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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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외진 동네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대하고 긴 담을 올려다보던 윤재하는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기운에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제게 다가오려는 형체에 고개를 살짝 저어 만류하고 곧장 대문으로 향했다. 메시지에 적힌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선 담 너머의 저택은 그의 생각보다 소담한 규모의 형태였다.
'눈속임.'
이 저택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저택의 뒤를 둘러싼 숲의 어귀에 시선을 던진 윤재하가 뒤를 돌았다. 높은 담에 빼꼼, 눈을 들이밀며 바라보는 형체에게 재차 고개를 저었다. 시무룩하게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없던 현관에 낡은 운동화가 가지런히 놓였다. 반질거리는 타일 위에 놓인 신발이 이질적이다. 그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던 윤재하는 애써 시선을 돌리고 거실로 향했다. 넓게 트인 공간으로 햇살이 번졌다. 빛의 잔재인지, 단순한 먼지인지 모를 것을 눈으로 좇다가 고개를 돌리니 거실의 한편을 차지하는 넓은 창이 눈에 띄었다.
그 넓은 면적을 빼곡하게 채운 것들이 새로운 인물을 뚫어지게 감상하고 있는 것 또한.
"......."
터와 함께 세월을 견뎌온 영가들답게 기운이 거셌으나, 악귀나 사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 규모면 확실히 일반인들은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그는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시선을 회피했다.
윤재하가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고 있는 사이, 온몸을 억누르던 터의 기운 역시 점차 익숙해져갔다. 그를 이곳으로 이끈 장본인이 염려한 것에 비해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러다 그 장본인과의 첫 만남을 상기한 윤재하는 말간 미간을 얕게 찌푸리곤 생각을 환기했다.
"......아무것도 없네."
간단하게 봐온 장거리를 들고 주방으로 향하자 텅 빈 냉장고가 그를 반겼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다면 장을 더 봐왔을 텐데. 아무래도 다시 다녀와야 할 듯싶다. 한숨을 삼킨 윤재하는 마트와의 거리를 가늠하며 장거리를 정리했다.
이후엔 미리 설명받은 그의 방으로 향했다. 포근해 보이는 침대와 원목 책상이 전부였으나 혼자 생활하기엔 너무도 넓었다. 이토록 넓고 쾌적한 방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빈약한 짐을 구석에 내려놓고 넓은 침대에 조심스럽게 앉아보았다. 몸뚱이를 포근하게 지탱해주는 매트리스에, 윤재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늘어뜨렸다. 뒤늦게서야 겉옷을 벗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방이다. 냉기가 흐르고 있으니 외투를 입고 있는 지금이 따뜻하고 좋았다.
낯선 방 안의 풍경을 눈에 담던 윤재하가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감은 베여 있으나 묘하게 평안함을 느끼는 제 모습이 우스웠던 탓이었다.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유년을 보낸 동네로 돌아온 윤재하는 이 알 수 없는 인연이 이끄는 도착지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 * *
"귀신 보시죠?"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끈질기게 따라오는 남자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제가 귀신을 본다는 것은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의 특성을 빌미 삼아 개소리를 늘어놓는 인간들을 윤재하는 수도 없이 겪어왔다.
"저도 보거든요. 기껏해야 기운을 보는 정도긴 하지만."
그건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던 부분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세상엔 꽤 많은 사람이 종종 기운을 느끼고 경험했다. 개중에서도 유독 감이 좋은 자들이 있는데 남자도 그중 하나인 듯했다.
비슷한 처지를 가진 사람들끼리 무리를 이루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윤재하는 남자도 제게 그런 부류의 제안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므로 들어줄 가치는 없었다. 애초에 남자는 완벽하게 트인 자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달고 다니면 안 무거워요?"
하지만 이 말엔 걸음이 멈춰 서고 말았다.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자세히, 그를 둘러싼 형체와 기운을 파악한 게 의외였던 탓이었다. 멈춰 선 윤재하가 시선을 던지자 그에게 매달린 영가들이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충분히 닿을 만한 거리였음에도 영들은 남자를 건들지 못했다. 남자 역시 무섭긴 했는지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들이 제게 손을 대지 못할 것을 아는 듯이 굴었다. 무서워할지언정 전혀 피하지 않는 것이다.
그제야 윤재하는 제 눈앞에 선 남자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아, 이 남자는 저와 비슷하다. 그에 비해 한참 미약하긴 해도 삿된 것이 섣불리 손을 댈 수 없는 기운을 가진 자였다.
"잠시 저랑 얘기 좀 하실까요?"
* * *
남자, 이상현이 그를 이끈 곳은 근처에 있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날씨에 맞게 눈치껏 따뜻한 음료를 받아와 윤재하에게 건넨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제 소개를 했다. 그에 반해 윤재하는 별다른 반응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따뜻한 잔을 매만질 뿐이었다. 그게 마치 저를 의심하는 거라 여겨졌던 모양인지 이상현은 제 학생증을 보여주며 신원 증명에 애를 썼다.
"이거 보이시죠? 저 진짜 한국대 학생 맞아요. 근데 제가 학교생활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쪽을 잘 몰랐거든요. 알고 보니 꽤 유명하시더라고요? 아, 근데 저희 동갑인데 말 좀 놔도 될까요. 존댓말이 영 어색해서."
허락을 바라는 듯 말했지만 윤재하의 의사 따윈 중요치 않았다. 저 혼자 합의를 내린 이상현이 한결 편해진 말투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좀 놀랐어. 너 같은 사람을 학교에서 본 건 처음이었거든. 이왕 털어놓는 김에 솔직히 말하자면, 학교에서부터 네 뒤를 밟았어. 미안하다. 마음이 급해져서 나도 모르게. 근데 절대 악의는 없었어."
스토킹했다는 사실을 저렇게 해맑게 말할 일인가. 윤재하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쪽을 불러 세운 건, 사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인데......."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나 보다. 그제야 줄곧 비스듬히 내리깔던 눈을 든 윤재하가 이상현을 바라보았다.
"도우미를 구하고 있어."
......도우미? 시선의 의아함을 빠르게 간파한 이상현이 말을 잇는다.
"가사를 맡아줄 도우미가 필요한데, 사실 삼시 세끼 밥만 좀 챙겨주면 되는 거라서 일의 강도가 어려운 건 아니야. 다만, 일하게 될 장소가 조금......."
이상현은 전에 없이 머뭇거리며 난처한 이야기를 꺼내듯 입을 열었다.
