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이었던 자 중 하나가 사람으로 돌아와 조금 나이 든 여인이 되어 입을 연다.
"당신은 절에서 내려오는 전승 중 하나로 기록된 인물입니다." 늙은 여인이 가만히 주지승을 응시하자 주지승은 조용히 일어서며 따라오시지요, 라고 손짓한다.
경건하고, 긴장되고,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 순간들이었다. 실제로 아무도 서재에 도달하기 까지 숨을 쉬는 감각이 없었다.
오늘에서야 나는 내가 숨을 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스님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곳 벽을 둘러싼 탱화는 무언가 들려주는 듯한 입과 눈을 가지고 있다. 알 수 없는 글자들도 적혀 있다.
타인의 눈에는 우리는 분명 사이비일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공포 영화에서 나올 법한 족속들이 맞다.
스님은 탱화 중앙의 부처 이마를 지긋이 눌렀다. 사실 부처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튀어나온 손잡이를 열고 어떤 입모양을 했다.
단어처럼 들리지도 않았지만, 어떤 말이었을 것 느낌을 준다. 알려지지 않았을 것 같은 단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는 꺾여진 소리, 음산하지만 안정적인 어떤 발음이었다.
문고리가 휘청이며 열리고, 스님은 매우 두껍고 튼튼해보이는 가죽커버의 책을 꺼낸다. 오래된건지 검게 보이는 짙은 갈색이다. 울퉁불퉁한 면도 있으나 잘 모르겠다.
"용의 가죽으로 덧씌운 책입니다. 주술이 걸려있어서 책을 보존할 수 있었죠. 그러나 읽을 수 있는 자가 읽게 되면" 스님은 잠깐 눈을 감는다. 걱정하는 것 같았다.
"책은 사라질 겁니다. 그런 주술입니다. 다행히도 여러 아수라들과 당신처럼 붉은 빛의 아수라들도 보았지만 이 책을 읽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읽힌 책들은 사라졌으니까요. 불행히도 이게 마지막 권입니다. 이 절에서는 이게 마지막 남은 전승이며, 처음으로 온 자들이 후대를 위해 남겼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같이 읽죠." 내 말투는 무모하고 당당했다.
"혹시 저 말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더 있지 않을까요?"
"이미 절에는 네 아이가 더 있지만 책은 열리지도 않았죠. 알맞은 자가 손을 대면 빗장이 풀리는 책입니다." 스님은 나를 살짝 흘겨보았다.
살짝 창피해져서 기분이 상했다. 나는 보여주기라도 하듯 손에 책을 대려 했다.
다 대기도 전에 빗장이 풀리고, 책이 스스로 열린다.
이윽고 글자들이 보인다. 어떤 글자는 검었다. 몇 글자는 붉었다.
내가 이걸 다 기억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 순간
그 검고 붉은 글자들이 하나하나 책에서 벗겨져 떨어져간다. 그리고 빛을 발하며 나에게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항상 이렇게 갑작스러운가. 왜 나는 무력하게 변화하는가.
책이 푸스슥 사라지는 소리와 함께 글자들이 내 이마로 쏟아져 내려온다.
나는 알고싶지 않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건 내가 배운 언어 뿐이다. 심지어 옛 생의 글자를 읽을 수도 없다.
그러자 글자들은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나타났다.
내가 본 이미지들을 설명해서 쓰자면 이러하다.
알려져서 안되는 비밀들이었다.
나만 알아야 할 게 당연했다.
그것은 전쟁이었으나,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붉은 아수라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었다. 나도 개 중 하나의 붉은 아수라였다.
그들은 지옥, 아니면 내가 지옥이라고 알고 있었던, 다른 공간, 혹은 다른 우주의 어떠한 공간에서 왔다. 그곳은 나와 같은 불들로 이루어진 것들, 혹은 자연물로 이루어진 것들, 자연과 비슷한 것들, 폭력과 닮은 것들, 혹은 땅에서 나온 것들, 그들은 불화와 폭력을 일삼았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적인 힘이다. 죽이고 나서 떨어진 것들은 다른 아수라를 낳는다.
내가 지옥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인간들처럼 보이는 살로 된 미지의 이질적인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어느새 하나 둘 씩 모여 아수라의 생리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아수라는 인간과는 달랐다. 인간을 존중해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폭발적인 힘이었으며, 멈추지 않는 뜨거운 강이었고, 괴로움을 모르나 인간들에겐 매우 뜨겁고 두려운 것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는 아수라의 신체는 아마 인간들은 보지 못하는 것인 듯 했다.
