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에 돌아와서도 형체는 쉽사리 날 선 기운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눈앞이 아득해진 윤재하는 멍하니 형체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태 어딜 갔었어?"
「널 찾으러 다녔어.」
하아, 한숨의 끝이 떨려왔다. 마른 손에 얼굴을 묻은 윤재하가 중얼거렸다.
"죽은 줄 알았다는 건 뭔데?"
「존재의 기운 자체가 세상에서 사라졌었어. 죽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 혼이라도 찾기 위해 돌아다녔어.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널 그렇게 만든 자를 죽이려고 한 거야.」
"그건 나 때문이었어. 내가 침범한 일이었다고. 그 사람 잘못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날 해친 적 없어!"
고개를 든 윤재하가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낯을 일그러뜨린 형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했잖아. 그건 사람 명줄 잡아먹는 존재야. 명을 대가로 일하는 간악한 족속들이라고! 지금 당장은 널 아껴주는 척하면서 네 목숨을 노리고 있는 거야!」
"도대체 그건, 명을 잡아먹는다느니, 그런 말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존재지. 부정하지 않는 거 너도 봤잖아.」
일순 윤재하의 숨이 멎었다. 굳은 낯 위로 맴도는 동요에 화색을 띤 형체가 속살거리며 말했다.
「떠나자, 재하야. 떠나야 해.」
"......떠나자고?"
넋두리하듯 중얼거리는 것에 형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자가 널 위협하기 전에 떠나자. 그러면 되잖아.」
"아니, 아니야......."
「뭐?」
희게 질린 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대로 떠나는 건 의미가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무언가가 내 몸을 빼앗았어. 내 몸을 노리고 있어. 내 곁에 있으면 엄마도 위험해져."
침묵이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내려앉았다. 스산하기까지 한 정적을 깨트린 건 웃음기가 어린 형체의 목소리였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지? 그치, 재하야?」
"아니,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그럼?」
"그 악귀는 다른 영가들을 잡아먹으면서 힘을 키우고 있어요. 내 곁에 있다가 엄마까지 잘못되면....... 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엄마도 언제까지 내 곁에 있을 순 없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재하야. 악귀라니. 악귀가 왜 널 노려? 그리고 내가 왜 네 곁에 있을 수 없는데? 나는 언제까지고 재하 곁에.......」
"아니."
윤재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함께 있을 수 없어."
「왜?」
"살아가는 세상이 다르니까. 서로의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결국 서로에게 독이 될 거야. 늘 불안에 떨게 되겠지. 엄마가 한순간에 사라지진 않을지, 악귀에게 흡수되진 않을지....... 그렇게 불안에 휩싸여서 끝내 엄마를 원망하게 될지도 몰라."
왜 죽어버렸냐고. 왜 날 두고 떠났냐고.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냐고.
"나, 그러기 싫어요. 엄마가 나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도, 괴로워지는 것도 다. 이젠 서로를 놓아줘야 할 때야."
「......놓는다고? 날 버리겠다는 거야?」
"버리는 게 아니......!"
「아니! 넌 날 버리는 거야. 그게 날 버리는 거라고! 날 잊으려는 거잖아!」
악에 받친 고함이 저택 안을 메운 순간, 천장의 전등이 와장창 깨졌다. 빛을 잃고 어두워진 사위에 유리가 바닥 위를 나뒹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버린 윤재하는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 형체를 바라보았다. 피를 흘리는 것처럼 두 눈에 검은 액체를 흘린 형체가 뼈를 짓씹는 것처럼 읊조렸다.
「그자 때문이야. 그자가 널 망쳐놨어. 내 아이를, 착한 내 아이를 망쳐서 날 버리게 했어......!」
"......엄마."
「......그래, 그럼 차라리 나랑 같이 가자. 그자한테 죽임을 당하게 둘 순 없으니, 차라리 내가.......」
굳어버린 윤재하의 코앞에 다가온 형체가 손을 뻗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한 한기가 발치부터 엄습해왔다. 창백해진 얼굴을 쓰다듬던 손이 심장께를 향했다.
가슴을 가르는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스며드는 한기에 숨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하며 맞춰 온 상성이 형체의 침입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맥없이 바라보던 윤재하가 입을 열었다. 엄마.......
"엄마의 이름이 뭐였지?"
힘없이 읊조리는 음성에 형체의 움직임이 멎었다. 굳어버린 그를 응시하던 다갈색의 눈이 흔들렸다. 이런 질문, ......정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떨리는 손길로 제 심장께를 비집은 망자의 손을 붙든 윤재하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는?"
「.......」
"왜, ......왜 말을 못해요. 기억이 안 나서 그래?"
「나, 나는.......」
"계속 생각해봤는데."
「......재, 재하야.......」
"나는 요거트 같은 거 안 좋아했어."
당신은 지금.
"나에게서 누구를 보는 거야?"
「너도 이거 되게 좋아했었는데.」
어느 날 유제품 판매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형체가 했던 말이다. 덩달아 요거트의 종류를 바라보던 윤재하는 생각했다.
'내가 이런 걸 좋아했나?'
문득 의아해졌지만 어릴 때의 기억은 저보다 모친인 그가 더 잘 알 것이므로. 윤재하는 수긍하며 넘어갔다. 하지만 제가 먹기를 바라는 듯해서 구매한 요거트는 끝내 손 한번 대지 않은 채 저택의 냉장고에 자리하고 있었다.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냉장고 속에 있는 요거트가 눈에 띄었지만 단 한 번도 손이 간 적은 없었다. 좋아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밖에도 이상한 점이 많았다.
