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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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빗소리는 다음날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노곤한 숨을 내쉰 윤재하는 품 안에 있어야 할 온기를 찾아 손을 뻗었다. 기대와는 달리 잡히는 것이라곤 눅눅해진 시트뿐이었다. 무겁던 눈꺼풀을 단번에 올린 그가 텅 빈 이부자리를 바라보았다. 김석영이 없다.
눈을 뜨면 그가 제 곁에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인기척이라도 느껴졌다면 안심했을 텐데 요란한 빗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심장이 철렁한 윤재하가 다급하게 방을 나섰다.
"혀, ......."
요란하게 뛰쳐나온 게 민망하게도 그가 찾던 이는 가까이에 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은 김석영은 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녘의 온기가 사그라든 남자는 공허한 낯을 하고 있었다. 제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순간 그 표정은 사라졌지만 윤재하의 심장은 곤두박질쳤다.
"일어났......."
불쑥 등을 끌어안는 몸짓이 성마르다. 몸을 무너뜨릴 것처럼 기대오는 체중에 김석영의 입에서 웃음이 흘렀다. 어깨에 묻은 다갈색의 정수리에다 입을 맞추자 미약한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후회해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대답해줘요. 나랑 잔 거, ......후회해요?"
무엇이 윤재하를 불안하게 만든 걸까. 원인을 알고 싶었으나 당장의 안심에 초점을 둔 김석영이 고개를 저었다.
"후회 안 해."
"그럼, 왜......."
"왜?"
"......."
왜 그렇게 떠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윤재하는 입안에 고인 말을 꾹 눌러 삼켰다. 마음속에 피어난 불안은 꺼내지 않고 숨겨두는 게 나을 때가 있었다. 불안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 때였다.
"......아니에요. 그냥, 일어났는데 옆에 없어서."
"놀랐어? 미안."
툭 머리를 기댄 김석영이 팔을 토닥였다.
"목이 말라서 잠깐 나온 건데 빗줄기가 시원하길래."
"다음부턴 그냥 깨워줘요. 내가 가져올 테니까."
"자는데 왜 깨워."
"깨워도 괜찮아요. 내가 다 해줄게요."
몸을 꽉 끌어안은 윤재하가 읊조렸다.
"전부 다 해줄게요."
"......."
떨리는 목소리에 마른 숨을 삼킨 김석영이 고개를 돌렸다. 어깨에 묻은 낯을 더 깊숙이 감춰버린 윤재하는 제 표정을 숨기고 싶은 것 같았다. 낮게 침잠된 눈으로 살랑이는 머리칼을 바라보던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 * *
전부 다 해주겠다던 윤재하는 그날, 호되게 앓아눕고 말았다. 외투도 없이 거리에 붙박여 있던 탓이기도 했고 지나치게 감정을 소모한 탓이기도 했다. 그 상태로 몸까지 섞었으니 체력이 바닥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열에 들떠 아픈 윤재하는 예민했다.
'안 아파요. 병원에 안 가도 돼요'라며 고집을 부리길래 단호하게 쓴소리를 했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렸고, 서러운 숨을 들썩이며 제 얼굴을 가렸다. 우는 모습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새삼스럽게 말이다.
김석영은 기어코 윤재하를 병원으로 이끌어 수액을 맞게 했다. 거칠었던 호흡이 잠잠해지고 지친 잠에 빠져든 윤재하는 한결 나아진 낯으로 눈을 떴다. 그 모든 과정이 짧게만 느껴진 건 김석영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밤 되니까 또 열 오르네."
체온계를 확인한 김석영이 이마에 손등을 맞댔다. 서늘한 체온이 달가웠던 윤재하는 손을 끌어당겨 얼굴을 대어왔다.
"이제 미지근해진 것 같은데."
"그럼 다른 손......."
열이 옮은 손은 거두고 다른 손을 내밀자 폭삭 얼굴을 맞댄다. 딱딱한 손보단 폭신한 물수건이 나을 텐데 윤재하는 굳이 그의 손을 찾았다. 군말 없이 제 손을 양보한 김석영은 따끈한 피부를 원 없이 매만졌다. 눈길은 자연스레 얼굴을 이루는 요소로 향했고, 한참 동안 멈춰서 바라본 건 건조해진 입술이었다. 촉촉하던 입술이 바싹 메마른 게 이토록 신경 쓰일 일인가 싶다.
"목마르지 않아?"
"......음, 조금요."
