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왔다는 건,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는 걸 의미해요."
내부를 살펴보던 남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요?"
"네. 간절히 바라는 것이요."
카운터에 기대어 느슨히 턱을 괸 김석영이 말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는 매개체를 전달하는 집배원 같은 거예요. 아시죠? 우체국 집배원."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해가 빨라서 좋네요. 그럼 설명을 이어가죠. 완전한 소멸을 맞은 자만 아니라면 저승에 있는 모든 이에게 매개체를 대신 전달해줄 수 있습니다. 대체로 편지를 많이 쓰긴 하는데, 간혹 물건을 보내는 분들도 계세요."
"저승이라고 했어요, 지금?"
무감하게 이야기를 듣던 남자가 돌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형형한 안광은 어딘가 뒤틀린 구석이 있었다. 쉽진 않겠네. 속으로 생각한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저승에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거죠?"
"네. 맞아요."
단조로운 대답에 기괴한 숨을 터뜨린 남자가 마르고 앙상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잘게 경련하는 어깨와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는 웃음 같기도, 신음 같기도 했다.
"이곳은 아주 간절하게 바라는 자들만 올 수 있는 곳이에요."
어떠한 형태이든 그것은 미련이라고도 부를 수 있고, 그것에 대한 감정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강렬해져서 이승에서의 삶에조차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선택되어 오는 곳.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기뻐하셔도 돼요. 선택된 거거든요."
"......대가는요?"
건조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김석영이 대답했다.
"무엇을 줄 수 있는데요?"
"목숨이요."
환희로 가득 찬 얼굴로 내뱉기엔 퍽 기괴한 답변이었다. 턱을 괸 손끝으로 피부를 갉작이던 김석영이 눈매를 늘어뜨렸다.
"필요 없는데요."
"그럼 육체요."
"목숨이나 육체나 거기서 거기 아닐까요."
"그만큼 절실하다는 겁니다."
"절실함은 이미 증명됐으니 충분합니다. 평범하게 생각해보세요. 목숨값이나 육체는 너무 부담스럽거든요."
잠시 생각에 잠긴 남자는 기묘한 분위기가 맴도는 내부에 시선을 돌렸다. 공간을 빼곡하게 채운 고가구와 신묘함이 느껴지는 서적들. 코끝을 간질거리는 독특한 향내와 감실감실 피어오르며 유영하는 연기의 흐름. 이런 곳에서 지내는 존재라면 무엇을 받아도 부족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목숨값만큼 그럴싸한 게 없는데요."
"어려우세요?"
"......조금 그렇네요."
"그럼 과자는 어떨까요."
"......과자라고요?"
가벼운 대꾸에 불쑥 남자의 미간이 깊게 팼다. 이 모든 게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 뒤늦게야 정신이 드는 것이다.
"줄 게 목숨이나 육체밖에 없다고 하시니 별수 있을까요. 말했다시피 그건 영 부담스러워서요. 마침 집에 떼를 쓰는 애가 있으니, 입막음용으론 과자가 딱이겠다 싶어서."
"......장난치는 거라면 가만 안 둘 겁니다."
"명심하죠."
태연하게 웃어 보인 김석영이 말을 이었다.
"대가는 미리 정해졌으니 됐고. 매뉴얼을 덧붙이자면, 저승에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뭐죠?"
"수신인의 물건이요."
"그건 왜......."
"수신인을 찾아가기 위해선 살아생전 수신인이 가장 아끼던 것, 혹은 손때가 묻은 물건이 필요하거든요. 저는 그걸 통해 수신인을 찾아갈 수 있어요. 주소를 대신해서."
이해를 마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우편물의 준비와 함께 수신인의 물건 또한 찾아야 할 테니까요. 모두 준비가 되었을 땐 지금 이곳을 상상......."
"아니요."
남자가 불쑥 말을 끊었다.
"지금 바로 보내죠."
"지금은 아무런 준비가 안 됐을 텐데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아서요.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거든요. 종이와 펜 정도는 빌려줄 수 있겠죠?"
"수신인의 물건은요?"
"걱정하지 마세요. 늘 지니고 있거든요."