"내가 크긴 했나 봐."
문득, 인식하지 못했던 시선의 높낮이에 새삼스러움을 느꼈던 어느 날.
「그렇긴 하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그냥. 엄마가 참 작게 느껴져서."
눈에 띌 정도로 키가 컸던 모친과 조부였는데. 아무리 제가 자랐어도 기억 속의 모친보다 현저하게 작은 키를 단순하게 넘겼던 그 순간의 기억이 이제 와 뇌리에 박혔다.
그리고.
"꼼꼼하게 씻고 왔어?"
어딘가 익숙했던 목소리와 뒷모습.
"나 이제 요거트 먹어도 되지? 혼자 목욕탕 잘 갔다 왔잖아."
"하나만이야. 저번처럼 엄마 몰래 네 통 다 먹고 토하면 혼날 줄 알아."
저승의 경계에 남아 엄마를 기다린다던 아이. 아이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사람.
"......정말 엄마가 아니었던 거야."
입 밖으로 진실을 내뱉은 순간,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몸에 스며들던 손을 단숨에 빼내자 일렁이는 영기가 형체의 진입을 가로막았다. 몸 안에 채워둔 보호막에도 미치지 못한 형체의 손은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망연하게 굳어버린 형체는 침잠된 윤재하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겁에 질린 듯한 낯이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나는, 나는.......」
"왜 내 곁을 지켰어요? 왜......."
내가 당신의 아이가 아니란 걸 당신도 몰랐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형체는 깨달음을 얻은 자의 얼굴이 아닌 거짓말이 들킨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왜일까. 왜 당신은 알고서도 내 곁을 지켰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가족을 잃고 이성을 잃은 아이가 붙드는 손을 왜 뿌리치지 않았나. 왜 그렇게 애틋하게 내 옆에 있어 주었나. 내가 당신을 엄마라고 착각했듯이, 당신 역시 잃어버린 아이가 나와 닮았던 걸까.
「예쁜 도령, 죽었어?」
......그 아이가 나와 닮았던가.
"내 몸을 빼앗으려고 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 의도로 내 옆을 있던 게 아니잖아요. 말 좀 해봐요. 다 들어줄 테니까......!"
「나는, 나는 그냥.......」
"엄마......!"
머리로는 더 이상 형체가 엄마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이성을 배반한 입은 그를 엄마라고 불렀다. 화들짝 놀란 형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멀어지는 뒷걸음질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가지 마요."
멀어진 거리만큼 성큼 다가선 윤재하가 읊조렸다. 그 말은 잠시나마 족쇄가 되어 형체의 움직임을 붙들었으나 금세 삭아 바스러졌다. 두려움에 떠는 듯한 형체는 뒤를 돌아 달아났다. 황급히 뒤따랐으나 인간의 속도로는 한계가 있었다. 달아나는 망자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형체를 놓쳐버린 윤재하는 형체의 기운만이 남아 있는 거리에 망연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익숙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상체 위로 따스한 온기가 감싸왔다. 점퍼의 묵직함과 옷감에 밴 향은 줄곧 참고 있던 마음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깊숙이 밀어두었던 울분이 목울대를 어른거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짓눌러 참아 보려 했지만 흐트러진 호흡에서 새어나오는 숨결에 물기가 가득했다.
앞으로 다가와 점퍼를 여며준 김석영이 빨갛게 부르튼 손을 붙들었다. 추위에 질린 손은 그의 미약한 온기에도 스르륵 풀려버렸다. 아무런 말 없이 손을 단단하게 잡아준 김석영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윤재하는 아스팔트 위로 점점이 떨어지는 눈물을 바라보며 걸음을 떼었다.
* * *
안채로 돌아와 윤재하를 방으로 이끈 김석영은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어깨에 걸친 점퍼를 벗겨주고 이부자리 위로 윤재하를 인도했을 뿐이었다. 머리칼에 가려진 턱 끝에 물기가 맺힌 걸 확인했을 땐 손을 뻗었다가도 차마 만지지 못하고 거두었다.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몸을 일으킨 김석영은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와 윤재하의 손을 닦아주었다. 서툴지만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주던 손길은 불쑥 튀어나온 읊조림에 멈춰버렸다.
"......형 말대로예요."
"......."
"엄마가 아니었어요."
멈추었던 손길이 움직였다. 식어가던 물수건의 부분 중에서 가장 따뜻한 곳을 찾아낸 그는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윤재하의 턱 끝에 맺혀 있던 눈물이 김석영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온기가 서린 물방울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궤적을 남겼다.
"......사실,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어요. 정말, 엄마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든 윤재하가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부정하고 싶어서 외면하다가도, 불쑥 찾아오는 불안감이 현실을 알려줘서....... 차라리 최악을 상상했어요. 미리 준비해두면 좀 덜 아프지 않을까 싶어서."
악귀에게 먹혀버린 엄마. 혹은 악귀 그 자체인 엄마. 혹은 엄마인 줄 알았던 가짜.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본 순간....... 줄곧 함께 해왔던 그 얼굴을 본 순간, 아무렴 어떨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인데....... 내가 엄마라고 믿어왔던 존재인데, 저렇게 날 찾아와줬는데."
