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커다란 클럽 앞에서 산호는 걸음을 멈추었다. 덩치가 커다란 가드가 입구에 서 있었고, 질이 좋아 보이지 않는 노란 머리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 그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산호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자정이었다. 주철을 만나기 위해선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산호가 클럽의 입구로 조심스레 다가가자, 노란 머리의 남자가 산호를 바라보더니 팔을 쭉 뻗어 입구를 막아섰다.
“넌 뭐야?”
다분히 시비조의 목소리였다. 산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약속 있어서 왔는데.”
건조한 대답에 남자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산호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아, 알바 뛰러 온 오메가야? 오늘이 처음?”
산호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 남자가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씨발, 요즘 것들은 성의가 없어. 돈 벌고 싶으면 이것도 면접이라고 생각해야지, 존나 허름한 꼴 하고는.”
“돈 벌러 온 거 아니-.”
남자가 낄낄 웃었다.
“너 같은 애들 중에 돈 벌러 왔다는 애 한 명도 없어. 뭐, 허름해도 반반하긴 하네. 페로몬이나 좀 풀어봐. 쓸만한지 보게.”
산호의 눈가가 와락 찌푸려졌다. 남자가 음흉한 눈으로 산호를 바라보았다. 그때 덩치가 커다란 또 다른 남자가 다가와 노란 머리 남자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주철이었다.
“야, 아서라. 얘 페로몬 맡으면 너도 눈깔 뒤집힐걸.”
“어, 형님.”
“얘 페로몬에 눈깔 뒤집힌 새끼 때문에 안 그래도 골치 아프니까 좀 참아.”
주철은 큭큭 웃으며 산호에게 눈짓했다.
“백산호 오랜만이다?”
“…….”
“그래도 간만에 만났는데 오붓하게 술이나 한 잔 하자?”
주철의 시선이 클럽 안을 향했다.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산호는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양주철과 함께 클럽에 들어서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셈이었다. 고집스러운 얼굴의 산호를 바라보며 주철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허, 하고 웃었다.
“야, 네가 이것저것 따질 군번이야?”
“나한테 바라는 거 있어서 부른 건 너야.”
주철은 인상을 찌푸리며 산호를 마주 보았다. 하얀 얼굴과 까만 머리카락. 가늘고 낭창한 몸. 표정이 거의 서리지 않은 얼굴까지, 주철이 익히 아는 백산호였다. 그러나 무언가 조금 달라 보였다. 이 새끼… 뭔가 분위기가 바뀐 것 같은데. 상황을 가늠하듯 한동안 산호를 바라보던 주철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느물느물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뭐, 좋아. 불편한 길바닥에서 얘기하고 싶으면 그것도 나쁠 건 없지.”
주철은 클럽의 뒷골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영 싸늘한 백산호의 분위기가 조금 꺼림칙했지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깟게 서늘하게 굴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다고. 주철은 어깨 너머로 산호가 따라오는 것을 흘끗 바라보고는 소리죽여 웃었다.
정확히 제 어깨가 으스러졌던 자리에서 주철은 걸음을 멈추었다. 티나지 않게 슬쩍 고개를 올려 골목 끝 설치된 CCTV를 확인했다. 어두운 구석에 달려있는 CCTV는 이미 그곳에 카메라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 외에는 눈치채지 못할 만도 했다. 진시우에게 위협을 당한 뒤 혹시나 싶어 주철이 설치해 놓은 카메라였다.
원래는 클럽 안 룸에서 백산호에게 마약을 먹이고, 백산호가 이성을 놓으면 섹스 비디오를 찍을 생각이었다. 최음 성분이 들어간 마약은 오메가에게 치명적이었다. 제 스스로 쑤셔지지 못해 안달일 테니, 그 모습을 비디오로 찍으면 여러모로 써먹을 데가 많을 것이다. 진시우나 백산호나 전부 주철의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무기인 셈이었다.
애써 룸 안에 교묘히 설치한 카메라를 쓰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주철은 재빨리 마음을 고쳐먹었다. 페로몬을 풀던, 억지로 협박을 하던 오늘 백산호는 저에게 다리를 벌리게 될 것이다. CCTV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주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떤 변태들은 야외에서 억지로 범해지는 오메가에 더 환장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주철은 히죽이는 입꼬리를 꾸욱 누르며 산호에게로 몸을 돌려세웠다.
“잘 지냈냐?”
“…….”
“오란다고 올 줄은 몰랐는데.”
“…….”
“아니, 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직접 지 발로 기어 오니까 존나 웃겨서 말야.”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 말 섞으러 온 거 아니야. 선배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약속만 받으면 되니까, 나는.”
주철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진시우 앞에 얼씬대지 않으면 넌 뭘 해줄 건데. 우리 그 얘기 하려고 만난 거잖아.”
산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주철을 마주 보았다. 얼핏 주철의 셔츠 너머로 어깨에 칭칭 감긴 붕대가 눈에 띄었다. 산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데.”
주철이 히죽 웃으며 산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오메가한테 바라는 게 뭘 거 같냐?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
“…….”
“안 돌아가는 척하는 거겠지. 순진한 척도 정도껏 해. 이만하면 너도 알고 온 거 아니야?”
“……뭘.”
“오늘 여기 클럽에서.”
주철이 슬쩍 시선을 올려 클럽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빙글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 바퀴 돌고 가라. 뭐, 이만하면 빡센 것도 아니야 한 열 명 정도만 뒤 대주면 될 것 같은데.”
주철은 산호의 표정을 살피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 전에 나한테 한 세 번쯤 박히고.”
“세 번?”
산호가 무감하게 주철의 말을 따라 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조금은 오싹했다. 반응이… 왜 이러지? 미쳤냐고 아락바락 소리 지를 줄 알았는데. 백산호 성격에… 주철이 슬쩍 굳어가는 입꼬리를 다시금 끌어올리며 말했다.
“왜? 세 번으로는 영 부족해? 걱정하지 마. 나 아니라도 박아줄 새끼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거면 돼?”
애써 끌어올린 주철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어떤 위화감이 느껴졌다. 위화감보다는 위협에 가까운 것이.
“그거면, 선배 앞에서 사라질 수 있어?”
“…뭐라고?”
“고작 다리 몇 번 벌려주면, 선배한테 더 이상한 소문 달라붙지 않게 입 닥치고 사라질 수 있는 거냐고.”
“야, 백산호. 너….”
산호가 픽 웃었다. 도무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아… 되게 쉬운 거였네. 나는 손가락이라도 하나 자를 생각으로 왔는데. 아니면 장기라도 하나 떼던지.”
주철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제 앞에 선 산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 건방진 오메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왜 알파인 자신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느냔 말야.
“이게 미쳤나. 지금 누구한테…!”
산호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었다. 모로 기울인 시선이 주철을 빤히 응시했다.
“너한테 하잖아.”
“씨이팔, 약이라도 처먹고 왔나.”
“아, 약.”
산호가 다시 픽 웃었다.
“네가 처먹인 약? 김동현한테 담배형 페로몬제까지 풀어서 처먹인 거 말하는 거야?”
“뭐?”
주철의 입이 헤 벌어졌다. 주철이 동현에게 흘린 담배형 페로몬제는 불법으로 유통되는 것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독한 것이었다. 빠르게 해독제를 맞았다고 해도 후유증이 남을 수 있고, 기억이 온전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약이니까. 그래서 당연히 백산호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건가?
"김동현이 알선책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 들었거든. 그때부터 네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 그럼….”
