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부터 서서히 몸을 타고 오르는 스산함이 괴기했다.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숨줄을 옥죄이는 감각이 선명해지고 등줄기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불길이 들끓는 듯한 속과는 다르게 피부 위를 흐르는 식은땀은 육체의 껍데기를 한기에 떨게 했다.
온몸을 잠식하는 알 수 없는 공포에 가쁜 숨을 터뜨리며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런 윤재하를 비웃기라도 하듯, 깊게 닫힌 눈꺼풀 너머로 어른거리는 것이 히죽이는 게 느껴졌다.
소리가 되지 못하는 욕설이 입안에 맴돌았다. 굳어버린 손끝을 움직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저릿한 감각과 함께 미세하게 움직인 순간, 줄곧 육체를 짓이기던 위압감이 사라지고 모든 감각이 증폭되었다. 거친 숨을 토해내고 눈꺼풀을 들어 올린 윤재하는 시야를 가로막는 검은 형상에 온몸을 굳혀야만 했다.
그 순간, 그가 느끼는 것은 날것의 두려움이었다.
이성적인 사고 자체가 억압당하고 근본적인 공포가 온몸을 잠식했다. 흔들리는 말간 눈망울에 뜨거운 물이 차올랐다. 흐릿해진 시야로 번진 검은 형상이 히죽 웃었다. 깊은 호선을 그린 입매로 무언의 속삭임이 나오려던 찰나였다.
"괴롭히지 말라고 했잖아요."
불쑥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인영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오른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익숙한 형상이 아른거렸다. 서늘한 기운과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향 내음. 낮은 목소리가 뱉어지는 순간 달라지는 공기의 흐름. 언제나 직설적인 시선으로 저를 바라봐주는 사람.
아, 김석영이다.
"구경 좀 한 걸 가지고 유난은."
히죽 웃은 검은 형상이 스르륵 몸을 뒤로 뺐다. 숨도 쉬지 못한 채 굳어져선 눈동자만 굴리는 윤재하의 모습에 김석영이 곧장 다가왔다. 잇새 사이로 새어나오는 끅끅거림은 불안정한 호흡을 동반하고 있었다.
"괜찮아, 윤재하. 숨 쉬어."
"흐으......."
눈을 가득 메운 물기가 김석영을 마주한 순간 후두둑 떨어졌다. 혀를 찬 김석영이 투박한 손길로 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일정한 리듬에 엉켜 있던 호흡이 점차 돌아왔다. 또다시 놀라지 않도록 가까이 다가가 시야를 막아버린 김석영이 윤재하를 살폈다.
"괜찮아?"
입술을 달싹이던 윤재하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김석영의 등 뒤에서 어른거리던 것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윤재......."
시선이 어긋난다 싶더니 불쑥 표정을 굳힌 윤재하가 김석영의 상체를 끌어당겼다. 강한 힘으로 얽매여 단단한 어깨에 턱을 괸 김석영은 견갑골을 받쳐 끌어당기는 힘에 숨을 삼켰다. 그의 몸을 숨기듯이 품 안에 감싸 안고 웅크린 윤재하가 온몸을 떨며 검은 형상을 노려보았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형형한 눈빛으로 경계하는 모습에, 형상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지금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건지."
상체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한숨을 삼킨 김석영이 손을 뻗어 윤재하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움찔한 순간을 놓치지 않은 그가 상체를 떨어뜨렸다. 놀란 윤재하가 재차 손을 뻗었으나, 단번에 낚아채어 깍지를 낀 김석영이 진정하라는 듯 꾹― 힘을 주었다.
"기운 좀 갈무리해 주시죠."
"버티고 있는데 뭐 하러?"
"이러다 얘 부정 타면 거래는 무효예요."
"음, 그건 안될 일이지."
어깨를 으쓱한 형상이 기운을 죽였다. 비로소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돋아나던 소름과 공포가 사그라들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내쉰 윤재하가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엔 의문이 가득했다.
"괜찮아. 너를 해칠 자가 아니야."
"하지만, 기운이......."
살면서 이런 기운은 처음 느껴보았다. 그건 김석영을 마주했을 때와는 결이 다른 공포였다. 저것은 부정(不淨)과 살(煞), 그 자체였다.
"걱정 말렴, 아해야. 넌 내 입맛이 아니거든."
"오해할 말 하지 마시죠."
넌더리가 난다는 듯 김석영이 한숨을 토했다. 히죽 웃은 검은 형상이 돌연 몸집을 부풀렸다. 손끝을 움찔하며 경직하는 윤재하에게 '괜찮아'라고 읊조린 김석영이 익숙한 시선으로 형상을 바라보았다.
제각각 길게 뻗쳐나간 검은 형상은 사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검은 재가 타들어가는 동시에 드러난 것은 치묵의 도포 자락이었다. 유려하게 뻗은 도포의 선을 따라 눈길을 옮긴 윤재하는 그 끝에 있는 형상에 또다시 숨을 삼키고 말았다. 그건 제각각 다른 눈, 코, 입을 끼워 맞춘 얼굴 가죽이었다.
"쟤 죽은 거 아닌지 확인 좀 해보렴, 망종(亡種)아."
"그놈의 망종 소리."
"양물 달린 사내놈이 안채에서 지내는데 망종이 아니면 뭘까."
"세기(世紀) 차이가 나서 영, 대화가 안 통하네요."
어깨를 으쓱 추켜올린 김석영이 윤재하의 낯빛을 살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김석영의 평연한 표정이 불안정하게 일렁이던 마음을 잠재웠다. 안정을 찾은 윤재하가 뒤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시 보니 도포 안엔 일반적인 옷을 입고 있었으나, 각기 다른 이목구비를 모아놓은 얼굴 가죽은 보는 것만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남자가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보아하니, 귀하게 태어난 아이인데도 팔자가 더럽게 꼬였구나. 가엾어라."
미간을 찌푸린 윤재하가 남자를 노려보았다. 겁먹어서 벌벌 떨 땐 언제고, 성난 살쾡이처럼 눈을 세운다. 비웃음과 함께 혀를 찬 남자가 윤재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사람의 형태를 따르곤 있으나 죽은 생선의 눈깔 같은 것을 달고 있는 모양새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었다. 도대체 뭐 하는 존재란 말인가.
"흠? 잠깐, 이거 망자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걸."
쇳소리 섞인 음성이 내뱉은 말에 윤재하의 표정이 덜컥 굳었다.
"허깨비는 실어봤자란다, 아해야. 애초에 너는 신을 받을 팔자도 아니야."
"......그런 거 아닙니다."
"그래? 그럼 왜 달고 다녔어?"
비꼬는 게 역력한 어투였다. 윤재하의 턱 끝에 힘이 들어갔다. 둘의 대거리를 지켜보며 옅은 한숨을 토해낸 김석영이 남자를 향해 말했다.
"이유는 나중에 묻죠.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가 우선이에요."
"너그러운 구석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의외롭다는 얼굴로 김석영을 바라본 남자가 어깨를 추어올리곤 윤재하의 곳곳을 살폈다. 눈깔이 이동하는 궤도에 삿된 것이 얼룩덜룩 묻어나는 기분이었다. 침묵을 유지하는 김석영을 따라 제 불쾌감을 억누른 윤재하가 숨을 죽였다. 곧 남자의 눈이 한곳에 멈춰 섰다.
"윽......."
왼쪽 손목을 잡아챈 불시의 악력에 윤재하의 미간이 구겨졌다. 강제로 끌어온 손목을 향해 제 낯을 들이댄 남자가 오묘한 음성을 내뱉었다. 점차 강해지는 악력에 윤재하가 입술을 짓씹었다. 낯을 굳힌 김석영이 남자의 손을 가로채지 않았다면 손목이 뒤틀렸을지도 모를 만큼의 힘이었다.
"힘 풀어요."
"싸고돌긴."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린 남자가 몸을 물렸다. 낭창한 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것에 김석영 역시 몸을 일으키자 윤재하가 옷자락을 잡아챘다. 붙들린 상의 자락을 바라보던 그가 윤재하에게 시선을 옮겼다.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 다급하게 말했다.
"가지 마요."
"왜?"
"저건 일반적인 영가가 아니잖아요. 도대체 저건......."
"괜찮아. 너한텐 위협일 수 있겠지만 나한텐 아니거든. 애초에 저자를 부른 것도 나고."
피식 웃은 김석영이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손짓이 의미하는 바에 윤재하가 힘없이 손을 떨쳤다. 잠시 시선을 맞춘 그가 방을 나섰다.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시선은 끈질기게 닿아왔다. 그것에 담긴 염려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마냥 달래주고 있을 수도 없었다. 끝끝내 맹목적인 시선을 뒤로한 김석영은 제 안방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편하게 드러누운 채로 그를 맞이했다. 닫은 문에 몸을 기댄 김석영이 삐딱한 시선을 보내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웃고 말이나 해봐요. 뭘 봤어요."
"맨입으로?"
