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폐된 차 안에서 산호와 얼마간의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 잘 가늠되지 않았다. 제법 긴 시간인 것 같기도 했고, 또 짧은 시간인 것 같기도 했다. 시우는 가만히 앉아 부드럽게 숨을 골랐다. 풋풋하고 달큼한 향이 폐부로 가득 스며들었다. 그건 페로몬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고, 훨씬 순수한 것이었다. 그 향은 시우를 어루만지듯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한사코 거절하는 산호를 겨우 차에 앉혀 골목 끝 집까지 데려다 주고 나서야 시우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산호를 데려다주기 위해 골목길을 걸어 올랐던 시간 동안 기다려준 대리운전 기사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 건네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미소를 띤 채였다.
오늘 오메가 클럽에서의 약속은 불쾌한 것이었다.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술 역시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왜일까. 시우는 생일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한껏 부푸는 기분이었다. 좋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하지만 풍선처럼 부푼 마음은 금세 사그라들지 않았다. 말끔하게 씻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시우의 입가에 어룽어룽 미소가 물들어 있었다.
그 기분이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뜬 시우는, 문득 당황스러움에 미간을 좁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자신의 페로몬이 녹녹하게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공기 아래 두껍게 깔린 페로몬이 성마르게 일렁였다.
“…이게 뭐.”
의식이 없을 때 페로몬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우는 단 한 번도 페로몬을 제어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전날 술을 마시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 의식 없이 페로몬을 흘릴 리는 없었다. 게다가 이 페로몬은… 일종의 욕구의 발현이었다. 마치 사춘기 소년이 짝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몽정을 하는 것처럼. 시우는 손끝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사이드 테이블의 핸드폰을 확인한 시우의 미간이 조금 더 깊게 좁혀졌다. 오늘 저녁 주주총회에 참석하라는 내용의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JR그룹 주주총회. 시우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이 참여할 필요는 없는 자리였다. 존재의 과시가 아니라면. 물론 아버지 진 회장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겠지만.
시우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제어하지 못하고 새어 나온 페로몬, 구태여 참석해야 하는 주주총회, 그리고 어젯밤… 공존할 수 없는 몇 갈래의 마음이 동시에 떠올랐다. 시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욕실로 들어섰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시우는 드레스 룸 거울 앞에 서서 옷장에 주르륵 걸린 슈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정갈하게 다림질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고가의 제품들이었다.
“…….”
긴 고민 없이 아무거나 골라 입는다고 해도, 모두 시우에게 꼭 들어맞을 것이다. 평소의 시우라면 망설임 없이 하나를 골라냈을 터다.
“…….”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선택이 어려웠다. 고작 옷 따위를 고르는 일이 왜 고민스러울까. 짙은 그레이 컬러 슈트를 꺼내 거울에 비추어보았다.
“…음.”
시우는 살짝 눈썹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더 나은 거 없나. 다소 거칠게 옷장을 헤집었다. 짙은 푸른색 슈트를 골라 다시 한번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조금 전의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이쪽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천천히 옷걸이를 빼어내며 시우는 문득 기가 막힌 듯 픽 웃었다. 이렇게 옷 고르면서 고민하는 거, 데이트할 때나 하는 행동 아니던가. 입매를 매만지며 시우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나, 누군가한테 잘 보이기라도 하고 싶은 건가.
“…아.”
자연스레 흘러가던 생각의 연결고리가 금세 한 지점으로 튀었다. 시우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통화 연결음이 짧게 들리고, 여느 때처럼 단정하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네, 정 실장님. 아침부터 죄송해요.
- 괜찮습니다. 오늘 주주총회 건으로…
“아, 그건 다음에요. 지금 전화 드린 건.”
시우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미간을 톡톡 두드렸다.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이 무언가 부끄러워하는 사춘기 소년 같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 네, 말씀하십시오.
“그… JR 대학생 인턴십 있지 않았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은 무언가 난처하고, 또 부끄러워하는 낯빛이었다. 시우는 여전히 미간을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 네, 대학생 인턴십 진행 중입니다. 모집은 끝났고 선별 작업 중입니다.
음, 목울대를 짧게 울린 시우가 입술 끝을 살짝 깨물었다. 왜 자신이 난처해하는지 알아챘다. 한 번도 이런 식의 부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창하게 말할 것 까지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청탁은 청탁이니까.
“추천해도 괜찮을까 해서.”
핸드폰 너머 목소리는 잠시 침묵했지만, 곧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 물론입니다, 이사님.
시우의 입꼬리에 빙긋 웃음이 올랐다. 음, 다시 목울대를 울리자 정 실장이 말했다.
- 어떤 분이십니까?
“아, 예쁜….”
무심결에 입을 열었던 시우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콧잔등을 찌푸리며 애써 사무적인 목소리를 꾸며냈다.
“후배예요. 학교 같은 학부 후배.”
- 네. 제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을까요?
그 애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시우는 잠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머리가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아뇨. 평범한 애라서.”
평범…? 그 애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조금 묘했다. 정 실장이 반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네, 알겠습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간단하게 이력 보내드릴게요. 고맙습니다.”
통화가 끊어졌다. 한쪽 팔에 걸쳐진 푸른색 슈트, 그리고 반대편 손에 들린 핸드폰. 시우는 다시금 멀끔히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 보았다.
***
이르게 학교에 도착했다. 사실은, 꽤 많이 이르게.
오늘은 오후 느지막이 하나의 수업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주차를 한 후에 다급히 차에서 내려섰다.
햇살이 내려앉은 학교는 오늘도 평범했다. 활기차고 평온한 모습. 시우는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하는 것은 있었지만. 강의 시간까지는 두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고, 딱히 머물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우는 단과대 주변을 한 바퀴 걷고, 또 전공 강의실이 늘어진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알은체를 해오는 동기나 후배들을 더러 만났고…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내내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조금 시들해졌다.
“…….”
시우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깔끔하게 조성된 연못가 근처. 그다음은 사람이 없는 단과대 뒤편의 주차장. 그늘진 벤치까지 모두 스윽 훑어본 후에야, 시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마음 한구석이 이상했다.