“나 정말 많이 아팠는데. 그건 용서해줄게. 용서해 줄 수 있어. 근데, 있지.”
“…….”
“그날 일 때문에 학교 게시판에 글도 올라오고, 소문도 엄청 부풀었거든. 내 소문이나 욕은 괜찮은데… 선배 욕은 안돼.”
“야, 야!”
“그건 좀 용서가 안 돼서.”
주철은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아둔한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지금 백산호가… 저를 협박하고 있는 건가? 오메가 따위가 나에게? 산호의 말이 협박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주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누굴 용서해, 이 건방진 새끼가!”
“……선배가 신경 쓰면 어떡해. 그런 거 불쾌한 일이잖아.”
“무슨 헛소릴-.”
“선배가 아니라도 선배 주변에서, 잘난 선배 집안에서 그런 소문 싫다고 하면….”
그래서 나 보기 싫다고 하면. 산호의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이거 다 너 때문이야.”
주철이 기가 막힌 듯 하, 하고 헛웃음을 쳤다.
“씨발,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우락부락한 주철의 목에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
“말은 바로 해. 네가 문제야. 네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니까 그런 거라고. 애초에 어울리지도 않는 알파 물었다고 의기양양하게 굴어서…!”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그럼 설마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진시우랑 네가? 너 따위가 그런 부잣집 도련님 옆에 붙어있으면 애새끼들이 배알 꼴리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고!”
산호가 가만히 입을 다물자, 주철은 더욱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씹질하고 싶게 생긴 거 말곤 가진 것도 없는 새끼가 다 가진 놈 옆에서 헤실대는데 그 꼴이 보기 좋았겠어?”
숨을 가쁘게 몰아쉰 주철이 비열한 눈으로 산호를 훑어보았다.
“그래, 존나 꼴리는 거 하나는 인정해줄게. 어차피 진시우도 그래서 너랑 어울려준 걸 테니까.”
“…….”
“그리고, 너.”
바글바글 끓어오른 열이 사그라들지 않는지 주철은 계속 씩씩댔다.
“너 내가 알파인 거 까먹었냐? 우성 알파 옆에만 붙어있다 보니까 나 같은 열성은 별거 아닌 것 같아? 이 하찮은 오메가 새끼가-.”
“너야말로 자꾸 잊는 거 같은데.”
산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또렷했다. 주철이 하릴없이 입을 다물고 산호를 바라보았다.
“나 우성인거.”
“…그, 그게 뭐…!”
“독한 담배형 페로몬제 피우고도 정신 남아있는 이유가 뭔지 모르나 봐. 내가 작정하고 페로몬 풀면 너 같은 열성은 정신도 못 차릴 텐데. 나는 너 섹스밖에 모르는 백치로 만들어 줄 수 있어.”
주철의 눈이 크게 뜨였다. 뒷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산호의 말이 맞았다. 서로의 형질에 반응하는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에서 우성 형질의 강력한 페로몬은 압도적이었다. 알파를 자극해봐야 얻을 게 없는 오메가가 위험을 감수하고 알파를 자극하는 일이 없을 뿐, 실제로 알파를 자극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산호의 말대로 작정하면 오로지 본능만 남긴 채 백치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알파가 오메가를 길들일 때 그런 방법을 쓰지 않던가.
“미, 미친 새끼. 페로몬 쏟아서 돌게 만들면 뭐. 그래봐야 위험한 건 너야. 지금 내가 여기서 발정나면 너는-.”
산호가 새삼스럽다는 듯 웃었다.
“아직도 이해 못했네. 난 상관없어.”
“어떻게 상관이 없… 너 제대로 걷지도 못할….”
“그런 거 안 무서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난 네가 선배 근처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돼.”
불안하거든. 네가 만드는 불쾌한 소문이나 일들이, 선배가 나를 떠날 빌미를 만드는 것 같아서. 그래서 너는 사라져야 해. 산호가 입술을 물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자욱한 페로몬이 삽시간에 새어 나왔다.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은 것처럼 더러운 골목길이 오메가의 페로몬에 잠기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망가지겠지만… 그런 거 신경 안 써.”
축축하고 달콤한 향이 강하게 전신을 감싸왔다. 손으로 쥐면 잡힐 듯 강력한 향이었다. 주철의 동공이 크게 뜨이기 시작했다.
“페로몬 뒤집어쓰고 여기서 나를 강간하던지, 그건 네 마음대로 해. 대신 넌 평생 백치로 살게 될 테니까. 그러면 선배 근처에 얼씬도 못하겠지.”
“씨발, 씨이…팔… 이거 그, 그만 안 둬?”
주철의 눈동자가 홱 뒤집어졌다. 흰자위를 그대로 내보인 채 입술이 헤 벌어졌다. 그 사이로 침이 지익 흘렀다. 촛불이 바람에 훅 꺼진 것처럼 이성적 판단이 순식간에 날아간 모양이었다. 주철이 대뜸 산호에게 달려들었다. 몸이 거세게 뒤로 떠밀렸지만, 산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주철을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래, 마음껏 해봐.”
짐승처럼 크르릉 소리를 내며 주철이 산호의 셔츠를 찢어발길 듯 거칠게 움켜쥐었다. 투둑, 단추가 튕겨져 나가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산호의 눈에 새겨졌다. 낡은 우윳빛 단추가 또로로 굴러갔다. 그리고 누군가의 발 앞에서 멈추어 섰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
“…….”
“…….”
“…백산호.”
“…….”
“페로몬… 치워. 당장.”
거세게 일렁이고 있던 산호의 페로몬이 잠시 주춤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주철의 손은 우악스럽게 산호의 셔츠를 벌리고 있었지만, 뚜벅뚜벅 다가온 커다란 그림자 앞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커다란 손이 주철의 손을 거머쥐었다. 손등 마디에서 우드득, 하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어깨가 으스러지던 그날처럼. 손목이 기형적으로 비틀리자, 주철이 돼지처럼 꽥꽥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파… 아, 프… 아아악…!!!”
큰 손은 망설임 없이 주철의 비틀린 손을 탁, 놓았다. 산호의 시선이 커다란 손을 따라 천천히 위를 향했다.
“……선배.”
***
[30분 전]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시우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어깨로 떨어진 물방울이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시우는 테라스 테이블 의자에 등을 대고 앉았다.
“…….”
점점 더 서늘해지기 시작한 바람이 등 뒤로 얕게 일렁였다. 진작 어둠에 가라앉은 도시가 곳곳에 밝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시우는 테이블 위에 나란히 올려놓은 핸드폰과 빨간 담뱃갑을 바라보았다. 눈썹이 잘게 찌푸려졌다.
“…….”
몇 시간째 도돌이표처럼 같은 생각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아버지 진 회장이 했던 말을 더듬으면서였다.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산호와 거리를 두라는, 아주 명백한 경고. 얼마 전 아침 식사 자리로 불러 넌지시 건넸던 말보다 몇 배는 더 직설적이고 과격한 것이었다. 시우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시우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체로 따뜻하고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결코 인정에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한 것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냉혹하고 가차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산호를 ‘부정적인 영향’으로 판단한 게 분명했다.
시우는 골치 아픈 듯 양손으로 눈썹 뼈 부근을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어지러운 형상들이 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산호의 주변을 맴도는 악의적인 일들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불쾌했고, 화가 났지만, 그건 제가 언제까지고 막아줄 수 있었다. 산호의 곁에서 해결해주고, 보듬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
아버지는 조금 달랐다. 반려를 찾고 있다는 말까지 흘린 것을 보면, 아버지는 반드시 시우의 앞에서 산호를 치워버릴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치워버린다’는 말이 무척이나 가슴을 선득하게 만들었다. 위험했다. 제가 아닌, 산호가.
