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동으로 향하는 차 안은 무지근한 침묵에 쌓여있었다. 산호는 운전석에 앉은 규철이 의도적으로 조금씩 흩트리는 페로몬에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깨에 걸쳐진 시우의 카디건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카디건에 은은하게 배어있는 시우의 향기가 규철의 페로몬에 덧입혀지는 것이 끔찍하리만큼 싫었다.
규철이 운전하는 차는 산호의 집, 파란 대문 앞에 멈추어 섰다. 골목길이 정리된 탓에 차가 골목 위까지 올라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호는 미련 없이 차에서 내리곤 차 문을 탁 닫았다. 다시금 시우의 카디건을 가슴 가까이 여몄다. 은은한 흙냄새가 포근하게 산호를 감쌌다. 하잘것없고 미약하기 짝이 없는 향기였지만, 지금은 이것이라도 갈급했다. 산호가 초라한 집 마당으로 한 걸음을 뗐을 때였다.
“백산호 씨.”
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난 후에 구둣발 소리가 났다. 산호는 등 뒤의 인기척을 무시한 채 그대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규철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서고 싶었지만, 도통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진시우 이사님이 하신 말, 설마 믿으십니까?”
의문형의 말은 몹시도 불쾌했다. ‘설마’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산호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서 있었다.
“진시우 이사님의 약혼처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칼에 찔린 사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남이 미뤄졌을 뿐이죠.”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데요?”
“믿지 말라는 얘깁니다. 이사님 말씀.”
“당신이 뭘 안다고…!”
“나라면.”
규철의 페로몬이 조금 더 새어 나왔다. 인상을 와락 찌푸린 산호가 카디건을 더욱 바짝 여미며 규철을 홱 돌아보았다. 사나운 얼굴로 규철을 노려보았지만, 규철은 무표정하게 산호를 마주 볼 뿐이었다.
“싸구려처럼 눈 가리고 얼굴도 모르는 상대 몸이나 더듬는 오메가에게 마음을 주진 않을 테니까. 아니,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테지.”
“뭐…?”
“진시우 이사님이 다정한 성품인 건 백산호 씨가 더 잘 알겠죠. 누구한테나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잖습니까.”
“…….”
“그런 사람이 당신에게 품은 마음이 동정일지, 연민일지 어떻게 확신합니까. 동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게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해.”
뻥 뚫린 암흑 속으로 몸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산호는 아득, 소리가 날 만큼 이를 깨물었다. 손안에 쥔 카디건의 부드러운 촉감조차 날카로운 가시로 변해버린 듯 감각이 곤두섰다.
“백산호 씨에게 개인적으로 유감은 없습니다만.”
“…….”
“보고 있자니 조금 한심해서 말입니다.”
“…닥쳐. 한마디만 더 하면-.”
“진시우 이사님 약혼처가 얼마나 치열하게 정해졌는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 착각하게 눈웃음 짓고 다니는 우성 알파한테 홀린 게 당신뿐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시우를 노리는데. 고작 당신을 선택할 리가 없지.”
“지금 뭐라고-.”
“진시우처럼 다 가진 사람은 절대 너 같은 사람 선택하지 않아.”
“닥치라고 했…!”
“차라리 네가 진시우를 가둔다면 또 모르겠지만.”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일순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여태껏 감정이란 없는 로봇처럼 행동하던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무척이나 섬뜩한 것이었다. 가장 섬뜩한 건, 일그러진 그의 표정이 즐거운 웃음이라는 사실이었다.
***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 선 시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칼에 찔린 상처가 문득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상처 부위를 짚자 축축한 것이 손바닥을 적셨다. 환자복 위로 불그스름한 색이 비쳤다. 붕대 위로 핏물이 스미고 있었다. 애써 봉합한 상처 부위가 벌어지기라도 한 걸까. 묵직한 고통에 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 걸음이 조금 위태로웠다. 문을 밀어 열자, 병실 안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시우를 돌아보았다. 굳은 얼굴의 정 실장과 간호사였다. 정 실장에게 애타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호소하던 간호사의 눈이 시우를 바라보더니 크게 뜨였다. 무척 당황한 얼굴의 그녀는 붉게 물든 시우의 상처를 바라보더니 더욱 난처하다는 듯 빠끔 입을 벌렸다.
“어머, 환자분! 세상에, 이걸 어떡해….”
간호사는 황급히 시우를 침대로 이끌었다. 시우가 침대에 걸터앉자, 그녀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상처 부위를 부산스레 확인했다.
“말도 없이 외출을 하시면 어떡해요. 병원 지시를 따라주셔야 하는데.”
타박이라기보다는 걱정이 묻은 목소리였다. 간호사는 핏물이 배어 나온 상처를 꼼꼼히 살피더니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크게 벌어진 건 아닌 것 같지만, 제대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네요. 거칠게 움직여서 피가 났나 봐요. 고통이 컸을 텐데 괜찮으셨어요?”
시우는 간호사를 바라보며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아프지 않… 그러나 간호사가 상처 부위를 건드리자 콧잔등이 잘게 찌푸려졌다. 간호사는 시우의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 정 실장을 향해 고개를 틀어 입을 열었다.
“환자분 절대로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우습게 볼 상처가 아닙니다.”
정 실장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가 고개를 마주 끄덕이며 일어서려는 찰나 시우가 간호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올곧은 시선이 간호사의 얼굴을 향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간호사가 조금 멋쩍은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김 교수님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예의 바른 목소리에 간호사는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예의 사무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 어차피 환부 확인해야 하니까요. 김 교수님 지금 교수실에 계실 시간이라 바로 불러올 수 있을 거예요.”
차트를 품에 안은 간호사는 정 실장을 향해 가벼운 눈인사를 던지곤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서자, 병실 안에 적막이 가라앉았다. 시우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흠결 없는 VIP 병동을 무감히 바라보던 시우는 말없이 침대맡에 선 정 실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 옆에 정 실장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딱딱하게 굳었던 정 실장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는 조금 느슨한 말씨로 대답했다.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겠습니다, 이사님.”
시우는 가만히 입술을 다물고 정 실장을 응시했다. 상처 부위의 고통이 점차 면피를 키우고 있었음에도, 이상하게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건, 이제 해야 할 일이 하나로 좁혀졌기 때문일 터였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하면 될 것이다.
“실장님.”
“…네.”
“생각보다 시간이 더 부족할지도 몰라요.”
정 실장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는 시우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사님 약혼…에 관해서 확인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건은 내일 말씀드릴 테니 오늘은 쉬시는….”
“아뇨, 괜찮아요.”
“그렇지만-.”
그때 병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우와 정 실장의 시선이 동시에 문가를 향했다. 살며시 열린 문 사이로 주치의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들어섰다.
“이사님.”
침대에 앉은 시우를 바라보며 주치의는 간호사가 그랬던 것처럼 피가 배어 나온 시우의 상처 부위를 바라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주치의가 가까이 다가오자 정 실장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조용히 뒷걸음질을 쳤다. 주치의의 어깨 너머로, 시우가 정 실장에게 말을 건넸다.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조금 더 쉬운 방법.”
