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그 존재를 인지한 영향인지, 사랑채를 오가던 윤재하는 종종 고택의 기운을 느꼈다. 그러다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고택의 기운이 강해지기 전에 늘 청량한 종소리가 울린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가옥의 기운이 거세졌고, 담장에 가려진 안채로부터 기묘한 감각이 느껴지곤 했다. 제가 휘말렸던 그 밤을 떠올린 윤재하는 애써 궁금증을 억누르고 저택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지난 저녁. 자격증 공부에 매진하다가 식사 준비에 늦어버린 윤재하가 황급히 가옥으로 향했을 때도 청량한 종소리가 들렸다. 뒤늦은 저녁 식사를 툇마루에 올려놓고 고택이 숨겨진 안채의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자, 미세하게 가려진 막과 함께 그날의 밤에 보았던 반짝이는 빛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무슨 일을 하는 걸까. 또 누군가가 찾아온 걸까.
묻고 싶었으나 물을 수 없었고, 선을 넘어 묻는다고 해도 쉽사리 알려줄 것 같지 않았다. 한참을 툇마루 앞에 서서 미지의 너머를 바라본 윤재하는 여느 때처럼 옅은 한숨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어김없이 식사를 내려두고 지난 보온 박스를 안아 든 윤재하의 입매가 굳었다.
'무게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어.......'
툇마루에 걸터앉아 저녁 식사분의 보온 박스를 열어보니 손을 댄 흔적이라곤 없었다.
또 식사를 거르고 잠을 잔 건가. 끼니를 거른 공복인 줄 알았다면 좀 더 먹기 쉬운 걸로 준비했을 텐데. 미리 알려주면 좀 좋을까, 생각하다가도 연락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기에 혀만 차게 된다.
한숨을 쉰 윤재하가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저택으로 돌아왔다. 남은 잔반은 또 그의 몫이 되었고, 뒷정리를 하기 무섭게 곧장 점심을 준비했다. 김석영의 취향대로 미나리를 듬뿍 넣은 맑은 국물의 대구탕과 고두밥, 그 외의 부수적인 반찬을 용기에 차곡차곡 담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형체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우리 재하. 장금이 다 됐네. 바로 장가가도 되겠다.」
"......올려놓고 올게."
말을 회피한 윤재하가 서둘러 주방을 나섰다. 등 뒤로 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애써 무시한 채 가옥으로 향했다. 익숙해진 오솔길을 지나 곧장 사랑채의 툇마루에 올려두었다. 그러다 시선이 자연스레 아침의 보온 박스로 향했다.
"......설마."
아침에 두고 간 그대로인 것 같은데....... 미심쩍은 눈으로 보온 박스를 열어보니, 그의 예상대로였다. 손도 안 댄 그대로다. 저녁도 모자라 아침까지 거르다니. 입이 짧은 사람답게 한 끼 정도는 종종 거르긴 했으나, 두 끼니를 연달아 거른 건 처음이다.
'혹시 어디 아픈 건가?'
그가 지내는 가옥은 외딴섬과도 같으니 홀로 앓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입술을 달싹이다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긴 윤재하는 결국 한숨과 함께 발걸음을 뗐다.
긴 담을 지나 중문을 넘어 안채로 향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확인해보니 숨 막힐듯한 고요함만이 그를 반겼다.
'없는 것 같기도 한데.......'
간밤에 자리를 비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치기라도 할까, 뒤늦은 걱정이 밀려왔다. 괜한 짓 한 건가. 멋쩍은 한숨을 삼키며 머뭇거리던 찰나였다.
냐아― 어느새 모습을 드러내고 곁에 다가온 나비가 인사를 건넸다. 설핏 웃으며 무릎을 굽힌 윤재하가 마주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오랜만에 보네. 요새 왜 안 보였어? 종종 내려오지. 엄마 얼굴도 보게."
「냐아―」
분명 대답은 해주는데 그 의미를 알 리가 없다. 알겠다는 뜻이었으면 좋겠네. 가볍게 생각한 윤재하가 안채를 바라보다가 재차 나비에게 물었다.
"그 사람 안채에 없어?"
지칭하는 대상을 단번에 이해했는지 나비의 시선이 안채로 향했다. 있다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조용했다.
"혹시 자고 있는 건 아니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냐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답한 나비가 곁을 벗어나 안채의 내부로 향했다. 몸을 일으켜 잠시 머뭇거리던 윤재하 역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뒤따랐다.
처음 봤던 그대로 훤히 개폐된 대청 위엔 김석영이 덮던 이불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마루 위에 올라간 그는 저를 이끄는 듯한 나비를 따라 안방에 다다랐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맨바닥에 널브러진 김석영이 보였다. 놀란 윤재하가 황급히 문을 열고 그에게 다가갔다.
"......왜, 왜 이래요, 괜찮아요?"
미동도 없이 눈을 감은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온몸에서 풍기는 서늘한 기운도 심상치 않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껏 굳어버린 윤재하가 조심스럽게 김석영의 코 부근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다행히 미약한 숨이 닿았다.
"하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졌으나 그 끝이 하염없이 떨려왔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어디 아파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은 윤재하가 제 이마의 열과 김석영의 이마를 비교했다. 열은커녕 서늘하기만 했다.
'무슨 사람 체온이 이 모양이야.'
