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는 조수석에 앉아 시우가 채워준 벨트를 꾹 쥔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우의 차에 올라탄 게 처음도 아니었으면서 여전히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시우는 조용히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JR그룹 본사 건물 앞에 도착하자, 시우는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들어섰다. 시우의 차를 알아본 이들이 줄지어 나타나면 산호가 당황할 듯싶어서였다. 물론, 후문이라고 해도 본사 건물은 무척이나 넓었다. 지하 주차장 안으로 들어선 시우는 능숙하게 넓은 자리에 차를 주차시켰다.
“가자.”
산호가 입술을 꾹 다물며 차에서 내렸다. 어깨에 바짝 긴장이 들어간 것 같아 시우는 살며시 웃었다. 지하 2층, B-45. 주차된 위치를 확인하며 기분 좋게 생각했다. 한 번도 이런 거 기억해 본 적 없는데. 회사에서 자신이 직접 차를 주차하는 일은 드물었다. 있어도 상층의 지정 장소가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사소한 일탈은 우습게도 몹시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넓은 로비를 가로질러 걸었다. 단정한 슈트 차림의 직원들 사이에서 캐주얼한 옷차림을 한 두 사람은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시선이 꽂히자 조금 주눅 드는지 산호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시우는 웃으며 산호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이쪽으로 가자. 비밀 통로 있거든.”
산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무슨 회사 건물에 비밀 통로가 있어? 의문을 담은 산호의 눈초리를 보곤 시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지나 안쪽 깊숙이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문이 나타났다. 한 눈에도 관계자가 아니면 함부로 드나들어선 안 될 것 같은 위압감을 풍기는 문이었다. 시우는 대수롭지 않게 문을 열었다. 곧바로 널찍한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여긴 사람 없어.”
“…아.”
“응. 우리 둘밖에 없어, 이제.”
산호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갛게 귓불이 달아올랐다. 시우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산호를 바라보았다.
“나랑 둘만 있어서 불편해?”
“…아니요.”
불편해서 곧 죽을 것 같은 목소리인 것 같은데. 그제서야 시우는 자신이 산호의 손목을 쥐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살며시 손목을 놓자, 엘리베이터 문이 때마침 열렸다. 산호는 시우가 잡았던 손목을 매만지며 시우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 이사님!”
채광이 좋은 사무실의 유리문을 열자, 안쪽 자리에 앉아있던 40대쯤의 남자가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시우가 그를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인턴십 때문에.”
남자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매끄럽게 말했다.
“네, 정 실장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13기 맞으시죠?”
“네.”
시우는 고개를 살짝 틀어 산호를 향했다. 빙그레 웃으며 눈짓했다. 산호는 시우를 올려다보더니 우물쭈물 남자를 향해 어색한 몸짓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우가 픽 웃었다. 그러더니 급히 말아쥔 주먹으로 입가를 가린다.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것을 꾹 참는 중이었다.
“그럼 저는 밖에.”
시우가 인사차 고개를 끄덕이고는 산호에게 웃어 보였다. 동그랗게 휜 시우의 눈꼬리를 바라보며 산호가 눈을 깜빡였다. 엄마와 억지로 떨어져야 하는 아기고양이 같은 얼굴이었다. 시우가 장난스럽게 눈가를 찡긋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입 모양으로 속삭인 시우는 곧 유리문 밖으로 나섰다.
“백산호 씨?”
단정한 옷차림의 젊은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매우 사무적인 태도로 산호가 앉은 테이블 위에 태블릿 패드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계약서 읽어보시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아, 네.”
산호는 태블릿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조막만 한 글씨가 가득 차 있었다. 계약서는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산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조금은 성급하게 길게 밑줄이 그어진 곳에 자신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여자는 산호에게 태블릿을 받아들며 빠르고 정확한 말씨로 말을 이어갔다.
“백산호 씨는 JR인턴십 13기로 등록이 되실 거고, 배정될 부서는.”
태블릿 액정을 휙휙 넘기던 여자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배정될 부서는 기획실입니다.”
목소리가 조금 뾰족하게 들렸다. 산호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본래 JR인턴십은 대학교 방학이 시작되면 진행됩니다. 하지만 백산호 씨의 경우는… 음, 조금 이례적으로 진행이 될 예정이에요. 적응하는 차원에서 본격적인 인턴십 이전에 출근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이 있으셔서.”
“어… 네.”