어깨를 으쓱한 김석영이 바지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고리에 손가락을 끼우고 흔드는 것에 반색한 남자가 단번에 몸을 일으켜 손을 뻗었다. 너른 손안에 열쇠를 숨기고 팔을 뒤로 물린 김석영이 입매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말부터."
"고약하긴."
쯧, 혀를 찬 남자가 털썩 주저앉았다. 곁으로 다가가 시선을 보내자 곧장 입을 열었다.
"피 냄새가 배 있던데."
"어디요."
"왼쪽 손목에."
왼쪽 손목이면 귀어가 있던 자리다. 고개를 끄덕인 김석영이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끝의 흐름을 따라 문양을 읽어낸 남자가 말했다.
"그게 아이의 손에 적혀 있던 거라고."
"네."
"엉성하긴 해도 귀어가 맞네."
"무슨 의미예요."
"골상."
"골상?"
그래. 골상.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김석영이 그려냈던 문양을 상기하는 듯하더니 바닥에 대고 귀어를 그려본다.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나 보지? 부를 수가 없으니 생김새라도 설명한 거야."
계속하라는 듯 고요하게 시선을 보내는 것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진흙 같은 검은 머리에."
비늘이 돋아난 검은 혓바닥을 지니고 텅 빈 눈을 지닌,
"독을 품은 자."
"......."
말만 들어도 지독하네. 속으로 혀를 찬 김석영이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걸 적어낸 이유는요."
"부리고 싶었거나, 반대라면 그로부터 지켜내기 위함이지."
"귀어가 사라졌다면요."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겠지. 당연한 걸 묻고 그래?"
"왜겠어요. 확인차죠."
한숨과 함께 머리칼을 쓸어 넘긴 김석영이 숲에서 마주한 악귀를 떠올렸다. 망자들을 뜯어먹어 제 본연의 모습을 숨겼던 탓에 귀어에 적힌 외향을 확인할 순 없지만, 그것이 귀어가 가리키는 악귀라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제 모습을 바꿀 힘까지 지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이름으로 속박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인간이 알아내기란 쉽진 않지. 제 딴엔 나름대로 머리를 썼던 모양이지만 영 엉성해서 말이야. 기껏해야 일, 이 년 막아주는 것 정도가 다였을 거야. 하지만 아까 확인했을 땐 꽤 오랫동안 존재한 것처럼 보이던데, 분명 피를 대가로 그려낸 걸 테지."
"생명력을 대가로 주었다?"
"그래. 뻔하지."
게다가 대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건, 본격적으로 대처하려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물며 악귀 본연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외향을 파악할 수 있는 정도라면 분명 영안이 강하게 트여 있거나 오랜 괴롭힘을 받은 자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그래. 분명, 윤재하의 조부가 박수무당이라고 했었다. 그가 손자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희생한 것인가. 치매에 걸려도 정신이 돌아오는 때가 있으니.
"그런데 어쩌나. 조치가 힘을 잃어 모습을 드러낸 게로구나. 저 정도 영기라면 더럽히는 것도 보람찬 일이지. 몸을 빼앗고 싶어 안달이 났겠는데."
"다행히 윤재하의 영기가 거부하더군요. 하지만 억누르면서도 몸을 움직였던 걸로 봐선, ......확실히 보통은 아니겠죠."
"흠, 한번 빼앗긴 거로군. 그래도 그리 쉽게 몸을 허락할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여러모로 마음이 약해져 있던 상태였어요. 저승의 경계에까지 갔다 와서 기운도 평소보다 약해졌을 테고."
"저런."
남자가 과장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어찌 됐든 네가 그린 귀어는 지칭하는 대상이 정해진 언어였어. 맞춤형 부적이나 다름없었으니, 저게 없어진다고 해서 다른 삿된 것들이 우후죽순으로 붙거나 할 일도 아니라는 거지. 그럼 간단하잖아. 대상을 없애면 돼."
"그 전에 이번처럼 몸이라도 빼앗기면요."
김석영의 말에 잠시 멈칫한 남자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학, 하악, 학! 졸도라도 할 것 같은 음성에 눈살을 찌푸리자 남자가 갈무리하지 않은 호흡의 틈에서 목소리를 끌어냈다.
"과하게 싸고돈다 했더니만. 너 저 아해에게 마음이라도 준 거야?"
"대화의 흐름이 왜 이따윈지 모르겠네."
짜증스레 머리칼을 쓸어 넘긴 김석영이 대꾸하자 남자가 웃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걱정하고 있잖아!"
"그게 뭐 어때서요."
"이거 봐. '그게 뭐 어때서요?'라잖아!"
끅끅, 배를 부여잡고 대소를 감추지 않은 그가 돌연 호흡을 갈무리하고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낯가죽 너머의 진짜 눈을 짐작하며 시선을 맞추자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래의 너였다면 말이야."
"......."
"오히려 몸을 빼앗기길 기다렸을 거야. 그래야 한 번에 잡아버리지. 안 그래?"
남자의 말에 김석영은 무감한 얼굴로 응수했다. 낯을 들이밀며 요리조리 꿰뚫어 보려는 시선의 의도에 가볍게 혀를 찼다.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지만, 마음을 줬다고 표현하기엔 거창하네요."
"매사에 뚱하던 것이 새삼 타인에게 왜 신경이 쓰이실까."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 장르가 뭐예요."
태연하게 내뱉은 물음에 일순 남자가 멈칫했다.
"......뭘 물어."
"왜 답을 못하실까. 뭐 어때서 그래요. '범죄 스릴러'에서 '멜로드라마'로 노선 변경한 게 부끄러워요? 당신네도 사랑 정도는 하지 않나?"
"대장 김 서방은 안 그랬는데. 넌 참 버릇없어."
"그래요? 그럼 할아버지한테 가서 한마디 하세요. 너는 손자 농사에 실패했다. 그 실패의 원인은 아무래도 너의 무지한 교육에 있었던 것 같으니 저승에서도 반성하거라."
"불공불손하기까지."
어쩌겠냐는 듯 가볍게 어깨를 올리며 무해한 표정을 짓는 김석영이 퍽 가증스러웠는지 남자가 혀를 찼다.
"나로 인한 것일지도 모르니 신경 쓰이는 건 당연한 거겠죠. 그 악귀가 마치 나를 아는 것처럼 말했거든요. 정작 나는 초면이라 의문이지만. 어쨌든 접근을 막아버리는 방향을 원하는 건 아니에요. 나타나야 없애버릴 수 있을 테니까. 다만, 함부로 몸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킬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해요."
"너를 아는 악귀라니, 고거 흥미롭군. 그리고....... 흠, 몸을 지킬 수단이라."
생각에 잠긴 듯한 남자가 돌연 그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에게 붙은 악귀는 네가 처리할 생각인 거지? 그럼 차라리 악귀가 저 아이에게 닿는 순간, 네가 알아챌 수 있는 방향이 좋겠네."
"그 전에 보호막 먼저."
"흠, 그래. 그럼 다 겹의 결계막을 만들어놓는 게 좋겠구나. 악귀가 뚫어놓은 자리와 영기의 틈새에 말이야. 그 막에 악귀의 손길이 닿는 순간 네가 바로 감지할 수 있게 수단을 만드는 거야. 그렇다면 악귀 역시 막을 전부 깨트리기 전엔 몸을 쉽게 차지할 수 없을 테지. 보호막인 것과 동시에 감지막인 거지."
"그래요. 이제야 말이 통하네요."
육체에 보호막을 설치해놓으면 윤재하 역시 악귀로부터 몸을 지킬 시간을 벌게 된다. 막을 없애기 위해 악귀가 날뛸 것이 염려되긴 하지만, 그 전에 제가 끄집어내서 없애버리면 될 일이었다.
"좋아요. 적용할 방편은요."
"뭐겠어. 뻔하잖아. 내 특기는 무고(巫蠱)의 영역이야. 부적을 써야지. 알면서도 불렀잖아?"
"잘못된 부적은 도리어 액과 살을 끼게 하죠. 만에 하나 그 애한테 조금의 부정이라도 끼친다면 거래는 무효라는 걸 잊지 마세요. 안전하게 가자고요. 단순히 부적 쪼가리 말고, 보다 좋은 물건을 만들어봐요. 장신구 같은 것으로."
"쯧, 눈은 높아선."
혀를 찬 남자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머리 한번 잘 굴려서 방안을 강구해내라는 김석영의 압박에, 아랫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토해내던 남자가 돌연 묘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러는지. 대체로 저런 미소를 짓는 이들은 뒤끝이 좋지 않았기에. 김석영이 한숨을 삼키며 남자를 마주 보았다.
"그런데 저 애에게 직접적인 액과 살이 끼는 게 안 된다면, 너는 된단 말이냐?"
이럴 줄 알았다. 대놓고 미간을 찌푸린 김석영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말했다.
"왜. 저 아이보단 네가 낫잖아. 안 그래?"
"낫다고 해서 그래도 되는 건 아니죠. 나도 내 목숨은 소중해서."
"그런 놈이 왜......."
"됐고."
