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영기는 네 몸을 지키는 역할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눈에 띄는 게 문제야. 방패가 지나치게 화려하면 시선 한 번 더 가게 되는 것처럼. 한마디로 너는 그림의 떡이라고나 할까. 간절히 바라지만 가질 수 없어서 애타게 만들지. 제 주제를 아는 것들은 알아서 몸을 사리지만 산 것이든 죽은 것이든 무모한 놈들은 있기 마련인데, 그래봤자 함부로 손을 대진 못할 거야. 네 몸이 거부할 테고 네게서 흐르는 영기가 그들을 눌러버릴 테니까. 네가 가진 것은 생명력이고 그들은 죽음 그 자체이니."
윤재하의 곳곳을 바라보던 김석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너는 사람이야. 신이 아니지. 아무리 강한 영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오늘 새벽의 악귀 같은 것들. 본래 향해야 할 악의의 대상과 원인조차 잊어버리고 악의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들. 잠시라도 마음이 흐트러지고 한눈을 팔게 되는 순간, 맞지 않는 상성을 억누르면서까지 몸을 가로챌 거야. 그들이 바라는 건 강인한 생명력이고 단단한 껍데기일 테니까."
"그런 존재가 지금....... 제 몸을 노리고 있다는 거죠."
"그래."
식어버린 머그잔을 쥔 윤재하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왜 이렇게 갑자기......."
물론 죽은 모친을 달고 다니는 것에 겁도 없이 달려드는 영가들이 있긴 했다. 영가들을 떨칠 수 있는 육체를 지닌 주제에 죽은 자를 달고 다니니, 저 역시 그 틈을 노려보려 했을 것이다. 원래라면 가까이할 수도 없는 것들이 온몸에 달려 있을 수 있던 건 그 때문이었다. 망자가 같은 망자를 불러들인 것이다. 하지만 윤재하의 영기는 저를 해치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할 수 있었고,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는 것들만을 허락했다. 아니,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는 그들을 언제든지 떨쳐낼 수 있는 데다가, 그들을 달고 다니는 동안엔 영안을 지닌 자들의 접근이 줄어들었으니까. 차마 건들 용기가 나지 않을 모습이었을 테니.
하지만 단언컨대 그를 지나쳐온 많은 존재 중에 오늘과 같은 악귀는 없었다.
"귀어로 인한 건 아닐까 생각되는데."
"귀어요?"
"내가 봤을 때부터 그건 이미 희미해져가고 있었어. 그것에 깃든 힘 역시 약해지고 있던 거겠지. 하물며 저승의 경계에 다녀오기까지 했으니, 분명 그게 영향을 끼쳤을 거야. 넌 귀어가 사라진 동시에 몸을 빼앗겼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게 악귀로부터 너를 보호해주던 장치였을 수도 있어."
혼란에 물든 얼굴로 달싹이던 입술이 겨우 말을 토해냈다.
"......이해가 안 돼요. 설사 그렇다 해도 왜 그런 게, 도대체 언제부터 제 손목에......."
"어머니가 무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윤재하의 낯이 구겨졌다.
"아니요. 무당은 할아버지셨어요. 어머니 역시 영안이 트이긴 했지만 무당 일을 업 삼은 분은 아니셨고요. 고약한 소문이었을 뿐이에요."
"그래. 그랬구나."
덤덤한 대꾸에 윤재하의 날 선 기색이 수그러들었다. 얕은 숨을 삼킨 그가 힘없이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일 리도 없어요. 제가 태어났을 무렵엔 이미 치매 증상이 있었다고 하셨으니까요."
비스듬히 턱을 괸 고개를 바로 하며 윤재하를 바라본 김석영이 입을 열었다.
"새겨진 시기나 원인을 알 수 없다면, 정확한 기능만이라도 알아내면 돼."
"기능이요?"
"귀어의 기능 말이야. 그게 사라진 시점에서 일이 터졌으니, 그것에 주어졌던 기능을 파악해야 대처를 하지 않겠어? 악귀를 없애버리기 전까지 널 지켜낼 임시방편도 필요하고."
"......그런 게 있을까요?"
"글쎄. 이제부터라도 찾아봐야지."