"터의 기운이 조금, ......아니. 많이 강한 곳이라 일반인은 며칠 견디지도 못해. 그곳에서 일하려면 적어도 기운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두 사람의 시선이 엉켰다.
"그쪽이라면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이상현은 윤재하에게 매달려 옹기종기 뭉쳐 있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설령 삿된 영가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저렇게 잔뜩 매달고 있으면 서서히 혼의 기운을 빼앗기기 마련인데. 윤재하는 그 자체로 굳건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네가 왜 그렇게 영가를 달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만한 기운이라면 섣불리 다가갈 수도 없을 텐데. 왜 가만히 두고만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모자의 그늘에 가려진 상대의 눈이 가늘어진 줄 모르고, 이상현은 말을 이어갔다.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떼어내고 싶다면 도와줄 수 있어."
"필요 없어."
직접 마주하고 처음으로 윤재하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표정 없는 말간 낯으로 이상현을 바라보던 남자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쪽은 떼어낼 수도 없을 테고."
"어, 어? 아......, 당연히 나는 못하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어. 아까 말했던 끼니 챙겨줘야 할 사람이랑 동일 인물인데, 나랑은 다르게 기운을 타고난 사람이라서."
"사람이 맞긴 한가."
미심쩍은 어조에 이상현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사람 맞아. 내가 보증할 수 있어. 왜냐면 그 인간이 내 사촌 형이거든. 사정이 있어서 혼자 생활하는데, 이 인간이 원체 생활력이 부족해서....... 혼자 두면 굶어 죽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원래 가사를 봐주시던 분이 은퇴하시고부턴 내가 종종 오가긴 했지만 거긴 나도 오래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그래서 그에게 제안하는 거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때마침 그쪽도 아르바이트랑 방을 알아보는 것 같아서 제안하는 거야. 숙박도 지원해줄 수 있어.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저택이 있거든. 혼자 편하게 생활하면서 시간마다 끼니만 가져다주면 돼. 물론 페이도 섭섭하지 않게 줄게. 아무래도 일반적인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못 되니까. 해보고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선 네가 제일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그래."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고 연락을 달라며, 이상현은 제 연락처를 적어 건네주었다.
"긍정적인 연락 기다릴게. 혹시 거절이라 해도 꼭 좀 연락해주라!"
이상현은 눈을 빛내며 간절히 말했다. 먼저 자리를 떠난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재하는 손에 쥐어진 메모지에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새하얀 손이 다가와 메모지를 톡 건드렸다.
「갈 거니?」
속삭이듯 물어오는 음성에 설핏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바스락, 종이를 접어 주머니 속에 쑤셔 넣은 그는 식어버린 음료를 마셨다.
「천천히 마셔. 음료도 급하게 마시면 체해.」
부드러운 음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모습이 몇몇 이들의 시선을 앗아갔다. 저 사람 좀 봐. 아무도 없는데 혼자 대답해. 여느 때와 같이 윤재하를 향한 수군거림이 시작됐다. 처음 이상현에게 그러했듯, 또다시 제 귀를 막아버린 그는 묵묵히 음료를 넘길 뿐이었다.
* * *
최악의 한파였다.
반지하의 오래된 보일러는 늘상 요란한 소리로 신경을 긁긴 했지만 그날은 유난한 추위 탓인지 그 정도가 평소보다 심했다. 발작하듯 제 존재감을 드러내던 낡은 고철 덩어리는 그날 영원히 멎어버렸고 자연스레 윤재하의 보금자리는 냉골이 되었다. 남들보다 비교적 체온이 높아 추위에 강하다고 해도, 그해 최악의 한파 앞에선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이불 속에서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윤재하는 패딩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다 오른손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 맞다. 연락처.'
작게 접힌 종이를 꺼낸 그가 얕은 한숨을 뱉었다. 휘갈긴 글자를 함께 바라보던 형체가 물었다.
「과외 잘렸던가?」
추위 탓에 굳어버린 목을 뻣뻣하게 끄덕였다.
"잠을 못 잔대. 자꾸만 뭐가 보여서."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다른 애들이 장난쳤나 봐.」
"알아요. 신경 쓰지 마."
시무룩한 어조에 설핏 웃은 윤재하가 종이를 쑤셔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자, 형체가 머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 감기 걸릴 텐데. 아침 되면 연락해보지 그래?」
"......."
입술을 달싹인 윤재하는 결국 말을 삼켰다. 사실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지금 그에게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곳에 감으로 인해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을 무시할 순 없다. 기운이 아주 강한 터라고 했다. 이상현은 그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도 그러할지는 모를 일이고. 무엇보다 그의 곁에 있는 자 또한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윤재하의 생각이 낯에 드러났던 걸까. 머리를 쓰다듬던 형체가 포근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네가 견딜 수 있으면 괜찮을 거야.」
"혹시 모르잖아."
「이상하면 도망가면 되지.」
"......."
어디로?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는데? 머릿속을 잠식한 생각을 억누른 윤재하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잠이 든 것이라 여긴 형체가 그를 향해 다정히 말했다.
「잘 자렴.」
윤재하는 답하지 않았다.
새벽 내내 눈을 감고 추위를 견디다 설핏 잠이 든 모양이다. 한줄기의 햇살이 반지하의 창살 사이로 내려앉았다. 부스스 눈을 뜬 윤재하는 웅크리고 자느라 잔뜩 경직된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나갔어?"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응. 나갔어!」
옷장에서 놀고 있던 영이 대신 답했다. 그가 종종 밖을 떠도는 걸 알기에 수긍하며 일어섰다.
곧장 냄비를 꺼내 물을 끓이며 온기를 느끼던 그는 팔팔 끓는 냄비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 전날 미리 받아둔 물에 손을 대보니 피부가 아플 정도로 차갑다. 익숙하게 냄비 속의 끓인 물을 부었다. 적당히 온도가 중화되어서야 씻을 수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물은 빠르게 식어버렸다.
저렴하게 사들인 드라이기는 소음이 시끄러운 데다가 종종 탄내가 났지만 열기만큼은 브랜드 제품 못지않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과 빨갛게 얼어버린 발끝에 열을 쬐고 있자니 몸이 나른해졌다. 결국 탄내가 심해질 때까지 드라이기의 열기를 만끽하던 윤재하는 달달거리는 소음이 커지고 나서야 전원을 꺼버렸다.
「연락 안 해봐?」
"......."
애써 무시하고 있었건만, 눈치도 없이 문틈에 끼어 있던 영이 물었다.
「아줌마도 연락해보라고 했잖아. 나 어딘지 궁금해. 근데 우리도 데려가 줄 거야?」
"어딘 줄 알고 따라가려고."