"물이랑 이온 음료 있어."
"......이온 음료."
피식 웃으며 얼굴을 쓰다듬은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분부대로 이온 음료를 챙기는 사이 식탁 위의 립밤이 눈에 들어왔다. 컵과 함께 립밤을 챙기고 방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내리 문만 바라보고 있던 다갈색의 눈동자와 마주한 그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천천히 마셔."
비척비척 일어난 상체를 몸에 기대게 하고 컵을 건넸다. 시원스레 음료를 넘긴 윤재하는 해사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속삭였다.
"이 정도 병간호는 할 만하네."
"......그럼 종종 아플래요."
이토록 다정한 병간호를 받을 수 있다면 아픔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김석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돼. 아프지 마."
"왜요? 병간호해주기 싫어졌어요?"
"할 만하다고 했지, 병간호가 좋다고는 안 했잖아?"
그러니까 웬만하면 아프지 말라고 덧붙인다. 그게 김석영식의 걱정이란 걸 이제는 안다. 병간호를 해야 한다는 건 결국 아픔이 전제되는 것이니까. 윤재하 역시 김석영이 아픈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싫었다.
"형도요. 아프지 마요."
"그래. 그러지 뭐."
그게 뭐가 어렵냐는 듯, 김석영이 대수롭잖은 투로 대꾸했다. 가볍기 그지없는 대답이었으나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다. 아플 거라는 말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그럼 나도 안 아플게요."
"그래. 꼭 그러도록 해."
달가운 말이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매단 김석영이 윤재하를 눕혀주었다. 살짝 물기가 맺힌 입술을 살살 쓰다듬은 그는 챙겨 온 립밤을 발라주었다. 바싹 마른 주름을 펴버릴 기세로 꼼꼼히도 바른다. 심혈을 기울이는 김석영을 말릴 수 없었던 윤재하는 가만히 입술을 내어주었다.
'나보단 형이 발라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기름칠이라도 한 것 같은 표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석영이 불쑥 제 입술을 포갰다.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윤재하의 숨이 멎었다. 꾹, 맞붙은 입술이 비벼지는 감촉이 선연하다.
나른한 감각에 잠겨 굳게 다물린 입을 벌리려던 순간, 입술이 물러났다. 키스로 이어지지 못한 입맞춤에 허망함을 느낀 윤재하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미 새의 입에 물린 먹이를 쫓는 아기 새 같다고, 김석영은 생각했다. 장난기가 돋아 고개를 뒤로 쭉 빼자 상체를 일으키면서까지 낯을 들이댔다. 입술을 찾아 돌진하는 행동이 귀엽고도 우스워서 결국은 화답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윤재하는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김석영은 체온계를 확인하고서도 굳이 이마를 짚어보았는데, 그게 어찌나 마음을 간질거리게 했는지 당사자는 모를 것이다.
"열 내렸네."
"......아직 머리가 무거운데."
"그래? 이상하네."
기계가 잘못됐나 싶어 제 체온을 재본 김석영은 곧장 기재된 숫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찰싹 달라붙어 체온을 확인한 윤재하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기계는 멀쩡한 것 같은데."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바람이나 쐬러 갈까 했는데. 아직 아프다니 하는 수 없지."
아쉬운 어조로 이어진 대꾸에 눈을 키운 윤재하가 입을 벌렸다.
"바람이요?"
"모처럼 날이 좋길래.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기도 해서 콧바람이나 쐴까 했지."
"......혼자서요?"
얼빠진 질문에 가늘어진 시선이 꽂혔다. 그 시선이 내포한 의미를 알아챈 윤재하가 황급히 손을 잡아끌었다.
"나 안 아파요."
"그새 머리가 가벼워졌나. 신기하네."
"네. 완전 가벼워요. 하나도 안 무거워요."
"그래?"
김석영이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붙잡은 손에 힘을 준 윤재하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
"나갈래?"
마음을 붕 뜨게 하는 한마디였다.
"차가 있는 줄 몰랐어요."
"모를만하지. 거의 이상현이 운전 연습한다고 몰고 다녀서."
쓸 일 있으니 차를 가지고 오라고 말하자, 이상현은 대여인의 신분을 상실했는지 깨끗하게 쓰고 돌려달라 말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면허는 땄어?"
안전띠를 매며 내부를 구경하던 윤재하가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 네. 따긴 땄는데 장롱면허에요. 운전해볼 기회가 없어서."