“다음 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하시게 될 거고요. 인턴십이니 어려운 업무를 배당받지는 않을 테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여자가 안경 너머로 산호를 흘끗 바라보았다. 어딘가 묘한 눈길이었다.
“진 이사님과 함께 근무하실 테니, 어려울 것도 없으시겠지만.”
묘하게 가시가 있는 말투였다.
인사과 사무실 앞,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시우는 손끝으로 입매를 톡톡 두드리는 중이었다. 곧 핸드폰을 꺼내 짧게 메시지를 써 내려갔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프라이빗으로 준비해주세요. 10분 뒤. 메시지 전송음이 들린 순간 유리문이 열렸다. 산호가 시우에게로 다가왔다. 벽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시우가 빙긋 웃었다.
“끝났어?”
“네.”
“우리 갈 데 있어.”
“네? 어디요?”
시우는 기분 좋게 웃었다. 있어, 그런 게. 깨끗한 대리석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시우가 산호의 손목을 다정하게 잡았다.
목적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차된 곳을 찾지 못해 조금 헤맸는데, 연락을 넣은 대로 10분 안에 도착 할만큼 가까운 곳이었다. 전광판이 번쩍이는 명품관 앞에 차를 세우자, 유니폼을 입은 발렛 기사가 다가왔다. 시우는 허리를 굽혀 산호의 벨트를 풀어주었다. 산호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회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가자, 나 엄청 기대돼. 달칵, 차 문이 열렸다.
프라이빗 쇼룸 안은 무척이나 밝았다. 환한 조명이 사각 없이 곳곳을 비추고 있었고 다양한 옷들이 깔끔하게 열을 맞추어 줄지어 있었다. 단정한 블랙 슈트 차림의 매니저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산호는 시우의 얼굴과 쇼룸 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 여기… 뭐에요?”
매니저에게 마주 인사하던 시우가 아, 하고 웃었다.
“첫 출근할 거니까 옷 준비해야지.”
“옷이요?”
산호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산호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시우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출근할 때 입을 거니까, 단정한 걸로.”
“단정한 거….”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얼굴로 산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래도 조금은 캐주얼한 게 나으려나.”
시우가 웃으며 매니저에게 시선을 던지자, 매니저가 눈치 빠르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쪽 고객님께서 입으실 건가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산호가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자 시우가 다시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매니저는 부담스럽지 않은 시선으로 산호를 주욱 훑어보았다. 사이즈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너무 클래식하지 않은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이사님.”
매니저가 단정한 걸음으로 멀어지자, 시우는 약지 손끝으로 눈썹 끄트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은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이거 회사에서 첫 출근하는 직원한테 선물하는 거야.”
정식 직원도 아닌 대학생 인턴에게 이런 명품관에서 옷을 선물하기도 하던가? 자신이 생각해도 개연성이 없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애써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우리 회사 진짜 좋은 회사거든.”
산호가 말간 얼굴로 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우는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입꼬리는 자꾸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데, 무어라 대답을 하는 것이 좋을지 난감한 탓이었다.
“이런 스타일은 어떠실까요.”
매니저가 다가오자 시우는 눈썹을 좁히며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아, 지금 꼴이 조금 우스운 것 같은데. 산호가 매니저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시우가 다행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캐주얼하면서도 단정한 디자인이에요. 고객님은 피부가 워낙 좋으셔서 컬러는 다양하게….”
핀턱[1]이 잡힌 드레스 셔츠는 매니저의 말처럼 부담스럽지 않고 단정했다. 시우가 웃으며 그것을 산호의 어깨선에 맞추어 보았다.
“예쁘다.”
산호는 제 몸에 대어진 옷을 내려다보곤 다시 시선을 올려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입어봐.”
매니저가 매끄럽게 산호를 이끌었다.
“피팅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산호가 여섯 번째 옷을 갈아입는 사이, 시우는 선반 위에서 하얀 운동화 하나를 골라냈다. 가벼운 캔버스 재질의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손끝으로 이음새를 훑던 시우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들어 올렸다. 쇼룸 한 가운데의 소파에 앉으며 테이블 위에 운동화를 내려놓곤 그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
산호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네이비색 슬랙스와 품이 넉넉한 디자인의 캐주얼 셔츠 차림이었다. 시우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고 산호를 바라보았다. 시우가 말없이 저를 바라보자, 산호의 귓불이 점차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아, 역시 이상하죠, 이거….”
