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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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
시우와 산호가 커다란 식당 안에 들어서자,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직원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안녕하세요.”
시우가 고개를 숙이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어색하게 제 옆에 서 있는 산호를 향해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는 13기 인턴인데, 다음 주부터 출근할 것 같아요.”
“아, 네! 들었어요.”
가까이 있던 여직원 한 명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산호에게 살갑게 웃어 보이는 여직원을 바라보며 시우도 빙그레 웃었다.
“출근 전에 다들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
“아, 너무 좋죠.”
“그리고 다들 고생하시니까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싶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인사가 쏟아졌다. 아까의 여직원이 까르르 웃으며 감사합니다, 이사님, 하고 인사했다. 역시 우리 이사님이 최고야. 다정스레 시우의 팔짱을 끼어온다. 산호가 말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사님이 주인공이시니까, 이쪽 가운데로 앉으세요.”
팔짱을 낀 여직원이 친근하게 자신의 옆자리로 시우를 이끌었다. 시우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웃으며 산호를 돌아보았다.
“오늘 주인공은 이 친군데.”
여직원이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해맑게 웃으며 건너편 자리를 향해 손짓했다.
“새 인턴분도 건너편 가운데에 앉으면 되겠다. 거기도 주인공 자리에요.”
애교 있는 목소리에 시우가 기분 좋은 듯 여직원을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산호는 입을 꾹 다문 채 시우의 건너편 자리에 천천히 앉으며 여직원을 바라보았다. 여직원은 시우의 자리 위에 부지런히 물컵과 젓가락을 놓고 있었다.
“사실 기획실은 분위기가 좋기 쉽지 않은데.”
“맞아, 괜히 심각한 분위기잖아.”
“그래도 우리 2팀은 이사님 오시고 나서 얼마나 분위기가 좋은데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자리가 이어졌다. 술이 여러 차례 돌았고, 직원들의 목소리도 한층 높아졌다. 시우는 예의상 받은 술잔을 앞에 내려두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불편한 듯 뻣뻣하게 앉아있는 산호의 앞에 고기를 한 점 놓아주고는 슬쩍 눈짓했다. 산호가 시우를 흘끔 바라보자 재촉하듯 다시 눈짓했다. 너 먹으라고 온 건데, 네가 안 먹으면 어떡해. 산호가 천천히 젓가락을 움직여 고기 한 점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물오물 씹는 것을 보며 시우가 다시금 웃었다.
“그럼 산호 씨랑 이사님은 같은 학부생?”
시우의 옆에 달싹 달라붙어 앉은 여직원이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악의 없이 천진한 얼굴을 마주 보며 산호는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JR인턴십 엄청 빡센데. 공부 잘 하시나 보다.”
“…….”
“아, 하긴 H대니까 당연히 잘하시겠죠?”
회식 자리에서 학벌 얘기하면 못 써. 테이블 끝 쪽에 앉은 남자 직원이 술잔을 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시 한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직원이 산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산호 씨, 우리 잘 해봐요.”
“…네.”
모두가 잔을 들어 올리자, 산호도 마지못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여러 개의 잔이 허공에서 챙, 하고 부딪혔다. 저마다 잔을 입으로 털어 넣는 것을 보며 산호가 우물쭈물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시우의 눈썹이 잘게 찌푸려졌다.
“줘.”
“네?”
방금 비운 자신의 잔을 내려놓고는 시우가 산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산호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시우가 산호의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입 안으로 잔을 톡 털어 넣는다. 콧잔등을 슬쩍 찌푸리며 시우가 웃었다. 허공에 뜬 자신의 손이 어색한지, 산호가 천천히 손을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 오늘 이사님 술 많이 드시네요?”
여직원이 다시 시우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시우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은 좀 마시고 싶은 기분이라.”
“어머,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저는 이사님이 술 싫어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저번에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여직원을 바라보며 시우는 다정하게 눈을 깜빡였다. 조금 따끔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시선을 돌려 산호를 바라보니, 산호가 자신과 여직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꽤 새초롬해서 시우는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산호 씨도 한잔해요.”
산호의 옆에 앉은 다른 직원이 산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마지못해 잔을 받는 산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우는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술… 안 되는데. 시우가 손을 쭉 뻗었다.
“나 줘.”
응? 방금 전 산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던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가 그를 향해 변명하듯 웃어 보였다.
“아.”
겸연쩍은 듯 미간을 톡톡 두드리고는 말을 이었다.
“박 대리님이 주시는 술 마시고 싶어서. 제가.”
이번에도 산호의 손에 들린 잔을 받아들곤 입 안으로 톡 밀어 넣었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액체가 유난히도 썼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기는 했지만, 조금 속이 탔다.
“저희는 이사님 들어가시는 거 보고….”
“아, 괜찮아요.”
시우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시야가 조금 뿌얬다. 끔뻑거리는 눈꺼풀도 평소보다 조금 무거운 기분이었다. 회식 내내 옆자리에서 친근하게 굴었던 여직원이 시우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이사님 오늘 술 많이 드셨잖아요.”
“괜찮….”
“정 실장님께 전화 드려야 할까요?”
여직원이 동료들을 돌아보며 묻자, 시우가 자신의 팔을 잡은 여직원의 손목을 잡았다. 여직원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끌어내리려는데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아뇨, 오늘은 그냥.”
“선배, 아니, 이사님은 제가 데려다 드릴 수 있어요.”
산호가 시우의 팔을 잡은 여자의 손을 단호하게 끌어내리며 말했다. 유난히 말수가 적었던 인턴 직원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것에 조금 놀랐는지 여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꽤 차갑게 떨쳐진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 어… 그래도 되나…? 여직원도 조금은 취기가 오른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난감해하는 동기들과 시선을 교환하며 어색하게 산호를 마주 보았다.
“네, 저 산호랑 같이 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시우가 직원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직원들 역시 마주 인사하며 저마다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우는 손목의 시계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자정이 거의 가까운 시간이었다. 마침내 여직원이 택시에 올라타자, 시우는 택시 기사에게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건네곤 다정하게 손을 흔든 후에야 후,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산호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나 취했나 봐.”
무방비한 웃음이 배시시 퍼졌다. 산호는 표정 없이 시우를 마주 보았다. 조금은 딱딱한 산호의 표정에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네 술 다 뺏어 먹어서 화났어?”
“…….”
“음, 그럼….”
“선배.”
다음에 둘이 있을 때 술 사줄게. 뒷말을 삼키며 시우가 응? 하고 대답했다. 여전히 웃음을 띤 시우를 바라보며 산호가 입을 열었다.
“저 여자랑 친해요?”
저 여자?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산호의 말을 더듬던 시우가 곧 아, 하며 웃었다.
“윤주?”
“……윤주.”
“응. 친해. 처음 회사 들어왔을 때….”
“선배.”
산호가 시우의 말을 끊으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시우의 팔을 잡고는 고개를 들어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차에서 쉬다가 가요.”
주차장을 향해 시우를 이끌며 산호가 이를 아득 깨물었다.
오메가 클럽이 즐비한 거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우와 산호는 나란히 차 뒷좌석에 앉았다. 다른 점이라면 그때보다 시우 자신이 조금 더 취했다는 것 정도. 그리고 그때는 자신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았던 산호가 지금은 가까이 앉아있다는 것쯤. 산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시우가 눈을 깜빡이며 산호를 마주 보았다.
“왜?”
“선배 취했어요?”
“아니, 별로 안 취했어.”
거짓말이었다. 사실 제법 취했다. 산호에게 건네지는 술잔을 모두 제가 마신 탓이었다. 학부 모임 때도 그랬고, 산호는 술에 약한 것이 분명하니까. 술을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시우는 술에 약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은 자만했는지도 모른다.
수면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차 시트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고개를 모로 기울여 산호를 바라보았다. 산호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새까만 산호의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
하얀 얼굴과 새까만 머리카락의 조화는 어딘가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커다란 장식장 안에 자리한 도자기 인형이 그랬었다. 어릴 적부터 시우는 그것을 좋아했다. 사용인들이 먼지를 털어내려 장식장을 열면, 제가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적도 더러 있었다. 매끄러운 도자기 인형의 뺨을 쿡 찔러도 보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도 보았다. 또래의 남자애들이 으레 그렇듯 시우도 인형보다는 모형 장난감을 더 좋아했지만, 그 도자기 인형만큼은 예외였다. 새까만 머리를 쓰다듬으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
시우가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산호의 까만 머리카락이 손끝에 닿았다. 찰랑이는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손가락 사이에 걸렸다가 빠져나오고, 다시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가 멀어진다. 조그맣고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
놀란 사람처럼 시우가 불현듯 손을 거두었다.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 미안.”
제 머리를 쓰다듬던 큰 손이 훌쩍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산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
시우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미안해. 그냥… 예뻐서.”
시우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어린아이처럼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손대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생각보다 더 취한 걸까. 곧이어 산호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져도….”
“응?”
“만져도 되는데….”
시우가 다시 시선을 올려 산호를 바라보았다. 옆에 앉은 산호가 가까웠다. 원래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안돼.”
“…….”
“약속 못 지킨다고 너한테 혼났잖아.”
“…….”
“그러니까 약속 잘 지켜야지.”