생을 잃은 사람처럼 차가운 체온에, 황급히 일어선 그가 대청에 있던 이불을 끌어와 김석영의 몸을 감싸 안았다. 냐아― 문 너머에서 멀뚱하게 바라보던 나비가 윤재하의 곁에 다가와 몸을 부딪치며 자리를 잡는다. 그게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뜻처럼 느껴져서 줄곧 굳어 있던 윤재하의 낯이 미세하게 풀렸다. 그의 감은 대체로 틀린 적이 없었다.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쉰 윤재하는 품에 안긴 커다란 남자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왜 이 사람에게서 짙은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낯빛이 창백하긴 해도 병약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이러는 건지.
한가지 다행인 건 괴로운 기색 없이 고른 숨을 쉬고 있다는 거였다. 너무 고요하게 잠에 빠져 있어 죽은 줄로만 알았다.
상체를 묵직하게 압박하는 상대를 추스르고 바닥에 눕힌 윤재하가 뒤늦게야 베개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때, 무심결에 스쳐 간 손끝이 너무 차가워 낯이 굳어졌다. 김석영의 손끝을 살짝 잡아보니 그의 서늘한 체온이 전달되었다. 손을 떼고 손등을 재차 손끝에 가져다 대 보았다.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느껴졌다. 윤재하의 온기가 전달된 것이다.
한번 온기를 느낀 몸이 자연스레 윤재하를 찾아 헤맸다. 덥석 잡힌 제 손을 바라본 윤재하의 몸이 굳어졌다.
"......깼어요?"
김석영에게선 답이 없었다. 얕으나 고른 숨을 내쉴 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따뜻함을 찾아 붙잡은 것이겠지만, 무방비하게 붙잡힌 윤재하의 낯이 미묘해졌다.
"......."
혼자가 된 이후로 이렇게 누군가와 손을 잡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타인과의 접촉은 불쾌하기만 한데, 남자의 서늘한 체온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잡은 거 아니에요. ......난, 피해자예요."
단단히 붙잡힌 손을 바라보며 김석영의 옆에 몸을 뉜 윤재하가 불퉁하게 속삭였다.
온기가 필요해 보이니 어쩔 수 없지. 예전에 그가 어린 제게 나눠준 온기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의 선심쯤은 못해줄 일도 아니니.
어느새 제 등 뒤로 자리를 잡은 나비의 존재감과 맞잡은 손에서 섞이는 미지근한 체온, 그리고 남자의 서늘한 낯을 바라보던 윤재하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 * *
한이 깊은 사연일수록 현실로 돌아왔을 때 기력 소모가 크다. 이번 일이 딱 그러했다. 수신자를 찾아가는 시간 역시 평소의 배에 달했다. 그 덕에 온몸엔 저승의 향이 덕지덕지 뱄고, 지친 몸을 회복시키는 데엔 수면만 한 것이 없었다. 간신히 방에 들어가 몸을 뉜 것까진 좋았는데 하필이면 이불이 대청에 있었다. 몸을 일으키긴 귀찮고 널브러진 상태로 꿈틀꿈틀 움직이다가 스르륵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다 몽롱한 꿈결에서 불쑥, 온기가 느껴졌다. 따스하면서도 청량한 감각이었다. 안온하게 감싸는 온기가 사그라들 땐 아쉬움마저 들었다.
'떠나지 못하게, 이 온기를 붙잡아둬야 해.'
그런 생각이 무의식중에 가득했던 것 같다. 김석영은 제 감각에 충실했고 온기를 붙잡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게 단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보슬보슬한 다갈색의 머리칼이었다. 결이 얇고 건조한 머리칼이 숨을 내쉴 때마다 하늘하늘 움직였다. 윤기가 나기보단 바싹 마르고 건조해서 보들거리는. 묘하게 쓰다듬고 싶어지는 그런 머리통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살짝 몸을 일으키자 단단히 맞잡은 손이 달려왔다. 줄곧 힘을 주어 잡고 있던 건 김석영, 본인이었다.
"......."
꿈결의 온기는 윤재하로부터 비롯된 거였다. 더불어 청량한 감각 또한 그로부터 전해진 거겠지. 공기청정기도 아니고, 기운이 특별하다 보니 별 능력이 다 있었다. 어찌 됐건 고마운 일이다. 눈앞의 존재 덕분에 몸이 개운해졌으니.
'이 이상의 기운을 뺏을 순 없지.'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손에 힘을 빼려던 찰나, 윤재하의 손이 김석영의 검지를 붙잡았다. 미약한 힘이었기에 뿌리치면 그만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어렸던 윤재하가 머뭇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쥐었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는 분명 아이가 잡고도 남았던 손가락의 마디가 지금은 넉넉히 가려졌다. 정말 많이도 컸다. 그 조그맣던 아이가 이렇게 자랄 줄 누가 알았을까. 곁에 두고 마주하고 있으니, 재차 새삼스러운 감상에 잠기고 만다.
잡힌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쩍 움직여보자, 붙잡는 힘이 세졌다. 손을 들어보니 덩달아 딸려왔다. 설핏 웃던 와중에, 흘러내린 소매 사이로 보이는 것에 김석영의 입매가 단번에 굳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김석영이 윤재하의 손을 잡아 쥐었다. 미약한 신음과 함께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뭘 그리고 다니는 거야."