「여기보단 낫겠지, 뭐.」
"......여기가 뭐 어때서."
불퉁한 대꾸에 키득키득 웃은 영이 추위로 얼어붙은 윤재하의 피부를 가리켰다. 시무룩하게 눈을 흘긴 그가 무릎에 얼굴을 묻곤 한숨을 내쉬었다.
과외는 진즉 잘렸고, 식당의 저녁 파트 아르바이트 역시 손님으로 찾아온 동기로 인해 소문이 나버렸다. 잘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정산을 받아도 이번 월급으론 생활이 버거운데.......
역시 별수 없나. 한숨을 삼키며 패딩 주머니 속에서 이상현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꺼냈다.
「연락할 거야?」
"어딘지는 알아보려고."
생각해보니 장소가 어딘지는 듣지 못했으니까.
제안받고서 한참이 지나서야 문자를 보낸 것이었으나, 이상현은 줄곧 기다리고 있었는지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 메시지에 적힌 문장을 읽어가던 윤재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긴......."
――구 ――동.
이상현이 보내온 주소는, 어린 시절의 그가 살던 동네였다.
십 년 만에 돌아온 동네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복잡한 골목골목을 즐비하던 주택들이 사라지고 작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가 다니던 초등학교 역시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새 단장을 마친 채였다. 기억 속에 존재하던 모든 장소가 사라졌다. 윤재하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13년간 나고 자란 동네라고 할지라도 모든 곳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주소지 속의 장소는 그가 알지 못하는 좀 더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도 앱이 알려주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그는 가파른 경사의 입구에 멈춰 섰다.
"......."
아직 초입에 불과하건만, 벌써부터 기이한 기운이 윤재하의 피부에 닿았다. 얕은 한숨을 토해낸 그는 묘하게 힘이 없는 형체를 향해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응.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힘들면 꼭 말해요."
「응. 그럴게.」
씁쓸히 웃은 윤재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경사 너머엔 마트나 편의점이 없었던 탓이었다. 때마침 건널목에 소형 마트가 보여 곧장 그곳으로 향한 그는 이상현에게 미리 전달받은 카드로 간단한 장을 보았다.
빈약한 장거리와 함께 경사를 올라갈수록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 매달린 영가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간 것이다. 줄곧 묵직했던 어깨 역시 한결 가벼워졌다.
「무서워!」
「으, 난 안 되겠어. 못 버틸 것 같아......」
「나도 그냥 갈래.......」
귀찮아서 내버려 뒀을 뿐 딱히 영가들을 거느리려던 건 아니었기에 잘된 일이었다. 평소에도 그다지 무리는 없었으나 확실히 영가들이 대거 떨어지니 몸이 가벼웠다. 제 곁에 유일하게 남은 형체와 눈을 맞춘 윤재하는 설핏 웃으며 걸음을 이었다. 곧,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대하고 긴 담이 보이자 몸을 짓누르는 기운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파악하기 전까진 안 되겠는데.'
혀를 찬 윤재하가 형체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 것 같은데."
「난 괜찮은데....... 너 혼자 보내는 게 더 불안한걸.」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나는 견딜만해서 괜찮아요. 익숙해지면 곧바로 찾으러 갈 테니까, 잠시만 이 근처에서 기다려요. 옛날에 살던 동네는 절대 가지 말고. 어차피 다 변해서 볼 것도 없어."
「그래. 그럴게.」
시무룩하게 떨어지는 형체를 뒤로하고 대문을 넘었다. 이전은 모르겠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저택과 그 뒤를 에워싼 숲의 어딘가에, 진짜 집주인이 살고 있다고 했다. 윤재하 역시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 저택은 눈속임에 불과하고 숲이 진짜라는걸. 그 숲속에 살고 있다는 이상현의 사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것 역시.
터와 함께 세월을 보낸 영가들이 침입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평생을 산 자와 죽은 자들 사이에서 중심을 지키며 살아온 윤재하는 그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곧장 내부로 들어선 그는 최소한의 가구만 있는 넓은 거실과 주방을 거치고, 앞으로의 제가 생활하게 될 방으로 향했다. 포근해 보이는 침대와 깔끔한 원목 책상이 전부였으나, 혼자 생활하기엔 너무도 넓었다. 이토록 넓고 쾌적한 방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단단하지만 포근하게 몸을 지탱해주는 매트리스에 몸을 늘어뜨렸다. 온통 낯선 것뿐인데도 묘하게 편안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여긴 그가 어릴 적 살았던 곳과 동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재하는 왜인지 모르게 그리운 감각을 느꼈다.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고향은 그에게 있어 괴로운 기억만 가득한 곳이었으므로. 하지만 곧, 묻어두었던 기억의 한 조각이 수면 위에 올랐다.
"......그래봤자."
그래. 그래봤자, 기억의 마지막은 절망으로 끝맺어졌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형체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어찌 되었든 그는 결국 되돌아왔고, 윤재하는 저를 이곳으로 이끈 알 수 없는 인연의 끝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깊어지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끊어낸 윤재하가 몸을 일으켰다. 이상현에게 장을 더 보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밖을 나섰다.
'어디로 간 거지? 근처에 있으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보이지 않는 형체를 찾아 주변을 살피다 보니 마트가 코앞이었다. 우선은 장부터 봐야 할 듯싶다. 한숨을 내쉰 그가 모자의 챙을 깊게 눌러쓰고 마트로 들어섰다.
'일단 내일 아침은 흰쌀밥에 계란 프라이, 김치랑 김. ......그리고 뭐가 더 필요하지?'
그에겐 이 정도면 충분한 밥상이었으나 남들에겐 빈약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일의 첫인상은 중요한 법 아니던가.
'아침밥엔 대체로 뭐가 있었더라.'
가족이 있던 어린 시절, 제 밥상을 상기한 윤재하는 장바구니에 소시지와 콩나물을 더했다. 급하게 검색한 레시피대로 부수적인 조미료까지 챙기고 나서야 마트를 벗어났다. 작은 사이즈의 쌀이 있어 꽤나 묵직한 봉투를 쥐고 주변을 살피던 그는 곧 익숙한 기운을 느끼곤 걸음을 뗐다.
단정한 걸음이 향한 곳은 작은 미끄럼틀과 그네가 전부인 놀이터였다. 몇몇 아이들이 뛰놀며 만들어낸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저도 모르게 멈춰서서 아이들을 바라보던 윤재하는 저리는 손의 감각을 느끼곤 걸음을 이었다.
"찾았잖아요."
