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후]
사각사각.
사과 껍질을 까던 윤 할머니는 콧잔등 아래로 내려온 안경 너머로 창가의 남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대학병원의 6인실 병실은 환자와 보호자들로 항상 북적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가장 안쪽 창가 자리는 늘 고요하기만 했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의 자리였다. 사실 그는 남자라기보다는 소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치 앳된 얼굴이었다. 오늘도 오도카니 앉아 창 너머를 공허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퍽 쓸쓸해 보였다.
“에구, 어린 학생 같아 보이는데.”
윤 할머니는 막 깎은 사과 서너점을 소담스레 종이 접시 위에 올렸다. 몇 달째 허리가 아프다며 툴툴거리는 영감은 무시하고 쓸쓸해 보이는 젊은 남자에게 사과를 건네주어야겠다 생각한 참이었다. 윤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침대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제 아내의 손목을 턱 잡았다.
“어디가는 거여?”
“저 학생 사과 좀 나눠주려구.”
할아버지는 백발이 성성한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창가 쪽으로 흘끗 시선을 던지고는 혀를 쯧 차며 말했다.
“관두소. 오지랖은.”
윤 할머니는 허이구, 소리를 내며 남편을 타박하기 시작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양반 같으니. 보니까 며칠째 찾아오는 사람두 없구, 딱해 보여서 그러는구만. 사과 많어. 뭘 아까워해.”
할아버지는 윤 할머니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과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저놈 저거 미친놈이라 아무도 안 오는 거여.”
“으잉?”
윤 할머니는 의자에 철벅 주저앉으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거, 임자가 병수발 아들놈들한테 맡기구 그동안 병원 안 왔응게 모르는 거여. 저거 보통 미친놈이 아녀.”
“그게 무슨 소리여?”
할아버지가 윤 할머니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목소리를 죽였다.
“저놈이 죽겠다고 차에 뛰어들었는데, 그거 구한다고 다른 사람이 대신 치인 모양이여.”
“응? 암만 해도 지 죽겠다고 차에 뛰어들었을라구. 그냥 사고 아니여?”
“하이고, 아니라니깐. 심지어 지 죽는 꼴 보여주겠다고 일부러 그랬다드만. 첨에 들어왔을 때 제 놈 대신 다친 사람 찾아가겠다구 발광하고 난리두 아니었어. 팔에 꼽힌 거두 다 뽑구. 참나.”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듯 다시 쯧쯧 혀를 찼다. 윤 할머니는 슬그머니 창가의 남자에게 시선을 던지곤 다시 남편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지금은 저리 얌전하잖우.”
“미친놈 속을 어찌 알어? 뭔 시꺼먼 양복 입은 놈이 한 번 왔다갔는데, 그때 저 대신 다친 사람 소식을 들었는가 봐. 암시래도 크게 다쳤는가 보지. 그때부터 시체마냥 저래 앉아서 밥도 안 먹고. 뭣허면 병실이나 비우고. 빈자리도 어찌나 꼴 보기가 싫은지. 저런 놈이랑 한 병실 쓰는 것도 찜찜혀. 재수가 없으려니, 원.”
윤 할머니는 사과가 담긴 접시를 무릎에 올려놓으며 흐음, 콧소리를 냈다. 조금 전만 해도 조심스레 흘끗대던 시선은 어느새 노골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호기심 보다는 연민에 가까웠다.
“그래도 뭔 사정이 있겠지. 난 딱해 보이는데.”
“왐마, 세상에 사정없는 사람 어디 있간? 암만 그래두 남한테 피해를 주는 거는-.”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는 반사적으로 문가를 바라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윤 할머니가 궁금증을 담아 남편과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새까만 양복의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옴칠 입에 힘을 주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이 양반이 꿀이라도 자셨나, 입은 갑자기 왜 콱 다물고 그런댜.”
“크흠, 거, 커튼 좀 치시게.”
“하이고, 답답 시려. 커튼은 뭣 하러-.”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지금 들어온 양반이 저번에 저 미친놈 찾아왔던 양복쟁이란 말여.”
뭐 어디 높으신 분 모시는 사람 같은데… 얽히면 골치 아퍼. 얼른 커튼 치소. 윤 할머니는 목소리를 더욱 죽이며 말하는 할아버지를 불만스레 바라보았다. 그러나 윤 할머니 역시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새까만 양복의 남자를 슬쩍 훔쳐보면서였다.
“백산호 씨.”
새까만 양복의 남자는 창가 자리의 남자 앞에 우뚝 섰다. 커튼을 쥔 채 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짐짓 관심 없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썩 잘 꾸며내지는 못했다.
“오늘 중으로 퇴원하셔도 됩니다. 수속은 밟아놨으니까.”
창가의 남자는 여전히 창 너머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새까만 양복의 남자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감입니다.”
다섯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행간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는 창가의 남자에게 짤막하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세웠다. 창가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뺨 한쪽과 오똑 솟은 콧대만 흘끔 바라보았던 윤 할머니로서는 남자의 얼굴을 처음 보는 셈이었다. 조막만 한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찬 이목구비가 무척이나 섬세하고 예뻤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차가운 느낌이었다. 텅 빈 유리잔처럼 금세 깨어질 것 같은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윤 할머니는 드르륵, 커튼을 쳤다. 그때, 처음으로 창가의 남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회장님…한테 한 마디만 전해주세요.”
“…….”
“한 마디만.”
“…백산호 씨.”
“아직 우리 내가 끝나지 않았다고, 그 말만요.”
윤 할머니는 가려진 커튼 너머 얼핏 한숨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VIP 병실 복도는 6인 병실이 늘어선 병동의 복도보다 널따랬다. 복도를 왕복하는 이가 적어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산호는 단 두 개뿐인 VIP 병실 앞 의자에 앉아있었다. 병원에서 으레 볼 수 있는 딱딱하고 기다란 플라스틱 스툴이 아닌, 보드라운 벨벳 소재의 소파였다. 깔끔한 복도 위에 푹신한 소파가 놓여있는 까닭에 흡사 병동이 아닌 호텔의 라운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
주기적으로 복도를 지나가는 의료진들이 산호에게 흘끗 시선을 던지며 지나쳤다. 산호의 초라한 행색은 확실히 이곳에서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비단 초라한 행색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날마다 이곳에 찾아와 시간을 보낸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던지는 시선이었다.
“…….”
두 달 전, 산호의 부상은 크지 않았다. 저를 감싼 단단한 품이 대부분의 충격을 막아준 탓이었다. 단순한 골절과 타박상. 커다란 냉동 탑차에 치인 상처치고는 무척이나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나 저를 감싸준 이는 사정이 달랐다. 우성 알파의 타고난 형질 덕분에 신체의 부상은 제법 빨리 회복되었지만, 그는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특별한 지시라도 받은 듯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문 의료진들은 산호의 애타는 질문에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한참을 애걸해 겨우 들은 대답이라곤 ‘충격으로 인한 혼수상태’가 전부였다. 분명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터다. 그들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그랬다. 하지만 산호에게는 절대로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을 셈인 듯했다.
그런 산호에게 ‘기억장애’의 가능성을 이야기해준 건 의료진이 아닌, 늘 시우의 곁을 지키던 블랙 슈트의 남자였다. 그는 이번에도 사무적이고 건조한 말투로 용건을 전달했다. 그마저도 의중을 알 수 없을 만큼 짤막한 내용이었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사님께서 깨어나셨을 때 기억이 온전치 못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검사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뇌파가 불안정하다고.’
‘그 말은….’
‘이사님께는 이게 다행일지 불행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산호를 바라보았다.
‘이사님께서 깨어나시고 나면, 다시는 이사님과 얽히지 마십시오.’
‘…….’
‘백산호 씨와 이사님이 함께하는 걸 바라는 유일한 사람을, 백산호 씨가 달리는 트럭 앞으로 내몰았으니까.’
블랙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산호는 알 수 없었다. 때로는 가여워하는 것도 같았고, 때로는 원망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산호를 보살펴 주었다. 그가 내켜서 하는 행동이었을지, 누군가의 지시였을지는 알 수 없었다. 간간히 짤막한 소식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산호는 버틸 수 있었다.
VIP 병실에 시우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도 그였다. 절대,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알려준 사실이었지만. 꾹 닫힌 VIP 병실의 문은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굳게 닫힌 병실 문 너머 누워있을 사람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는 것은 고통을 닮은 희망이었다.
산호는 사막에 홀로 떨어진 초식동물처럼 어울리지 않는 VIP 병실 앞에 오래도록 앉아 생각을 거듭했다. 하지만 아무런 답도 내릴 수 없었다. 답을 내려줄 수 있는 사람은 문 너머 죽은 듯 누워있는 그가 유일했기에.
선배는, 날, 어떻게 생각해요?
생각해보면 그는 한 번도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다. 산호가 그를 보내주었던 화려한 클럽의 거리 앞에서조차, 그의 말은 모호했다.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다음에 만나면 해줄게, 꼭. 그의 말이 모호한 만큼 세상은 그가 산호를 선택하지 않을 거라 끊임없이 단호하게 되뇌었다. 산호는 그것을 부정해내지 못했다. 불안은 심장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앉아 연약하게 피어오르는 희망을 모두 먹어 치웠다.
그럼에도,
사랑한다는 말.
그가 해준다던 말을 듣고 싶었다. 누군가가 말했듯 동정을, 혹은 연민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것일지라도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산호가 원하는 것은 그것 하나였다. 모두에게 다정한 웃음 말고, 모두에게 친절한 말씨 말고, 오로지 자신에게 해주려고 했던 말.
결국 촘촘한 생각의 거름망에 걸러진 여과물은 산호의 뿌리 깊은 바람과 욕망이었다. 단단히 비틀려있는 욕망이었으나, 그것을 바라는 마음만큼은 티끌의 이물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이었다.