흐릿하긴 했으나 윤재하의 손목에 새겨진 것은 귀어(鬼語)가 분명했다.
'왜 이런 걸 새기고 다니는 거지? 삿된 것이 붙기라도 했던 건가.'
가늘어진 김석영의 시선이 문양과도 같은 것을 찬찬히 훑었다. 손아귀의 힘이 강했는지 윤재하가 눈을 떴다. 몽롱한 눈이 보여주는 광경을 멍하니 보기만 하던 그는 무저갱 같은 흑안을 마주했다.
"괜찮아요?"
"이게 뭐야."
말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빠르게 선수를 친 건 김석영이었다.
"손목에 뭘 그리고 다니는 거야."
"......그리다니, 그게 무슨, 아니 그보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은 거 맞아요?"
몸을 일으킨 윤재하가 잡히지 않은 나머지 손등을 들어 김석영의 이마로 향했다. 살포시 닿았다가 떨어지는 체온에 김석영의 낯이 미묘해졌다. 그에 반해 윤재하의 눈매는 안도감에 허물어졌다.
"아까보단 체온이 오른 것 같아요. 이상한 기운도 사라지고."
"고마워. 네 덕이야."
말의 성격과는 달리 묘한 시선이 거침없이 꽂혔다. 의아하게 시선을 받아치던 윤재하가 뒤늦게야 붙잡힌 손목의 감촉을 느꼈다. 강한 힘으로 옥죄인 손에 피가 몰려있었다.
"......아파요."
손아귀의 힘이 약해지긴 했으나 잡은 손을 풀지 않은 김석영이 뻔뻔하게 물었다.
"지금은?"
"......안 아파요."
"그럼 됐어. 다른 질문 하나 해도 될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목을 가리켰다.
"뭐가 보여."
"......."
손끝이 이끄는 대로 제 손목을 바라보다가 의아하게 시선을 옮기니, 김석영이 재차 눈길을 준다. 손목을 보라고. 순순히 바라본 윤재하가 의아하게 말했다.
"......혈관이요?"
"그거 말고."
"그쪽 손가락이요."
"......."
아무래도 윤재하의 눈엔 안 보이는 게 분명했다. 당사자가 알지 못하는 귀어라....... 잠시 생각에 잠긴 김석영이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영가에게 해코지 당한 적 있니."
"해코지라고 하기엔....... 그냥 장난은 치고 싶어 하지만, 직접적으로 손은 못 대요."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다거나."
"......글쎄요.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 기억으론 없어요."
찰나의 정적 후, 순식간에 덤덤한 얼굴을 한 윤재하가 무감하게 내뱉었다. 미세하긴 했으나 줄곧 감정이 어린 얼굴만 봐왔던 터라 김석영에겐 조금 의외로운 낯이었다. 그게 신기해서 보았던 것뿐인데, 시선의 의도를 잘못 해석한 윤재하가 얕은 한숨을 삼키곤 말을 덧붙였다.
"정말이에요. 의도하고 누군가를 해치거나......."
"답변의 흐름이 왜 이래. 의심한 적 없어."
"그럼, 왜 그렇게 보는 건데요."
"그냥. 신기해서 봤어."
"......내 얼굴이요?"
얼굴이 신기하다는 말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미세하게 금이 간 시선을 받은 김석영이 바람 빠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눈높이가 같아졌어도 애는 애였다.
어찌 됐든 말을 조합해보면, 윤재하는 자신의 손목에 귀어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다면 누군가 은밀하게 새겨넣은 것일 텐데, 저렇게 예민한 감을 지닌 자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게다가 그 자체의 타고난 힘도 있을 테지만 별달리 영가에게 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아, 새겨진 귀어가 다른 영가들을 끌어들이는 용도는 아닐 터다. 도리어 쫓는 역할일까. 악귀라도 얽혀있다면 골치가 아픈데.
"왜 자꾸, 그렇게 봐요......."
훑어 내리는 시선에 윤재하가 읊조렸으나, 김석영의 눈길은 그대로 머물렀다. 윤재하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보고 있자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능했다. 악귀들이 탐낼만한 그릇이긴 하니까. 하지만 저 몸을 빼앗기란 영 쉽지 않을 테니 되려 악이 오를 수도 있다.
'아.'
생각이 이어지다 보니 떠오른 게 있다. 그러고 보니 윤재하의 어머니가 무당이라고 했던가. 그가 몰래 새겨 넣은 거라면.......
"......그만 좀 보면 안 될까요."
"미안."
참다못한 윤재하의 타박에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 김석영이 가볍게 사과했다. 한숨을 삼킨 윤재하가 붙잡힌 제 손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목에 뭐가 있기라도 해요?"
말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있긴 하지."
"그게 뭔데요?"
"글쎄. 나도 잘 몰라서."
선뜻한 대답에 윤재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르는 것도 있어요?"
"왜 없겠어."
내가 신도 아니고.
"그냥....... 왜인지 다 알 것 같아요."
"설마."
그러게.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냥 막연하게 이 남자는 무엇이든 알 것 같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나 위압감이 마치 어른의 표본 같다고 느껴서일까. 우스운 생각이었다. 어른이라고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아는 것도 아닌데. 저 스스로도 어른의 영역에 속하면서, 남자를 보고 어른 같다고 말하다니. 이상한 말을 해버렸다는 자각에 귓가로 열이 번졌지만 다행히 김석영은 가볍게 넘긴 듯했다.
