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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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아. 그렇게 누르면 벌레가 아파할 거야. 석영이도 아픈 건 싫지 않니?」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손끝으로 눌러보던 아이가 고개를 들어 제게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응. 아픈 건 싫어."
「그렇지? 지난번에 할아버지가 석영이 이마 찰싹했을 때 뒤로 발라당 넘어졌던 거 기억해?」
"네."
「그때 할아버지는 살짝 누른 건데 석영이한테는 너무 아팠잖아. 지렁이도 그럴 거야. 석영이는 괴롭히려는 생각이 없었어도 지렁이한테는 아플 수 있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긋한 질문에 생각에 잠긴 아이가 손을 빼냈다.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품에 숨긴 아이가 여인을 올려다보자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따스하게 풀어졌다.
「똑똑하다. 우리 석영이.」
배시시 웃은 아이가 따스한 얼굴을 한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너른 품에 안겨 얼굴을 비볐다.
"......또 돌아왔나."
꿈의 여파에 한숨을 내쉬며 뻐근한 눈을 비빈 김석영이 상체를 일으켰다. 문 너머로 식기를 매만지는 소리가 났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며 방에 나오자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윤재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녕. 윤재하."
"......네."
어제 그런 식으로 달아나선 곧장 숨어버리길래 꽤 오래갈 줄 알았더니. 부르는 말에 대답은 하는 걸 보아 제 나름대로 생각 정리를 한 모양이다.
"잘 잤어?"
"......네."
"오늘 아침은 뭐야?"
"......네."
"메뉴 이름이 '네'야? 특이하네."
뒤늦게 엉뚱한 대답을 뱉었다는 자각이 든 윤재하가 몸을 움찔했다. 바보 같은 답변을 덥석 물어버린 김석영의 말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민망함에 달아오른 귓불을 만지작거린 윤재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곧장 부딪혔다.
"......."
식탁에 상체를 늘어뜨리고 바라보는 얼굴이 평소와는 달랐다. 윤재하는 저도 모르게 김석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어디 아파요?"
황급히 손에 물기를 닦아낸 윤재하가 김석영에게 다가갔다. 늘 창백할 정도로 서늘했던 피부 위로 혈색이 감돌았다. 나른하게 풀린 얼굴이나 묘하게 늘어지는 말끝도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살짝 넘겨 손등으로 이마를 대보니 그의 예상처럼 열기가 느껴졌다. 고작해야 일반 사람들의 평열 정도였지만 체온이 낮은 김석영에겐 큰 열이나 다름없었다.
"열나요."
줄곧 따뜻하기만 했던 윤재하의 손이 시원하게 느껴진다는 건 확실히 열이 올랐다는 증거였다. 이맘때쯤이면 으레 있었던 일이기에 김석영은 무감하게 대꾸했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열이 이렇게 오르는데 별것 아니라고요?"
"이맘때면 원래 이렇거든. 하루 정도 앓고 나면 괜찮아져."
낯을 굳힌 윤재하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
"그래도 병원에 가요."
"괜찮대도. 병원 갈 정도는 아니야."
"형이 의사예요?"
김석영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윤재하가 말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대화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김석영이 헛웃음을 토해냈다.
"왜 따라 해?"
"그럴 만해서요."
단호한 태도로 윤재하를 병원으로 이끌던 장본인이 정작 자기 자신한테는 무심하니, 어느 누가 황당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병원에 갈 정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아픈 정도를 파악하는 건 의사라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음. 그랬지."
"그런데 그런 말을 해요?"
진심을 담아 타박하는 말에 설핏 웃은 김석영이 대꾸했다.
"나는 내 증상의 정도를 알거든. 계절 감기 같은 거라 병원 가도 별거 없어. 약 먹고 푹 쉬는 게 낫는 거야. 이건 경험과 연륜에서 우러나온 판단이니 그때의 네 상황과는 다르지."
"......그럼 적어도 방에 들어가서 쉬어요. 주방은 찬기가 많이 들어오니까. 목이 잠긴 걸 보면 편도가 부은 걸 수도 있으니까 죽 끓여서 가져갈게요."
"그럴까, 그럼."
몸을 일으킨 김석영이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방으로 향했다. 뒤따라온 윤재하는 그가 이부자리에 눕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주방으로 돌아갔다. 미리 준비한 아침은 대충 정리하고 곧장 죽을 끓였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니 볼록한 이불이 그를 반겼다. 숨이 막히지도 않는지 이불 속에 온몸을 파묻은 것이다.
"......형."
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쟁반을 놔둔 윤재하가 볼록한 이불을 쓰다듬었다. 꿈틀거리며 이불속에서 얼굴을 내뺀 김석영이 피식 웃었다.
"다정하긴."
"......죽 먹어요."
"그래. 고마워."
당장 먹기 편하게 골고루 식힌 죽그릇을 건네자 상체를 일으킨 김석영이 받아들었다.
"너는?"
"아, 저는......."
"이리 와. 너도 같이 먹어."
"전 괜찮아요. 편히 먹어요."
"그래?"
어깨를 가볍게 으쓱한 김석영이 죽을 한술 떴다. 느릿하게 씹어 삼킨 그가 맛있다고 해주자 윤재하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몸이 무거운 탓에 평소보다 더딘 속도였지만 그는 부지런하게 그릇을 비워갔다.
"먹는 약 있어요?"
"응. 거실 서랍장 안에 있을 거야."
"가지고 올게요. 잠시만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앉아만 있는 김석영은 곧장 구급상자를 찾아온 윤재하로 인해 속전속결로 약까지 해결했다.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그리 아픈 것도 아닌데.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에 김석영은 결국 웃음을 흘렸다.
"나 별로 안 아파. 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
"그런 게 어딨어요. 아픈 건 아픈 거죠."
"네 몸부터 이렇게 챙기고 그런 말을 해."
"......화살을 돌리는 건 비겁한 거예요."
나직한 직구에 김석영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에 윤재하 역시 덩달아 미소를 머금었다.
"뭐, 편하고 좋긴 하네. 챙김 받는 거."
순순한 인정에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윤재하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까 이맘때면 원래 아프다고 했잖아요. 이 넓은 곳에서 늘 혼자 아팠던 거예요?"
그러고 보면 그가 김석영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특수성을 지닌 남자라는 것과 이 넓은 곳에서 홀로 지낸다는 것뿐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니. 작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와 집안일을 도와주시던 분이 계셨어. 홀로 외롭게 아팠던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작년까지라는 건......."
"돌아가셨어. 이승을 떠나신 거지."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괜찮아. 나는 만날 수 있으니까."
너도 알잖아. 내가 저승을 오고 갈 수 있다는 거. 태연히 말을 잇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뜬 윤재하가 물었다.
"평소에도 오갈 수 있는 거예요?"
"응. 그런데 사실 일이 아니면 안 가긴 해."
"왜요? 나였다면......."
제가 김석영처럼 저승을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리울 때마다 보러 갈 텐데.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여유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드는 거일 수도 있고. 또 염치가 없다고 해야 할까."
"염치라니요?"
의아한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긴 그가 윤재하를 불렀다.
"윤재하."
"네."
"내 이야기 하나 해줄까?"
"......."
"뭐,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을 테......."
"아니요."
가벼운 어조로 이어지는 말을 윤재하가 막았다. 고개를 저으며 바라보는 표정이 진중했다.