시우는 불이 켜지지 않은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 실장에게 아버지가 알아보고 있다는 혼처에 대해 확인해달라 부탁해놓은 참이었다. 정 실장이 미리 언질을 주지 않은 것을 보면, 아버지는 정 실장이 아닌 다른 이를 통해 혼처를 알아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 실장이 시우를 위해 움직이는 것까지 파악한 모양이었다. 시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집안끼리의 약속인 혼처를 찾을 정도로 아버지가 마음을 먹은 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 해야… 그 애가 더 이상 아버지 눈에 띄는 것은 피해야 했다. 그러려면 방법은…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작은 울림이었지만, 적막이 가라앉은 공기가 일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시우는 정 실장의 이름이 반짝이는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실장님.”
- 예, 이사님. 알아보라고 하셨던 일 때문에.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알아보신 건….”
- 네, 그게.
정 실장이 흠, 목을 가다듬었다. 곧 반듯하고 빠른 말씨로 말을 이어갔다.
- 회장님께서 어젯밤 급히 지시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사님께서 서울에 없다는 것을 알고 나신 후에 바로.
“…네.”
- 은밀하게 지시하신 것이라 확인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지금 재계에는 대부분 소식이 들어갔고, 빠르게 연락이 오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많이 진전된 분은 WT 차남이십니다.
WT는 JR과 견줄 만큼 거대한 기업이었다. 외국계 기업이라 한국에서의 영향력은 JR보다 약했지만, 입지가 단단하고 깊었다. 그곳의 차남이라면. 시우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 미국에서 돌아오신지 1년 남짓 되셨다고 합니다. 또… 오메가시기도 하고.
시우도 알고 있었다. 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몇 번 마주친 일이 있었다.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서로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다. 시우가 기억하기로도 그는 오메가였다. 비단 화려하게 생긴 외모 때문이 아니라도, 의도적으로 페로몬을 조금씩 흘리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귀한 대접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그래서 남을 함부로 하대하는 게 몸에 밴 인물이었다. 시우의 눈썹이 잘게 찌푸려졌다.
“오메가인 게 중요한가.”
- 회장님께서… 상대가 반드시 오메가이길 바라셨다고…
시우의 눈가가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물론 후계를 위해 임신이 가능한 오메가와 짝을 지어주길 바랐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형질에 대해 편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유달리 산호에게 날을 세운 것 외에는. 오메가라는 조건을 건 이유가 산호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가슴속에 퍼져나갔다.
“지금 상황은요.”
- 두 분이 만나실 자리가 곧 마련될 것 같습니다. 이례적으로 빨리 진행되고 있어서, 저도 조금…
정 실장은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정 실장의 말이 맞았다. 짝을 구하는 일은 무척이나 신중하게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이렇게 성급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는데. 시우의 손끝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정 실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 회장님께서, 후배분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산호를? 알고 계셨다고?”
- 사실… 네, 알고 계십니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지?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시우의 고개가 의아한 듯 살짝 기울었다. 시우가 입을 열기도 전 정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 그리고 이건 말씀드리는 게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 방금 전 후배분께서 호텔에서 나선 모양입니다.
시우는 산호를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정 실장에게 부탁한 것 역시 산호의 감시가 아니었다. 작은 행동까지 제가 알 필요는 없는데. 정 실장은 고저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양주철 실장의 움직임을 계속 파악하고 있었는데, 둘이 연락을 나눈 것 같습니다. 아마 후배분이 직접 양주철 실장을 만나러 간 듯합니다. 지금 쯤 만났을…
시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양주철을 왜…? 시우가 주철의 어깨를 으스러뜨린 후, 통하지도 않을 복수를 결심한 것쯤은 시우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 실장에게도 주철의 주변을 살펴달라 부탁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산호가 직접 주철을 찾아가는 상황은 상정하지 못했다. 시우의 잇새가 세게 맞물렸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시우가 물었다.
“지금? 어디서.”
- P클럽입니다. 양주철 실장이 찾아간 게 아니고, 후배분이 직접 찾아가신 거라 큰 문제가 있…
젠장, 사리물은 잇새로 자그마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말을 잇던 정 실장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핸드폰 너머 시우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 실장 역시 자신의 말에 어폐가 있음을 알았다. 누가 찾아갔던 백산호와 양주철이 만나는 일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보기 좋은 상황일 리 없으니까. 다급한 발소리를 끝으로 통화가 끊기자, 정 실장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정 실장 역시 불안했다. 시우와 산호,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모두.
***
P클럽 앞에 도착한 시우는 지하로 내려가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입구에 서 있던 노란 머리 남자의 시선이 껄끄러운 탓이었다. 그는 짐짓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시우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엔 호기심과 흥분이 곳곳에 배어있었다. 시우가 계단을 밟는 순간 노란 머리 남자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시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돌아섰다. 잠시간 시선을 두었지만, 그와 말을 섞을 생각은 아니었다.
“…….”
그와 말을 섞을 이유조차 없었다. 시우의 목적은 오로지 산호를 찾는 것이었으므로. 그리고 지금 시우는 산호가 어디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익숙한 페로몬이 공기에 실려 왔다. 우성 오메가의 강한 페로몬이었다. 노란 머리의 남자도 형질인인 게 분명했다. 그의 표정이 일순 무너지는 것이 똑똑히 새겨졌다. 주체인 오메가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페로몬을 푼 까닭이었다. 시우는 뒤쪽 골목길로 성급히 움직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희게 질려갔다.
“…….”
골목 안에 들어서자 마주선 산호와 주철이 눈에 들어왔다. 산호가 페로몬을 풀자, 주철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시우조차 숨이 답답할 정도로 짙은 농도의 페로몬이니 주철 같은 열성 알파는 당할 재간이 없을 터였다. 턱 근육이 얼얼할 정도로 이를 사리물은 채 시우는 둘에게 다가섰다.
오메가가 직접 알파에게 페로몬을 쏟는 이유는 뻔했다. 자신을 안아달라는 뜻. 이 정도로 강한 페로몬을 풀었다면 더더욱. 어쩌면 너무 강한 페로몬에 주철이 정신을 아예 놓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산호가 주철을 상대로, 대체 무엇 때문에.
주철이 우악스럽게 뜯어낸 산호의 셔츠에서 단추 하나가 톡 튕겨져나와 또로로 굴러왔다. 자신의 발치에서 멈춘 단추를 밟고 시우는 둘에게로 다가섰다.
“…….”
“…….”
“…….”
심장이 쿵쿵, 크게 뛰었다. 시우 역시 산호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은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크게 몰아치는 감정의 영향이 더 컸다.
“…백산호.”
“…….”
“페로몬… 치워. 당장.”
스스로 페로몬을 풀었다면 의도한 일일터다. 하지만 아무리 산호가 원하는 일이라 해도 주철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있는 모습은 견딜 수 없었다. 시우는 주철의 손을 거세게 말아 쥐었다.
고작 어깨를 으스러트리는 건 너무 상냥한 거였어. 그렇지.
손목이 기괴하게 꺾이자 주철이 꾸에엑, 비명을 질러댔다. 이미 흰자위를 드러낸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 아파… 아, 프…아아악…!!!”
더러운 것을 내버리듯 시우가 주철의 손을 뿌리쳤다. 아래로 내리깔린 산호의 시선이 천천히 시우를 향해 올라왔다. 생각을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선배.”