말을 끊어낸 김석영이 부산스러운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뜻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 아침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부지런하다고 해야 할지, 요령이 없다고 해야 할지. 헛웃음을 토해낸 그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한테 살 날릴 생각 말고 구체적인 방편이나 구상해봐요. 엄살도 그만 부리시고."
"건방지다, 건방져."
"하루 이틀인가. 일어나요. 밥이나 먹자고요."
"잠깐, 밥 말고 내 술을 내놔야지!"
남자가 버럭했다.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악을 쓰는 것에 김석영이 어깨를 추어올렸다.
"내가 대가를 떼먹을 놈으로 보인다면 좀 서운한데. 거래가 확실해야 하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아요. 대가는 방편을 찾아올 때 교환할 거니까 애먼 걱정하지 마시죠. 오늘은 맛보기 정도로만 확인하시고. 따라와요."
문을 열고 나오는 인기척에 칼질을 멈춘 윤재하가 황급히 주방을 가로질렀다.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김석영의 등 뒤로 인두겁을 뒤집어쓴 남자가 툴툴거리며 따라왔다.
"수저 하나 더 놔줄래."
"......네."
경계하는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던 윤재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와의 거래를 위해 미리 빼둔 술을 가지고 온 김석영이 윤재하의 옆에 섰다. 찬장에서 술잔을 꺼내 들며 몰래 속삭인다.
"몰래 침 뱉어도 모른 척해줄게."
"다 들린다. 망종아."
"이런. 들켰네."
피식 웃은 김석영이 윤재하를 지나쳐 식탁에 앉았다. 가볍게 병을 흔든 그가 남자에게 잔을 건넸다.
"히야, 빛깔 한번 곱구나! 그래. 이거지, 이거. 이게 어찌나 생각나던지!"
"이번 백화주는 할아버지도 유독 아끼셨어요. 제대로 묵히기도 전부터 즐기신 데다가 손자한테조차 한 잔 주는 걸 꺼리셨을 정도니. 초반에 미리 한 병 빼두길 잘했죠."
뚫린 귀를 막을 수도 없던 탓에 이야기를 듣던 윤재하가 김석영을 돌아봤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황당함에 김석영이 시원스레 웃음을 흘리자 남자가 혀를 찼다.
"망종도 이런 망종이 없지."
"그 망종 덕분에 한 병 얻어갈 수 있게 됐으니 좋은 거 아닌가. 온전하게 한 병 다 얻고 싶다면 준비 잘해봐요.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이러려고 맛보여준 거구나."
"상품성을 확인해준 것뿐이죠. 거래는 확실해야 하는 법이니까."
코웃음을 친 남자가 술을 홀짝였다. 찬거리를 내려놓으면서 덩달아 술의 향을 맡은 윤재하가 고운 빛을 띠는 술잔에 시선을 두었다. 김석영이 옆자리를 툭툭 쳤다.
"윤재하. 그 나이 먹도록 입에 술 한번 안 대본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니지만, ......몸에 잘 안 받아요."
"의외네. 영기가 알코올만은 정화해주지 않나 봐."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망종아. 영기도 아는 거지. 술은 삿된 것이 아니라는걸. 그런 김에 아해야. 너도 한 잔 받아봐. 많이는 안 되지만 한 모금 정도는 허락하지."
향이 좋긴 좋았는지 머뭇거리면서도 제게 쥐여주는 잔을 거부하진 않는다. 적당량을 따라주자 코끝에 직격으로 부딪히는 향에 눈을 홉뜬 윤재하가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나를 돌봐주시던 분이 직접 담근 백화주야. 꽃을 사용한 가향주라 향이 좋지. 마셔봐."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잔에 입을 댄 윤재하는 혀에 감기는 쌉쌀함에 눈매를 굳혔다. 다행히 목 넘김은 부드러웠다. 꽃을 사용했다는 설명처럼 입안엔 신맛과 더불어 은은한 꽃향기가 맴돌긴 했으나 술을 즐기지 않는 윤재하로선 약재 맛으로 느껴지는 쓰디쓴 술일 뿐이었다. 금세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김석영이 혀를 찼다.
"입에 안 맞나 보네."
"......써요."
"그래? 난 달다고 생각했는데."
"향긋하긴 하지만 단맛은 전혀......."
연신 물을 삼키며 혀끝에 맴도는 쓴맛을 없앤 윤재하가 몸을 일으켰다. 술 한 잔에 달아오른 걸로 보아 저대로 두었다간 그릇이라도 깰 것 같다. 어깨를 눌러 도로 자리에 앉힌 김석영이 대신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어."
"어, 아니요, 제가......."
"담기만 하면 되잖아. 괜히 그릇 깨지 말고 앉아 있어. 이 정도는 나도 해."
멋쩍게 입술을 달싹거린 윤재하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김석영의 등을 바라보았다. 주인을 바라보는 개 같은 모습에 묘한 웃음을 삼킨 남자가 술을 홀짝였다. 의식하지 못한 채 싸고도는 김석영도 그렇고, 그를 향한 아이의 유순한 태도도 그렇고. 이들은 꽤 안정적일 정도로 가까워 보였다. 씩 웃은 남자가 밥그릇을 건네는 김석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흰 도대체 무슨 사이지?"
"......."
또 시작이네. 덜컥 굳어버린 윤재하 대신 가볍게 웃음을 흘린 김석영이 대꾸했다.
"집주인과 가사도우미."
"오호."
남자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김석영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또 다른 말로는 영역을 침범한 죄인과 그에 대한 기억을 지울 사람."
"......음?"
"그리고 아는 형과 아는 동생 정도."
"......."
"답변 됐어요?"
멀뚱하게 눈을 깜박인 남자가 헛웃음을 토하며 말했다.
"......생각보다 뭐가 많은데?"
"적진 않죠."
수저를 든 김석영이 눈빛으로 식사를 종용하자 남자는 마지못해 술잔을 내리고 수저를 들었다. 간이 심심하긴 해도 꽤 먹을 만했다. 밥 생각이 없던 남자지만 반찬을 술안주 삼아 부지런히 해치웠다. 그에 반해 밥그릇을 반절 정도만 비워가던 김석영은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의뢰자, 아니 발신자예요?"
"맞아."
"아직 아침인데......."
"괜찮아. 원래 시간 안 가려."
지금 찾아온 손님이 얼마 전에 찾아온 발신자라면 수신자의 물건을 가지고 방문한 것일 테다. 그럼 김석영은 바로 저승에 가는 걸까. 마른침을 삼킨 윤재하가 몸을 일으키는 김석영의 손을 붙잡았다.
"혹시 바로 다녀올 거예요?"
"당연히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 널 그냥 두고 갈 순 없구나. 잠시 잊고 있었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윤재하를 안채에 두고 갔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결계의 강도를 높이더라도 그때의 그 악귀라면 결계 역시 완벽하게 안전하진 않다. 안채가 아닌 고택에 숨겨두는 게 나을까. 혹여나 삿된 부름에 홀리기라도 해서 윤재하가 제 발로 뛰쳐나간다면.......
역시, 만일을 대비해 곁에 붙어 지켜줄 자가 필요하다. 김석영의 시선이 자연스레 남자에게 꽂혔다. 단번에 인상을 굳힌 그가 펄쩍 뛰었다.
"왜 날 봐? 날 저 아해 옆에 붙여두려고?"
"그럼 지금 당장 몸을 지켜낼 방편을 줄래요? 대가도 바로 드릴 테니까."
"바랄 걸 바라야지, 망종아. 어디, 몸 지킬 방편이 뚝딱하면 나오는 줄 아는가 본데, 재료가 없으면 불가능해. 너랑 연결하려면 금줄도 새로 꼬아야 한다고. 그게 보통 시간이 드는 줄 알아? 쟤 혼자 두기 불안하면 그냥 데려가. 어차피 한 번 다녀왔다며. 저리 멀쩡한 걸 보면 두 번째도 괜찮을 거야."
"운이 좋았던 거죠. 살아 있는 육체가 저승을 가는데 괜찮을 리가."
"그럼 육체를 두고 가면 되지."
가벼운 대꾸에 김석영의 낯이 서늘해졌다. 그에게서 흐르는 기운에 위압감이 서렸다. 몸을 움찔한 윤재하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자 위압감은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무감한 낯 위로 흐르는 냉기는 가시지 않았다. 혀를 찬 남자가 한숨을 토하듯 말을 이었다.
"성격 급하긴.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냥 두고 가라는 말이 아니었어. 눈속임할 분신을 만들어 안채에 두고, 진짜 육체는 고택에 숨겨놓으라는 거지. 행여나 빈 육체에 악귀가 든다고 하면 차라리 잘된 것 아닌가? 가장 위험한 게 혼이 다치는 거지만 빈 육체라면 혼이 뒤섞일 염려 없이 바로 꺼내서 제령해버리면 될 것을. 게다가 악귀라면 저승이 아닌 이승에 머무르려고 할 터. 저승으로 가는 입구인 고택까지 침범할 리도 없지. 아니면 그냥 육체를 데리고 경계까지 가던가. 거기서 홀리든 여기서 홀리든 위험한 건 매한가지잖아."