결국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 와, 시우는 다시금 단과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제법 여유가 있어 천천히 걸음을 떼는 중이었다. 사물함 캐비닛을 열고 그 안에 가지런히 놓인 전공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공 책… 전공 책 위에 올라 있던 가지런한 손가락이 연이어 떠올랐다.
시우는 살짝 답답한 듯 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에 달콤한 향이 끼쳐왔다.
아, 드디어.
시우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며 웃었다. 희미하게 옅어졌던 미소가 다시 환하게 얼굴 위로 피어올랐다. 시우는 몸을 돌려세웠다.
산호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시우에게서 한 걸음 정도 뒤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얼음이 가득 찬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산호가 불쑥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든 손을 내밀었다. 시우는 이슬이 맺힌 테이크아웃 커피잔과 살짝 발긋하게 달아오른 산호의 귓불을 바라보곤 눈꼬리를 둥글게 휘었다.
산호는 시우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살짝 틀었다. 잘근 깨물던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었다. 익숙한 불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귓바퀴는 달아올라 있었다.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으며 시우는 입을 열었다.
“산호야.”
“…이거.”
산호가 우물댔다. 눈꼬리를 찌푸리고 있는 것이 영 말을 떼기가 어려운 눈치였다. 시우는 말없이 산호를 응시했다. 조금 머뭇대던 산호가 여전히 우물대며 입을 열었다.
“이거 커피 드세요.”
시우는 입술 끝을 살짝 물며 웃었다.
“나 주는 거야?”
웃음기 묻은 시우의 목소리에 산호의 눈꼬리가 조금 더 찌푸려졌다. 시선을 피하려는 듯 조금 더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의 눈꼬리가 활짝 휘었다.
“왜?”
산호는 시우가 왜냐는 질문을 던져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테이크아웃 잔을 내민 손이 움찔 떨렸다. 그 애가 내민 커피잔을 바로 받아들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골리고 싶은 짓궂음이 가득 차올랐다. 태연히 웃으며 시우는 일부러 천천히 커피잔을 받아들었다. 스치듯 시우의 손가락이 산호의 손가락을 쓸며 멀어지자, 산호가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냥… 어제 감사해서요.”
“응.”
“집… 데려다주신 거요. 그래서….”
“그래서?”
산호가 또다시 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렇게 입술 깨물면 상처 나. 시우가 입술을 떼려던 찰나 산호가 말했다.
“선배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거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퉁명스러운 목소리는 어딘가 풀이 죽어있었다. 취향을 거의 타지 않는 평범한 커피를 선택하기까지 이 애가 얼마나 오래 메뉴판 앞에서 고민했을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시우는 다시 한번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으며 산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산호야.”
허리를 살짝 숙여 산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이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거 뭔지 알고 싶어?”
“……알려… 주시면.”
“싫어.”
산호가 빤히 시우를 바라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산호 네가 알아내면 되잖아.”
산호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시우가 허리를 바로 세우며 커피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달그락거리며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기대된다.”
“……네?”
“내가 좋아하는 거 네가 알게 되면.”
“…….”
“다음엔 나한테 그거 줄지도 모르잖아.”
커피 고마워. 시우가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다. 산호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던 터라, 주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용건이 있는 듯 가까이 다가오자, 시우는 시선을 돌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인혜였다.
“아, 인혜야.”
시우가 잠시 곧아졌던 눈꼬리를 휘며 인혜를 향했다.
“수업 들으러 왔….”
“선배.”
인혜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달싹이며 시우의 말을 잘랐다. 입은 시우를 부르고 있었지만, 시선은 산호를, 그리고 산호가 시우에게 건네준 커피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시우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 드릴 말씀 있어요.”
“응?”
인혜의 동그란 눈에 단호한 빛이 떠올랐다. 인혜가 이어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악!”
좁은 복도를 다급히 뛰어가던 학생 하나가 인혜의 어깨를 거세게 밀쳤다. 작달막한 체구의 인혜가 그 힘에 밀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 놀란 시우의 품 안으로 인혜가 와락 부딪히듯 안겼다. 산호가 건네준 커피가 기우뚱하며 와르르 쏟아진다. 인혜의 하얀 원피스에 이리저리 갈색 커피가 튀었다.
“괜찮아?”
시우가 다급히 커피잔을 고쳐 쥐며 인혜의 어깨를 감쌌다. 인혜는 시우의 품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저를 밀치고 지나간 학생을 홱 돌아보았다. 그 학생은 다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사과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뭐야, 진짜….”
인혜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짜증스럽기도 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우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열려있던 사물함 캐비닛에 커피를 올려놓고는 인혜를 향해 돌아섰다. 슈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자, 인혜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를 하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혜가 손수건으로 원피스의 얼룩을 닦아내는 사이 시우는 고개를 들어 산호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 있던 산호는 시우가 저를 바라보자 홱 몸을 돌려세웠다. 아, 잠깐…! 시우가 입을 열었지만, 산호는 등을 돌린 채 강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시우는 산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옅은 한숨이 샜다. 난처한 얼굴로 인혜를 향해 다시 돌아섰다.
“인혜야, 옷 갈아입어야겠다.”
“어… 네.”
“할 얘기는 뭐였어?”
연신 원피스의 얼룩을 닦아내던 인혜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눈을 빼꼼 올려 시우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산호의 뒷모습을 차례로 바라본다. 인혜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긴 얘기라서.”
“응?”
“다음에 해요, 선배. 다음에 얘기할게요.”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올렸다. 산호는 막 강의실 안으로 들어선 참이었다. 작은 얼굴이 또다시 아무런 감정도 띠지 않은 무표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시우는 캐비닛 안의 커피를 꺼내 들었다. 산호가 건네준 커피가, 반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
수업이 끝나자 정 실장이 정확히 시간을 맞추어 모습을 드러냈다. 학교에, 그것도 강의실 앞까지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시우였지만, 오늘의 주주총회 일정은 제법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얹지는 않았다. 말없이 차로 자신을 안내하는 정 실장을 따라 움직였다. 강의실을 떠나기 전, 텅 비어있는 산호의 자리를 흘끗 바라보았다.
“…….”
수업이 끝나기 기십분 전, 산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수업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자리를 뜨는 산호를, 시우는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산호는 시우 쪽으로는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기실 피하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이사님.”