"......."
"차마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었어요. 그냥 믿고 싶었어요. 그런데 결국은......."
아니었어요. 숨결과 함께 흘러나온 뒷말은 희미하게 흩어져갔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잔상이 남은 물기를 훑은 김석영이 힘없이 내려앉은 눈꺼풀 위로 입술을 묻었다. 거친 입술이 살포시 스치고 가는 감각에 눈을 뜬 윤재하가 말했다.
"아까 상처 줘서 미안해요."
"......."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형이 그 사람을 함부로 해칠 리가 없는데....... 괜히 나 혼자 겁이 나서......."
정말 해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단번에 소멸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날뛰는 형체를 제압하기만 했을 뿐, 결국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석영을 할퀸 건 형체였다. 날이 설 만큼 동요했지만 윤재하는 그가 제 기운을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저 날뛰는 형체를 붙들려는 것뿐이었을 텐데. 그의 행동을 곡해하고 막아선 제게, 김석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김석영의 검은 눈이 희미하게 떨려왔다. 아무런 말을 잇지 못하는 그는 무언가를 꾹 참아내는 것처럼 보였다. 윤재하는 담담하던 얼굴에 생긴 균열을 두 눈에 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언제나 건조하고 담담한 줄만 알았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있단 걸 알게 된 것이. 그저 김석영과 함께한 후로 제 시선은 늘 그에게 향했고, 바라보는 매 순간 그의 표정과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순간은 쌓여갔고, 쌓여간 순간은 시간이 되었다. 그 시간은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물기 어린 시야 위로 번진 김석영의 표정은 윤재하의 뇌리와 가슴에 박혀,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통증을 유발했다. 그가 저로 인해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기를, 제가 새로운 감정의 형태를 선사할 수 있기를. 매일같이 바랐지만 그게 상처이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헤집어진 상황과 감정 앞에서 무력하게 서 있던 그 순간, 코끝에 스치는 향기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동시에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하염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사실은 안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김석영은 알고 있을까. 저를 놓지 않고 찾아와 미약한 온기를 나눠주는 그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형한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어요."
애달픈 감정은 모조리 눈가에 몰린 듯하다. 마른 줄만 알았던 눈에 또다시 물기가 차올랐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윤재하의 눈가를 어루만진 김석영이 어설프게 웃었다. 그러다 잠시 마른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마침내 목소리를 내어준다. 나는.......
"네가, ......왜 그렇게 나를 믿는지 모르겠어."
눈물이 묻어난 손을 붙잡은 윤재하가 설핏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몰라요. 그냥 그래야만 하니까 그러는 거예요."
"내가 널 배신하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함께 있을 수만 있으면."
"......."
속을 뻐근하게 조여오는 감각은 의지로 조절되는 게 아니었다. 밭은 숨을 내쉰 김석영이 입을 열었다.
"아까 그자가 했던 말 사실이야."
침묵이 내려앉기 전에 말을 이었다.
"명줄을 잡아먹는다는 말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인데요?"
"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주어진 시간을 거스르려는 거야. 명을 늘리기 위해서 타인의 생명을 대가로 일을 하지."
그렇게 만족할 만큼의 수명을 얻고 나면 돈을 요구한다. 욕심껏 명줄을 늘려놨으니 살아가는 동안의 의식주도 해결해야 하니까. 건조한 웃음을 흘린 그가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아니야. 대가로 수명을 받아본 적 없어. 네 수명을 빼앗을 마음도 없고."
"......."
"남의 수명을 깎아 내 목숨줄을 연장하는 삶이라니. 끔찍하잖아."
덤덤하게 이어지는 말을 곱씹은 윤재하가 입을 열었다.
"한때, 매일같이 그런 생각해본 적 있어요."
"어떤 생각?"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내 수명의 반을 내어줘도 좋을 텐데, 같은 거요. 내 목숨을 내어줘서라도 맞이하고 싶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거예요."
가만히 마주 보는 시선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그만큼 간절한 사람만이 올 수 있는 곳이라면, 분명 그만한 각오도 하지 않을까요. 목숨을 요구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간절한 건 아닐까요. 때론 불공정한 이해관계가 성립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잘잘못을 떠나서. 그러니까......."
줄곧 짓씹고 있던 입술을 어루만진 윤재하가 쓰게 웃어 보였다.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나는 형이 그랬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으니까."
"......역시 나는."
"......."
"네가 왜 나를 믿는지 모르겠어."
희미하게 웃은 김석영이 맞잡은 손끝에 입술을 묻었다. 그런 그의 뺨에 입술을 묻은 윤재하가 떨리는 숨과 함께 말했다.
"사랑해요."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무게가 눈물샘을 자극했나보다. 물기 어린 눈에 입을 맞춘 김석영이 기대오는 온기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윤재하의 여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떨리는 등을 쓸어내린 김석영이 읊조렸다.
"자지 말자, 오늘."
* * *
맞닿은 입술 사이로 젖은 숨결이 새어나왔다. 점막이 떨어지던 찰나에 모자란 호흡을 내쉰 윤재하가 조급하게 입술을 부딪혔다. 거칠한 부분을 잠재우듯 입술을 문지르는 행위에 김석영의 숨에 웃음기가 어렸다. 건조한 입술 감촉이 좋다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하아."