가볍게 대꾸한 김석영이 턱을 괸 손을 풀고 길게 뻗었다. 찌뿌드드한 상체를 길게 늘이며 식탁 위에 늘어졌다. 나른한 포식자 같은 모양새에 침울함을 억누른 윤재하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자연스레 시간을 확인하자 점심시간이 코앞이었다.
"식사해야죠."
길게 뻗은 팔뚝 위로 얼굴은 묻은 김석영이 비스듬한 시선을 보냈다.
"솔직히 말하면, 귀찮아서 먹기 싫어."
"아침도 건너뛰었잖아요."
"배고프면 너는 챙겨 먹어. 이참에 냉동실에 있던 거 다 해치워줬으면 좋겠네."
처치 곤란이었거든. 넌지시 읊조린 그가 눈을 감았다. 피로해 보이는 얼굴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잠시만 기다려요. 저택에 남은 식자재가 있어요. 부담스럽지 않게,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거로 준비할게요."
"그러면서 도망가려는 건 아니고?"
윤재하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가늘게 눈을 뜬 김석영이 건조한 웃음을 매달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너 이제 신뢰감 바닥이라고."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까지 무모하진 않아요."
"그런 애가 잘도 저승까지 따라왔지."
"그건, 몰랐으니까......."
표정을 흩트리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에 속으로 웃음을 삼킨 김석영이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요? 자러 가는 거예요?"
"그러고 싶었는데, 코앞의 어린애가 배가 고프신 듯해서."
한창때인 청년을 굶길 순 없으니 뭐라도 가져와서 먹여야겠지. 어깨를 으쓱한 김석영이 멀뚱하게 서 있는 윤재하를 향해 턱짓했다.
"뭐 해. 식자재 가지러 간다며."
"......같이 가려고요?"
"혼자 보냈다가 또 몸 뺏길라."
"......"
말문이 막힌 윤재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볍게 등을 돌려 걸음을 뗀 김석영은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윤재하는 고집스레 입술을 달싹이다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인기척에 김석영이 말했다.
"조치를 취하기 전까진 혼자 다닐 생각 마."
"......네."
"네 망자를 찾는 것도 아직은 일러. 다급한 건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너 자신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니까. 방어할 줄도 모르면서 공격하는 건 무모한 짓이라는 걸 잊지 마."
"......네."
"식자재 같은 것도 웬만하면 시켜. 괜히 장 본다고 힘 빼지 말고."
"네. 알겠어요."
고분고분한 대답에 김석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 닿는 시선에 흠칫한 윤재하가 눈을 피하며 불퉁하게 항의했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대답을 잘하는 게 기특해서."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요."
"어리잖아."
"안 어려요. 군대도 다녀왔어요."
"아. 그러셨어요."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그런 말 해봤자. 피식 웃은 김석영이 고개를 바로 했다. 혼자 열 낸 것 같아 무안해진 윤재하가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다.
저택에 다다르자 아침에 쏟아부은 눈물이 떠올랐다. 어린애처럼 울던 저를 달래준 김석영의 앞에서 애 취급하지 말라고 했던 게 부끄러워졌다. 화르르 귓가를 붉힌 윤재하가 김석영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는 여느 때처럼 무감한 표정이었다. 안도하기 무섭게 김석영의 입매가 씰룩거린 걸 보지 못한 윤재하가 다급하게 눈가를 주물렀다.
"여기 있는 거 다 챙기면 되는 건가."
"아....... 제가 할게요. 앉아 있어요."
냉장고를 확인한 김석영을 물린 윤재하가 식자재를 살폈다. 근 한 달을 생활해서인지 제법 익숙하게 주방을 오갔다. 다용도실에서 보온 박스를 가져와 식자재와 남은 반찬을 채운 윤재하는 어느샌가 보이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황급히 주방을 나섰다.
"어디, ......아."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옷장이 있는 방안에서 걸린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석영이 문가에 서 있는 윤재하를 발견했다.
"어쩐지 안 입는 거 같더라니."
"아, 그게......."
"입던 거라 꺼려져?"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입고 다녀. 추워 보여."