"틀린 말은 아니네요."
날 선 기운을 갈무리하고 남자를 바라본 김석영이 물었다.
"분신의 정밀도는요."
"분신은 수만 번도 더 만들어봤어. 나는 한낱 종이 쪼가리를 쓰지 않는단다. 제웅과 혼쥐를 쓸 거야. 이 둘의 궁합이 꽤 좋거든. 여분의 제웅과 혼쥐의 환은 늘 들고 다니니 지금 당장도 만들 수 있지."
재촉하듯 염주의 진동이 강해졌다. 혀를 찬 김석영이 남자를 향해 열쇠를 건넸다.
"창고 열쇠에요. 술은 알아서 꺼내 가요. 고택에 다녀오는 사이에 분신 만들어놓을 수 있겠죠."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어찌 보면 너희를 연결시키는 것보다 이 방법이 더 나을 수도 있어."
"그건 차차 비교해보면 알겠죠. 윤재하."
"네."
다갈색의 눈동자는 줄곧 김석영을 향해 있었기에 시선은 바로 부딪혔다. 가볍게 웃은 김석영이 붙들린 손을 거두며 당부했다.
"내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저자가 하라는 대로 해. 다 들었을 테니 왜 그러는진 너도 알겠지."
"......경계에 저도 데려갈 거예요?"
"맹하게 굴지 마. 여태껏 뭐 들었어?"
"......죄송해요."
머쓱하게 웃은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에게 눈인사를 건넨 김석영이 고택으로 향했다. 단둘만 남게 되자 인두겁을 뒤집어쓴 남자가 히죽 웃었다.
"너희 정말 무슨 사이야?"
"......집주인과 가사도우미. 또 다른 말로는 영역을 침범한 죄인과 그에 대한 기억을 지울 사람. 그리고 아는 형과 아는 동생. 답변 됐을 텐데요."
"재미없게 굴긴."
불퉁하게 투덜거린 남자가 손을 튕겼다.
그 순간, 찢어진 허공의 틈에서 툭 떨어진 작은 궤를 잡아챈 그가 다시 한번 손을 튕겼다. 불쑥 손을 잡아끄는 무언의 힘에 놀라기도 잠시, 낯을 굳힌 윤재하가 힘을 주어 버텼다. 제멋대로 힘을 놀리는 것에 불쾌감이 든 것이다.
'요놈 봐라?'
순한 괭이처럼 굴 땐 언제고 김석영이 사라지기 무섭게 날을 세운다. 재밌네, 이거. 히죽 웃은 남자가 좀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상체가 반쯤 딸려오던 윤재하는 이를 악물고 버텨내기 시작했다. 영기 또한 강하게 일렁이는 걸 보니 경계를 풀 생각은 없어 보였다. 도깨비의 힘을 버티다니. 본래의 의도를 잊어버리고 순간의 승부욕에 잠식된 남자가 억눌러둔 기운을 풀어냈다.
"윽......."
온몸을 타고 오르는 듯한 괴기한 공포는 아침에 느꼈던 그 기운이다.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숨통을 조였다. 입술을 짓이기며 흐트러진 호흡을 갈무리한 윤재하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위압감과 공포는 여전하지만 아침과 같이 무력하게 잠식당할 생각은 없었다. 버티면 버틸수록 견디는 것 역시 안정을 찾아가니까.
"잘 버티네?"
"......버틸 만하니까."
"그래?"
그럼 못 버티게 눌러줘야겠지.
남자가 부정의 기운을 더욱 풀어내자 윤재하의 낯이 일그러졌다. 타들어가려는 기운과 맞서는 영기가 강하게 부딪히며 일렁였다. 굴복시키고 압살하려는 기운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날 선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던 윤재하가 문득 시야에 걸린 것에 마른침을 삼켰다.
"뭐야, 좀 더 버텨봐. 이게 다야?"
살갗에 돋아난 핏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점점 밀리고 있는 윤재하의 모습에 히죽이며 웃은 남자가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려던 찰나였다.
퍼억―! 식탁 아래를 무릎으로 걷어찬 윤재하로 인해 잔잔하던 상차림이 들썩였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른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시선이 제 앞에 있던 술로 향했다.
"안돼. 내 술!"
술을 빚은 노인이 이승을 떠나버린 지금. 비록 맛보기라 할지라도 줄어드는 술 한 방울이 소중했다. 다급함에 머리가 굳어버린 남자는 주술을 쓸 생각도 못한 채 손을 뻗었다. 탁! 아직 두 세 모금은 거뜬하게 남은 술병과 술잔이 추락하는 걸 간신히 막아낸 남자가 놀란 가슴을 다스렸다. 아슬아슬하게 넘실거리는 술잔의 술을 단번에 들이켠 그는 입안을 맴도는 향에 노곤한 숨을 삼켰다.
크흐, 그래, 이 맛이지. 언제 경악했냐는 듯 히죽 웃은 남자가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러자 그의 시야엔 어느새 평연한 얼굴로 궤를 살피고 있는 윤재하가 있었다.
"......아."
언제 저걸......,
"이게 분신을 만드는 건가. 열어도 돼요?"
"비겁하게 다리를 쓰다니. 하마터면 귀한 술 버릴 뻔했잖아!"
"안 버렸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대수롭잖게 대꾸하는 투가 낯설지 않다. 순둥이인 줄 알았더니만 하는 짓이 묘하게 김석영과 닮아 있다. 금세 투지를 잃고 혀를 찬 남자가 손을 튕겼다. 하지만 주인에게로 날아가려는 궤를 힘으로 붙든 윤재하가 말했다.
"멋대로 휘두르려고 하지 마세요."
"허, 내가 언제 휘두르려고 했다 그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남의 손 끌어가려는 우악스러움을 요즘 말로 휘두른다고 표현하죠."
"......."
......요즘 것들이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찬 남자가 힘을 풀고 순순히 손을 건넸다. 대거리할 기색이 없단 걸 확인한 윤재하가 남자의 손바닥 위에 궤를 올려주었다. 불퉁하게 콧방귀를 뀐 남자가 비꼬는 듯한 말투로 윤재하를 불렀다.
"손을 보여주시지요. 아해 나리."
"손은 왜요."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그자가 말했던 거 잊었나?"
"......."
퍽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말간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손을 요리조리 살핀 남자가 가볍게 말했다.
"좀 짧긴 해도 이 정도면 뭐. 자, 그럼 확인했으니 손을 거두시고 손톱이나 잘라주시지요, 아해 나리. 분신을 만들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 잔말 말고."
"......."
좀 전의 일로 기분깨나 상했던 모양이다. 말투가 연신 이기죽이기죽 빈정거렸다. 사람도 아닌 것이 퍽 유치하게 군다. 한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킨 윤재하가 손톱깎이를 찾아 제 손톱을 잘라냈다. 초승달 모양의 짧은 손톱을 휴지에 감싸 건네자 남자가 궤를 열었다. 새하얗고 동그란 유리 환약과 짚으로 만든 저주 인형 같은 것이 보였는데 그 모양이 쥐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짚으로 된 쥐를 든 남자가 그것을 눈앞에 들이밀더니 위아래로 꾸벅 흔들었다.
"네 분신이 되어 액운을 막아줄 놈이니 인사라도 해."
"......."
대꾸 없이 서늘하게 바라보자 킬킬 웃음을 터뜨린 그는 배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을 벌려 윤재하의 손톱을 집어넣었다. 짚의 틈을 여며 잘 막아두자 '토독, 토도독'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쥐가 손톱을 파먹는 것만 같았다.
"입맛에 잘 맞나보군. 맛있게도 먹네."
남자가 자식 먹는 모습에 배가 부른 부모처럼 흐뭇하게 말했다. 꺼림칙한 기분에 낯을 굳히면서도 짚으로 만든 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윤재하가 불쑥 눈을 크게 떴다. 어린아이의 주먹만 하던 것이 점차 몸집을 부풀리더니 형태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긴 다리와 상체를 거쳐 두 팔이 뻗어나가고 모가지와 얼굴이 생겨났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윤재하였다.
"잘 만들어졌네. 이 정도면 망종이도 못 알아보겠는걸?"
"......."
분신을 마주하는 것은 거울을 보는 것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뭐랄까, 좀 더 불쾌감에 가까웠다. 제 모습을 한 채로 멀뚱하게 눈을 깜박이던 분신이 불쑥 미간을 굳혔다. 윤재하를 따라 하는 거였다.
"......."
"......."
입술을 잘근거리자 똑같이 입술을 잘근거린다.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자 똑같이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이 일었다. 한숨을 내쉬고 머리칼을 쓸어 올리니 저 역시 똑같이 따라 한다.
"이거 언제까지 따라 하는 거예요."
"이거 언제까지 따라 하는 거예요."
"......."
"......."
"기분 나쁘니까 입 좀 다물게 해줘요."
"기분 나쁘니까 입 좀 다물게 해줘요."
"입 닥쳐."