그나저나 뭐가 있다는 걸까. 제 눈에 보이는 건 피부의 표면과 혈관, 마디가 도드라진 김석영의 손가락뿐인데.
"혼자라고 했었지."
그때, 갑자기 김석영이 말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다. 표정의 의미를 알 재간이 없던 윤재하는 잠자코 기다렸고, 그런 그의 행동을 눈치챈 김석영이 대수롭잖게 말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뭔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렇긴 한데, 여태껏 별일 없었다면 됐어. 신경 쓰지 마."
"......네."
영 꺼림칙하지만 김석영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니 저라고 별수 있을까. 그에게 말했다시피 지금껏 큰 위험 없이 잘 살아왔다. 그리 평탄했다고는 말 못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보다 지금 윤재하로선 눈앞의 남자에 대한 의문이 더 컸다.
잠에서 깬 김석영은 죽음을 앞둔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이 많이 가신 상태였다. 창백하던 안색 역시 나아졌다. 찬찬히 살핀 윤재하가 넌지시 물었다.
"몸은 괜찮아요?"
"덕분에."
덕분이라기엔 이불을 덮어준 것밖에 없는데. 혹시 손을 내어준 것도 포함할 수 있는 건가. 실없는 생각을 이어가던 윤재하는 문득 아직 잡혀 있는 손목에 시선이 향했다. 그 기색을 파악한 김석영이 짧은 사과와 함께 손을 놓아주었다. 머쓱하게 옷소매를 내린 윤재하가 말했다.
"죽은 줄 알았어요. 맨바닥에 널브러져 있지, 안색은 창백하지, 체온도 서늘하지. 그, ......이상한 기운도 그렇고."
"피곤해서 그런 거야.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 상태가 아니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건 피부에 닿는 시선의 무게 때문이었다.
'나한텐 물어봤으면서.......'
문득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 따윈 진즉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동등하지 못한 관계에서 평등을 바라는 건 미련한 짓일 뿐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인지 이 남자 앞에선 자꾸만 실수하게 된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꾹 억누르는 듯한 낯을 마주한 김석영이 말했다.
"말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건 너도 잘 알 거야. 기억을 온전하게 가진 채로 돌아가고 싶다면 더는 관여하지 않는 게 좋아."
말간 눈을 끔벅인 윤재하가 이상한 것을 들은 듯한 표정을 했다. 뒷말은 협박 같기도 한데, 왜인지 이건.......
"배려예요?"
배려처럼 느껴졌기에.
"그렇게 들렸어?"
김석영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아니었던 건가. 별안간 민망해진 윤재하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가 웃었다.
"배려라고 했다가 다시 아니라고 부정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그런,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아닌 게 아니라....... 아니에요."
"뭘 당황하고 그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래. 다 아니구나."
바람 빠지는 건조한 웃음을 낸 김석영의 낯이 느른하다. 그에 비해 윤재하는 한 문장만을 습득한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스스로가 민망했다. 하지만 김석영은 맘 놓고 민망해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보다, 일자리 구하는 건 좀 어때."
"아......."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날부터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은데. 맞나?"
"네. 맞아요."
"언제쯤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번 달은 힘들 것 같아요. 당장 구하더라도 집을....... 아니, 아니에요."
말간 시선이 비껴가고 마른 입술을 달싹이는 게, 마치 궁지에 몰린 약자 같았다.
'내 화법에 문제가 있나.'
이상현이 툭하면 운운하던 사회성이란 단어가 뇌리를 스친 김석영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윤재하."
나직한 부름에 비껴간 시선이 되돌아왔다. 다갈색의 눈이 한껏 커진 채였다. 세워진 오른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김석영이 낯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름 부른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그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올 거라곤 상상조차 못해봐서. 얼떨떨한 낯을 마주한 김석영이 말했다.
"쫓아내려고 압박하려던 의미는 아니었어. 정말 단순히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본 거야. 못된 말을 들은 것처럼 굳어버리니까 내가 꼭 악당이라도 된 것 같아서. 해명해보려고."
"아......."
그랬던 거구나. 남자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속이 빠듯하게 조여드는 감각을 느끼며 김석영의 얼굴을 바라본 윤재하는 막연히 생각했다. 사실 선악을 따지자면 그의 얼굴은 선보단 악에 가까운 느낌이긴 하다고. 내면의 충동을 자극하는 악의 근원 같은.
"뒷말은 그냥 해본 건데. 수긍하네."
아, 실수했다.......
죄송해요. 빠르게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죄송까지야'라며 가볍게 웃은 김석영이 덩달아 윤재하의 낯을 눈에 담곤 말했다.
"그러는 넌 히로인의 연인같이 생겼어. 간악한 악당들이 눈독 들이는."
"......."
"칭찬이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별안간 늘어지게 하품하던 김석영이 눈가를 찌푸렸다. 딱지가 말라붙은 입술 위로 빠르게 피가 고였다.
"......피가, 나는데요."
"괜찮아. 일상이라."