어리숙한 숨을 토하는 잠깐의 순간도 참지 못한 김석영이 윤재하의 뺨을 끌어왔다. 가쁜 숨을 토하느라 붉어진 낯과 단 한 순간도 닫히지 않은 입술이 어여쁘다. 혀를 엮어 빨아들일 때마다 움찔거리는 속눈썹과 그 속에 자리한 다갈색의 눈동자 역시도.
"흐으......!"
입천장을 훑는 감각에 놀란 윤재하가 김석영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무게가 쏠려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그의 뒤통수를 김석영이 급히 받쳐주었다. 바닥에 부딪힌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눈가가 찌푸려지는 건 덤이었다.
놀란 윤재하가 제 상체에 엎어진 김석영을 끌어안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졸지에 그의 다리에 앉게 된 김석영이 황망한 눈가에 키스를 내렸다. 스르륵 감기는 눈꺼풀과 흐드러지게 웃을 때만 드러나는 인디언 보조개의 부위에도 건조한 입술의 자취가 남았다.
"형. 혀엉......."
대답을 바라는 부름은 아니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달뜬 고양감에 절로 터진 신음에 가까웠다. 김석영은 가슴께에 번지는 만족감에 설핏 웃음을 흘렸다. 눈물이 맺혀 있던 턱 끝에 쪼듯이 입을 맞춘 그는 여린 목덜미를 깨물었다.
"하, 으."
잇자국이 난 살갗을 가볍게 할짝이자 온몸을 파르르 떤다. 낯선 감각에 숨이 가빠올수록 김석영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공기 한 점 들어갈 곳 없이 바짝 밀착된 가슴으로 서로의 심장박동이 전해졌다. 서로 다른 리듬이 잠시나마 일치했을 땐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형, 키스요. 키스해요......."
시선을 올린 윤재하가 애달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드러운 머리칼에 입을 맞추던 김석영이 분부대로 입술을 삼키자 조급한 혀가 입안을 제멋대로 휘저었다. 호흡이 흐트러진 김석영이 고개를 비틀어 얼굴을 떼어냈다.
움찔거린 윤재하가 김석영을 올려다본다. 붉게 달아오른 눈꼬리와 애처로운 숨결은 그의 흥분을 여실히 드러냈다. 만개한 꽃 같은 두 뺨과 귓불이 예뻐서 멍하니 바라보던 김석영은 유난히 붉은 입술을 어루만졌다.
"......피 묻었네."
피 맛은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샌가 입술이 찢어졌던 모양이다. 핏물이 배어든 입술을 엄지로 훔친 김석영이 손을 떼지 않고 움직였다. 입가와 볼로 이어지는 붉은 궤적이 마치 인장 같았다. 내 것에 도장을 찍는 기분으로 이어지던 엄지의 움직임은 열기 어린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손끝과 손바닥에 쪽, 쪽 입을 맞춘 윤재하가 핏물이 고여 있는 입술을 핥았다. 송골송골 배어 나오는 피를 타액과 함께 삼켜냈다.
"......흣."
제 목덜미의 감각을 상기한 윤재하가 무방비한 목에 이를 박았다. 너무 세게 깨물었는지 잇자국이 선명했다. 지레 움찔하여 호오― 입바람을 불어주자, 김석영으로부터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제게 해준 것처럼 잇자국이 난 살갗을 부드럽게 핥은 윤재하가 쇄골을 가로막는 니트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옷 틈으로 드러난 뼈에 쪼듯이 입을 맞추었다.
넥라인이 늘어질 게 뻔한 니트를 애도하기보단 조급함을 감추지 않는 행동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피식 웃은 김석영이 윤재하의 상의 밑단을 잡아 올렸다. 불쑥 말아 올려진 옷에 입맞춤을 멈춘 윤재하가 벙찐 얼굴을 한다. 긴 속눈썹이 두 번 깜박이던 순간, 부끄러운 듯이 웃은 그가 제 상의를 단번에 벗어냈다.
김석영 역시 니트를 벗었다. 열감에 달아올랐다고 해도, 아직은 창백한 살갗에 애가 탄 윤재하가 상체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맨살에 서로의 체온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김석영은 번져오는 온기의 따스함이, 윤재하는 번져오는 서늘함이 달가웠다. 묵직하게 비벼지는 아래가 뻐근했지만 서로를 붙든 체온에 마음이 충만해졌다.
"형. 형......."
"응."
김석영은 과실처럼 붉게 익은 뺨에 연신 입을 맞췄다. 땀에 젖은 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길이 부드럽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 부드러운 살성에 울컥 마음이 치민 윤재하는 물기를 매단 눈으로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그가 제게 그러하듯, 미약하게나마 체온이 오른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낮은 숨결이 흘러나왔다. 붉어진 눈가로 손을 옮긴 김석영이 속삭였다.
"......자꾸 우네."
눈에 맺힌 눈물을 훔쳐내자 윤재하가 그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좋아서요. 너무 좋아서......."
뒤엉키는 피부와 전해지는 체온과 떨리는 숨결이 좋아서. 벅차오르는 마음에 자꾸만 속눈썹이 눅눅하게 젖어들었다.
"하, 아......."