"그럼 돌아올 때 운전해봐. 옆에서 봐줄 테니까."
"정말요?"
"네. 정말요."
피식 웃은 김석영이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여유롭게 운전대를 잡는 모습이 심장을 뛰게 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과 이상현의 취향인 듯한 시끄러운 음악은 설레는 마음을 고조시켰다.
창밖을 바라보며 연신 미소 짓는 윤재하는 김석영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짓게 했다. 혹시 답답할까 싶어 문을 내려주니, 바람을 맞는 낯이 해사하게 흐드러진다. 근교로 빠지면서 바다가 보일 땐 눈이 반짝 빛나는 것만 같았다.
뱃터에 다다르자 선착장이 보였다. 인근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오자 바다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제법 바람이 세서, 미리 챙겨 온 목도리를 윤재하의 목에 꼼꼼히 둘러준 김석영이 손을 잡았다. 귓가가 붉게 달아오른 윤재하는 설핏 웃으며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카페에 들러 따뜻한 음료를 한 잔씩 쥐고 산책길을 걸었다. 맞잡은 손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으나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석영은 보란 듯이 힘을 주었고, 단단하게 얽힌 손을 앞뒤로 흔든 건 윤재하의 몫이었다.
"엄마. 저 오빠들 데이트하나 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보지 마."
아이의 순수함은 직설적인 면이 있어 어른을 당황시키곤 한다. 미소를 띤 김석영이 대놓고 시선을 주자 화들짝 놀란 부모가 아이의 손을 이끌고 자리를 피했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도망갈 것까진 없는데. 그치?"
뻣뻣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윤재하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음이 조금 쓰라렸다. 저야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에 익숙하지만, 김석영은 아닐 텐데. 제가 아니었다면 그는 호기심 어린 시선과 부정의 시선 따위를 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리 생각하니 덜컥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손안에 쥐어진 온기를 떼어낼 맘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
"틀린 말도 아니고."
김석영의 말이 무거운 마음을 깨부쉈다.
"좋네. 데이트는 데이트라는 게. 남들도 그렇게 보인다는 거잖아."
깨부순 마음의 틈으로 온유한 미풍이 부드럽게 밀려왔다. 귀를 파고든 음색과 문장을 곱씹을수록 가슴을 휘젓는 미풍의 온기가 거세졌다. 감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무수한 감정의 형상들이 북받쳐 오르고, 목울대를 간질거렸다.
"윤재하."
"......네."
"나를 변화시킬 수조차 없는 것들에게 휘둘리기엔, 이 순간이 너무 아깝잖아."
목멘 목소리를 마주한 김석영이 느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
그를 따라 사르르 웃고만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 말이 맞아요."
* * *
"하고 싶은 거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석영이 불쑥 물었다. 점점 운전의 감을 익힌 윤재하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하고 싶은 거요?"
"응. 해보고 싶었던 거라던가."
"음, 글쎄요.......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좀 어렵네요."
"그럼 해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았던 건."
"해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았던 것......."
문장을 되뇌어본 윤재하가 생각에 잠겼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수학여행지가 제주도였는데 안 갔던 거?"
"왜 안 갔는데?"
"음, 그냥요. 여러모로 안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요."
"그럼 남들 수학여행 갈 때 넌 뭐 했는데?"
"학교에서 자습했죠, 뭐."
에어컨 바람을 쐬며 시원하게 공부할 수 있었으니 불만은 없었다. 다만.
"근데 사실 수학여행 자체가 아쉬웠다기보단 제주도가 아쉬운 거라고 해야 하나. 제주 바다가 예쁘다잖아요."
"그렇지."
"이제 나도 어엿한 성인이고, 제주도 정도야 시간을 내서라도 갈 수 있다는 거 아는데.......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여겨졌어요. 내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할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 느꼈던 거죠. 그런데."
설핏 미소 지은 윤재하가 흘끔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오늘 바다를 보니까 너무 예쁜 거예요. 제주도 바다는 사진으로 본 게 다지만, 감히 오늘 본 바다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
"그래서 불쑥 제주도도 가고 싶어졌어요. 제주도의 바다가 아름다울지, 오늘 본 바다가 더 아름다울지 궁금해졌거든요. 아, 말하고 보니 하고 싶은 게 생긴 거네요?"
"그래. 그렇네."
피식 웃은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빨간불에 멈춰서 고개를 돌린 윤재하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오늘도 형이랑 함께 봤으니까 제주도의 바다도 형이랑 함께 보고 싶어요."