"입 닥쳐."
윤재하가 윤재하를 노려보았다. 크흡, 웃음을 터뜨린 남자가 실실거리며 둘의 대거리를 구경했다. 성난 시선이 둘이나 꽂히자 남자가 숨넘어가게 대소했다. 그 순간, 고택의 기운이 사그라들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단정한 듯하면서도 느릿하게 발끝을 끄는듯한 걸음걸이의 주인은 안 봐도 뻔했다.
아, 김석영이다.
반가움과 안도, 그리고 언뜻 그리움과도 같은 감정이 뒤섞인 채로 낯을 갠 윤재하가 달려 나갔다. 때마침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가려던 그가 제 앞에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오셨...!"
"오셨...!"
"......."
"아, 진짜......."
"아, 진짜......."
윤재하가 윤재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묘한 얼굴로 두 명의 윤재하를 번갈아 훑은 김석영이 대청에 올라섰다. 주방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남자가 실실 웃으면서 그를 반겼다.
"어때, 망종아. 기가 막히지?"
"재밌네요."
"재미없어요."
"재미없어요."
동시에 터진 말에 김석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진짜인데.'
제게 곧장 시선이 오지 않고 가짜를 바라보는 김석영의 행동에 마음이 초조해진 윤재하가 손을 뻗었다. 그의 옷소매를 쥐며 흔들려는데, 어느샌가 똑같이 손을 뻗은 가짜의 피부가 느껴졌다. 짜증이 치밀었다.
"손 떼."
"손 떼."
"음, 그래. 내가 떼는 게 낫겠다. 싸우지 마."
피식 웃은 김석영이 붙잡힌 손을 떼어내기 위해 팔을 들자 윤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잘근 짓씹으며 분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형형하다. 그 모습이 마치 얼마 전에 보았던 드라마 속의 한 장면과도 흡사해 남자는 폭소를 터뜨렸다. 하필이면 드라마 속의 이야기도 쌍둥이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라서 더더욱. 진짜 재밌네, 이거. 연신 실실거리며 상황을 구경하던 남자가 제안했다.
"누가 진짜인지 맞혀보지 그래?"
"너무 쉬운데."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윤재하의 낯이 화색을 띠었다. 그래, 김석영이라면 짚으로 만든 가짜 따위와 진짜 자신을 혼동할 리 없다. 남자에게 향하던 고개를 돌린 그가 윤재하에게 시선을 보냈다. 안도감에 살짝 웃으며 제게 다가올 손길을 기다리던 윤재하는 그를 스쳐 가는 김석영의 체향에 얼굴을 굳혔다.
"얘잖아."
"푸흡."
진짜를 지나쳐 간 김석영이 가짜의 어깨를 만지며 말했다. 계속 거슬리기만 하던 남자의 박장대소가 이번만큼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윤재하는 이유 모를 아릿함과 허탈함에 젖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굳어버린 낯으로 저를 스쳐 간 김석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가짜를 향하고 있었고 윤재하는 울컥 치미는 것을 삼키며 입술을 짓이겼다. 그때였다.
"가짜 말이야. 윤재하."
가볍게 말한 김석영이 제 앞에 서 있는 윤재하의 이마를 툭 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굳건하던 형태가 바스러지고 지푸라기 쥐로 돌아갔다. 이내 꼬리가 파르르 타들어가며 그 형태조차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윤재하가 느릿하게 두 눈을 끔벅이는데, 저 뒤에서 경악 어린 고성이 터져 나왔다.
"야! 이 미친, 저 망할 잡놈을 봤나. 너 저게 얼마짜린 줄 알아?"
"멍청하게 따라 하기만 하는 걸 보니 실패작이던데 뭘. 다시 만들어요. 거울 같은 거 말고, 좀 더 상황 파악을 할 수 있는 똑똑한 놈으로."
대수롭잖게 대꾸한 김석영이 윤재하에게 다가갔다. 오묘한 표정을 마주한 그가 허탈한 웃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너한테는 무슨, 장난도 못 치겠다."
"......."
"표정 풀어."
표정을 풀라는 말이 억지로 웃으라는 것도 아니었건만 윤재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잔뜩 경직된 얼굴로 입꼬리만 올려봤자 웃는 얼굴이 되는 것도 아닌데.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자 꿈틀거리던 입매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게 더 낫네."
결국 일자로 굳게 닫힌 입술을 보며 한마디를 던지니 속도 모를 얼굴로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김석영은 눈에 불을 켜고 쏘아보는 남자를 달래듯이 말을 건넸다.
"화났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백화주 한 병 더 있어요."
"......뭐라고?"
이 망종이 방금 뭐라고 했지? 기가 막힌 탓에 떡 벌어진 입 동굴을 바라본 김석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뻔뻔한 대꾸가 뒤를 이었다.
"사실 두 병 훔쳤거든요. 그 두 병 다 드리죠. 분신 새로 만들어요."
"......저 천하의 몹쓸......."
"뭐해, 윤재하. 손톱 깎아. 없으면 발톱이라도 깎고."
태연자약하게 주방으로 들어선 김석영이 열려 있던 궤에 시선을 던졌다. 새하얀 환을 향해 손을 뻗으니 남자가 다급하게 궤를 채어가 숨겼다. 가늘어진 눈이 마치 보물을 탐하는 도둑놈을 마주한 모양새다. 가볍게 손을 털어내며 자리에 앉자 윤재하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손톱은?"
"준비했어요."
휴지로 감싼 것을 들어 올린 윤재하가 남자에게 건넸다. 그 고분고분한 모양새에 대놓고 쯧, 혀를 찬 남자가 또다시 공간의 틈을 벌렸다. 대충 손을 휘적이자 허공에서 궤가 툭 떨어졌다. 그것을 받아든 남자는 들쥐 모양의 제웅에 손톱을 집어넣어 틈을 여미고, 손끝으로 수식을 그려 넣었다. 김석영의 요구에 맞춰 적당한 이지를 새겨넣은 것이었다.
토독, 토도독.
손톱을 갉아 먹는 소리가 이어지고 점차 몸을 부풀린 제웅이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갔다. 완성된 모습은 역시나 윤재하였다. 제 모습을 한 거짓 인형에게 불쾌함이 스민 윤재하가 낯을 굳히고 그것을 응시했다. 하지만 이번엔 남자의 주술이 첨가된 탓일까. 새로운 분신은 이전처럼 무작정 행동을 따라 하지 않고 가만히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윤재하."
턱을 괸 채 분신의 낯을 살피던 김석영이 이름을 불렀다. 저를 부른다는 걸 알아챈 분신이 시선을 보내며 대답했다.
"네."
"집 잘 지키고 있어야 해. 할 수 있겠어?"
"네. 걱정 마세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꼭 진짜 살아 있는 사람 같다. 이건 이거대로 묘하게 기분이 이상해서 윤재하가 한숨을 삼켜냈다.
분신을 만들었으니 본격적으로 저승에 가기 위해 나머지 절차를 이어가야 했다. 윤재하의 인두겁을 쓴 분신에게 주의를 당부하고 안채를 벗어난 그들은 곧장 고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디 불편해?"
김석영의 직구에 뜨끔한 윤재하가 숨을 삼켰다. 자연스럽게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귀신같은 눈치를 소유한 김석영에겐 어림도 없었나 보다.
"아니요. ......왜요?"
"걷는 게 영 이상한데."
"평소랑 똑같은데......."
애써 태연한 낯으로 덧붙이자 김석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속이 바짝 말라와 마른침을 삼키던 사이, 방관하며 코웃음을 치던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자, 이게 혼쥐의 환이야. 입에 물고 있으면 혼쥐의 기운을 타고 영혼이 분리되지."
"다시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요."
"간단해. 진짜 육체의 입에 든 환으로 들어가면 돼. 육신이 알아서 이끌 테니 긴장 말고 몸을 맡겨.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후에는 환을 없애고."
"그렇대. 알아들었어?"
"네."
고개를 끄덕인 윤재하가 새하얀 유리 환약을 건네받았다. 김석영과 눈을 맞추고 입안에 환을 넣자 점막 안에서 바람이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어떠한 형태를 지닌 듯한 바람이 몸속 깊은 곳에 파고들자 미약한 구토감이 일었다. 속을 잡아끄는 듯한 이끌림에 몸을 맡기자 스르륵 눈이 감겼다.
힘없이 무너지는 윤재하의 몸을 붙든 김석영은 코의 호흡에서 새어나오는 하얀 연기를 바라보았다. 공중에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형태를 이룬 그것은 곧 윤재하의 모습이 되었다.
'아.......'
혼이 분리된 윤재하가 김석영에게 안긴 제 몸을 바라보았다. 그건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윤재하."
「아, 네.」
"어때. 어딘가 이상하다거나."
「전부 이상해서 뭐 하나 이상하다고 꼬집기가.......」
"하긴, 그것도 그렇겠네."