불가항력처럼 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산호는 웃음이 퍼진 시우의 하얀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표정은 무던했지만, 머리카락만큼이나 새까만 눈동자는 그렇지 않았다. 무언가 커다란 파도 같은 것이 동공 안에서 울멍지고 있었다. 시우가 입술을 살짝 끌어올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
“……어떻게 봤는데요?”
“음.”
잠시 고민하듯 눈을 감았던 시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그냥… 산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그냥… 선배처럼 다 가진 사람은 처음 봐서요.”
조막만 한 얼굴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시우는 천천히 가까워지는 산호의 얼굴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
“아닌데.”
“네?”
“아니야, 나 없는 거 많아.”
“선배가?”
“응. 가지고 싶어서 욕심나는 것도 있고.”
"가지고 싶은 게 뭔데요?”
“음.”
시우는 다시 목울대를 울리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거…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시선이 부드럽게 엉켰다. 손끝이, 그리고 발끝이 저릿저릿한 기분이었다. 시우가 픽 웃으며 말했다.
“있어, 그런 거.”
산호가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전 가진 거 없어요. 가지지 못한 거 말고, 가진 게 하나도 없어서.”
자조적인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오히려 그 건조한 어조가 심장을 찌르르하게 만들었다. 시우가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
“나 가지면 되겠다.”
“…네?”
“나는 다 가진 것 같다며.”
“…….”
“나 가지면… 내가 가진 거, 다 네 거잖아.”
취기가 오른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틀린 건 아니지 않나? 산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깨물면 아프잖아. 반사적으로 뻗어지던 시우의 손이 멈칫했다.
“…제 거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시우가 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거.”
“저 선배 가져도 되는 거예요? 그럼 선배 제 거예요?”
조금 더 큰 소리로 시우가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달뜬 목소리가 귀여운 탓이었다. 손 마디로 둥글린 입매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응, 네 거 하지 뭐. 산호 네 거.”
“내 거….”
중얼거리는 산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우가 느리게 눈꺼풀을 감았다. 다시금 수면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 산호의 목소리가 수면 아래서 들려오는 것처럼 웅얼웅얼 들려왔다.
“선배.”
“응.”
“저한테 빚진 거 있잖아요.”
“응.”
“그거… 지금 하나 써도 돼요?”
“뭔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산호의 작은 얼굴이 가까이 다가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시우의 뺨에, 입술에, 달큰한 산호의 숨이 여과 없이 닿았다. 간지럽고, 또 간지럽고, 또 간지러운… 그리고 무척이나 달콤한 것.
“…키스해주세요.”
“…….”
“…….”
“…….”
미진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시우가 입술을 떼려는 찰나 산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빚 갚는 거잖아요.”
“…….”
“갚아요. 지금.”
큰 손이 성급히 뻗어졌다. 조금은 거친 손길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산호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물었다. 통통한 입술의 탄력이 감각 세포를 일깨웠다. 혀를 내어 산호의 아랫입술을 더듬자, 닫혀있던 입술이 빠끔 열렸다. 그 사이로 온통 달콤한 숨이 쏟아졌다. 산호의 얼굴을 감싸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울컥 들어갔다.
“하….”
차 시트에 산호를 깊게 묻었다. 양 팔꿈치 사이에 산호를 가두고 얼굴을 감싼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어 매끄러운 뺨과 머리카락을 쓸었다. 손끝에 다시금 전류가 튀었다.
“하아, 으, 선배….”
두 개의 혀가 부드럽게 얽혔다. 끈적한 타액이 입술 새로 지익, 흐른다. 츕, 소리 나게 그것을 빨아 마시고는 혀끝으로 입 안 점막을 훑어 내렸다. 부드러운 혀의 마찰이 쯔업거리는 젖은 소음을 빚었다. 혀끝을 둥글리듯 움직이자 산호가 움찔 떠는 것이 느껴졌다.
“…….”
습기 먹은 단내가 시우의 몸을 녹진하게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농염한 페로몬이 몸 곳곳을 끊임없이 매만져왔다. 산호의 가는 손가락이 시우의 넓은 등을 긁듯이 끌어안았다.
조금은 성급하게, 치기 어린 사춘기 소년처럼 입 안의 모든 점막을 핥았다. 이대로 씹어 삼키고 싶을 만큼 모든 것이 달았다. 어느 틈에 산호의 몸을 압박하듯 겹쳐진 자신의 몸이 쿵쿵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서로의 체온이 달뜬 공기처럼 서로를 옭아맸다.
“…….”
색정적인 오메가의 페로몬에 반응한 알파의 페로몬도 서서히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감싸 안은 산호의 뺨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선명히 느껴진다.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시우의 몸 안에 갇힌 채로 산호의 허리가 가늘게 비틀렸다. 으응, 콧소리도 새어 나왔다. 시우의 등을 안은 산호의 손끝에 미약한 힘이 실렸다.
시우가 성마르게 산호의 목덜미를 핥아 내려갔다. 얼굴을 감쌌던 손을 스르르 미끄러트려 산호의 옷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매끄러운 피부 위로 커다란 손이 더듬거리며 올라가자, 산호의 허리가 움찔 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래가 빠르게 부피를 키워갔다.
“…….”
차 시트를 받친 시우의 손이 불끈 주먹 쥐어졌다. 곧 힘겹게 산호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떨어트렸다. 반들거리는 입술 끝에서 타액이 주욱 흘렀다. 옷 속으로 밀어 넣었던 손도 거두어졌다. 하아, 하아, 얇게 부서지는 숨을 뱉으며 시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선배….”
가까스로 몸을 뒤로 물린 시우가 자신의 입술을 콱 깨물며 이마를 꾹 짚었다.
“……미안해.”
발갛게 달아오른 산호는 촉촉이 젖은 입술을 갸름하게 벌린 채 색색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조금 더 진하게 퍼졌다. 제어할 마음이 없는 듯, 그것은 시우의 몸을 끊임없이 더듬었다. 입술을 더욱 세게 짓씹었지만, 이미 자극받은 성감은 점점 더 몸집을 부풀리는 중이었다.
산호가 손을 뻗어 깨물린 시우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선배, 저 괜찮아요.”
“…….”
“더 해주세요.”
시우가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는 산호의 손을 덥석 쥐었다. 알파와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서 페로몬을 흘리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 애는 정말 모르는 걸까. 내가 널, 널 함부로 안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더 해줘요. 네?”
“……산호야.”
“내 거잖아요. 선배 내 거라면서요.”
산호가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옷 아래 부피감을 키운 시우의 성기를 둥글리듯 매만졌다. 울컥 힘이 실린 성기가 꼿꼿하게 섰다. 빠르게 맥동하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자신의 아래를 만지는 산호를 바라보며 시우가 밭은 숨을 뱉었다. 산호의 손이 시우의 바지 버클에 닿자, 시우가 다시 산호의 손목을 잡아챘다.
“산호야.”
“…….”
“그만해.”
끈이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산호의 손에 툭, 힘이 풀어졌다. 시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산호의 손을 입가로 끌어올렸다. 잔뜩 찌푸린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인내할 수 있는 최선의 마지노선. 소중한 것에 입맞춤을 하듯 손끝에 입술을 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너랑… 이런 거 하고 싶은 거 아니야.”
오늘 산호에게 한 두 번째 거짓말이었다.
***
시우는 가만히 닫힌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로 산호의 페로몬이 미약하게 느껴졌지만,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작게 숨을 뱉으며 몸을 돌려세웠다. 선반 위에 올려진 담배를 들곤 커다란 창문을 열었다. 테라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테라스 테이블 위에 담뱃갑을 내려놓고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의자에 천천히 걸터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라이터에 불꽃이 오르자 담배 끝에 불씨가 붙는다.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자 머리가 또다시 쾅쾅 울려오는 기분이었다.
“…….”
마음 같아선 산호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좁은 골목, 그 스산한 집에 산호를 혼자 두는 것은 위험했다. 산호 역시 시우의 페로몬에 반응했으니까.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불안했다.
“하….”
그렇다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지금의 선택이 옳았는지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산호는 그 이후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으로 가도 괜찮아? 그 말에도 그저 고개만 작게 끄덕일 뿐이었다. 조그만 얼굴은 표정이라곤 없이 텅 비어있었지만, 어딘가 상처받은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우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산호가 침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시우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따뜻한 습기와 온도를 머금은 채 샤워실에서 나오는 산호에게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잔뜩 긴장했던 탓이었다.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비벼 끄고는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웬만한 침대보다 더 넓은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누우며 시우는 팔로 눈가를 덮었다. 나 지금 무슨… 자조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에 술기운이 돌면서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정원이었다. 10살의 시우는 한 손에 소방차 모형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시우의 앞에 서 있는 아이는 시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너한테서.’
‘응?’
‘되게 좋은 냄새 나.’
‘좋은 냄새…?’
‘응, 흙냄새 같은 거. 따뜻한 냄새.’
시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킥킥 웃었다. 그게 무슨 냄새야? 물으려던 찰나, 돌연 바람에 실려 온 달큰한 냄새를 맡았다. 촉촉한 과일 냄새였다. 짓이긴 과일에서 나는 듯한 달콤한 냄새. 왜인지 감각이 곤두서고 예민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를 향해 말했다.
‘이 냄새 너한테 나는 거야?’