시우의 경직된 뺨 위로 속눈썹이 그림자졌다. 자신의 목구멍을 콱 막고 있는 것이 분노인지 절망인지 시우도 가늠할 수 없었다.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산호의 얼굴 역시 희게 질려갔다. 산호의 페로몬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시우 자신도 놀랄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입술 새를 뚫고 새어 나왔다.
“선배가 여기 왜….”
“산호야.”
모래라도 한 움큼 삼킨 것 마냥 목이 까끌거렸다. 시우는 산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산호야, 이 새끼랑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야?”
“선배… 잠깐만….”
“응? 산호야. 왜… 네가 스스로 페로몬까지 풀면서 이 새끼랑 이렇….”
“그러니까, 그게… 저는….”
“혹시… 또 내가 방해했어?”
그러니까, 지금 방해하는 게 저 버러지 같은 새끼가 아니라 나인 거야? 산호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난처한 얼굴이었다. 시우가 산속 캠핑장에서 자신을 좋아하느냐 물었을 때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산호를 바라보던 시우는 천천히 주철을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산호가 자신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는 것은 미처 보지 못한 채였다. 시우는 주철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너를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선배…!”
등 뒤에서 산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이 오히려 감정에 불을 지폈다. 감각을 잃은 시우의 입술이 무감하게 달싹였다.
“왜 자꾸 만나는 걸까. 나는 산호가 너랑 같은 공간에 서 있는 것조차 너무 싫은데.”
“…….”
“역시 그냥 네가 없어지는 게 빠를 것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성 오메가의 거센 페로몬에 잠식되었던 주철은 아직도 온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제 앞에 우뚝 선 시우를 마주 보면서도 헤 벌어진 입술 새로 침이 뚝뚝 흘렀다. 그러나 이성이 빠르게 돌아오는 것만은 확실했다. 비틀린 손의 고통이 선명해지면서 뿌얘진 시야 역시 밝아지고 있었다. 더듬더듬 머릿속에 입력한 시우의 말을 곱씹으며 주철이 고개를 저었다. 이성이 돌아오는 것 만큼이나 빠르게 분노가 차올랐다.
“씨, 바알…! 오, 해….”
“뭐가?”
“그러니까 오, 해라고. 나는 아무, 것도 안했….”
시우가 주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한 번 으스러졌던 어깨 위에 다시금 시우의 손이 오르자 주철은 본능처럼 파득 몸을 떨었다.
“아냐, 산호랑 만나고 있었잖아. 지금. 그건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잖아.”
“씨팔, 백산호가 먼저 나, 찾아온…!”
“응, 그래서 만났잖아. 얼굴 맞대고 있었잖아. 네가 산호한테….”
주철은 반사적으로 제가 달려들며 반쯤 뜯어낸 산호의 셔츠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주철의 시선을 따라 차갑게 눈을 내렸다. 시우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주철의 눈동자는 공포에 물들어 있었지만, 동시에 울분 같은 것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곧 또렷한 분노의 빛을 띠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이 개, 개 같은 새끼들이 사람 무시도 정도껏-.”
“무시가 아니라, 참고 있는 거야.”
“참아? 하, 잘난 네가 참아주고 있다 이거야?”
이제야 정신을 바로 차린 듯 주철의 초점이 하나로 모아졌다. 벌게진 얼굴로 악악대던 주철이 난데없이 자신의 재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내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시우는 주철이 재킷 안에서 묵직한 무언가를 꺼내 드는 것을 보았다. 후미진 골목길에 희미하게 새어 들어온 빛이 시퍼런 금속 재질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건 30cm는 족히 될 법한 칼이었다. 검신이 채 모두 드러나기도 전, 시우가 주철의 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선배!!!!!!”
시우가 주철의 팔을 비틀어 저지하려고 했지만, 산호가 조금 더 빨랐다. 새까만 눈동자에 커다란 칼이 맺히는 순간 산호는 다급히 주철과 시우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산호의 새까만 눈이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산호가 급작스레 둘 사이를 막아서자, 당황한 시우의 손이 일순 느슨해졌다. 시우를 보호하려는 듯 산호의 양 팔이 뻗어지는 순간 몹시 생경한 소리가 귓가를 울려왔다.
“…산….”
공기를 가른 칼이 살갗을 베는 소리였다. 주철이 휘두른 칼은 산호의 반듯한 쇄골 아래를 주욱 긁으며 움직였다. 칼끝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이 몹시도 느릿하게 생생히 뇌리에 새겨졌다. 크게 뜨이는 산호의 눈, 그리고 앞으로 풀썩 고꾸라지는 산호의 몸.
“산호야…!”
시우는 앞으로 기우는 산호의 몸을 가까스로 받아들었다. 반대로 몸을 돌려세워 산호를 품 안으로 깊이 끌어안았다. 얕지만 길게 그어진 쇄골의 상처에서 피가 콸콸 뿜어져 나왔다. 맞닿은 두 몸을 뜨거운 피가 한가득 적시기 시작했다.
“나, 나 봐. 나 봐봐, 산호야.”
시우는 다급히 산호의 상처를 더듬었다. 그러잖아도 새하얀 산호의 얼굴은 빠르게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지혈을 하기 위해 성급히 시선을 내리는 순간, 또 한 번 생경한 소리가 들려왔다. 잘 벼린 칼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꽤 끔찍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낯선 고통이 이어졌다.
“씨팔 새끼들…! 다 뒈져버려!!!!”
옆구리 아래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30cm 정도의 커다란 칼이 시우의 옆구리에 푹 꽂힌 채였다. 핏기가 가신 산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선배!!!!”
그러나 시우는 산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주철에게서 산호를 멀리 떼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산호의 상처 위를 꾸욱 누른 채 다른 한 손으로 산호의 눈가에 튄 핏물을 훔쳐냈다.
“돌아서서, 뛰어가. 골목 밖으로.”
“그게 아니… 선배, 지금 선배가….”
“산호야, 그냥 무작정 뛰어가.”
주철이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어 푹 찔러 넣었던 칼을 뽑아냈다. 퓨슛, 피가 튀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허공으로 들렸다. 시우는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산호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 걱정하지 말고. 응?
산호가 주춤대며 뒷걸음질을 치자, 시우가 몸을 돌려세웠다. 주철의 시야에 산호가 걸리지 않도록 주철의 앞으로 움직였다. 점점이 피로 얼룩진 시우의 얼굴이 주철을 바라보았다. 주철은 칼을 쥐고 있으면서도 궁지에 몰린 쥐새끼마냥 양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너, 너 진짜 죽일 수도 있어. 진짜야…!”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고함치는 주철에게 시우는 한 걸음 다가섰다. 등 뒤로 산호의 걸음이 가쁘게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한 번 끔뻑이자 눈꺼풀을 타고 흐른 피가 속눈썹에 맺히곤 똑, 떨어졌다.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산호가 자리를 피했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은 무척이나 큰 것이었다. 곧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칼을 쥔 손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망가진 다른 쪽 손만큼이나 험악한 소리를 내며 주철의 손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못 죽일 것 같은데.”
“크읍… 노, 놔아!!!!”
“죽일 거였으면, 목을 찔렀어야지.”