자리를 물려주려던 정 실장이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의아하다는 저를 바라보는 정 실장을 향해 시우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다물린 시우의 입술이 달싹이지 않는 것을 보아 지금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모양이라고 정 실장은 판단한 듯했다. 그는 곧 병실을 빠져나갔다.
동그란 의자를 끌어당겨 침대맡에 앉은 주치의를 돌아보며 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김 교수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잘못하면 생명이 위독할 뻔했던 사고였습니다. 생명보다 중한 일이기라도 하셨습니까?”
시우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네, 더 중요한 일이요.”
주치의가 입을 꾹 다물자, 시우가 천천히 이어 말했다.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함이 서린 목소리였다.
“제가 특정 페로몬에 반응할 수 있다고 하셨던 말, 기억하시죠. 일종의 각인이라고 하셨던.”
“……물론입니다.”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
[한 달 후]
산호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산호에게 물려준 이 작은 집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거울이었다. 거울의 낡은 귀퉁이가 반질반질했다. 공책만 한 크기의 작은 거울이었지만, 좁다란 집 안을 모두 비추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산호는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초라한 집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이 무척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
인턴십 때문에 회사에 등록하러 갔던 날, 시우가 명품관에서 사주었던 네이비색 슬랙스와 품이 넉넉한 디자인의 캐쥬얼 셔츠였다. 응, 예뻐. 시우의 눈가에 배시시 퍼졌던 웃음을 산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JR 내의 불화설 때문에 지난 한 주 몹시도 시끄러웠었는데요, 불화설의 주인공인 진태석 회장의 외아들 J군의 약혼 소식이 또 한 번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등 뒤로 작은 빛이 일렁였다. 손바닥만 한 TV에서 쏟아지는 빛의 살점들이었다.
[JR 오너 일가가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있었던 탓에 이번 소식은 더욱 놀라웠죠. 차기 회장직으로 점쳐지는 J군은 진태석 회장 다음으로 많은 주를 보유한 주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일에 싸여있기는 했지만, 부자간의 반목이 단 한 번도 세간으로 알려진 적이 없던지라 진태석 회장과 J군의 불화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는데요, 사실상 소문을 넘어서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 들려온 약혼 소식이라니, 여러 가지 추측을 낳을 만 하죠.]
[네, 맞아요. JR과의 결별이 이번 약혼 때문이라는 추측 같은 것들 말이에요. 혹시 세기의 사랑 같은 것일까요?]
[글쎄요,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저희 연예가 뉴스에서는 복잡한 정재계의 뉴스 대신 화려한 약혼식의 현장을 보여드리려는 것이니까요.]
[네, 좋습니다. 새로 탄생한 커플은 환상적인 알파, 오메가 커플 아니겠어요? 보기만 해도 훈훈해지는…]
패널들의 목소리가 작은 집 안 곳곳에 들어찼다. 어제부터 뉴스에 오르내렸던 이름들이 다시금 들려왔다. TV에서 송출되는 되는 화면이 얼핏 거울에 비쳐 산호의 망막에 맺혔다.
화면 속 예식장은 층고가 높은 성당만큼이나 커다란 공간이었다. 온통 하얀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성당보다는 신전에 가깝다고 할 만했다. 하얀색 백합이 화려하게 늘어서 있고, 한 층 올라선 단상에는 꽃과 아이싱으로 꾸며진 케이크가 놓여있었다. 옅은 라일락 컬러의 슈트를 입은 남자가 단상 앞으로 걸어오는 화면이 이어졌다.
[J군의 약혼 사실이 공개되면서 상대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는데, 네, 지금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WT 일가의 차남이라는 소식입니다. 이날 약혼식에서 화사한 파스텔 톤 슈트를 입고…]
산호는 천천히 몸을 틀었다. 저벅저벅 TV 앞으로 다가간 산호는 전원 버튼을 꾸욱 눌렀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 끝에 힘이 실려 마디가 곧잘 새하얘졌다. 얄팍한 전자음과 함께 시끄럽게 울려대던 VJ의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산호의 고개가 바로 들렸다. 까만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들어차지 않은 채였다. 울멍하게 차올랐던 감정은 지난 한 달간 모두 소진되어 버린 듯이.
“…….”
산호는 작디작은 단칸의 방을 가로질러 걸었다. 쇄골 위에 길게 가로진 상처를 잠시 훑었지만, 이내 손을 내렸다. 신발을 향해 발을 뻗던 산호는 잠시 멈칫했다. 여전히 눈처럼 새하얀 운동화를 산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벼운 캔버스 재질의 심플한 디자인. 생채기라도 날까 두려워 조심스레 걷곤 했었다. 오직 이 운동화를 선물한 사람 때문에.
‘이제 학교도, 회사도 같이 다닐 생각 하니까.’
‘…….’
‘기분 좋아.’
산호는 운동화를 천천히 꿰어 신었다. 선물한 이가 나타날 리 없는 학교로 향할 셈이었다.
***
단과대 복도에 들어선 순간부터 진득한 시선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저를 향한 시선은 이제 대수롭지 않았다. 온갖 악의와 조롱이 담긴 시선을 받아왔던 터였다. 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무례한 사람들을 지나 산호가 강의실 앞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복잡해 보이긴 했어.”
“안 그래도 걱정되더라.”
“친구새끼 약혼 소식을 뉴스로 봐야겠냐.”
“야, 지금 걔가 얼마나 정신없겠….”
산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와 두 명의 남자가 강의실을 향해 다가오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산호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조승현, 선배의 친구. 건방지게도 선배의 손을 함부로 쥐었던. 승현은 양옆에 선 제 친구들에게 이어 말했다.
“나도 오랜만에 통화한 거야. 진시우 목소리 들은 게 얼마 만인지.”
“약혼식 날이라 정신없었을 텐데.”
“몰라, 식 올리기 전이었나 봐. 그냥 학교에 별 일 없냐고 물어보던데. 조금이라도 이상한 거 있으면 알려달라고 그러는 게 좀 이상하긴 했어.”
“뭐야, 약혼 앞둔 놈이 학교 일은 왜 신경 써?”
“그러게. 그때는 나도 약혼 소식은 몰랐으니까… 그냥 그 회장… 아니, 아버지랑 사이 안 좋은 거 괜찮냐, 그것만 물어봤지.”
오른쪽에 서 있던 남자가 살짝 어깨를 숙이며 승현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딴에는 작은 목소리를 내려는 모양이었지만, 산호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아로새겨졌다.
“그 불화설 확실히 오메가 때문인 건 맞는 것 같던데.”
승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친구를 바라보았다. 친구는 변명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삼촌 JR 다니잖아. JR이 워낙 스캔들 싫어하고 직원들도 오너 일가 좋아해서 입 잘 다무는 편인데, 이번엔 좀 달랐나 봐. 오메가 어쩌고 하더니 대뜸 WT 차남이랑 약혼한 거 봐. 그 사람 오메가라며. 영상 봤어? 진짜 연예인 발라먹게 생겼더라. 영상 공개는 안됐지만 시우랑 같이 서 있으면 눈부실 것 같긴 하더라고.”
그러더니 그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오메가라길래 난 또 백산혼가 했더니, 역시. 걔 주제에 시우 옆에 있는 게 가당키나 하냐. 걔야말로 완전히 끈 떨어졌-.”