‘무슨 냄새?’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엄청 달고, 어, 아무튼 기분 좋아지는 냄새.’
‘기분… 좋아져?’
응, 계속 맡고 싶은… 잠결에 시우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알파로 발현하기 전날의 꿈. 몽롱한 기억을 더듬었다. 계속, 계속 맡고 싶은… 가둬 놓고 나만 맡고 싶은 그런, 냄새였는데. 찌푸려진 시우의 미간 위로 누군가의 가느다란 손끝이 닿았다.
“…….”
부드럽게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것도 꿈인가? 시우가 살짝 눈을 떴지만, 주변은 까무룩한 어둠 속이었다. 다시 스르르 눈을 감을 때, 또다시 그 향기를 맡은 것 같았다.
“…내 거.”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정확히 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을 감싸는 달콤한 향기처럼. 수마가 다시금 덮쳐왔다.
***
평소보다 제법 빨리 일어났다. 시우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을 부르는 것을 싫어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혼자가 아니니까. 시우가 부탁한 옷과 아침 식사를 들고 도착한 사용인은 조용히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올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시우가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 사용인은 용무를 막 끝낸 듯 돌아가겠다는 인사를 건네 왔다. 아침부터 미안해요. 시우가 사과하듯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회장님께는 말씀 안 드렸어요. 혹시나 해서. 시우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그녀가 문을 나서자, 침실 문이 달칵 열렸다. 산호의 하얀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시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눈짓했다. 어제의 일 때문에 산호가 불편해하는 것은 싫었다.
“잘 잤어?”
“…….”
산호는 조금 머뭇거리듯 시우를 향해 다가왔다. 곧 테이블 위에 올라온 식사를 내려다보곤 입을 갸름하게 벌렸다.
“걱정 하지 마. 이건 내가 한 거 아니야.”
“…네?”
아. 시우가 가볍게 픽 웃었다.
“맛있을 거란 얘기였어.”
“아….”
“우리 해장해야지.”
음, 해장은 나만 하면 되나? 시우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산호가 천천히 맞은편에 앉자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었다.
“소파에 새 옷 있어. 내 옷은 사이즈 안 맞을 것 같아서, 네 사이즈로 몇 개 가져왔는데.”
“옷… 안 그러셔도 되는데.”
시우는 산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마음에 드는 걸로 입어.”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부드럽게 공간을 메웠다.
***
편의점 매대 앞에 선 산호는 담배가 진열된 벽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뭐 드려요?”
산호가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자, 알바생이 조금 짜증 어린 말투로 물어왔다. 산호는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저기, 빨간색….”
“빨간색이요?”
“담배… 저 빨간색 각이요.”
알바생이 몸을 홱 돌려 담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말보로 레드 말씀하시는 거 맞아요?”
“말보로 레드… 네, 그거요.”
알바생은 불퉁한 얼굴로 바코드를 쿡쿡 찍더니 산호를 향해 그것을 불쑥 내밀었다.
“4,500원이요.”
산호는 우물쭈물 돈을 내밀었다. 생소한 담뱃갑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시우의 집에서 테라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빨간 담뱃갑을 보았었다. 시우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흡연 구역에서 동기들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담배를 피우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
함께 공유하고 싶은 게 많은 것이 나쁜 건 아니잖아. 마음 같아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공유하고 싶은데. 온전히 내 것처럼. 산호는 주머니 속 담뱃갑을 꾹 쥐며 걸음을 옮겼다.
단과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흡연구역에 도착해 천천히 비닐을 뜯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담배 중 한 개비를 꺼내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는 무언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 불. 라이터도 함께 사야 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 게 스스로도 기가 막혔다. 산호는 잠시 망설였다.
“…….”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남자애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산호는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불을 빌려야 하나? 아니면… 어색하게 담배 한 개비를 들고 멀뚱히 서 있는 산호를, 누군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산호?”
남자애들 무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동기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술을 먹이고, 운동화를 발로 찼던 그 동기였다. 산호는 냉랭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백산호 너 담배도 피냐?”
동기가 느물느물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얽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자리를 뜨려는 찰나 그가 산호의 어깨를 잡았다.
“뭐야, 불 없어?”
“…….”
산호는 차갑게 동기의 손을 떨쳐냈다. 동기가 잠시 산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 모양인지 눈알이 데굴데굴 굴렀다. 멈칫했던 표정을 풀며 동기가 입을 열었다. 짐짓 다정한 체하는 목소리였다.
“야, 너 담배 처음 피우면 그거 독해서 안 돼. 레드는 9mg이란 말야.”
9mg? 산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과장되게 한숨을 푹 내쉬며 더듬더듬 자신의 가방 안을 뒤적였다. 곧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을 꺼내듯 담뱃갑 하나를 쥐곤 그 안에서 얇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산호에게 내밀었다.
“이거 1mg야. 난 약해서 안 피거든, 이거.”
산호가 잔뜩 경계를 세운 눈초리로 동기를 바라보자, 그가 다시 한번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야, 미안해서 그래.”
“…….”
“저번에 학부 모임 때도 그렇고, 강의실에서도 그렇고.”
동기의 눈이 슬쩍 산호의 하얀 운동화로 향했다. 그는 곧 눈썹을 늘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뭐, 장난이긴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너무했다 싶다.”
“…….”
“이건 사과의 의미라고 생각해.”
누가 사과의 의미로 담배를 나누어주지? 산호가 눈썹을 잘게 찌푸렸지만, 그는 이미 산호의 손을 끌어와 담배를 쥐여준 후였다. 산호의 손에 들렸던 갈색 필터의 담배는 자신의 입에 문 채였다.
“불도 빌려줄게.”
“…….”
“너 담배 처음 피는 거 다 티나.”
동기의 뒤에 서 있던 남자애들 무리에서 작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같은 학부생들은 아니었다. 하나같이 인상이 어딘가 험악하다는 생각을 하며 산호는 시선을 돌렸다.
“뭐해? 불 붙여준다니까.”
산호가 잠시 그 동기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비웃음이 담긴 눈초리가 왜인지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산호는 가만히, 조금은 충동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동기가 재빨리 불을 붙여주었다.
“야야, 빨아야지. 그냥 물고 있는 게 아니라.”
산호가 미간을 좁히며 필터를 흡, 빨았다. 동기가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어, 깊이 빨아.”
기도를 타고 넘어온 담배 연기가 폐부로 들이닥치는 것이 느껴졌다. 알싸한 연기가 무척이나 매웠다. 콜록, 콜록. 산호가 기침을 내뱉자, 남자애들 무리에서 재미있다는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기가 그들을 향해 몸을 홱 돌렸다. 야이씨, 초치지 말고 너네 가만히 있어. 제 친구들을 나무라는 목소리가 묘하게도 신이 난 듯했다.
“원래 처음에 필 때는 그래.”
“…너무 독한데.”
동기가 입을 삐뚜름하게 벌리며 웃었다.
“아니, 너 처음 피는 거라 그렇다니까. 한 번 더 빨아봐. 깊이.”
다시 한번 필터를 깊게 빨았다. 한 번 해보았다고 조금은 익숙해진 모양인지, 조금 전보다 많은 양의 담배 연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한 번 더.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산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동기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어지럽지…? 원래 이렇게 어지러운 건가?
“어지러워?”
동기가 산호의 팔을 슬쩍 잡았다. 뿌리치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야, 어지럽냐고.”
별안간 땅이 홱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산호가 비틀거리자, 동기가 산호의 팔을 더욱 세게 거머쥐었다. 무릎에 힘을 주어보았지만 여전히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어느 틈에 손가락 사이에서 툭 떨궈진 담배를 바라보며 산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하, 아….”
몸이 급작스럽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해가 작열하는 공터에 몇 시간이나 서 있었던 것마냥 열이 달아올랐다. 단전에서부터 꾸물꾸물 이상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와, 이거 진짜 효과 좋네.”
“내가 뭐랬냐, 그거 효과 좋댔잖아. 그 형이 그랬어.”
“쟤 오메가 맞네. 이거 베타한테는 반응 없다면서.”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며 산호가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이미 몸은 제어가 되지 않는 상태였다. 힘이 풀린 무릎이 툭 꺾이면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산호가 힘없이 주저앉자,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 남자애들 무리가 산호를 에워쌌다.
“야, 얘 눈 풀린 거 같은데.”
“근데 담배형 페로몬제 마약 아니었냐?”
“몰라, 마약도 섞여있다는데, 애초에 출처도 불분명하잖아.”
“이거 발정제 맞긴 한가보네. 얘 표정 봐라. 장난 아니다.”
“나 이런 얼굴 포르노에서 밖에 못 봤는데.”
남자애들 무리가 떠드는 사이, 담배를 건넸던 동기가 산호의 볼을 우악스럽게 쥐곤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끄, 으, 신음이 샜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산호의 입술이 얇게 벌어졌다. 밭은 숨이 색색 쏟아졌다.
“소리 씨발, 왜 오메가 오메가 하는지 알겠다.”
“얘 상태 봐서는 시키는 거 다 할 거 같지 않냐?”
“야, 동현아.”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동기, 동현은 산호의 입술을 엄지로 꾸욱 눌렀다. 입술이 조금 더 벌어지자 그 안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거칠게 쑤셔 넣는다. 입 안으로 들어온 이물질에 산호의 인상이 바락 찌푸려졌다.
