로 손을 올렸다. 무척 서툴렀지만, 능숙한 척 무던히도 애를 쓰면서였다.
“여기 딱딱해졌어요. 저 때문인 거 맞죠.”
“…….”
“이거 제 안에 넣고 싶지 않아요?”
상대는 홈웨어 같은 옷을 입은 모양이었다. 버클이 아닌 밴드가 손끝에 걸렸다. 산호가 바지 밴드에 손가락을 걸자, 허리를 감싼 손에 울컥 힘이 실렸다. 그 손은 산호의 허리를 별안간 거칠게 끌어당겨 안았다. 조금의 틈도 없이 하체가 달라붙었다. 여태까지의 조심스러운 손짓과는 확연히 다른 몸짓이었다.
손님이 흥분한 걸까. 정말 이대로 이 사람과 관계를 하게 될까. 안도감과 동시에 공포감이 엄습했다. 상반되는 두 감정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산호는 눈가리개 뒤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사람에게 안기고 나면…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그 후엔 지금의 일은 그저 악몽으로 남을 것이다. 지금은 상대의 흥분이 가라앉기 전에 더욱 확실히 행동해야 했다. 산호는 살짝 웃어 보였다.
“저도 거칠게 하는 게 더 좋아요. 세게 안아도….”
“…그만해.”
몹시 작은 목소리였다. 그 작은 목소리에 억지로 떠올렸던 산호의 미소가 순식간에 꺼졌다. 상대의 목소리는 분명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늘 그리던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을 리 없었다.
잘못… 잘못 들었나? 이 사람을 선배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어서, 그래서 선배 목소리가 들린다고 착각하는 건…
“산호야, 제발 그만해.”
그건 의미 없는 바람이었다. 산호는 성급히 상대의 가슴을 거칠게 떠밀었다. 가까이 붙었던 몸이 물리적인 힘에 의해 멀어졌지만, 하체가 엉켜있는 바람에 다시 중심을 잃었다. 허리가 뒤로 홱 꺾이자, 커다란 손이 황급히 산호의 허리를 받쳐왔다. 공포에 질린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 아니… 이게 아닌….”
정신없이 고개를 저으며 산호는 절박하게 읊조렸다. 색색 숨이 쏟아지는 얼굴 위로 반대쪽 손이 살며시 올라왔다. 눈을 가렸던 부드러운 실크 가리개가 스르륵 풀렸다. 어둠에서 겨우 벗어났건만, 산호는 눈을 꼭 감은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뜰 용기라곤 남아있지 않았다.
“…눈 떠.”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말했다. 고개를 젓는 산호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상대가 다시 말했다. 눈 떠봐. 얼굴 보여줘. 상대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다정했고, 다정한 만큼 힘이 있었다. 산호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밀어 올렸다. 희끄무레한 빛이 눈가를 사정없이 찔러왔다.
“…….”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병원의 로고가 빼곡히 적힌 환자복이었다. 눈가리개를 풀어낸 커다란 손, 그리고 그 소매 끝에 핏물이 튄 자국 같은 것이 차례로 들어왔다. 상대의 얼굴을 감히 바라보지 못하고 산호는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허리를 안은 손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놔, 놔….”
거이 울먹이듯 속삭이자, 허리를 감은 손이 스르르 풀려났다. 산호의 몸에서 완전히 떨어지는가 싶었던 손은 그대로 얇은 손목을 거머쥐었다. 시선이 쏟아질 것만 같아 두려운 마음에 산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허름한 병원 슬리퍼와 생채기 가득 오른 하얀 발등이 눈에 들어왔다. 고운 발 위에 생긴 빼곡한 상처에 가슴이 사정없이 따끔거렸다. 눈가가 뜨거웠다. 빠르게 차오른 물기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호는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눈물을 참아냈다.
“…그게, 그러니까….”
“나가자.”
“…….”
“그냥…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손목을 쥔 손은 산호를 단호히 이끌었다. 상대는 망설임 없이 문가 앞에 다다랐지만, 황금색 문을 밀어 열려는 찰나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또 다른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린 탓이었다. 산호의 손을 쥔 커다란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알겠구나. 네가 뭘 선택했는지.”
“…….”
“그 애가 아무에게나 천박하게 다리를 벌릴 수 있는 오메가라는 것까지.”
등 뒤에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는 저를 ‘천박한 오메가’라고 칭했다. 그 말은 산호의 심장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천박한 오메가’라고 생각한다 한들, 산호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은 자신을 ‘천박한 오메가’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었다. 그 상대가 지금 바로 옆에 있었다.