턱 끝에서 시작된 김석영의 입맞춤이 도드라진 목젖을 타고 흘렀다. 뒷덜미를 감싸고 조심스럽게 윤재하를 눕힌 그가 몸을 숙였다. 입술이 스치듯 머물다 간 곳은 모조리 불에 덴 것만 같았다. 가빠오는 숨과 성대를 간질거리는 신음을 참아보려 해도 자꾸만 잇새 사이로 빠져나갔다.
쪽, 쪽. 소리의 농도가 가장 진해지는 곳에 연거푸 입맞춤이 쏟아졌다. 그러다 김석영이 부푼 하반신을 어루만지자 허리를 튕긴 윤재하가 다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혀, 형......!"
중심에서 손을 끌어당긴 윤재하는 어쩔 줄 모르는 아이 같았다. 떨림을 잠재우기 위한 눈속임처럼 뺨에 입을 맞춘 김석영이 속삭였다.
"이대로 두면 답답하잖아."
"아......."
윤재하의 시선이 김석영의 중심에 향했다. 그 역시 저처럼 부푼 상태였다. 흥분의 증거를 마주하자 묘한 충족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김석영의 입안에 불어넣으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바짝 맞붙은 하반신이 비벼졌다. 거친 숨결을 달게 받아 마신 윤재하가 말했다.
"......같이, 같이 해요."
제 것을 풀어낼 때와는 달리 김석영의 바지 버클을 푸는 손길이 성급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야 바지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한 윤재하는 서늘한 살갗을 마주하고 숨을 삼켰다. 김석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멎어버린 숨을 되돌린 건 심폐소생 같은 입맞춤이었다. 동시에 김석영은 투명한 액이 묻어난 선단을 엄지로 훔쳤다. 덩달아 입안으로 넘어오는 윤재하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성기를 쓸어내리는 김석영의 손길과 입맞춤은 견디기 힘든 자극이 되어 윤재하를 무너뜨렸다. 힘줄이 서도록 김석영의 목덜미를 단단히 붙든 그가 거칠게 입술을 삼켰다.
"흐, 읍."
빈틈없이 맞물렸음에도 불구하고 밀려오는 혀의 움직임이 거침없었다. 한껏 벌어진 턱이 아릿했다. 호흡을 내쉬는 방법을 잊을 정도로 머리가 뜨거워졌다. 깊게 밀려오는 혀가 김석영의 숨을 막았다. 맞물린 입이 떨어진 건, 목에 핏줄이 서면서도 모자란 숨을 견뎌낸 김석영이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흡, 하아, 하......!"
"하아, 하아."
거친 숨이 안정을 되찾기도 전이었다. 김석영은 깊은 키스에 멈춰 있던 손을 움직였다. 손안을 가득 채운 성기가 너무 뜨거워 피부가 데일 것 같았다. 울컥 새어나오는 선액을 윤활제 삼아 성기를 쓸어내리자 흐트러진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흐, 형."
"흣......!"
김석영을 따라 성기를 감싸 쥔 윤재하가 선단 끝을 살살 문질렀다. 미끈거리는 선액을 손에 묻히고 기둥을 쓸었다. 그저 손에 느껴지는 부피감만으로 몸이 달았다. 서로의 성기를 손에 쥐고 흔든 그들은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질척이는 음습한 소리가 지독할 정도로 성감을 부추겼다. 머릿속이 하얗게 번졌다.
"하, 윽......!"
"......하, 아...!"
사정은 맥없이 빠르게 찾아왔다. 왈칵 터져 나온 정액이 손과 배를 적셨다. 파정감에 몸을 떤 윤재하가 김석영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바짝 맞붙은 뱃가죽 위로 단단함을 잃지 않은 두 성기가 비벼졌다. 끌어안은 어깨에 낯을 비빈 윤재하가 숨을 몰아쉬었다. 피부를 데우는 숨결은 안정감을 주기보단 날 선 고양감을 선사했다.
"......윤재하."
등과 머리칼을 쓰다듬던 김석영이 속삭였다.
"우선 네가 넣어봐."
그 말에 연신 거칠었던 숨이 한순간에 멈췄다.
"......네?"
"넣어보라고. 아직 부족하잖아."
허리를 밀어붙여 성기를 비빈 그가 웃음을 흘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문 윤재하가 흔들리는 눈으로 물었다.
"......뒤, 뒤에 넣어요?"
"뒤가 싫으면 입에 넣든지."
입은 앞이잖아, 라고 덧붙이니 거의 경기를 일으킨다. 화르르 달아오른 윤재하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김석영의 입을 막았다. 부드럽게 웃은 그가 손바닥의 피부를 잘근 씹어버리자 몸을 움찔한다. 떨리는 손을 잡아 내린 김석영이 흔들리는 눈망울에 입술을 포갰다.
"왜, 무서워?"
"......절대 안 들어갈 거예요."
"하긴. 크긴 하다, 너.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언뜻 보기엔 크기나 길이가 비등했으나 손으로 만져서 가늠해본 결과, 윤재하의 것이 좀 더 두께가 있는 편이었다. 겁을 내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면 돼."
"......정말,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아."
'행여 다치더라도 너보단 내가 다치는 게 나으니까.'
낯선 경험의 위험성은 어린 그보단 제가 감당하는 게 낫다고 김석영은 생각했다. 바짝 긴장한 등을 쓸어내려준 그가 속삭였다.
"넣기 전에 일단, ......풀어보자."