"재미 따윈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형이 말해주는 이야기면 돼요."
멈칫한 김석영이 가만히 시선을 마주했다.
"그거 알아요?"
"뭐가?"
"형이 먼저 자기 이야기를 해주는 건 처음인 거. 나는 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말해줘요. 나한텐 형이 주는 말 하나하나가 아쉬워요."
부드럽지만 올곧은 어조. 단단하게 바라보는 눈빛. 서투르고 불안정하던 청년은 어디 갔을까.
"......너 조금 변한 거 같네."
일순 흠칫한 윤재하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뒤늦게 제가 뱉은 말에 당황한 것이다.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것에 피식 웃은 김석영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은 좀 극성인 면이 있는 분들이셨어. 자식이라곤 나 하나였는데, 어린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셨거든. 그렇다고 해서 온종일 옆에 붙어 있었다는 건 아니고 그저 멀찍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곤 하셨지. 사실 그럴 만도 했던 게, 어릴 때부터 좀 성격이 별나단 말을 들었거든."
"어떤 부분이요?"
"음, 글쎄. 아이답지 않게 겁이 없는 면이라든가 잘 울지 않는 점이려나. 나도 잘 모르겠네."
설핏 웃은 윤재하가 김석영의 어린 시절을 상상했다. 지금처럼 아주 잘생기고 인기가 많은 아이였을 것이다.
"어찌 됐든 늘 내 곁을 지켜주려 하셨어. 나 역시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러다 내가 막 여덟 살이 되었을 때인가. 이곳 숲길에서 놀다가 지렁이를 발견했어. 며칠간 비가 내려서 흙바닥이 축축했거든. 손에 닿는 흙이 축축하고 부드러워서 파헤치며 놀다가 그 속에 있던 지렁이를 건드린 거지. 그렇게 길고 통통한 놈을 본 건 처음이라 내심 신이 났었던 것 같아. 만지는 촉감이 신기했고 꿈틀거리는 것도 재밌었지. 그러다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꾹 눌러버렸는데, 앞에서 지켜보던 어머니가 타이르셨어. 그렇게 만지면 벌레가 아플 거라고. 너도 아픈 건 싫지 않냐고. 당연히 싫었지. 그 나이에 아픈 걸 즐기는 애가 어디 있겠어. 아니, 있을 수도 있나? 근데 뭐. 나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지렁이한테 시선을 떼고 부모님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던 중이었다. 느슨하게 메고 있던 목도리가 숲 바람에 휘말리다가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려버렸다. 부드러운 촉감 때문에 좋아하던 것이라 아이는 곧장 목도리를 가져오기 위해 달려나갔다.
「석영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풀거리는 목도리만을 바라보며 뛰던 순간.
투두둑―
미끄러운 흙길에 넘어진 아이가 경사를 굴렀다. 부드럽기만 하던 흙은 곳곳에 박혀 있던 돌과 나뭇가지로 여린 피부를 매섭게 할퀴어댔다. 설상가상으로 바위에 이마를 찧었다. 피가 흐르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아이는 혼란에 빠졌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기절조차 하지 못해서 온갖 고통을 다 느껴야만 했는지.
생리적으로 차오르는 눈물과 흐르는 피가 뒤섞여 눈이 따가웠다. 온몸이 아팠고 찢어진 이마 부근이 고통스러웠다. 겁도 없이 뛰어다니다가 넘어졌던 상처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도였다. 끅끅 차오르는 설움과 고통에 눈물만 펑펑 흐르는데,
투둑.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석영아. 석영아!」
"엄마아....... 아빠......."
진흙이 뒤엉킨 니트는 빗방울에 젖어들자 더욱 무거워졌다. 옷감이 감싸지 못한 피부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아프기만 했고 점차 흐릿해지는 시야에 비친 모든 것은 공포로 다가왔다. 다급한 얼굴로 제게 다가오는 부모님조차도 그 순간에는 사람이 아닌 말라 죽어가는 나무 같았다. 동화 속에서 보았던 괴물의 숲에 존재하는 기괴한 나무. 날카로운 이빨로 살갗을 씹어먹을 것만 같던, 그런.
「석영아! 아, 어떡해...! 피가.......」
「비까지 내려서 이대로 두면 안 돼. 옮겨야 해.」
「석영아, 석영아. 엄마야. 정신 차려봐......!」
가물가물해지는 정신 너머로 들리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아이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제 고통에 집중했다. 그들이 가려주지 못한 빗방울은 연신 아이의 얼굴을 때렸지만 아이는 간신히 눈을 떠 부모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행히 제 곁을 둘러싼 앙상한 나무가 아닌, 애정과 걱정을 담은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석영아. 정신 차려야 해. 눈 감으면 안 돼. 자면 안 돼.」
"나 아파....... 못 움직이겠어. 아파......."
힘없이 내뱉는 말에 부모의 가슴이 미어졌다. 아이는 그런 부모의 얼굴을 바라보며 혼자가 아니란 것에 안심했다.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단단하게 붙들던 정신을 놓으려던 순간.
「이대론 안 돼.」
낮게 읊조리던 목소리가 잦아든 동시에, 모친이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닫힐 듯 말 듯한 시야에 무서운 얼굴을 한 모친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건 아이가 평소에 알던 모친의 모습과는 달랐다. 몸을 파헤치는 손길은 평소와는 달리 전혀 부드럽지 않았고 실로 우악스러웠다.
「여보, 다시 생각해봐. 혹시라도 잘못되면......!」
「아니. 지금은 이게 빨라.」
어른의 서늘한 손이 작은 아이의 손끝에 맞춰지고 몸체에 파고들었다. 아이는 제 몸에 들어오는 모친의 기운에 숨을 허덕이며 눈물을 흘렸다.
"흐으, 흐으윽......!"
그 순간 아이가 느낀 건 공포였다.
누군가 몸에 들어오려 해. 몸을 빼앗으려 해....... 그게 사랑하는 모친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이를 강타한 건 본능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이었다.
"싫어, 싫어......!"
「안돼. 석영아. 석영아, 거부하지 마!」
육체의 주인이 침입을 거절하자 모친의 몸이 튕겨 나왔다. 다급하게 아이를 붙들어 스며들어보려 해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석영아. 석영아 제발......!」
구슬픈 애원에도 아이의 마음은 굳건하게 닫혀버리고 말았다. 공포에 잠식된 아이는 부모의 형상을 거부하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들이 두려웠고 보고 싶지 않았다.
망연하게 아이의 곁에 무너져 앉은 아내를 두고 남자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집에 돌아온 아이의 삼촌으로 인해 아이는 무사히 구출되었지만 한번 피어난 공포는 쉽게 가라앉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아이는 제 부모가 죽은 이들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갓난아이를 두고 사고로 생을 잃은 거야. 어린아이가 걱정되어 저승에 가지 않고 이승에 머문 거지. 차라리 내가 망자들을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들을 인식하니 더더욱 떠나기 힘들었을 테고."
"......."
"사실 은연중에 알고 있었어. 그분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체온도 그림자도 없었거든. 알고 있었는데 모른 척 무시했어. 그러다 그 사고로 인해 곁을 지켜주던 부모에게 거부감마저 생겨버린 거지. 몸을 빼앗으려던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주고 싶었던 건데. 그대로 두었다간 큰일이 날 테니 옮겨주고 싶었던 건데. 민감했던 아이는 의도를 곡해해서 거부하고 말았지."
