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누워있던 시우는 진동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핸드폰이 우우웅, 진동을 울리며 몸을 떨었다. 나른하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쥔 시우는 액정을 확인하곤 잘게 눈썹을 찌푸렸다. 정 실장의 이름이 액정에 떠올라 있었다.
“정 실장님…?”
조금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핸드폰 너머 정 실장이 대답했다.
- 이사님, 쉬시는 데 죄송합니다.
정 실장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차분했다. 하지만 어딘가 격양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무슨 일이라도.”
- 문… 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룸 앞입니다.
찌푸려져 있던 시우의 미간이 조금 더 깊게 패었다. 정 실장이 다급하게 찾아올 일이 무엇일까. 그 질문에 떠오른 대답은 하나같이 불안한 내용뿐이었다. 마른 발에 룸 슬리퍼를 꿰며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만 기다려요.”
재일의 앞에서 거칠게 닫힌 후 미동 없던 잠금장치가 철컥 풀어졌다. 문을 열자 반듯하게 선 정 실장이 시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조금 급….”
말을 이어가던 정 실장은 시우의 얼굴을 보곤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얀 얼굴이 어딘가 푸석했다. 시우는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말씀해보세요.”
“식사는 하신 겁니까?”
“아니. 생각 없어요. 무슨 일인지….”
짤막한 한숨을 내쉰 정 실장은 다시금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백산호 씨가 학교에 간 모양입니다.”
시우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애써 띄웠던 미소가 점차 옅어졌다.
“학교에… 갔다고?”
“네. 학교에서 작은 다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다치신 것도 아니고.”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얼까. 시우의 눈가가 자그마하게 비틀렸다. 정 실장은 시우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JR 인턴십 정기 교육이 있습니다. 컨벤션홀 7시입니다. 혹시 백산호 씨가 이쪽으로 찾아오시진 않을까 해서….”
시우는 핸드폰 액정의 시간을 확인했다. 6시 30분. 시우의 시선을 따라 시간을 확인한 정 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정기 교육에 회장님이 참석하실 겁니다. 본래 인턴십을 진행하면 정기 교육에는 짧게라도 얼굴을 비추시곤 하셨고-.”
시우는 다급히 문을 크게 열어젖혔다. 무언가를 걸칠 새도 없이 걸음을 떼려는 시우를 정 실장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사님, 어떻게 하시려는….”
“산호 찾아야 해요. 여기 오면 안 되는-.”
“이사님…!”
시우는 등 뒤에서 울리는 정 실장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달음질을 치듯 복도를 가로질렀다. 엘리베이터 앞에 멈추어 서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밭은 숨이 입술 새를 뚫고 새어 나왔다. 아직 끝나지 않은 러트의 영향으로 몸 안에서 페로몬이 용틀임했다. 다급한 마음을 알 리 없는 엘리베이터는 느릿느릿 최상층에 도착했다. 부드러운 전자음 소리와 함께 스르륵 문이 열렸다. 시우는 재빨리 엘리베이터로 올라탔다. 정 실장이 다가와 버튼을 눌러주었다.
“…….”
반질한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제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우는 가운뎃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다급한 마음에 발맞추지 못했던 이성이 삐걱거리며 제 위치를 찾아갔다. 숨을 고른 시우는 정 실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에 띄지 않게 산호 찾아주세요. 정 실장님이 산호 찾는 걸 아버지가 알게 되면, 분명히 집요하게 사람을 붙일 테니까 더 조심하셔야 해요.”
정 실장이 말없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마주 보며 시우는 골치 아픈 듯 다시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벌써 아버지가 알고 계실 거란 거 알고 있어요.”
“…네, 아마도 그럴 겁니다. 회장님 역시 백산호 씨 동태를 파악하고 계실 테니까.”
심장이 불쾌하게 쿵쿵 뛰었다. 시우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괜찮아. 나랑 마주치는 게 아니라면, 산호한테 먼저 손대지는 않으실 거예요. 한 달이나 만나지 않았으니까… 감시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 경계가 느슨해졌을 거고. 오늘 밤만 넘기면 돼요. 그러면….”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했다. 부드럽게 멈추어 선 엘리베이터의 계기판은 로비를 의미하는 L 글자를 띄우고 있었다. 단단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시우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작게 웃어 보였다. 뻣뻣하게 굳었던 입꼬리가 완만한 호를 그리며 당겨졌다.