다른 너절한 시선에 선배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 아무도 선배를 만지게 하고 싶지 않아, 오롯이 내 거야.
삐뚤어진 마음은 눈치채지 못한 사이 오래전에 질주를 시작했고, 스스로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산호가 자신의 삐뚤어진 질주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지금 이 방법.
산호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호텔 라운지를 방불케 하는 병동의 조명이 눈꺼풀에 가려 끔뻑였다. 멀리서 어두운 무채색의 옷을 입은 장년의 남자가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왔다. 차양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 쓴 덕에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산호는 여전히 눈을 깜빡일 뿐, 남자를 향해 한 조각의 시선도 던지지 않은 채였다. 기실, 텅 비어있는 산호의 눈동자는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할 성싶었다.
“…….”
장년의 남자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다가와 산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푹신한 소파가 출렁였다. 그는 살짝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자신의 양 무릎에 팔꿈치를 기댔다. 발끝을 톡톡 두드리는 품새로 보아, 그 역시 산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별안간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했지만, 귓가를 날카롭게 찌르는 웃음소리는 어딘가 낯익은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흐렸던 산호의 초점이 하나로 또렷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정말 네가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옆에 앉은 장년의 남자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첫인사로 꺼낼 말은 아니었다. 산호는 천천히 남자를 돌아보았다. 장년의 남자는 눈인사를 하듯 산호를 마주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익숙한 버릇이었다. 산호의 눈썹머리가 잘게 찌푸려졌다.
“…진태석 회장.”
산호의 말에 진 회장은 가볍게 하하, 웃었다.
“이제는 존칭도 붙여주지 않는구나.”
산호는 진 회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VIP 병실 안에 가만히 누운 사람을 제법 많이 닮은 진태석 회장의 얼굴은 태연자약하고 여유로웠다. 보는 눈이 많아 편안한 차림으로 왔다. 구설수에 오르는 일은 질색이라.”
“…….”
“아. 내가 이곳에 올 이유가 없어서 말이다. 먼저 연 끊은 아들놈을 보러 오는 것도 우습지 않니.”
“…….”
“그래, 내가 널 만나러 올 만한 가치가 있겠니?”
산호는 딱딱히 굳은 입술을 애써 움직였다. 입술을 달싹이는 작은 움직임조차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마침내 낮은 목소리가 입술을 뚫고 새어 나왔다.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래.”
“선배는 내가 가질 거예요.”
진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좋을 대로 하려무나. 의절한 아들놈인데 누구와 함께하던 구태여 내가 알 필요가 있을까.”
그의 목소리는 사뭇 가벼웠다.
“하지만 이상하구나. 이제는 네게도 시우가 필요 없을 텐데. 가족도 버리고, 제 위치도 내걸은 녀석이니, 가진 것 전부를 잃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하느냐. 하물며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고. 네게 조금의 이득도 없을 텐데.”
“내가 가지고 싶은 건 선배예요. 이득 같은 게 아니라 선배 하나라고.”
산호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선배가 왜 가족을 버렸는지 저도 몰라요. 아니, 사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이젠 내가 아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겠어요. 선배가 무슨 마음이었는지도.”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적어도 속지는 않을 거예요. 회장님도 선배 포기하지 않았잖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게냐.”
“나를 만나러 왔으니까요.”
진 회장의 입매에는 가벼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입매를 매만지며 산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얄팍한 증오와 깊은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방해가 되는 것은 애초에 치워버린다. 하지만 방해가 되는 그것이 꽤 매력적일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 눈앞의 이 애처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진 회장은 다시 입을 뗐다.
“그래, 일리가 있는 이야기구나. 좋아. 어떻게 가질 셈인지 말해보거라. 감히 네가, 시우를.”
진 회장만큼이나 가벼운 어투로 산호가 대답했다.
“가둘 거예요.”
진 회장의 눈이 조금 커지는 듯하더니 금세 휘어졌다. 눈가까지 퍼진 웃음은 퍽 유쾌해보였다.
“가둔다?”
“네. 가둘 거예요. 선배는 누구한테나 탐나는 사람이니까. 난 선배를 탐내는 시선, 전부 다 싫어요. 아무도 못 보게, 나만 볼 수 있게, 나만 만질 수 있게 숨길 거예요.”
진 회장은 진심으로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가벼운 흥분감이 그의 얼굴 위에 떠올랐다.
“굳이 나에게 말해주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산호는 아랫입술을 콱 물었다 놓으며 또렷이 말했다.
“내기요. 아직 안 끝났잖아요. 그거 끝내려고요.”
“우리가 했던 내기는 그런 종류가 아니지 않니.”
“끝나지 않은 내기 대신에 저랑 거래해요.”
웃음기를 머금은 진 회장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새삼스럽다는 듯 산호를 바라보는 눈이 반짝였다.
“음, 거래라.”
“내가 선배를 가두고 꽁꽁 숨긴다고 해도, 회장님이 방해하면 당해낼 수 없겠죠.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회장님 눈을 피해 선배를 가두고, 선배까지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겠어요. 불가능해요.”
“그래서?”
“그래서, 회장님이 나를 도와줘야 해요.”
예기치 못한 허점을 찔린 것처럼 진 회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오래도록 누군가에게 빈틈을 내어준 적이 없었다. 불쾌하면서 동시에 얕은 쾌감이 일었다. 엉망이 된 약혼식 날 자신을 찾아온 시우가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우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아니, 맞았다. 이 애가 제법 마음에 든다. 진 회장은 곧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말이 되지 않는구나, 얘야. 거래라는 건 오고 가는 것이 있어야 하잖니.”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장사꾼이다. 장사꾼은 절대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않는다.”
산호가 진 회장의 흉내를 내듯 살짝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손해는 아닐 거예요. 절대로.”
“왜?”
“선배 앞에서 영영 사라질게요, 내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진 회장은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다. 일견 산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 같았다.
“3개월. 3개월만 선배랑 같이 있게 해주세요. 그다음엔 당신이 불쾌하다고 했던 일, 내 스스로 해줄 테니까.”
커다란 클럽의 룸 안에서 진 회장이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네가 숨통이 붙어있는 한 부득불 다시 시우의 앞에 나타날 수도 있지 않겠니. 그렇다고 널 죽이기엔… 그런 건 불쾌한 일이지. 진 회장의 미소가 옅게 흐려졌다. 그의 입매를 바라보며 산호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도 당신 아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나도 선배를 포기 못해. 당신이 날 괴롭히고 망가트릴 힘은 있겠지만, 난 망가져도 선배 옆에서 떠나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기억되는 편이 낫겠다고 선배 앞에서 죽어버리려고 했던 미친놈이니까, 내 말을 허풍으로 받아들이진 않겠죠.”
진 회장은 한동안 산호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머리카락만큼이나 새까만 눈. 하얀 도자기 인형은 이미 산산조각 내어 없애버렸다. 벌레가 꼬일 싹은 미리 잘라 없애는 편이 좋으니까. 그러나, 눈앞의 이 애는. 전혀 웃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음에도 진 회장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일주일로 하자꾸나.”
“그건-.”
“시우가 병원을 나선 후로 일주일. 의료진들은 시우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더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네게 시간을 더 줄 순 없다.”
“하지만…!”
얘야. 진 회장이 어린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니. 나 역시 시우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또 너를 괴롭힐, 망가트릴 힘이 있다고. 이건 거래다. 서로의 조건이 맞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게야.”
산호는 입술을 꾹 깨물며 진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장사꾼이었고, 장사꾼은 절대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않는다. 여유로운 그의 태도에서 확고함을 읽어냈다. 자신이 영영 시우 앞에서 사라진다고 다짐해도, 그건 고작 일주일의 시간을 얻어낼 가치밖에 되지 않았다. 진 회장에게 자신의 존재가 그랬다.
그래, 이대로 영원히 시우를 보지 못한 채 의미 없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애초에 블러핑한 카드를 늘어놓듯 3개월의 시간을 거래로 내놓은 것도 같은 이유다. 산호에게, 시우와 단둘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어떤 것보다 가치 있었다. 반쪽짜리인 자신 혼자 지리한 평생을 사느니, 짧은 불꽃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잿더미가 되는 쪽이 나았다.
그러니, 이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산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주일은 절대 방해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절대로.”
진 회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마. 네가 필요한 게 있다면 모두 다 도와주겠다. 외진 장소건, 돈이건, 무엇이건, 전부. 박 실장에게 부탁해 놓을 테니 어려운 것 없을게다. 다만, 너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 알겠니?”
산호는 허탈한 듯 픽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건 몰라도, 전 거짓말은 안 해요.”
진 회장은 빙그레 마주 웃었다.
***
병원을 나선 진 회장의 곁으로 블랙 슈트를 입은 남자가 가까이 다가섰다. 마치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다가오는 품새가 무척 익숙해 보였다. 그는 인도에 가까이 서 있는 리무진의 뒷좌석 문을 달칵 열었다. 진 회장은 자연스레 리무진 위에 올라타며 블랙 슈트의 남자에게 무감한 시선을 보냈다.
“박 실장.”
블랙 슈트의 남자, 규철은 고개를 숙이며 진 회장을 바라보았다.
“네, 회장님.”
“저 아이가 준비해달라는 건 전부 다 준비해줘. 무리한 것도 상관없으니 전부.”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진 회장이 말없이 규철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대답을 종용하는 몸짓이었다.
“아직 백산호는 진시우 이사님이 깨어나신 것을 모르긴 하지만… 일주일간 같이 있다가는 둘 사이의 연결에 대해서 알게 될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연결이라. 김 교수가 말했던 것 말이지. 한쪽의 상태가 다른 한쪽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는.”
“구태여 말씀드리면….”