점점 더 목소리를 죽이던 남자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그는 무척이나 당황한 듯 갑작스레 제 티셔츠 앞을 거칠게 거머쥔 하얀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백산호?”
양 주먹으로 남자의 멱살을 쥐어올린 산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작고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타오르는 감정이 여실히 담긴 목소리였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너 뭐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
“지금 무슨 말 한 거냐고. 네가 선배 얘기 했잖아.”
“이게 지금 선배한테 무슨….”
“끈 같은 거 아니야.”
선배랑 나는 그런 거 아니야. 선배는 분명히… 산호는 입술을 세게 짓쳐 물었다. 지난 한 달간, 산호는 시우가 다시 만나면 해주겠다는 말에 대해 생각하고 보듬었다. 그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산호의 집 안 손때 묻은 거울의 귀퉁이처럼 반질반질해지고 낡아갔다. 많이 더듬을수록 더 빠르게 바래졌다. 그 위로 수많은 불안과 의심이 덧칠되었다.
‘싸구려처럼 눈 가리고 얼굴도 모르는 상대 몸이나 더듬는 오메가에게 마음을 주진 않을 테니까. 아니,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테지.’
‘진시우처럼 다 가진 사람은 절대 너 같은 사람 선택하지 않아.’
끈 같은 거 아니야. 선배랑 나는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러나 확신할 수 있던가? 선배가 한 달 동안 연락조차 없는 이유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있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둘을 바라보던 승현이 다급히 제 친구를 말리기 시작했다.
“야, 야. 학교에서 왜 그래. 그만해.”
그러나 불시에 멱살이 쥐어올려진 남자는 이미 승현의 중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산호를 향해 날 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끈 아니면, 뭔데. 시우 단물이나 빨아먹으려고 했던 거잖아, 너도. 아니면 네가 무슨 세기의 사랑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어?”
“…….”
“그래, 시우가 잠깐 너한테 넋 놨던 건 사실이라고 쳐. 근데 걔가 바보냐? 이제서야 정신 차린 거야, 걔도. 정상으로 돌아온 거라고. 너 따위가 무슨….”
언성이 높아지자 승현이 친구의 어깨를 쥐었다.
“그만 하라니까.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그냥 무시하면 될걸.”
“이게 먼저 멱살부터 대뜸 쥐니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던 남자는 이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거칠게 산호의 주먹을 떨쳐내며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얘한테 성질내봐야 뭐하냐. 어차피 이제 엮일 일도 없을 텐데. 시우도 다시 얘 만날 리 없고.”
남자는 불쾌함을 떨쳐버리려는 듯 어깨를 툭툭 털었다. 산호를 한 번 쏘아본 그가 몸을 돌려세우려는 찰나, 산호가 고개를 번뜩 치켜들었다.
“…선배가 왜 날 다시 만날 리가 없어?”
약점을 사로잡힌 여린 짐승은 도리어 몸을 부풀리고 공격성을 보이게 마련이다. 산호의 눈이 약점을 물린 여린 짐승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승현이 다시 얼굴이 벌게지려는 친구를 저지하며 산호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단호한 목소리로 승현이 말했다.
“야, 너. 적당히 해. 너랑 시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모르긴 뭘 몰라. 이미 다 소문 퍼진 마당에. 친구가 비아냥 섞인 목소리로 중얼댔다. 승현은 조금 더 깊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뭐가 어떻게 됐던지 간에, 네가 시우 옆에 있는 거 좋아보이진 않았어. 안 그래도 걔 지금 엄청 바쁘고 복잡한데… 아 됐고, 약혼까지 한 애 계속 이런 얘기로 들먹이는 거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만해.”
짧게 한숨을 내쉰 승현이 다수의 혐오와 약간의 동정을 담은 눈으로 산호를 바라보았다.
“그냥 너도 너 원래 살던 대로 지내. 괜히 시우 옆에….”
“너도.”
“…뭐?”
“너도 선배 좋아해?”
산호의 말에 승현의 눈이 황당하다는 빛을 띠었다. 잠시 떠올랐던 동정의 기색은 빠르게 사라졌다.
“네가 함부로 선배 만질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승현의 눈가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만지다니, 뭘. 설마 잔반 뒤집어썼을 때 말리느라 손 잡았던 거 얘기하는 건가? 당황과 함께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승현의 얼굴에 가득 차올랐다.
“선배 바쁘다면서… 통화는 왜 하는데? 왜 선배 목소리를 너랑 나눠야 하는데?”
“무슨 개소리 하는 거야? 친구니까 당연히….”
“아니, 친구도 안돼.”
“…뭐?”
선배 옆에 다른 사람 있는 거 못 봐. 선배 옆에 있는 사람, 내가 다 죽일 거야.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음순이 없는 입술의 달싹임에 불과했다. 그러나 승현은 대충의 의미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산호의 입술을 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듯했다.
“백산호,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바로 들린 산호의 얼굴을 승현이 마주 보았다. 승현은 허, 하며 코웃음을 쳤다.
“내가 지금 뭔가 엄청난 헛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시우 옆에 있는 사람들 다 죽이겠다고 한 거 맞냐?”
산호는 아무 말 없이 승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승현의 입에서 연달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씨발, 이거 완전 또라이새끼 아냐. 무섭다?”
“…….”
“야, 진시우가 네 거야? 무슨-.”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랬어. 나한테 준다고 했어. 가지라고 했다고. 승현은 산호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짙은 혐오감뿐 아니라 미미한 공포감까지 떠오른 얼굴로 승현은 산호를 바라보았다.
“이 새끼… 완전히 미쳤어.”
표정이 어리지 않았던 산호의 얼굴이 살짝 기울었다.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응, 미쳤어. 완전히 미친 거 맞아. 안 미치고 버틸 수 있었겠어? 샐쭉 입술이 호를 그리는 것을 보며 승현은 더더욱 기겁했다.
“진시우는 어쩌다가 이런 미친개한테 물린 거야…?”
“야, 승현아. 말 섞지 마. 가자.”
친구가 달래듯 승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동그랗게 벌어진 입을 빠끔거리며 산호를 바라보던 승현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친구를 따라 산호의 어깨를 스치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는 내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심각하게 쟤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저러다가 사람도 가둬놓겠다, 쟤는.”
“신경 꺼. 지가 뭘 할 수 있다고. 이제 상관도 없는 애라니까.”
산호는 한동안 입술을 꾹 깨문 채 서 있었다. 복도의 웅성거림이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상념들이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JR 오너 일가의 불화설, J군의 약혼, 약혼 상대라는 WT의 차남, 그리고 오메가. 모든 단어들이 하나의 이름을 관통했다. 진시우.
“…….”
산호는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승현의 무리가 그랬던 것처럼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반쯤 들어찬 강의실 안의 학생들이 일제히 산호를 돌아보았다. 산호와 승현의 말다툼을 이들 모두 들었을 것이다. 산호는 그대로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
맨 뒷자리의 창가. 시우가 늘 앉던 자리의 옆자리에 산호는 천천히 가방을 올려놓았다.
“와, 쟤 진짜 뻔뻔하다.”