씁쓸하게 웃은 남자가 제 왼손가락에 자리한 두 개의 반지 중 하나를 빼냈다.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표면이 고른 은반지였다.
"손때가 묻기는커녕 새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만큼 아꼈고, 아낀 만큼 관리를 잘했거든요."
"좋습니다. 종이와 펜을 드릴게요. 보내시는 분의 정보와 물품도 따로 기재해야 하니 발신인 정보지도 채워서 주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서랍장을 뒤져 순백의 편지지와 만년필을 찾은 김석영이 정보지와 함께 남자에게로 날려 보냈다. 팔랑이며 날아오는 것을 받아든 남자는 일순 놀란 듯한 표정을 짓다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종이를 채워나갔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김석영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자에만 집중한 남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덤덤해져만 갔다. 단 한 번도 방향을 헤매지 않는 것은 주어진 길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남자는 이미 이곳에 오기 전부터 무언의 결단을 내린 듯했고 지금은 그것을 표출하는 시간일 테다.
일반적인 장소가 아닌 만큼 잉크는 종이와 맞닿는 순간 빠르게 말라갔다. 남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활자를 눈으로 담다가 손끝으로 훑어보았다. 불쑥 치미는 무언의 감정을 빠르게 갈무리한 그가 종이를 곱게 접었다.
"다 적었습니다."
손짓으로 종이와 만년필을 넘겨온 김석영이 정보지를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수신인의 물건을 주시면 됩니다."
"......네. 그러죠."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가 반지를 건넸다.
"우편이 전달되면 돌려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네."
"대가도 받아야 하니까요. 원래라면 대가를 먼저 받고 일을 시작하거든요."
"......그런가요. 감사하네요."
"그러니까."
미묘한 얼굴로 대꾸하는 남자에게 김석영이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다는 거 잊지 마세요."
"......."
하아, 남자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안채의 마당에서 부지런히 빨래를 널던 윤재하는 희미해지는 고택의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아스라이 사라지는 고택의 형상 속에서 김석영이 걸어 나왔다.
"오셨어요."
"응. 그런데 다시 들어가야 해."
"어딜요? 고택으로요?"
일이 끝난 거 아니었냐고 묻자 김석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성격 급한 손님이 오셔서. 바로 일하러 가야 해."
"아......."
눈을 깜박인 윤재하가 아직 반이나 쌓인 빨래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김석영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윤재하는 황급히 빨래 바구니를 안채에 밀어놓았다. 아슬아슬하게 줄에 매달린 빨랫거리는 잽싸게 손에 쥔 분홍 집게로 고정한 뒤 김석영의 소매를 붙들었다.
"저도 가요."
"......생각해보니, 팔찌를 차고 있더라도 내가 저승에 가 있을 땐 별다른 방도가 없네. 일을 하는 도중엔 돌아오지 못하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분신을 하나 더 만드는 건데. 생각이 짧았어."
"분신을 두지 않더라도 괜찮지 않을까요? 팔찌가 있잖아요. 여기엔 형의 기운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으니까, 오히려 이전보다 더 함부로 건들지 못할 거예요."
이미 따라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잘도 말한다. 오묘한 표정으로 한숨을 삼킨 김석영이 붙들린 소매를 털어냈다. 떨어지기는커녕 더더욱 손끝에 힘을 준 윤재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 노골적인 행동에 김석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놓으시지."
"싫어요."
"잠시 방에 들어갈 거야. 계속 붙잡고 있으면 불편하잖아."
"아......."
멋쩍게 입술을 달싹인 윤재하가 손에 힘을 풀었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방에 들어선 김석영이 자주 입는 카디건을 몸에 걸치고 나왔다. 툇마루에 앉아 방문만을 바라보던 윤재하가 마주치는 시선에 설핏 웃었다.
'이건 뭐, 주인을 맞이하는 개도 아니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린 김석영이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하얀 이마에 손끝을 튕겼다.
"고백 한번 했다고 너무 들이대는 거 같은데."
"......그래요?"
이마를 문지른 윤재하가 멋쩍게 대꾸했다. 열이 몰린 눈가와 귓불이 붉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맘 접어."
"......그건 싫어요."