"......."
"나중에 꼭 같이 가요."
사르르 웃는 낯에서 설렘이 묻어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선이 붙들린 김석영이 입술을 달싹인 순간 신호가 바뀌었다. 전방을 주시한 윤재하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 * *
하고 싶은 게 있냐던 그날의 질문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상적인 경험이나 좋은 정보 따위에 무지해서인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문득 타인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남들은 어떤 것을 바라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직접 물어볼 친구는 없었으나 인터넷이 존재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버킷리스트라."
누군가가 적어놓은 버킷리스트는 꽤 흥미로웠다. 그로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종종 있었으나,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에 가기. 음, 좋아하는 가수......."
음악을 즐겨듣는 편이 아니어서인지 딱히 떠오르는 대상이 없었다. 하지만 김석영은 평소에도 음악을 자주 듣는 편이니 좋아하는 가수가 있지 않을까? 만약 그에게라도 보고 싶은 가수가 존재한다면 함께 가보고 싶다. 분명 즐거울 테지.
막막하게만 느껴졌을 땐 언제고. 김석영과 함께한다고 생각하자 수용의 범위가 넓어졌다. 터무니없어 보였던 것이 그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면 즐거운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만면에 미소를 지은 윤재하는 제가 웃는 줄도 모르고 상상을 이어갔다. 즐거운 상상을 깨부순 건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뭐가 윤재하의 기분을 고조시켰을까."
지나치게 몰두한 게 문제였다. 등 뒤로 어른거리는 인기척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윤재하는 불쑥 귓전에서 속삭인 음성에 몸을 들썩였다. 파드득 떨리는 어깨를 감싼 김석영이 단단하게 붙들었다. 어째 놀란 건 이쪽인데 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경기를 일으키네?"
"혀, 형! 놀랐잖아요......!"
은은한 원망을 터뜨린 윤재하가 빠르게 핸드폰을 뒤집었다. 본의 아니게 그 수상한 손놀림을 정면으로 확인한 김석영이 묘한 낯으로 물었다.
"뭘 보고 있었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식탁 위에 몸을 걸친 김석영이 슬금슬금 두 손가락을 움직였다. 핸드폰에 가까워지는 걸 확인한 윤재하가 황급히 가로채자 불퉁하게 혀를 찬다.
"뭐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네."
"......이게 그렇게 궁금해요?"
"응. 내 눈앞에서 뭔가를 대놓고 숨긴 건 처음이라 그런가. 뭘 보고 그렇게 웃는 건지도 궁금하고."
"......진짜 별거 아닌데."
머뭇거리던 윤재하는 결국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고개를 기울여 화면을 바라본 김석영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깃들었다.
"버킷리스트?"
"......하고 싶은 거 없냐고 물었잖아요.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어서 검색해보니 이런 게 있더라고요."
"음. 재밌어 보이는 게 많네. 그럼 이 중에 뭐가 널 웃게 했지?"
"뭐 하나를 보고 웃은 게 아니라......."
하아.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린 윤재하가 부쩍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그냥....... 형이랑 함께 해본다고 생각하니 좋아서. ......그래서 웃었어요."
수줍게 읊조린 목소리가 김석영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일순간 말문이 막혀왔다. 마른 입술을 뻐끔거린 그는 웃는 듯, 아닌 듯한 미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형?"
어긋난 시선에서 더럭 불안을 느낀 윤재하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김석영이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제일 하고 싶었던 건 뭐야."
"......아, 뭐가 제일이라기보단, 그냥 다양하게......."
"그래? 그럼 곧바로 할 수 있는 것도 있나?"
"곧바로, 할 수 있는 거요?"
"응. 바로 할 수 있는 건 하면 되잖아. 어디 한번 볼까."
싱긋 웃은 김석영은 리스트를 훑어 내려갔다. 그를 바라보던 윤재하는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혹시 함께한다는 상상이 부담을 주었던 걸까. 생각해보면 김석영의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상상한 것이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할 일은 아니었는데. 알고는 있는데.......
"......."
기이하리만치 불안이 엄습했다. 찰나에 지나간 그 표정이 자꾸만 눈앞을 어른거렸다. 그저 잠시 당황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지금은 이렇게 직접 찾아봐 주고 있지 않나. 그런데 왜 이렇게.
"이건 어때? 집에서 직접 만든 음식으로 파티하기. 여태까지 네가 요리를 맡았으니, 이번엔 내가 직접, ......왜 그래?"