“오늘 밤만 지나면 아무 일도….”
완전히 문이 열리자 시우는 로비를 향해 걸음을 뗐다. 러트가 끝나지 않아 피곤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조금 이르게 출국 준비를 하면 될 터다. 무사히 밤을 보내고 날이 밝으면 산호를 만나러 갈 수 있다. 산호를, 산호를…
“…….”
로비에 들어선 시우는 우뚝 멈추어 섰다. 다짐하듯 웃어 보였던 뺨이 다시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순식간에 저를 감싼 페로몬 때문이었다. 짓이긴 과일을 물속에 넣고 휘휘 저을 때 날 법한, 습기 먹은 단내. 뇌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를 만큼 강하고 유혹적인 향기였다. 몸이 순식간에 반응했다. 시우는 정 실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실장님, 지금….”
시우의 말이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누군가가 난데없이 시우에게로 다가왔다. 인상을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본 시우의 얼굴이 조금 더 당황으로 얼룩졌다. 화사한 하늘색 슈트를 입은 현재일이 비틀거리며 시우에게로 몸을 기댔다. 그에게도 약한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로비를 채운 페로몬에 비하면 무척이나 미약한 것이었다. 동시에 몹시도 역겨웠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거의 안기다시피 그는 시우에게로 몸을 내던졌다.
“이 페로몬… 현재일 씨가 왜… 무슨 일 있었…?”
문장을 이루지 못한 말들이 조각지어 쏟아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재일의 얼굴은 연극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게 분명했다. 누군가에게 목이라도 졸린 듯 목 부근에 불긋한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시우는 힘이 풀린 듯 무너지는 재일의 어깨를 반사적으로 잡아주었다.
“시우 씨… 후, 으… 나 좀 부축해줘요.”
노골적으로 몸을 붙여오는 행태가 불쾌했지만, 아픈 사람을 거칠게 떠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우가 뻣뻣하게 자신의 어깨를 쥔 채 서 있자, 재일은 한층 더 가까이 몸을 붙여왔다. 그리고는 시우의 귓가에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페로몬 맡았으니까 알겠죠, 그 거머리 같은 오메가가 여기 찾아온 거.”
재일의 어깨를 잡은 시우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악의로 반짝이는 눈이 시우를 향해 두어 번 깜빡였다.
“여기 보는 눈 많으니까, 지금은 나 부축해줘요. 병원까지 데려다주면 더 좋고.”
“떨어져.”
입술을 거의 달싹이지 않고 시우가 말했다. 재일은 자신의 목을 더듬더듬 만지며 말을 이었다. 조금 더 작은 목소리였다.
“나 그 오메가 만났어요. 진시우 네가 홀려 있는 게 어떤 새낀지 확인 했다는 얘기야. 내가 당신 아버지랑 손잡고 그 오메가 괴롭히는 상황은 피해야 하지 않겠어요?”
“…….”
“적어도 나는 당신 골치 아프게 만들 수 있어. 상황 판단 바로 해요.”
시우는 입 안 연약한 점막을 짓씹었다. 이 비열한 인간이 무어라 지껄이던 아무 관심 없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무사히 보내야 했다. 더 골치 아픈 일을 만들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시우는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 실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실장님.”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정 실장 역시 어렴풋이 상황을 파악한 듯 보였다. 베타인 그는 페로몬을 직접적으로 느끼지는 못할 테지만, 대여섯 명의 가드가 몰려와 있고, 목이 졸린 흔적을 매단 재일이 시우에게 매달려 무어라 속삭이는 모습은 확실히 암시하는 바가 있었다. 게다가 재일의 속삭임에 얼핏 들려온 ‘오메가’라는 지칭까지. 어쩌면 백산호가 이미 이 호텔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정 실장의 표정 역시 불쾌한 듯 살짝 일그러졌다. 시우는 그의 얼굴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분은 병원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네, 그럼 제가.”
“아뇨, 다른 사람 부를게요. 정 실장님께서는 일단… 제가 부탁드린 것부터.”
재일의 눈앞에서 명확한 부탁을 할 순 없었다. 정 실장은 시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백산호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라는 의미임을 그는 알아차렸다.