능숙하게 피를 훑으며 아랫입술을 갉작거렸다. 저러면 더 덧날 텐데,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뜯어진 면적이 넓어졌다. 보는 이는 눈살을 찌푸리는 데 반해 당사자는 고통도 못 느끼는 것처럼 태연했다.
"약 발라야 할 것 같은데."
"놔두면 나아."
"제대로 안 나아서 계속 뜯어지는 거예요."
"그런가. 근데 괜찮아."
입술에 신경을 쓰는 것 자체가 귀찮다는 태도다. 누구 입술은 막 만지면서 왜 본인 입술은 못 괴롭혀 안달일까. 기껏 모양 좋은 입술이 상처로 가득한 게 신경 쓰였다.
일어나자마자 말을 해서인지 타는듯한 갈증을 느낀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기존에 있던 방을 트고 넓게 개조한 부엌에서 물을 꺼내 마신 그가 제 뒤에 선 존재감에 설핏 웃었다. 새로운 컵에 물을 담아 건네자 예의 그 얼떨떨한 낯으로 받아 들었다.
"왜. 갈증 나서 따라온 거 아니었어?"
"아......."
그냥, 의식하지 못하고 뒤따른 거였다. 머쓱해진 윤재하가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목을 축였다. 막상 시원한 물을 넘기고 보니 마른 갈증이 일었다. 순식간에 한 컵을 다 비우자 냉장고에 어깨를 기대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석영이 생수통을 흔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물을 채워주었다.
"고맙습니다."
"약수거든. 많이 마셔."
몸에 좋대. 말을 덧붙이며 싱크대 위에 생수통을 올려둔 김석영이 제 어깨를 매만졌다. 길게 뻗은 목을 살짝 기울이며 툭툭 두드렸다. 베개도 없이 맨바닥에 자서 그런듯했다. 방석이라도 접어서 목에 대줄걸.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김석영이 불쑥 말했다.
"그러고 보니 무단침입 상습범이네."
"......."
입을 합 다물자 그가 건조하게 웃었다.
"성실한 도우미 님이시니 밥 안 먹는 게 신경 쓰여서 온 거겠지.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 없어. 보다시피 자느라 끼니를 거른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나한텐 밥보다 잠이 더 소중해서."
시선을 피한 채 컵만 만지작대는 윤재하를 보며 김석영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일이 구해질 때까지 식사 준비도 그만해."
"......쫓아내려고 압박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왜......."
컵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다르지. 이건 압박이 아니라 편의를 봐주는 거야."
그의 말이 맞다는 걸 알지만 왜인지 부정하고 싶었다.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는 부정의 언어를 억누르며 윤재하가 말했다.
"괜찮아요. 식사 준비하면서도 구할 수 있어요."
"지난 일주일은 못 그랬는데, 이번엔 되겠어?"
또다시 턱, 말문이 막혔다.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실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버티고 있다 보면 생각을 바꿔주지 않을까, 하는. 무관심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니까 쥐 죽은 듯 버티다 보면 그냥 포기해주지 않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은연중에 그러길 바라면서 일을 알아보는 것에 소홀했다. 이곳에서의 일이 편하고 좋아서. 정말 부끄럽게도 그러했다.
윤재하의 귓가가 붉어졌다. 색채를 직시한 김석영이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타박한 건 아니야. 단순히 의문이었어."
"......."
"편할 대로 해."
다 마셨으면 내려가 봐. 상냥한 축객령에 윤재하는 도망치듯 안채를 벗어났다.
* * *
동네와 학교 근처의 고시원 정보를 비교하던 윤재하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학군에서 벗어난 동네라 확실히 값은 싸지만 통학 시간을 비롯해 교통의 노선이 불편하다. 환승 구간도 영 애매해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모자란 잠을 채우기도 무리였다.
그렇다고 기숙사를 신청하기엔 뒤끝이 안 좋을 게 뻔했고, 1인실은 반지하 월세의 두 배에 달했다. 하숙 역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문제였다. 거리는 멀어도 지금으로선 이 동네의 고시원이 제일 나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저렴한 월세방이 있는지도 알아봐야겠다.
다행히 곧 정산받게 될 급여는 두 달 치의 아르바이트비보다 높은 금액이라 앞으로의 생활비로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득바득 아끼면서 모아둔 돈은 되도록 건들고 싶지 않았다. 아직 방학이니까 시간만 부지런히 쓰면 될 것이다.
낮에 할 수 있는 일자리와 야간 편의점 정보를 살펴보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장을 보러 가야 할 때였다. 김석영은 분명 윤재하에게 편할 대로 하라 말했고, 적어도 떠나기 전까지는 그 말을 충실히 이행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는 윤재하가 준비한 식사를 무시하진 않았다.
저택의 도우미로 일하게 되면서 자리 잡은 틈새 시간마다 자격증 공부에 매진하는 윤재하를 알기에, 형체는 종종 만나는 영가를 보러 간다며 자리를 비워 주었다. 오늘도 그러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아직도 미약하게나마 걱정이 드는 한편, 사실 혼자만의 시간이 달갑기도 해서 윤재하는 쓰게 웃었다.
외진 구역의 외진 동네라서 그런지 드물게 구인·구직 신문함이 눈에 띄었다. 하나 남은 신문을 소중하게 챙긴 그는 익숙해진 마트로 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다다를 때면 어김없이 모자를 꾹 눌러쓰고 들어섰다.