"아이였으니까요. 두려울 수밖에 없는 아이였으니까......."
"맞아. 그땐 정말 두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지나고 보면 안타깝게만 느껴지지."
말을 하다 바라본 윤재하의 표정은 마치 울 것 같았다. 가볍게 웃은 김석영이 그만할까 물어보자 고개를 저었다. 계속해달라는 말에 김석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부모한테 거리를 둔 채 초등학교에 입학했어. 교실 뒤에는 학부모들로 가득했지. 물론 우리 부모님을 포함해서. 하지만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당시 가업을 이어받았던 삼촌 대신에 할아버지가 참여해줬어. 그 옆에 선 부모님의 표정은 잘 기억이 안 나. 보기가 힘들어서 외면했거든."
입학식이 끝나면 다들 맛있는 식사를 하러 가곤 하니, 부모는 아이 또한 그러길 바랐다.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란 것일 테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건 아이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지 못했다. 아이가 보는 가족은 넷인데 식당 테이블 위에 올려진 식기는 둘뿐이라는 게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었을 뿐이었으니까.
선천적으로 아이는 제 또래에 비해 성숙했고 이해가 빨랐다. 일반적인 아이들은 망자를 보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죽은 자들은 이승이 아닌 저승으로 떠나야 하고 산 자는 이승에서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저승을 오가는 역할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훗날 제가 하게 될 역할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다 안채까지 떠도는 영을 발견한 날이 있었다. 그 영은 평소 아이가 보던 영들과는 달랐다. 그것을 함께 바라보던 삼촌에게 아이가 물었다. 저건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냐고. 그러자 삼촌이 대답해주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헤매다 보니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숨을 쉴 수 없는 곳에서 오기로 견뎌보려다 저렇게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라고.
짓궂은 면이 있던 삼촌은 아이를 두고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왔다. 얼굴을 넣어보라는 말에 순순히 물속에 얼굴을 처박은 아이는 빠르게 얼굴을 떼어냈다.
"아니지, 석영아. 물속에서 숨을 쉬어봐야지."
"여기서 숨을 쉬라고?"
"응. 물속에서 숨을 쉬어 봐. 숨이 안 쉬어지면 참아봐."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것에 아이는 충실히 이행했다. 물속에서 호흡하는 방법 따윈 모르니 무작정 참을 수밖에 없었고, 쉽게 얼굴을 떼어내고 싶지 않아 극한까지 견뎌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부친이 화를 내며 제 동생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고 어깨를 으쓱한 삼촌은 아이의 뒷덜미를 끌어내 물에서 빼내었다.
"푸하! 헉, 허억!"
「이 미친놈아! 너 내 아들 죽이려고 작정했어?!」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부친이 동생의 멱살을 쥐며 악을 질렀다. 코웃음을 치며 부족한 숨을 들이마시는 조카를 흘끔 바라본 그가 말했다.
"죽기 직전까지 참은 건 얘 의지야. 어린 게 독해가지고. 얘는 대체 누굴 닮은 거야. 형수님인가?"
옆에서 화를 내는 부친을 무시한 삼촌이 아이를 향해 물었다.
"어땠어?"
"......숨 막혔어."
"괴로웠지?"
"괴로웠어."
"물에서 떨어지니까 살 것 같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살 것 같아."
나는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속에서 살아갈 수 없어. 나는 공기가 필요해. 숨을 쉬어야 해. 하지만 부모님은 숨을 쉬지 않아. 숨을 쉬지 않는 건 죽었다는 걸 의미하고, 죽은 자들은 내가 있는 곳에서 살아갈 수 없어. 억지로 버텼다간 저 영가처럼 희미해지고 말 거야.
「석영아.」
"나는."
「.......」
"귀신 부모님 따위 필요 없어요."
확실하게 깨닫고 만 아이가 선택한 방법은 부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죽었는데 여기 있는 건 이상하잖아."
이제 나는 죽은 부모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자라날 수 있으니 떠나라고. 김석영은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한 뒤로 며칠 후에 부모님은 저승으로 떠났어."
"......."
"그날 이후로 매년 비슷한 시기에 갑작스럽게 몸이 아파왔어. 그게 부모님께 모질게 말했던 날이라는 걸 깨달은 건 꽤 지나고 나서였고."
김석영은 저와는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처럼 무감하게 말했다.
"오늘도 그날이 돌아온 거야. 죄책감 같은 거겠지. 가업을 잇고 나선 한 번쯤 찾아가볼까 싶기도 했는데. 죽어서 귀신이 된 게 싫다고 말하며 떠나보냈는데 살아 있는 상태로 만날 순 없겠더라고. 그래서 나는 일이 걸려 있지 않으면 웬만해선 저승에 가지 않아. 아직은 살아 있으니까."
하지만 제게 주어진 특수성으로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떠나보내는 것 역시 가벼워졌다. 정말 만나러 갈 생각은 없으면서, 마음은 그랬다.
"지금 당장은 헤어져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그게 두려울 때도 있지만 분명 위안이 되기도 하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재하에게 김석영이 말했다.
"그러니까, 윤재하. 너는 나처럼 상처 주지 말고 온전하게 보낼 준비를 해. 가족이라면 더더욱. 물론 너는 나와는 달리 잘하고 있지만."
움칫 몸을 굳힌 윤재하가 숨을 삼켰다. 달싹이던 입술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고 있었어요?"
제가 찾는 망자가 가족이라는 걸.......
"그냥. 어렴풋이 짐작만. 너처럼 경계성이 높은 녀석이 타인을 곁에 둘 것 같진 않고, 혼자 살아간다는 건 가족과 떨어져 있다는 건데. 그게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인 것 같진 않았으니까."
정확한 말이었다. 쓰게 웃은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가족. 엄마거든요."
"어머니?"
"네. ......그때 경계에서 했던 말 기억해요? 형이랑 만났던 때가 열세 살이었는데, 그해 겨울에 사고가 났어요. 차 사고였고 엄마가 절 감싸다가, ......돌아가셨죠."
잠시 생각에 잠긴 김석영이 물었다.
"그 사고 이후로 염주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나?"
"네. 깨어났을 때 손에 없었어요. 주변에 물어봐도 염주에 대해선 아무도 몰랐고요. 이전에 한번 끊어졌던 걸 억지로 묶어놓은 거라 헐거웠을 거예요. 바닥을 뒹굴면서 떨어졌을 것 같긴 한데 확실하진 않죠."
"생각해보니 이걸 묻지 않고 넘어갔네. 네 염주의 용도는 뭐였지?"
"아, 영가들을 가려주었어요. 그걸 차고 있는 동안엔 영들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한번 끊어지고부턴 다시 보이게 됐지만."
눈을 가려줄 정도의 힘이 깃든 염주는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강한 신령의 기운이 깃든 것이거나 오랜 기도를 통한 좋은 염원이 깃들어야 한다. 윤재하의 조부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치매에 걸린 상태라고 했으니 아무리 용한 박수였다 할지라도 시기가 애매하다. 미래를 점쳐 미리 만들어두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염주를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
"아마 할아버지의 동료분들이실 거예요. 할아버지가 잠시 정신을 차리셨을 때 엄마랑 대화하셨던 걸 어렴풋이 기억하거든요. 어느 날 갑자기 자리를 비우시더니 엄마가 염주를 들고 오셨고, 절대 빼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손에 감싸주셨어요."