“이사님은 어떻게….”
“집에 있을게요. 억제제 가지고 있어요. 저는 괜찮으니까-.”
“괜찮지 않습니다. 러트 내내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정 실장답지 않게 강한 어조였다. 시우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페로몬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것이었다. 애타게 그리던 이의 흔적을 만난 페로몬은 자신의 짝을 찾으려는 듯 끊임없이 꿀렁꿀렁 쏟아졌다. 한 모금의 물은 오히려 갈등을 돋우는 법이다. 아지랑이처럼 시우의 페로몬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산호를 찾으려는 듯 몸집을 점점 더 부풀렸다.
“아뇨, 괜찮아야 돼.”
“…….”
“가요. 부탁할게요.”
시우는 저에게 기대있는 재일의 팔을 잡았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을 뒤집어쓰고, 시우의 페로몬까지 고스란히 느끼고 있을 그는 약한 자극에도 쉽게 몸을 떨었다. 시우가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 불러줄 테니까, 병원 가요. 말 더 얹지 말고.”
“…진시우….”
“그리고 한 번만 더.”
“…….”
“내 짝에 대해 함부로 떠들면.”
“…….”
“그 입 찢을 거야.”
앞을 바라본 채 걸음을 옮기는 시우의 표정은 덤덤했다. 목소리도 무던했다. 자칫 다정함까지 묻어있는 목소리였다. 재일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살짝 몸이 떨려와 걸음을 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재일은 이것이 미약하나마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넓은 로비를 가로질러 마침내 호텔 밖을 빠져나왔다. 정 실장이 재일을 병원으로 데려갈 사람을 부르는 사이, 시우는 재일의 팔을 차갑게 탁, 놓았다. 호텔 앞 도로는 널따랬다.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몇 걸음 더 걸어간 시우는 제 옆에서 보폭을 맞추어 오는 정 실장을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정 실장님, 반드시-.”
산호 반드시 찾아요. 그리고 안전하게 집에 머무르게 해주세요. 아버지 눈에 띄지 않게. 내가 찾아갈 때까지, 앞으로 몇 시간만 기다려달라고. 애타는 부탁은 시우의 입술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
첨예해진 감각이 어떤 신호를 보내왔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강렬했다. 작은 발걸음 소리, 공기 중에 섞여 있는 달큼한 향. 아니, 그런 것이 없어도 시우는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그 누군가가, 여태 자신이 애타게 그려왔던 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지금은 마주해선 안 될 이라는 사실까지.
“…….”
멀리서 커다란 차가 모퉁이를 돌아 호텔 앞 도로로 진입하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진태석 회장의 리무진이었다.
“선배.”
작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밤마다 되새기던 목소리는 전과 다름없이 여전했다. 그리고 황홀할 정도로 달콤했다. 가슴이 저릿거렸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전류를 흘려보내기라도 하듯이 따끔한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선배가 찾아오지 않아서, 내가 찾아왔어요.”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울음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에 시우의 눈가가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봐줘.”
돌아서서 그 애를 향해 달려가야 했다. 품에 한가득 그 애를 안고 소중히 입 맞추어 주어야 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신호에 걸렸던 커다란 리무진은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짙게 틴팅된 차창 너머, 저희를 바라보고 있을 시선이 여실히 느껴졌다. 시우는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엄지로 조심스레 만졌다. 딱딱한 무기체가 따스한 온기를 품은 채 손가락 위에서 헛돌았다.
“……선배, 나 왔잖아요.”
“…….”
“나 안 봐요? 나… 안 보고 싶어?”
“…….”
“나만, 나만 보고싶었던 거예요?”
물음표를 매단 목소리는 짙은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성이 투둑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시우의 몸이 그림처럼 빙글 돌아가는 순간, 정 실장이 다급히 시우의 어깨를 잡았다. 당장에라도 등 뒤의 아이에게 달려가려는 시우를 정 실장은 단단히 막아섰다.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사님, 회장님 리무진입니다.”
“……놔주세요.”
“지금은 안 됩니다.”
시우도 알고 있었다. 지금 산호를 마주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버지가 직접 자신의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그래선 안 됐다. 지난 한 달간 공들여 세웠던 계획도, 꾹 참아왔던 간절함도 이 한순간의 선택에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성과 본능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정 실장을 뿌리친 채 시우는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선배.”