"아, 어서 와요."
카운터의 직원이 인사를 건네다 제 앞에 선 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요새 자꾸 가위를 눌린다니까 그러네."
"그게 다 피곤해서 그러는 거야. 몸이 허약한 거라니까? 그럴 땐 홍삼이야, 홍삼. 아는 동생이 홍삼 판매하는데, 어떻게, 싸게 좀 해줘?"
"거참,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난 몸에 열이 많아서 홍삼 먹으면 안 된대도 자꾸 그 소리네. 아니, 됐고. 내 말 좀 제대로 들어보라니까. 내가 생전 가위를 안 눌리던 사람이야. 그런데 요 며칠간은 계속 꿈자리가 사나운 게, 어후, 영 소름 끼치고 이상해서 용한 무당을 알아보려고 하거든......."
유행이 한참이나 지난 가요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직원의 말소리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한숨을 삼킨 윤재하가 흘끔 시선을 던졌다. 부쩍 핼쑥해진 직원의 목뒤로 삿된 기운이 어른거렸다. 매섭게 쏘아보자 그의 눈치를 살피듯 몸을 사그라뜨렸다.
"......하."
또 시작됐다. 그가 있는 곳이면 늘 일어나는 사귀들의 장난질이. 윤재하를 직접 건드릴 용기는 없으면서, 꼭 이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못된 장난질을 해댔다. 호의든 적의든,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다가오는 자들에겐 정도가 더욱 심했다. 그건 윤재하가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는 이유였다.
"쟤한테 말 한 번 걸었더니, 그날 밤 꿈에 웬 귀신이 나와서 목을 조르더라니까?"
"기분 나쁜 새끼. 분명히 저 새끼 때문에 사고 난 게 맞아. 충고 한번 한 걸 두고 저 새끼가 나 저주한 거라고!"
"......미안한데, 그만 나와줬으면 좋겠다. 왜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네가 더 잘 알겠지. 급여는 바로 챙겨줄게."
차라리 저를 향한 직접적인 괴롭힘이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감당하는 건 오롯한 그만의 몫일 테니까. 하지만 타고난 영기는 윤재하의 몸만을 지켰다. 그게 끔찍하게도 싫어서 한때는 개입해 보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도리어 사귀들을 자극하는 것임을 알게 된 후론 그마저도 멈추었다. 저로 인해 피해 볼 사람들의 원망과 고통이 두려운 한편, 언젠가부턴 감정을 소모하는 그 자체가 지겹기도 해서. 그래서 윤재하는 일부러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형체와의 대화를 숨기지 않았다. 흥미는 잠깐일 뿐 혐오의 감정은 길게 이어진다는 걸 알기에.
사실 좋은 방법은 아니란 걸 알았다. 이러한 대처가 생활에 있어선 발목을 잡으니까. 일자리를 구해도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가 그러했다. 제가 자초한 것에 의한 소문과 사귀들의 괴롭힘. 어느 쪽이든 막다른 길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저택의 도우미 일이 편했다.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까. 오롯이 시간을 활용할 수 있으니까. 염려한 것에 비해 형체 또한 온전히 적응해나가고 있는 데다, 저보다 타고난 영기를 가진 자가 함께한다는 것도 마음이 놓였다. 그 사람이라면 저로 인한 피해를 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마음을 허물게 했다. 안이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었다는 걸, 창백한 낯으로 쓰러져 있던 김석영을 마주하고서야 깨달았다. 그는 이미 제가 알 수 없는 영역에서 고통받는 사람 같았다.
"무서워서 잠도 못 자겠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와중에서 소름이 돋는다니까? 어깨도 무겁고 말이야......."
......마트를 바꿔야 할 때가 왔다. 익숙한 체념과 함께 걸음을 물린 윤재하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아, 가려고요? 잘 가요. 직원이 건네는 친절한 인사말에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입술을 짓씹고 푹 숙인 시야로 불쑥 누군가의 신발이 튀어나왔다. 미처 피하기도 전에 어깨 위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통으로 몸을 부딪힌 상대방이 뒤로 나자빠졌다. 하아, 속으로 욕을 삼킨 윤재하가 남자를 부축했다.
"......죄송합니다."
어흐, 앓는 소리를 내며 더듬더듬 일어서던 남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어?"
눈이 커진 남자가 불쑥 제 얼굴을 들이댔다. 낯을 굳힌 윤재하가 몸을 물리려 하자, 빠르게 팔을 잡아채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역시,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너, 너 윤재하 맞지? 그치?"
불쑥 튀어나온 제 이름에 윤재하의 몸이 굳었다.
"야 너 진짜 오랜만이다.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어제 쟤네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 보고 차 조심하랬다니까? 존나 기분 나빠."
"너네 할아버지 때문이야! 너네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아빠가 죽은 거야!"
"사내새끼가 팔찌나 차고 다니잖아. 꼴 보기 싫게."
"나 김민재잖아. 기억 안 나?"
살이 두툼한 손으로 어깨를 툭 친 남자가 말했다. 가래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만 다가왔다. 얼어버린 윤재하의 낯에 균열이 일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모자로 얼굴을 가린 그가 황급히 일어섰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야, 어떻게 잘못 봐? 너 윤재하 맞잖아. 나 김민재라니까? 모른척하기야?"