"결국 그 염주를 네게 채워준 건 너의 어머니인 거네."
"네. 그렇죠."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긴 김석영이 읊조렸다.
"네 곁을 지킨 건 너의 어머니이고, 저승의 경계에서 아이를 통해 들었던 대상도 여성이지. 한번 떨어트린 것을 다시 붙잡으려고 할 정도로 미련을 가진. 그건 소중한 물건을 가진 자가 할법한 행동이고."
"......혹시 아이가 말한 사람이 엄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리깐 시선을 든 김석영이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왜. 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
"저는......."
"물론 어머니에 대해선 네가 제일 잘 알겠지. 그런데 이야기만 듣는 나로선 그냥 지나치기 힘든 부분이라 가능성을 열어두는 거야."
"......아닐 거예요. 내가 엄마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요. 제 곁을 지켜준 건 엄마가 맞아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어."
"......."
"눈앞에서 사고를 겪은 아이가 제게 닥친 현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때때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볼 때도 있어. 무언가를 투영해서. 의외로 그런 경우의 사연을 많이 겪었거든, 나는."
덜컥 굳어져서 말을 잇지 못하는 것에 옅은 한숨을 삼킨 김석영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물론 이건 내 가정일 뿐이야. 널 엉망으로 헤집으려는 건 아니었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간신히 쓴웃음을 짓고 있으나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 원래라면 끝까지 제 생각을 꺼냈을 테지만 윤재하의 표정을 보니 차마 그럴 수 없어 김석영은 말을 삼켰다.
"배고프겠다."
"아......."
"이제 그만 쉬어. 아침도 챙겨 먹고. 그리고 지금 나눈 이야기는 네 어머니를 찾으면 차차 알 수 있는 거겠지. 아마 내일 중으로 방편을 전해주러 도깨비가 방문할 거야. 그럼 속도가 날 테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네, 고마워요."
"나야말로."
싱긋 웃는 김석영을 뒤로하고 윤재하는 방을 나섰다. 스르륵 문을 닫고 주방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복잡하네.'
떠나간 윤재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김석영이 생각했다. 윤재하의 말대로라면 아이를 감싸다가 끊어진 염주를 그의 모친이 쥐고 있던 것일 수도 있다. 아이의 흔적이니 소중하게 쥐었을 것이고 저승까지 이어져간 것일 테지. 하지만 그럼 윤재하는 진짜 모친이 아닌 대상을 모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혹여 무너진 아이의 빈틈을 파고들어 윤재하의 눈을 속인 것이라면. 그게 그때의 악귀라면....... 모습을 그럴듯하게 바꿔 아이의 눈을 흐리게 하고, 흐트러진 정신을 파고들어 불안정한 영기를 누르고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귀어는?'
귀어가 지닌 보호막을 어떻게 뚫었지? 애초에 그것을 뚫고 윤재하의 곁을 지켰다면 언제든지 몸을 빼앗을 수 있던 것 아닌가. 혹시 제 밑의 수하를 눈속임으로 대신 부렸나. 보다 온전하게 몸을 얻기 위해 모친으로 둔갑할 수 있는 수하를 곁에 둬서 윤재하의 마음을 얻으려 했나. 상성이 깊어지고 귀어가 사라질 순간만을 기다렸던 건가.
"......귀찮게 됐네."
얽힌 게 많아질수록 귀찮아진다. 하루빨리 해결해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제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윤재하는 분명 상처받을 것이다.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만들어진 가짜라면 어느 누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받아야만 하는 상처라면, 차라리 빨리 받는 게 낫겠지."
언제까지고 상처를 마주하는 것을 미룰 수는 없다. 다만 그 상처가 너무 깊지만은 않기를, 시간은 조금 걸리더라도 끝내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김석영은 이제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이마의 자국을 매만지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 * *
익숙한 안채에 들어선 도깨비는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상황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시커먼 한 놈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나 묘하게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생기가 넘치던 말간 놈은 묘하게 어두워진 눈을 하고 있었다.
"둘이 싸웠나?"
인상을 찡그리며 묻자 한쪽에선 코웃음을 치고 또 다른 한쪽에선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 모양이냐 묻자 한쪽은 어깨를 으쓱하고 또 다른 한쪽은 시선을 피했다.
"뭐. 무슨 일이 있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자, 망종아. 네가 주문한 거 가져왔다."
"네. 참 오래도 걸리네요."
가볍게 웃은 김석영이 손을 내밀었다. 욕설을 짓씹으며 눈을 부라린 남자가 마지못해 함을 건넸다. 묵직한 함 속에는 길게 늘어진 금줄 두 개와 은으로 만든 작은 방울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그 금줄에 너네의 머리카락과 피를 섞을 거야."
"원시적이네요."
"정통이라고 표현해줄래?"
쯧, 혀를 찬 남자가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검집도 없는 것을 휙 던지는 것에 윤재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빠르게 손을 뻗었으나 김석영이 가로채는 게 더 빨랐다. 다행히 그는 칼날이 아닌 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별다른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윤재하가 사나운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제정신입니까? 베이면 어쩌려고 그딴 걸 날려요?"
"허이고, 무셔라. 잘 받았으면 됐지, 왜 화를 내고 그래? 야 망종아. 아해 나리께서 널 무시한다."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
"됐어. 윤재하. 저자가 하는 말은 그냥 무시해."
고개를 기울인 김석영이 눈을 맞추며 말했다. 성난 마음을 달래는 듯한 눈빛이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윤재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한 남자가 읊조렸다.
"주인과 개 같군."
"개 지키려는 주인이 도리어 당신을 물 수도 있죠."
허. 입을 떡 벌리고 황당하게 쳐다보자 바람 빠지는 웃음을 토해낸 김석영이 제 머리칼을 잘라냈다. 손에 쥔 머리칼을 잿더미로 만들어 금줄 위에 뿌리자 물을 갈구하는 마른 흙처럼 사르륵 흡수했다. 곧 찬찬히 색이 물들더니 검은색으로 변했다.
"좋아. 이젠 아해도."
"윤재하."
단도를 받아든 윤재하가 머리칼을 직접 잘라내고 손에 쥐었다. 그의 손등에 제 손바닥을 겹친 김석영은 천천히 힘을 불어넣으며 손을 쥐었다. 곧 다갈색의 머리칼 역시 재가 되어 금줄 위에 뿌려졌다. 이번엔 검은색이 아닌 주인의 머리칼처럼 다갈색으로 색이 변했다.
"이제 각각 피를 뿌려. 피가 섞여야 엮이게 되니 두 개 다 뿌려야 해."
고개를 끄덕인 김석영이 윤재하의 손에서 단도를 넘겨와 제 옷자락에 닦아냈다. 머리칼의 잔여물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제 손가락을 그었다. 벌어지는 살점 속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서늘한 체온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서 그 속에 돌고 있는 피가 파란 것도 아닐 텐데. 우습게도 윤재하는 흘러내리는 붉은 피의 궤적에 내심 안도를 느꼈다.
"입맛에 맞나보네. 잘도 먹는구나."
검은색과 다갈색의 금줄이 단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김석영의 피를 끌어왔다. 골고루 피가 스며들자 단도에 묻은 피를 연소시킨 김석영이 곧장 윤재하에게 건넸다.