“…아, 으….”
그러나, 본능적으로 두꺼운 손가락을 핥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입 안 점막이 확 좁아지면서 손가락을 쪽 빨아올렸다. 제어할 수 없는 본능적 행위였다. 입술 새로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하, 씨발. 쟤 지금 손가락 빠는 거냐?”
“와, 미친.”
동현이 입 안을 헤집듯 손을 휘젓다가 산호의 혀를 꾸욱 눌렀다. 하아, 으. 산호는 고개를 저었지만, 얼굴이 잡혀있는 상태에서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약물로 인해 억지로 끌어올려진 페로몬의 영향으로 온몸에 힘이라곤 조금도 실리지 않은 상태였다.
“야, 백산호.”
“…흐.”
“맛있냐?”
“하으, 으, 흐….”
“더 맛있는 거 빨고 싶지?”
동현이 느물느물 웃었다. 몰려있던 무리 중 한 명이 동현의 어깨를 툭 쳤다.
“야, 김동현. 적당히 해. 뭐 하려고.”
동현이 그의 손을 거칠게 치우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발정난 오메가 데리고 뭐 하겠냐?”
“너 미쳤냐? 여기 학교야, 병신아.”
동현이 신경질적으로 산호의 입 안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산호의 달뜬 뺨에 타액으로 범벅된 자신의 손을 비벼 닦으며 저를 제지하는 친구를 향해 험악하게 입을 열었다.
“관심 없으면 넌 빠져.”
“…야.”
“씨발, 내가 이 새끼 얼마나 벼르고 있었는데.”
동현이 다시 산호를 향해 돌아섰다. 이성이 휘발된 험악한 눈이 번들번들했다.
“오메가 구멍이 그렇게 맛있다잖아. 알파 아니어도 오메가는 확실히 다르다던데?”
동현이 씨익 웃으며 주저앉은 산호의 무릎을 발로 툭툭 찼다.
“얼마나 다른지 좀 보자고.”
우악스러운 손이 산호의 팔을 거칠게 잡아 몸을 일으켰다.
동현에게 이끌려 간 곳은 연극과 학생들이 소품을 쌓아두는 창고였다. 고등학교의 체육 창고처럼 외진 곳에 위치한 공간이었다. 여러 가지 소품들은 물론 각종 의자와 테이블도 있었다. 동현은 벤치처럼 커다란 스툴 위에 산호를 거칠게 주저앉혔다.
“씨발.”
겁이 많은 친구 놈들은 꽁무니를 뺀 뒤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동현은 그놈들에게 산호를 나누어 줄 생각이 없었다. 힘없이 늘어진 몸으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이끌려온 산호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매서운 눈으로 동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동현이 아랫입술을 축축하게 핥으며 웃었다. 몸은 잔뜩 달아있으면서 반항적인 시선을 보내오는 산호의 모습에 사타구니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백산호, 기분이 어때?”
“…….”
입술을 거칠게 짓씹고 소리 내지 않으려 애를 쓰는 산호의 얼굴을, 동현은 즐거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건방진 얼굴이 엉망으로 젖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일 것이다. 결국에 저 냉랭한 얼굴이 달뜬 채 무너지고 벌어진 입술 새로 앙앙 신음을 쏟을 테니까. 클럽에서 만난 오메가 알선책이라는 남자가 동현에게 담배형 페로몬제를 나누어주며 흘린 말대로라면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너 오메가랑 해봤어?’
그 오메가 알선책은 동현이 오메가들에게 페로몬제를 구해주는 연결책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빙글빙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알파가 아니어도 오메가는 확실히 맛이 달라. 박으면 박는 대로 좋다고 울거든.’
‘…….’
‘그리고 남자 오메가는 더 그래.’
‘…….’
‘…남자 오메가요?’
‘이거 너 줄게.’
남자가 내민 담뱃갑을 받아들며 동현은 그를 바라보았다. 상표도 없는 민둥한 담뱃갑. 얇은 담배가 반쯤 채워진 그것은, 인쇄된 것 없이 허연 담뱃갑을 제외하면 정말로 시중에서 판매하는 담배 같아 보였다.
‘오메가들이 이거 피우면 효과 바로 와. 네가 싫다고 해도 걔들이 먼저 너한테 달라붙어서 좆 박아달라고 다리 벌릴 거라니까?’
‘…….’
‘주변에 남자 오메가 있으면 한 번 써봐. H대에 남자 오메가 있다고 들었는데. 경영학부였나.’
동현이 천천히 산호의 티셔츠를 말아 올렸다. 새하얀 피부는 결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매끄러웠다. 그리고 도도록하게 솟은 분홍색 유두. 그것은 마치 씹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비죽 서 있었다.
사실, 동현이 오메가들에게 페로몬제를 구해주는 일에 손을 댄 것은 백산호 때문이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은 그저 부수적인 이득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상냥한 표정을 지어주지 않는, 건방지고 냉랭한 백산호. 백산호가 정말 오메가일까? 정말 오메가라면… 끝없고 음습한 상상의 결실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동현에게 티셔츠가 끌어 올려져 가슴을 드러낸 산호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움찔 떤 것에 불과할 텐데도, 묘하게 저를 유혹하는 듯했다. 동현은 다시 한번 아랫입술을 핥았다.
“야, 이거 물어.”
동현이 억지로 산호의 볼을 꾸욱 눌러 입을 벌리곤, 산호의 티셔츠를 뭉쳐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웁, 산호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봐야 동현에게는 하찮은 움직임일 터였다. 가슴까지 말려 올라간 자신의 티셔츠를 억지로 입에 문 채 산호는 동현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눈가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자꾸만 물 먹은 스펀지처럼 몸이 가라앉았다.
“흐…으응.”
의지와는 상관없이 극도로 끌어올려진 성감이 산호의 온몸을 훑었다. 팬츠 아래 성기가 바짝 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울컥, 요도구에 맺힌 체액이 쏟아지는 것까지 생생했다.
“으…흐, 으응…으.”
그러나 더욱 생생한 것은 몸 안 가장 은밀한 곳이 반들반들 젖어 드는 감각이었다. 좁게 닫혀있던 구멍이 빠끔거리며 안달을 냈다. 산호는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동현이 낄낄거리며 산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볼록 솟은 산호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툭 튕긴다. 다시금 몸이 바르르 떨렸다.
“허리 존나 흔드네.”
“……으.”
“백산호.”
“…….”
“내가 어떻게 해줄까?”
“…하, 하지….”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지? 너 지금 뭐 하고 싶어 죽겠잖아.”
“아니…야, 하….”
“아니긴 뭐가 아니야.”
동현이 빼죽한 산호의 양쪽 유두를 손으로 꼬집어 당기며 큭큭 웃었다.
“젖꼭지 바짝 세워놓고 어디서 앙탈을 부려.”
“…하지, 으흥, 으, 마아….”
“너 지금 뒤에 간지럽지.”
동현이 집요하게 유두를 비틀고 누르며 말했다.
“뒤에 막 쑤셔줬음 좋겠지? 존나 큰 걸로 푹푹 쑤셔지고 싶으면서.”
“아니…아니….”
“네 젖꼭지에 내가 좆 비벼줬으면 좋겠잖아. 눈은 씨발, 다 풀려가지고.”
산호의 입이 헤 벌어지면서 동현이 물렸던 뭉쳐진 티셔츠가 툭 떨어졌다. 동현은 가슴을 가리는 티셔츠를 다시 거칠게 올리며 산호의 하얀 가슴을 와락 쥐었다. 살집이 없는 판판한 가슴을 억지로 모아 쥐며 동현은 잔뜩 열이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박아주세요, 해봐. 이 오메가 새끼야.”
“…바…아으…니야.”
“박아달라고 빌면 내가 박아줄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직접 엉덩이라도 벌려 봐.”
“시…으, 흐, 시러…읏.”
반쯤 벌어진 입술이 번들번들했다. 동현의 손바닥이 산호의 유두를 누를 때마다, 살을 거칠게 쥘 때마다 점점 더 더운 숨이 쏟아졌다. 동현이 산호에게 몸을 가까이 붙이며 바지 버클을 툭툭 풀기 시작했다.
“오메가들은 생자지만 보면 환장한다던데.”
“…흣.”
“아까 손가락 빨던 것처럼 내 자지 잘 빨면.”
“……으응, 흐….”
불룩 솟은 브리프가 산호의 눈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안에는 터질 듯이 발기한 성기가 있을 것이다. 동현은 느물느물 웃으며 브리프를 내리지 않은 채로 자신의 샅에 산호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왔다.
“하악, 아! 싫…!”
산호가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돌렸지만, 동현의 힘이 더욱 셌다. 뜨끈뜨끈한 열기로 축축해진 브리프 위에 산호의 하얀 뺨이 엉망으로 비벼졌다. 산호가 움직일 수 없도록 동현이 뒷머리를 손으로 가둔 탓이었다.
“손 쓰지 말고 입으로 벗겨서 빨아.”