주철은 미친 듯이 악악대며 바둥거렸지만, 이내 견디지 못하고 칼을 툭 떨어트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시우의 뺨 위로 튀었다. 칼을 떨어트린 주철은 무릎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양손이 으깨진 채로 주저앉은 주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시우는 축 늘어진 주철의 발목 위로 제 발을 올렸다. 느릿한 움직임이었지만, 망설이는 것은 아니었다. 서서히 힘이 실리기 시작한 발짓에 발목 역시 콰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입을 빠끔 벌린 주철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였다.
“혀 뽑는 게 나을 뻔했는데. 팔다리가 아니라.”
시우는 비죽 비어져 나온 다른 쪽 발목을 흘끗 바라보았다. 고통에 정신이 반쯤 나간 주철은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다른 한쪽의 발목 역시 으스러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뿐. 양쪽 팔다리가 모두 부서진 채 늘어진 주철을 바라보며 시우는 발끝으로 칼자루를 밀어냈다. 더러운 골목길 바닥을 긁으며 칼이 멀리 미끄러졌다.
“…….”
피가 꿀렁꿀렁 쏟아지는 상처를 한 손으로 꾹 누르며 시우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사이드 버튼을 두세 번 연달아 눌렀다. 곧 내던지듯 핸드폰을 툭 떨구며 시우는 하아, 숨을 뱉어냈다.
“상처… 안 남길 기도해.”
“끄으…흐.”
“산호 몸에 흉터 남으면… 산호가 그걸 볼 때마다 네 생각할 테니까.”
“…흐으읏. 큭.”
“그럼 그때마다 내가 널 죽이고 싶어질 것 같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시우는 고개를 틀어 골목 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상황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지만,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흉터 같은 거, 중요한 건 아닌데… 그런 거 있어도 예뻐서.”
생각보다 많은 피를 흘린 모양이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는 생각을 하며 시우가 눈꺼풀을 깜빡일 때, 밝은 라이트가 골목 안을 환히 비추었다. 어느 틈에 가까이 다가온 사이렌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울리고 있었다. 선배, 선배! 울음기 섞인 목소리조차 달콤하게 들리는 것을 보니, 자신이 정신을 잃어가는 게 분명한 모양이었다.
***
삑, 삑, 삑.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규칙적인 기계음이었다. 링거액과 연결된 모니터에 일정한 곡선이 그려졌다. 시우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눈을 떴다. 약기운이 남은 탓일까, 몽롱한 기분이었다. 하얀 천장을 마주 보며 시우는 눈을 깜빡였다.
“…….”
가습기에서 새어 나온 하얀 수증기가 평화로이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호텔을 방불케 하는 넓은 방은 병원의 VIP실임에 분명했다. 무거운 몸을 세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자, 병원 로고가 빼곡히 새겨진 담요가 우그러졌다. 팔뚝에 꽂힌 커다란 링거 바늘을 빤히 바라보곤 상처 부위를 꼼꼼히 감싼 붕대 위에 손을 얹어보았다.
큰 고통은 없었다. 잘게 욱신거리는 잔통만이 있을 뿐이었다. 정갈한 병실을 바라보는 시우의 눈에 천천히 잔상이 떠올랐다. 더러운 골목길, 그 안을 비추는 밝은 라이트, 라이트 앞에 선 그림자. 그리고 애타는 목소리.
선배, 선배!
약기운에 희미했던 기억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새빨간 피로 앞자락을 모두 적신 채 울던 얼굴이 떠오르자, 느슨하게 뜨였던 시우의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산호…!”
시우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 물을 잔뜩 빨아들인 스펀지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팔뚝에 꽂힌 링거 바늘을 거칠게 뽑아냈을 때, 닫혀있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세상에, 환자분!”
차트를 품에 안은 채 들어오던 간호사가 침대에서 일어선 시우를 보며 사색이 된 얼굴로 다급히 다가왔다. 링거 바늘이 빠진 팔오금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환자분, 누워 계셔야 해요. 안 그래도 피를 많이 흘리셔서… 이러시면 안 되는….”
“지금 며칠이에요?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난….”
“일단 누우세요, 일단 누우셔야-.”
“산호 어딨어요. 저랑 같이 들어온 환자 없어요? 칼에 크게 베였는데….”
당황한 간호사 뒤로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 제 주치의의 얼굴을 마주하곤 시우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만류하는 간호사를 보고 주치의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시우를 향해 나무라는 시선을 던져왔다.
“이사님, 진정하세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저 괜찮-.”
“아뇨, 괜찮지 않아요. 지금 이것도 무리하시는 거고. 일단 누우시면 설명해드릴 테니까.”
눈썹을 와락 찌푸린 채로 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주치의의 말에 다소 잠잠해진 시우를 보고 크게 안도한 간호사가 시우를 침대 위로 이끌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시우는 주치의를 바라보았다. 피가 점점이 튄 산호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시우는 애써 크게 숨을 골랐다.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간호사가 다시 링거 바늘을 꼽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우는 주치의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장기를 다치신 건 아닙니다. 정말 천운이에요. 자칫하면 비장을 찌를….”
“아니, 그런 거 말고. 산호는.”
주치의의 입술이 꾸욱 다물렸다. 마침 링거액을 연결한 간호사가 허리를 펴자, 그는 간호사에게 가볍게 눈짓했다. 눈치 빠른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커다란 병실에 다시금 침묵이 가라앉았다. 주치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장에 계셨던 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는 시우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정확한 상황은 저희도 모릅니다. 클럽가에서 강력사건이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이사님이 응급실에 실려 오신 게 전부예요. 피해자가 둘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병원으로 오신 건 이사님 혼자셨습니다.”
“그럼….”
“자세한 건 정 실장님이 오시면 말씀해 주실 겁니다. 제가 아는 것도 여기까지라.”
파리한 시우의 표정을 바라보던 주치의는 다시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님께서 3일 내리 깨어나지 못하셨어요. 당연합니다. 피를 많이 흘리셨으니까. 말씀드렸지만, 정말 천운이었어요. 칼날이 조금만 틀어졌어도 비장을 찢었을 겁니다. 그러면 생명이 위독했을 거예요.”
“그런 건-.”
“이사님.”
주치의가 동그란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시우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시우를 보아왔던 주치의였다. 그의 얼굴에 깊은 근심이 드리워있었다.
“최근에 건강에 이상은 없으셨습니까?”
시우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시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페로몬…에 문제가 있다거나, 아니면 다른 반응 같은 것 말입니다.”
“…아뇨, 전혀.”
“오래전 이사님께서 발현하시던 날 회장님께 넌지시 드렸던 말씀입니다만.”
“…….”
“이사님께서 특정 페로몬에 반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물론 확실한 건 더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
“일종의 각인-.”
그때 주치의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핸드폰 액정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시우를 향해 시선을 올리며 말했다.
“회장님이 오신 모양입니다.”
***
옆구리를 감싼 채 힘겹게 걸음을 뗀 시우가 쏟아지는 라이트에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를 감싼 손가락 사이로 빨간 피가 꿀렁꿀렁 쏟아졌다. 갸름해진 눈이 자신을 찾아내자 곧 둥글게 휘어졌다. 시우의 입 모양이 무어라 말을 건네왔다. 괘ㄴ…찮… 시우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두꺼운 팔이 자신을 단단히 막아섰다. 애타게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선배, 선배!’
자신의 목소리에 시우의 눈꼬리가 더욱 활짝 휘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무릎이 풀썩 꺾였다. 커다란 시우의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주황색 옷을 입은 구급대원들이 황급히 달려갔다. 어지러운 인파 사이로 곱게 휘었던 시우의 눈이 사르르 감기는 것이 똑똑히 새겨졌다.
‘놔요, 놓으라고!’