"깊지 않게 살짝만 베면 돼."
"네. 걱정 마세요."
설핏 웃은 윤재하가 망설임 없이 제 손가락을 베어냈다. 김석영의 피가 묻은 곳 위로 그의 피를 쏟아내자 두 사람의 피가 뒤섞이며 금줄에 스며들었다. 잠시나마 붉은 빛을 내던 두 개의 금줄은 검게 물들어갔다.
"좋아. 알맞게 잘됐네."
만족스럽게 웃은 남자가 두 개의 물컵을 가져와 물을 따랐다. 이내 각각의 금줄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잘라내더니 재로 만들어 물에 뿌렸다. 손가락을 동그랗게 젓자 물컵 속의 물이 소용돌이치며 재를 섞어냈다. 히죽 웃은 남자가 그것을 건넸다.
"자, 이건 망종이의 것. 쭉 들이켜."
"이 미묘한 걸 마시라고요."
"그래. 쭉 들이켜. 끊지 말고 쭉쭉."
흠. 투명한 유리컵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잿빛 물을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김석영은 한숨과 함께 그것을 들이켰다. 속 안을 사정없이 헤집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자 윤재하의 표정이 덩달아 굳어졌다.
"왜 그래요?"
"......내장이 꼬이는 것 같아."
"뭐가 잘못된 거예요?"
황급히 바라보는 시선에서 불안이 느껴졌다. 남자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말렴, 아해야.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거든. 오히려 너무 잘 참아서 싱거울 정도란다. 원래라면 바닥을 기어야 하는데."
"바닥....... 정말 괜찮아요?"
"음. 이제 참을만해."
"이런.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아해야, 너는 더 지독한 걸 마셔야 해."
짓궂은 웃음을 매단 남자가 품에서 부적을 꺼내며 말했다.
"특별히 우리 아해는 몸속에 결계까지 만들어야 하니 말이야. 부적까지 갈아 넣어야지."
부적을 잿더미로 만든 남자가 그 재를 물컵 안에 흩뿌렸다. 또다시 소용돌이를 일으켜 가루들이 뒤섞이자 김석영이 마신 것보다 미묘한 색이 된 물이 윤재하를 반겼다. 김석영에게도 그러했듯, 또다시 히죽 웃은 남자가 그것을 건넸다.
"자 단번에 쭉 들이켜."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윤재하가 물컵을 받아들이고는 짧은 심호흡을 끝으로 단숨에 삼켜냈다.
"윽......."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을 시작으로 온몸을 날카로운 바늘로 사정없이 긁어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보호막으로 감싸자는 건지 살점을 뜯어내겠다는 건지 모를 고통이었다. 사정없이 헤집어대는 고통 뒤엔 불에 타는 듯한 감각이 이어졌고, 연신 가쁜 숨과 함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잠깐, 너무 고통스러워하잖아요."
"그만큼 견고하게 자리 잡을 거야. 참아내야 해."
미간을 찌푸린 김석영이 비틀거리는 윤재하의 어깨를 감싸 품에 가두었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자신을 감싼 김석영의 품에 매달린 윤재하가 그의 상의 자락을 손에 쥐었다. 우악스럽게 옷자락을 붙잡은 손끝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그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친 김석영이 떨림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
"견뎌야 해."
"흐으......."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생리적인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정작 윤재하는 제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다만 이 빌어먹을 고통을 견디기 위해, 저를 강하게 붙들어주는 사람의 체온과 심호흡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러자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하아......."
"괜찮아?"
"......네. 괜찮, 아요."
김석영의 상체에 얼굴을 묻은 윤재하가 부드러운 옷감에 눈물을 닦아냈다. 의식하지 못한 행동인 듯해서 옷감의 주인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좋아. 잘 견뎠어. 이젠 서로의 손목에 팔찌만 감싸면 끝이야."
검은 금줄에 은색의 방울을 매단 남자가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김석영이 먼저 윤재하의 손목에 금줄을 둘렀다. 가볍게 매듭을 묶자 맞닿은 매듭이 스르륵 스며들어 곧은 표면이 되었다.
"무슨 신성한 의식 같네."
"......진짜 그러네요."
장난스러운 어조에 설핏 웃은 윤재하가 동의하자, 눈을 부라린 남자가 이것은 신성한 의식이 맞으니 집중하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시끄러우니까 빨리 끝내자."
"네."
"......너네 내 말 무시하니? 집중해야 한대도?"
왜인지 모르게 손끝이 살짝 떨렸다.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편 윤재하가 김석영의 오른 손목에 금줄을 둘렀다. 매듭의 표면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두 사람의 손목에 팔찌가 나란히 자리 잡았다.
제 손목을 바라보며 감상에 잠긴 윤재하는 조그마한 은색의 종을 만져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소리가......."
"아, 그건 위험이 닥쳐올 때만 소리를 내. 평소에도 소리가 나면 거슬리잖아?"
"이럴 땐 섬세하네요. 좋아요."
"그래. 썩 미묘하긴 해도 칭찬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윤재하의 몸에서 느껴지는 결계막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린 김석영이 주방 하부 장에서 나무로 된 긴 함을 꺼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고운 향에 남자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설마......."
"대가는 확실하게. 씀씀이가 야박하면 안 된다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죠. 백화주예요. 사실 세 병 훔쳤거든요."
지난번의 두 병은 이미 다 마셨을 거 아니에요? 태연하게 묻자 남자의 표정은 황당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넌 정말, 망나니로구나."
"그 망나니 덕에 재미 보잖습니까."
"그래. 심심하진 않다."
허탈하게 웃은 남자가 허공을 갈라 백화주를 숨겨버렸다. 볼일도 끝났겠다,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던 남자가 돌연 멈추어 섰다. 그의 시선이 팔찌를 응시하던 윤재하에게 향했다. 기묘한 시선을 좇아 고개를 든 윤재하가 낯을 굳히던 찰나, 불쑥 다가온 남자가 어깨를 감쌌다.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아해야, 이 내가 충고 하나 해줄까?"
뒤에 있는 김석영은 듣지 못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남자가 속삭였다.
"됐......."
"저 망종에게 너무 마음을 주지 말렴. 분명 상처받을 테니."
휙, 윤재하를 떨쳐낸 남자가 자신을 응시하는 김석영에게 짓궂은 미소를 짓곤 재가 되어 모습을 감췄다.
"무슨 말 했어?"
남자가 사라진 빈 허공을 바라보며 눈매를 굳힌 윤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김석영이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제 기운과 윤재하의 기운이 연결된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곧장 느낄 수 있을 테다.
"윤재하."
"네."
"효능 시험해봐야지. 나가봐. 동네까지는 괜찮아."
"아......."
눈을 크게 뜬 윤재하가 제 손목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를 지켜낼 방편을 손에 넣었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형체를 찾으러 갈 수 있는 거였다. 어제 김석영과의 대화 이후 줄곧 마음에 걸리던 것을 해소할 수 있다. 형체만 찾는다면 확실해지는 것이니까.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그래. 다녀와."
손을 흔들어주는 김석영을 뒤로하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 내려가는 숲길과 넓은 마당 그리고 저택 안 어디에도 형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외의 기운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구나.'