동현이 허리를 뭉근히 튕기며 말했다. 번득이는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산호는 고개를 저을 뿐 동현의 욕심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씨발, 왜 말을 안 듣지? 페로몬제가 더 퍼지길 기다려야 하냐? 빨리 이 새끼 뒤 따고 싶은데. 산호의 가쁜 숨이 쏟아질 때마다 동현이 욕지기를 입에 물었다. 결국 동현은 참지 못하고 산호의 양 볼을 거칠게 쥐었다. 폭력적인 손놀림으로 산호의 입술 새를 마구 짓눌렀다.
“씨발, 입 열어. 안 열어?”
“으읍, 읍….”
“네가 직접 네 목구멍으로 내 좆대가리 조이란 말야.”
산호는 이를 앙 물었지만, 이성을 잃은 동현의 악력은 엄청났다. 입술을 뚫고 다시금 손가락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한 번 틈이 벌어진 입은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산호가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자, 눈꼬리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열꽃이 핀 눈꼬리에 눈물이 흐르는 모습은 가학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동현이 헤벌쭉 웃었다. 먼젓번보다 더욱 거칠게 입 안에 손가락을 넣어 휘저었다.
마디가 굵은 두 개의 손가락이 입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자, 넓게 헤 벌어진 입술 새로 타액이 질질 흘렀다. 젖은 눈을 감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빠져나올 방법은 없어 보였다. 끊어지기 직전의 이성을 부여잡은 채, 산호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흐트러진 힘을 겨우 끌어모아 이를 세게 콱 깨물었다. 입 안에 물려있던 손가락에서 우두둑, 하는 험악한 소리가 났다.
“으아악!”
동현이 멱이 따이는 짐승처럼 소리를 꽥 질렀다. 황급히 산호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는 동현의 얼굴이 시뻘겋다 못해 자줏빛으로 달아올랐다.
“피…피…!”
동현은 산호가 거세게 짓씹은 제 손가락을 바라보며 신음을 뱉었다. 시뻘건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크, 아… 씨…씨이팔….”
동현이 다른 쪽 손으로 다친 손을 쥐며 발버둥 쳤다. 그러더니 곧 양손을 휘둘러 산호의 뺨을 거세게 후려친다. 산호의 몸이 크게 휘청하면서 기다란 스툴 위로 풀썩 쓰러졌다. 몸을 일으킬 힘도 없이 산호는 고개만 돌려 동현을 노려보았다.
“하아… 으, 너 싫….”
단어가 되지 못한 말의 조각이 신음처럼 쏟아졌다. 동현은 이를 아득 깨물며 산호를 한대 더 후려치려는 듯 다시금 손을 들어올렸다.
“으윽.”
그러나 지혈을 하듯 손가락을 쥐던 손을 떼어내자 찢어진 손가락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동현은 점점 더 피가 솟구치는 자신의 손을 겁먹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시퍼런 멍은 물론 부기가 차오르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 뼈를 다친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난 모양이었다.
“백산호 너, 너… 여기서 얌전히 손으로 구멍이나 풀고 있어. 그거 어차피 해독제 없으면 열 시간은 넘게 지속되는 거니까.”
“…….”
“내 손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너 내가 가만히 두나 봐.”
“…흐읏.”
“깡패 같은 알파새끼들 죄다 데리고 와서 입이고 구멍이고 좆물 뒤집어쓰게 해줄 테니까. 알아들어?”
동현은 제 손을 꾹 쥔 채 소품 창고에 늘어진 물건들을 발로 뻥 차며 씩씩댔다. 마침내 동현의 발길질에 아그리파 석고상 하나가 와장창 부서지고 나서야, 동현은 거칠게 문을 열고 소품 창고를 빠져나갔다.
쾅, 소리의 잔음이 귓가를 왱왱 맴돌았다. 산호는 세게 입술을 깨물며 달달 떨리는 몸을 일으키려 힘을 주어 보았다.
“흐, 읏.”
그러나 도무지 힘이 실리지 않았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입술을 더욱 세게 물었다. 동현이 뺨을 후려칠 때 입술이 찢어진 모양인지 찝찌름한 피맛이 났다. 하아, 하아. 파도처럼 끝없이 부서지는 숨을 뱉으며 산호는 눈을 감았다.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온 몸을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제발 나, 나 좀 어떻게…
산호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끈을 향해 어렵사리 손을 뻗었다. 중심을 잃은 몸이 반쯤 굴러 스툴 아래로 미끄러졌다. 한쪽 팔꿈치로 겨우 스툴을 받쳐 몸을 지탱한 채 손을 더 뻗었다. 자꾸만 힘이 풀려 헛손질하기를 여러 번, 겨우겨우 가방을 손에 쥐었다. 무너지듯 스툴에 한쪽 뺨을 기대며 가방 안쪽을 더듬었다.
“하…아, 제발….”
가방 안쪽에서 낡은 자신의 핸드폰을 찾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이 액정을 더듬었다. 눈이 자꾸 흐릿하게 감겨왔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내달리고 있었다.
“…….”
핸드폰에 저장된 단 하나의 연락처. 빨간색 통화 버튼을 누른 후에야 손끝에 힘이 모두 풀렸다. 산호의 손에서 툭, 떨구어진 핸드폰이 파삭,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노랫가락 같은 통화 연결음이 지리하게 들려왔다.
산호는 달뜬 숨을 몰아쉬며 제가 입으로 물어 군데군데 타액으로 젖은 티셔츠를 위로 끌어올렸다. 동현의 희롱에 자극받은 유두가 여전히 꼿꼿이 서 있었다.
“흐으…응.”
스툴의 둥그런 모서리에 바짝 선 유두를 문질렀다. 금속성의 차가운 물질에 유두가 짓눌리자, 찌르르 별이 튀었다. 아, 제발… 허리가 무너지고 흥분이 들끓었다. 스툴에 기댄 몸이 움찔움찔 튀었다.
만지고 싶…
바지 버클을 풀고 스스로 드로어즈 밴드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발기한 성기가 드러난다. 산호가 숨을 뱉으며 자신의 성기를 말아 쥐었다. 이성이 끊긴 눈이 게슴츠레했다. 이미 엉망으로 젖은 성기는 질금질금 체액을 뱉고 있었다.
- ……
통화 연결음이 별안간 멎었다. 발신이 끊어진 것일까 싶었지만,
- …산호?
곧 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온몸에 전류가 찌릿하게 흘렀다.
“선…ㅂ…흐, 으흣…!”
퓨붓, 성기 끝에서 찐득한 정액이 왈칵 내뿜어졌다. 자신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만으로 사정을 이끌어낸 핸드폰 액정 위로 희끄무레한 정액이 후두둑 뿌려졌다.
- 산호야.
“흐, 으… 선배… 선….”
- 무슨…
한 번의 사정으로 성감이 가라앉을 리 없었다. 여전히 심을 꼿꼿이 세운 성기를 말아 쥐며 산호가 학, 학 숨을 골랐다. 이성이 점점 더 옅어졌다. 핸드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가 폭력적인 성감을 더욱 부풀렸다.
- 어디야.
“……흐윽.”
- 기다려. 금방 갈게.
***
운전석에 앉은 시우는 시동도 켜지 않은 채 핸들을 손으로 꾸욱 쥐었다. 차창 너머로 정문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얕은 한숨을 쉬었다. 수업이 끝난지 꽤 되었을 텐데. 밀물과 썰물처럼 학생들이 우르르 모였다가 또 한바탕 우르르 빠져나가는 정문 앞 버스정류장을 흘긋 바라보며 시우가 핸들을 톡, 톡 두드리고 있을 때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시우는 액정을 바라보고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 이사님.
“네, 실장님. 말씀하세요.”
- 오메가 알선책 확인했습니다.
아, 시우가 눈썹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꾸욱 누르며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정황이 발견되어서.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한 정황?”
- 네. H대생들과 연락이 잦았던 알선책 하나가, 최근에는 오메가에게 페로몬제를 구해주는 연결책들과 자주 접선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때 핸드폰이 다시금 진동했다. 통화 중에 다른 전화가 수신되는 모양이었다. 시우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은 정 실장의 이야기가 더 중요했다.
“계속하세요.”
- 연결책에게 최음 성분이 있는 담배형 마약 페로몬제를 흘리는 것 같습니다.
“…마약 페로몬제라면.”
- 최근 들어 퍼지기 시작한 마약 종류인데, 한 번만 흡입해도 급속도로 퍼져서 빨리 해독하지 않으면 곧바로 중독되는 신종 마약입니다. 성매매용으로 개발된 거라, 일반인들은 쉽게 손에 넣기도 어려운 물건인데…
시우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시우가 입을 열려는 찰나, 정 실장이 조심스레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 그게 H대 경영학부생 중 연결책을 하는 학생에게 다량 흘러간 것 같습니다.
경영학부…? 정 실장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정 실장은 확실한 사실이 아니고서야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남자다. 더군다나 이런 지저분한 이야기를 구태여 시우에게 전했다는 건… 불안을 머금은 생각이 꼬리를 무는 와중에도 수신되는 전화는 끊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끈질기게 울려댔다. 시우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짜증스럽게 액정을 확인한 시우의 눈에 당황의 기색이 떠올랐다. 시우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실장님, 다시 연락드릴게요.”
정 실장의 통화를 끝내고 수신 전화를 황급히 연결했다. 불안한 예감이 온몸을 진득하게 훑고 지나갔다.
“…….”