나무 옆에 있는 벤치로 다가간 그가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형체에게 말했다.
「쟤들 좀 봐. 너 어릴 때랑 비슷하다. 너도 딱 저만했는데.」
"그랬나."
「참, 예뻤는데.」
봄처럼 살랑이는 음성이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벤치에 앉은 윤재하가 벌겋게 부어오른 제 손바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아닌가 봐."
툭 내뱉은 말에 되돌아온 건 부드러운 웃음소리였다.
「너무 예쁘지. 그걸 말이라고.」
그 다정한 시선에 눈꼬리를 누그러뜨린 윤재하가 형체를 향해 말했다.
"이제 같이 들어가자, 엄마."
* * *
"아침은 아홉 시, 점심은 한 시, 저녁은 여섯 시. 이렇게 하루 세 번 챙겨주면 돼. 메뉴는 너무 부담 갖지 마. 입이 짧긴 한데 까다롭진 않거든. 그냥 주면 주는 대로 먹긴 해."
그 뒤에 '아마도'라고 덧붙였던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다. 어찌 됐건 본격적인 일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실패를 대비하여 새벽부터 일어난 윤재하가 분주히 움직였다.
전날 미리 불려둔 쌀을 안치고 콩나물과 부수적인 채소를 도마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저 혼자 있을 때면 부엌용 가위로 대충 썰었을 테지만, 앞으로 집주인의 식사를 담당해야 하는 만큼 칼질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칼을 손에 쥔 윤재하가 어색한 손길로 재료를 손질해나갔다.
「손을 그렇게 쥐면 안 되지.」
"이게 편한데......."
옆에서 지켜보다 혀를 찬 형체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썰면 안 되지, 그건 이렇게 썰어야지, 그러다가 손 베인다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윤재하의 기가 한껏 꺾여버렸다.
"나 기죽이려고 그러는 거면 성공했어요."
「......미안해. 재하 편한 대로 해.」
머쓱하게 웃은 형체가 한걸음 물러섰다. 얕은 한숨을 내쉰 윤재하가 칼을 움직였다. 할 수 있는 요리 메뉴라곤 김치찌개나 김치볶음밥, 계란프라이, 구운 햄 정도가 전부였던 그로선 칼질이 영 쉽지 않았다. 배만 채우면 그만이었던 탓에 제 입에 들어가는 메뉴의 구성 역시 따져본 적 없었다. 이제 첫날이건만 벌써부터 앞날이 걱정이었다.
「재하, 음. 아니야....... 미안해. 어서 해.」
"......그러지 마요. 해봐야 늘지."
잘리기 전까진 노력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형체로부터 터지는 한숨 섞인 효과음을 애써 무시하고 꿋꿋이 칼질을 이어갔다. 그래도 몇 번 하다 보니 후반부에 썰어놓은 재료는 모양이 제법 그럴싸했다. 그게 뭐라고 이렇게 기쁜 건지. 뿌듯하게 웃은 윤재하가 핸드폰 화면을 뒤적였다. 요리 블로거가 제시하는 레시피를 꼼꼼하게 정독한 후 행동을 이어갔다.
멸치와 다시마를 볶아주고 물을 부어서 육수를 만든다. 그다음엔 미리 깨끗하게 씻어놓은 콩나물을 넣어준다. 아, 뚜껑을 닫지 않아야 비린내가 나지 않는구나. 고개를 끄덕인 윤재하가 충실히 단계를 이어갔다. 곧 제법 그럴싸한 모양새가 갖춰졌다. 하지만 문제는,
"......간이 맞는 건지 모르겠네."
싱거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좀 애매한데....... 미묘한 표정을 확인한 형체가 재료를 살펴보곤 말을 덧붙였다.
「새우젓이랑 청양고추도 사 왔으면 좋았을걸.」
"레시피엔 없었는데."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
"......국간장을 더 넣을까?"
「아니. 색이 변하니까 소금으로 하자.」
고개를 끄덕인 윤재하가 소금을 추가했다. 한소끔 더 끓여 재차 맛을 보니 처음 도전해 본 것 치곤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다. 용기를 얻은 그가 차례대로 남은 요리를 이어갔다. 흰쌀밥에 맑은 콩나물국. 반찬은 마트용 포장 김치와 소시지야채볶음 그리고 반숙 계란프라이. 제법 그럴싸한 한 상이 차려졌다.
용기에 조심스럽게 담고 보온 박스에 채워 넣자 얼추 시간이 맞았다. 부스스한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묵직한 보온 박스를 안아 든 윤재하가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형체에게 고개를 저어 만류하곤 저택을 나섰다.
"저택의 뒤편에 숲길이 있어. 사람이 오갈 수 있게 해놨기 때문에 찾아가는 게 어렵진 않을 거야. 길을 따라 십오 분 정도 가다 보면 가옥이 보일 텐데, 대문으로 들어가서 바로 보이는 전면의 건물이 사랑채야. 툇마루라고, 기둥 안으로 길게 연결된 마루가 있는데 거기에 식사를 두고 가면 돼. 그 외엔 일절 출입하지 않는 게 좋아."
이른 새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경사로 이어진 숲의 오솔길엔 안개가 자욱했다. 빼곡하게 어우러진 나무 동굴을 덤덤히 걷고 있자니 묘한 소리들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윤재하는 정신을 붙잡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소리에 신경을 뺏기는 순간, 홀리게 될 것을 알기에.
십오 분이라던 이상현의 말과는 달리 억겁과도 같은 시간을 견디며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새로운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오래된 듯한 전통 가옥이었다.
가옥은 마치 숲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룬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름답게 어우러진 그 생김새와는 달리 거센 기운으로 몸을 짓눌렀다. 쉽사리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윤재하는 선뜻 기다림을 택했다. 그저 멈춰 서서, 가만히. 장소가 침입자를 살피고 받아들일 시간을 주듯이.
그렇게 묵묵히 기다리던 어느 순간. 서늘하지만 안온한, 기이하고 모순적인 바람이 피부를 간질였다. 매서운 압박감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는 이것이 허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스스로도 미처 알지 못하는 대상을 향해 속 인사를 건넨 윤재하가 조심스럽게 한발을 내디뎠다. 지붕이 높게 솟은 대문을 넘자, 이상현이 말한 사랑채가 보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어 선 채로 멍하니 공간을 이루는 선의 발자취를 따랐다. 넓은 마당을 내리쬐는 겨울의 햇빛,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 소리, 세월이 스며든 목재의 향. 사소한 요소 하나하나가 공간에 힘입어 제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아, 밥."