시우가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아니, 예뻐.”
산호가 살며시 시선을 올려 시우를 바라보았다.
“…예뻐요?”
“응. 예뻐.”
시우의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퍼졌다. 시우는 곧 아, 작게 중얼거리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무릎을 굽혀 산호의 발치에 그것을 가만히 내려놓는다. 산호가 제 아래 무릎을 굽힌 채 앉은 시우의 널따란 어깨를 빤히 바라보며 선배…? 하고 중얼거렸다. 시우가 고개를 들어 산호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내 선물.”
이미 포장된 다섯 개의 쇼핑백은 마치 자신의 선물이 아니라는 듯 시우가 웃었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
“이제 학교도, 회사도 같이 다닐 생각 하니까.”
“…….”
“기분 좋아.”
산호는 입술을 말아 물며 시선을 흩트렸다. 복잡한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
마음이 어딘가 붕 뜨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좀체로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이었다. 산호가 강의실에 도착한 건 꽤 이른 시간이었다. 텅 비어있는 강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허리를 바로 세웠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오면 하나둘 학생들이 나타날 터다.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산호는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시선은 반듯하게 놓인 전공책 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온몸의 감각은 온통 다른 곳으로 비죽 서 있었다.
따뜻한 흙 향기. 다정한 향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가슴을 울멍지게 만들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호에게는 의미 없는 소음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찰나, 누군가 산호의 발끝을 툭 차며 지나쳤다.
“아, 미안.”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어투가 정수리로 쏟아졌다. 애초에 책상 아래 가지런히 놓인 산호의 발을 차고 지나가는 것부터가 작위적이었다. 산호는 아래로 시선을 흘끗 내렸다가 곧 자신의 발을 찬 학생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산호의 새하얀 운동화를 찬 학생을 향해서였다.
“…….”
언젠가 학부 모임에서 술을 물인 양 속여 먹였던 그 동기였다. 삐뚜름한 미소를 건 그는 곧 노골적으로 산호의 새 운동화를 눈짓하며 과장된 목소리를 냈다.
“운동화가 너무 번쩍거려서 이거밖에 안 보이더라고.”
주변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어지럽게 터져 나왔다.
“이거 되게 비싸 보인다. 설마 샀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도 산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감한 하얀 얼굴을 마주 보는 동기의 얼굴에 점차 뚜렷이 악의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근데 얜 왜 말을 걸어도 맨날 대답을 안 하냐.”
산호가 다시 살짝 시선을 내렸다. 허리를 굽혀 흙먼지가 묻은 운동화 앞 코를 톡톡 털어냈다. 혹시 운동화에 생채기라도 생길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걸어왔더랬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다시 고개를 드는 산호의 꾹 다물린 입매가 차가웠다. 동기가 일부러 커다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 백산호 요즘 작업 잘 돼가나 보다?”
“…….”
“근데 그런 작업은 기본이 친절함 아니냐? 개새끼처럼 꼬리 살랑거리는 거?”
“…….”
“얘는 이렇게 재수 없이 구는데 왜 이런 운동화가 뚝 떨어지는 거냐.”
옆의 동기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작게 오메가, 하는 웅얼거림을 들은 것 같았다. 곧 조롱 조의 말이 이어졌다.
“야, 생각을 해봐라. 백산호가 너한테 뭐 하러 꼬리 흔들겠냐. 떨어지는 것도 없는데. 떨어질 게 있어야 엉덩이도 흔들고 허리도 흔들고 하는 거지.”
“야이씨, 더러워.”
“하긴, 우리한테는 잘해줄 이유가 없긴 하겠네. 우리가 무슨 재벌도 아니고.”
“아니지, 병신아. 너는 성격이 더러우니까 아예 너한텐 비비지도 못하는 거지. 쟤도 좀 잘해줘야 비벼볼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냐.”
아아, 말끝을 늘이며 몰려있던 동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산호의 운동화를 발로 툭 찼던 동기가 조롱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너네, 저번에 시우 선배가 길고양이 구해주는 거 봤냐?”
어느 틈에 강의실에 제법 들어찬 학생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는 주변을 크게 둘러보며 들으란 듯이 떠들었다.
“여자애들 난리였잖아. 멋있다고.”
“뭐. 그 실외기 위에 올라갔던 까만 고양이 내려준 거?”