통화가 연결되었음에도 핸드폰 너머는 고요했다. 그것이 불안한 예감에 더욱 불을 지폈다.
“…산호?”
시우가 입을 뗀 순간, 잔뜩 습기 먹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선…ㅂ…흐, 으흣…!
곧 하악, 밭은 숨소리와 함께 털썩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그것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웅웅거리며 울렸다.
“산호야.”
시우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산호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말이 아닌 신음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달뜬.
- 흐, 으… 선배… 선…
“무슨….”
망연히 중얼거리던 시우의 표정이 곧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오메가 알선책. 그리고 페로몬제 연결책. H대 경영학부. 최음 성분의 담배형 마약 페로몬제.
“어디야.”
응응거리는 울음이 들려왔다. 완전히 표정이 지워진 싸늘한 얼굴로 시우는 이를 아득 깨물었다.
“기다려. 금방 갈게.”
핸드폰을 꾸욱 쥐며 황급히 차에서 내려섰다. 등 뒤로 차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호는 학교에 있는 게 분명했다. 정문을, 그리고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면, 우연을 가장해 그 애를 만날지도 모르니까. 수업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니, 단과대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단과대로 향하는 걸음이 초조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시우는 멈칫하며 우뚝 멈추어 섰다.
“……페로몬….”
공기 아래 가라앉은 오메가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꽤 묵직한 페로몬이었다. 지금 느껴지는 것은 미약했지만, 이만큼 묵직한 페로몬이 새어나왔을 정도라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 오메가가 이런 페로몬을 흘린다고? 말도 안 됐다. 시우는 페로몬이 흘러오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건물 구석, 단과대 학생들이 주로 흡연을 하는 장소 방향이었다.
담배형 페로몬제와 흡연 장소.
명백한 연결점이 윤곽을 드러내자, 걸음이 다시 가빠지기 시작했다.
“…….”
벤치들이 줄지어 놓여있는 흡연 장소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시간이면 의례히 한두 명의 학생들이 있을 법도 한데, 부자연스러울 만치 텅 비어있었다. 공기 중에 잔존하는 페로몬의 흔적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씨발, 전에 없이 욕을 씹으며 시우가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번만 흡입해도 급속도로 퍼져서 빨리 해독하지 않으면 곧바로 중독되는 신종 마약입니다. 성매매용으로 개발된….’
사실 이 모든 게 자신의 과민한 상상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다행일터다. 하지만 아니라면. 시우는 이를 아득 깨물었다. 시한폭탄처럼 시간은 목을 졸라오는데, 자신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기분이었다. 느껴본 적 없는 무력감이었다. 시우는 이를 세게 사리물며 더듬더듬 페로몬의 흔적을 찾아 발을 뗐다. 우성알파의 날 선 감각이 한 줄기 빛 같은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예술대 학생들이 쓰는 창고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연극과 학생들이 소품을 모아 놓는 곳이었다. 낡고 외진 곳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녹색의 철문은 평소와 다름없이 우뚝 서 있었지만, 어지러운 발자국과 군데군데 점점이 떨어진 검붉은 자국은 이질적이었다. 피…?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쾅,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자 텁텁한 먼지가 공기 중으로 훅, 흩어졌다. 자욱하게 흐트러지는 뿌연 먼지 사이로 자욱하게 페로몬이 가라앉아 있었다. 약물에 절은, 누가 보아도 비정상적인 오메가의 페로몬. 인기척이 느껴지는 안쪽으로 시우는 다급히 달려갔다.
“…산…!”
티셔츠를 가슴까지 끌어올린 채, 기다란 스툴 위에 기대어 있는 하얀 몸뚱이가 발발 떨고 있었다. 푹 숙여진 머리와 새까만 머리카락은 땀에 절어 척척히 목덜미에 달라붙어 있었다. 바지 버클도 엉망으로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곧게 발기한 성기를 감싼 하얀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우의 달음질 소리를 들은 것인지, 하얀 몸뚱이가 시우를 향해 돌아섰다.
“…….”
산호의 하얀 얼굴이 온통 흐트러져 있었다. 눈꼬리와 뺨은 발긋하게 달아올랐고, 갸름하게 벌어진 입술 새로 타액이 지익 흘렀다. 초점 없이 흐린 눈동자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나 망막에 시우가 비치자 산호는 무릎으로 기어 시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산호야, 일어…!”
“저어, 나, 나 좀… 어떻게….”
지저분한 흙 알갱이가 산호의 무릎에 지익 긁히며 마찰음을 냈다. 시우가 허리를 굽혀 산호를 안아 일으켰다. 매끄러운 맨살 위에 시우의 큰 손이 닿자, 산호의 어깨가 파득 떨렸다.
“아…!”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자극이 느껴지는지, 산호의 입술이 조금 더 벌어졌다. 안다시피 산호를 지탱해 스툴에 앉히는데, 힘이 빠진 산호의 몸이 앞으로 풀썩 쓰러져 시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더운 숨이 여과 없이 시우의 목덜미에 닿았다. 시우가 산호의 어깨를 잡아 바로 세우려는 찰나, 더운 숨을 뱉던 입술이 목덜미를 물었다.
쭙, 쭈웁, 서툴게 빨아대는 입술에서 질척한 소음이 났다. 요령 없이 흡입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자극적이었다. 발간 혀가 날름 기다란 목선을 핥아 올렸다. 시우의 눈썹이 잘게 찌푸려졌다.
“산호야, 정신-.”
“저, 빨고…싶어요.”
탁한 목소리가 시우의 목덜미 여린 살을 씹으며 웅얼웅얼 말했다. 매달리듯 시우의 어깨를 답싹 쥔 산호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마구 할퀴고 싶은 듯 손끝이 서자, 도톰한 니트 카디건 사이로 손톱이 쿡 박혀들었다.
“소, 손 안 쓰고…할게요.”
산호의 무릎이 다시 풀썩 꺾였다. 등에 업기 위해 시우가 애써 앉힌 스툴에서 다시 주르르 미끄러져 무릎에 땅을 대고 털썩 주저앉는다. 시우가 다시 산호를 일으키기 위해 허리를 굽혔지만, 이내 멈칫했다.
“나 이거… 빨…아, 으, 빨고 싶어.”
산호가 시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샅에 뺨을 문질렀다. 의미가 통하지 않는 단어를 읊조리며 새액 새액 숨을 뱉었다. 잇새로 서툴게 바지 지퍼를 물어 지익 아래로 끌어내린다.
“백산호.”
시우가 산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거칠지는 않았지만 힘이 실린 손길이었다. 발그레해진 산호의 눈꼬리에 아룽아룽 눈물이 젖었다. 산호가 여전히 뺨을 비비며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저… 간지러, 운데… 기분이 이상, 해서.”
“산호야. 나 봐봐.”
“여기… 너무 뜨, 거워.”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 보였다. 시우가 걸쳤던 카디건을 황급히 벗어 산호의 몸을 감쌌다. 끌어안으려는 찰나, 산호가 몸을 숙여 자신이 입으로 지퍼를 내린 버클 사이의 드로어즈 위를 핥아 올렸다. 산호의 부드럽고 탄력 있는 혀가 마구잡이로 비벼지자, 드로어즈 안 성기가 딱딱하게 힘을 받기 시작했다. 버석한 면 위에 엉망으로 타액을 묻히며 산호의 작은 머리통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여전히 혀를 내어 핥으면서 산호는 고개를 들어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눈꼬리가 점점 더 짓물렀다. 시우가 이를 아득 깨물며 산호를 번쩍 안아 일으켰다.
시우가 산호의 양팔을 꽉 쥔 채 허리를 조금 숙인다. 산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시우가 잇새로 읊조렸다.
“백산호.”
“……으응.”
“나 누구야.”
“……응?”
“나 누구야. 말해봐.”
초점을 모으려는 듯 산호의 미간이 애처롭게 찌푸려졌다. 눈꺼풀이 두어 번 끔뻑였지만, 텅 빈 눈동자에 비친 시우의 얼굴은 그저 비추어내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냥, 저, 좀 어떻게 해…주면….”
시우가 눈을 꾹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가슴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숨을 뱉으며 시우는 단호하게 눈을 떴다.
“지금 여기에 다른.”
“…….”
“내가 아니라, 다른 새끼가 산호 너, 먼저 찾았으면.”
그럼 그 새끼한테 이렇게… 뒷말을 씹으며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굳은 턱 근육이 뻣뻣했다. 산호가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사람한, 테… 안 할, 안 해요. 내, 거…만.”
“…….”
“내 거, 한테만 이럴 거, 에요. 내….”
시우가 산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작은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큰 손으로 뒷머리를 가득 당겨 안았다. 맞닿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냥 이대로 한없이 안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다. 산호가 정말 그 담배형 페로몬제에 입을 댄 것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해독제를 맞아야 했다.
시우가 힘없이 흔들리는 산호의 어깨를 감싸고 무릎 오금을 받쳐 품으로 안아 올렸다. 자신의 카디건이 산호의 어깨 위에 둘러졌다.
“조금만, 참아.”
시우가 자신을 안아 올리자 조금 당황한 모양인지 산호가 바둥댔다. 물론 힘이라곤 조금도 실리지 않아서, 행동에 제약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산호의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아파? 산호야, 아픈 거야?”