한참을 풍경 속에 현혹되었던 정신이 돌아왔다. 황급히 툇마루에 다가가 보온 박스를 내려두었다. 코앞의 사랑채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긴 아무도 없는 건가.'
자연히 담 너머의 구조를 향해 시선을 던지던 윤재하는 무언의 힘에 이끌리듯 발을 뗐다.
"......가면 돼. 그 외엔 일절 출입하지 않는 게 좋아."
"아......."
중문을 앞에 두고서 걸음을 멈춰 세운 윤재하의 낯에 사색이 깃들었다. 기어이 공간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입술을 짓씹고 마른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빠르게 대문을 나섰다. 올 때와는 달리 공간을 어른거리던 안개가 희미하다.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 오솔길 역시 다른 공간 같았다. 텃세를 이겨낸 듯한 기분에, 윤재하는 쓰게 웃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다행히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은 억겁의 세월 같지 않았다.
「어땠어?」
저택으로 들어서자 줄곧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던 형체가 물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감상을 회상하며 표현을 고민한 윤재하가 입을 열었다.
"묘하다고 해야 하나."
「무서웠어?」
"조금은? 근데 괜찮았어. 엄마는 혼자 괜찮았어?"
「응. 나도 괜찮았어.」
다행이다. 안도감을 느끼며 설핏 웃은 그가 주방으로 향했다. 신경이 곤두서 있던 탓인지 허기가 졌다. 요리하다 남은 반찬들을 싹싹 긁어 깨끗하게 밥을 비운 윤재하는 뒷정리를 하기 무섭게 핸드폰을 켰다. 점심이 한 시라고 했으니,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고 오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조회 수가 가장 높은 영상을 찾아 진지하게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형체가 웃었다.
「재하, 열심이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대충 하면 안 되잖아."
조금 남은 콩나물은 무치면 될 것 같고, 계란이 있으니까 영상 레시피대로 계란국을 끓이면 되려나. 나머지 반찬은 뭘 해야 하지?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불쑥 섬광이 번쩍였다. 화면을 검색하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급식 식단 계란국?」
"학교 급식은 영양사가 고심해서 내놓은 조합이니까. 메뉴 구성을 따라가면 좋겠다 싶어서."
계란국으로 결정했으니 부수적인 반찬은 따라가면 되는 거다. 검색 결과를 찬찬히 훑어보던 윤재하는 가장 쉬워 보이는 구성을 택하곤 각 반찬의 레시피를 검색했다.
「정했어?」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하게 말을 잇는다.
"참치 야채 비빔밥에 콩나물무침, 감자조림과 계란국."
레시피를 확인한 윤재하가 밖을 나섰다.
"......안 까다롭다며."
수거해온 보온 박스 속의 아침을 확인하자 원망스러운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요리의 결과가 처참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게, 흰쌀밥은 3분의 1 정도나 먹은 듯했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소시지야채볶음은 심지어 손도 안 댔다. 맑은 콩나물국은 건더기만 조금 줄었을 뿐이지 국물의 양은 그대로였다. 그나마 다 먹은 것은 계란프라이 정도였다.
"그렇게 맛이 없었나......."
제법 괜찮았던 것 같은데. 혹시 시장이 반찬이었던 건가. 한숨을 내쉰 윤재하가 음식을 정리했다.
"점심도 이러면 안 되는데."
「아침이라 입맛이 없던 걸 수도 있지.」
"아. 그러고 보니 입이 짧다고는 했었어."
양을 좀 줄여봐야겠다. 아침 잔반을 정리한 윤재하는 씁쓸한 기분으로 남은 점심을 해치웠다. 뒷정리까지 말끔하게 끝낸 뒤엔 비장하게 가옥으로 향했다. 세 번째 오가는 것이어서인지 숲의 기운 또한 한결 느슨해졌다.
대문 앞에 서서 마당 너머를 살펴본 그는 아무런 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으로 향했다. 툇마루에 올려놓은 보온 박스는 그가 두고 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설마 안 먹은 건 아니겠지."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박스를 열어본 윤재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용기를 열었던 흔적이 있다.
'그래,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으니 점심은 좀 먹었겠지.'
보온 박스를 잘 여며 품에 안은 윤재하가 설핏 웃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하지만.
"......또 남겼어."
망연자실한 윤재하의 곁에 선 형체가 어색하게 말을 덧붙였다.
「기운 내. 그래도 아침보단 좀 먹었잖아.」
"......똑같은 거 같은데."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심란한 맘을 억누르고, 가는 눈으로 용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참치 야채 비빔밥인데 고추장을 비볐던 흔적이 없다. 참치는 아예 손도 안 댔고, 야채는 조금 먹은 것 같은데. 아, 계란국의 건더기나 콩나물무침은 먹은 흔적이 있다. 계란이나 콩나물은 아침에도 먹었던 걸 보면 싫어하는 것 같진 않고, 간이 안 맞았나. 감자조림은....... 내가 먹어도 간이 세긴 했어.
생각이 깊어지던 그때, 설핏 웃음을 매단 형체가 말했다.
「담백하게 먹는 타입 아닐까?」
"......아, 그런가?"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인 윤재하는 식단의 구성과 대략적인 맛,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인 집주인의 잔반 처리 결과를 메모해나갔다. 제 요리 실력 탓일 수 있으니 아직은 메뉴의 호불호를 판단할 순 없다. 우선 그나마 양이 줄어든 것 위주로 체크해두고, 다음 재시도 땐 간을 담백하게 해보겠다고 다짐했다.
"아, 맞다. 저녁 해야 하는데."
꼼꼼하게 식단 일지를 기록하던 윤재하가 시간을 확인하곤 황급히 검색에 들어갔다. '든든한 석식 메뉴'를 검색하는 것에 형체가 웃으며 제안했다.
「생각해보니까 오늘 새해던데. 저녁은 떡국이 어떨까?」
"......떡국."
크나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것 같아. 새해엔 떡국이지. 게다가 떡국은 종종 해본 적이 있어서 자신 있었다. 만면에 화색이 돈 윤재하가 이른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꼭 집주인의 입맛에 맞기를 기원하면서.
* * *
저택에 입주하여 도우미의 역할에 충실한 지도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윤재하는 얼굴도 모르는 집주인의 식성을 파악하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했는데, 그 가상한 노력이 근래에 들어 빛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식성에 대해 감을 잡은 것이다.
집주인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까다로운 구석이 있었다. 조리법에 따라 식자재에 대한 호불호가 확실한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익힌 당근은 먹되 생당근은 손도 안 대는 식이랄까. 굽거나 찐 생선은 먹지만 양념이 된 건 먹지 않았다.