주인을 모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악의를 숨기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뿐 아니라, 이 강의실의 대부분이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산호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전공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선배 또 책 안 가져왔을까 봐, 가져왔는데.”
산호는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며 눈꼬리를 휘던 시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바로 옆에 있는 듯 너무나도 생생했다. 산호는 가만히 책상 가운데로 전공 책을 끌어당겼다. 책을 펴자 귀퉁이에 필담이 적힌 페이지가 단번에 드러났다. 수도 없이 열어보고 매만진 탓이었다. 반질한 종이 위 필담을 산호는 다시 한번 손으로 쓸어내렸다.
[오늘 우리 회식이야]
[새로운 팀원 합류하면 원래 회식 하는 거야]
[뭐 먹고 싶어?]
또박또박한 글씨체가 방긋 웃는 시우의 얼굴과 퍽 닮아있었다. 산호는 통증이 일 만큼 세게 이를 사리물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대체 언제까지. 그때 엎어놓은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산호는 천천히 핸드폰을 뒤집어 액정을 바라보았다.
[web발신]
JR 인턴십 13기 정기 교육 안내
JR 인턴십 13기의 운용을 맞이하여 정기 교육 일정을 다시금 안내드립니다.
일시 : 00월 00일 금일, PM 7:00
장소 : JR 호텔 컨벤션홀 3F
대상 : JR 인턴십 13기 전원
메시지에 적힌 날짜를 가만히 바라보던 산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삐뚤어진 빛이 산호의 동공에 맺혀있었다. 꾸욱 다물렸던 입술이 달싹이며 한 마디를 뱉었다.
***
JR 호텔의 로비는 언제나 그랬듯 고급스럽게 정돈되어 있었다. 로비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대체로 앳되어 보이는 이들이 다소 어색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것을 보니, 그들 역시 인턴십을 위해 찾아온 것이라 짐작할 만했다. 산호는 늘 올랐던 엘리베이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계기판의 숫자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산호는 자신의 하얀 운동화 앞코를 바라보았다.
“…….”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향이 스며들었다. 공기 중을 부유하는 아주 옅은 향기였지만, 산호는 이 향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따뜻한 흙냄새. 고개를 번뜩 들어 올리자, 한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
옅은 하늘색 슈트를 입은 남자였다. 로비에 웅성이던 이들과는 달리 고급스러운 슈트 차림이 맞춤복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그는 산호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손목시계를 흘끗 바라보고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계기판을 향해 고개를 드는 시선까지 위화감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저기.”
조용히 입을 떼는 산호의 눈가가 사정없이 비틀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불쾌감과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울컥 쏟아진 탓이었다. 시우의 이름에 일순 얼굴을 붉혔던 윤주나, 시우의 손목을 쥐었던 승현을 향한 감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 산호는 그 감정에 질투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의 여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응?”
노기를 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이 퍼져나간 건 순식간이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던 남자가 페로몬을 감지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조막만 한 얼굴에 유려하게 위치한 남자의 얼굴이 명백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페로몬을 감지한 것을 보면 그 역시 오메가인 게 분명했다.
“이건 뭐야?”
남자의 입가에 떠올라있던 가벼운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산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선배 페로몬인데.”
“선배?”
“왜 너한테 선배 페로몬이 묻어있어?”
산호는 그가 누구인지 확신했다. TV가 뱉어낸 영상 속, 화려한 약혼식장의 단상 위를 자신만만하게 걸어오던 라일락색 슈트의 남자. 시우의 약혼자였다.
“선배라니, 무슨….”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에 위협을 느낀 남자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찌푸린 시선이 산호를 진득하게 훑었다. 곧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아, 진시우…?”
남자의 입술이 시우의 이름을 뱉었다. 자신도 함부로 뱉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비틀린 눈으로 산호가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함부로… 함부로 선배 이름 말하지 마.”
멀어진 만큼 다시 가까워진 산호를 바라보던 남자의 눈빛이 조금 다른 빛을 띄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인가 떠오른 듯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혹시, 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남자가 이내 뻔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산호의 페로몬에 위협을 느낀 탓에 그의 페로몬도 살며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야, 일단 페로몬 좀 치워. 호텔 로비 한가운데에서 알파들 자극할 일 있어?”
그의 어깨가 으쓱였다. 넓은 로비를 스윽 훑은 남자의 시선이 다시금 산호를 향했다. 산호는 그를 차갑게 응시했다. 지금 중요한 건 흩뿌려지는 제 페로몬에 영향을 받을 알파들이 아니었다.
“그런 거 알 바 아냐. 지금 중요한 건… 너야.”
네가 함부로 선배 이름을 부르는 게. 그리고 네가 선배 페로몬을 묻히고 있는 게. 산호의 페로몬이 사납게 일렁이며 발광했다. 숨통을 막는 진한 단향에 남자가 다시금 와락 인상을 구겼다. 우성 오메가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한 그의 페로몬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선배 옆에서 떨어져.”
그러나 그는 애써 산호의 말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소리지?”
답답한 듯 타이를 조금 아래로 끌어내리면서도 남자는 여유 있는 모습을 흉내 냈다.
“보아하니 가진 것 하나 없는 거지 같은 게, 비싼 옷만 겨우 걸친 것 같은데.”
남자의 시선이 산호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시우가 예쁘다고 말해주었던 캐쥬얼 셔츠와 슬랙스를 훑곤 하얀 운동화를 내리깔아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무례했다.
“어디서 구르던 거지가 대뜸 나타나서 선배 옆에서 떨어지라고 하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
“너 지금 나보고 내 약혼자 옆에서 떨어지라는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산호는 아득 이를 깨물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내 약혼자’라는 말이 무수한 칼날처럼 쪼개어져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산호의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검은 눈동자는 무너지듯 흔들렸다. 남자는 산호의 표정을 바라보며 확신이 선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아. 내 약혼자한테 거머리 같은 오메가 하나 붙어있다는 얘기는 들었어.”
“…….”
“너구나, 그 거머리.”
남자가 씨익 웃어 보였다. 오메가인 그 역시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미소였다. 타인을 짓밟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듯한, 잔인하고 교활한 미소였다.
“음… 누구일까 궁금하긴 했는데. 이렇게 실제로 보니까… 내 생각보다 더 하찮네.”
“…….”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더 거머리 같고. 앞뒤 분간 못하고 달라붙는 걸 보니 머리도 나빠 보이고 말야.”
그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눈앞의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이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그는 산호를 향해 조롱의 시선을 던졌다.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너 같은 애들 흔해. 피 빨아먹으려고 달라붙는 거머리들.”
“…….”
“뭐, 그래도 진시우는 조금 의외지. 재미로 오메가 끼고 놀 애는 아니니까. 안 그래도 약혼 전에 오메가 하나 붙어있다길래 누구일지 조금 신경 쓰이긴 했는데… 막상 보니 오히려 안심된다?”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가늘게 눈을 뜨고 산호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시우랑 잤어?”
산호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미약한 반응이었지만, 남자가 원한 반응이었다. 남자는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신이 난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래, 보아하니 너한테는 손도 안 댄 모양이네. 페로몬도 풋내나는 게, 안 봐도 알 만해.”
“…….”