생각에 잠겨있던 시우가 정 실장의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음료, 필요하십니까?”
조금 엉뚱한 말이었다. 시우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정 실장의 시선이 시우의 손끝을 향했다. 정확히는 시우의 손에 들린 커피잔을 향해서였다. 반도 남지 않은 커피가 시우의 손에 들려있었다. 얼음이 모두 녹은 맹탕 같은 것이었다.
“아.”
“드시던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정 실장은 예의 바르게 시우에게 손을 뻗었다. 손에 들린 쓸모없는 음료 따위 버려주겠다는 듯이. 시우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뇨, 괜찮아요.”
정 실장이 시우를 다시 바라보았다.
“커피 안 드시지 않습니까.”
시우는 미지근한 온도의 커피잔을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애가 고심해서 고른 것이 분명한, 다른 이들의 눈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을 커피였다. 시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뇨, 이건….”
“네?”
“이건 마실 거예요.”
정 실장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짧게 고개를 숙인다. 좀체로 이유를 묻는 법이 없는 그 다운 행동이었다. 시우는 천천히 자신의 차가 주차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우가 차 키를 건네주자 정 실장은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천천히 차에 오른 시우는 홀더에 커피를 내려놓고는 등을 차 시트에 깊게 묻었다. 정 실장이 운전석 위로 오르자, 시우가 차창을 내렸다.
“정 실장님.”
“예, 이사님.”
“시간이 빠듯한 건 아니죠.”
“예, 아직 여유 있습니다.”
차창 너머 캠퍼스 거리를 바라보며 시우가 천천히 말했다.
“천천히 가주세요.”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시우는 여전히 차창 너머 캠퍼스 거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듯이.
억지로 커피 두어 모금을 넘기는 사이 차는 금세 학교 앞 번화가에 도착했다. 마침 정지 신호에 걸린 차가 멈추어 서자, 시우는 옅은 숨을 내뱉으며 거리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직감과도 같은 불안함이 밀려들었다.
“…….”
그리고 그 직감은 예민하게 시우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시우가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만.”
“예?”
“잠시만 멈춰주세요.”
대학가 술집이 모여 있는 거리였다. 익숙한 지하 술집 옆, 작은 골목길에 어릿한 두 형체가 눈에 띄었다. 시우는 눈썹을 찌푸리며 골목 안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점점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잠시만 계세요.”
정 실장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시우는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섰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때로는 짐승처럼 예민하게 위험을 감지하는 알파의 감각이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시우는 천천히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어둠이 가라앉은 골막으로 네온사인 깜빡이며 빛 얼룩을 만들어냈다. 골목 안쪽에는 덩치 큰 남자가 있었고, 남자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지만, 다른 누군가도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남자에게 떠밀리며 벽에 등을 쿵, 찧는 것이 보였다.
떠밀린 누군가가 무어라 말했다. 도와… 달라는 것 같은데. 그때, 페로몬이 훅 끼쳐왔다. 그들은 형질인이었다. 그리고, 이건 분명히 공격적인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그에 반항하는 듯한 오메가의 페로몬은 벽에 가로막힌 듯 연기처럼 미세하게 흩어졌다.
시간이 많지 않은데. 시우는 손목의 시계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상황을 인지하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내 골목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섰다. 덩치 큰 남자가 벽으로 밀어붙인 누군가의 목덜미에 얼굴을 성급하게 묻는 것이 보였다. 시우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요즈음은 왜 자꾸 이런 더러운 꼴을…
“거기 뭐 하는…!”
시우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페로몬을 풀었다. 순간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덩치 큰 남자를 수마처럼 덮쳤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위협적인 것이었다. 저열한 짓이나 일삼는 열성 알파 따위가 견디기 힘들 정도의 페로몬이었다. 덩치 큰 남자는 순간 저를 덮친 페로몬에 토기가 밀려오는지 몸을 홱 뒤로 물렸다. 허리가 단박에 굽어지며 우웩 소리와 함께 숨을 거칠게 토해냈다.
벌게진 얼굴로 시우를 돌아본다. 시우를 확인한 남자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씨이팔, 또 이 새끼야?”
또? 얼핏 남자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는 얼굴이야.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 얼굴이 잔뜩 일그려져 있는 탓일까. 그가 누구인지 단박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이든 간에 비열하고 추잡한 인간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꺼져.”
시우가 위협적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덩치 큰 남자는 숨통을 조이기라도 하듯 저를 옥죄어 오는 시우의 페로몬에 몸부림치며 더욱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쿨럭, 쿨럭. 타액을 줄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시우를 노려보는 눈길이 험악했다.
“이 개…새끼들이 쌍으로….”
“꺼져, 당장.”
허리를 잔뜩 굽힌 채 시우를 노려보던 남자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시우의 옆을 지나치며 벌게진 눈을 부릅떴다.
“내가 너네들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마치 시우를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 역시 상관없었다. 약한 자에게만 강한 인간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시우는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냉랭하게 바라보다가, 다급히 벽에 떠밀린 상대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그를 살펴보기 위해 허리를 살짝 숙이고 얼굴을 걱정스레 들여다보았다.
“괜찮아요?
한 걸음 다가서자, 어둠 속에 가려져있던 상대의 얼굴이 또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산호….”
산호의 눈가가 온통 눈물로 짓물러있었다.
“산호 너 여기서 무슨….”
어쩐지,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게…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이유가… 노기를 띤 시우의 페로몬이 울컥 쏟아졌다. 페로몬을 느낀 산호가 옅은 신음을 뱉었다. 눈가가 천천히 열꽃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시우는 이를 사리물며 다급히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울컥 치솟은 분노는 끝 간 데 없이 터져 나왔다.
또, 또다.
왜 이 애는 자꾸만 이런 일을 당하는 걸까.
잔뜩 겁먹은 얼굴의 산호를 바라보는 시우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
산호는 말없이 시우의 시선을 피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셔츠 앞자락을 꾸욱 말아쥐는 산호의 손 역시 달달 떨리고 있었다.
아.
시우가 작은 탄성을 뱉었다. 방금 전 악의에 찬 말을 뱉으며 사라진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산호의 집 근처 좁은 골목길 가로등 아래서 산호에게 추근댔던 그 남자였다.