즉 인간들은 이유없이 죽어나갔다. 떨어져간 아수라에 의해서 다시 올려지고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아수라는 생명력이 가득한 존재이기에, 또 힘과 가장 비슷한 존재여서 인간들은 구축당하고 분해당하고...
여튼 이걸 읽는 이에겐 좋지 않아보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처럼 생기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어떤 눈으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지는 커녕 정형화된 형체라고 할만한 게 없는 존재도 많았으니까. 차라리 불꽃이나 갈라진 땅이라고 부를 만한게 다수였다. 우리는 이름이나 명칭이랄만한 것도 없었다.사람 기준으로 무척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아수라 중 하나가 인간의 구성물을 입게 된다.
사실 입는 법을 알게 된 것에 더 가까웠다.
알 수 밖에 없던 것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쏟아져나왔다. 처음에는 원숭이 같은 사람들, 그 다음 내가 인류의 역사에서 배운 차례대로, 어지간히 우스꽝스러운 옷들, 여러 장식물이 달린 옷들, 여튼 복잡하고 화려하게 치장된 살갗의 사람들이 잡아먹힌다.
그리고 아수라들은 사람을 흉내내게 되었다.
흉내내는 법을 아는 자. 그들은 스스로에게 이름을 부여했다. 인간의 지성을 흉내내기로 한 것이다.
이윽고 이 방식을 익힌 이들은 사람의 세계로 넘어온다.
태초의 아수라는 한참 후에 지구에 태어난다.
이전의 많은 아수라가 자신의 움틀거리는 힘을 참지 못해 유산되거나,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말을 때기도 전에 죽는다.
태초의 아수라는 성인이 되는 것에 성공한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인간의 삶을 흉내내며 산다.
그는 붉은 아수라다.
붉은 아수라는 자손을 낳는 법을 알았다. 인간과 함께 자손들을 낳다가, 오래지 않아 죽고 이곳의 자연에 묻힌다.
나또한 넘어온 자였다. 그러나 그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안다.
나는 태초의 아수라의 자손이며, 많은 강한 아수라들이 그러했다.
책을 읽은 모두가 그의 뿌리에서 왔다.
붉은 아수라 뿐 아니라 다른 아수라들도 그 사이사이에 이곳에 오게되었다.
더러는 짧은 생 후에 죽고, 더러는 사람 흉내를 살고, 많은 이가 이전을 잃어버리고 산다.
수많은 이가 사람을 배웠다.
수많은 이가 아수라의 씨를 인간의 땅에 뿌렸다.
그리고 아수라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우리와 비슷한 것을 통해 온 다른 이들도 보였다.
우리처럼 기억을 잃거나, 야금야금 자리를 만드는, 우리는 그야말로 침략자였다. 나쁜 족속이었다.
나는 이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글자들의 말미는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었다.
전쟁, 그러나 이는 파괴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길을 열기 위한 전쟁. 그리고 쏟아지는 빛들,
그리고 말미에는 인간의 껍질이 녹아내림이 보인다.
모두가, 모든 인간과 생명체에게 드러나는 미래였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으므로, 지금 죽든 살아있든 이 길은 시작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강한 에너지원으로 길을 열게 될 존재였다.
나는, 붉은 아수라들은 통로이자 추였으므로.
이것은 계획이었다.
모두가 우리의 추함을 보게 된다.
옷이 벗겨지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다른 이들, 다른 것들...
분열, 혼란
수많은 존재들,
나 같은 이는 혼자가 아닐것이다.
내가 죽어도 다른 아수라가 넘어올 것이다.
책의 마지막 글자가 보인다.
나는 금빛으로 빛나는 글자였다.
금빛 글자는 나에게 이름을 주었다.
'환희'
눈을 뜨자, 나는 절의 병실 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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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생물로 사는 즐거움
FantasyThe Art of Being a Creature의 각색 버전으로, 많은 부분을 다듬어서 사실상 플롯만 비슷한 다른 책입니다. 정서적으로도 한국식으로 많이 고쳤습니다. 실시간으로 다듬고 있어서 중간중간 내용이 바뀔 것 같네요! +진도나 순서같은게 정말 많이 달라요 ㅠㅠㅠㅠㅠ 읽으시다가 다른쪽에서 스포당할 수도 있을거같네요 죄송합니다... 영어판:The Art of Being a Creature 같은 사람입니다 저작권 안걸림 처음 쓰는거라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