가볍게 웃은 김석영이 윤재하의 몸을 추슬렀다. 제 몸에 상체를 기대게 하고 등을 받쳐 든 그가 나머지 한쪽 팔로 허벅지를 감싸 들어 올렸다. 널브러진 채로 안아 들어진 것에 경악한 윤재하가 황급히 다가갔다.
「제, 제가 할......!」
"저리 가. 자칫 몸에 스며들지도 모르니까."
가볍게 대꾸하며 윤재하를 물린 김석영이 육체를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의 손길이 스쳐 가는 부위를 하나하나 바라본 윤재하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듯한 기분에 연신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그냥....... 그냥 바닥에 둬도 되는데.......」
"뭐 하러 그래. 의자에 앉히면 되는데."
흐트러진 고개를 조심스럽게 조절해주는 손길에 귓가가 달아올랐다. 감촉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건만 그의 손에 맡겨지는 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 방관자처럼 상황을 주시하던 남자가 육체의 양쪽 뺨을 눌렀다. 자연스레 벌어진 입속에서 환을 확인하는데, 김석영과는 달리 불쾌감만 느껴져 윤재하는 저도 모르게 오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표정이 왜 그래. 어디 불편하기라도 해?"
「......아니, 아니에요. 그냥, 내 모습을 보는 게 어색해서요.」
"그래? 아, 그보다 우린 이제 가야 하는데 계속 있을 겁니까?"
"설마. 할 일 끝났으니 이제 가야지. 나도 바쁜 몸이거든."
"그래요. 그럼 방편 준비하는 대로 연락하세요."
그러지. 가볍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윤재하에게 손을 팔랑거렸다. 무릎을 흘끔거리는 시선에서 비웃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보자. 아해 나리."
「......네.」
아해 나리? 의아하게 돌아보는 김석영에게 씩 웃어 보인 남자가 인두겁의 형태를 벗고 고택을 빠져나갔다.
"왜 저렇게 불러?"
「......모르겠어요. 이상해요.」
"하긴. 도깨비의 생각을 누가 알겠냐만."
「도깨비요?」
"아,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해줬구나. 저자는 인계에 숨어 사는 도깨비야. 먼 조상 때부터 인연을 이어왔다고 하던데, 나로선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는 존재지."
「아, 도깨비.......」
종종 영가 이외에 낯선 기운들을 느낄 때가 있다. 이번 역시 일반적인 영가의 기운이 아니더라니, 그 존재가 도깨비였던 거다. 인계에 숨어 지내는 거라면 윤재하가 이따금 느끼던 기운 역시 도깨비나 그 이외의 존재들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인간으로 위장하며 숨어 살기 때문에 언뜻 보면 진짜 인간과 구분하기 쉽지 않은데, 저자의 이목구비가 엉망이었던 건 널 놀려주기 위해서야. 장난이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할 짓도 없나 봐요.」
"저들의 특성이지. 참고로 저자는 무고(巫蠱)로부터 생겨난 도깨비라 자칫 밉보이면 부정 탈 수도 있어.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것 같긴 한데, 멀쩡한 걸 보니 다행이네."
「.......」
잔뜩 경계하면서 날을 세웠던 기억을 되살린 윤재하가 멋쩍은 숨을 삼켰다. 사실을 알 리 없는 김석영은 수신자의 물건으로 보이는 은시계를 손에 쥐고 말을 이었다.
"저주나 다름없으니 생명력이 강한 네 영기와도 극악의 상성이라고 볼 수 있지. 네가 겁을 먹었던 것도 그래서일 거야. 그런 것치곤 잘 버티긴 했지만. 앞으로 저런 걸 만난다면 그냥 모른 척 피하도록 해."
「......네. 그렇게 할게요.」
"대답 잘해서 좋네. 이제 가자."
가볍게 웃은 김석영이 손을 내밀었다. 육체와 분리된 상태인데 잡을 수 있을까.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자, 염려가 무색하게도 강하게 붙들어준다. 나머지 손에 쥔 수신자의 물건을 바라보던 김석영이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지난번과 같이 공간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듯하지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이전과 같은 두려움은 없었다.
붕괴된 공간의 틈 사이로 기억이 흘러들었다. 어느새 그들은 고택의 내부가 아닌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수신자의 물건이 보여준 기억 속의 세상을 마주하게 된 윤재하는 낯설지 않은 감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뭐 해? 가자."
「아, 네.」
이끄는 힘에 기대어 걸음을 옮겼다. 소담한 분위기의 가게와 어딘가 예스러운 간판의 그림들. 사람들의 옷차림과 분위기가 현재의 시점은 아니었다.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 풍경은 윤재하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이곳은 그가 아주 어릴 때 살던 동네였기 때문이다. 이번 발신자는 그와 같은 동네에 살던 사람이었나보다.
발신자를 주시하는 김석영과는 달리 윤재하는 기억의 세상이 보여주는 풍경만을 눈에 담았다. 그때의 사람들, 그때의 골목, 그때의 대화.
그때에 속하던 윤재하는 갓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이였을 것이다. 유치원도 가지 못한 아이는 늘 모친이 일하던 가게의 구석에 앉아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고, 집안 혹은 좁은 골목만이 제 세상이었다. 그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좀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 걱정된 모친은 미리 조부의 친우들을 수소문해 염주를 구해 왔다.
또래보다 작았던 윤재하의 손목에 염주를 채워주면서, 어린아이가 짊어져야 하는 세상의 이면을 가려주고팠을 그 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윤재하 역시 그런 아이들을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지난 제 세상을 떠올린 그는 저 같은 아이들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는 연약하니까. 제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쑥쑥 자라나는 마음과는 달리 성장 속도가 더딘 몸뚱이에 갇혀 얼마나 많은 한계에 부딪혀야 했던가. 어른이 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그때의 그 어린아이가 바라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린 몸뚱이에 갇혀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정작 자라고 보니 마음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걸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아서 꼭꼭 숨겨두었건만, 왜인지 김석영에게는 자꾸만 들켜버린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자꾸만 직면하게 되어서 괴로운데,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 않는 아이러니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쓰디쓴 약이라는 걸 깨달아서인가. ......결국 나아지게 만든다는 걸 알아서인가.
분명 김석영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형체에 대한 생각을 바꾸려는 노력조차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심 그가 편히 쉴 수 있게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비겁하게 회피하기만 했을 것이다. 형체가 제 곁에 머무는 거라고 여기며 외면했으나 사실은 제가 그를 붙들고 있었다는 것 역시.
생각이 이어지던 순간, 나풀거리던 김석영의 검은 머리칼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덩달아 걸음을 세운 윤재하는 길잡이의 눈길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곳엔 아주 어렸던 윤재하가 있었다.
「.......」
윤재하는 호흡마저 멈추고 어린 저 자신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식당 앞의 평상에 앉아 발을 동동 휘젓고 있는 어린아이는 자르지 않은 김밥을 야금야금 베어 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오물거리는 입가엔 밥풀과 김이 묻어 있는데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윤재하."
지금의 윤재하를 부른 게 아니었다.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읊조린 김석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맞춘 윤재하가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제 어린 날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타인의 기억 속 한 장면에 속해 있던, 순간의 제 모습을.
「아.......」
발을 동동 굴리던 아이의 앞에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활짝 웃은 아이가 뒤를 돌자 짓궂은 웃음을 매단 모친이 손을 뻗었다. 입가에 묻은 흔적을 살살 떼어내며 여린 볼에 입을 맞춰주는 행동엔 애정이 가득했다.
「그만 가요.」
김석영의 시선이 닿았다.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윤재하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일하셔야죠.」
"......그래."
옅은 웃음을 입가에 매단 김석영이 걸음을 뗐다. 그를 따라 걸으며 잠시 고개를 돌린 윤재하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나마 영원히 함께 머무는 두 사람을 눈에 담았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으니 더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지나간 추억은 돌이킬 수 없고, 이제는 현재를 살아가야 하므로.
형체에 대한 그리움에 가슴이 욱신거리지만, 이상하게도 머리는 차가워져만 갔다. 몸을 지켜낼 수단을 찾고 나면 반드시 형체를 찾을 거라고 다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후엔 서로 인사를 하며 놓아줄 수 있기를, 꼭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기대는 믿음으로 이어지고, 믿음은 불안정하던 마음을 점차 가라앉혀주었다.
순식간에 장소가 변했다. 상황 역시 변했다.
의무를 짊어지고 있는 김석영과는 달리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제가 타인의 기억을 엿보아도 되는 건지. 내심 마음이 불편했던 윤재하였으나 이번이 두 번째라서일까. 이전처럼 허둥대며 앞만 보기보다는 제 마음을 가다듬고 주어진 상황을 직면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사람의 인생 한 부분을 감히 두 눈에 담으며 그가 바라는 염원이 잘 전달되기만을 기도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석영이 제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였던 건 늘 이런 세상을 오가는 영향일지도 모르겠다고.
"다 왔어."