“생각해봐. 어떤 알파가 오메가한테 손도 안대고 지켜만 보겠어.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
“…….”
“그건 말이지, 그냥 너한테 손대기 싫었던 거야. 왜 손대기 싫었겠어?”
“…….”
“더러우니까.”
남자가 큭큭 웃으며 이리저리 살펴보듯 산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시우 러트야.”
산호의 눈썹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산호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남자가 샐쭉 눈꼬리를 찢었다.
“그래서 지금 호텔에 있는 건데, 나. 어제 밤새도록 시크릿 룸에 같이 있었거든. 결혼 전에 임신하는 건 싫지만, 그래도 섹스는 좋으니까.”
시우와 자신이 함께 머물렀던 JR 호텔의 최상층의 룸을 시크릿 룸이라고 불렀다는 걸 산호는 기억해냈다. JR의 오너 일가만 사용하는 룸이라는 설명과 함께. 자신과 함께 머물렀던 곳에서, 자신이 누웠던 침대에서, 지금 눈앞의 이 남자와 선배가… 산호는 턱을 꼿꼿이 들어 올렸다.
“…다 떠들었어?”
산호의 차가운 목소리에 빙글거리며 떠올라 있던 남자의 웃음이 일순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눈썹을 치켜떴다.
“다 떠들었을 리가. 원하면 말해줄 수도 있는데. 어제 우리가 어떻게….”
“아니, 다 안 끝났어도 이제 상관없어.”
산호는 그를 향해 성큼 걸음을 뗐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산호의 보폭이 조금 더 컸다. 코앞에 선 산호의 시선과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엇갈렸다. 둘의 키는 엇비슷했다. 산호는 천천히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차분하고 담담한 산호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 너 죽일 거야. 지금.”
남자의 동공이 크게 뜨이기도 전, 뻗어진 산호의 손이 먼저 남자의 목덜미에 닿았다. 기도 위를 정확히 짚어낸 손끝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황급히 산호의 팔을 양손으로 부여잡았지만, 소용없었다.
“으, 흣.”
“마음 같아선 선배랑 마주 본 눈알도 파고.”
“큭, 놔, 놔!”
“선배 이름 부른 혀도 뽑고.”
“놓으란…큭.”
“선배 앞에서 젖었을 구멍도 다 찢어버리고 싶은데.”
페로몬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넓은 로비 안의 인파가 모두 느낄 만큼 강력한 페로몬이었다. 남자의 손톱이 산호의 팔을 애처롭게 긁었다. 가느다란 생채기를 내며 하얀 피부에 붉은 줄이 그어졌다. 그러나 산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남자의 목을 거머쥔 힘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다른 감각이 일깨운 초인적인 것에 가까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페로몬 농도가 치솟-.”
로비를 가로질러 다급하게 다가오던 컨시어지가 남자의 목을 쥔 산호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어피스에 손을 대고 재빨리 몇 마디 말을 뱉어냈다. 그는 금세 산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고객님, 진정하세요. 우선 이것부터 놓고-.”
산호를 저지하기 위해 어깨에 손을 올렸던 컨시어지는, 산호의 얼굴을 확인한 후 흡,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분명 한동안 시크릿 룸에 머물렀던 산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산호를 시크릿 룸에 머물게 하면서, 시우가 자신에게 했던 부탁까지 생생히 기억했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컨시어지가 산호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놓으세요. 일이 더 복잡해질 겁니다.”
산호의 시선은 오로지 남자를 향해 있었다. 목덜미를 쥔 손이 풀어지지 않자, 남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다수의 구둣발 소리가 어지러이 울려 퍼졌다. 너덧의 남자들이 그들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호텔의 가드였다.
“백산호 씨.”
컨시어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일순 산호의 손끝에 힘이 풀어졌다. 호텔의 가드가 산호의 어깨를 와락 쥐어 남자와의 거리를 물리적으로 떨어트려 놓았다. 숨통이 트인 남자가 콜록콜록 숨을 뱉어냈다. 컨시어지는 남자가 아닌 산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범죄자를 다루듯 거칠게 산호를 떼어놓은 가드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백산호 씨 놔주세요. 제가 잘 이야기 하겠습니다.”
산호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쥐었던 가드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컨시어지는 산호를 향해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지금은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뇨, 상관없어요.”
산호는 차가운 눈으로 연신 거칠게 숨을 뱉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백산호 씨. 이사님 곤란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산호가 고개를 살짝 틀어 컨시어지를 바라보았다.
“아시겠지만… 이분은 이사님 약혼자 되시는 분입니다. 이 이상은-.”
산호가 입을 떼려는 찰나, 부드러운 전자음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캑캑 숨을 뱉는 거친 소음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그 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가 일종의 신호탄이라도 된 듯, 모두의 시선이 엘리베이터 앞으로 쏟아졌다.
“뭐 하는… 이거 놔…!”
그리고 순식간에 컨시어지가 산호를 구석으로 이끌었다. 스르릉,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 컨시어지는 민첩하게 비상구 계단과 이어지는 철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산호를 떠밀었다. 불시에 밀어내는 힘에 저항하지 못한 산호가 비상계단 안쪽으로 들어섰다. 미처 닫지 못한 좁은 문틈 사이로 엘리베이터 문이 벌어지는 것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제발, 가만히 있어요. 이사님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컨시어지가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동시에 은은한 흙냄새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심장은 몸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아플 정도로 쿵쿵 울려대는 심장의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입을 벌린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명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 슈트 차림의 남자 역시 산호가 아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한 사람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
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는 키가 몹시 컸다. 조막만 한 얼굴에 들어찬 이목구비가 흠잡을 데 없이 예뻤다. 따뜻한 밤색의 눈동자, 도톰한 입술이 그리는 얕은 호. 색이 옅은 머리카락이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져 눈썹을 가리고 있었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따뜻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선…배.”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앞으로 움직이는 산호를 컨시어지가 황급히 막아섰다. 좁다랗게 열린 문틈을 막은 컨시어지를 밀어내며 산호가 울먹였다.
“비켜요. 선배한테 가야….”
“백산호 씨. 제 말 들어요. 지금 나서면 분명-.”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시우는 무척 당황한 듯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따뜻한 미소가 올라있던 얼굴이 굳어지고 눈썹이 잘게 찌푸려졌다. 검은 슈트의 남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늘색 슈트의 남자에게로 시선을 움직였다. 연신 고통스러운 숨을 내뱉으며 자신에게 기대오는 약혼자를 시우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페로몬… …무슨… …있…?”
온전히 닫힌 것은 아니었지만, 두꺼운 철문은 너머의 소음을 차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잘게 쪼개어진 조각처럼 드문드문 들려왔다. 조각난 목소리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였다.
“시우 씨… 나 좀…….”
좁은 문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호는 잠시 머뭇한 시우가 자신에게 기대온 약혼자의 어깨를 부축하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탓에 시우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단단한 가슴 위로 하늘색 슈트의 남자가 안기듯 손을 올리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시우에게 몸을 달싹 붙인 그는 시우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는 듯 보였다. 조금밖에 보이지 않았던 시우의 입매가 딱딱히 굳어갔다.