덜컥 찌푸린 윤재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연약한 동물에게 상처를 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얼굴 빼곤 저와 대등한 체격을 지닌 남자에게 할법한 생각은 아닌데 말이다. 여러모로 얼굴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걸, 김석영이 새삼스레 깨달았다.
"떼쓴다고 될 일은 아니지."
"......얼른 가요. 늦겠어요."
꿋꿋하게 소매를 붙든 윤재하가 그를 잡아당겼다. 고택의 방향으로 앞서 걷는 윤재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김석영은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말을 삼켜냈다. 지금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해도 귀를 막고 모르는 척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며칠 이러다가 말겠지, 생각하면서도 내심 골치가 아파져왔다. 어느 순간부터 윤재하가 제게 차근차근 마음을 열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탓일까. 그가 대수로이 여기지 않은 사이, 윤재하의 가슴에선 조그마한 감정의 싹이 피어나고 있었던 거다.
경계의 입맞춤에서부터 분신과의 사건까지. 피어난 싹의 존재는 은연중에 드러나 김석영의 감각을 일깨웠다. 하지만 윤재하라면 제 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넘어가리라 여겼다. 그는 타인과의 관계나 접촉에서 무지한 게 느껴졌고 곁을 내어줄 여유 따윈 없어 보였으니까. 그 곁을 제게 내어줄 것이란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김석영은 그리 생각했다.
물을 주지도 않았는데. 윤재하는 제 가슴에 피어난 싹의 꽃을 피웠고, 꽃은 끝내 만개하고야 말았다.
'안일했네.'
결국 제가 안일했던 탓이다.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에겐 최후의 방법이 있다. 바로 윤재하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제가 문 열어도 돼요?"
"......그래."
고택의 뒷문 앞에선 윤재하의 말에 생각에서 벗어난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문을 여는 윤재하의 모습은 마치 충실한 수하 같았다.
"가기 전에 당부하는데."
"네."
"이번에 발신인의 기억은 조금 괴로울 수 있어."
"괴롭다니요?"
남자의 손가락에 자리하던 두 개의 반지. 개중에 하나였던 수신자의 반지를 바라본 김석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연자가 범상찮으면 대체로 그 사연 역시 범상치 않거든."
남자의 영혼은 너덜너덜했다. 분명 현실에서는 제 몸뚱이를 간신히 붙들고 있을 것이다.
"괴로워도 견딜게요."
"그래. 부디 그래줘."
옅게 웃은 김석영이 염주를 매만졌다. 적당한 알을 선택하곤 가볍게 두드리자 발신자의 편지는 희미한 연기가 되어 염주 알에 스며들었다. 탄내를 입바람으로 떨쳐낸 김석영이 곧장 은색의 반지를 손에 쥐고 힘을 불어넣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간이 비현실적으로 흐트러지기 시작하고 붕괴의 틈 사이로 기억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을 깜박이던 찰나.
"전학생. 밥 안 먹으려고? 오늘 수요일이라 맛있는 거 나오는데. 우리랑 같이 먹으러 가자."
"아......."
새하얀 이를 시원스레 드러내며 웃은 남학생이 멀뚱하게 앉아 있는 상대를 향해 말했다. 당황한 시선을 마주한 남학생은 시계를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야, 원래는 종 치기 전에 뛰어가야 하는 걸 너랑 가려고 참았어. 지금도 늦었다고. 빨리 일어나."
"아, 미안."
그 상대가 황급히 일어서자 팔뚝을 낚아챈 남학생이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제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그대로 식당으로 돌진한 그들은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산더미 같은 반찬을 얻었고, 서로를 경계하며 식사를 해치웠다. 저 혼자 2인분은 먹은 것 같은데도 은근슬쩍 반찬을 넘보는 남학생의 모습에 전학생, 임선재가 웃으며 식판을 밀어주었다. 남학생, 김도원이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대학 정했어?"
"나? 나는 당연히 국한대지. 나 거기서 대회 상 받은 거 있잖아. 무조건 수시 노려야지. 미대는 정시로 갈 게 못 된대."
"하긴. 넌 그래도 되겠다."
임선재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개구쟁이처럼 웃은 김도원이 물었다.
"선재 너는 정했냐?"