“…….”
그 남자를 왜… 하지만 산호가 그 남자를 다시 만난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시우가 전에 없이 인상을 구기며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그 새끼를 그냥 보내주는 게 아니었다. 그냥 곱게 보내주는 게 아니었어. 시우는 산호의 손목을 거칠게 말아 쥐었다.
“나와.”
산호는 뿌리치려는 듯 손목을 비틀었지만, 시우는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은 가슴 한가득 차오른 분노가 더 거센 탓이었다. 분노로 일렁이는 눈으로 산호를 돌아보자, 시선을 피했던 산호가 젖은 눈을 들어 천천히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선배.”
“나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시우답지 않은 차갑고 강압적인 말투. 화가 치밀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인지 시우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분노가 치솟고 있다는 것만 인지했다. 다소 거칠게 산호를 끌어당기자, 산호가 억센 힘에 끌려 시우에게로 가까이 붙었다. 잡힌 손목이 아픈 듯 눈꼬리가 찌푸려져 있었다.
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산호의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러잖아도 바들바들 떨리는 손목에 자신의 붉은 손자국까지 남은 것을 보자, 또다시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거.”
“……선배.”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
“이런 거 안 하기로 나랑 약속한 거 아니었나.”
아, 약속이 아니라 일방적인 내 소원이라서, 그래서 무시하는 건가. 산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시우는 말 없는 산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이 흐른 후에야, 시우에게 잡혔던 손목을 매만지며 산호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화 나신 거예요?”
산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묘하게 달뜬 목소리이기도 했다. 가라앉지 않는 화를 누르며 시우가 시선을 내리깔자, 산호가 움찔하듯 어깨를 떨었다.
“혹시 제가 다른 알파….”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산호가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선배. 화 안 내시면 안 돼요?”
산호는 가만히 입술을 물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소중한 공예품을 만지기라도 하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시우의 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산호의 손끝이 시우의 뺨에 닿았다.
십수 년 전, 알파로 발현하기 전날 만났던 아이가 비슷한 행동을 했었다. 예뻐서. 너 되게 예뻐. 그때도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가. 산호의 손끝이 닿은 뺨에서부터 이상한 촉감이 퍼져나갔다. 시우의 눈썹이 잘게 찌푸려졌다.
이 애는… 정말 모르는 걸까. 자신이 얼마나…
“시우 선배?”
그때 골목길 앞에 작은 그림자가 아른댔다. 시우가 골목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작달만한 여자애가 고개를 모로 기울여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시우 선배예요?”
인혜였다. 울컥울컥 쏟아지던 복잡한 감정을 꾹 내리눌렀다. 억지로 표정을 펴고 입을 열었다.
“아, 인혜야.”
품에 노트북을 안고 있는 것을 보니, 인혜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인 모양이었다. 인혜가 천천히 시우와 시우를 향해 손을 뻗은 산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는 그냥…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페로몬이….”
놀란 듯 동그래진 눈으로 횡설수설 중얼거리던 인혜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지금의 상황을 머릿속에서 그리는 듯했다.
“왜 선배가 산호랑 여기서….”
인혜의 얼굴에 짙은 혐오감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히 시우를 향한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향한 것이었다.
“백산호, 진짜 선배한테….”
역시나 뜻 모를 이야기였다. 시우는 눈가를 찌푸렸다.
***
핸들을 쥔 시우의 손이 잘게 떨렸다. 마음이 계속 이리저리 날뛰었다. 본래 시우는 감정에 크게 동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이나 욕구를 다스리는 것이 늘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를 만나고 난 이후부터는 묘하게 모든 것이 비틀리는 기분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치솟았고, 설명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 공존했다.
방금도 시우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높다랗게 우뚝 선 JR그룹의 본사 건물이 가까웠다. 시우의 차가 매끄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이를 알아본 경호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뒷좌석 문을 달칵 열며 경호원이 말했다.
“……이사님?”
뒷좌석이 아닌 운전석 문을 열고 시우가 차에서 내려서자, 텅 빈 뒷좌석을 들여다보던 경호원이 다소 난처한 얼굴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가 직접 운전을 해서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시우는 억지로 굳은 미소를 띠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주차 부탁드릴게요.”
경호원에게 스마트 키를 내밀었다. 경호원은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이어피스의 마이크에 발렛 기사를 부르는 요청을 넣으며 고개를 마주 숙였다. 시우는 딱딱하게 걸음을 옮겼다.
***
[30분 전]
“정 실장님, K동으로 가주세요.”
주춤대는 산호를 끌어와 차 뒷좌석에 앉히자, 정 실장이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그의 눈썹이 찌푸려지려는 듯 한순간 움찔했다. 시우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제 후배 집에 데려다 주세요. 안에 들어가는 것 까지 확인하세요.”
“그럼 이사님께선….”
“저는 다른 차 부를게요.”
“하지만 시간이….”
“괜찮으니까.”
시우는 후,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곤 억지로 웃어 보인다. 걱정하지 마세요. 단호한 시우의 말에 정 실장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윤 비서 편에 차 보내라고 연락하겠습니다. 본사까지 모셔다드리지는 못할 테지만….”
“제가 운전할게요. 고맙습니다.”
시우가 차 문을 닫으려 손을 뻗었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산호와 눈이 마주쳤다.
“…….”
“…….”
시우는 산호의 시선을 피해 시선을 올렸다. 룸미러 너머로 정 실장에게 시선을 맞춘 시우는 다시 한번 조용히 말했다.
“부탁드려요.”
달칵 문이 닫혔다. 잠시간 멈추어 있던 차는 다시금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발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인혜에게 몸을 돌려세웠다. 멀거니 서 있는 인혜의 표정이 몹시도 복잡했다. 오늘 학교 복도에서 짓고 있던 표정과 비슷했다. 시우가 인혜에게 말했다.
“인혜야, 오늘 여기서 본 거.”
“제가 드릴 말씀 있다고 했던 거요.”
인혜가 또다시 시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시우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인혜는 절대로 무례한 성격이 아니었다. 예의 바르고 착한 아이다. 시우가 인혜를 바라보자, 인혜는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거 백산호 얘기에요.”
“산호… 얘기?”