“자네는 그 연결을 믿나?”
“…….”
“그래, 누가 알겠나. 학자도 아닌 우리는 더더욱 알 수 없지. 그 애들이 정말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신체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일지, 아니면 그저 우연에 불과할지 말일세. 뭐, 김 교수는 제법 확신하는 것 같았지만.”
“뿐만 아닙니다. 백산호가 이사님께 위해를 가하거나, 페로몬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진 회장은 빙긋 웃었다.
“그러니 자네가 필요한 것 아니겠나. 자네는 형질인이니까 저 아이가 무슨 짓을 벌이려 한다면 알 수 있을 테지.”
우성알파를 감금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수적일 터다. 여기서 ‘다른 이’란 규철을 의미했다. 규철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게. 이건 하나의 테스트일세. 혹은 보여지기 위한 퍼포먼스일 수도 있겠지.”
“…….”
“저 아이가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하군.”
진 회장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금 말을 보탰다.
“오늘 저녁에 김 교수와의 약속 잊지 말게. 각인에 대해 중요한 의견을 들어야 하는 자리이니 신경 써서 모시도록 하고.”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리무진 문이 달칵 닫혔다. 허리를 곧게 세운 규철은 멀어지는 리무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옅은 알파의 페로몬이 알 수 없는 표정을 띄운 규철의 주변으로 스며들었다.
***
[그리고 현재. 5일 전, 학교]
산호는 강의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어 섰다. 공기 중에 은은하게 떠다니는 포근한 흙냄새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감았던 눈을 떴다. 미친 듯이 뛰었던 심장이 일순간 차분히 가라앉았다. 시우가 깨어난 이후, 지난 한 달 내내 늘 생각해오던 순간이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망칠까 두려웠지만, 막상 이 순간이 다가오자 돌연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이 신기했다. 산호는 조용히 강의실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맨 뒷줄의 창가 자리. 하얀 얼굴이 저를 돌아보았다. 저를 향한 악의의 목소리에 다시 앞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제가 옆자리에 앉자 다시금 눈을 맞추어왔다.
“안녕하세요, 선배.”
자신의 목소리는 꾸며낸 것처럼 매끄러웠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소유욕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애닳음도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텅 빈 목소리였다.
“응? 어, 안녕.”
따뜻한 밤색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반달 모양으로 휜 눈가에 맺혔다.
“괜찮아요?”
자신의 안부를 묻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눈가가 조금 더 깊이 휘었다.
“응, 괜찮아. 고마워.”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였다. 여전히 다정한 눈이 저를 향해 있었다.
“기억 안 나요?”
살짝 갸웃하는 고갯짓이 무척이나 익숙했다.
“무슨 소리야?”
“정말 기억 안 나시나 봐요.”
산호는 시선을 거두고 앞을 바라보았다. 빔 프로젝터에 돌아온 불빛 때문에 눈가가 조금 시큰거렸다.
“괜찮아요. 전 기억하니까.”
하지만 정말로 괜찮았다. 자신이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
[3일 전, 호텔]
붉은 융단이 깔려있는 호텔 복도 밖으로 백산호가 위태롭게 쓰러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에서 시크릿 룸의 문이 쿵 닫히고 나서야 애써 지탱하던 무릎이 탁 꺾였다. 문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르 주저앉은 백산호의 손에는 텅 빈 주사기가 들려있었다. 아마도 진시우에게 주삿바늘을 찔러 넣은 모양이지.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을 보니 짐작이 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규철은 잠시 자리에 서 있었다.
규철이 서 있는 곳은 복도 끝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그는 이 며칠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백산호와 진시우의 주변을 맴돌았다. 백산호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자신을 찾아오길 무척 꺼려하는 듯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약물이 필요한 경우라던가.
규철이 백산호의 부탁으로 구비해온 약물은 대체로 합법적인 것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불법적인 루트로 들여온 약물도 더러 섞여 있었다. 백산호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약물의 복용법이나 부작용 같은 것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거나, 위험해 보이는 약물을 발견하면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는 것이다.
‘선배한테 이런 쓰레기를 어떻게 먹이라는 거야.’
웃기는 얘기였다. 진시우는 우성 알파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건장한 사내였고, 그런 그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약물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위험 등급도 올라가게 마련이었다. 강력한 진정제가 필요하다기에 규철이 구해온 진정제는 직접 혈관에 주사해야만 하는 종류의 약물이었다. 규철이 내민 약물을 멀끔히 바라보던 백산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옷을 팔꿈치까지 둘둘 말아 올렸다. 망설임 없이 제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으려는 백산호를 보며 규철은 그의 손을 덜컥 잡아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백산호는 의아한 눈으로 규철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강력한 약물이잖아요. 선배한테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확인해보려는 건데.’
미쳤다. 백산호는 완전히 미쳐버린 게 분명했다. 말간 얼굴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런 말을 했다. 진시우가 깨어진 접시 조각으로 제 생살을 찢은 후에는 더 그랬다. 솔직한 말로 심사가 뒤틀리는 일이었다.
“하, 아….”
규철은 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가쁜 숨을 토해내는 백산호를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눅눅한 흙냄새가 짙어졌다. 진시우의 페로몬이었다. 진시우가 쏟은 페로몬은 백산호의 몸에 엉겨 붙은 채 거머리처럼 하얀 몸을 꾸물꾸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예민한 오메가의 성감을 자극하고 있을 그 페로몬이 무척이나 짜증스러웠다.
“…….”
규철은 주저앉은 백산호의 팔을 거칠게 휘어잡았다. 억지로 그를 일으켜 세우기까지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숨을 몰아쉬던 백산호는 규철의 손이 닿자 눈을 번뜩 떴다. 자신을 바라보는 백산호의 눈에는 혐오감이 배어있었다.
“읏, 이거 놔.”
거칠게 규철을 뿌리친 백산호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욕정하는 남자의 페로몬을 뒤집어쓴 탓에 잔뜩 달아오른 주제에. 그런 몸을 하고 저를 안을 준비가 되어있는 눈앞의 알파는 무시하는 꼬락서니가 아니꼬웠다. 이런 오메가에게 손대지 않는 진시우도 아니꼽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실패했네요, 백산호 씨.”
그러게 진시우가 아닌 아무 알파에게나 안기면 편할 것을. 백산호는 자신이 얼마나 정복욕을 불러일으키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른 말로, 제 가치를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백산호가 조금만 머리를 굴린다면 남부러울 것 없이 평생을 살 수 있을 텐데. 규철은 그가 한심했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안달이 났다. 비아냥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규철은 입을 열었다.
“가없기도 하지. JR 호텔로 진시우를 옮길 때 조금은 기대했을 거 아닙니까. 혹시 함께 묵었던 시크릿 룸이라면 진시우의 기억이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닥쳐요.”
백산호는 저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규철은 비죽 솟는 욕구를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같은 우성 오메가가 페로몬 풀고 다리까지 벌려가며 유혹하는데, 꼼짝하지 않는 걸 보면 알 거 아닙니까. 진시우는 절대로 당신을 안지 않아. 당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닥치라고 했어요.”
“내 말이 틀립니까? 진시우가 당신에게 품었던 마음이 사랑일 리 없지. 심지어 이제는 당신을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규철은 자신이 백산호 앞에서 저답지 않게 많은 말을 쏟아낸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인지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자신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백산호를. 그리고 진시우를.
사실 규철이 백산호를 만난 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오래도록 재계의 뒷일을 수습하는 역할을 해온 그였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어린 나이에 일을 배우기 위해 처음 재계에 발을 들였을 때, JR의 진태석 회장이 특정 오메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손을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오메가가 정재계의 누구와도 연을 맺지 못하게끔. 부유한 재벌가에서 오메가를 집안에 들이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고, 그 과정에는 트러블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진태석 회장의 지시는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진태석 회장의 눈 밖에 났다는 그 오메가를 먼발치에서 처음 봤을 때, 규철은 의아함을 느꼈다. 저 아이가 왜 진태석 회장의 미움을 받았을까. 탐냈다면 또 모를까, 일부러 멀리하는 이유가 대체 뭐지?
그 아이를 다시 보게 된 건, 진태석 회장의 일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규철은 오래도록 JR 일가를 맡아온 정지환 실장을 배제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지환 실장은 진시우를 위해 일했고, 진태석 회장은 정지환 실장에게 지시할 수 없는 것을 자신에게 지시했다. 우습게도 그것의 대부분은 진태석 회장의 미움을 받았던 오메가, 백산호에 관련된 일들이었다.
규철은 백산호가 맹목적으로 진시우를 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시우처럼 완벽한 사람이 백산호의 마음까지 차지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은, 끔찍하게 속이 뒤틀렸다.
“박규철 실장님.”
백산호가 가만히 저를 불렀다. 나긋한 목소리였다. 관심이 없는 대상을 부를 때, 백산호의 목소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철저한 무관심. 그 의도된 무관심이 얼마나,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도 모른 채. 규철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자, 백산호는 살짝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진시우에게 옮아온 버릇이었다.
“닥치고 시키는 일이나 하세요.”
“…….”
“진태석 회장이 당신한테 지시한 일은 내 부탁 들어주라는 것뿐이었을텐데. 쓸데없는 말 지껄이라는 게 아니라.”
규철의 눈썹이 좁게 찌푸려졌다. 조롱조의 목소리에 또 한 번 비죽, 욕망이 솟구쳤다.
“백산호 씨. 벌써 일주일의 반이 지나갔다는 건 알고 있으시겠죠.”
“…….”
“애초에 같이 갇힌 척 진시우를 속여 경계를 허물려고 했던 것도 실패했고. 이제 진시우가 벗어나려고 하는 것을 막는 데 급급할 뿐이잖습니까. 그 꼴을 지켜보는 것도 3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용건이나 말해요. 그쪽이랑 말 섞는 거 불쾌하니까.”