"응. 나도 국한대."
"뭐냐, 너. 왜 따라 하냐?"
"뭐라는 거야. 내가 먼저 정했거든?"
서로 본인이 먼저라고 우기며 투덕거리던 두 사람은 어느새 같은 대학의 교정을 거닐게 되었다. 서로의 시간표를 공유하고 서로의 빈 시간을 아는 건 당연했다. 그 시간을 함께하는 건 암묵적인 약속이었을 만큼 두 사람의 우정은 각별했다.
―야 임선재. 사실대로 말해라. 너 신기 있지? 아니면 그렇게 감이 좋을 수가 없어. 나 지금 네 충고 무시했다가 죽을 뻔했어!
"......야. 하아, 내가 거기로 가지 말라고 했잖아. 진짜 말 더럽게 안 듣지."
―됐고. 야. 이젠 솔직하게 털어놔라. 너 이런 거 한두 번 아닌 거 알지? 네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젠 못 기다려. 바른대로 불어라. 네가 뭐, 무녀라도 되면 내가 널 버릴까 봐 그래? 야. 너 우리 우정 무시해?
"......무녀가 아니라 무당. 남자는 박수. 병신아."
―아 맞다. 어제 오랜만에 이누X샤 보고 잤더니. 말이 헛나왔어.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태연한 대답에 미간을 찌푸리던 임선재는 이내 허탈한 웃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신기도 아니고 우정 무시한 것도 아니야. 그냥 좀 보이는데, 감이 좋아. 꿈도 꾸고."
―......야. 그럼 나 이번 기말 성적 어떨지 꿈 좀 꿔주면 안 되냐? 미리 마음의 준비 좀 하게.
"......되겠냐?"
―야. 능력 좀 키워. 필요할 때 써먹어야 진정한 능력이지!
무언가를 본다는 게 결코 가볍게 넘길만한 일은 아닐 텐데, 김도원은 평소처럼 임선재를 대했다.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고, 이미 꿈속에서도 경험했던 장면이었지만 내심 긴장했던 임선재는 비로소 환히 웃을 수 있었다.
소매 끄트머리가 아닌 김석영과 손을 마주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그들을 둘러싼 기억의 세상이 시간의 흐름에 맞춰 흘러갔다. 윤재하는 그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한 사람이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에, 사랑의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걸 눈치챘다. 감정은 쉽사리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역시 깨달았다.
"......."
지금 김석영의 표정은 어떠할까. 그도 눈치챘을까.
그의 시선을 돌려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길을 찾아가는 사람의 신경을 흩트릴 순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이 모든 기억을 볼 수 있는 것도 김석영의 힘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더더욱.
윤재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잠시 움찔하던 김석영의 손에 화답하듯 힘이 실렸다. 그 사소한 반응이 기뻐서 윤재하는 웃고 말았다.
시간이 흘렀다. 대학의 교정을 거닐던 두 사람은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김도원은 학교 선배가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을 시작하였고, 임선재는 아버지의 회사에 취직했다. 학교와는 달리 사회는 틈이라는 걸 허투루 허락하지 않았고, 서로 다른 영역에서의 접점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했을 뿐, 그들은 여전히 서로에게 충실했다. 남들은 그들을 향해 기이한 우정이라고 말했다.
"......또 차였다, 나. 이게 도대체 몇 번째냐."
"일곱 번째."
"......넌 그걸 왜 또 말로 내뱉고 그래?"
"네가 물었잖아."
"그래. 임선재가 이러는 게 어디 한두 번이냐."
연인과의 결별로 부쩍 우울해하는 김도원을 다독여주는 건 언제나 임선재의 역할이었다. 그날도 그런 역할에 충실해야 할 날 중의 하나였다. 익숙한 상황이었고 김도원을 다루는 것 역시 익숙한 일이었으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김도원."
"......왜."
"언제까지 방황할래?"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임선재의 마음이었다.
"뭘 방황해?"
"네 마음.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무슨 말이야?"
표정을 굳힌 김도원이 술잔으로 입을 가리며 임선재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입술 끝이 떨려오고 있다는 걸 임선재는 모르지 않았다.
"그만큼 방황했으면 이젠 돌아와야지."