산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금색 문을 똑바로 응시한 시우의 옆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예쁜 눈꼬리 끝이 조금 발긋했다. 꾸욱 다물렸던 시우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그냥 드린 말씀 아닙니다. 이건 양보 못해요.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황금색 문이 발칵 열렸다. 시우와 산호의 발이 나란히 밝은 대리석 복도 위를 밟았다.
***
‘여기 딱딱해졌어요. 저 때문인 거 맞죠.’
‘…….’
‘이거 제 안에 넣고 싶지 않아요?’
가까이 다가와 야릇하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감정이 끊임없이 솟구쳤다. 산호의 손목을 거머쥐고 있었지만 현실감이 없었다. 제 옆의 산호가 신기루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듯 힘주어 얇은 손목을 쥐고 싶었지만, 산호가 겁을 먹을까 두려웠다. 아니, 자기 자신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산호를 겁먹게 할까 그것이 두려웠다.
“…….”
클럽을 가로지르는 내내 산호의 손목이 비틀렸다. 미약한 힘이었지만,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거부의 행동임을 시우는 알고 있었다.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
클럽을 빠져나오자 화려한 거리가 드러났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거리의 분주함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더럽고, 한편으로는 화려한 거리였다. 산호가 마침내 손목을 비틀어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자, 시우는 고개를 돌려 산호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산호는 이 거리만큼이나 화려한 차림새였다.
“…….”
그리고 이 거리만큼이나 외설적이었다.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에 얇은 산호의 셔츠 속 가녀린 실루엣이 여과 없이 비추어졌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매끄러운 재질의 실크 셔츠에 가릴 듯 말듯 드러난 분홍색 유두가 수줍은 듯 발긋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시우는 입술을 꾹 깨물고 가만히 자신의 커다란 카디건을 벗었다.
“…….”
시우는 말없이 산호의 어깨 위에 카디건을 둘렀다. 잠시나마 노골적인 거리의 시선에서 산호를 가려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담담한 척 카디건을 둘러주던 커다란 손은 이내 힘을 잃고 툭 떨어졌다. 지난한 인내를 견디지 못한 탓이었다. 시우는 무너지듯 산호의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선배… 저….”
“산호야.”
산호의 쇄골을 감싼 붕대 위를 조심스레 쓸었다.
“다친 건… 괜찮아? 지금은 아프지 않아?”
떨리는 목소리에 산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시우의 꽉 깨문 잇새로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많이… 다쳤잖아. 칼에 베여서.”
“…전.”
“아팠지.”
뺨에 이질적인 것이 흘렀다. 뜨거운 습기는 충분히 이질적이었다. 시우의 뺨을 타고 또로로 굴러간 눈물방울이 턱 끝에 맺혔다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것은 산호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젖은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던 산호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지금…우는….”
“나, 보고 싶었거든, 너.”
“…….”
“정말, 정말로 보고 싶었는데.”
시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웃으면 반달처럼 곱게 휘어지는 눈가가 지금은 따뜻한 웃음 대신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하얀 뺨에 얄따란 물길이 졌다. 젖은 시우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는 산호의 얼굴이 창백하리만큼 새하얬다. 다시 한 방울의 습기가 뺨을 타고 흘렀다.
“그런데… 이런 걸 보고 싶은 건 아니었어.”
산호에게 둘러준 카디건 앞을 조심스레 여몄다. 그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고 이내 꾸욱 주먹쥐어졌다.
“네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유혹하는 모습 같은 거… 보고 싶은 건 아니었어.”
“…….”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어. 이런 곳이 얼마나 위험한데… 왜 자꾸 이런….”
“아니, 아니에요. 전 정말 그런 게….”
“내가 자꾸 널 방해하는 거야?”
가까스로 열렸던 산호의 입이 다시 다물리는 것을 시우는 미처 보지 못했다. 시야가 온통 흐렸다.
“양주철을 만난 것도, 네 스스로 페로몬을 푼 것도, 지금 여기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매달리고 더듬던 것도, 다 네가 원하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내가 자꾸 널 방해하고 있는 거야?”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방울들이 왜곡을 만들어냈다. 산호를 바라보며 시우는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왜 마음대로 안 되는 걸까, 너는.”
왜 지금도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걸까.
“넌 왜 이렇게 어려운 거지.”
차라리 어떤 변명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산호가 가만히 카디건을 여민 시우의 주먹 위로 제 손을 올렸다. 핏물이 튄 환자복 소매를 바라보며 산호가 말했다.
“제가 선배 마음대로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산호야.”
“선배도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저도 어려워요. 뭐가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그냥, 다 어려워.”
산호의 까만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치는 것을 시우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선배.”