차가운 목소리에 규철은 잇새를 꾹 물었다. 건방진 오메가. 가진 거라곤 탐스러운 몸뚱이밖에 없는 주제에. 머릿속은 온통 진시우로 가득 차서 완전히 망가져 버렸으면서, 끝까지 도도하게 구는 저 오메가를 망가트리고 싶었다. 뭐, 이미 망가지기는 했다만.
“이게 용건입니다. 백산호 씨, 당신의 쓰레기 같은 현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려는 게.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건 시한부 판정 받은 소꿉놀이에 불과하다는 거, 당신이 잊지 말았으면 해서.”
백산호는 일순 굳었던 표정을 풀어내며 큭, 하고 웃었다. 살짝 숙여졌던 턱이 바로 들리면서 까만 눈동자가 규철을 향했다.
“소꿉놀이?”
“소꿉놀이지 뭡니까. 그럼 사람 가둬 놓고 무슨 신혼 생활이라도 하는 줄-“
“당신이야말로 그 소꿉놀이 나랑 하고 싶어서 안달 났잖아.”
규철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백산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말간 얼굴에 비죽 솟은 입꼬리는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발정 난 눈으로 은근히 나한테 페로몬 묻히는 거 설마 모를 줄 알았어? 소용없어. 선배 페로몬 위에 당신 페로몬 덧입히려고 해봤자, 역겹기만 하거든.”
아득 소리가 날 정도로 규철은 이를 세게 물었다. 백산호는 다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나나 선배한테 관심 꺼요. 천박하게 호기심 가지지도 말고. 선배가 기억을 찾던 말던….”
백산호 역시 문득 입을 다물었다. 무성의했던 목소리가 뚜렷한 감정을 띠며 백산호의 입술을 뚫고 새어 나왔다.
“선배가 기억… 찾지 못하길 기도나 해요.”
전구의 불이 꺼지는 것처럼 백산호의 얼굴에 차올랐던 감정도 순식간에 꺼졌다.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는 백산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규철은 입을 다물었다.
기억을 찾지 못하길 기도하라고…? 무슨 의미지? 진시우가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란 것 아니었나? 백산호는 진시우를 가지고 싶은 소유욕에 미쳐서, 집착에 완전히 미쳐버려서 제 스스로 차도로 뛰어든 미친놈이었다. 그런데, 왜?
그다음 날, 백산호는 진시우를 잡아두기 위해 일부러 계단을 굴렀다. 진시우는 다친 백산호를 버리고 도망가지 못했다. 백산호는 다시 진시우를 가두는 데 성공했다. 머리가 찢어져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백산호는 규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응급처치를 위한 붕대와 약을 받아 갔을 뿐이었다. 누구의 응급처치를 위한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백산호는 오랫동안 시크릿 룸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긴 시간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규철은 조금 애가 탔다.
또다시 그다음 날, 꾹 닫힌 문 너머 알파의 페로몬이 요동치는 게 규철에게도 느껴졌다. 오래도록 백산호가 룸을 나오지 않아, 문 앞까지 서성거린 탓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 정도 페로몬이라면, 진시우의 러트 사이클이 시작된 게 분명했다. 백산호는 아직도 룸 안에 있었다. 러트를 보내는 알파와 한 공간에 있는 오메가. 상황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백산호는 정말 진시우가 자신을 기억하지 않길 바라는 걸까. 자신을 기억해내면, 진시우가 죄책감을 느낄 것이 두려워서…? 웃기는 얘기였다. 진시우를 가지고 싶어 완전히 미쳐버린 새끼가, 그런 이타적인 생각을 할 리 없지. 규철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
[다시 현재]
문 앞에 웅크리고 누운 산호를 안아 든 시우는 그를 가만히 침대 위에 눕혔다. 조금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산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산호야.”
“…….”
“내가 널 좋아했어?”
“…….”
“우리, 무슨 사이였어?”
“…….”
“왜 내가 이렇게 너를 안고 싶은지, 그리고 그걸 왜 이렇게까지 참고 있는지. 왜… 너를 안는 게 이렇게 무서운지, 기억나게 해줘.”
단단히 갇혀있었던 기억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얄팍한 빛 한줄기도 새어 나오지 못할 만큼 작은 균열이었다.
“……선배.”
“…응.”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거, 해봐요.”
“…….”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금 제일 마음 가는 거 해보라고.”
언젠가, 이 애가 같은 말을 했었다. 화려한 거리 앞이었다. 그때, 나는 이 애한테… 자그마했던 균열은 점점 틈새를 벌려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무언가 물밀듯이 쏟아져 내렸다. 지난 1년 동안의 기억이었다. 시우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호에게로 허리를 숙여왔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조심스레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연약한 피부의 점막이 서로에게 닿았다.
“…선배.”
“…….”
“나도 알고 싶어요. 선배가 날 좋아했는지.”
“…….”
“아니면 그냥 내가 불쌍했었던 건지.”
“…….”
“기억 못해도 괜찮아요.”
“…….”
“내가 다 기억하니까.”
가까이 다가선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간지러운 촉감이 일었다. 달콤한 숨도 계속해서 쏟아졌다. 시우는 산호의 얼굴 옆, 침대를 지탱하고 있는 자신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꾸욱 쥐어지는 주먹 안으로 하얀 침대 시트가 구겨졌다.
“…백산호.”
두 얼굴이 가까이 마주하고 있었기에, 시우는 산호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억을 잃은 동안, 또 이곳에 갇혀있던 6일 동안, 시우는 단 한 번도 온전한 산호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반쪽짜리 이름만을 불렀을 뿐이었다.
어깨를 파득 떨며 산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시우는 산호를 저지하듯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허리를 조금 세우니 가까이 닿았던 얼굴도 살며시 멀어졌다. 시야에 산호의 얼굴이 고스란히 맺혔다. 하얀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이었다.
“백산호.”
다시금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산호의 눈이 조금 더 크게 뜨였다. 눈꼬리가 천천히 달아올랐다.
“이름… 내 이름… 누구한테 들었어요?”
내내 자신을 가둬놓은 사람이 하기에는 어색한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망연히 물어오는 산호를 바라보며 시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심장이 뭉크러졌다.
“네가 알려줬잖아. 1년 전에 학교에서.”
“…선, 배?”
“내가 사준 연고, 그거 억지로 받아서 손에 꼭 쥐고선.”
커졌던 산호의 눈동자가 가늘게 일그러졌다. 바르르 비틀리는 눈가는 당황한 것인지, 고통스러운 것인지, 혹은 기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느 쪽이던 간에 커다란 감정이 파도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시우는 산호의 눈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다른 사람 말고, 너한테 직접 듣고 싶었어. 네 이름.”
“기억… 기억해요?”
“응. 기억해. 기억났어.”
입술에 닿은 산호의 눈가가 뜨거웠다. 시우는 엄지로 산호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척척하게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밀려나자 하얗고 곧은 이마가 드러났다. 눈가에 닿았던 입술을 움직여 이마에 대 보았다. 보드라운 이마는 마치 달군 쇠붙이처럼 뜨거웠다.
“그동안 혼자 기억하느라… 많이 힘들었어?”
입술이 다시금 움직여 오똑한 콧잔등에 닿았다. 도장을 찍듯 꾸욱 눌렸던 입술이 스르르 미끄러져 동그란 콧방울에 닿았다.
“…선배, 으, 흑….”
살짝 이를 내어 콧방울을 깨물었다. 읏, 짧은 신음소리가 터졌다. 야살스러운 신음이었다. 작은 자극에도 몸이 예민하게 반응한 탓이었다.
“…….”
“…….”
입술에 맞닿은 피부가 뜨거운 열을 품은 것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신음을 흘리는 것도 한 가지를 의미했다. 산호가 달뜨기 시작한 제 몸을 견디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산…호야…?”
공기 중으로 오메가의 페로몬이 빠르게 섞여 들었다. 산호가 누운 침대는 알파가 꼬박 하룻밤 러트를 보낸 곳이었다. 산호 역시 러트를 보내는 알파의 지근거리에서 꼬박 하루를 지새웠다. 시우의 러트가 산호로 인해 당겨진 것처럼, 산호 역시 시우의 러트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살짝 벌어진 시우의 입술이 콧방울 아래로 떨어져 산호의 입술에 닿았다. 아랫입술을 깨문 산호의 입술을 부드럽게 덮었다.
“흣, 으.”
그리고 달래듯 깨물린 입술 위를 더듬었다. 하아, 참지 못한 숨이 터져 나오며 산호의 입술이 벌어졌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두 입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감히 제 욕망을 밀어 넣지 못한 시우의 혀가, 애타는 듯 산호의 아랫입술 선을 핥으며 멀어졌다.
“선배 저….”
자신의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 것을 산호 역시 깨달았다. 시우는 고개를 들어 산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열에 들뜨기 시작한 얼굴을.
“산호 네 페로몬… 너무 단데.”
“아, 흐… 선, 배. 빨리….”
“뜨거워, 산호야. 네 몸 전부 다 뜨거워.”
속삭이는 목소리에 견디기 힘들었는지, 산호는 시우의 어깨에 매달리며 콱 손톱을 박아넣었다. 시우는 송골송골 땀이 맺힌 산호의 이마를 다시금 훔쳐냈다.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시우 역시 밭아진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억제제 어디 있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산호의 눈가가 온통 발긋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벌어진 입술은 타액으로 반질반질했다. 산호가 힘겹게 눈을 올려 떴다. 시우의 입맞춤이 촉진제 역할을 한 걸까, 견디기 버거웠다. 시우는 인내하듯 이를 꾹 사리물었다.
“억, 제제… 그러니까, 억제제는….”