왜, 무슨 이유로 자신을 막아 세우는지 알 수 없었다. 시우를 눕힌 들것이 하얀 구급차에 실리고 나서야 자신을 막았던 팔이 느슨해졌다. 그제서야 산호는 저를 막아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백산호 씨.’
똑 떨어지는 블랙 슈트 차림의 남자였다. 서늘하고 단정한 인상의 그는 멀어지는 구급차의 모습을 흘끗 바라보더니 다시금 시선을 맞추어왔다.
‘일단 치료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다.’
‘선배 보러 갈 거예요.’
‘많이 다쳤습니다. 치료부터 해요.’
‘선배가 간 병원으로 가면….’
‘아뇨, 거기는 안 됩니다. 제가 모셔다드릴-’
산호는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무감한 표정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뭐가 안 되는데. 왜 안 되는데!’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산호 씨. 잘 들어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시는 것 같으니까.’
산호는 번쩍 눈을 떴다. 식은땀이 살짝 배어 나온 듯 이부자리가 축축했다. 방금 자신이 돌돌 말고 누웠던 허름한 이불을 천천히 걷어냈다. 한눈에 좁다란 방 안이 모두 들어찼다. 꽉 막힌 작은 공간. 분명 골목길 끝 파란 대문의 자신의 집 안이었다. 산호는 습관적으로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기다리던 연락은 아직이었다. 방금 꾼 꿈을 기억에서 떨치려는 듯 산호는 작게 머리를 저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꿈을 꾸는지 알 수 없었다. 밤낮없이 까무룩 잠이 들었고, 같은 꿈을 꾸며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산호는 쇄골 아래 주욱 그어진 자신의 상처를 흘끗 바라보았다. 붕대를 갈고 소독을 해야했지만, 산호는 제 상처를 무감히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의 상처는 아무래도 좋았다.
블랙 슈트의 남자가 산호를 데려간 작은 병원에서 의사는 봉합까지는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었다. 산호의 얼굴조차 쳐다보려 하지 않았기에 블랙 슈트의 남자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주기적으로 소독하고 붕대 갈아주시면 된다고 합니다. 흉터가 남을지도 모르지만 신경 써서 관리하면 괜찮다고.’
병원에서 나온 블랙 슈트의 남자는 산호에게 소독약과 연고, 붕대를 안겨주었다. 그것들을 받아들며 산호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닌데. 선배가 어떻게 됐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게 알고 싶을 뿐인데. 하지만 블랙 슈트의 남자는 말없이 산호를 차에 태울 뿐이었다.
산호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시우가 정 실장이라고 부르던 남자였다. 언젠가 시우의 부탁으로 산호를 집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그는 정말 필요한 말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심각하다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전해준 말은 짧디짧았다.
‘이사님께서 많이 난처하십니다. 더군다나 이런 일까지 벌어졌으니 더 그러실 테고. 당분간은 백산호 씨와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산호의 집 근처는 제법 많이 바뀌어 있었다. 좁다랗고 촘촘히 엮여있던 골목길이 꽤 정돈되어 있었다. 드문드문 서 있던 가로등 개수가 늘어서일까, 골목 안이 제법 환했다. 넓어진 골목길을 따라 올라간 차가 파란 대문 앞에 멈추어 섰다. 블랙 슈트의 남자가 산호를 흘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호텔에서 가져오실 짐, 있습니까?’
‘…….’
‘호텔로 다시 돌아가시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선배가….’
그는 산호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곧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분간은 집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왜요?’
‘말씀드린 대로 이사님께서 크게 다치셨으니 분명 상황이 좋지 않을 겁니다. 회장님께서 많이 화가 나셨을 테니까요.’
찌푸린 산호의 시선을 피하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사님께서 연락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언제….’
‘그거야.’
그는 메마른 눈으로 산호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사님이 결정하시겠죠.’
모호한 말이었다. 산호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차에서 내려섰다. 시우가 달아준 잠금장치를 풀고 싸늘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쓰러지듯 누워 잠이 들었다. 그렇게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딱딱한 바닥에 깔린 이불은 퍼석했다. 그 위에 몸을 말고 누워 오랫동안 생각했다. 선배는 괜찮을까. 피를 많이 흘렸는데. 몇 번이나 자리를 박차고 나와 근처의 병원을 전부 둘러볼까 생각했었다. 단순한 교통사고 환자가 아니라 칼에 찔린 환자이니 찾기 수월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작정 찾아다녀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전국을 뒤져서라도 찾을 수만 있다면.
“…….”
하지만 블랙 슈트의 남자가 했던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존재가 시우를 난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정작 다른 것이었다. 산호는 단단한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으며 숨을 내쉬었다.
‘혹시… 또 내가 방해했어?’
천천히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스르르 감긴 눈 너머 저를 바라보던 시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철에게 페로몬을 풀었던 자신을 바라보는 시우. 다급히 달려온 듯 잔뜩 흐트러진 머리칼과 경직된 뺨. 자신이 주철을 유혹한다고 오해한 얼굴은 몹시 절망스러워 보였다. 아니, 그것이 절망이 맞을까? 나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
시우의 오해가 두려웠다. 진시우에게 너 같은 오메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주철이 떠들어댄 말이 단순한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고 애써 생각했지만, 그 말들이 산호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두려움을 건드린 것만은 분명했다. 혹시 선배가 나에게 실망해서 더는 나를 보려 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생각의 부피만큼 불안 역시 커져만 갔다.
그게…아닌… 그게 아니었는데…
숨을 몰아쉬는 산호의 속눈썹에 물기가 아롱졌다.
그때 낮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산호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반투명한 유리창 너머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른댔다. 곧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선배?”
산호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낡은 자신의 집을 찾아올 사람은 많지 않았다. 블랙 슈트의 남자가 했던 말처럼 당분간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렸으니 시우가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몇 걸음 되지 않는 문까지의 거리가 몹시도 멀게 느껴졌다.
“선배예요?”
그러나 문을 열려는 찰나 산호는 멈칫했다. 문밖의 사람은 시우가 아니었다. 아주 옅은 알파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그건 시우의 페로몬과는 전혀 다른 페로몬이었다.
“…누구, 누구세요?”
경계가 서린 목소리로 산호가 입을 열었다. 상대가 시우가 아니라는 사실에 부풀어 오른 실망감이 천천히 불안함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문고리를 쥔 손이 잘게 떨려왔다. 산호의 물음에 문밖의 그림자가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백산호 씨?”
낯설고도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곳을 찾아온 이가 시우가 아니라면, 블랙 슈트의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간 스쳤지만, 그도 아닌 것이 분명했다. 기척도 목소리도 그와는 몹시 달랐다.
“누구신데요?”
차가운 목소리가 지체없이 대답했다.
“저와 함께 가시죠. 백산호 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산호의 눈가가 와락 찌푸려졌다. 차갑고 고압적인 목소리는 불안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넘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산호의 본능이 그를 위협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산호는 여전히 문고리를 꾹 쥔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상대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게 누군데요.”
“가보면 알게 될 겁니다.”
“제가 왜 가야 하는데요. 누가 날 만나고 싶어 하던 관심없-.”
“진시우 이사님 만나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비틀린 산호의 눈가가 일순 크게 뜨였다. 순간적으로 흡, 숨을 들이마셨지만 이내 가쁘게 토해냈다. 시우의 이름에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산호는 유리문 너머를 노려보았다.
“백산호 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진시우 이사님을 만나게 해줄 겁니다.”
“그걸 어떻게 믿-.”