“비켜… 비키란 말야….”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산호가 속삭였다. 컨시어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좁다란 문틈까지 차단하려는 듯 문고리에 손을 올렸지만, 이내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면, 시우의 주목을 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탓이었다. 산호는 입술을 거세게 깨물었다.
“…괜찮… ……병원으로… 일단… …내가….”
드문드문 들리는 목소리는 여느 때의 시우와 다름없이 다정했다. 조금 감정이 거세어 진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다정했다. 왜? 자신의 약혼자에게 건네는 말이라서? 아니면, 자신의 약혼자가 방금 거칠게 목이 졸렸기 때문에? 햇빛을 머금은 듯한 흙냄새가 조금 더 농도 짙게 공기 중에 흩어졌다. 알파의 페로몬은 자신의 짝을 드디어 찾았다는 듯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러트를 함께 보냈다는 이를 만났기 때문인 걸까. 그래서 이 페로몬이 이토록 애타게 느껴지는 걸까.
“……억제제… 괜찮으니까… …가요….”
시우는 저에게 기대있는 남자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와 함께 걸음을 떼면서 살짝 고개를 틀어 검은 슈트의 남자에게 무슨 말을 건네는 것이 보였다. 걸음이 멀어지자, 그들의 뒤를 잇는 가드들의 뒷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하.”
세게 깨물었던 잇새가 탁 풀어지면서 울음기 섞인 숨이 산호의 입술 새로 쏟아졌다. 어느 틈에 세게 짓물은 입술이 찢어진 모양인지 찝찌름한 피 맛이 났다. 시우와 하늘색 슈트의 남자, 그리고 함께 서 있었던 검은 슈트의 남자가 로비를 가로질러 한참 멀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컨시어지는 문을 가로막았던 제 몸을 이완시켰다.
“백산호 씨. 요즘 뉴스를 확인하셨다면 알고 계실 겁니다.”
“…….”
“진시우 이사님의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회장님과의 관계도 그렇고 WT와의 약혼도 그렇고.”
컨시어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얕은 숨을 뱉은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백산호 씨가 시크릿 룸에 머무실 때, 이사님께서 제게… 최대한 백산호 씨와 JR 일가와 마주치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하셨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백산호 씨를 위한 부탁이셨을 테죠.”
“…….”
“백산호 씨를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백산호 씨도 이사님을 곤란하게 하지는 않으셨….”
“나를… 생각했다고?”
산호는 초점이 맺히지 않은 눈을 들어 컨시어지를 바라보았다.
“…왜?”
“백산호… 씨?”
“왜 나를 생각해요?”
“…….”
“그럼 왜 그동안 찾아오지 않은 건데…? 꼭 찾아올 테니까 나한테 보내달라고 했잖아.”
그건 누군가를 향한 물음이 아니었다. 도리어 산호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았다.
“꾹 참고 보내줬잖아. 그런데, 다 거짓말… 지금 다른 오메가….”
“백산호 씨.”
산호의 새까만 동공이 하나의 점으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흐렸던 초점이 또렷이 맺히자 산호는 고개를 단단히 들어 올렸다.
“…이제 안 기다려. 안 보내줘. 절대로.”
산호가 대뜸 걸음을 뗐다. 몸의 긴장을 풀고 있던 컨시어지를 단박에 밀어제치고 좁은 문틈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직 로비에 잔존하는 포근한 흙냄새를 크게 들이마셨다. 폐부로 쏟아지는 향이 사정없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다급한 산호의 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내 달음질로 변모한다. 커다란 로비 끝 투명한 유리 회전문이 눈에 들어왔다.
“선배.”
그리고 그 너머 애타게 그리던 사람을 찾아냈다.
“…선, 배.”
검은 슈트의 남자를 향해 서 있던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회전문으로 들어섰다. 삼각형의 유리관 안에 갇힌 채 산호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프레임처럼 한 순간, 한 순간이 새겨졌다. 마침내 호텔 밖 거리를 밟았다.
“…….”
5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선 뒷모습을 향해 산호가 입을 열었다. 뒤돌아선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였다. 멀리서 자동차 배기음이 들려왔다.
“선배.”
“…….”
“…….”
“…….”
“선배가 찾아오지 않아서, 내가 찾아왔어요.”
“…….”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봐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등을 보이고 선 그의 엄지가,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햇빛에 반사된 반지의 작은 다이아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
[3일 전]
시우는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았다. 액정에 반짝 불이 오르는 순간을 애타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우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손끝이 초조한 듯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일분일초가 심장을 옥죄어왔다.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한 달이라는 시간 내내, 어두컴컴한 단칸의 방에 앉아서. 지금 이 순간도 역시. 작은 방에 오도카니 앉아있을, 도자기 인형 같은 그 애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커다란 돌덩이가 묵직하게 심장을 누르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하며 액정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며 시우는 입술을 물었다.
- 이사님. 확인했습니다. 3일 뒤입니다.
참았던 숨이 단번에 터져 나왔다. 안도의 숨이었다. 시우가 물었다.
“산호는요?”
- 댁에 계십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아직까지는 잘 버티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시우는 혼잣말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산호에게는 더욱 그랬으리라. 반드시 찾아간다는 다짐 외에, 산호에게 어떠한 설명도 해주지 못했다. 자신이 찾아올 것을 산호가 끝까지 믿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앞으로 3일. 단, 3일만.
- 괜찮으실 겁니다.
시우는 산호와 함께 한국을 떠날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거처를 마련하는 일은 제법 번거로웠다. 클럽에서 대화를 나눈 이후, 아버지 진 회장은 시우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했다. 거처를 마련하는 것 자체야 어렵지 않았지만, 이 감시의 시선을 벗어나는 것이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그들이 머물 곳을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아무 의미 없을 테니까.
아버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산호를 안전히 숨기기만 한다면, 그다음에는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시우는 결국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가 산호를 인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비록 그 시간이 너무 길어 평생을 쓴다고 해도 좋았다.
예상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끝이 보이는 듯했다. 산호를 찾아갈 3일 뒤를 떠올렸다. 무릎을 꿇고 함께 떠나주기를 간청하면, 그 애는 뭐라고 할까. 대뜸 어디로 떠나는 것이냐고 물을까, 아니면 물음 없이 고개를 끄덕일까. 시우는 주머니 속 딱딱한 금속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두 개의 반지였다. 지난 한 달간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닌 것이었다. 다시 산호를 찾아갔을 때 전해줄 순간을 그리면서.
“내일 약혼식은.”
핸드폰 너머 정 실장이 빠르게 대답했다.
- 변동된 건 없습니다. 회장님께서는 강행하실 생각이십니다.
“…산호가 약혼식 소식을 완전히 모르게 할 순 없겠죠.”
- 매스컴을 완전히 통제할 순 없습니다. 이미 주요 매체에는 소식이 들어간 상태입니다. 물론 회장님 지시로.
시우는 두 개의 반지를 천천히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니까 산호 주변 계속 확인해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정 실장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곧 머뭇거리듯 그는 입을 열었다.
- 러트는… 어떻게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정 실장의 질문에 시우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아버지는 제 러트에 맞추어 약혼식 날짜를 정하신 거겠죠, 아마도. 염두에 두신 게 있을 테니까.”