“지금 선배 급한 일 있으신 거죠.”
“…응.”
“내일 학교에서요. 아니, 학교 말고 밖에서 말씀드릴게요.”
인혜의 표정이 정말로, 정말로 이상했다.
***
“JR그룹 452회 주주총회….”
널따란 콘퍼런스 룸에 시우가 앉자, 단상 위에서 마이크가 울리기 시작했다. 가장 상석에 앉은 진 회장은 조금 늦게 도착한 시우를 한 번 바라보았을 뿐,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진 회장은 총회에 10분가량 늦게 도착한 것으로 시우를 나무라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시우는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1/4분기의 안건에 대해서….”
주주총회는 지루했다. 진 회장의 아들, JR그룹의 젊은 후계자로서 존재감을 보여주는 것 외에, 다른 효용이 없는 자리였다. 애초에 곧 대학 졸업을 앞둔 어린 이사가 얹을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모든 순서가 끝나자 사람들이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진 회장은 시우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리며 웃고는 곧 자리를 떴다. 시우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본사 건물 앞, 차에 오른 시우는 잠시간 숨을 골랐다. 골목에서 보았던 짧은 순간들이 눈앞에서 빠르게 재생되었다. 페로몬, 알파, 산호, 그리고… 그리고 혐오감이 서린 인혜의 표정. 얼핏 시선을 내려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10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시우는 핸드폰을 꺼내어 액정을 쓸어보았지만, 이내 도로 내려놓았다.
늦은 시간이니까.
한숨을 푹 쉬며 시동을 걸었다. 시우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단정히 서 있는 차창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안한 듯 웃었다. 마음이 몹시도 불편했다.
***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시우는 주차를 하는 대신 캠퍼스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시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이번에도 찾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시우는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 목록을 주욱 훑었다. 마침내 찾던 번호를 확인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조금 길게 신호가 이어졌다. 연결 음이 끊기려는 찰나 핸드폰 너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시우 선배?
“응, 인혜야.”
- 아,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인혜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마치 이제 잠에서 깨기라도 한 것처럼. 점심을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시우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어제 하려던 얘기 듣고 싶어서.”
- ……
“산호 얘기.”
핸드폰 너머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곧 인혜가 천천히 말했다.
- 저 오늘 몸이 조금 안 좋아서 학교 못 갔어요.
“아.”
괜찮아? 습관적으로 안부를 물으려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인혜가 미안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 선배 학교시면…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어요? 저 학교 근처 오피스텔 살거든요. 놀이터 옆에 빨간 벽돌 건물.
대학가 근처가 으레 그렇듯, 오피스텔이 즐비한 곳이었다. 인혜가 말하는 곳이 어디인지 시우도 잘 알고 있었다. 응, 가볍게 대답하자 인혜가 말했다.
- 놀이터 앞으로 나갈게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작은 목소리에, 시우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아픈데 미안해.”
잠시간 시간을 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금방 갈게.”
아픈 후배를 귀찮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인혜가 하려는 말은 들어야 했다. 산호의 이야기니까. 시우는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시우가 놀이터 앞에 도착한 뒤 5분도 채 되지 않아 인혜가 종종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루종일 집에 있었던 모양인지 편한 옷차림에 보송한 카디건을 걸친 모습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이 제법 푸석해 보였다. 시우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많이 아파?”
인혜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뇨, 괜찮아요.”
“약이라도 사 올 걸 그랬나.”
인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쉬면 낫는 거라….”
시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혜가 놀이터 가장자리의 벤치에 앉자, 시우도 인혜를 따라 천천히 옆자리에 앉았다. 인혜는 양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그것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시우는 아무런 말 없이 인혜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인혜가 고개를 들고 시우를 바라보았다.
“선배. 산호랑 무슨 사이예요?”
눈꼬리가 슬쩍 비틀렸다. 언젠가 산호와 어울리지 말라며 인혜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뭐라고 했더라.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었던가. 시우는 대답 없이 인혜를 응시했다. 인혜가 뻣뻣한 표정의 시우를 바라보곤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혹시 산호한테… 돈 주신 적 있어요?”
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시우가 미간을 좁히며 인혜를 바라보았다. 인혜가 변명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
“그래도 선배. 제가 저번에 얘기했던 거. 백산호가 이상한 아르바이트 한다고 했던 거요. 그거는 진짜에요.”
시우도 알고 있었다. 눈으로 목격했고, 대화도 들었다. 그리고 오메가 클럽 앞에 서 있던 산호. 그날 산호에게 취소하라고 했던 약속이 무엇인지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산호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인혜가 어떻게 확신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시우가 여전히 대답 없이 인혜를 바라보자, 인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먼저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무슨.”
“제 비밀 지켜주시기로.”
비밀?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눈썹을 잘게 찌푸렸다. 화사한 꽃향기가 주변을 가득 메운 탓이었다. 얼핏 어린 데이지 꽃 같은 향기. 산호의 것처럼 강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인혜는 찌푸려진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곤 자신의 페로몬을 갈무리하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저 오메가에요.”
“…….”
“선배 알파인 거 알고 있었어요. 원래는 그냥 의심만 했었는데… 어제 선배 페로몬 맡고 바로 알았어요.”
형질인이라면 어제 골목에서 사나운 시우의 페로몬을 당연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시우가 우성 알파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했다. 인혜가 오메가라면, 산호가 그런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메가한테 이상한 연락 많이 오는 거 아시죠.”
“…응.”
“저도 그래요. 스팸 문자보다 더 지독하고 더럽거든요, 그거.”
“…….”
“그런데 얼마 전에 이상한 메시지를 받아서.”
인혜는 핸드폰 액정을 손으로 꾹꾹 눌러 쓸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곧 결심한 듯 핸드폰 잠금을 풀어 시우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그냥, 선배가 직접 보시는 게 낫겠어요.”
시우는 가만히 인혜가 내민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일방적으로 도착한 메시지가 아래로 줄지어 있었다.
[구인 : 오메가(남녀무관) 데이트 1회 1,000,000원 지급]
[너 H대생이지?]
[겁먹지 마]
[그냥 잡담이나 하려는 거니까]
[H대 경영학부 xx학번 백산호. 알지?]