불안한 마음을 억누른 그는 밖을 나섰다. 형체와 함께 지나친 모든 곳을 뒤졌으나 그의 기운 한 자락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어디에 간 걸까. 정말 악귀에게 스며들기라도 한 걸까.
자꾸만 최악의 가정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생각을 환기하기 위해 걸음을 빨리한 윤재하는 혹시 모를 영가의 흔적을 찾아 헤매며 동네를 들쑤셨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잠시 고민에 빠진 그는 결국 발걸음을 뗐다. 개인마다 동네의 범위는 모호하니, 제가 살던 곳도 포함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김석영의 저택 근처는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저를 찾기 위해 밖을 나서놓고 돌아오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윤재하는 곧장 어릴 적에 살았던 동네로 향했다.
'헷갈리네.'
십 년의 세월 동안 동네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골목과 소담한 주택들이 있던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섰고, 곳곳엔 조그마한 공원도 생겨나 머물다 갈 수 있는 여유를 안겨주었다. 기억 속에 존재하던 모든 장소가 사라졌다. 아니,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 형태가 바뀐 것은 분명했다. 처음 이곳에 돌아왔을 땐 기억과는 다르게 변한 그 형태에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왜인지 오늘은 아주 조금, 씁쓸하게 다가왔다.
과거의 기억은 고통을 수반했기 때문에 부러 의식적으로 억누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결에 숨통이 트였고, 숨을 쉴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달콤해서 그대로 쭉 과거를 외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현실을 버텨내고 싶었다. 현실을 버텨내고 싶었다는 건 결국 살고 싶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홀로 살아남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는데, 사실 자신은 살기 위해서 제 기억을 억누르고 외면하면서까지 발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곁을 지켜주던 모친에게 위로를 받았다.
'죽어서도 떠나지 않고 곁에 남아준다는 건, 날 원망하는 마음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큰 것 아닐까?'
그런 혼자만의 결론에 기대어 형체에게 집중하고 형체만을 곁에 둔 채 살아온 결과가 이 모양이다. 지켜주기는커녕 도리어 위험에 빠뜨리고야 말았다.
"......빨리 찾아야 해."
이대로 억울하게 보낼 수는 없어. 서로에게 독이 되는 미련 따윈 떨쳐버리고 온전하게, 오롯하게 놓아줄 수 있어야만 해. 인사를 해야만 해. 그러니 빨리 엄마를 찾아서 확인해야 해.
그래야.......
"네 곁을 지킨 건 너의 어머니이고. 저승의 경계에서 아이를 통해 들었던 대상도 여성이지. 한번 떨어트린 것을 다시 붙잡으려고 할 정도로 미련을 가진. 소중한 물건을 가진 자가 할법한 행동이고."
"눈앞에서 사고를 겪은 아이가 제게 닥친 현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때때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볼 때도 있어. 무언가를 투영해서. 의외로 그런 경우의 사연을 많이 겪었거든, 나는."
형체가 진짜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어머! 아이고, 미안해요. 학생."
길목에서 튀어나온 중년의 여성이 미처 윤재하를 확인하지 못하고 어깨를 부딪쳤다. 당황한 목소리와 묵직한 통증 덕분에 상념에서 벗어난 윤재하가 고개를 저으며 한걸음 물러났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 어? 학생 혹시....... 재하. 그래! 너 혹시 재하 아니니?"
갑작스레 튀어나온 제 이름에 놀란 윤재하가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곳곳을 살핀 상대가 화색을 띠며 늘어진 손을 붙들었다.
"재하 맞지? 아줌마 기억하니? 저기, 시장에서 청과점 하던. 그 왜, 네 할아버지 찾는다고 자주 들렀잖아."
"......아."
치매에 걸린 조부가 집에서 뛰쳐나와 한없이 바라보던 곳이 시장의 청과점과 떡집이었다. 아마 박수 시절에 행했던 행위로 인한 것이었을 테다. 과일과 떡은 행위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요소일 테니까. 정신을 놓아버린 노인네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게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었을 텐데, 청과점의 주인은 늘 그들을 가게의 한켠으로 이끌어주곤 했다.
"아....... 기억, 기억해요."
"세상에, 처음엔 못 알아봤지 뭐야. 그 조그맣던 애가 언제 이렇게 훌쩍 커서는....... 아, 미안하다. 나이 먹으니까 주책이네. 그동안 잘 지냈니? 어떻게, 고향에 다시 돌아온 거야?"
"아, 그게......."
멋쩍게 웃으며 말을 어물거리자 붉어진 눈시울을 문지른 주인이 윤재하의 손을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떠나버리고 다신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 만나네. 밥은 잘 먹고 다니고? 아니지, 참.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가게에 가자. 아줌마가 과일 좀 챙겨줄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너 이대로 돌려보내면 내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래. 왜, 너 어릴 때 귤 좋아했잖니. 요새 귤이 참 달고 맛있어. 몇 개 챙겨줄 테니까 가지고 가.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야."
잠시 망설이던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짊어진 짐을 대신 메고 함께 시장으로 향하자, 모든 게 변한 줄만 알았던 이곳에서 달라지지 않은 것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시장은 변함이 없네요."
"그렇지? 바깥은 원체 달라져서. 나도 가끔은 깜짝깜짝 놀라. 자, 여기 앉아. 발 난로 돌려줄게."
어린 시절에 앉았던 색이 바랜 플라스틱 의자가 그대로였다. 저도 모르게 설핏 웃으며 자리에 앉자, 검은 비닐봉지에 귤과 야채 등을 가득 담은 주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그것들을 품에 안겨주었다. 당황한 윤재하가 고개를 저으며 봉지를 도로 내밀었다.
"너무 많아요."
"얘가 참. 그게 많긴 뭐가 많아? 네 그 덩치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지. 내가 청과점이 아니라 정육점을 했으면 고기라도 10kg 안겨주는 건데. 어휴."
"아니, 그래도......."
"아줌마 섭섭하게 할래? 어른이 주면 사양하는 게 아니라 냉큼 받아야지."
"아.......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잘 먹겠습니다."
"그래. 받아주고 맛있게 잘 먹어주는 게 주는 사람한텐 보람된 일이야."
코끝이 찡했는지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주인이 담요 안에 데워놓은 두유 두 병을 가지고 곁에 앉았다. 곧장 받아 들고 뻑뻑한 뚜껑을 따서 건네자 주인이 너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잘 지냈니?"
"......네. 잘 지냈어요."
"사고가 났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고?"
"아....... 네. 전 아무 이상도 없어요."
"그래. 너라도 괜찮으니 천만다행이다."
미지근한 유리병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연달아 그런 일이 생겨나서 어찌나 놀랐던지. 그래도 네 할아버지, 정신은 불안정하셨어도 몸은 정정해 보이셨는데 그렇게 하루아침에 가버리실 줄 누가 알았겠니. 연달아 일어난 네 사고도 그렇고......."
"아......."
......할아버지.
일순 느껴지는 두통에 윤재하는 입술을 짓씹었다. 잊고 있던 기억의 잔상이 떠오르려 한다.
"할아버지?"
조부가 지내는 안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 수 없는 기묘한 느낌에 어린 윤재하가 방문 앞에 다가서던 순간.
"......안 돼. 오지 마. 오면 안 돼!"
찢어질 듯 고함을 지르던 조부의 외침과 함께, 분명 무언가 일어났던 것 같은데.......