산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침대의 시트를 세게 움켜쥐었다. 유예기간 없이 빠르게 시작된 히트 사이클은 고통을 동반했을 터다. 갑자기 퍼진 고통을 참기 위해 산호의 아랫입술이 다시 콱 깨물리자, 시우는 엄지로 산호의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물리적인 힘에 의해 벌어진 입술에서 더운 숨이 쏟아졌다.
“밖에 나가, 밖에 나가야 돼요. 박규, 철 실장한테….”
시우의 손은 아직 산호의 입술 위에 올라가 있었다. 시우의 손끝에 조금 힘이 실렸다. 벌어진 산호의 입술 새가 조금 더 벌어져 촉촉한 혀끝을 내보였다. 시우의 눈썹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밖에…이 상태로 밖에 나간다고? 어딜.”
“박규철 실장, 근처에 있을, 텐….”
“그동안 묻히고 있던 다른 알파 냄새가 그 사람 거였어…?”
산호에게 묻어있던 다른 알파의 냄새를 기억해냈다. 바닷가에서 나는 옅은 물 냄새. 비릿한 향이었다. 별안간 짙은 흙냄새가 바다를 메워버리려는 듯 훅 퍼져나갔다.
“하, 아읏…! 선배, 저 지금….”
“안돼, 이렇게 못 내보내.”
그것도 다른 알파 앞으로는, 절대로.
산호의 눈꼬리에 물기가 빠르게 고였다. 별안간 퍼진 시우의 페로몬이 몸을 덮쳐온 까닭이었다. 귓바퀴를 향해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자신의 오메가가.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은 알파의 러트 사이클보다 더욱 큰 고통을 동반했다. 산호 역시 저처럼 억제제를 미리 복용하지 않았으니, 이 순간이 몹시도 괴로울 것이다. 고통을 잠재워 주고 싶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알파와의 교합. 하지만, 이 애를 함부로…
“…선배. 나, 안, 아주면 안 돼요…?”
오메가의 페로몬은 시우를 보채듯 조금 더 농밀해지기 시작했다. 산호의 까만 눈동자에 비치던 이성도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리며 산호가 말했다.
“안, 안아주세요. 제발.”
“산호야, 너 지금.”
“알아, 요. 선배가 나 사랑하지 않는 거.”
말을 이으려던 시우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잘게 찌푸려진 눈가가 산호를 향했다. 심장이 따끔하게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사랑하지 않는 사람, 안고 싶지 않, 겠지. 알…아요.”
“지금 무슨….”
“모두에게 다정한 선배가, 나한테도 평범한 호의, 읏, 호의를 나누어 줬을 뿐이라는 거. 어쩌면 동정이나 연민 같은 마음, 이었을, 뿐이라는 거. 나도 안, 다고.”
“백산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간, 으흣… 얼마 안 남았는데.”
무슨 시간을 말하는 거지? 시우의 미간이 조금 더 깊이 패였다.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안아주면 안 돼요?”
오메가의 페로몬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알파의 페로몬이 모두 사라지지 않은 공간에 피어오른 오메가의 페로몬은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빠르게 공간을 헤집었다. 허리를 뒤트는 산호를 시우는 세게 끌어안았다. 침대에 눕혔던 몸이 바로 들리고, 산호의 등 뒤로 시우의 단단한 팔이 감겼다. 숨이 막힐 정도로 거센 포옹이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이 맞닿은 채 쿵쿵 뛰었다.
“나, 기다리는 거 잘해. 그래서 네가 대답해 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
시우는 산호를 끌어안은 자신의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매끈하게 젖은 목덜미에 가까이 닿은 입술이 속삭이듯 달싹였다.
“내가 캠핑장에서 물었던 거 있잖아.”
“…으응.”
“대답, 해줘. 산호야. 지금 대답해줘.”
저를 안은 팔이 갑작스레 탁, 힘을 풀어버린 탓에 산호의 상체가 살짝 휘청였다. 시우는 단단히 산호의 어깨를 받치고는 시선을 맞추었다. 까만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있었다. 따뜻한 밤색의 눈동자가 가만히 까만 눈동자를 응시했다.
“백산호.”
“…….”
“나 좋아해?”
정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조그마한 끄덕임이었다.
“좋… 좋아해. 좋아해요. 선배. 선배만 좋아했어. 처음부터, 선배 말고는-.”
바로 앉혔던 산호의 몸이 다시 풀썩 뒤로 눕혀졌다. 침대 매트리스가 출렁이기도 전, 시우의 몸이 성마르게 산호의 위로 겹쳐졌다. 묵직하게 체중을 실은 단단한 몸은 산호의 다리를 가르고 그 사리에 자리했다. 사뭇 다급한 손이 산호의 셔츠를 끌어 올리며 안으로 침범했다. 매끄러운 피부를 따라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한 번만 더 말해줘.”
“흐응… 으, 선배.”
“산호야, 한 번만 더.”
두꺼운 몸이 내리누르는 감각은 황홀한 속박이었다. 산호는 연신 밭은 숨을 몰아쉬며 제 위에 오른 시우를 바라보았다.
“페로몬 때문이 아니라, 사이클 때문이 아니라. 정말 내가 좋아서.”
야트막한 가슴을 모조리 덮을 듯 커다란 손이 닿았다.
“그래서 안아달라고 하는 거라고. 한 번만 더 말해줘.”
산호의 허리가 가쁘게 들썩였다. 침대와 몸 사이에 틈새가 벌어지자 체중에 눌려있던 셔츠가 단번에 위로 말려 올라갔다. 하얀 가슴이 시우의 단단한 가슴과 맞닿았다.
“으, 응… 안, 아주세요. 세게….”
시우는 산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불만스럽다는 듯 작게 도리질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어깨에 마찰했다. 가려움일지 모를 찌르르한 감각이 손끝으로 퍼져나갔다. 산호가 한 번 더 허리를 들썩였다. 다시 침대와 몸 사이에 틈이 벌어지자 시우는 셔츠를 더욱 위로 끌어올렸다. 산호의 팔이 셔츠 사이를 쑥 빠져나갔다. 셔츠가 말끔히 벗겨지면서 잠시 가려졌던 산호의 얼굴이 다시 드러났다. 눈물로 짓물은 눈가가 새빨갰다. 지독하게도 야한 얼굴이었다.
“안아주세요, 말고.”
시우에게도 인내할 여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답지 않게 대답을 종용하며 시우는 쇄골 아래 길게 가로그어진 흉터에 입술을 묻었다. 주철이 휘두른 칼이 남긴 흉터였다. 흉터 같은 거, 남아도 상관없어. 이것마저도 너무, 너무 예뻤다.
“좋…아해. 선배.”
“응. 산호야, 산호야… 나ㄷ….”
“아니, 선배. 저, 흐읏, 좋… 아, 아니, 사, 랑.”
억눌린 목소리가 조각진 단어를 뱉었다. 흉터 위에 정성스레 입을 맞추던 입술은, 자신도 좋아한다는 대답을 담으려는 순간 움칠 다물렸다. 발아래가 쑥 빠지는 것마냥 심장이 요동쳤다.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심장에 깊숙이 박혀왔다.
“…응?”
단전에 빠르게 흥분이 고여가는 것이 느껴졌다. 더는 견디기 어려운지 산호는 다시금 시우의 어깨에 쿡 손톱을 세워 박아넣었다. 어깨에 미세하게 느껴지는 따끔한 감각이 현실감을 일깨웠다.
“사랑해요, 나 엉망으로 망가트려도 상관없어요.”
“…….”
“선배라면, 어떻게 해도….”
시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산호의 턱을 콕 깨물었다. 읏, 신음을 뱉은 산호가 눈을 아래로 내려떴다. 산호만큼이나 흥분으로 물들어 있었음에도, 시우는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웃었다.
“싫어.”
“선, 배.”
“안 망가트려. 절대로 안 그래.”
“…응, 으….”
“소중한 건 그렇게 대하는 거 아니야.”
짐승이 가르렁거리는 듯한 울음이 들렸다. 산호의 가슴에 이마를 묻고 시우는 잠시간 침음했다.
“나, 사실 거짓말했어.”
“…네?”
“나 참는 거 잘 못해.”
“무슨…?”
“이젠 잘 못 참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딱딱하게 부피감을 키운 아래가 더욱 몸집을 부풀렸다. 맥이 거칠게 뛰는 커다란 살기둥이 바투 붙은 산호의 여린 허벅지살을 짓눌렀다.
“전, 괜찮, 은….”
“그래도 산호야, 내가 너무 거칠게 굴면.”
시우는 자신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여기, 물어뜯어도 좋아. 오메가가 알파에게 각인을 새기는 페로몬 샘 위였다. 시우의 어깨를 주욱 긁으며 산호의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페로몬 샘을 짚은 시우의 손 위를 덮었다. 산호의 손끝이 이번엔 손등에 박히는 순간, 시우는 으르렁거리듯 목울대를 울리며 산호의 목덜미를 물었다.
“하, 아악…!”
각인하듯 이를 내어 깨문 것은 아니었지만, 연약한 피부를 빨아올리는 힘은 거셌다. 손등을 덮은 산호의 손을 뒤집어 그대로 깍지를 꼈다. 커다란 손에 도리어 잡아먹힌 산호의 손은 마디가 새하얘질 만큼 꾸욱 마주 쥐어졌다.
“산호야, 여기 너무.”
“흣, 으응…?”
산호의 목덜미를 강하게 빨아올리다가 툭, 풀어내고 다시 느른하게 핥기를 반복했다. 붉은 울혈이 빠르게 맺혀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흥분이 일었다.
“너무 달다.”
“아, 흐읏… 달, 아요?”