"뭔 소리냐고."
"모르는 척하는 거 지겹지 않냐."
"......."
"난 이제 기다리는 거 지겨운데."
너 알잖아. 내가 너 사랑하는 거. 나직하게 내뱉는 말에 김도원의 표정이 흔들렸다. 임선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너도 나 사랑하잖아."
"......사랑, 사랑하지. 넌 내 가장 친한 친......."
"도원아."
"......."
"이제 나한테 상처 주는 거 그만해."
나 힘들어, 라는 말에 결국 김도원은 무너졌다. 부정하고 또 부정하려 했지만 언제나 굳건하게 옆을 지키던 임선재가 토해낸 고통의 한 조각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젠 두려움보다 사랑을 감추기가 더 힘들어져버린 것이다.
품에 가득 안기는 김도원의 단단한 몸을 힘껏 껴안은 임선재는 환희의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이루어졌다. 아주 긴 시간이었지만 드디어 사랑을 이루었다. 꿈에서 보았던 순간과 똑같이 흘러가는 상황에 임선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의 예지몽은 언제나 비껴가는 법이 없었다.
"......진짜 이렇게 돼버릴 줄 몰랐는데."
"난 너랑 행복해질 줄 알았어."
"......어떻게? 또 그 너의 신명 나는 능력으로?"
"맞아. 나의 신명 나는 능력이 우린 반드시 행복해진다고 말해줬어."
태연히 대꾸하는 임선재를 가는 눈으로 흘기던 김도원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뭐, 듣기는 좋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우리는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았어.
임선재는 그렇게 믿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갈 수 있어. 어떻게에....... 선재야, 우리 도원이. 우리 도원이 불쌍해서 어떡하니. 우리 도원이 불쌍해서 어떡해......."
퇴근 후에 일어난 뺑소니 사고였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통화를 나누던 사람이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빼도 박도 못한 즉사였고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이었다. 빠르게 진행된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난 그날처럼 환히 웃고 있는 김도원의 사진은 이런 식으로 사용되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영정에 쓰인 사진은 그들이 함께한 사진의 한 부분이었다.
「선재야.」
망연자실하게 영정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임선재를 향해 김도원이 다가왔다. 오랜 시간 방치되어 삐걱거리는 인형처럼 고개를 돌린 그는 김도원을 바라보았다.
「......너 진짜 보는구나.」
그날 임선재는 난생처음으로 영혼을 볼 수 있다는 현실에 감사했다.
"반지가 깨끗해."
「그러게. 나도 모르게 손을 감쌌나.」
"......반지를 감쌀 게 아니라, ......하아. 아니, 아니야. 미안해."
「아니야, 선재야. 내가 미안해.」
흐려지는 얼굴을 바라보던 김도원이 임선재에게 다가왔다. 연약하게 떨려오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체온을 전달해주고 싶었으나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의 증거였다.
"도원아. 가면 안 돼. 항상 내 옆에 있어. 난 널 볼 수 있어. 너랑 함께할 수 있어."
「......그래. 그럴게. 네 옆에 있을게.」
서로의 온기와 무게감은 느낄 수 없지만 그들은 그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를 느꼈다. 하루를 온전하게 함께할 수 있다는 건 꽤 달콤했다. 언제나 김도원의 존재가 느껴졌고, 업무를 보다가도 고개를 돌리면 김도원의 얼굴이 있었다. 그 순간 임선재는 깨달았다. 행복해지는 꿈속에서 분명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는 걸.
"요새 임 대리님 조금 이상하지?"
"자꾸 허공 보고 얘기하시잖아. 소름 돋아."
남들이 어떤 말을 하든 상관없었다. 임선재는 어떠한 형태로든 김도원과 함께할 수 있다는 현실이 행복했으므로.
「아, 그거 내가 진짜 좋아하던 거잖아. 맛있겠다.」
배달원에게서 김도원이 좋아하던 브랜드의 치킨 봉투를 넘겨받은 임선재가 씩 웃어 보였다. 발을 동동 굴리면서 군침을 흘리는 김도원을 따스하게 바라보던 그가 미리 준비해둔 제기를 꺼내 식탁에 올렸다.