- ……
“괜찮아요, 차라리 잘됐어요. 러트가 지난 후에 산호랑 떠날 수 있게 됐으니까. 같이 있을 때 러트가 왔다면 산호는 분명히 불안해했을 거예요.”
- 저는… 백산호 씨 이야기를 한 게 아닙니다. 이사님께서…
시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그마하게 퍼지는 웃음에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알아요, 제 걱정해주신 거. 저는 괜찮아요.”
- ……
“산호가 괜찮으면, 저는 다 괜찮아요.”
***
매끄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시우는 뒷좌석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손에 들린 패드를 가만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액정에 생방송으로 이어지는 뉴스 화면이 가득 찼다. 층고가 무척이나 높은 예식장은 눈이 부실 만큼 화려했다. 하얀 대리석은 흠결 없이 매끄러웠고, 마찬가지로 새하얀 백합이 화려하게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한 층 올라선 단상에는 커다란 케이크가 놓여있었다. 연신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며 번쩍이는 빛의 얼룩을 만들어 냈다.
소리를 꺼 놓은 탓에,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기 시작했다. 곧 예식장 끝의 문이 열리고 옅은 라일락 컬러의 슈트를 입은 남자가 단상 앞으로 걸어왔다. WT 그룹의 차남, 현재일이었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카메라를 향해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몹시도 화려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카메라가 건너편 예식장 문을 몇 번 비추는 것을 보니, 또 다른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굳게 닫힌 문은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현재일의 얼굴에 떠 있던 미소가 점차 시들해졌다. 현재일이 들어왔던 문이 살며시 열리고, 관계자로 보이는 누군가가 조용히 들어섰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현재일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재일의 얼굴이 잠시 굳는 듯했으나,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다시 정신없이 터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제 모습을 담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단상 아래를 내려와 자연스레 들어왔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다음 순간 화면이 바뀌었다. 예식장의 모습이 아닌 아나운서가 앉아있는 스튜디오의 모습이었다. 아나운서의 아래 자막이 떠올랐다.
[JR, WT 약혼식 비공개 결정]
아나운서의 입술이 끊임없이 달싹였지만, 시우는 소리가 울리지 않는 패드를 망설임 없이 점멸시켰다. 자신이 참석하지 않은, 자신의 약혼식 보도는 여기까지만 확인해도 충분했다.
“…….”
이 상황을 아버지가 상정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자신이 끝끝내 약혼식에 불응하리라는 것을. 갑작스런 언론 비공개 결정 역시 어느 정도 준비된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시우는 패드를 내려놓고 차창 너머 도시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높다랗게 솟은 건물의 뿌리에 자신이 탄 차가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이사님.”
호화로운 건물 입구에서 차를 세운 정 실장이 룸미러 너머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 역시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네, 실장님.”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시우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그리고는 차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섰다. JR의 본사, 아버지의 집무실이 있는 상층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건물 앞에 주차된 까만색 세단 앞에서 시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막 건물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부적처럼 매만졌던 두 개의 반지가 시우의 손안에서 미끄러졌다. 시우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몸 안쪽 깊숙한 곳에서 열기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알파의 타고난 체질 덕분에 빠르게 아물었던 상처 부위도 다시금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러트가 시작된 것이다.
시우는 차 문을 열었다.
“…….”
운전석에 미동 없이 앉아있던 정 실장이 고개를 틀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회장님과의 대화는….”
정 실장이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시우는 카시트에 등을 기대며 애써 웃어 보였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
“내일 하루만 지나면.”
내일이 지나고, 그다음의 내일이 오면 시우는 산호를 찾아갈 수 있었다. 내일 하루만. 시우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지만, 몸의 변화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억제제는 이미 복용했다. 그러나 억제제를 먹는다고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억제해줄 뿐. 몸 안에서 거세게 발광하기 시작한 알파의 페로몬이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 흘렀다.
“괜찮으십니까?”
발긋하게 달아오른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시우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어디로… 댁으로 모셔야 할까요?”
눈이 따끔거렸다. 시우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암전하는 시야에 선명한 잔상이 맺혔다. 러트 덕분에 가장 본능적인 욕구가 들끓는 지금, 더더욱 떨칠 수 없는 잔상이었다. 시우는 주먹 쥐었던 손을 펼쳐보았다. 커다란 손 위에 나란히 앉은 반지 두 개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
그중 조금 더 큰 사이즈의 반지를 들어올렸다. 사뭇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이사님?”
시우는 잠시 망설였다. 같이 끼우고 싶었는데. 네가 끼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조금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우는 제 손가락에 직접 반지를 대어보았다. 반지는 네 번째 손가락에 꼭 맞아 들었다. 시우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이렇게라도 남몰래 그 애를 욕망하는 자신에게 얄팍한 혐오가 느껴졌다.
“JR 호텔로 가주세요.”
그러나 본능의 욕구는 강렬했다. 조금이라도 그 애의 향이 묻은 곳이 필요했다.
***
시우는 커다란 호텔 룸의 응접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산호와 함께 이곳에 묵었던 며칠의 시간이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오도카니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이 억제제가 조금씩 약효를 보이기 시작했다. 거세게 일렁이던 페로몬이 일정하게 가라앉았다. 심장이 세게 뛰는 것 외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
시우는 가만히 몸을 뒤로 눕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나른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했다. 혹시 공기 중에 그 애의 작은 흔적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하는 허망한 생각을 하면서였다. 손을 쫙 펼쳐 천장을 향해 들어올렸다. 네 번째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반지는 밋밋했다. 심플한 표면 위에 쌀알만큼 작은 다이아 하나가 콕 박혀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우는 이것이 마음에 들었다.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 오히려 그 애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산호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상상하며 시우는 빙그레 웃었다. 저와 같은 반지를 낀 손이 제 손을 잡는 상상을 했다. 첫사랑에 막 눈을 뜬 사춘기 소년처럼 철없는 심장이 다시 아프도록 쾅쾅 뛰었다. 달래면 토라지고, 토라지다가도 안겨 오는 어린아이처럼 온통 제멋대로였다. 이렇게 선명한 감정을 여태 외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시우는 가만히 일어서 침실로 향했다. 커다란 침대 맞은편에 걸려있는 추상화를 잠시 바라보곤, 그 옆에 자리한 작은 공간으로 들어섰다. 제법 넓은 드레스 룸이 이어졌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
산호에게 사주었던 옷을 이곳에 주르륵 걸어놓았었다. 아침이면 사락거리는 옷감 소리가 이곳에서 들려왔던 순간이 생생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까지도. 이제는 텅 비어있는 공간에 시우는 자신의 슈트 한 벌을 걸어두었다. 짙은 푸른색 슈트 한 벌이었다. 얼핏 검은색으로 보일 만큼 짙은 푸른색. 빛이 반사되면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옷감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시우는 픽 웃었다. 언젠가 무심결에 신경 써서 옷을 고르던 제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옷 고르면서 고민하는 거, 데이트할 때나 하는 거 아닌가. 그때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이었다. 이틀 뒤, 무사히 러트를 보내고 나면 산호를 만나러 갈 수 있겠지. 그때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우는 자신의 반지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매만졌다. 짧은 숨을 토해내곤 반지를 재킷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단조로운 벨 소리가 들려왔다.