동그란 어깨에 입술을 쪽쪽 찍으며 시우가 으응, 대답했다. 깍지를 끼지 않은 손이 판판한 가슴을 넓게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살결 위에 도도록하게 튀어나온 돌기가 툭툭 걸렸다. 기다란 손가락은 장난스럽게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돌기 위를 수차례 왕복했다. 톡톡 손가락이 튀어 올랐다.
“하, 으… 거기. 으응.”
“여기?”
“흣, 선배… 거기….”
“응. 여기는 더 달 것 같아.”
어깨에 연신 찍던 입술을 아래로 불쑥 내렸다. 수줍게 선 유두를 단번에 입 안으로 머금었다. 야트막한 언덕처럼 도톰하게 올라온 유륜 위에 유두가 바짝 발기했다. 그것은 곧 시우의 혀끝에 짓눌렸다.
“아, 아…!”
살이 오른 과일처럼 탱글한 돌기가 달아올랐다. 장난스러운 혀놀림에 희롱당하면서 발긋한 색을 띠기 시작했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유두를 쓰다듬으며 둥글게 원을 그리자, 산호의 입이 갸름한 동굴을 만들며 벌어졌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타고 지익, 타액이 흘렀다.
시우는 가늘게 뜬 눈을 올려 산호를 바라보았다. 산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아, 미치겠다.”
깍지 낀 손이 시우의 손등을 애처롭게 긁어댔다. 조금 따끔한 감각이 일었지만, 그마저도 기꺼웠다. 시우는 다른 손으로 입에 물지 않은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비틀었다.
“아, 선…! 너무 이, 상….”
“깨물고 싶은 거 참고 있는데, 산호야. 그런데 왜 자꾸 보채.”
씹어 먹고 싶게. 시우가 손끝을 세워 유두를 긁어내리자, 산호의 허리가 다시 한번 튕겨 올랐다. 그 바람에 하체가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시우는 날름 내민 혀로 톡톡 돌기를 굴리며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너무 뜨겁다.”
산호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허리를 비트는 통에 아래가 뭉근하게 비벼지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온통 아래를 덥히고 있었다. 커다란 손은 매끄러운 피붓결을 따라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오목하게 패인 명치를 꾸욱 누르고 새하얀 대리석처럼 흠결 없는 피부 위를 기어가듯 움직였다. 마침내 시우의 손끝에 산호의 팬츠 밴드가 걸렸다. 시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허리 들어봐.”
으응, 울음소리를 내며 산호가 허리를 들어 올렸다. 밴드에 걸린 손가락이 힘을 주어 아래로 움직였다. 속옷과 팬츠가 한꺼번에 툭 떨어졌다. 굽어있는 무릎에 살짝 걸렸지만, 산호가 움찔 떨며 무릎을 펴자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우는 자신의 몸을 조금 더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얀 허벅지가 두꺼운 몸을 감싸지 못하고 활짝 벌어졌다. 시우는 눈썹을 잘게 찌푸렸다.
“이러고 어떻게 밖에 나갈 생각을 했어.”
“선배, 가, 으흐… 억제제….”
커다란 손이 부드러운 허벅지를 세게 움켜쥐었다. 살성이 여린 피부는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다른 사람이 너, 이러는 거.”
벌을 주기라도 하듯 거세게 허리를 쿵 짓쳐 넣는다. 벌어진 다리가 나풀, 허공을 내저었다.
“이렇게 예쁘게 구는 거 보면 어떡해.”
“아니, 안… 안 그래요.”
“응, 안돼. 아무도 보여주면 안돼.”
빨갛게 달아오른 허벅지를 위로 치켜올렸다. 안쪽 여린 살에 입술을 대며 시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만 보여준다고 약속해.”
“…흣.”
“빨리.”
뾰족하게 세운 혀가 허벅지 안으로 주욱 미끄러졌다. 흐으응. 대답 없이 신음을 흘리는 산호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츠읍,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옴칠 다물렸던 구멍이 벌름대기 시작했다. 짙은 페로몬이 주변을 촘촘히 메웠다. 애액이 스며들기 시작해 반들거리는 구멍은 끊임없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시우의 혀가 가까이 다가가자 발발 떨던 산호의 허벅지가 확 오므려졌다. 긴장을 한 탓일까. 시우는 힘을 주어 다리 사이를 밀어냈다. 위로 들렸던 하얀 다리가 V자 모양으로 더 넓게 벌어지며 허리도 더 높이 들렸다.
“대답 안 해주네.”
“읏.”
“대답 안 해줄거야?”
“하지, 마요… 선배, 하지 마아….”
아직 은밀한 곳에 입술이 닿지도 않았는데, 산호는 울먹이는 소리를 했다. 달콤한 애액을 빨아먹고 싶은 듯 갈급했던 입술이 우뚝 멈추었다. 부끄러움이 묻은 목소리가 사뭇 귀여워 시우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를 세워 허벅지 가장 안쪽, 여린 살을 잘근 씹었다. 하악, 소리를 내며 산호의 허리가 둥글게 휘었다.
“말했는데. 나 잘 못 참을지도 모른다고.”
허공에 뜬 두 다리가 짧게 떨었다. 산호의 발끝이 바짝 오므려졌다. 시우는 세웠던 허리를 다시 굽혀 산호의 가슴 위에 제 몸을 포개왔다.
“그래도 참을까.”
“흐응.”
“네가 하지 말라는 건 안 하고 싶은데, 산호야.”
스스로도 제 말이 밉살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품 안에서 바르르 떨고 있는 이 애를 보니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이다. 산호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며 시우는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나, 하지 마?”
“아, 으… 선배.”
“아까는 안아달라고 했으면서. 세게.”
“…아.”
“나 정말 하지 마?”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저를 놀리듯 속삭이는 시우가 야속했는지, 산호는 시우의 등을 세게 끌어안았다. 언제 깍지 낀 손이 풀어졌을까, 눈치도 채지 못했다. 제 등을 긁는 산호의 손이 사뭇 매서웠다.
“야, 얄밉게, 굴지 마요.”
큭 웃으며 시우는 다시금 산호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약속도 안 해주고, 하지 말라고만 하니까. 난 하고 싶은데.”
별안간 산호의 손이 시우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약한 힘이었지만, 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보니 시우의 셔츠를 벗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시우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산호 네가 이렇게… 손버릇 나쁜 줄 몰랐어.”
꾸물꾸물 올라가던 시우의 셔츠는, 그 말에 홱 위로 치솟았다. 단번에 벗겨진 셔츠가 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셔츠를 벗기 위해 잠시 세웠던 허리를 굽히려는데, 산호가 팔꿈치로 침대를 받치며 제 몸을 먼저 일으켰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이 원망스러운 듯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산호는 제가 만든 울혈을 목덜미 구석구석 매단 채였다. 제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유두 역시 발갛게 달아올라 도도록하니 서 있었다. 하, 시우는 얕은 탄성을 뱉었다. 이젠 참으라고 해도 못 참을 것 같은데.
“내가… 할래.”
산호가 대뜸 팔을 쭉 뻗어 시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단단하게 힘을 받아 부풀려진 샅 위에 달뜬 제 얼굴을 맞대면서였다. 부드러운 뺨이 발기한 성기 위를 문질렀다. 오똑한 코가 성기에 짓눌렸다. 아, 짧게 침음하며 시우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거, 내 안, 에 넣어… 줄 거죠.”
음란한 말이었다. 시우는 눈썹을 조금 더 찌푸리며 산호의 작은 머리 위에 큰 손을 올렸다. 손가락 사이에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걸렸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산호는 제 뒷머리를 쓰다듬는 시우의 손길을 느끼듯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뺨을 비벼댔다. 흡사 만져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반쯤 감겼던 눈이 위로 향하자, 시선이 마주쳤다. 산호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에 울컥 힘이 실렸다.
“으응… 나, 선배 좆, 빨아도 돼요?”
아. 찌푸린 눈썹이 산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산호는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여 팬츠 안에서 꿈틀대는 제 귀두 끄트머리를 물고 있었다. 단번에 팬츠와 속옷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이미 오래전에 발기한 성기는 답답한 속옷을 벗어나자 꼿꼿이 몸체를 세웠다. 퉁, 튕겨져 나오며 산호의 뺨을 툭 치고 만다. 제 뺨을 때린 커다란 성기를 바라본 산호는 잠시 멈칫했다. 제 생각보다 더 크고 우람했다. 단단한 살기둥을 따라 입술을 대며 산호가 우물우물 말했다.
“더한… 말, 도 할 수 있는데.”
하, 이번에는 조금 더 큰 헛웃음이 터졌다. 힘이 실렸던 커다란 손은 다시금 다정하게 산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봐, 더한 말.”
속삭이듯 말했다. 산호가 입을 빠끔 벌렸다. 동그랗게 벌어진 입동굴 안으로 커다란 귀두가 빨려 들어갔다.
“읏.”
산호의 입 안은 뜨거웠다. 그리고 부드럽고, 축축했다. 작은 입이 품기에 버거운 귀두를 어렵사리 무느라 입술 끝으로 타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산호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반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데, 산호는 계속해서 성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귀두가 산호의 혀를 주욱 긁는 것이 느껴졌다.
“우웁….”
꾸역꾸역 밀고 들어가던 귀두가 마침내 목구멍에 닿았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로 흘렀지만, 산호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멀어졌다가, 다시 앞으로. 이번에는 조금 더 멀어졌다가 다시 앞으로. 진자운동은 속도를 조금씩 높여갔다. 귀두만 입에 담을 정도로 빠져나왔던 성기가 움찔 맥동하자, 산호는 조금 다급하게 얼굴을 처박았다. 뿌리까지 삼킨 성기가 쾅, 목구멍에 박혔다. 그러잖아도 좁은 목구멍이 확 좁아지면서 귀두 끝을 콱 조였다. 끌어안듯 산호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시우의 손에 불끈 힘줄이 돋았다.