「야....... 설마 제기야, 그거?」
"응. 생각해보니까 이 방법은 시도 안 해봤잖아. 여태까지 이걸 몰랐다는 게 더 신기해."
「......기분이 좀 묘하네.」
오묘한 낯의 김도원을 향해 어깨를 으쓱한 임선재가 닭 다리를 차곡차곡 재기 위에 쌓았다.
"됐다. 만져봐."
「......될까?」
잔뜩 긴장한 김도원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임선재의 바람과는 달리 김도원은 끝내 물질을 만질 수 없었다. 눈에 띄게 굳어버린 임선재를 흘끔 바라본 김도원이 쓰게 웃어버렸다.
「이럴 줄 알았잖아. 우리.」
침잠된 얼굴로 한숨을 토해낸 임선재가 마른 얼굴을 쓸어 넘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고민하던 그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임선재의 얼굴이 기묘한 빛을 띠었다.
"도원아."
「응.」
"차라리 나한테 들어와."
「...뭐?」
경악 어린 김도원을 향해 환히 웃은 임선재가 제 몸을 살폈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지?"
「야 너 미쳤어?」
"한번 해보자. 시도나 해보자고"
「임선재.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지금 어떻게 그딴 말을 해?」
화를 내는 김도원의 반응에 임선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왜? 만약 네가 내 몸에 들어올 수 있으면, 너 역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어. 난 너를 좀 더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거고."
「......야, 임선재.」
"나 너 안아보고 싶어."
임선재의 목소리 끝이 형편없이 떨렸다. 간절하게 바라보며 두 팔을 벌리는 것을 김도원은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그 역시 연인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안 될거야.」
"혹시 모르잖아."
실패를 예상한 김도원의 행위는 혹시나를 염원한 임선재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날 김도원은 처음으로 임선재의 육체에 빙의했다.
"......."
지금 도대체 뭘 본 걸까. 기억을 응시하던 윤재하의 걸음이 멎었다. 마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떨림에 김석영의 걸음 또한 멎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보기 괴로울 수도 있다고."
"......저러면. 저렇게 되어버리면, 저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건 끝까지 가보면 알게 되겠지."
떨리는 손을 강하게 붙든 김석영이 걸음을 떼었다.
임선재는 행복했다. 제 몸으로 김도원이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햇볕의 따스함을 느끼고 바람의 서늘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그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건 김도원과 섞이는 듯한 감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제 생각이 도원의 생각이 되고, 도원의 생각이 제 생각이 되었으나 그것 또한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도원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아니야. 이건......,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
"뭐가 아닌데?"
「난 죽었잖아. 내 육체는 썩어들어가고 있는데....... 너한테 기생해서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 정상이야?」
"그게 뭐 어때서 그래?"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에 김도원의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넌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남들의 시각에선 비정상처럼 비칠지 모르지. 그런데 나는 이게 좋아. 정상이든 비정상이든 상관없어."
「......너 미쳐가는구나.」
일그러져가는 연인의 표정에 임선재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미쳐도 좋다. 그와 함께할 수 있다면 미치는 것 정도야 대수일까.
「임선재, 정신 차려. 이건 이상해. 우리 이렇게 함께하는 건, ......의미가 없어.」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의미야. 그 이상 뭘 바라?"
「서로가 서로에게 독이 되어가고 있는데, 함께 있는 게 의미가 된다고?」
"......내가 너한테 독이라는 말이야?"
믿을 수가 없었다. 김도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다는 게. 나의 존재가 어떻게 네게 독이 될 수 있나. 광포한 기세가 사그라들고 창백하게 질린 연인의 얼굴에 육체를 잃은 남자가 말했다.
「네가 날 독으로 만드는 건 확실해.」
"......내가 널 독으로 만든다고?"
「그리고 나는 그런 널 병들게 할 거야.」
독이 되어서. 바로 지금처럼.
「선재야. 네 옆에 남는 게 아니었어.」
"......아니야.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내 미련으로 네가 병들어가고 있어.」
"아니야. 난 멀쩡해."
몰아치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연인을 향해 웃어 보인 임선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소중한 친구이자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연인이 무너져버린 것에 김도원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껴야만 했고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 결코 그를 지키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버렸다.