불안한 걸까.
"윤재하. 왜 그래."
걱정이 스민 어조와 부드럽게 뺨을 감싸는 손길. 이 모든 것에 애정이 아닌 것은 없는데. 별안간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형."
확인받고 싶어진다.
"좋아해요."
미약한 목소리가 실어 온 고백은 어딘가 애달픈 구석이 있었다. 뜬금없게 느껴지는 문장이니만큼, 윤재하의 내면에서 어떤 마음의 파고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대체로 그러한 움직임은 타인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 테다. 김석영은 그것이 저로 인한 것임을 깨달았다.
평연한 모습을 가장하려 하지만 불안은 쉬이 감춰지지 않았다. 떨리는 입술을 바라보다 살포시 입을 맞춘 김석영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도 그래."
너를 좋아하고 있어. 속삭이는 음성을 들이마신 윤재하는 서늘한 체온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애써 불안을 삼켜버렸다.
* * *
문을 열기 무섭게 내부의 훈기가 끼쳤다. 적당히 시끄러운 음악으로 가득 찬 프랜차이즈 카페 안은 인파로 가득했다. 겨울바람보다 매섭다는 꽃샘추위를 피하기 위한 인파였다. 분주하게 눈을 움직이던 윤재하가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인영을 확인했다.
매끈한 테의 안경을 쓰고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남자는 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럴듯한 껍데기 안에 감춰진 기운을 확인한 윤재하는 남자가 제가 찾던 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아, 왔니? 날이 춥지?"
"......네."
사람 좋게 웃어 보인 남자, 도깨비가 제 맞은편을 가리켰다. 제대로 된 인두겁을 뒤집어쓴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매력적이었다. 저를 놀리려고 일부러 외향을 바꾼 거라던 김석영의 말이 사실이었다.
"음료 시키고 와."
검은 모직 코트 안에서 지갑을 꺼낸 남자가 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흘끔 바라보기만 할 뿐, 받아들이지 않은 윤재하는 외투를 벗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까칠하긴.'
머쓱하게 손을 내린 남자가 고집 센 청년을 감상했다. 언제 보아도 시선을 잡아끄는 용모다. 이러니 그 메마른 김석영도 저 아이에게 느슨한 거겠지.
달달한 핫초코를 후륵 마신 남자가 돌아오는 윤재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정확히는 트레이에 올려진 것에.
"커피도 마실 줄 아나 보지?"
"장난해요?"
진심으로 짜증이 난 어조였다. 속으로 폭소를 삼킨 남자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 쓰디쓴 커피에도 끄떡없는 우리 어르신께서 어쩐 일로 날 호출했을까."
안채가 아닌 김석영이 없는 곳에서 만나자는 것만으로 대충 감을 잡았지만, 남자는 매끈하게 웃으며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뜨거운 머그잔을 매만지며 새하얀 김을 바라보던 윤재하가 읊조렸다.
"지난번에, ......형을 너무 믿지 말라고 했었죠. 분명 상처받게 될 거라고."
"그래. 그랬었지."
"무슨 의미예요."
"말 그대론데. 상처받게 될 테니까 믿지 말라는 거지."
"그러니까 왜, 내가 상처받는다는 전제가 주어지는 건지를 묻는 거예요."
말간 낯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대답을 요구하는 끈질긴 시선이 모든 움직임을 쫓았다. 가는 눈으로 피식 웃은 그가 물었다.
"넌 김석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남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윤재하가 입을 열었다.
"그게 중요해요?"
"그럼. 중요하지.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따라 설명의 길이가 달라질 테니까."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 눈을 내리깔고 머그잔을 바라보던 윤재하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
"......눈에 콩깍지는 빼고 말해야지."
"콩깍지 아니에요."
미간을 찌푸리며 부정하는 것에 핫초코를 들이켠 남자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가문의 업(業)이라는 것 때문에 이승의 사연을 들고 저승을 오가는 것.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데 제약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 하지만 이 모든 게 그 사람의 기운을 갉아먹는 짓이라는 것."
"그리고?"
남자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처럼 물었다가 윤재하의 표정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일 중요한 부분만 빠졌네."
"그게 뭐예요."
"그들이 지닌 업(業)에 대한 부분이지."
"......."