노을 진 하늘이 조금 더 짙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빛이 산호의 얼굴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산호야.”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산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도자기 인형 같은 새하얀 얼굴은 여러 감정으로 찰박였다.
“말해요. 나 다시 만나면 해준다고 했던 말, 지금 해요.”
“…산호야.”
“그 말, 거짓이 아니었다면, 지금 해.”
작았던 목소리에 점차 힘이 실렸다. 울분 같은 것을 담은 목소리였다. 심장이 뻐근했다. 자신이 낀 것과 같은 반지를 끼워주면서 하려고 했던 말을, 이 자리에서 할 수 없는 현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이사님, 냉정하게 판단하셔야 합니다.”
정 실장이 시우의 한쪽 팔을 꾸욱 쥐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시우 역시 정 실장의 말이 옳다는 것을 가슴 시리게 알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도 무력하게 느껴지는 자신이 이렇게 혐오스러울 수 없었다. 시우는 곧 입술을 단단히 물었다. 애써 표정을 굳힌 채 산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해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는 시우를 바라보며 산호는 천천히 입매를 끌어당겼다.
“…하.”
허탈한 웃음이었다. 절망이 산호의 얼굴 위로 빠르게 물들었다.
“나만 기다렸던 거야. 그치.”
“…….”
“바보처럼 나만 기다렸던 거였어.”
산호의 얼굴은 웃음인 듯 울음인 듯 가늠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선배 없으면 안 돼요. 선배가 내 전부야. 선배 없이는 아무것도 의미 없어.”
“산…!”
“나만 기다린 거, 괜찮아. 그런데, 다른 놈이랑 같이 있는 건 안 돼. 적어도 나를 잊는 건 안 돼. 평생 나만 생각하면서 살게 만들 거야.”
산호의 입술이 더욱 둥근 호를 그렸다.
“다정한 선배는… 내가 이렇게 하면 평생 날 기억하겠지.”
순식간이었다. 산호의 가는 몸이 망설임 없이 널따란 차도를 향해 움직였다. 빠앙, 클랙슨 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지하 주차장과 이어지는 도로의 끝에서 막 달려오던 커다란 냉동 탑차가 도로를 따라 미끄러졌다. 도로의 한 가운데 선 산호의 시선이 달려오는 커다란 트럭을 향했다. 하얗게 빛나는 헤드라이트가 산호의 몸을 잡아먹었다. 무척 짧은 순간이었지만, 산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분명 체념을 담은 미소였다.
“백산호…!!!”
시우의 팔을 세게 쥐고 있던 정 실장의 손이 거칠게 뿌리쳐졌다. 막아설 틈이라곤 없었다. 황급히 달려 나가는 시우의 뒷모습을 바라본 정 실장의 눈이 크게 뜨이기까지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하얗게 빛나는 산호를 시우는 단번에 끌어안았다. 작은 머리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고, 등 위로 단단히 손을 엮었다. 움직임의 반동으로 엉킨 두 개의 몸이 풀썩 기우는 찰나,
끼이익, 쾅.
덩치가 커다란 냉동 탑차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몸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갑작스레 차도로 뛰쳐나온 남자와, 그 남자를 보호하듯 끌어안은 남자를 쿵, 들이받았다. 충격으로 덩어리진 두 개의 몸이 도로 위를 굴렀다.
시우는 품 안에 가둔 그 애가 저를 끌어안는 것을 느꼈다. 아스팔트 위를 구르며 손등 마디가 찢어지는 고통에 비하면 하잘것없이 작은 감각이었지만, 저를 끌어안는 주먹에 작은 안도를 느꼈다. 충격에서 보호하기 위해 더욱 강하게 그 애를 끌어안았다. 쿵, 머리를 세게 부딪혀 눈앞이 흐려지는 순간에도 시우는 더듬더듬 그 애의 뒷머리를 안았다.
“괜, 찮아…? 산호야, 괜찮….”
가까스로 시선을 내려 그 애를 바라보았다. 물기로 어룽진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우는 빙긋 웃었다. 아, 괜찮구나, 괜찮… 그렇게 세상이 암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