다급하게 말한 남자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옷깃을 잡아챘다. 타악, 손아귀를 떨쳐낸 윤재하가 희게 질린 낯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세차게 얻어맞아 부어오른 손등을 부여잡으며 앓던 남자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야.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난 반가워서......!"
남자의 뒷말을 무시한 채 윤재하가 걸음을 뗐다. 흔들리는 시야에 몇 초 남지 않은 신호등이 보였다. 불가능한 거리였으나 이성이 만류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가까스로 횡단보도의 초입에 들어서자 신호등의 남은 시간이 5를 알렸다. 호흡조차 멈추고 달음질하던 순간이었다. 무언가 거세게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빠아아아앙―!'
귀를 찢을듯한 트럭의 경적에 온몸이 굳었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귀를 막고 멈춰선 윤재하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달려오던 트럭은 온데간데없고 일제히 멈춰 선 차창 너머로 짜증 섞인 운전자들의 얼굴만 보였다.
"......."
얼른 건너라는 듯 휙휙 손짓하는 것에, 막힌 숨을 터뜨리고 고개를 바로 했다. 보행자 신호등은 어느새 빨간불로 변한 채였다. 무거운 발을 이끌고 인도로 향하자 그제야 차들이 움직였다.
멍한 정신으로 건널목을 바라보니 남자가 그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흐트러진 호흡을 삼킨 윤재하는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인적이 드문 골목을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 길이 막히면 다시 뒤를 돌아 걷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목적지도 없이 한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소형 슈퍼가 보였다.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조명이 눈부시다고 느끼는 순간에서야 사위가 어두워져 있었단 걸 깨달았다.
"......아, 저녁."
몇 시지. 황급히 핸드폰을 꺼냈으나 하필 배터리가 닳았는지 전원이 꺼져 있다. 마른 한숨을 내쉰 윤재하가 슈퍼로 향했다. 다행히 벽면엔 아날로그 시계가 붙어 있었고, 시간은 6시를 가리켰다.
"하아......."
늦는다고 말해야 하는데. 폰이 꺼져 있어서 전하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번호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잘해야 하는데, 자꾸만 실수를 연발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지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서 준비하자.'
다급하게 장을 본 윤재하가 밖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해서 한참을 헤매야만 했다. 겨우 집에 도착하니 7시에 가까웠다.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체가 지친 낯을 마주하곤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늦었네?」
"아....... 날이 좋아서 산책을 좀 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어. 길까지 잘못 들어서서 헤매는 바람에."
「헤맸어? 핸드폰 있잖아.」
"강의 들을 때 충전하는 걸 깜박했나 봐. 배터리가 나가서 꺼졌어요."
「그랬구나. 고생했네.」
"아니야. 뭘."
멋쩍게 웃은 윤재하가 황급히 식사를 준비했다. 반쯤 정신을 놓고 움직이던 그때였다. 갑작스레 시야를 가린 형체의 모습에 움직임을 멈췄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엄한 얼굴을 한 모친이 낮게 잠긴 어조로 말한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뭘 하긴, 재료 손질......."
말을 잇던 와중에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윤재하의 멍한 시선이 통증이 시작되는 곳으로 향했다.
「피나잖아.」
"아......."
칼질이 서툴렀을 때도 손을 베여본 적이 없는데. 언제 베인 건지, 기껏 썰어놓은 재료 위로 피가 묻어 있었다.
......못쓰겠네. 한숨과 함께 혀를 찬 윤재하가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제법 깊게 베였는지 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만 씻고 지혈하자. 구급상자 있을까?」
"괜찮아. 휴지로 잘 막아주면 금방 아물어."
「휴지도 안 좋은데....... 차라리 수건으로 하지 왜.」
"아깝게 뭐 하러."
꾹 눌러 피를 짜낸 후 휴지를 돌돌 감았다. 비닐장갑을 낀 채로 다른 칼을 꺼내 새로 손질을 시작했다. 도리어 상처의 아릿한 통증 덕분에 정신이 맑아져서, 식사 준비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시간을 확인한 윤재하가 보온 박스를 챙겼다.
"너무 늦었다. 갔다 올게."
「응. 다녀와.」
황급히 저택을 나서 숲길로 향했다. 급하게 나온 탓에 손전등을 깜박했지만 익숙해져서인지 헤매지는 않았다. 뛰다시피 한 걸음으로 가옥의 대문을 넘은 윤재하가 멈칫했다. 사랑채의 뒤편에서 내려오고 있던 김석영과 마주한 탓이다.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것을 확인한 김석영이 느릿하게 눈을 끔벅이곤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그거 내 저녁이야?"
"아, 네. 오늘 조금 늦어서......."
두 시간이 조금은 아니었으나 이미 말은 튀어나온 후였다.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인 김석영이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잘됐네. 나도 이제 내려온 거야."
"아......."
다행이다. 안심한 윤재하가 굳어진 낯을 누그린 채 툇마루로 다가갔다.
"그래도 늦어져서 죄송해요."
"넌 참 별 게 다 죄송하네."
죄송할 일이니까 죄송한 건데. 그는 이상한 부분에서 너그러운 면모가 있었다. 쓴웃음을 삼킨 윤재하가 조심스럽게 보온 박스를 올려두었다. 그러다 왼손가락에 퉁퉁 감아놓은 휴지 붕대가 김석영의 눈에 띈 모양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리켰다.