확실히 가업에 대해선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애초에 김석영이 말하지 않는 것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가 먼저 묻는 건 무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의 입에서 나온 순간, 선을 넘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부정의 입을 닫아버리고 남자의 입에서 나올 말만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 그를 줄곧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주 먼 옛날.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에서 무언가가 생겨났다."
[아주 먼 옛날,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곳에서 태어난 존재가 있었습니다.]
"......."
일순, 익숙하게 느껴지는 문장에 숨을 멈춘 윤재하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탓에 외롭게 떠돌던 그것은, 도리어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특성으로 어디든 갈 수 있었지. 그러다 불쑥 이승을 떠돈 그것이 사고를 쳐버리게 돼. 인간의 탈을 쓴 거야."
["육신은 따뜻하단다. 나의 혼이 육신을 떠나거든 네가 나의 육신으로 들어가렴."]
"하지만 인간에겐 명(命)이 주어지지. 이승에서의 명이 끊긴 육신은 결국 자연의 순리를 따르게 되는 법. 미천한 탓에 순리를 알지 못했던 그것은 죽은 인간의 탈을 쓰고 이승을 떠돌았어. 그 탈이 썩어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에구머니나!"]
얼굴이 썩어가던 여인을 확인한 아낙이 충격을 못 이기고 졸도하였습니다. 아낙의 비명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오자 하나같이 경기를 일으키며 뒤로 넘어갔습니다. 개중 유일하게 정신을 붙든 한 아이가 부리나케 도망가며 외쳤습니다.
["시체다! 시체가 움직인다!"]
"움직이는 시체가 되어 이승을 어지럽힌 죄로 그것은 저승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 하지만 그 존재가 퍽 기이했던 탓에 흥미를 느낀 저승의 왕이 기회를 주게 돼.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특성을 살려 두 곳을 이어줄 수 있는 역할을 준 것이지. 처음엔 차사의 일을 돕는 심부름꾼 정도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것들이 그에게 부탁하기 시작해.
이승의 가족에게 내 안부를 전해 다오.
저승의 가족에게 내 안부를 전해 다오.
그렇게 서로 다른 세상의 안부를 전해주던 그것으로 인해 인간과 망자의 염원(念願)과 한(恨)이 해소되는 걸 알게 된 왕이 새로운 역할을 주게 된다. 1,000명분의 염원을 해소하는 것. 이것이 시초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야."
그런데 진짜 중요한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이승을 오가며 인간에게 흥미가 생긴 그것이 인간의 육신을 바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난 제 행위를 반복할 수 없었던 그것은 왕에게 부탁했다.
이승에서의 육신을 달라고.
왕이 직접 업(業)을 내린 죄수이긴 하나, 그것의 순수함과 노력을 기특하게 여긴 왕이 육신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육신은 그리 단단하지 못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껍데기에 불과한 만큼 금방 썩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꾸만 썩어버리는 육신 때문에 슬퍼하던 그것을 가엾게 여긴 왕이 방법을 제시했다. 인간의 한과 염원을 풀어주는 대가로 수명(壽命)을 받아내는 것. 한과 염원의 무게에 따라 받아낼 수 있는 한계치를 지정하고 말이다.
그렇게 그것은 조금씩 육신의 명(命)을 늘려갔고, 진정으로 따스한 육신을 얻게 되어 이승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
남자의 검은 눈이 굳어버린 상대를 훑었다. 찬란한 생기로 가득하던 말간 낯의 청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숨 쉬는 방법조차 잊은 것처럼 목 졸린 낯을 한 남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 윤재하를 향해 남자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게 바로 김석영의 선조란다."
창백하게 질린 낯을 마주하며 주저 없이 말을 뱉었다.
"이 이야기에서 네가 깨달아야 할 부분은 뭘까, 아해야."
사고의 회로가 마비된 윤재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불안정한 박동이 거세지면서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으나 이어지는 남자의 말만큼은 지독한 형태로 고막에 달라붙었다.
"그건 바로 김석영의 수명이 아주 짧다는 거지."
「저건 사람 명줄 잡아먹는 악귀니까.」
"하지만 난 아니야. 대가로 수명을 받아본 적 없어. 네 수명을 빼앗을 마음도 없고."
"......."
"남의 수명을 깎아 내 목숨줄을 연장하는 삶이라니. 끔찍하잖아."
"그러게 내가 말했잖니."
저주에서 비롯된 존재가 저주와 같은 말을 이었다.
"상처받을 거라고."

তেওঁ মইDonde viven las historias. Descúbrelo aho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