“…….”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거, 해봐요.”
“…….”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금 제일 마음 가는 거 해봐요.”
한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분주한 거리의 소음도 진공상태에 들어간 듯 고요하게 느껴졌다. 시우의 주먹 쥔 손이 스르르 풀리고 그 손은 산호의 작은 뺨을 감쌌다. 얼굴을 덮을 만큼 커다란 손이 동그란 뺨과 뒷머리를 단단히 옭아맸다. 그대로 두 입술이 포개어졌다.
“하아….”
시우의 손끝에 살짝 힘이 실렸다. 산호의 입술 사이를 거칠게 헤집고 싶다는 듯 매끄러운 혀가 둥근 입술 선을 덧그렸다. 하지만 감히 파고들지는 못했다. 산호의 입술이 좁다랗게 열리고 나서야 조심스레 그 안으로 혀끝을 밀어 넣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거세게 몰아붙이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흐, 으읏….”
그러나 확신 없이 이 애를 품 안으로 가둘 수는 없었다. 이 애를 거칠게 다룬 다른 알파들처럼 행동할 순 없었다. 시우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으응….”
조심스레 입 안을 훑는 입맞춤에 애가 타는 듯 산호의 입술 사이로 살며시 신음이 흘렀다. 턱선을 따라 조심스레 입술을 미끄러트리던 시우는 목덜미 아래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타액으로 촉촉해진 산호의 입술을 엄지로 훔트렸다. 산호가 조용히 물었다.
“왜 나한테 키스했어요?”
“…산호야, 나는.”
“지금 제일 마음에 가는 게 나한테 키스하는 거였어요? 왜요?”
“…….”
“정말 모르겠어요. 선배가 무슨 생각 하는지, 뭘 바라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자신의 입술을 훑고 멀어지려는 시우의 손을 산호가 답삭 쥐었다.
“선배도… 제가 천박한 오메가라고 생각해요?”
산호는 고통스러운 듯 비틀린 눈을 내리깔았다. 곧 절망한 얼굴이 다시 시우를 향해 들렸다. 산호는 입술이 닿은 시우의 손끝을 제 입술 새로 밀어 넣었다. 입술 사이를 파고든 손끝에 산호의 매끄럽고 촉촉한 혀가 닿았다. 아껴먹는 사탕을 할짝이듯 혀가 살며시 움직였다.
“선배한테만큼은 이런 거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야. 그런데 차라리 지금은.”
“…….”
“선배도 다른 알파들처럼 내 몸이라도 원했으면 좋겠어. 그럼 차라리 쉬웠을 텐데. 선배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는 게-.”
“백산호.”
“난 그냥 선배 옆에 있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전분데.”
“백산호, 내 말 들어.”
시우가 입술 새에 물린 손을 빼내어 다시 산호의 손을 쥐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가에 여러 감정들이 뭉쳐 있었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야.”
“…….”
“아무도 산호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산호 너조차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상에서 제일 귀한 너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뜻인데요. 선배가 원하는 게 그것뿐이에요?”
“지금 네가 얼마나 위험한지 넌 몰라.”
“전 그런 거 중요하지 않-.”
“아니, 나는 중요해.”
산호야. 시우가 나지막이 산호를 부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줄게. 나,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줄 수 있어.”
커다란 손에 갇힌 산호의 손이 작게 떨렸다. 시우는 단호한 눈으로 산호를 마주보았다.
“그냥 한마디만 해. 내가 너를 지킬 수 있게, 한 마디만 해줘. 그럼 네가 원하는 거 전부 들어줄 수 있어. 전부 다.”
“…….”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만 해줘.”
산호는 한동안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 말하면… 내 옆에 있어 주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응. 무슨 일이 있어도.”
까만 하늘에 하얀 별이 콕콕 박혀있었던 산속 캠핑장 아래에서 자신을 좋아하느냐 물었을 때처럼, 산호는 입술 점막을 짓씹었다. 열릴 듯 말 듯 한참을 달싹이던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도와주세요. 선배가 원하는 대로.”
작은 목소리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 시우는 산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세게 품 안으로 가두었다. 마주 닿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산호의 목덜미에서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농염한 페로몬이 아니라, 조금 더 풋풋한 산호의 체향이었다. 청순하고 무구한 산호의 체향은 어쩌면 페로몬보다 더 색정적이었다. 당장에라도 이 목덜미에 자신의 이를 박아넣고 각인을 새기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시우는 천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자신만큼은 이 다디단 향을 들이마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게 이 애를 지키기 위한 자신의 역할이었다.
“…….”
“…….”