하아, 아. 산호는 혀를 길게 내며 제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시우의 성기를 천천히 입 밖으로 꺼냈다.
“…맛, 있어요.”
“…백산호.”
“맛있어요, 선배 자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산호를 내려다보는 시우의 눈꼬리가 빨갛게 익었다. 이 애를, 이 애를 어떻게 해야 할까. 시우의 입술이 깨물리는 것을 보며 산호가 입을 열었다.
“내 입… 엉망으로 쑤셔 주, 세요.”
“백산호, 너.”
“나, 목… 구멍 열고 잘, 받을 수 있….”
시우가 제 허리를 안은 산호의 팔을 대뜸 풀어냈다. 침대 위로 강하게 떠밀자, 산호의 몸은 다시 풀썩 뒤로 눕혀졌다.
“너.”
터질 듯한 감정이 끓어오르는 목소리였다. 단단히 제 양 팔 사이에 산호를 가두곤 시우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이런 말 누구한테 배웠어. 그런 말….”
산호가 저를 가둔 시우의 팔을 약하게 긁어내리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오메가, 아르바이트할 때.”
“뭐?”
“이런 말, 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요. 만날, 때…마다.”
“…하.”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들어주기, 만… 하으읏…!”
씨발, 음산하게 욕설을 뱉은 시우는 산호의 귓바퀴를 아득 깨물었다. 조금 아플 정도로. 산호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허리를 뒤틀자 작은 공간이 벌어졌다. 그 틈으로 시우의 커다란 손이 불쑥 들어왔다. 커다란 손은 산호의 하얀 엉덩이를 사납게 쥐었다.
“그게 어떤 새낀데.”
“아, 흣. 아파요.”
커다란 손에 감긴 하얀 둔덕은 터질 듯 꽉 쥐어졌다. 손바닥 모양으로 발갛게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잠시 힘을 풀었다가도 다시 거세게 움켜쥐는 손짓은 짐짓 무척이나 화가 난 듯했다.
“왜… 왜, 화났어요. 선, 배….”
다른 손이 아래로 침범했다. 양쪽 엉덩이 살을 꽉 쥔 손에 조금 더 거센 힘이 실렸다.
“응. 화났어.”
“그러니까, 왜….”
“네가 그런 소리 듣는 거 싫어. 다른 새끼가 너 보면서….”
“그러, 면… 선배가, 흣, 해주면 되잖아요.”
거칠게 둔덕을 주무르던 손이 멈칫했다. 갸름하게 벌어진 산호의 입술이 다시금 움직였다.
“선배, 가 해줘요… 야한 말.”
게게 풀린 눈으로 시우를 바라보며 산호가 속삭였다.
“내, 구멍에 박고 싶다고….”
“…….”
“선배 자지로 마음껏, 쑤시고, 흐으, 싶다고.”
“…….”
“내 뱃속에 선배 씨물 뿌리고 싶-.”
시우가 거칠게 산호의 골반을 움켜쥐었다. 엉덩이에 빨간 손자국을 남겼던 커다란 손은, 이제 골반 위에 붉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엎드려.”
낮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화가 난 것도 같았고, 조급한 것도 같았다. 산호가 팔꿈치로 상체를 지지하자, 골반을 잡았던 손이 홱 힘을 주어 산호의 몸을 단번에 뒤집었다.
“아윽…!”
거칠게 몸이 뒤집힌 탓에 산호가 얕은 탄성을 뱉었다. 팔꿈치와 무릎으로 침대를 지지한 채 산호는 고개를 틀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생리적으로 맺힌 눈물방울이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다리 벌려.”
무릎이 침대 시트를 밀며 벌어졌다. 엉덩이 사이의 골이 벌어지고 빠끔거리는 구멍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분홍빛을 띤 구멍은 이미 오래전부터 척척하게 젖어있었다. 시우의 손가락이 발름대는 구멍에 닿았다.
“하아읏…!”
주름진 구멍을 꾹꾹 누르자 손가락에 찐덕한 애액이 늘어졌다. 흥건하게 젖은 구멍은 끊임없이 울었고, 손바닥을 타고 흐른 애액이 손목까지 적셨다. 다른 손이 앞으로 움직였다. 그 손은 마찬가지로 곧게 발기한 산호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윽, 흐으… 선배.”
커다란 손에 단번에 감싸인 산호의 성기가 꿈틀댔다. 시우는 성기를 쥔 손을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며 엄지로 귀두를 둥글렸다. 선액으로 젖은 귀두가 반들반들했다. 미끈거리는 선액 위로 부드럽게 엄지가 미끄러졌다.
“앞도 뒤도 다 적시고 그런 말 하면 어떡해, 산호야.”
“아으, 으으응….”
“손버릇도 나쁜데, 입버릇도 나빠.”
침대를 지탱하고 있던 산호의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양 한참을 바르작대던 상체가 결국 와르르 무너졌다. 활짝 벌어진 무릎으로 지탱해 엉덩이만 높이 치켜든 노골적인 자세였다. 침대 위에 뺨을 댄 산호의 눈가에는 계속해서 눈물이 맺혔다. 시우의 손가락이 마침내 구멍 안을 파고들었다.
“으으응…!”
손끝 한 마디만 삽입했을 뿐인데, 산호의 허벅지가 바르르 떨렸다. 발가락이 잔뜩 오므려지는 것을 보며 시우가 하, 하고 헛웃음을 쳤다.
“힘 빼.”
한 번 삽입이 시작된 손가락은 가차 없었다. 가까이 하체를 붙여오며 더욱 깊이 안으로 진입했다. 터질 듯 단단해진 시우의 성기가 산호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흐응, 우응, 선배.”
“응. 산호야.”
자비 없이 들어온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휘었다. 뜨겁고 좁은 내벽을 꾹꾹 누르는 손은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사나웠다.
“울지 마.”
“하읏…!”
망설임 없이 손가락 하나가 더해졌다. 히트 사이클의 영향으로 녹진하게 풀어진 구멍은 꽉꽉 손가락을 물고 있었지만, 더해진 손가락 역시 무리 없이 삼켜냈다. 구멍이 연신 벌름대며 두 개의 손가락을 오물오물 씹었다.
“네 구멍이 너무 울어서, 여기 다 젖었어.”
“우는, 하으…거, 아닌….”
“그럼, 싸는 거야?”
손가락 두 개가 교차했다. 가위질을 하듯 굽어진 손가락 두 개가 내벽 안을 거침없이 휘저었다. 기다란 손가락은 내벽 안쪽을 마구 찔러댔다. 부드럽게 눌렀다가, 거세게 휘저었다가, 다시 둥글리듯 매만지다가, 거칠게 왕복을 반복했다.
“싸, 싸는…!”
한 마디만 남겨 놓은 채 밖으로 빠져나온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춘 것도 잠시, 금세 안으로 푹 처박혔다. 아, 으흑! 산호의 허리가 한 번 더 무너졌다. 엉덩이가 조금 더 위로 솟았다.
“싸는 건가 봐. 소리가.”
찰박, 찰박 소리가 났다. 기다란 손가락에 꿰뚫린 구멍은 연신 움찔댔다. 찌걱거리는 내벽의 울음과 젖은 손가락 마디와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번갈아 났다.
“너무 야하다.”
산호의 성기를 쥔 손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슨하게 쥐었던 손바닥이 얕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내 귀두를 둥글리던 엄지가 요도 구멍을 틀어막았다.
“뒤로 싸고 있으니까 앞은 싸면 안 돼.”
시우의 엄지 손끝이 구멍을 긁듯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침대 시트에 뺨을 문지르며 산호가 하악, 하악 울어댔다. 쾌감이 고이고 있는데 분출할 길을 찾지 못한 까닭이었다. 내벽이 부르르 떨며 시우의 손가락을 꽉 물었다.
"싸지 말라니까, 왜 꽉 물어.”
“하으… 힘들, 힘들어요.”
그러나 시우는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쫄깃한 구멍은 처음엔 침입을 거부하는 듯했지만, 안쪽 내벽을 꾹 누르자 스스로 빠끔 벌어졌다. 주륵, 애액이 흘렀다. 미끄러운 애액이 마찰을 줄여주었다. 단번에 손가락 세 개를 먹어 치운 구멍이 게걸스레 움찔댔다.
“놔, 놔줘…요. 선배. 아, 앞에… 놔줘요.”
세 개의 손가락이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찰박이는 물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찔꺽, 측, 쯥. 시우의 손목을 타고 애액이 길게 물길을 내며 흘렀다. 시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쁜 말 안 하기로 약속하면.”
“아앗, 흑, 응! 흐읏!”
왕복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맞추어 산호가 신음을 쏟아냈다. 찌푸린 산호의 눈가가 애처롭게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 안 할…게요. 안…해. 안…!”
“응, 약속했어.”
시우가 발갛게 달아오른 제 눈꼬리를 활짝 휘며 산호의 요도를 막고 있던 엄지를 미끄러트렸다. 요도 구멍을 긁듯이 지익, 움직인 손가락이 마침내 떨어지자, 후드득. 기다렸다는 듯 뽀얀 탁액이 쏟아졌다. 팍, 터진 과즙처럼 덩어리진 것이 흘러내렸다. 도톰한 살기둥을 쥐고 있는 시우의 손등 위를 뜨겁게 적셔갔다.
“흐응읏….”
나른한 사정감에 산호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이대로 늘어지고 싶다는 듯 눈을 감았지만, 금세 번뜩 눈을 뜨고 만다. 구멍에 박힌 세 개의 손가락이 내벽 안으로 깊숙이 쿵 처박힌 탓이었다.
“하악…!”