대체로 담백한 맛을 선호하고, 해산물은 거부감이 없어 보였으나 육류나 가공식품은 즐기지 않았다. 개중 한 번은 메뉴의 다양성이 염려되어 양식을 도전해보았는데 처참한 결과만 돌아왔다. 아예 입도 안 댄 거다. 만드는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한두 입은 먹어줄 만도 하건만, 그따위 호의를 선사할 만큼의 아량은 없는 듯했다.
그래도 점차 나아지는 중이다. 요즘 들어 잔반의 양이 부쩍 줄어드는 것이다. 첫날의 처참했던 잔반들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점심을 올려보내고 수거해온 아침의 보온 박스를 확인한 윤재하는 떨리는 손으로 제 눈을 비벼보았다.
'꿈인가? 아니면 내 염원이 보여주는 환상인가?'
그는 제 눈을 의심하며 질끈 감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살며시 열린 시야가 보여준 광경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 대성공이다."
입주하고 어언 열흘이 지난 지금, 처음으로 잔반 없는 빈 용기를 마주했다.
'드디어 성공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 없는 기쁨을 만끽한 윤재하의 곁으로 형체가 다가와 탄성을 터뜨렸다.
「다 먹었네?」
"처음이야. 처음으로 다 비웠어."
「축하해, 재하. 그동안의 고생이 드디어 빛을 보네?」
「아이고. 축하해, 아가. 축하해.」
저택을 떠돌던 영가들도 다가와 축하를 건넸다. 머쓱하긴 하나 기쁜 듯이 웃은 윤재하가 '고맙습니다' 하고 마주 인사를 건넸다.
이 기쁨이 사그라들기 전에 저녁을 준비해야지. 비장하게 앞치마를 둘러맨 윤재하가 냉장고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형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재하야. 나 밖에 구경 좀 다녀올게.」
"지금?"
언제 웃었냐는 듯 미세하게 굳어진 얼굴에 형체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도 종종 나갔다 왔잖아. 새삼스럽게 뭘.」
"그렇긴 한데, 그래도 아직은......."
물론 그가 예전부터 밖을 나서는 건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괜찮대도 그러네? 그냥 친구가 보고 싶어서 그래.」
"종종 만난다던 그 친구?"
「응. 그 친구.」
이승을 맴도는 영가 중에 비슷한 처지를 지닌 자가 있다고 했다. 많은 의지와 위로를 받는다며 웃는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만류할 수 있을까. 생전의 모친은 어린 저와 늙은 노부를 등에 업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바빴기에. 마음 맞는 친우와 수다 한번 떨어본 적 없던 그를 알기에.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되는 마음을 억누르고 윤재하는 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조심해요. 너무 아래까진 가지 말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
염려가 고스란히 섞인 낯을 마주한 형체가 다정히 웃으며 대답한다.
「알아, 무슨 말인지. 너무 걱정하지 마. 이 근처에 있을 거니까. 이젠 여기도 괜찮아지고 있잖아.」
그의 말대로였다. 윤재하가 점차 이곳에 익숙해지면서, 자연히 형체 또한 터의 기운에 짓눌리지 않고 제 중심을 잘 지켜가고 있었다.
하지만 제법 거리가 있다고 해도 이곳은 그에게 끔찍한 기억만을 안겨준 곳인데. 모친은 여태까지 그러했듯 마음 편히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제 곁을 맴돌았다. 그 부채감은 늘 윤재하를 따라다녔고 이제는 제가 그의 보호자가 된 것처럼 지나친 걱정을 하게 되는 거다.
"알겠어. 잘 다녀와."
애써 웃으며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칼을 쓰다듬은 형체가 저택을 나섰다.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재하는 한숨을 삼키고 시선을 돌렸다. 저녁을 준비해야 했다.
* * *
간밤에 내리던 얕은 눈발은 새벽 사이에 폭설로 변했다. 유리창 너머의 세상이 순백으로 가득해지고, 유난히도 고요해진 사위가 윤재하를 잠에서 끌어냈다. 잔 소음을 잠재운 고요함이 마치 공백 같았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무거운 눈꺼풀 위로 몽롱함이 내려앉았다. 의식적으로 시간을 확인한 윤재하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거실로 향하자 전면을 가득 채운 넓은 유리 프레임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직 아무도 침범하지 않은 눈의 면적을 보고 있자니 미약한 충동이 일렁였다. 곧 방에서 패딩을 꺼내 입은 그가 현관을 나섰다.
뽀드득―
발자국이 생겨났다. 발목까지 깊숙하게 파고드는 눈 속의 감각이 생경했다. 눈이라면 매년 지긋지긋하게 보는 건데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다가온다. 짓밟힌 눈은 더럽고 거슬리기만 했었는데, 고요한 마음으로 마주한 눈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나.
뽀드득― 뽀드득―
산 자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새겨지는 발자취가 선명하다. 어느새 따라 나온 형체 역시 순백의 세상을 눈에 담았다. 그 아래엔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예쁘다, 그치? 건네진 말에 윤재하는 조용히 시선으로 응수했다.
씁쓸해진 기분을 삼키며 제가 새겨온 발자국을 바라보던 그의 시야에 문득 무언가가 스쳐 갔다. 숲으로 올라가는 저택의 뒤편에서 이질적인 색채가 어른거렸다.
「왜 그래? 뭐가 있니?」
뚫어지게 응시하는 윤재하에게 형체가 물었다. 시선을 거둔 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잘못 봤나 봐."
「그래?」
"응. 이제 들어가요. 춥다."
고개를 끄덕인 형체가 앞서 저택으로 향했다. 뒤따라 걸음을 옮기며 흘끗 바라본 너머엔 언제 그랬냐는 듯 순백의 세상만이 가득했다.
살림이 조금이나마 능숙해지면서 얻은 것이 있었다. 바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롯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평소라면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새벽녘에나 할 수 있던 자격증 공부 역시, 좀 더 온전한 정신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다가오는 필기시험의 원서 접수를 앞두고 느슨해졌던 긴장감을 끌어올린 윤재하는 저녁 준비를 앞둔 두 시간 정도의 여유 시간 동안 인터넷 강의에 매진했다. 혹여 제 존재감이 방해될까 염려한 형체는 일찌감치 자리를 비워주었다.
그 배려에 마음 편히 기출문제를 풀던 중이었다. 불쑥 느껴지는 기시감에 손이 멈췄다.
'뭐지?'