"손은 왜 그래."
"아....... 그냥, 좀 베였어요. 별거 아니에요."
재빨리 손을 숨기고 머쓱한 낯으로 대꾸했다. 김석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냥 좀 베였다기엔.......
"피가 제법 많이 묻어 있던데."
"제대로 지혈을 안 했나 봐요. 괜찮아요."
"거즈가....... 아, 거긴 구급상자가 없을 수도 있겠네. 손 이리 줘볼래. 한번 보자."
"진짜 괜찮아요."
"얼른."
재촉하는 말에도 윤재하는 주저했다. 늦은 것도 모자라 꼴사납게 손 베인 것까지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도리질을 하자 김석영이 짐짓 엄한 얼굴로 말했다.
"너 내일 아침 안 할 건가 보지?"
"......무슨 소리예요. 아침 할 거예요."
"아, 그럼 피 묻은 거 먹게 할 생각인가 봐? 나 골탕이라도 먹이려고?"
사색이 된 윤재하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짐짓 억울한 얼굴로 황급하게 말했다.
"내가 왜 혀, 아니, 그쪽을 골탕 먹여요......."
"왜. 골탕 먹일 수도 있지. 말 못되게 하잖아."
어느 댁의 이상현 씨는 나보고 마귀라던데.
"......아니에요."
어느새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를 바라본 김석영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한 박자 늦는 거 보니 맞나 본데."
"아니에요."
"이제 와서 빨리하면 뭐 해. 그만 튕기고 손이나 줘봐."
튕기, 하아...... 말을 삼킨 윤재하는 사색과 울상이 된 낯으로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마귀에게 바쳐지는 제물 같았다. 가여운 제물의 손을 잡은 마귀의 피부는 냉골처럼 차가웠다.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하자, 마디가 도드라진 김석영의 창백한 손이 휴지로 감싼 검지를 꽉 쥐었다. 베인 상처가 아픈 건지 남자의 손아귀 힘 때문에 아픈 건지 구별이 안 되었다.
"잘 참네."
칭찬이라도 하는 어투였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휴지 조각을 떼어내고 상처를 확인한 김석영이 고갯짓을 했다.
"피 멈췄다. 이제 소독하자. 들어와."
상처가 난 부위를 피해 검지의 마디를 잡은 김석영이 윤재하를 이끌었다. 신발을 벗고 그를 따라 사랑채에 들어섰다. 응접실 같은 분위기였다. 좌식 의자에 윤재하를 안내한 김석영이 구급상자를 찾아와 곁에 앉았다. 손을 달라는 말과 함께 내민 손에 머뭇거리다 손을 얹었다. 소독이 시작됐다.
따끔거리는 건 잠깐일 뿐, 상처 위로 얹어진 소량의 연고를 펴 바를 땐 조금 간지러웠다. 커다란 손으로 꼼꼼하게 약을 펴 바른 김석영이 윤재하의 검지를 잡아 올리며 말했다.
"호오― 해봐."
"......네?"
윤재하는 제 귀를 의심했다.
"호오― 하라고. 호오― 몰라?"
삭풍보다 건조하고 무감한 낯을 한 사람이 '호오―' 하며 입바람을 부는 시범을 보였다. 잔뜩 굳어진 얼굴로 반응 없는 윤재하를 도리어 이상하게 바라본 김석영이 말을 덧붙였다.
"내가 불면 더럽잖아. 직접 하라고. 좀 말라야 밴드를 붙이지."
'......어릴 때는 직접 침까지 발라줬잖아요'라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으나 간신히 삼킨 윤재하가 얼떨결에 호오―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옆에서 '한 번 더'라고 재촉한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또다시 입바람을 부니, 이번엔 잘했다며 건조한 목소리로 칭찬을 해주었다. 밴드의 포장지를 벗기는 김석영을 바라보는데, 윤재하는 방금 제가 뭔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눈가와 귓가를 흘끔 바라본 김석영이 웃음을 흘렸다. 반응이 곧장 드러나니 건드리는 재미가 있었다. 저를 놀리는 걸 알았는지 윤재하의 말간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입술만 달싹일 뿐 별말은 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밴드를 붙여준 김석영이 '됐다'라고 말하자 기어가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방수 밴드는 아니니까 물 닿지 않게 조심해."
"네, 고마워요."
"내려가는 김에 이것도 가져가고."
그가 구급상자를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자, 김석영도 몸을 일으켰다. 윤재하는 그제야 제 손가락 때문에 보온 박스를 밖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함과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벗어둔 신발을 신고 문가에 기댄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저......."
'식사 맛있게 드세요'가 나을까. 아니면 늦은 저녁이니 '안녕히 주무세요'로 해야 하나. 둘 다 해도 되는 걸까. 아니, 그런데 '주무세요'는 너무 극존칭 아닌가. 짧은 시간 동안 속으로 방황하는 사이 김석영이 먼저 말을 건네주었다.
"밤길이 어두우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눈을 휘둥그레 뜬 윤재하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은 김석영이 툇마루 위의 보온 박스에 눈길을 주었다.
"저녁 잘 먹을게. 들어가 봐."
김석영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윤재하의 낯이 흐드러졌다.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안녕히 주무세요."
결국 둘 다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