김석영이 두꺼운 파카와 목도리를 안겨주며 말했다. 얼떨결에 옷을 품에 안은 윤재하는 일순 어이없는 표정을 한 채 그를 보았다. 외투를 챙겨입지 않은 건 그 역시 마찬가진데 누가 누굴 보고 추워 보인다는 건지 모르겠다.
표정에서 훤히 드러나는 생각에 코웃음을 친 김석영이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난 원래 체온이 낮아서 추위에 강해."
"그런 말이 어딨어요. 체온이 낮으면 올려야죠. 이런 겨울이면 특히."
추위에 강한 사람이 볼 때마다 훤히 개방된 대청마루에서 이불 덮고 늘어져 있나. 생각하다 보니 불쑥 의문이 든 윤재하가 김석영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면 항상 밖에 나와서 누워 있던데. 왜 그런 거예요? 이불을 덮는 거면 춥긴 하다는 거잖아요. 그럴 거면 그냥 방에서 쉬면 되지 않나......."
"공기는 서늘한데 이불 안은 따뜻한 게 기분 좋아. 올라가면 너도 해보든가."
"음....... 아니요, 괜찮아요."
다 큰 성인 남자 둘이서 이불 고치 속에 파묻힌 꼴을 상상하니 영 낯부끄러웠다. 고개를 저은 윤재하는 느슨하게 드러난 뒷덜미를 목도리로 감쌌다.
"너 하라고 준 건데 왜 나한테 감고 있어."
"추워 보이니까요."
"말했잖아. 난 추위에 강하대도."
"저도 그래요. 남들보다 체온이 높은 편이라서. 목도리까지는 과해요."
목도리의 매듭을 짓고 있는 윤재하를 멀뚱하게 바라본 김석영이 말했다.
"그럼 그때는 왜 가만히 있었는데. 잘만 하고 있었잖아."
"......그땐 좀 춥긴 했어요."
"그랬나?"
"그랬어요."
그래.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가볍게 넘어간 김석영이 방을 나섰다. 목만 가려도 체온이 오른다던데. 감아놓은 목도리를 풀지 않는 것에 한결 마음이 놓인 윤재하가 식자재를 정리해둔 보온 박스를 품에 안았다.
"안 무거워? 나도 손 있는데."
"괜찮아요, 이 정도는. 안 무거워요."
양 팔목에 장바구니를 두 개나 끼고 제법 큼직한 보온 박스를 안고 있는데도 표정이 평온했다. 저 알아서 척척 나가는 것을 뒤따르던 김석영은 불쑥 멈춰선 윤재하의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거봐. 무겁지?"
"그게 아니라, 잠깐만요."
짐을 내려놓고 거실로 향한 윤재하가 메모지에 글을 적어 내렸다. 무언가를 꾹 참아내는 듯 아랫입술을 짓씹는다.
'입술을 가만히 놔두질 못하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김석영이 할 법한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는 인지하지도 못한 채 미간을 찌푸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메모에 적힌 글이 보였다.
[나 여기에 있어. 당분간 위쪽에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매일 2시가 되면 내려올게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달아나요. 반드시 내가 찾아갈게. ―재하―]
윤재하가 저택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장소는 주방이었다. 식사 준비와 뒷정리를 끝내면 식탁에 앉아 공부했다. 혹여 방해될까, 낮이면 자리를 비워주었던 형체는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와 분주히 움직이는 그를 구경하곤 했었다. 아마 형체가 돌아온다면 곧장 살펴볼 곳은 주방일 것이다. 식탁에 메모를 붙인 윤재하가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하며 설핏 웃었다.
"무슨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아요."
"그래?"
김석영이 의외롭다는 듯 바라보자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떨쳐내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런 거죠?"
정확한 답변이었다.
"솔직히 힘들 것 같기는 해요. 그래도 이젠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요. 내게 흐르는 영기는 나만을 지킬 뿐, 그 사람까지 지키진 못하는 거였어요. 눈에 잘 띈다는 건 그만큼 표적이 되기 쉽다는 것과도 같은데. 너무 안일했던 거죠. 더 위험해지기 전에, 더 걱정을 끼치기 전에 마음 편하게 보내주고 싶어요. 못 미더운 거 알아요. 그래도 정말 진심이에요."