으응, 산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아픔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일 것이다. 시우가 다급히 창고를 벗어나 차가 주차된 곳으로 향하며 입술을 깨물고 있는 산호를 내려다보았다.
“나 안아.”
“아, 안으면….”
“안아. 깨물든 할퀴든 다 괜찮으니까.”
품에 안은 것만으로도 산호가 얼마나 달뜬 열기를 품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산호의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시우의 뒷덜미를 감싸 안았다. 따뜻한 흙냄새. 산호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짙게 느껴지는 시우의 체취에 단전에서 울컥 열기가 솟구친 탓이었다. 배출할 수 없는 욕구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끄으, 산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시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곧 통통한 입술이 잘근잘근 목덜미를 씹었다.
차가 주차된 곳은 캠퍼스 가장 넓은 대로변이었다. 여기저기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카디건으로 흐트러진 산호를 감싸긴 했지만, 시선을 모두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붉은 자국이 곳곳에 물든 자신의 목덜미와, 입술을 댄 산호, 그리고 입을 떡 벌린 채 둘을 바라보는 여러 개의 시선. 하지만, 지금은 그것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시우 선배…? 왜 그래요? 무슨 일 있….”
누군가 시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외면한 채 시우는 달리다시피 걸음을 뗐다. 산호를 안은 팔에 울컥 힘이 들어갔다. 저를 안은 팔에 힘이 실리자 산호가 으, 아, 하고 울었다.
시우 선배 왜 그래? 뭐 하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쟤 누군데? 누군데 선배한테 안겨서… 잠깐만, 저거 백산호잖아. 쟤 설마 지금… 야, 사진 찍어. 쟤 뭐 하는 거야? 진짜 미쳤어? 내가 설마 잘못 보는 거냐? 여기저기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시우는 입을 꾹 다물고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산호의 뒷머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
“…….”
“이제 괜찮아.”
산호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대며 시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주변의 시선도, 웅성거림도, 지금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
시우는 가만히 낡은 호텔 룸 침대 위에 누운 산호를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얼굴이 조금의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천천히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쓸어보았다. 시우의 손끝이 뺨에 닿자, 산호의 눈꺼풀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침대 기둥에 걸린 팩에서 투명한 수액이 똑, 똑 일정한 박자로 떨어지며 튜브관을 타고 흘렀다. 산호의 하얀 팔뚝에는 굵은 주삿바늘이 꼽힌 채였다. 유달리 굵은 주삿바늘을 바라보곤 시우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널따란 호텔의 침실은 평온했고, 사방은 고요했다. 시우의 마음속과는 무척이나 다르게.
‘페로몬 해독제와 진정제 처방했습니다.’
열 두어 시간 전 다녀간 주치의는 그렇게 말했다. 시우가 알파로 발현한 이후 주욱 시우를 담당해온 주치의였다. 형질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인 그의 어두운 표정과 낮은 목소리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수액이 다 들어가고 나서도 한동안은 깨어나지 못할 겁니다. 한 10시간 정도. 어쩌면 더 오래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
‘이 정도 농도의 해독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마취가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니지만… 호흡기로 직접 약물을 흡입한 경우라, 깨어났을 때 부작용처럼 기억이 흐릿할 수도 있어요. 술을 많이 마셨을 때의 블랙아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주치의의 설명을 들으며 시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시우의 어두운 표정을 바라보며 주치의가 잠시 머뭇댔다.
처음 연락을 받은 그는 당황했었다. 병원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닌 JR 호텔로 와 줄 것을 부탁하는 시우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다급했으니까. 낯선 남자를 부탁하는 시우의 얼굴은 목소리보다 더욱 절박했다. 시중에 돌고 있는 담배형 마약 페로몬제를 흡입한 것 같다는 설명을 하는 내내 그랬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시우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불법적인 약물을 흡입한 상황에 호기심 어린 이목을 끌고 싶지 않은 것일 터다.
환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전형적으로 오메가를 성노리개로 만들기 위해 개발된 마약을 흡입한 것이 분명했다. 본래 그런 약물은 치명적인 법이다.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학생이 어떻게 이리도 위험한 약에 손을 댔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잠시 망설인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불법으로 유통되는 마약이라면… 신고는.’
시우는 그를 향해 난처한 듯 웃어 보였다. 김 교수님, 감사해요. 다음에 다시 찾아뵐게요. 시우의 어조는 확실히 그에게 자리를 뜨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는 시우를 빤히 바라보고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치의 말대로 산호는 12시간째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뜰 무렵이 될 때까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뒤척이지도, 처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지도 않았다. 그저 인형처럼 누워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의 흔들림에도 안도감이 밀려오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지금은 이 애가 무사하다는 아주 작은 신호라도 갈급했다.
시우가 다시금 산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올릴 때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새벽에 가까운 아침 시간. 기계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리는 시우의 표정이 몹시도 푸석했다.
“…….”
- 이사님.
작게 숨을 뱉으며 시우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네, 실장님. 죄송한데… 지금 제가 조금 피곤해서. 급한 일 아니면 다음에-.”
- 죄송합니다, 이사님. 회장님 말씀이십니다.
시우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올려 떴다. 굳어가는 입매를 손끝으로 훑었다.
“…말씀하세요.”
- 본가에 들어오셨으면 하십니다.
“…….”
- 최대한 빨리 들어오시라고…
굳은 입매를 훑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시우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잠든 산호의 얼굴 위에 닿았다. 자리를 비운 동안 이 애가 깨어날지도 모르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시우가 이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바로 갈게요.”
***
철컹, 소리가 들리고 족히 3미터는 넘어 보이는 대문이 스르르 열렸다. 시우는 대문을 넘어 익숙한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이슬을 머금은 잔디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곱게 손질되어 있었다. 길게 늘어진 길을 따라 걸어 현관문 앞에 서자, 고풍스러운 스테인리스로 장식된 문이 다소 성급하게 발칵 열렸다.
“아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여자가 양팔을 벌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시우의 모친이었다. 시우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어머니, 잘 계셨어요?”
“얘는. 얼굴 잊어버리겠다. 이 엄마가 보고 싶지도 않았니?”
“그럴 리가요.”
시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쓸자,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을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고운 얼굴이었다. 시우와 꼭 닮은 얼굴. 그녀는 어깨에 걸친 숄 카디건을 여미며 시우를 향해 손짓했다.
“어서 들어오렴. 아버지가 계속 기다리셨어.”
시우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를 향해 웃어 보였던 얼굴이 천천히 식어갔다.
조찬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한 차림이 테이블 위를 가득 메웠다. 사용인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이, 어머니 역시 쉴 새 없이 말을 건네며 음식을 날랐다. 샐러드와 구운 야채, 밀도 높은 빵은 보기 좋게 썰려 있었고, 두툼한 스테이크가 차례로 놓여졌다. 시우는 말없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아침엔 가볍게 먹는 게 좋지. 그래도 오랜만에 우리 아들 오는데 영 신경이 쓰여서.”
어머니는 무척 즐거운 듯 말했다. 시우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옆에 앉은 진 회장 역시 아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침부터 피곤하겠구나. 이 사람이 네가 보고 싶다고 어찌나 속을 끓이던지.”
“죄송해요.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작게 썬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시우가 말했다.
“죄송할 것 없다. 다 큰 자식 언제까지 끼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니.”
조금은 뻣뻣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시우는 손목의 시계를 흘끗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어머니가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영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이런, 깜빡할 뻔했네. 여보, 과일 좀 내올게요.”
어머니가 진 회장의 팔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아들 과일 좋아하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람이라도 불러서 가져올 걸 그랬어. 웃으며 자리를 뜨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우는 다시금 어색하게 웃었다. 마주 앉은 진 회장이 눈을 올려 시우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요즘 흉흉한 소문이 돌더구나.”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검사장이 마약 성분이 들어간 페로몬제가 유통되고 있어서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라고 하더군.”
“…네.”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며 시우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진 회장이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천천히 허리를 곧게 세워 앉았다.
“시우 너도 관심이 있는 모양이지?”
나이프를 쥔 시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짧게 숨을 들이마신 시우가 가만히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곧게 세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네. 불쾌해서요.”
진 회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나이프를 들어 올렸다. 두툼한 스테이크 위로 날이 선 나이프가 올랐다.
“오메가는 늘 문제가 되는구나.”
“…….”
“단 과일에는 언제나 벌레가 꼬이기 마련이지 않니.”
“…….”
“달면 달수록 더 그런 법이야. 먹음직스러울수록 말이다.”
서걱, 서걱. 날이 선 나이프에 질 좋은 스테이크가 썰리는 소리가 생생했다. 식기와 나이프가 부딪히는 짤막한 마찰음. 핏빛 살점 사이로 육즙이 주욱 흘렀다.
“그런 건, 먹을 게 못 되지.”
진 회장이 나이프를 내리자 달그락 소리가 났다. 인자하게 미소를 띤 입가가 갸름하게 벌어졌다.
“벌레가 갉아먹은 과일에 입을 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니.”
스테이크를 입가 가까이 끌어올리며 진 회장이 너그럽게 웃었다.
“그런 걸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다.”
포식자의 입 안으로 피식자의 살점이 씹혀 들어갔다.
“…….”