속삭임은 행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김석영의 뒤통수를 소중하게 받친 윤재하가 조심스럽게 그를 눕혔다. 묘하게 상기된 얼굴을 보니, 절로 가쁜 숨이 헐떡이며 튀어나왔다. 줄곧 서늘하던 남자의 낯에 피어난 열감이 저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흥분됐다.
"하아―."
군살 하나 없이 단단한 몸을 손끝으로 훑어내리자 낮은 신음이 이어졌다. 손이 아닌 입술이 닿으면 이 목소리를 조금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을까. 멍하니 김석영의 표정을 살핀 윤재하가 살갗에 입맞춤을 내렸다.
"하, 아....... 윤재하. 아래를 풀자니까, 흣."
"조금만, 조금만 더요......."
창백한 피부처럼 연한 유실에 입술을 비비자 원하던 신음이 터졌다. 건조한 살결을 물기로 가득 채우려는 것처럼 핥아 올리던 윤재하가 눈을 올려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곧장 뒤엉키는 눈 맞춤엔 숨길 수 없는 정염이 서려 있었다.
"하아, 형. 아랫배가 간지러워요."
거친 숨을 토해내는 윤재하의 머리칼을 헤집은 김석영이 동조했다.
"......그래. 나도 그래."
아.......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다는 게 이렇게나 충만할 일인가. 물기 어린 낯으로 흐드러지게 미소를 지은 윤재하가 허벅지 안쪽에 입을 맞췄다. 사타구니를 타고 흐른 입술은 곧장 단단한 성기로 향했다. 부드럽게 훑어대던 입을 열어 끝을 머금자 김석영의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파르르 떨리며 도드라진 근육을 매만진 그가 성기를 깊게 삼켰다.
"하, 아......!"
남자의 성기를 무는 건, 단언컨대 윤재하의 생에서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석영의 것을 본 순간, 윤재하는 아무런 의식을 거치지 못하고 무작정 얼굴을 묻었다. 입으로 하는 방법 따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반응에만 집중했다. 이빨이 스칠 때의 날 선 신음에 입술을 말았고,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질 때는 혀를 진득하게 핥아 올릴 때라는 걸 깨달았다.
허기진 것처럼 자꾸만 침이 고였다. 꿈틀거리는 기둥을 모조리 제 타액으로 적셔버리고 싶었다. 목젖까지 성기를 밀어 넣고 모자란 숨에 헐떡이면서도 행위를 멈출 수 없었다. 가학적이지만 확실한 쾌감의 행위는 김석영이 사정하고 나서야 멈췄다.
"아, 아, 하윽......!"
발작하듯 들썩이는 허리를 두 손으로 붙든 윤재하가 입을 떼어냈다. 툭, 투두둑. 표출된 사정액이 얼굴 곳곳에 튀었다. 잔떨림이 묻어나는 허리를 조심스럽게 놓아준 그가 핏줄 선 손등을 쓰다듬었다. 모자란 숨을 헐떡이며 굵은 눈물을 흘린 윤재하가 김석영의 표정을 살폈다.
"형, 좋았어요?"
"하......."
속눈썹에 묻어난 정액을 거칠게 훑어낸 김석영이 윤재하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끌어당기는 힘에 무너진 윤재하가 간신히 팔을 짚었으나 입술을 머금는 행동에 스르륵 자세를 낮췄다. 파정하지 못한 성기를 뱃가죽에 꾹 짓누른 그가 애달픈 목울음을 냈다.
짓누르는 몸을 끌어안은 김석영이 단번에 상체를 일으켰다. 시트 위로 쓰러진 윤재하의 허리에 걸터앉아 곳곳에 묻어난 정액을 손으로 훔쳤다. 곧 무릎을 대고 일어선 그는 적당히 묻어난 정액을 입구에 문질렀다. 한쪽 팔을 뒤로 짚고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킨 윤재하가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단단한 허벅지를 쓰다듬는 걸 붙잡은 김석영이 다리 사이로 손을 끌어왔다.
"......이제 진짜 풀어야지."
손이 인도한 곳은 정액이 묻어난 둔부의 틈이었다. 숨을 삼킨 윤재하가 떨리는 손으로 굳게 닫힌 입구를 꾹 눌렀다. 미끈거리는 정액이 윤활제를 대신했다. 조금씩 벌어지는 입구가 손가락의 끝을 집어삼켰다. 생경한 이물감에 몸을 굳힌 김석영이 숨을 삼켰다.
"너무, ......뻑뻑해요. 다칠 것 같아......."
조심스럽게 손끝을 빼낸 윤재하가 김석영을 끌어안았다. 가볍게 웃음을 흘린 그가 겁쟁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다쳐도 괜찮아."
"다치는 건 절대 안 돼요. 난 형이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김석영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팔자에도 없던 아래를 자처한 이유가 아니던가.
"조금 불편했을 뿐이지 아픈 건 아니었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몸을 끌어안고 옆으로 드러누운 김석영이 말했다. 불안에 떠는 얼굴을 어루만지자 손등을 감싸온다.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풀어봐. 내가 다치지 않게."
눈을 감은 윤재하가 김석영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하, 하아......."