품에 안은 이 애를 지키기 위해 시우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떠올렸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계획이 필요했다. 그것도 무척 탄탄하고 정교한 계획이어야만 했다. 우선은 아버지 눈에 띄지 않는 것부터. 지금 아버지를 더 자극해봐야 상황은 악화될 뿐이다. 산호를 안전한 곳에 숨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시야에서 몸을 숨겨야 했다. 자신뿐 아니라, 산호 역시.
떨어지기 아쉬운 듯 천천히 시우가 산호의 어깨를 쥐며 몸을 물렸다. 시우의 등 뒤에서 주먹 쥐어졌던 산호의 손도 사르르 풀렸다. 산호의 까만 눈동자에 비치는 네온사인 불빛을 가만히 바라보며 시우가 말했다.
“산호야, 잘 들어줘. 중요한 거야.”
“…네.”
“당분간 못 만날지도 몰라. 어쩌면 조금 오래. 널 찾아가지도, 마주치지도 못할지도 몰라.”
“왜…요?”
“준비할 게 있어.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꼭 찾으러 갈게.”
“얼마나 기다려야….”
“최대한 빨리.”
그때 블랙 슈트의 남자가 P클럽 입구에서 걸어 올라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단번에 제가 찾던 이들을 찾은 모양인지 시우와 산호를 향해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마주 보며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상대를 경계하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퍼져나갔다. 블랙 슈트의 남자, 규철은 시우의 날 선 경계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곧 태연하게 그들의 앞에 섰다.
“진시우 이사님.”
“…….”
“병원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차는 곧 도착할 겁니다.”
시우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규철을 마주 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알파의 페로몬은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시우의 페로몬에 숨이 답답한 듯 규철의 호흡이 조금 빨라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건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백산호 씨는 제가 집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산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규철을 바라보았다. 시우는 산호의 어깨를 조금 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며 규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편이 가장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거, 알고 계실 겁니다. 회장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니까.”
규철은 고개를 살짝 돌려 높다란 클럽의 외벽을 흘끗 바라보았다.
“백산호 씨도 저와 함께 가는 게 가장 안전할 겁니다.”
숨을 한번 고른 그는 다시금 말을 쏟아냈다. 이번엔 산호를 향해서였다.
“회장님께서 내기는 유예하자는 말씀을 전해달라셨습니다. 백산호 씨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내기? 시우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고개를 돌려 산호를 바라보자, 산호는 입을 꾹 다문 채 반항적으로 클럽의 외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내기를 말하는 거지? 자신이 모르는 상황이 있는 거라면…
“어서 가시죠, 이사님. 오늘 더 회장님을 자극해봐야 좋을 것 없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마침 골목 끝으로 검은색 세단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짙은 윈도틴팅이 되어있는 차는 그들의 앞으로 조용히 다가와 멈추어 섰다. 시우는 자신의 앞에 멈추어 선 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사님, 어서.”
사실, 규철의 말이 맞았다. 생각을 정리했던 대로, 아버지를 자극해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지금은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감정에 지배당했던 이성이 곧 차갑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시우는 부드럽게 산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저를 바라보는 겁먹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애써 웃어 보였다.
“산호야, 기다려줄 수 있지.”
“…선배.”
“응? 기다려줄 거지.”
산호가 작게 고개 저었다. 찌푸린 산호의 눈가가 애타게 시우를 향해있었다. 시우는 가까스로 웃어 보였다. 산호가 조금은 안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지금은 보내줘, 산호야.”
“싫어요. 이렇게 빨리… 당분간 못 볼지도 모른다고 했으면서.”
시우는 허리를 숙여 산호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빤히 까만 눈동자를 응시했다.
“응. 네가 보내주지 않으면 안 갈 거야.”
“그럼…가지-.”
“그런데 지금은 네가 날 보내줘야.”
작은 목소리로 시우는 말을 이었다.
“그래야 널 찾으러 올 수 있어. 반드시 그렇게 할게, 내가.”
젖었던 눈가가 빳빳했다. 산호가 불안하지 않기를 바라며 시우는 눈꼬리를 휘어 보였다. 마침내 산호가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과도 같은 몸짓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 애를 지키기 위해서만 행동할 것이다. 안전하게 이 애를 지키고 나면,
“산호야,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떼려던 걸음을 멈추며 시우가 산호를 향해 말했다.
“그건 다음에 만나면 해줄게. 꼭.”
“무슨… 무슨 말인데요.”
시우는 산호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랑한다는 말.”
산호의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그땐 산호 너도 대답해줘. 내가 캠핑장에서 물었던 거.”
너도 날 좋아하는지, 말해줘. 산호의 어깨에 올랐던 시우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