섬세하게 음각이 새겨진 장식장 앞에 선 시우는 유리 너머 오도카니 놓여있는 도자기 인형을 응시했다. 집안의 물건들이 그러하듯 먼지 한 톨도 앉아있지 않은, 말끔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말끔하다고 해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은 빛이 바랬고, 조금은 낡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뻤다. 하얗고 매끄러운 표면, 칠흑처럼 새까맣게 도색된 머리카락,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마치 시우를 빤히 올려다보는 듯했다.
“…….”
장식장 문을 살며시 열고 시우는 인형의 뺨에 손을 대어보았다. 단단한 무기질의 표면인지라 당연히 차가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인형은 희미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 햇빛을 머금은 듯한 잔잔한 온기였다. 시우는 인형의 매끄러운 뺨을 쓸어내렸다. 장난스레 오밀조밀한 입술도 쿡 찔러보았다. 인형의 얼굴이 그 애처럼 슬쩍 찌푸려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람의 피부와는 달리 단단하고 건조하지만, 시우는 조심스레 인형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얘, 정말 엄마 서운하게 벌써 가는 거야?”
시우는 잠에서 깬 듯 다소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장식장 문을 닫고는 어머니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어린 소녀처럼 입을 비죽이며 서 있는 어머니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죄송해요.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어머니는 아들의 따뜻한 포옹에 마음이 풀어졌는지 이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대신 다음에 이 엄마랑 데이트하기로 약속하는 거다, 알겠니?”
자신보다 훌쩍 커버린 아들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말한다. 시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아들을 배웅하고 들어온 시우의 모친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장식장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였다. 조금 전 제 아들과 똑 닮은 듯한 뒷모습에 슬쩍 웃음을 흘렸다. 진 회장의 옆으로 살며시 다가서며 그녀가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시우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이 인형이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음.”
진 회장은 목울대를 울리며 장식장 너머 새하얀 도자기 인형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동안 인형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그가 느릿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 인형 그만 처분하지.”
“…네?”
“아니, 아예 깨트려서 없애는 게 좋겠군.”
그녀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응, 왜? 당신이 아끼는 거잖아요, 이거.”
진 회장은 자신의 턱 끝을 살살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벌레가 꼬일 싹은 미리미리 자르는 게 좋지 않겠소?”
의아한 표정의 그녀를 마주 보며 진 회장이 가볍게 웃었다.
***
빨간색 융단이 깔린 복도를 따라 걷는 시우의 발걸음이 초조했다.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는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제법 시간이 흐른 탓이었다. 커다란 엘리베이터와 마주 보고 있는 초록색 비상구 표지판을 흘끗 바라보고는 시우는 문 앞에 섰다. 카드키를 대자 드르륵,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우는 가만히 문을 열었다.
룸 안은 조용했다. 애초에 JR 호텔 최상층인 이곳 시크릿 룸에는 직원조차 발길이 뜸한 편이었다. 게다가 당분간 사람을 물려달라고 이야기해 놓았으니 당연할 터였다. 병원 대신 이곳으로 산호를 데려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의 불필요한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아서. 시우는 슬쩍 눈썹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산….”
커다란 응접실을 지나 침실 안을 들여다보곤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산호가 침대 위에 엉거주춤 앉아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경계로 얼룩진 눈빛이 시우를 확인하는 순간 와르르 허물어졌다. 산호가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오려는 듯 몸을 틀었다.
“아냐, 그냥 누워있어.”
시우가 희미하게 웃으며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섰다. 산호가 다소 긴장을 풀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는 것을 바라보았다. 머리맡에 살짝 걸터앉아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산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푸석한 얼굴이긴 했지만, 확실히 조금은 혈색이 돌아온 듯 보였다.
“언제 깼어?”
“조금 전에요.”
예상보다 훨씬 더 힘이 없는 목소리에 시우의 눈썹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산호가 찌푸려지는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듯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선배, 여기 어디….”
아. 시우가 찌푸린 얼굴로 마지못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음, 이제 산호 네 집.”
“네?”
산호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눈이 조금 크게 뜨인 것이 제법 당황한 모양이었다. 무거웠던 마음이 일순 풀어지는 기분에 시우가 작게 웃었다.
“농담 아닌데. 진짜 네 집이야.”
산호가 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표정이 꽤 무감했다. 새까만 동공 너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눈을 떠 보니 낯선 곳에 누워있었을 산호의 심정을 가늠해 보았지만, 이 애가 이상하리만치 침착하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도 상황은 말해줘야 할 테지.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시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제 학교에서 있었던 일, 기억나?”
갸름하게 벌어져 있던 산호의 입술이 꾸욱 다물렸다. 옅었던 표정도 금시에 흩어졌다. 잠시간 텅 빈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산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꽤 단호한 목소리에 시우가 산호를 마주 보며 자신의 입매를 톡톡 두드렸다. 산호가 물었던 목덜미의 상흔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부모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목이 올라오는 니트를 입었다. 산호에게도 울긋불긋한 자신의 목덜미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애는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까.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 걸까. 곧 시우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입매를 끌어올렸다.
“네가 조금 아팠어.”
“…….”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그래서 내가 여기로 데려왔어.”
“…….”
“의사도 다녀갔고, 수액도 맞았고. 오래 잠들어 있었는데… 이제 괜찮을 거야.”
산호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수액이 연결된 자신의 팔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시우를 마주 보았다. 시우가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산호에게 손을 뻗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는 듯 올라가던 손은 허공에서 천천히 멈추었다. 곧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래서 당분간은 여기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당분간…요?”
“오래 있어도 좋고.”
시우는 잠시 망설였다. 허름하긴 해도 제 집이 편할 터다. 어디인지도 모를,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곳에 머무르라는 자신의 권유가 퍽 이상하게 들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무슨 말로 설득해야 할까. 누군가 악의적으로 너에게 페로몬제를 피우게 했으니 위험하다고? 누군가 이성을 잃은 너를 억지로 범하려 했어, 그것도 꽤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지금도 단내가 쏟아지는 너를 그 위험한 집으로 돌려보낼 순 없어. 사실을 말해주는 게 옳을까.
산호는 말간 눈으로 시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까만 동공이 깜빡였다.
“선배가 그러라면 그럴게요.”
시우는 앞뒤 없는 핑계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산호를 향해 눈꼬리를 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
무언가 생각난 듯 시우가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박스를 꺼내 산호에게 내밀었다. 최신 기종의 핸드폰이 담긴 박스였다. 산호는 제 손에 쥐어진 박스와 시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우가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내가 네 핸드폰 떨어트려서 고장 났거든.”
“…아.”
“미안.”
산호가 핸드폰 박스를 손바닥으로 스윽 훑었다. 시우가 웃으며 눈짓했다. 열어보라는 의미였다. 다소 서툰 손길로 산호가 박스를 열었다. 매끈한 핸드폰을 손안에 쥐고 전원 버튼을 켜자 액정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개통된 거니까 바로 써도 돼.”
“…네.”
시우가 잠시 난처한 눈으로 산호를 바라보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학교… 당분간 쉬면 좋겠는데.”
산호가 고개를 들었다. 또다시 의문스러운 눈길이 시우를 향했다. 시우는 조금 더 난처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너 많이 아팠거든. 교수님한테 얘기해 놓으면 학교 쉬어도 괜찮을 거야.”
“…저, 인턴은….”
시우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그러나 곧 매끄럽게 웃어 보였다.
“그것도 괜찮아. 내가 잘 말해 놓을게. 일주일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푹 쉬어.”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듯 허리를 세우자 산호가 다급히 시우의 소매를 잡아왔다. 시우가 자신을 붙잡는 산호의 손끝을 내려다보곤 천천히 산호를 바라보았다.
“선배….”
다시 침대 머리맡에 앉으며 시우가 대답했다.
“응.”
“일주일 동안 여기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시우의 입이 천천히 다물리자, 산호가 초조한 듯 눈꼬리를 움찔 떨었다. 두서없이 입을 여는 품새가 제법 초조한 듯 보였다.
“그냥… 넓잖아요. 여기. 선배는 어차피 학교도 갈 거고, 회사도 갈 텐데. 저 혼자 여기 있으면 심, 심심….”
“…….”
“아니, 무서울 것 같은데.”
여전히 시우의 입술이 다물린 채 조금도 미동이 없자 산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무도 우리 안보잖아요. 어차피 선배네 회사 호텔이고, 아무도 안 올 텐데.”
산호는 우물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혼자… 있기 싫은데.”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에 시우가 픽 웃었다. 꽤 조심스러운 손길로 산호의 귀밑머리를 살짝 넘겨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일주일 동안 내가 룸메이트 해줬으면 좋겠어?”
룸메이트… 산호가 입술을 달싹이며 시우의 말을 따라 했다. 입술을 앙다물며 고개를 끄덕인다. 시우가 다시 픽 웃었다.
“그래. 룸메이트 해. 일주일 동안.”
시선을 내리며 산호가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산호를 바라보는 시선과 미묘하게 엇갈린 시선이었다. 여기가 JR 호텔이라고 말해준 기억은 없는데. 아무도 안 올 거라는 말 역시. 시우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사이, 살짝 고개를 숙인 산호는 보이지 않게 입술 점막을 짓씹었다. 방금 전,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আৱদ্ধ ফেৰ'মন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