“백산호 씨가 믿든 믿지 않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판단은 알아서 하십시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
“지금 함께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고압적이었지만, 동시에 무미건조했다. 담담하게 사실을 이야기하는 듯한 어투. 그가 뱉은 말은 협박이나 다름없었음에도, 상황을 설명하는 것처럼 덤덤하게 느껴졌다.
“…….”
“…….”
“…….”
제법 긴 시간 동안 우뚝 선 채 문고리를 쥐었던 산호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천히 문고리를 밀었다. 빠끔 벌어진 좁은 문틈 사이로 키가 훌쩍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 역시 블랙 슈트의 남자처럼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발 하나 밀어 넣기도 어려울 만큼 좁게 열린 문 틈새로 남자의 페로몬이 조금씩 새어 들어왔다.
“…선배 볼 수 있는 거죠. 확실히.”
산호가 조용히 물었다. 물음과 동시에 그에게서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산호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천천히 입을 벌리는 문틈을 바라보며 남자가 공간을 마련해주듯 한 걸음 뒤로 몸을 물렸다. 산호가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도자기 인형처럼 아무런 표정도 띄우지 않은 얼굴이었다.
“좋아요. 가요. 선배한테.”
남자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산호 역시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
진 회장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시우의 주치의인 김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진 회장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자 진 회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진 회장은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지만, 김 교수는 그대로 조용히 자리를 물려주었다. 김 교수가 자리를 뜨며 닫은 문을 바라보던 시우는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진 회장은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침대에 앉은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핏자국이 남아있는 팔뚝의 링거 바늘에 잠시 머물렀다. 간호사가 다시 링거 바늘을 연결하며 피를 닦아주었지만, 환자복에 튄 핏자국까지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다는 듯 피가 튄 소매를 바라보던 진 회장이 천천히 자신의 아들에게로 시선을 맞추었다.
“시우야.”
“네, 아버지.”
“네가 아주 어릴 적에 개에 물려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었다. 혹시 기억하는지 모르겠구나.”
시우는 아버지를 잠시간 응시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내심 불안했지만, 시우는 무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어머니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해주셨던 것만 기억나요.”
“그래, 그럴 게다. 아주 어릴 때니까. 네 어머니가 크게 놀라 그 개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었다. 그때 어린 네가 어머니를 말리며 어찌나 울던지.”
“제가요?”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면서 네가 다친 것도 아니니 용서해달라고 떼를 쓰더구나.”
“…….”
“그때 네 어머니가 너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
“착한 우리 아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 네가 다쳤다면 설령 실수라도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네가 무사하니 이번엔 용서해줄게. 그렇게 말이다. 어린 네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
“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네가 무사했기 때문이야. 지금처럼 3일 내리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건.”
“넌 늘 착하고 명석했다. 나는 늘 네 판단을 존중했어. 철이 없는 어린 시절부터 넌 줄곧 바른 판단을 내리곤 했으니까.”
진 회장은 자신의 아들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따뜻함이나 다정함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물론, 아직도 너를 믿는다. 어린 네 말처럼 누구나 실수는 하게 마련이고, 너 역시 실수할 수 있으니. 너도 간혹 감정이나 욕망에 치우치는 순간이 있을게다.”
“아뇨.”
시우가 아버지를 향해 눈을 올렸다.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산호 이야기를 하시는 거라면, 아니에요. 실수 같은 거 아니에요.”
“실수가 아니다.”
시우의 말을 냉정하게 반복하며 진 회장이 시선을 내렸다. 가느다랗게 뜨인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시우가 또렷이 말했다.
“실수 아닙니다. 그 골목길에 찾아간 것도 제가 선택한 거고, 저는 후회 안 해요.”
진 회장이 가볍게 자신의 턱을 손끝으로 훑어내렸다.
“칼에 찔리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한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닌-.”
턱을 쓰다듬던 손을 아래로 살며시 내리며 진 회장이 중얼거렸다. 숫제 스스로에게 되뇌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더욱 문제구나.”
“아버지.”
“작정하고 알파를 찾아가 페로몬까지 푼 오메가 때문에, 그 오메가 하나 감싸겠다고 칼에 찔린 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아니-.”
“그 골목에 CCTV가 있었다.”
“…….”
“그 CCTV를 경찰만 본 것은 아니지.”
시우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CCTV가 있었다면 아버지는 그날의 상황을 모두 확인했을 게 분명했다. 자신이 산호를 감싸느라 찔린 것부터, 주철의 팔다리를 직접 부서트린 것까지. 진 회장이 그날의 상황을 어떻게 판단했을지는 뻔했다.
진 회장은 자신의 말에 변명하지 못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 교수 말로는 당분간 무리하지 않아야 한다더구나. 알파라고 해서 칼까지 튕겨내는 건 아니니까.”
진 회장은 슈트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흘끗 바라보았다. 액정에 떠오른 메시지를 눈으로 빠르게 읽어 내려간 그는 다시 아들을 향해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 오메가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게다.”
“아버지!”
시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미한 잔통만 이어졌던 상처가 욱신 쑤셔왔다. 진 회장은 자신이 상처를 감싸는 시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스스로 그 애를 떨치지 못하니 내가 그 애를 치울 수밖에 없겠구나.”
“산호한테 무슨…!”
“오메가 하나 떨치는 게 뭐 어려운 일이겠니. 클럽에 팔아버리던, 그보다 더 더러운 사창가에 팔아버리던. 이미 손 써둔 일이다. 더는 말하지 말아라.”
시우의 손이 꾸욱 주먹 쥐어졌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찰 것처럼 가슴 근육이 크게 부풀었다. 단단히 맞물린 턱 근육이 잘게 떨려왔지만, 가까스로 숨을 삼켜냈다. 울컥 쏟아지는 감정처럼 페로몬이 한순간 피어올랐다. 아버지의 앞에서 감정적으로 구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앞에서 이를 사리문 아들을 바라보며 진 회장의 미간이 잘게 좁혀졌다. 그 오메가를 만난 이후, 어딘가 변해버린 아들을 향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지어 보인 적 없었던, 차갑고도 서늘한 표정을 띤 채 한동안 아들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릴 적 그 개는 결국 네 어머니가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다. 나중에 네가 찾더라도 속상해하지 않도록 좋은 곳으로 보내주었었지. 왜 그랬는지 알겠니.”
“…….”
“그건 네가 다치지 않았기 때문이야. 너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냈다면 그리 곱게 살려두진 않았을 게야.”
***
산호는 커다란 세단의 뒷좌석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알파임이 분명한 남자를 따라 집을 나선 지 벌써 30분 즈음이 흘렀다. 남자는 다소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게 차를 몰았다. 산호가 초조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도 아는 듯했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수차례 핸드폰을 확인하며 시간을 보내는 듯한 눈치였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수십 분의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화려한 클럽가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쪽으로.”
차에서 내린 산호는 거리를 바라보던 눈을 깜빡였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시우가 칼에 찔린 골목 앞, P클럽의 화려한 간판이 번쩍였다. 네온사인의 빛얼룩이 산호의 하얀 얼굴에 고스란히 묻었다. 산호는 가만히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대답 대신 걸음을 뗐다. 말없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뚜벅뚜벅 밟아내려갔다.
“…….”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산호는 얕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곳까지 따라온 이상 남자를 따라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저를 만나겠다는 사람은 이 난잡한 클럽 안에 있는 걸까. 대체 누구기에. 들이마신 숨을 살며시 내뱉으며 산호 역시 걸음을 옮겼다. 시커먼 계단이 마치 커다란 괴물의 쩍 벌린 아가리처럼 느껴졌다.