표정이 굳어지는 것에 아차한 주인이 사과를 건넸다.
"어머. 미안하다, 재하야. 내가 괜한 말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어렸던 때라 기억이 좀 가물거려서요.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가 잘 생각이 안 나서......."
제게 닥친 사고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전에 돌아가신 조부에 대한 것은 잊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의 말대로, 사고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 돌아가셨던 건 분명한데 정확히 어떠한 경위로 돌아가신 건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장례식을 치렀던 건 기억이 나지만, 사실 저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몰라요. 물어봐도 말을 안 해주셨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럴 수 있지. 어렸으니까. 너한테 말해주기 어려웠을 거야."
"혹시 아주머니는 알고 계세요?"
"그렇긴 한데......."
머뭇거리는 기색에 윤재하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젠 어린아이가 아니니까요. 알고 싶어요. 알려주세요."
"......그래, 그렇지. 너도 어느새 이렇게 다 커버렸지."
또래보다도 작고 왜소했던 아이가 고개를 한껏 젖혀야만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는 것에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고 만다. 생각해보면 윤재하의 모친도 조부도 키가 훤칠하게 큰, 고운 사람들이었다. 말간 외향과 처연한 분위기에 시선을 끄는 이들이었다. 일찍이 세상을 뜬 아이의 부친도 못지않은 미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족의 좋은 점만을 물려받은 듯한 윤재하를 새삼스럽게 살펴보며 씁쓸하게 웃은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심장마비였던 걸로 기억해."
"심장마비요?"
"그래. 원래 그 나이쯤 되면 종종 있는 일이기도 해."
"......그렇군요."
혹시 그때 고함을 치셨던 건 제 생의 끝을 예상하고 내린 결론이었을까. 손자에게 마지막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였을까. 그때의 저는 누군가의 생이 사그라드는 모습을 마주하기엔 어리고 미약했으므로.
그래. 그럴듯한 생각이다. ......하지만 왜 자꾸만 무언가가 빠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정확한 건 친척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죠."
성인이 되고 친척 집을 나선 이후로 왕래는 없었고 그들의 연락처도 모른다. 애초에 그들은 모든 사고를 모친의 탓으로 돌렸으므로. 박수무당인 아비와 그의 자식인 모친을 꺼렸고, 아버지와의 결혼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윤재하가 혼자 남겨지기 전까지, 그들과의 왕래는 전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한숨을 삼켜낸 윤재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알려주셔서요."
"이 정도로 무슨. 더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지."
"아니에요. 충분해요."
적어도 제 기억에 대해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으니.
"그나저나 요즘 어떻게 지내니. 학생이야? 아니면 일하니?"
"학생이에요. 대학생이요. 지금은 방학이라......."
죽음을 상기하는 과거의 이야기는 넣어두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묵직한 비닐봉지를 들고 몸을 일어서자 팔뚝을 토닥이는 손길이 이어졌다.
"조심히 들어가. 장 볼 일 있으면 자주 들르고."
"네. 감사합니다."
머쓱한 웃음과 함께 시장을 등졌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비닐봉지에 잔뜩 담긴 것을 확인하며 저녁거리를 구상하던 윤재하가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몸이 기억하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낯익은 도로가 보였다. 그곳이 사고가 났던 지점이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무뎌진 줄 알았는데, 아직은.......'
주먹을 쥔 손톱이 피부를 강하게 파고들었다. 조여오는 심장께의 둔통을 억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빠르게 지나치는 승용차와 건널목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집중했다. 언제까지고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두려움에 떨 순 없다. 마주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여전히 심장은 우악스럽게 요동치고 머릿속을 헤집는 두통은 식은땀을 유발하지만, 길목에 서서 버티는 시간은 늘어가고 있었다.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 분명 온전하게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불안정한 한숨을 토해낸 윤재하가 천추 같은 걸음을 떼어냈다. 그때와는 달라진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귓속에 맴도는 경적을 견뎌내면서 걸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장소가 변하고서야 윤재하는 뒤를 돌아 어렴풋이 보이는 사고 지점을 바라보았다.
"......."
직면하지 않았기에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이고, 시간이 흘렀기에 무뎌진 것이라 착각했다. 다시 이곳에 돌아오게 되고 점차 생활에 익숙해지던 어느 날. 어쩌면 제가 이곳에 돌아온 것이, 무뎌지지 말고 도망치지도 말고 잊지도 말라고 상기시켜주기 위한 이끌림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여전히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다만 조금 변한 게 있다면,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죄의 무게처럼 느껴졌던 것이 지금은 기회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온전하게 마주할 수 있기를 윤재하는 바랐고, 지금 이 순간.
김석영이 보고 싶어졌다.
안채에 다다르자 대청에 늘어져서 누워 있는 인영이 윤재하를 맞이했다. 부스스 흩어진 검은 머리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숨이 막히지도 않는 건지, 두툼한 이불에 뒤덮인 상체를 따라가다 보니 그의 길쭉한 허벅지가 보였다. 세워진 무릎에 비스듬히 얹힌 긴 다리는 일정한 리듬을 따라 움직였다.
새하얀 눈으로 감싸여 나른한 음악을 흥얼거리던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홀린 듯이 시선을 빼앗겼던 그날의 기억을 상기한 윤재하가 희미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발 안 시려요?"
"별로."
"저 다녀왔어요."
나직한 인사에 얼굴을 가린 이불을 끌어낸 김석영이 가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서 와."
"너무 늦었죠. 배고프지 않아요?"
"고픈 건 아닌데, 입이 조금 심심한 것 같긴 해."
"그래요? 잘됐다."
입이 심심한데 잘 됐다니. 평소였다면 안색이 굳어져 주방으로 달려갔을 윤재하가 해사하게 웃으며 검은 봉지를 뒤적였다. 의아한 기분이 된 김석영이 제게 건네는 무언가를 받았다.
"귤이네."
"받았어요. 후식으로 먹으려고 했는데 입이 심심하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하나만 먹어요."
눈을 깜박이며 귤을 바라보던 김석영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한테 받았는데."
"우연히 어릴 때 알던 분을 만났거든요. 청과점을 운영하시는 분이라 귤이랑 채소를 주시더라고요."
"그래?"
남한테 무언가를 받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던 윤재하인데. 의외로움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인 김석영이 귤을 반으로 쪼갰다. 상큼하고 달달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쪼개진 단면에서 껍질만을 요령 좋게 떼어낸 그가 작은 부분을 맛보았다.
"어때요?"
주방에 들어가 봉지를 정리하던 윤재하가 빼꼼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턱짓을 하니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 과육을 적당히 떼어내어 건네주자 사르르 웃은 윤재하가 받아 들었다.
"달달하네요. 맛있다."
"그러게. 맛있네."
"이거 올해 첫 귤이에요."
"나도 그래. 이게 올해의 첫 귤이야."
피식 웃은 김석영이 볼을 오물거리는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윤재하."
"네?"
"하나 더 먹을까."
네가 반쪽 먹었잖아, 하고 태연하게 대꾸하니, 동그랗게 커진 눈매가 사르르 접히고 웃음소리는 커졌다. 둘은 이내 윤재하가 봉지에서 가져온 귤을 공평하게 나누어 먹었다.