「난 가야 해, 선재야.」
"아니야....... 아니야. 안 가도 돼. 가지 마. 가면 안 돼......."
「우리 지금이라도 바로잡자. 그래야 해.」
"......싫어. 싫어......."
현실을 부정하는 임선재를 향해 김도원이 다가갔다. 허무하게 통과해버리지 않도록 임선재의 얼굴 어귀를 손으로 감싼 김도원이 속삭였다.
「선재야. 사실 여태까지 부끄러워서 말 못했는데.」
"......싫어, 도원아. 나는......."
「교탁 앞에 서서 교실 안을 훑어보던 너와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에, 나는 사랑에 빠졌던 것 같아. 처음부터였던 거야.」
점심을 빌미로 네게 다가갔던 찰나에도, 사실 내가 얼마나 떨렸는지 너는 모르지?
「우리 꼭 다시 만나자. 기다릴 테니까 넌 네게 주어진 삶을 살고 나한테 돌아와.」
임선재는 그의 말에 차마 고개를 저을 수 없었고, 떨리는 숨결 끝에 내뱉은 대답에 김도원은 비로소 향해야 할 곳으로 떠났다.
그 후로 임선재는 괴로웠다. 사실 제가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 도원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도원이 없이는 현실을 버티는 게 너무 힘들었고,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그의 연인과 닮은 영혼을 제 몸에 담았다. 육체의 따스함을 맛본 영혼은 욕심을 부렸고 임선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뺏고 빼앗기고, 억누르고 짓밟히는 시간을 거쳐 임선재의 영혼은 무수한 상처와 구멍을 얻었다.
"쯧쯧.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게 되었구나. 혼이 아주 엉망진창이야. 이대로라면 너는 저승에도 제대로 가지 못한다. 그렇게 육체를 노리는 것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너 또한 그들처럼 이승의 망령이 될 거야.'
간신히 정신을 붙들어 육체를 움직인 임선재는 길거리 노파의 말에 미소 지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피식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뗀 그는 몸을 빼앗기 위해 날뛰는 망자들을 견뎌내며 산으로 향했다. 정상에서 떨어져서 육체가 산산조각이 난다면 망령들이 탐내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걷고 또 걷던 어는 순간.
그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물건에 스며든 기억의 순간들이 안개처럼 희미해지고, 푸른 초원의 경계 너머로 낮과 밤이 뒤섞인 삼도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풍경을 눈에 담고 뒤를 돌아본 김석영이 침잠된 낯의 윤재하를 들여다보았다.
"잘 견뎠어."
입술을 달싹인 윤재하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원래라면 대가를 먼저 받고 일을 하지만 이번 발신인에겐 대가를 받지 못했어. 그가 고택에 들어선 순간부터 나와의 연결 고리가 생겨났다고도 할 수 있으니, 일이 제대로 마무리 짓기 전까진 괜찮을 거야. 함부로 죽을 수도 없을 테니까."
"마무리가 지어진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혹시라도......."
"글쎄. 그건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아......."
그의 말이 맞았다. 이후의 상황은 그가 관여할 필요도, 함부로 관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숨을 삼키고 입술을 잘근거린 윤재하가 사과를 입에 담았다.
"......죄송해요. 괜한 말을 했어요.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나 봐요."
"네 일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시큰거리는 울대를 억누르며 복잡한 감정을 추스른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망자의 형태이더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은 감정과, 그렇게 해서라도 붙들고 싶은 미련은 윤재하에게도 존재했다. 누군가에겐 비틀린 마음처럼 비칠지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절박함을, 그는 이해했다. 동시에 그 절박함에 얽매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도 깨달았다.
"아무도 그들의 선택에 대해 말을 얹을 순 없어. 어떠한 결과든 그건 그들의 과정이었고 그들만이 감당할 몫일 테니까. 나는 그저 전달할 뿐이야."
"......네."
"이만 가자. 아마도 오늘은 아주 긴 시간을 걸어야 할 것 같거든."
느슨하게 얽매이던 손에 힘이 깃든 것은 움직임을 위한 도약과도 같았다. 윤재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이끄는 힘에 몸을 기댔다.<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