푸른 초원의 경계를 지나 자갈밭이 보이면 낮과 밤이 뒤섞인 빛깔을 반사한 삼도천이 시작된다. 그 광활한 수평선 너머로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커다란 나무가 어슴푸레하게나마 모습을 드리웠다. 육신을 두고 혼의 형태로 경계에 다다르자 이전엔 미처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비늘 아래엔 반딧불 같은 것들이 동동 띄워져 있었는데, 윤재하는 그것이 삼도천을 건너지 못한 혼령의 흔적이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윤재하."
「네.」
"명이 끊기지 않았음에도 혼의 형태로 이곳에 왔으니 더 조심해야 해. 차사의 눈에 띄면 골치 아파져. 대거리하기 싫은 족속들이거든."
「......차사.」
그들이 망자의 넋을 이끌고 저승으로 인도하는 심부름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명부에 적히지도 않았는데 혼령의 모습으로 발견된다면....... 그의 말마따나 골치 아파질 게 분명하다.
"사실 이곳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틈새가 존재하는 구역이기도 해. 그 틈으로 망자 이외의 존재들이 흘러들어오곤 하지. 그러다 이승에 가기도 하고. 워낙 많은 존재가 헤매는 지점이라 쉽사리 눈에 띄진 않겠지만, 글쎄. 너는 좀 눈에 띄게 생겨서 걱정이긴 하네."
지난번은 정말 천운이었을지도 모른다며 김석영이 덧붙였다.
「신기해서인지 말을 거는 존재들이 있긴 했는데, 그렇다고 함부로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어요. 아, 근데 돌을 막 던졌다.......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시선이라도 끌고 싶었나 본데, 난데없이 돌 맞은 윤재하는 퍽 억울했겠네. 잘 참았어."
「억울......까지는 아니고요. 별로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 그리고 전령 나리랑 왔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전령 나리라는 게 혹시, ......형이에요?」
어릴 때는 잘만 불렀는데. 막상 입에 대려니 어색한 호칭을 겨우 뱉어내며 말하자 김석영이 빤히 바라보았다. 괜스레 민망해져 시선을 내리깔았다. 가볍게 웃음을 흘린 그가 윤재하의 발끝을 툭 부딪치며 말했다.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그런 거 아니에요.」
"그쪽, 집주인님, 사장님보단 훨씬 낫네."
「......왜 전령 나리라고 부르는 거예요?」
괜스레 화제를 돌렸다. 선선히 넘어가 준 김석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겠어. 이승의 문서나 이야기를 저승에 전달하니 그렇겠지. 아주 예전엔 저승의 것도 전달했다고 듣긴 했는데, 여러모로 세상의 규율을 해치는 일이라 이승에 한정됐다고 했지 아마.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군요.」
"어찌 됐건 이곳에 남겨진 존재들은 날 안 좋아할 거야. 귀찮게 하면 혼을 내줬거든. 그러니 네가 내 일행이라는 걸 알면 함부로 건들지 않....... 아니, 오히려 너를 통해 복수하려나. 돌까지 맞았다며. 그래도 이후엔 괜찮았던 거지?"
「네. 괜찮았어요. 가까이 오려다가도 결국엔 다 도망갔거든요.」
"체취를 통해 기운을 묻힌 게 썩 나쁘진 않았나 보네."
「.......」
아, 애써 잊고 있던 것이 다시 생각나고 말았다. 혼의 형태라 입술이 마를 리도 없는데....... 괜히 목이 타는 듯한 기분에 잠긴 윤재하는 헛기침을 삼켰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입맞춤하게 되는 걸까 생각하니 자꾸만 눈앞의 남자를 의식하게 됐다. 시선과 호흡, 그리고 무의식의 움직임까지 말이다.
"윤재하."
「......네.」
"불쾌했어?"
다갈색의 눈이 커졌다. 황망해진 낯이 떨림을 묻힌 채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한 그가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물었다.
"입맞춤. 불쾌했어?"
당혹스러움에 휩싸인 윤재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불쾌했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향해 물으니 의외로 대답은 쉽게 돌아왔다.
'아니. 불쾌하지는 않았어. 다만.......'
「......아니요.」
그냥, 조금 부끄럽고 숨이 가빠오고 심장이 울렁거렸던 것 같기는 하다.
「불쾌하지 않았어요.」
잔떨림이 묻어나는 대답에 묘한 웃음을 매단 김석영이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육체를 달고 온 것도 아닌데 눈가와 귓불이 붉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이는 건 제 착각일까. 순진한 사람을 꼬여낸 몹쓸 무뢰한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무뢰한의 역할이 거북하고 죄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처음엔 분명 안전을 위한 조치인데도 낯을 붉히는 윤재하의 서툰 행동이 자꾸만 신경을 잡아끌었다. 당황하는 반응이 재밌어서 굳이 그것을 들먹이며 놀려보기도 했는데, 또다시 그런 순간을 안겨줘야 하는 상황이 되고 나서야 윤재하의 처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직접적으로 체취와 기운을 묻히는 데엔 입맞춤이 적합한 건 사실이지만 당사자가 거북해한다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그의 옷을 입혀주는 거였다. 체취와 손길이 묻은 옷을 입는다면 그에게 속한 자라는 증표가 될 수 있으니.
처음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두 번째까지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의사를 물어본 건데.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묘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어린애를 데리고, 나도 참.......'
어차피 무뢰한을 자처한 데다가 기억을 지우면 사라질 순간이니 김석영은 다시 한번 말간 낯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육체를 만질 때와는 달리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윤재하를 이루는 형태는 손안에 가득 담겼다. 잔뜩 긴장한 듯 얼어붙은 귓불과 뒷덜미를 어루만지고 가까이 끌어왔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서 시작하여 다갈색의 홍채로 시선을 옮기니 제 서늘한 인상이 비쳤다. 스르륵 눈이 감기고 경직된 미간에 줄이 생기자, 살짝 웃음을 흘린 김석영이 엄지로 미간을 문질렀다. 갑작스러운 감촉에 움찔한 윤재하가 눈을 뜨려던 찰나, 건조한 입술이 포개졌다. 깊게 맞물린 점막 너머로부터 김석영의 숨결이 넘어온다. 그에게선 은은한 향내가 났다.
조부의 영향으로 모친은 이따금 집안 가득 향을 피우곤 했었다. 그땐 고약하게만 느껴졌던 그 향내가 왜 이 남자를 통해선 좋게만 느껴지는 걸까. 서늘하기만 하던 체온이 미지근해지는 것 역시 왜 이렇게 안도감이 드는 건지.
김석영의 체온과 기운이 숨결을 통해 온몸에 스며들었다. 점막을 가볍게 헤집은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일렁이던 호흡을 토해낸 윤재하가 눈을 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응시하던 김석영이 손아귀에 붙들린 목덜미를 꾹 눌러주곤 손을 내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움찔 몸을 떤 윤재하는 묘한 아쉬움을 억누르고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 입술을 매만지던 김석영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전처럼 빨리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너 혼자 이곳에서 네 몸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야."
「......네.」
"이곳에서 널 부를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잊지 마. 그런데 오늘 나는 널 부르지 않을 거야. 지난번에 신호를 정했던 거 기억해?"
그와 나의. 둘 사이의 접점. 나비.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해요.」
"무언가 네 이름을 불러도 절대 대답하지 마. 내 목소리를 흉내 내도 흔들리지 마. 위험할 것 같으면 도망은 가도 돼.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는 건 안 돼. 네게 내 기운을 묻혀놓았다고 해도, 이곳은 변수가 많으니 찾는 데에 한계가 있어.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내려는 모습에 윤재하가 설핏 웃었다.
"왜 웃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대하는 태도라서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물 앞에 있기도 하니.
"그래. 물가에 가까이 가는 것도 조심해. 홀릴 수도 있으니까."
「......진짜 애 취급이에요?」
웃음기가 어린 한숨을 토해낸 윤재하가 눈앞의 남자를 마주 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말해봐."
「말도 없이 저질렀다가 혼나긴 싫어서요.」
"음, 뭔가를 저지르겠다는 소리네."
「솔직히 말하면....... 네. 그러고 싶어요. 그래도 더 이상 저 때문에 형이 곤란한 건 싫으니까, 적어도 이야기는 하고 싶어서요. 들어줄 수 있을까요?」
덤덤하게 말하려 하지만 절박함이 묻어났다. 한동안 물끄러미 윤재하를 바라보던 김석영이 옅은 한숨을 토해냈다.
"미리 허락이라도 받으려는 거야?"
「......형이 정말 안 된다고 말한다면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그러니 일단 들어는 봐달라."
「네. ......솔직히 그래줬으면 좋겠어요.」
무모하게 행동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았겠지. 하지만 줄곧 움츠려 있던 윤재하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분명 제 안의 생각을 정립해놓은 결과일 터였다. 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다. 적어도 무얼 할지 알아두면 혹시 모를 상황이 닥쳐와도 수습할 여지가 생길 테니.
"그래. 말해봐."
옅은 한숨을 삼켜낸 윤재하가 말을 이었다.
「지난번 이곳에서, 제 옆에 있던 아이를 봤어요?」
"봤어. 이곳에 맴도는 혼이지."