"형."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노랗게 물든 듯한 손끝을 응시하던 김석영이 고개를 돌렸다. 말을 뱉는 것만이 대답은 아니었다. 마주 닿는 시선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자 반응이었다. 이제는 조금이나마 김석영의 이런 부분에 익숙해진 윤재하가 입을 열었다.
"형은 부모님을 보낸 걸 후회한 적 없어요?"
"응. 없어."
곧장 닿아오는 시선을 향해 가볍게 웃은 김석영이 말을 이었다.
"후회의 초점이 다르거든. 부모님을 보낸 것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지만."
"......."
"보내는 과정에 대한 후회는 있지."
씁쓸한 낯이 된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갑자기 어머니를 보내는 게 후회가 될 것 같아?"
"아니요. 그렇지 않았을 때가 도리어 더한 후회가 될 거라는 걸 이제는 아니까요. 그냥......."
"그냥?"
"경험자의 과정에 빌붙어 혹시 모를 대비라도 하고 싶었나 봐요."
죄송해요. 나직하게 덧붙이는 사과에 김석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죄송할 일도 많지, 너는."
"형이 관대한 거 아닐까요."
"그런 말 살면서 처음 들어봐."
이상현이 들으면 분명 기겁할 말이었다. 우스갯소리처럼 넘기려는데 별안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의 주인이 말했다.
"그럼 나한테만 관대한 거예요?"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런 말 처음 들어본다면서요. 그럼 나한테만 관대하다는 거 아닐까요?"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건 아니고?"
웃으며 내뱉은 말에 갑작스러운 침묵이 스며들었다. 내리깐 눈매의 빽빽하고 기다란 속눈썹 한 올 한 올에 그늘진 윤재하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반쯤 가려져 있던 다갈색의 눈동자가 오롯하게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침묵처럼, 대답 또한 갑작스레 흘러나왔다.
"그런가 봐요."
"응?"
"형이 나한테만 관대한 거면 좋겠어요."
"......윤재하."
돌연 묘해진 분위기에 김석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 설마.......
"손을 잡아주는 것도, 품을 허락하는 것도."
정말 설마설마했었는데.
"혹시 너."
"입 맞추는 것도요."
"......나를 좋아해?"
물기가 어린 듯하지만 사실은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눈이 만들어낸 착시라는 걸 안다. 눈길을 잡아끄는 말간 형태가 그를 향해 맹목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색이 짙어진 눈가에 김석영은 속절없이 시선을 빼앗겼다.
"지금 형의 입에서 뱉어진 순간."
"......."
"의심할 여지도 없는 확신이 되어버렸어요."
떨리는 입술과는 달리 그 속에서 내뱉어진 말엔 떨림이라곤 없었다.
"저 어떡해요?"
"......윤재하."
김석영은 탄식하듯 윤재하의 이름을 읊조렸다. 나직하게 울렁이는 심장께를 억누르고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잠시 한숨을 삼킨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말한 것 같은데, 그거 착각일 수 있어. 누구나 보호를 받으면 안심하고 마음을 놓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거라면 더더욱 달게 느껴지겠지. 너는 착각을 하고......."
"보호자에게 입 맞추고 싶은 게 착각이에요?"
"......."
하아, 마른 손에 눈을 묻고 한숨을 토해낸 김석영이 읊조렸다.
"너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가 아니에요. 돌이켜보면, ......절대 갑자기가 아니었어요."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김석영을 만나는 게 좋았다. 그는 유일하게 저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아닌 듯 행동하지만 사실은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 역시 좋았다.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제가 바보처럼 굴 때마다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것도. 모두 다.
"그게 온전히 내게만 향하는 다정함이라고 느껴질 때마다, 여기가......."
제 심장께의 옷자락을 움켜쥔 윤재하가 말을 이었다.
"이상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형이 만지면 싫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손을 맞잡을 때면 마음이 설레요. 서늘하기만 했던 형의 손끝이 나로 인해 미지근해질 때마다......."
윤재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느꼈다. 진심이 담긴 게 아니라 상황이 만들어낸 순간이라는 걸 알지만, 사실은 그와 입을 맞추었을 때도 떨어지는 찰나가 아쉬웠다.
"웃어주는 게 좋아요. 형이 웃는 걸 보면 나도 웃게 되거든요."
제가 아닌 분신과 손을 잡는 게 싫었다. 분신 따위에게 입을 맞추고 품을 허락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형이 웃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품을 허락하고, 입을 맞춰주는 게. 전부 나만을 향했으면 좋겠어요.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 자꾸만 형이 궁금해요.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뭐예요?
"너 어쩌려고 이래."
짧게 숨을 뱉은 김석영이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사실 나도 안 믿겨요.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오늘, 아니. 요즘 진짜 이상해요."
헤쳐나가야 할 상황은 복잡하기만 하고, 자꾸만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생겨나고. 머릿속과 마음은 어지럽고 엉망진창인데, 이상하게도 도망치고 싶다거나 이대로 무너지고 싶진 않았다.
"오늘도요. 혼자 밖에 나가서 우연히 과거의 사람을 다시 만났는데,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어요. 악연이 아니어서일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기억을 건드리는 사람은 피하려고 했거든요."
복잡해진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것에 설핏 웃은 윤재하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다시 만나서 예상치도 못하게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자꾸만 뭔가가 빠진 것 같았어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선 기억을 헤집어야 하는데, 다행인 건 전과는 달리 상황을 파악하려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거겠죠."
제가 이럴 수 있는 건 분명 김석영의 영향이다. 상황을 보다 현실적으로 바라봐주고 쓴소리를 해줄 수 있는. 달콤한 불량식품이 아니라 쓴 약의 존재가 변화를 촉진한 것이다.
"......."
생각을 알 수 없는 흑안을 마주 바라보던 윤재하가 김석영의 소매를 붙들었다.
"내가 이토록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건 옆에서 지켜봐주는 형 덕분이에요. 이걸 언제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분명한 건 어떻게 해서라도 형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거예요. 어떠한 형태로든."
줄곧 모호하기만 하던 표정에서 김석영의 생각을 간파해낸 윤재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형 말대로 보호자를 향한 기대와 동경일 수도 있죠. 인정해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건 진심이에요."
"......."
"신기해요. 뭐하나 해결된 건 없고 복잡한 일만 늘어나는데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게. 갑자기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지만 어떠한 상황이었든 때에 따른 감정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스스로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예기치 못하게 마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있다. 윤재하에겐 그게 지금이었다. 불쑥 솟아난 생각과 마음을 억누르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내보이는 동안에 그 감정들은 더욱 선명해져만 갔다.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내 안에 생겨나고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 문득 그럴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 건가 봐요."
"......말 잘하네, 윤재하."
"이상해요. 이런 거. 그래도....... 기댈 수 있는 품이 되어줘 놓고 중간에 내치지는 말아요."
여전히 소매를 쥔 손끝은 떨려오고 붉어진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뻔뻔하게 말을 내뱉는 윤재하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간지럽게만 느껴졌다. 결국 김석영은 헛웃음을 토해냈고 그게 설령 즐거움의 웃음은 아니더라도 그가 웃는 게 좋았던 윤재하는 따라 웃었다.
"형."
"왜."
"좀 더 나아지면....... 그다음엔 함께 가주세요."
새빨간 귓가를 흘끔 바라보던 김석영이 대꾸했다.
"뻔뻔하긴."

তেওঁ মইDonde viven las historias. Descúbrelo aho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