[그 새끼 오메가 알바 뛰는 것도 아나?]
[내가 그 새끼 관리하거든. 선불 500까지 쥐여 준 적도 있고.]
[알잖아, 횟수권으로 끊으면 더 쳐주는 거.]
오메가들을 알선해주고 돈을 챙기는 포주임이 분명했다. 횟수권 따위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게다가 오메가를 창부 취급하는 저급한 말투. 그리고 지금 그가 창부 취급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산호였다.
[근데 이 새끼가 말도 없이 약속 펑크내서 내가 위약금 몇 배나 물었단 말야.]
[열받아서 잡아다 족치려고 했는데]
[이제 그런 거 안 한다고 지랄하더라고. 학교에서 선배라는 어떤 돈 많은 알파 새끼 문 것 같더라고. 그 뒤로 연락 두절이야.]
[H대 오메가 애들 몇 명한테 물어보니까 진시운가 하는 놈이랑 요즘 어울렸나 보던데.]
[그 새끼 JR 회장 아들이라며]
[조온나 거물 하나 물고는 뻗대는 꼴이 내가 배 아파 죽을 지경이라고.]
[그 머저리 같은 재벌 도련님한테 말 좀 전해줘. 백산호 그 새끼 진짜 거머리니까 조심하라고.]
[다리는 절대 안 벌리면서 돈은 쪽쪽 다 빨아먹는 새끼거든, 걔가.]
[순진한 도련님이 귀한 남자 오메가 페로몬에 꼴려서 어떻게 해보려고 돈 꽂아주고 할딱대나본데, 영 불쌍하잖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인혜가 처음으로 답장이 한 것이 눈에 띄었다.
[나한테 이런 얘기 왜 하는 건데요?]
그 이후로는 단 하나의 메시지만 도착해 있었다.
[왜긴 왜야. 이제 네가 학교에 소문 낼 테니까. 그러면 백산호나 그 도련님이나 학교에서 매장 당할 거 아니겠어?]
시우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인혜와 시선이 마주쳤다. 딱히 감정이랄 것이 없는 무표정이었다. 인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입을 열어 말하는 인혜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오메가가 1% 밖에 없다고 해도 100명 중에 1명은 오메가라는 뜻이에요. 저희 학교에도 제법 있어요. 제가 아는 것만 해도 그래요.”
“…….”
“이제 학교에 소문날 거예요. 이 메시지… 저한테만 왔을 리는 없으니까.”
***
인혜와 헤어져 차에 올라탄 시우는 잠시 고민했다. 짧은 고민이었다. 곧 흐트러짐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액셀을 밟았다. 차가 부웅, 하고 출발했다. 전방을 바라보는 시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K동으로 가는 길이 조금 지리했다. 번화가의 널따랗던 도로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인적이 드문 길로 접어들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이어진 골목길 초입에 다다랐을 때 시우는 차를 멈춰 세웠다. 스산한 공사장 앞에서 멈춘 차의 시동이 부드럽게 꺼졌다. 시우는 천천히 차에서 내려섰다.
“…….”
골목길을 오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새로이 가로등이 설치되고 있는 중인지, 곳곳에 공사의 흔적이 이어져 있었다. 차라리 이 길을 전부 밀어버리는 게 나으려나. 시우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걸음을 옮겼다.
“…….”
파란색 대문은 오늘도 낡고 초라했다. 그리고 여전히 위험해 보였다. 조용히 대문을 밀어 열고는 좁은 시멘트 바닥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곧 뿌연 반투명 유리문에 시우 자신이 설치한 잠금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우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뿌연 유리문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일렁였다.
“…….”
다시 잠시간 고민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민은 짧았다. 시우는 손들어 유리문을 똑똑 두드렸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골목길이 꽤 적막한 탓이었을까, 작은 문 두드림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유리문 너머에서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이 눈에 띠었다. 그저 아른거리는 그림자에 불과한데도, 안에서 움직이는 그림자가 느닷없이 찾아온 방문객에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날선 경계심을 보이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시우는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구….”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시우는 말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곧 천천히 잠금이 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끼이익, 소리와 함께 빼꼼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한 뼘 정도 벌어진 문 틈 사이로 산호의 하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칵 문을 열어젖히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시우가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나야.”
난데없이 저를 찾아온 사람이 시우라는 것을 확인하자, 산호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차례로 떠올랐다. 안도감. 그리고 불안함. 이어지는 서러움. 그 모든 감정 밑에 깔려있는 타오르는 설렘 같은 것까지. 하지만 그것들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산호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선배.”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이는 산호를 보니, 또다시 울컥 감정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어떤 새끼가 찾아왔을 줄 알고 함부로 문을 열어주는 거야. 시우는 입술을 말아 물고 미간 사이를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시우는 이내 한숨을 뱉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오늘 학교 안 갔어?”
“…….”
“…….”
“…….”
“왜 안 갔어?”
산호가 등 뒤로 문을 탁 닫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고개를 작게 저으며 조용히 대답한다.
“그냥요.”
“왜.”
“가기 싫어서요.”
그러니까 왜. 다시 한번 입을 떼려던 시우는 잠시 산호를 내려다보았다. 곧 자신의 입매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산호야.”
“…네.”
“나 화났어.”
산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우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어제 그 남자.”
“…….”
“왜 만났어?”
차분한 어조였다.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산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시우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쯤은. 산호의 눈썹이 잘게 찌푸려졌다.
“그럴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
“그게 선배한테 중요해요?”
“응, 중요해.”
“왜요?”
시우가 인내하듯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금 자신의 미간을 꾹꾹 누른다. 입술을 마구 짓씹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약속했으니까. 나랑.”
“…그건 약속이 아니라.”
“나 그냥 해본 소리 아니었는데.”
너한테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던 말. 시우가 천천히 손을 내리고 산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늘 다정한 미소가 감돌던 입가가 뻣뻣했다. 산호가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저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왜-.”
“저도 선배 소원 들어주려고 했었어요, 정말로.”
시우가 입을 열려는 찰나, 산호의 표정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배도… 선배도 약속 안 지키고 있잖아요.”
시우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약속을 안 지키다니, 무슨.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시우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산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구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였다.