아이는 노잣돈을 보따리째 달고 나타난 혼이었다.
저승 삯이 충분하고도 남으니 삼도천을 건너는 건 무리도 아닐 텐데, 아이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경계에 남았다. 그렇게 아이는 이곳에 남아 새롭게 들어서는 망자들을 구경하면서 제 노잣돈과 망자들의 물건을 교환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곳은 시간이 어그러진 곳이다. 오랜 세월을 방황하는 영가들과 함께하면서 자연히 말투가 이상해진 그 아이는 유독 김석영을 따르는 편이었다. 그의 뒤꽁무니를 쫓아 이승으로 가는 초원을 침범했지만, 김석영은 굳이 아이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애초에 아이는 이승에 목적을 둔 게 아니었고, 일정 지점에서는 정직하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영민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아이는 드물게도 윤재하만큼이나 맑은 기운을 가진 영이었다.
「잡동사니를 온몸에 매달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어요. 물건을 하나하나 늘어놓으면서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때 보여준 물건 중에, ......제 물건이 있었어요.」
"......."
"잠깐, 잠깐만요. 확인할 게 있어요......!"
다급하게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린 김석영이 말했다.
"확신할 수 있나?"
「네. 매일같이 몸에 지니고 다녔던 거예요. 확실해요.」
"비슷한 물건일 수 있어. 단순히 우연일 수도 있고."
「이곳에 흘러들어온 게 단순히 우연일 수는 있지만, 비슷한 물건은 아니에요.」
"왜 그렇게 확신하지?"
「모양이 비슷할 순 있어도 새겨놓은 낙서까지 비슷할 순 없으니까요.」
염주는 윤재하가 오롯이 제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름을 적으면 온전히 제 것이 될 것이라 여겼던 어린 윤재하는 염주의 몇몇 알에 제 이름을 적어놓았다. 아이의 보물 주머니 속에 있던 염주 알에도 분명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삐뚤빼뚤한 아이의 글씨는 언뜻 문양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놓은 당사자인 그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늘 차고 다니던 염주가 있었어요. 그중 몇몇 알에 이름을 적어놓았었는데, 흐릿하지만 분명 제 이름이 적힌 염주 알이 그 아이의 주머니 속에 있었어요.」
김석영은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시선만 보냈다. 이야기에 집중한 것이라는 걸 눈치챈 윤재하가 말을 이어갔다.
「형이랑 만났던 열세 살 겨울에 사고가 났어요. 인사도 없이 동네를 떠나게 된 게 그래서였는데....... 그때 그 사고 이후로 염주가 사라졌어요. 아마 끊어진 거겠죠. 헐거웠거든요.」
"사라진 그 염주의 알이 여기에 있는 거고."
「네. 그래서 아이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걸 갖게 되었는지.」
확실히, 끊어진 염주의 알 따위가 이곳에 흘러들어온 것도 이상한 일이긴 했다. 형태가 온전한 것도 아닌 것이 왜? 아무리 이곳이 경계라고 할지라도, 고작 한 걸음 차이로 저승의 영역에 속할 수 있었다. 도깨비와 같은 제3의 존재들의 눈에 띄어 흘러들어온 것일 수도 있으나, 혹여 망자의 손에 쥐어져 도달하게 된 것이라면....... 그 망자가 윤재하와 관련이 있다면 알아봐야 했다. 그와 얽힌 악귀와의 단서가 될지도 모르니.
"그 아이는 다른 이들을 해칠 만한 존재가 못 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정도는 괜찮아. 정말 그게 너와 관련 있는 물건이라면 혹시 모를 단서 하나라도 놓쳐선 안 되겠지."
「......정말요?」
"왜 놀라고 그래?"
「아니, 아니에요. 그냥.......」
"설령 이곳에 네가 아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냥 잊어."
단호하게 내뱉던 김석영을 떠올린 윤재하가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가라고 할 줄 알았어요.」
"원래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너와 얽힌 것들을 하나라도 무시할 수 없어. 악귀를 찾는 단서가 될 수도 있으니까."
「염주는 어릴 때의 물건이라 악귀와는 연관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
「네.」
어찌 됐건 허락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안도한 윤재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아이를 제외하곤 상대하지 말라는 당부를 남긴 김석영은 삼도천을 건넜다. 윤재하는 수면 위를 걷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발걸음이 떼어질 때마다 찰랑이는 수면이 한순간에 인영을 삼켜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던 탓이다.
결국 김석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가 되어서야 눈길을 물린 윤재하가 주변을 살폈다. 그가 찾던 아이가 저 멀리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리가 좁혀졌다.
「......안녕.」
「우와 인사해줬어!」
「그때 봤을 때보다 보물이 많이 늘었네.」
「맞아! 보물이 더 늘었어. 너 눈썰미가 있구나?」
기분이 좋은 듯 헤실헤실 웃은 아이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갸웃하더니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어?」
「왜?」
「어어?」
「......왜 그래?」
「예쁜 도령, 죽었어?」
「아.......」
당황한 탓에 말을 잇지 못하자 인상을 구긴 아이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왜 전령 나리 안 따라가고 여기 혼자 있어?」
「보고 있었어?」
「응. 난 전령 나리 좋아해. 멋있어. 근데 전령 나리는 너무 가까이 오면 뭐라고 하거든. 항상 거리감을 유지하랬어.」
그래서 멀찍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며 아이가 덧붙였다.
「혹시 삯이 없어서 여기 있는 거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난 노잣돈이 아주 많거든!」
「아니야. 괜찮아. 난 저기 안 건널 거야.」
「그럼 계속 여기에 있을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사정이 조금 있어.」
난처한 기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가 씩 웃는다.
「누구나 사정은 있기 마련이지. 괜찮아. 안 물을게.」
아이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윤재하의 눈이 커졌다. 고작 열한 살 정도 되었을까. 요란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정작 그 속의 깊이를 누가 알 수 있을까. 윤재하는 선입견을 품고 바라본 제 시각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헤헤, 고맙다는 인사 오랜만에 들어 봐.」
「그랬어?」
「응. 기분 좋다.」
싱긋 웃은 아이가 주렁주렁 매단 제 보물들을 어루만지며 흥얼거렸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숨을 삼키던 윤재하가 아이의 몸에 새로 추가된 안경을 가리켰다.
「멋지다. 이거.」
「이거? 그치? 백발의 할머니가 쓰고 있던 거야. 글을 쓰던 분이래. 이제는 눈이 잘 보여서 필요 없다길래 내 노잣돈이랑 교환했어.」
「그랬구나.」
피식 웃으며 대꾸해주자 잔뜩 신이 난 아이가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새로 교환한 것들을 하나하나 손짓하며 알려주었는데, 조그마한 손끝이 품속에 매달아 놓은 헝겊 주머니를 스쳐 갔다. 윤재하의 염주 알이 있던 주머니였다. 동요를 감추고 마른 입술을 달싹이던 윤재하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때, 가장 예쁜 것만 모아놓은 주머니를 보여줬었잖아. 그게 이거지?」
「응. 맞아.」
「물건 하나하나 다 기억해? 어떻게 얻어냈는지.」
「음. 아주 오래된 건 헷갈리긴 하지만 대충은 기억할걸?」
「그럼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의아하게 바라보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뭔데?」
「네가 보여줬던 보물 중에 흑요석 아니, 새카만 구슬 있잖아. 어떤 문양 같은 게 세공된 검은색의 예쁜 구슬.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나뭇잎처럼 녹색 빛이 맴돌고 곳곳에 하얀 글자가 적혀 있는.......」
「아아, 응. 알아. 내 보물 중 하나야. 왜?」
「그건 어떻게 구했어?」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헝겊 주머니를 뒤적인 아이가 염주의 알을 꺼냈다. 움찔하는 몸을 간신히 억누른 윤재하가 아이의 입을 주시하며 그 속에서 튀어나올 말을 기다렸다.
「이건 좀 오래돼서.......」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듯 한동안 생각에 잠긴 아이가 입을 달싹였다. 그 낯이 조금은 슬퍼 보였다.
「누구더라. 누구....... 아, 엄마. 엄마구나. 맞아. 엄마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삼도천을 건너기 전에 손에서 떨어졌어. 다시 돌아와서 잡으려고 했는데 도중에 돌아오진 못했어. 내가 대신 주워서 보고 있으니까 웃어줬던 것 같은데 표정이 좀 슬퍼 보였던 것 같아. 엄마가 우는 것 같아서 나도 좀 슬퍼졌었어.」
「.......」
「잊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하니까 조금 슬퍼져.」
힘없이 고개를 숙인 아이가 염주의 알을 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무릎을 끌어와 작은 얼굴을 묻는 행동에 윤재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아이의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손안에 닿는 형태감만으로 충분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에 고개를 든 아이가 설핏 웃었다.
「쓰다듬 받는 거 기분 좋아.」
「......그래?」
「응.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도령도 슬퍼 보여.」
「아니야. 그런 거.」
혼란스러움을 억누르고 표정을 갈무리한 윤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이를 쓰다듬지 않는 다른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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