“아, 어어. 뭐 타고 올라갔는지 실외기 위에서 앵앵거리는 거 선배가 내려줬잖아.”
“어, 봤지. 그 고양이가 손 막 할퀴는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웃으면서 쓰다듬어 주더라.”
“그때 고양이 간식 잔뜩 사줬을 걸. 그리고 나서 길고양이 쉼턴가 그거 골목에 놔줬잖아. 알지, 단과대 뒤에 있는 거. 무슨 길고양이 집이 우리 집보다 좋냐.”
동기가 산호의 옆으로 가까이 섰다. 비아냥을 담은 목소리가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주어 또박또박 울려 퍼졌다.
“시우 선배는 길고양이한테도 잘해주는 사람인데, 뭐. 고양이가 신발 신고 다녔으면 아마 운동화 열 켤레는 사줬을 거다.”
말을 마친 그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려는 듯 입을 뻐끔 열었을 때였다.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살며시 올라갔다. 조금은 묵직한 무게에 동기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길고양이?”
값싼 호기심으로 다글다글 모였던 시선들이 일순 얼어붙었다. 동기가 뻣뻣한 표정으로 제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상대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인 채 눈꼬리를 접어 웃고 있는 시우가 그를 향해 서 있었다.
“응, 나 고양이 좋아해.”
“…어, 시우 선배….”
“고양이는 쓸데없이 다른 사람 안 괴롭혀. 그래서 좋아.”
다들 그렇지 않나. 시우가 눈꼬리를 더욱 휘며 웃었다. 꾸욱 어깨를 눌렀던 손도 살며시 떼어냈다. 시우는 혼자 동떨어진 듯 오도카니 앉아있는 산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산호야, 나 책 보여줘.”
얼어붙었던 시선들이 묘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시우라고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 보였다.
“나 오늘도 책 안 가져왔어.”
시우는 가만히 산호의 손목을 쥐었다. 시우에게 이끌려 강의실 맨 뒷자리로 걸어가며 산호가 시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우의 얼굴은 딱딱했다. 그러나 산호의 시선을 느끼곤 시우는 살짝 고개를 틀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어 보인다. 신경 쓰지 마. 시우의 입술이 소리 없이 속삭였다. 산호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우는 입술 끝을 살짝 깨물었다.
수업 시간이 지루했던 적은 드물었다. 나 제법 성실한 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우는 턱을 괸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뺨에 닿은 검지 끝을 톡톡 두드리며 눈을 깜빡였다.
벌써 몇 번째 뒤를 돌아보는 학생들과 눈이 마주쳤다. 흘끔 뒤를 돌아보는 학생들은 시우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다시 앞을 바라보곤 했다. 그들의 눈동자에 서린 빛은 한결같았다.
소문 진짜야? 둘이 정말 그래? 시우 선배 어떡하냐.
꽤 기묘한 일이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은 악의보다는 안타까움이 대부분이었고, 옆 자리의 그 애를 향한 시선은 동정보다는 악의와 조롱이 대부분이었다. 왜일까. 그까짓 형질 때문에? 아니면…
시우가 작게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틀어 산호를 바라보았다. 턱을 괸 채 자신을 바라보는 시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부지런히 필기를 하던 산호의 손끝이 멈췄다. 곧 시선이 마주쳤다. 시우는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리곤 곧 책 귀퉁이에 무언가를 슥슥 적어 내려갔다.
[오늘 우리 회식이야]
시우의 커다란 손에 가려졌던 글씨를 확인하고는 산호가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시우를 바라보았다. 무슨 회식…? 회사? 출근은 다음 주부터 아니었나? 산호의 표정을 읽었는지 시우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손을 바삐 움직인다.
[새로운 팀원 합류하면 원래 회식하는 거야]
또박또박 써 내려간 글씨를 읽으며 산호가 되새기듯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이 쓴 메모를 입으로 소리 없이 읽어가는 산호가 재미있는지, 시우는 다시금 픽 웃었다.
[뭐 먹고 싶어?]
이번에는 산호도 입을 다물고 손을 움직였다.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래도 아무거나 골라봐]
[선배 먹고 싶은 거요]
나는… 손을 움직이려던 시우가 멈칫했다. 눈꼬리를 휘며 산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기 먹자. 소고기. 좋은 걸로.”
산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래, 하고 대답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자신의 필담이 적힌 책 귀퉁이를 산호가 손으로 쓰다듬는 것을 보지 못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