의아하게 주변을 살피던 윤재하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곧 무언가를 확인하자 황급히 일어나 현관을 나섰다.
외투를 챙겨 입을 생각도 못하고 저택을 뛰쳐나온 그가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딨지? 분명 봤는데.......'
정오가 지나면서 또 한차례 퍼붓던 눈 때문일까. 황망한 시야에 가득 찬 사위가 아침의 풍경과 다를 게 없다. 그러자 시선이 자연스레 숲의 어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색채. 뚫어질 듯 윤재하를 바라보던 낙엽을 닮은 색채가 움직였다.
"......잠깐만!"
다급하게 걸음을 뗐으나, 깊게 쌓인 눈으로 인해 쫓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윤재하를 기다려주듯이 조그마한 형상이 돌연 멈춰 섰다. 가까워질 듯하면 멀어지는 거리감에 조급함을 느꼈다.
지금 제가 생각하는 게 맞는지 확신할 수도 없는데 무언의 이끌림이 형상을 뒤쫓게 했다. 숨이 찬 줄도 모르고 눈 쌓인 숲길을 올랐다. 이끄는 방향이 가옥을 향하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끝이 휜 긴 꼬리가 대문을 넘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사랑채의 뒤편으로 향한 그 형상은 윤재하가 머뭇거리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사이, 밀린 숨을 몰아쉬며 형상을 살피던 윤재하의 걸음이 이어졌다.
사랑채의 뒤편을 돌아 가로막힌 긴 담장을 걸었다. 그 끝에 드러난 중문을 넘으니 새로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여기가 바로 집주인이 사는 안채라는 걸.
"......."
윤재하는 제게 허락된 영역이 사랑채의 툇마루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침범해버렸으나 안채의 영역까지 실수할 순 없었다. 입술을 짓씹고 뒷걸음질 치자 뒷마당으로 향하는 모퉁이에 멈춰 선 형상이 가만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딘가에서 작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쫑긋거린 형상이 소리를 향해 자리를 벗어났다.
"아......."
들어가지 마. 돌아가야 해. 예리한 이성이 수차례 경고했으나, 붙박인 듯 멈춰 선 다리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아주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불순한 합리화와 함께 충동이 휘몰아쳤다. 결국 발걸음은 뒤가 아닌 앞을 향했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숨을 죽이고 모퉁이를 지나, 시선을 가로막는 기둥에 몸을 기댔다. 귓가에 닿는 소리가 선명해졌다.
못된 짓을 앞둔 아이처럼 요동치는 심장께를 꾹 누르고 고개를 내밀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윤재하와 시선을 맞춘 형상이 유유한 걸음을 뗐다. 인도하는 시선의 끝엔 인영이 있었다. 훤히 개폐된 널찍한 마루 위로 늘어져 있는 한 남자.
부스스 흩어지는 검은 머리칼과 빼곡한 가마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두툼한 솜이불에 얼굴이 가려져 있으나,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는 커다란 몸체. 세워진 무릎 위로 비스듬히 얹힌 다리의 선이 시선을 끌었다. 살짝 말려 올라간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피부엔 핏기가 없었으나, 도드라진 복사뼈를 따라 이어진 선의 끝엔 미약하게나마 붉은 색채가 자리했다. 눈길을 붙잡는 상아를 닮은 매끄러운 태가, 진공이 느껴지는 낮은 흥얼거림과 함께 느슨히 움직였다.
모든 빛을 삼킨 듯한 검은 고수머리를 향해 윤재하가 쫓던 형상이 제 몸을 부딪쳤다. 곧 상체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자, 솜이불을 비집고 나온 커다란 손이 그것을 쓰다듬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나른해지는 손길이었다.
느릿하게 이어지던 음악이 멈추자 남자의 허밍 또한 끊겼다.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짧은 공백의 순간, 줄곧 멍하니 멈춰 서있던 윤재하의 이성이 돌아왔다.
'미친 건가.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신음을 삼키며 황급히 제 입을 부여 막았다. 빨라지는 심장의 박동이 고통처럼 느껴졌다. 누르면 조금은 잠잠해질까, 나머지 한 손으로 심장 언저리를 꾹 눌러봤지만 소용없었다.
......돌아가자. 윤재하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뒷걸음질 쳤다. 뽀드득― 뽀드득― 눈의 비명 소리가 이어 재생된 음악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가히 터무니없는 소망일 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급히 안채를 벗어나던 윤재하의 발끝에 무언가 부딪혔다. 소복하게 쌓인 눈에 가려진 돌탑이 우르르 무너졌다. 멈칫하며 제 발끝에 시선을 던지기 무섭게 거센 바람이 그의 몸에 감겨들었다.
"......."
아....... 이건 일반적인 겨울의 바람이 아니다. 윤재하의 날 선 감이 경고했다.
반쯤 무너져내린 돌탑을 황망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수습해보려 했지만 원래의 모습을 알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두고 간다면....... 분명 큰 화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깊은 한숨을 삼킨 윤재하가 돌탑을 향해 제 실수에 대한 사죄를 읊조렸다. 그리곤 공손한 손길로 조심스럽게 돌을 쌓았다. 다행히 손길이 닿는 대로 형태는 이어졌다. 마지막 돌을 무사히 올리고 재차 사죄한 그는 찝찝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자리를 벗어났다.
「어디 갔다 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현관문에 기댄 윤재하에게 형체가 물었다.
어딘가 넋이라도 나간 듯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심지어 외투도 없이 나갔던 탓에 드러난 피부가 온통 붉었다. 세상에, 얘가 공부하다가 미쳐버렸나. 절로 심각해진 형체가 윤재하를 닦달했다.
「왜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응?」
"......."
멍하니 호흡만을 다스리던 말간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곧 앓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윤재하가 입을 열었다. 나.......
"해고당할 것 같아......."
* * *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책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확실한 선고가 내려지기 전까진 적어도 맡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식사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평소보다 정성스레 음식을 담았다.
보온 박스를 품에 안고 현관문을 나서는 표정이 비장했다. 덩달아 심각해진 형체가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고 윤재하는 그제야 멋쩍게 웃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진 건 아니었지만 숲의 시간은 바깥보다 빠르게 흘렀다. 미리 챙겨 온 손전등으로 눈 덮인 오솔길을 비추며 나아가던 윤재하는 가옥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제가 무너뜨린 돌탑 때문인지, 확실히 이전과는 사뭇 기운이 달랐던 탓이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마음을 가다듬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윤재하가 조심스럽게 대문을 통과했다.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툇마루에 보온 박스를 올려두기 전까지 그를 제외하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여 아까의 일로 한마디 하러 나오진 않을까 했는데. 일단 오늘은 이렇게 넘어가려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가 저택으로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
어느 틈에 온 작은 형상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윤재하는 그 가만한 시선을 온전히 마주하며 서서히 몸을 굽혔다. 다갈색의 눈길이 형상의 곳곳을 담았다.