남자가 산호를 데리고 간 곳은 약에 취한 인파가 몰린 지하 라운지가 아니었다. 라운지를 가로질러 상층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남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또다시 핸드폰을 꺼내 무엇인가 확인한 그가 산호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향해 그가 눈짓했다.
“…….”
산호는 잠자코 그가 눈짓으로 종용하는 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남자는 가장 상층부의 버튼을 눌렀다. 소리 없이 상층으로 올라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옅은 미색의 대리석이 깔린 복도가 나타났다.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문은 화려한 금색이었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남자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문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절 만나려는 사람이 저기에 있어요? 아니면 선배가….”
“들어가세요.”
남자가 차갑게 산호의 말을 잘랐다. 다시금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곤 그가 덧붙여 말했다.
“회장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회장님… 산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묵직한 황금색 문을 밀어 열며, 자신을 만나려고 했던 이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
시우는 아버지가 나선 문가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는 말이 더 옳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울리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몸은 생각보다 더 빨리 반응했다. 시우는 이미 한 번 뽑아냈던 링거 바늘을 다시 한번 거칠게 뽑아냈다. 퓻, 소리와 함께 굵은 링거 바늘이 살을 가르며 뽑혀 나왔다. 다급히 걸음을 떼는 순간 병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이사님, 회장님께서-.”
병실 안으로 들어오던 정 실장이 자리를 뜨려는 시우를 마주하곤 살그머니 인상을 찌푸렸다.
‘시우, 병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게 하게. 자네도 더는 날 실망시키지 마.’
시우와 독대를 마치고 나선 진 회장이 문밖에 서 있던 정 실장에게 했던 말이었다. 정 실장은 반사적으로 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자신을 막아선 정 실장을 바라보는 시우의 눈이 빠르게 비틀렸다.
“비켜요.”
“이사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시우는 정 실장을 밀어제치려는 듯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정 실장은 그대로 문에 등을 바짝 기댔다. 시우의 손이 꾸욱 주먹 쥐어졌다. 느리게 감았던 눈을 힘주어 뜨자, 따뜻한 밤색 눈동자에 서린 이채가 번득였다.
“산호 어딨어요.”
정 실장은 여전히 문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시선을 피했다. 아주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미약한 부정이었지만, 시우는 그 몸짓의 의미를 알아챘다. 자신은 대답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산호 어디 있는지 말해요, 당장. 아니면 비키기라도 하던지.”
정 실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했던 시선을 다시 시우에게로 맞추며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말 몇 마디를 뱉어냈다.
“후배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무사히 치료도 했고, 상처도 깊지 않았습니다. 크게 다친 건 아니라서 기본적인….”
“크게 다친 게 아니라고? 그렇게 피가 많이 났는데.”
대뜸 자신의 목소리가 커지자 시우는 인내하듯 간신히 이를 사리물었다. 정 실장은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 부위가 길기는 하지만, 얕게 베인 터라 봉합까지는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들었습니다. 흉터는 남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집으로 무사히 모셔다드렸으니, 이사님께서도 우선 진정을….”
“집? 무슨 집.”
“…K동 골목 끝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렸습니다. 당분간 집에 머물라고 말씀드렸으니, 제 말을 듣는다면 집 안에 계실 겁니다.”
꾸욱 쥐었던 시우의 손이 사르르 풀어졌다. 파란 대문의 좁다란 산호의 집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시선을 틀자 손바닥에 반달 모양의 손톱자국이 진하게 남은 것이 눈에 띄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집 안에만 계신다면 괜찮으실 겁니다.”
“괜찮….”
정 실장의 말은 기계에 입력한 말과 다름없었다. 방금 전 아버지가 한 말과는 사뭇 다른. 아버지는 이미 손을 써두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 실장의 말처럼 괜찮을 리 만무했다.
“아뇨. 아버지가 가만히 계시지 않았을 텐데.”
“…….”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산호 지금 어디 있어요.”
정 실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역시 자신에게 허락된 몇 마디 말을 되풀이했다.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집까지 모셔다드렸고, 그 이후의 일은 저 역시 알 수 없습니다.”
“정 실장님.”
“이사님. 저도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습니다. 회장님께서 저에게 지시하신 것은 그저-.”
“그래도 윤곽은 알고 있잖아.”
정 실장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그는 오래도록 JR일가를 보아왔다. 아주 어린 시절의 시우를 그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시우가 감정에 동요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우가 모두에게 따뜻하고 다정할 수 있는 건, 그러한 그의 단단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런 진시우가 백산호를 만나고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자주 감정에 물들었고, 자주 감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시우의 얼굴에서 보기 어려운 감정을 자주 마주쳤다. 불안이나 분노, 절망과 두려움 같은 것들이었다. 자신에게 건넬 말을 찾지 못하는 정 실장에게 시우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가까이 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정 실장님.”
“…….”
“말해주세요.”
“…….”
“지금 저한테 이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이채가 서린 눈은 짐승의 것처럼 거칠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상처 입은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정 실장의 표정이 연민처럼 풀어졌다.
“……오메가 클럽과 연락하시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저도 모르지만….”
정 실장의 말에 꽉 깨물린 시우의 턱 근육이 잘게 떨렸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대답이었다. 아버지는 정말 당신의 말대로 오메가 클럽에 산호를 묶어두려는 것이다. 감각이 없는 입술이 달싹였다.
“오메가 클럽이라도 본인 동의 없이 소속시키는 건 불가능할 텐데.”
“이사님.”
“산호가 제 발로 갔을 리가….”
“…….”
“아니면….”
시우는 잠시 침묵했다. 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무척 침착한 목소리였다.
“연락하신 클럽이 어디예요.”
“…….”
“P클럽?”
“…….”
“대답 안 해도 괜찮아요. 그냥 눈짓만 해요. 알아들을 테니까.”
정 실장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시우를 향했다.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않았지만, 그 시선은 명확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우가 천천히 정 실장의 어깨를 잡았다.
“…비켜주세요. 지금 가야돼요.”
“이사님,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시우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알아요.”
“지금은 상황을 조금 더 파악하는 것이-.”
“아니, 그럴 시간 없어요.”
만류하려는 정 실장의 어깨를 꾸욱 쥐며 시우가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무작정 달려가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나도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란 걸 못 하겠어.”
가만히 정 실장을 밀어낸 시우는 병실 문고리를 쥐었다. 문고리를 비틀어 열곤 한 걸음 내딛은 시우는 시선을 틀어 다시 정 실장을 바라보았다. 차마 자신을 잡지 못하는 정 실장을 바라보며 시우가 말했다.
“실장님, 미안해요. 전부 다.”
“…아닙니다.”
“나 도와주기로 약속했었죠.”
“…….”
“항공편 알아봐 주세요. 지금 바로.”
“항공편…이라면.”
낮은 목소리로 시우가 말을 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아니,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여기만 아니면 괜찮으니까.”
“그 말씀은.”
“그래도 너무 위험한 곳은 안 돼요. 처음엔 내가 함께 가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정 실장은 시우의 저의를 알아차렸다. 진시우는 백산호를 숨길 생각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백산호에게 손을 뻗지 못하도록.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정 실장이 천천히 대답했다.
“회장님 눈을 피해 거처를 마련하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겁니다.”
“알아요.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요.”
답지 않게 감정이 떠올랐던 정 실장의 얼굴은 곧 본래의 무표정을 띄웠다. 그가 단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시우는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