정액과 뒤섞인 타액이 내벽의 진입을 도왔다. 마디가 하나씩 잠길 때마다 김석영의 몸이 움찔거렸다. 허벅지 안쪽에 입을 맞춘 윤재하가 부드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끝으로 밀어 넣은 액성 탓에 움직임이 수월해지자 찌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도드라진 마디가 거리낌 없이 입구를 드나들 때쯤,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빈틈없이 맞붙은 두 손가락이 내벽을 가르고 밀려 들어갔다. 하나를 삼킬 때와는 달리 굳게 다물렸던 주름이 펴지면서 도드라진 마디를 삼켜갔다. 뭉근해진 정액의 잔해는 미처 침입하지 못한 채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점성의 감각이 윤재하의 성감을 부추겼다.
"흣......."
내벽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물감이 거세지자 김석영이 숨을 삼켰다. 체온이 높은 손가락으로부터 전달되는 열감이 전신을 달아오르게 했다. 연신 표정을 확인하던 윤재하가 살살 움직이던 손가락으로 호를 그렸다.
"아, 아......, 하아......."
낮게 잠긴 신음에서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움직임이 점차 거세졌다. 바짝 맞붙은 중지와 약지가 끝까지 삼켜졌다가 반쯤 빠져나왔다. 제 선단에 맺힌 점액을 빠져나온 마디에 묻힌 윤재하가 다시 손을 밀어 넣었다. 찔걱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진해졌다.
"형. 하나 더, ......넣을게요."
어느샌가 두 눈을 가리던 팔을 살짝 들어 올린 김석영이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숨 한점 들이마시지 못한 낯으로 허락을 구하는 것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응."
허락과 동시에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은 확실히 버거웠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벽을 누르며 빠져나가는 부피감은 이미 성기와도 같았다. 바짝 뭉친 손을 찔러넣을수록 내벽 안의 열기에 물러버린 정액이 구멍 밖으로 흘러나왔다. 골 사이로 흐르는 액은 간지러우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하, 아, 윤재하. 이제 그만......."
내벽을 어루만지고 있는 손을 저지한 김석영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고 넣어."
이명처럼 들려오는 말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윤재하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가락의 두께에 맞춰 벌어진 입구가 움찔거렸다. 내벽이 감싸주던 손을 조심스럽게 빼내고 나니 붉어진 안이 보였다. 여유를 주지 않고 스르륵 닫혀가는 것에 성기 끝을 문지르자 구멍이 다시 벌어졌다. 그 틈으로 천천히 밀어 넣자 선단을 삼킨 내벽이 꿈틀거렸다.
"하아......."
"흐, 윽......."
충분히 풀었다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윤재하의 성기는 고작 손가락 세 개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목을 젖히고 힘겨운 숨을 토해낸 김석영이 시트를 우겨 쥐었다.
"형, 형....... 괜찮, 괜찮아요?"
움직임을 멈춘 윤재하가 뻣뻣하게 굳어버린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미 터질 듯이 부풀어온 성기의 고통과 조여오는 내벽의 감각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으나, 그럼에도 윤재하의 우선은 김석영이었다. 애틋하게 굴 줄 아는 것에 마음이 느른해진 김석영이 팔을 뻗었다. 뒷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끌어와 입을 맞췄다.
"......괜찮아. 계속해."
"아프면 꼭 말해줘요."
"응. 그럴게."
옅은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이마에 제 이마를 비빈 윤재하가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었다. 진입의 시간이 길었다. 몸 안에 받아들이는 것은 손으로 만졌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부피감과 길이를 자랑했다. 뿌리를 온전하게 삼켜버리기까지 진입의 시간 역시 길었지만, 인내가 길었던 만큼 보답은 빠르게 찾아왔다.
숨이 멎는 신음과 함께 김석영의 허리가 뒤틀렸다. 사정했을 때와는 비할 수 없는 경련이었다. 핏대선 목과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 새로 터지는 호흡에 놀란 윤재하가 몸을 굳혔다. 하지만 이내 그 반응이 쾌감에서 비롯된 걸 깨달은 그가 얕게 허리를 들썩였다.
"하, 아, 아......!"
선단이 비벼지는 지점에서 달뜬 신음이 터졌다. 뿌리 끝까지 맞물리며 도달한 성기의 끝이 전립선을 문지르고 있었다. 윤재하는 본능적으로 제가 움직여야 할 방향성을 깨달았다. 시트를 움켜쥔 손을 끌어와 깍지를 꼈다. 강하게 조여오는 아귀의 힘에 마음이 뻐근해진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나른하게 풀어진 눈매에 엉겨 붙었다. 달뜬 숨을 내뱉는 입술과 붉어진 피부가 야했다. 비밀스러운 모습을 제게 보여주고 있는 이 남자가 벅차오를 만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상체를 강하게 끌어안고 맞닿은 가슴으로 제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형, 형......."
"응, 윤재하."
등을 끌어안으며 뒷덜미를 어루만진 김석영이 대답했다. 철퍽! 내벽을 짓이기는 성기의 감각에 허벅지가 경련했다. 안에서부터 피어난 열감이 온몸에 퍼졌다. 시린 한기에 익숙하던 몸뚱이가 속절없이 열감에 잠식됐다.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되는 것 같았다.
"하아, 아, 형....... 어떡해, 어떡해요."