“선배한테 지금 무슨 냄새 나는지 알아요?”
시우의 인상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다른 오메가 냄새난다고요.”
오메가 냄새? 오메가의 흔적이 있을 리 없는… 찌푸려졌던 시우의 인상이 살며시 풀어졌다. 아, 짧은 탄성이 터졌다. 어린 데이지 꽃 향기일 것이다. 산호를 만나기 전, 인혜가 자신의 형질을 밝히면서 풀었던 페로몬이었다. 짧은 순간이었고, 많은 양도 아니었지만, 산호는 예민하게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우성 오메가니까. 산호의 이야기를 이해한 듯한 시우의 표정은 오메가를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산호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왜 다른 사람 안 만날 거라고 거짓말 했어요?”
“산호야.”
“왜 다른 오메가 냄새 묻히고 여기까지 온 건데요.”
“…산호야.”
“선배가 그런 말 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을 텐데. 산호는 질끈 감았던 눈을 매섭게 올려 뜨며 시우를 노려보았다.
“그래 놓고 저한테 왜 화내시는 건데요.”
일부러 나 미치게 하려는 거지. 나 보라고 이러는 거지.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거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서 내가 선배한테 더 목매게 하려고. 입술을 뚫고 나오지 못한 산호의 뒷말은 검게 응어리져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원망이 가득한 산호의 눈을 바라보며 시우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검은 눈에 담긴 원망은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구석이 있었다. 원치 않는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하지만 산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메가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페로몬을 묻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것을 구태여 설명하는 것도 우스웠다. 설명해서 달래 줄 수 있다면 자신이 우스워지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변명이 될 터다. 시우는 가만히 산호를 내려다보았다.
왜 이 애 앞에서는 항상 마음과 다른 일이 벌어지는 걸까. 평범했던 일상이 기묘하게 비틀리는 기분이 다시금 밀려들었다.
꽤 오랜 시간 산호를 바라보던 시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산호야.”
산호는 여전히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시우를 마주 보고 있었다. 시우는 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부풀었다가 곧 가라앉는다. 마음과 다른 일이 벌어진다면, 상황을 바꾸면 되잖아. 내가.
“나 회사 가는 거 싫어해. 그것도 엄청.”
맥락이 없는 이야기였다. 분명히 산호가 예상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산호의 눈이 일순 찌푸려지듯 크게 뜨였다. 의문이 작게 떠오른다.
“회사는 친구도 없고, 지루해. 답답하고.”
지루할 틈이나 있을까. 진시우가 혼자인 시간이 있기나 할까.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시우의 모습을 산호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산호가 말없이 시우를 바라보고 있자, 시우가 아주 천천히 눈꼬리를 휘었다.
“나랑 같이 회사 갈까?”
“그게 무슨….”
“나랑 같이 회사 가자. 나 안 지루하게.”
“대뜸 회사라니….”
“회사에 대학생 인턴십 있거든.”
산호의 표정에 떠오른 의문이 조금 더 짙어졌다. 시우가 살짝 허리를 숙여 산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보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따뜻한 흙냄새가 끼쳐왔다. 시우의 밤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깜빡였다.
“내가 너한테 빚진 걸로 해. 약속 못 지켰으니까, 내가 빚진 거야.”
“…….”
“갚을게, 내가.”
“…….”
“그러니까 나랑 회사 가자. 같이.”
돈 때문에 그딴 더러운 새끼 만나지 말고. 시우 역시 뒷말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산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우의 얼굴을 마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뜻이 이어지지 않는 단어들이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입 속에서 부서졌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시우의 눈동자가 천천히 더 굽어졌다. 따뜻한 미소가 만면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이것도 빚진 걸로 할까.”
“…….”
“이것도 갚을게. 꼭.”
“…….”
“그러니까, 내 말 들어줘. 응?”
얕은 바람이 불어와 시우의 가는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눈썹 아래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머리카락, 길고 섬세한 속눈썹, 그리고 따뜻한 밤색 눈동자와 곱게 휘어진 눈꼬리. 산호는 말없이 시우의 얼굴을 한동안 마주 보았다. 유일하게 자신에게 대가를 원하지 않는 사람. 산호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일정한 규칙 없이 멋대로 뛰는 심장의 박동이 산호에게 무언가를 일깨워주었다. 작은 불씨 같은 그것은, 곳 커다란 불로 이어질 것이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아주 무섭게, 아주 커다랗게. 그리고 곧 불시에 산호를 잡아먹을 게 분명했다. 산호 역시 그것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하지만 직감했을 뿐이었다. 막을 방법은 없을 테니까.
마침내 산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고갯짓에 시우의 입꼬리가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갸름해진 눈꼬리가 한껏 기분 좋은 듯 휘어졌다. 산호를 둘러싸고 있던 경계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시우는 콧잔등을 작게 찌푸리며 웃었다.
아, 안고 싶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끌어안고 이 애의 달콤한 향을 한껏 들이마시고 싶다.
“이번엔 정말 약속한 거다.”
“…….”
“응? 약속한 거야.”
“…네.”
물론, 내가 산호 너를 안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테지만.
시우의 따뜻한 눈빛이 산호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기분 좋은 웃음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
골목길 아래까지 내려오려는 산호를 억지로 집 안으로 밀어 넣은 후에야 시우는 몸을 돌려세웠다. 영 마뜩잖은 파란색 대문을 흘끗 바라보고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골목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시우는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마음이 조급했지만, 혹여나 조용한 골목길에서 누군가 통화내용을 들을 것이 조금은 걱정되는 탓이었다.
“…….”
차 위에 올라 문을 닫고 나서야 시우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익숙한 통화 연결음이 들린 후에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이사님.
시우는 차창 너머 공사 중인 새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정 실장님.”
- 예, 말씀하십시오.
“사람 하나 알아봐 주세요.”
- 네, 어떤.
“오메가 알바 알선책인데.”
여전히 새 가로등을 바라보는 시우의 눈이 답지 않게 차가웠다.
“H대 재학 중인 오메가하고 연결 있는 사람은 전부 추려주세요.”
- 전부, 말씀이십니까.
“네. 한 번이라도 연락했던 사람이면 전부.”
- 네, 알겠습니다. 급한 일이십니까?