입이 크게 벌어졌다. 반들한 입술 새로 촉촉한 혀가 비죽 튀어나왔다. 시우는 천천히 손을 뒤로 물렸다. 구멍을 빠져나온 손가락은 잔뜩 젖어있었다. 젖은 제 손가락을 바라보며 시우는 눈썹을 찌푸리듯 웃었다.
“백산호, 나빴어.”
“으응… 응?”
“나쁜 말 하고 싶게 만들잖아.”
“…안, 그랬는데….”
거짓말. 시우는 손등을 적신 산호의 정액을 그러모아 둔덕 사이에 묻었다. 찐덕한 유백색의 액체가 발름대는 구멍 주위에 치덕치덕 발라졌다. 이미 젖을 만큼 젖은 곳이지만 투명한 액체가 아닌 탁액을 머금고 있는 모습은 훨씬 더 음란해 보였다.
“아냐, 엄청 나쁜 말 하고 싶게 만들어.”
시우는 엉망으로 젖은 제 손을 들어 자신의 입매를 슥 훑었다. 시우의 입가에 하얀 탁액이 묻었다. 발간 혀가 아랫입술에 묻은 탁액을 살끔 핥았다. 곧 시우는 아플 만큼 단단해진 자신의 성기를 쥐었다. 두툼한 귀두를 발씬대는 구멍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나쁜 짓 하고 싶게 만들어.”
입 맞추듯 구멍에 닿은 살덩이는 고통스러우리만큼 천천히 구멍을 벌리며 밀어 넣어졌다.
“아, 선배, 으…윽!”
손가락 세 개를 물었던가 싶게 옴칠 닫혀있었으면서, 뜨거운 귀두가 밀고 들어오자 구멍이 환희하며 벌벌 떨기 시작했다. 꼬물꼬물 제 성기를 씹는 구멍을 바라보는 시우의 눈가가 움찔 비틀렸다.
“선배, 저 힘들, 힘…든….”
“응. 너 힘든데, 이렇게 나쁜 짓 하게 만들잖아.”
그치, 산호야.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산호의 가슴을 손으로 받치면서 시우가 속삭였다. 가슴을 받쳐주는 힘에 산호는 풀썩 꺾였던 팔꿈치를 다시 침대에 기댔다. 엎드린 모양새로 자리가 잡히자, 시우가 상체를 산호의 등 위로 겹쳐왔다. 산호야, 백산호.
“흣…응?”
아주 느릿하게 구멍을 열던 성기가 별안간 쾅, 안을 꿰뚫었다.
“하악…!”
읏, 산호의 귓가에 가까이 닿았던 시우의 잇새로도 작은 신음이 샜다. 커다란 성기를 감싼 내벽이 잘게 요동쳤다. 푹신하고 미끄러운 내벽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주름 하나하나가 시우의 성기에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츕츕 빨아댔다.
“아.”
황홀한 감각이었다. 허리를 조금 뒤로 물리자, 내벽 안이 다시 요동쳤다. 꽉 물고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달라붙는 것이다. 빡빡하게 미끄러진 성기는 구멍 끝에 귀두만을 물린 채 빠져나왔다. 시우의 미간이 조금 더 깊이 패였다.
“산호야.”
퍽. 성난 성기가 다시 내벽 안을 거세게 찧었다.
“맛있어?”
즈윽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온 성기가 빠르게 맥동했다. 그리고 다시, 퍽.
“내 자지, 후, 맛있어?”
퍼억, 퍽. 퍽. 허리짓이 사정없이 이어졌다. 아흑, 읏, 흣. 연신 신음을 터트리는 산호의 몸이 허리짓에 맞추어 앞뒤로 흔들렸다. 그새 발기한 산호의 성기가 흔들리는 몸과 함께 꺼덕였다.
“하앗, 앗, 윽, 으으읏…!”
거세게 쿵, 밀어붙인 시우의 성기가 산호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었다. 좁은 길을 꿰뚫은 성기가 기꺼운 듯 내벽이 쫀쫀하게 달라붙었다. 오메가의 자궁이 제 짝을 반기며 환희했다. 바득 떨리던 산호의 몸이 홱 들렸다. 허리를 세운 채 무릎으로 선 자세였다. 자궁 입구를 깊이 찔린 산호는 눈을 번뜩 뜨며 입을 크게 벌렸다.
“너무, 깊…어요. 아, 아…!”
뿌리까지 밀어 넣은 성기는 집요하게 자궁 입구를 문질렀다. 시우가 허리를 뭉근하게 움직였다. 산호의 양 어깨를 끌어안으며 시우는 조금 더 자신을 밀어 넣었다. 이 얇은 몸을 완전히 꿰뚫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마, 맛있…아, 으….”
안쪽이 문질러지는 감각에 산호는 정신없이 신음을 흘렸다. 크게 벌어진 입술 새로 타액이 질질 흘렀다. 시우는 허리를 조금 물려 얕게 추삽질을 이어갔다. 첩, 척, 처억, 땀에 절은 피부가 마찰하며 아득히 귓가를 울렸다.
“맛잇, 흣, 어요…흐웃, 응, 응.”
거센 허리짓에 흔들리는 산호의 상체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어깨를 안았던 손이 스르르 앞으로 움직여 가슴 위를 덮었다. 판판한 가슴을 움켜쥐려는 듯 쫙 펴졌던 손은 이내 꽃봉오리처럼 오므라들어 산호의 양 유두를 꼬집었다.
“흣…?”
꼿꼿하게 선 유두가 사정없이 비틀렸다. 얕게 구멍 안을 찧으며 시우는 손끝을 세워 말랑한 살점에 박아 넣었다. 양쪽 유두가 동시에 짓눌리자 산호의 허리가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발기한 성기가 달랑댔다.
“싸, 쌀 것… 같….”
유두를 짓누른 양손이 작은 원을 그렸다. 쉴 새 없이 터지는 달콤한 숨을 한껏 들이마시며 시우는 산호의 뒷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왜 이렇게 잘 느끼지.”
“싸…쌀…아, 으….”
뷰릇, 꺼덕이던 산호의 성기에서 다시금 정액이 쏟아졌다. 뷰르륵, 뷱. 끈적한 소리를 내며 정액이 터지는 순간, 산호의 몸 안을 깊숙이 찧어대던 시우의 성기 역시 부피를 키우기 시작했다.
“선, 배…! 너무 큰…크….”
노팅이었다. 시우는 자신의 입술을 거칠게 씹으며 눈을 감았다. 두툼하게 부피를 키워가는 자신의 귀두가 산호의 다물린 자궁 입구를 벌리는 것이 느껴졌다. 히트 사이클을 겪는 오메가의 자궁이 어서 빨리 씨를 뿌려달라는 듯 발씬대며 떨었다.
“아, 안돼… 임신, 할….”
아직 산호의 사정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앞으로 정액을 꾸물꾸물 흘리면서 산호는 허리를 뒤틀었다. 거칠게 씹었던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면서 시우는 읏, 숨을 뱉었다.
“후, 내 아이 가지기 싫어?”
엉덩이에 보조개가 패일 만큼 깊숙이 저를 밀어 넣으며 시우가 말했다.
“가지고 싶어 했잖아, 산호야. 우리 아이.”
커다랗게 부푼 귀두가 내벽을 한계까지 벌렸다. 시우의 목울대에서 짐승의 것 같은 으르렁거림이 울렸다. 산호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축축하게 젖은 신음을 뱉던 입술이 가까스로 달싹였다.
“가, 지고 싶어요. 선배 아이… 내 뱃속에….”
흑, 울음이 터지고 산호가 애원하듯 속삭였다.
“하, 아…그치만 안, 돼…안돼.”
사정이 끝난 산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시우의 팔에 가까스로 기대 힘없이 흔들렸다. 시우는 눈썹을 와락 찌푸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노팅이 시작된 성기를 삽입했던 몸에서 꺼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인내를 요구했다. 그러나 시우는 거세게 짓씹던 입술을 살며시 놓으며 허리를 뒤로 물렸다. 씨물을 기다리던 자궁이 아쉬운 듯 커다란 성기를 꽉 물어왔지만, 시우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물렸다. 깊게 찌푸려진 눈썹 아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흐…으….”
퐁, 구멍 밖을 힘겹게 빠져나온 귀두가 왈칵, 정액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산호의 상체를 끌어안고 있는 탓에 정액을 쏟아내는 성기가 산호의 허벅지 가장 안쪽에 비벼졌다. 하얀 액체는 마른 다리를 온통 적시며 툭, 투득, 흘러내렸다. 아래를 모조리 적신 채 무릎으로 선 산호의 몸은 지독하게 야했다.
“…산호야.”
시우는 산호의 허리를 조심스레 안았다. 저를 바라보게 몸을 돌리곤 침대 위에 천천히 눕혔다. 얕은 숨을 뱉는 산호의 가슴이 작게 오르내렸다. 침대 위에 완전히 눕혀지자, 산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게게 풀렸던 눈도 점차 초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까만 눈이 시우를 바라보았다.
“선…배.”
가늘게 뜨인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이건 생리적인 눈물이 아니었다. 퐁퐁 솟아난 눈물이 속눈썹 위에 방울지고 이내 양옆으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미, 안해요.”
“…….”
“사랑, 해요. 정말, 너무…너무.”
“산호야.”
“그래도, 선배 아이… 가질 순 없어.”
산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선배의 아이까지 죽일 순 없어. 긴 섹스와 사정으로 온몸이 나른했다. 그래서 이 애의 입술을 제대로 읽지 못한 걸까. 시우는 큰 손을 뻗어 산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산호야, 괜찮아.”
“…으응. 선배.”
“네가 싫어하는 거 안 해. 네가 좋아하는 것만 할게.”
시우는 연신 산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부드럽게. 히트 사이클이 끝나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이 애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긴 이야기가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