......미칠 것 같아요. 김석영을 끌어안은 윤재하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쾌락에 무너져내린 예민한 몸이 자꾸만 눈물을 만들어냈다. 윤재하의 낯이 파고든 목덜미에서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김석영은 품에 안겨드는 어린 남자의 등을 강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모조리 쏟아부어도 괜찮아. 그렇게 속삭이면서 김석영은 밀려오는 성기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들썩였다. 제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여린 부분으로 성기를 유도했다. 깊게 맞물릴 때마다 짓이겨지는 내벽이 빠져나가는 성기를 붙들었다. 윤재하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목울음 소리를 냈다. 움직임이 거세질수록 철퍽이는 마찰음 역시 적나라해졌다.
"아, 흐윽, 아, 아아......!"
"형, 혀엉....... 형......."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서 타액이 흘러내렸다. 마른 목을 축이는 사람처럼 김석영의 타액을 전부 핥아 올린 윤재하가 뺨을 비볐다. 뒤로 쭉 빠져나간 성기가 퍽 하고 내벽을 짓이겼다. 상체를 낮춰 아랫배에 부딪히는 성기를 꾹 누르자 김석영의 턱이 젖혔다. 끝까지 삽입한 채로 허리를 들썩이자 등을 감싸던 손이 까드득 피부를 긁어내린다. 윤재하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채 경련하는 몸을 훑듯이 바라보았다.
"하흐, 읏......."
분출한 정액이 맞붙은 몸에 고였다. 상체를 조금 떨어뜨리자 쩌억, 연결되던 정액의 실낱이 뚝 끊어졌다. 서로의 가슴에 흥건히 묻어난 정액을 바라보자 아래에 피가 몰렸다. 끝까지 밀어 넣었던 성기를 선단까지 빼버린 건 의식을 거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하, 윽, 윤재하......!"
사정의 여운으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불쑥 시작된 움직임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까무룩 점멸했던 시야가 돌아왔을 땐 온몸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으스러질 듯 껴안은 윤재하가 아래를 들이박았다. 지독한 쾌감이 전신에 쏟아졌다.
"아아, 아, 읏, 아!"
"하아, 하, 아, 형, 흣──!"
절정에 다다른 순간은 난폭한 감각을 선사했다. 핏대 선 목이 숨을 턱 막히게 했고 말이 되지 못하는 신음만을 울부짖게 했다. 긴 인내 끝에 터져버린 정액이 김석영의 몸속 깊숙이 들이닥쳤다. 내벽을 채워가는 열기를 온전하게 느낀 성기가 꿈틀거렸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간헐적인 숨을 헐떡이며 끌어안은 몸을 붙들고 경련하던 윤재하가 허리를 물렸다.
주욱, 빠져나온 성기의 움직임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농도 짙은 숨을 내쉬던 김석영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켜냈다.
윤재하는 그런 남자의 곳곳을 눈에 담았다. 새하얀 시트에 널브러진 몸의 선과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가늘게 웃음을 매단 눈매와 부어오른 입술까지. 상체를 숙인 윤재하는 단단한 선을 그리는 빗장뼈와 도드라진 목울대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뒷덜미를 잡아챈 손이 제 몸에서 얼굴을 떨어뜨린다. 시선을 맞춘 김석영이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엉뚱한데 하지 말고 제대로 키스해봐."
거부할 수도, 거부하고 싶지도 않은 말이었다. 깊게 입을 맞물리자 등을 끌어안은 그가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촉,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사락사락 넘기는 김석영의 손길이 나른했다. 장난을 치듯 손가락으로 돌돌 마는 것에 설핏 웃은 윤재하가 목덜미에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입을 떼지 않은 채로 웅얼거렸다.
......형.
"한 번 더 해도 돼요?"
손장난을 멈춘 김석영이 허리에 다리를 올렸다. 허락의 신호였다.
* * *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세 번이 되었다. 기나긴 정사의 끝에 닥쳐온 건 지독한 수마였다. 그러다 불쑥 타는듯한 갈증에 눈을 뜨니 온몸을 옭아매는 온기가 있었다.
턱 끝에 살랑거리는 머리칼을 손가락에 휘휘 감자 가슴께에 처박은 얼굴이 비비적거린다. 더 이상 파고들어 올 틈이 없는데도 낯을 밀어대는 행위가 마치 여린 짐승 같았다. 피부에 닿는 숨결은 속살거리는 목소리 같았다. 마른 웃음을 매단 김석영이 품 안의 윤재하를 꽉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온기를 놓은 건 목이 타는 갈증이 심해져서였다. 윤재하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빠져나온 김석영이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습관적으로 냉장고로 향하던 그는 고개를 돌려 식탁을 보다가 나무 트레이 위에 곱게 채워놓은 물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어디서 들었는데, 찬물보다 미지근한 물이 몸에 더 좋대요."
그리 말한 윤재하는 물 한 통을 실온에 두기 시작했다. 날이 추운 탓에 그마저도 미지근하다기보단 시원한 정도였지만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다. 식탁으로 다가간 김석영이 물통의 물을 단번에 비워냈다. 적당한 시원함이 마른 목을 적셔주었다.
쏴아아―
적막한 공간을 메우는 빗소리에 신경이 빼앗겼다. 뻐근한 몸을 두드리며 대청으로 나가니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김석영은 마루에 걸터앉아 겨울의 잔여물을 쓸어가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해갈하고부터 잠기운은 진즉 가셨지만 나른함만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끌어안은 무릎에 턱을 묻고 늘어지는 감각을 만끽하던 순간이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김석영이 불쑥 나타난 기척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나.」
검은 그림자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김석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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