“…….”
시우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누구지? 이곳에 찾아올 사람은 없을 텐데. 자연스레 떠올린 사람은 정 실장이었다. 하지만 그라면 러트를 보내고 있는 자신을 무턱대고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우가 드레스 룸을 빠져나오는 사이, 벨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안에 있는 거 알아요.”
조금 낯선 목소리였다. 시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굳게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단단한 문 너머 서 있는 이의 기척이 여실히 느껴졌다. 러트를 보내고 있는 알파의 예민한 감각 때문이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오메가인 게 분명했다.
“약혼식 날 바람맞히는 걸로도 모자라서 그냥 돌려보내지는 않겠죠.”
약간의 비아냥을 담은 목소리가 울렸다. 시우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천천히 문을 열어주었다.
“…….”
WT의 차남 현재일은 실시간 뉴스에서 보았던 것처럼 옅은 라일락색 슈트를 입은 채였다. 곱게 매만진 머리카락이 단정히 넘겨져 있었다. 화려한 이목구비에 언뜻 불쾌한 감정이 배어 나왔다.
“…무슨 용건으로.”
재일이 룸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시우가 문 앞을 몸으로 가로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들어오지 말라는, 명백한 거절의 의사였다. 재일은 입술을 비죽이며 시우를 마주 보았다.
“호텔 복도에 서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리는 나눌 얘기가 없는 걸로 아는데.”
딱딱한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재일이 픽 웃었다.
“너무 무뚝뚝하네, 진시우 씨. 그렇게 다정하다고들 그러던데. 거짓말이었어요?”
“의사전달은 분명히 했어요. 약혼하는 일 없을 거라고. 억지로 식을 감행한다고 해도 참석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까지.”
재일이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듣기는 했어요. 그래도 정말 진태석 회장 얼굴에 먹칠을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자존심이 상한 건 별개로 하더라도.”
“자존심 상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시우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돌아가요.”
재일은 시우 어깨 너머 룸 안을 흘끗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 러트?”
“…….”
“억제제 먹고 혼자 러트 보내는 거예요? 수절한 열녀처럼?”
“…….”
“우성이라 그런가. 억제제 먹었는데도 이 정도 페로몬이 샐 정도면… 꽤 힘들 것 같은데.”
시우의 눈썹이 잘게 일그러졌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차가웠다.
“좀 도와줄까? 어차피 약혼한 사이잖아.”
“가요, 이만.”
재일이 다시금 픽 웃었다.
“왜 이렇게 까탈스럽게 구는지 모르겠단 말야.”
고개를 치켜들고 시우를 빤히 바라본 그는, 시우가 절대로 저를 그의 공간 안으로 들일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얄팍한 입술을 핥으며 재일이 말했다.
“진시우 씨. 이거 비즈니스잖아. 그냥 결혼하면 서로가 편할 텐데, 무슨 고집인지.”
그는 시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 만나고 싶어서 그래요? 만나요. 상관없어. 그냥 우린 공식 석상에서 같이 사진이나 찍어주면 되잖아. 뭐, 가끔 사이클 맞아서 섹스하는 건 좋겠네. 서로 즐길 거 즐기면서 살면 되잖아.”
“아니, 안돼.”
시우의 딱딱한 대답에 재일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 잦아들었다. 시우는 이마 아래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각자 사는 모습이 다른 거겠지. 그쪽 가치관을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난 그렇게 안 해요. 그렇게 못해.”
재일의 시선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시우의 왼쪽 손가락에 닿았다. 정확히는 반지가 끼워진 네 번째 손가락에. 재일의 입에서 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약혼자 앞에서 당당히 반지 끼고 있는 건 무슨 예의에요?”
시우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재일이 시우의 굳은 표정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을 이었다.
“어떤 거머리 같은 오메가한테 지독하게 물렸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물린 게 아니라 쌍방이었나 봐?”
시우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꽉 문 잇새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조심해.”
“반응 보니까 확실한 것 같은데요.”
재일이 큭 웃었다.
“아, 정말 자존심 상하는데. 배도 엄청 아프고. 바람피우는 배우자 보는 기분이 이런 건가.”
키들키들 웃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시우는 가만히 손을 내렸다. 더는 그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불쾌가 아닌, 화가 일었다. 감히 누굴, 뭐라고 부르는 거야. 시우가 문을 닫으려는 듯 문고리를 쥐자, 재일이 다급히 시우의 손목을 쥐었다.
“내가 원래 자존심이 조금 세거든요. 그래서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진시우 그쪽 조금 탐나서. 뭐 잘생기고 잘난 알파 싫어할 오메가는 없지 않겠어? 딴 데 마음 팔려있다고 하니까 더 뺏고 싶잖아.”
시우는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더 거칠게 밀쳐내고 싶었지만, 자칫 힘을 조절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감정이 동요되자 페로몬이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원래는 진태석 회장이랑 사이 틀어진 것 때문에 약혼도 파기하려는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 보니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닌가 본데. 그 오메가 때문이죠? 진태석 회장이랑 틀어진 것까지 전부.”
시우의 손이 꾸욱 주먹 쥐어지는 것을 보며 재일의 입가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그 오메가 조금 궁금해지는데. 어떤 걸레가 내 약혼자-“
“말조심하라고 했지.”
거칠게 으르렁거리듯 시우가 자신의 말을 자르자, 재일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그러나 곧 재일은 깔깔 웃어 보였다.
“반응이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요.”
시우는 다시금 단호히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옥죄었던 긴장을 잠시간 흩트렸다. 페로몬이 순식간에 재일에게로 쏟아졌다. 갑작스럽게 알파의 페로몬이 저를 덮치자 재일이 흡, 숨을 들이마시며 인상을 찌푸렸다. 러트를 보내고 있는 알파의 페로몬에 오래 노출되면 그 역시 영향을 받을 터다. 그 전에 이 남자를 눈앞에서 치우고 싶을 뿐이었다.
재일이 잠시 넋을 놓은 사이, 시우는 거칠게 문을 쾅 닫았다. 물리적으로 공간이 차단되자, 재일이 헛숨을 터트리는 것이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나 내일 다시 올 거예요. 지금 나 제대로 자존심 상했거든. 오늘 못한 얘기 더 해보자고.”
시우는 입술을 깨물며 신경질적으로 문의 잠금을 걸었다. 현재일이 산호에게 관심을 쏟는 상황은 골치 아픈 일을 만들 게 분명했다. 산호의 주변에 더는 위험인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전부 끝날 것이다. 내일 하루만 지나면 함께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시우는 침실의 커다란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
억제제로 누르고 있던 페로몬이 사납게 일렁였다. 산호를 부르는 모욕적인 단어에 끓어올랐던 감정이, 페로몬 조절에 영향을 미친 탓이었다. 동요한 감정을 누르려는 듯 시우는 느릿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길 반복했다.
“…….”
지겨웠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끔찍이도 지리멸렬했다.
“……보고 싶다.”
엄지 손끝으로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쓰다듬으며 시우는 눈을 감았다. 다음날, 정 실장의 다급한 전화가 울릴 때까지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