시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굳게 다물린 입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려요.”
- 네,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처리는 어떻게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알아만 봐주세요.”
그건 제가 직접 할 거니까. 구태여 뱉을 필요 없는 말을 삼키며 시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 한 가지만 더.”
입매를 두드리던 손끝이 입술 선을 누르며 길게 미끄러졌다.
“아버지 모르게 하세요.”
핸드폰 너머 침묵이 이어졌다. 평소보다 조금 더 긴 침묵이었다.
- 알겠습니다, 이사님.
“감사합니다. 그럼.”
통화가 끊긴 핸드폰 액정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시우는 핸들 위로 손을 올렸다.
***
하루 정도 푹 쉬고 나자 컨디션이 회복된 느낌이었다. 인혜는 현관 앞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골목길에서 쏟아진 시우의 공격적인 페로몬의 영향이 제법 컸던 탓이었다. 잠시지만 묵직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접한 것으로 하루를 내리 앓을 정도였으니까. 열성 오메가인 인혜에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가까스로 구한 페로몬 진정제를 먹고 하루를 꼬박 쉬었다. 하필 구비해 놓은 약이 전부 떨어져 약을 구하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알파들과 달리 오메가들은 공식적인 루트로 페로몬제를 구하는 것을 꺼려 했다.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이거 효과 완전 좋은데. 써볼래?’
페로몬제를 구하는 인혜에게 연결책은 담배형 페로몬제를 내밀었다. 주로 마약성분이 함유된 담배형 페로몬제는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불법으로 거래되는 만큼 좋지 못한 성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그만큼 가시적인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번에 인혜에게 내밀어진 것은 누가 보아도 일반 담배로 보일 만큼 상태가 좋아 보였다.
인혜는 눈살을 찌푸리며 단박에 거부했다. 안 그래도 정식으로 구매하지 않는 것이 꺼려지는 마당에 그런 것에 손을 대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인혜는 고개를 털며 천천히 학교로 향했다.
“…….”
두 개의 교양 수업이 있었고, 이어 전공 수업이 있었다. 자신의 사물함 캐비닛을 열고 오늘 수업에 필요한 것들을 정리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프린트물도 제법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프린트물을 탁탁 그러모으는 중이었다.
“…….”
어디선가 습기 먹은 단내가 훅 끼쳐왔다. 오메가의 페로몬. 학교에서 대체 누가…? 오메가는 특히 더 자신의 페로몬을 신경 써서 제어한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페로몬이 새어 나오려 하자, 인혜는 서둘러 그것을 제어하며 몸을 홱 돌려세웠다.
“어…!”
인혜의 뒤에 가까이 서 있던 누군가와 거칠게 부딪혔다. 인기척이 없어 누군가 뒤에 가까이 서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와 부딪힌 충격으로 품에 안았던 프린트물이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인혜와 부딪힌 누군가는 냉랭한 눈으로 흩어진 프린트물을 빤히 바라보았다.
“…백산호?”
그건 산호였다. 표정이랄 것이 없는 얼굴이 무척이나 희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흰 얼굴은 감정 없는 표정 때문인지 어딘가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
“…….”
인혜는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이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불쾌한 그 메시지 때문이기도 했고, 시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떤 직감처럼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인혜는 말없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프린트물을 그러모았다.
“…….”
산호의 마른 두 다리는 여전히 인혜의 앞에 말가니 서 있었다. 낡은 운동화가 천천히 움직였다. 한 걸음 떼는가 싶더니 바로 앞에 떨어진 프린트물 하나를 꾸욱 밟는다.
“…이거….”
인혜가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올렸다. 살짝 아래로 시선을 내린 산호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했다.
“너였어. 역시.”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것 같았다. 프린트물을 밟은 운동화가 그것을 짓이기듯 작게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오싹함을 느낀 탓인지 인혜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너였어, 역시. 무슨… 말이지?
“산호야.”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은 산호가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선배.”
복도 끝에서 키가 큰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색이 옅은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프린트물을 밟았던 낡은 운동화가 가만히 물러났다. 천천히 걸음이 멀어지고, 이내 조금씩 빨라진다. 산호가 시우의 앞으로 다가서는 것을 인혜는 빤히 바라보았다.
“수업 끝났어?”
“네.”
“같이 가. 오늘은 서류 등록만 해도 괜찮아.”
“아.”
시우가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나랑 같이 가잖아.”
산호와 시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인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거칠게 짓이겨진 프린트물을 천천히 주워들었다.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과 짓이겨지면서 찢어진 자국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인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혜는 그제서야 굽혔던 무릎을 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기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너 교양 있지 않아?”
“아… 어.”
인혜가 복도 끝에 여전히 시선을 둔 채 중얼댔다. 동기가 인혜의 시선을 따라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아, 너도 아까 시우 선배랑 걔 봤어?”
응? 인혜가 망연히 중얼거리며 동기를 바라보았다.
“같이 내려갔잖아. 방금.”
“…아. 봤어.”
인혜의 대답에 기운이 없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동기가 잔뜩 목소리를 낮추며 종알댔다.
“그 소문 진짜인 거 같더라.”
“무슨 소문?”
“너 못 들었어?”
동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산호가 시우 선배한테 공사친다잖아.”
적나라한 단어였다. 인혜의 눈썹이 찌푸려진 것도 모르고 동기는 눈치 없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간도 크지. 어디 시우 선배한테.”
“…….”
“시우 선배가 잘해주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냐고. 선배 워낙 착하니까 다 잘해주는 건데. 조금 잘해주니까 아주 이때다 싶어서 달라붙는다고 그러더라. 진짜 오메가인지 뭔지, 그렇게 남자들을 잘 홀린다고….”
“지현아.”
인혜가 동기의 말을 가로막았다. 응? 저를 돌아보는 동기를 바라보며 인혜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런 거 아니라고? 하지만 확신할 수 있나? 정말로 백산호가 그런 마음이면… 인혜는 억지로 뻣뻣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커피 사러 가자. 수업 들어가기 전에 커피 사 갈래.”
여전히 말을 얹고 싶어 하는 동기의 팔을 잡아끌며 인혜는 걸음을 뗐다. 짓이겨진 프린트물이 품 안에서 팔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