가을 햇살을 담은 낙엽 색의 보드라운 털. 봄을 담은 코와 나비의 날갯짓처럼 쫑긋거리던 두 귀, 그리고 뚫어지게 바라보던 노란 눈.
확신을 얻은 것과 동시에 무표정을 가장하던 낯이 사정없이 허물어졌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나비야."
「냐아―」
화답해 준 나비가 꼬리를 세우고 다가왔다. 보드라운 털의 감촉은 느낄 수 없지만 묵직한 존재감만은 손안에 가득 찼다. 붉어지는 눈시울에 입술을 짓씹은 윤재하가 나비를 쓰다듬었다.
"왜, 왜 여기에 있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한참을 찾았었는데. 비록 너무 늦어버렸지만, 그래도 한참을 찾아 헤맸었는데.......
"미안해."
부딪히는 온몸을 마주 안으며 늦어버린 사과를 건넸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눈 위로 새겨지는 발자국이 없다는 사실이 서글퍼서. 그렇게 한참을 말간 눈물만 뚝뚝 흘리던 윤재하가 품 안에 가득 찬 나비를 향해 묻는다.
"그런데 아까는 왜 도망갔어?"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나비가 웃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아무렴 어떤가. 슬퍼 보이는 것보단 낫지 않나.
나비의 작은 코에 살포시 이마를 맞대며 마음을 가라앉히던 순간, 어디선가 딸랑―, 청량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나비의 목 주변을 살폈으나 방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뭐지?"
딸랑―
또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품 안을 벗어난 나비가 어딘가를 향했다. 덩달아 몸을 일으켜 뒤따르니 낮에 지나쳤던 길을 향하고 있었다. 두 번째여서일까. 이미 실수를 저질러버린 탓에 생긴 대담함인지, 윤재하는 멈춰 서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이끌고 있는 듯한 나비의 속내가 더욱 궁금했다.
뽀드득― 뽀드득―
적요한 사위 속에 윤재하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중문을 지나친 나비는 아까와는 다르게 안채의 앞마당으로 향했다. 뒤따라 마당에 들어선 그는 제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탄성을 터뜨렸다.
"......뭐야, 여긴......."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던 안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몸을 집어삼킬 것 같은 거대한 숲의 한가운데에 기묘한 고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선 빛의 가루를 흩뿌리는 기묘한 상(像)들이 숲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는데, 희미하게 반짝이는 꼬리를 하늘하늘 움직이며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
비현실적인 공간을 마주하니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멍하니 굳어 있던 윤재하의 정신을 깨운 건 갑작스레 생겨난 인기척이었다. 들키면 안 된다. 무언의 감이 경고했다.
황급히 숲의 외각으로 몸을 숨긴 것과 동시에 한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왜소하고 깡마른 체구의 남자가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냐아―」
윤재하의 곁에 다가온 나비가 몸을 부딪혔다. 소리 내면 안 돼. 다급하게 속삭인 그는 곧장 나비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여긴 도대체 뭐 하는 곳이야,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
들키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며 물어보았지만, 나비는 시치미를 떼기만 했다.
'도대체 뭐지, 여긴....... 꿈을 꾸는 건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떠보아도 상황은 그대로다. 앓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던 그때, 고택의 문이 열리기 무섭게 '흐아아악!' 하고 왜소한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황급히 입을 막고 숨까지 멈춘 윤재하가 조심스럽게 시야를 들었다.
문 너머로 쏟아지는 빛을 등진 남자가 쓰러진 남자를 부축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다. 온 신경을 집중하던 그 순간, 왜소한 남자를 고택 안으로 들여보낸 인영이 잠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재빨리 몸을 숙인 윤재하가 숨을 죽였다.
"......."
정적은 짧았다.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달칵, 문이 닫혔다. 그제야 윤재하는 막힌 숨을 몰아쉬고 털썩 주저앉았다. 꼼짝없이 들켜버린 줄 알았다.
「냐아-」
"......아, 미안. 답답했지."
줄곧 품 안에 갇혀 있던 나비가 몸을 틀고 빠져나가더니 유유히 발걸음을 뗐다. 몸을 일으켜 그 뒤를 쫓던 윤재하의 낯이 일순간 당황에 물들었다. 무언의 벽에 가로막혀버린 탓이었다.
'뭐야, 이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 너머로 나비가 멀어지는 게 보였으나 그 뒤를 쫓을 수가 없다. 황급히 다른 곳을 향해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아가지 못하고 튕겨 나갈 뿐이었다. 고택의 주변을 에워싼 숲의 결계가 침입자를 가두었다.
완전히 갇혀버렸다는 걸 깨닫고부턴 무력을 행사했으나 소용없었다. 힘을 주어 내려치면 더한 반동으로 튕겨냈다. 쿵, 쿠웅― 아무리 몸을 부딪쳐도 벽은 부서지지 않았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쉰 윤재하가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당혹감에 굳어버린 이성으론 파악하기 힘들었다. 땀에 젖은 이마를 짚으며 보이지 않는 벽에 몸을 기댄 윤재하가 숨을 가라앉혔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가자 날뛰던 감정 역시 가라앉았다. 그제야 차근차근 상황을 돌이켜보았다.
나비를 따라 안채를 향했을 뿐인데, 원래 존재해야 할 건물은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의 고택이 존재했다. 느껴지는 기운의 흐름 또한 평소와는 달랐다. 공간이 어그러졌나, 그도 아니라면.......
"......돌탑."
돌탑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몸을 휘갈기던 강한 바람. 낯선 기운과 함께 몰려들었던 불안감.
"결계였던 거였어."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결계를 제가 무너뜨린 것이다.
......미치겠네. 탄식을 토해내며 숨을 몰아쉬던 순간이었다.
달칵―
고택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다가온다.
저벅, 저벅―
느릿하지만 힘이 있는 걸음걸이에서 방황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정해진 목적지로 향하듯, 곧장 침입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커다랗고 짙은 그림자가 서서히 윤재하의 몸을 집어삼켜갔다. 기척이 다가올수록 조여오는 숨통의 통증을 느끼며 윤재하는 코앞에 드리운 그림자를 바라보다 질끈,
눈을 감았다.

তেওঁ মই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