"그럼 나는, 네가 그자를 온전하게 놓아주기 위해서 찾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네. 맞아요.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며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대꾸도 없는 덤덤한 얼굴이었으나 이야기를 받아들이려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런 김석영을 향해 윤재하가 말을 이어갔다.
"돌아오면, 그 사람을 해치지 말아줘요."
"윤재하."
"알아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런데 분명 아닐 거예요. 그 사람이 악귀일 리가 없어요. 설사 악귀가 삼켜버렸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는 거라면. 그땐 제가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기다려주세요. 부탁할게요."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윤재하를 응시하던 김석영이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악귀가 아닌 온전한 영가 그 자체일 경우라면."
"고마워요."
윤재하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경직된 입매를 풀고 숨을 내쉬었다. 식탁에 붙여놓은 메모를 재차 확인한 그가 '이제 가요'라며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뒤따라선 김석영이 널브러진 장바구니를 빼앗자 당황한 낯을 했다.
"안 무거워요. 제가 다 들 수 있는데......."
"그래. 안 무거우니까."
"......진짜 괜찮은데."
"그래. 나도 괜찮아."
양손에 장바구니를 쥔 김석영이 홀연히 저택을 나섰다. 덜렁덜렁 흔들리는 부직포 재질의 장바구니는 김석영과는 참 안 어울려서, 윤재하는 허탈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 * *
안채에 올라와서도 식사 준비는 자연스레 윤재하의 몫이 되었다. 애초에 말릴 새도 없었다. 저 알아서 척척 준비하는 데다가, 김석영이 주방에 들어서기라도 하면 불안한 표정부터 지었다. 일전의 냉동실 사건 때문인 듯했다. 기왕 함께해야 할 시간도 늘어났겠다,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김석영은 말했다.
네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이곳에 지내면서 하게 되는 모든 살림은 도우미 일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라고. 그러자 윤재하는 잠시 당황해하다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던 탓이다.
먹는 것을 귀찮다고 여기는 사람이 요리를 할 리가 없고, 사람 자체가 나른해 보여서인지 집안일을 못 할 거라는 편견이 있었으나, 일을 벌이지 않는 덕분인지 의외로 집안은 깔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치울 상황을 만들지 않으니 치워도 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대청에 늘어져 있을 때마다 덮는 이불엔 은근히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불 좀 빨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 묻자, 김석영은 전에 없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황당한 시선을 무시한 그는 보란 듯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그 손등에서 핏줄이 돋아난 걸 확인했을 때 윤재하는 굳게 다짐했다. 어떻게든 저 이불을 세탁하고야 말겠다고. 그렇게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결국 승자는 윤재하였다.
안채의 욕실에는 욕조가 없었던 탓에 기어이 다용도실을 뒤져가며 김장용 고무 대야를 찾아낸 그는 곧장 호스를 끌어와 마당에 쌓인 눈을 녹였다. 본격적으로 빨래를 위한 준비를 마치기 무섭게 이불을 빼앗아 온 윤재하가 두 팔과 두 다리를 걷어 올리고 대야 안에 들어갔다. 빼앗긴 이불 대신 극세사 이불을 뒤집어쓴 김석영은 대청에 앉아 제 이불이 세탁되는 과정을 구경했다.
서늘한 기온 탓에 미지근한 물은 금방 식어갔다. 몇 년 전, 이상현이 사다 준 김석영의 누빔 점퍼를 입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윤재하의 코끝이 점점 빨개졌다. 짙은 고동색의 머리칼은 햇빛을 받아 부드러운 색감으로 변모하고, 발갛게 달아오른 혈색은 평소보다 그 색이 더 진했다. 그에게서 흐르는 생동의 빛은 마치 봄과도 같았다. 움직일 때마다 나풀거리는 건조한 생 머리칼은 바람에 흩날리는 잎사귀를 닮았고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과 눈가는 색을 입고 피어나는 꽃잎 같았다.
'예쁘게 생겼구나, 윤재하.'
김석영은 새삼스러운 감상을 느끼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직선적인 시선을 못 이긴 윤재하가 움직임을 멈춰 세우고 마주 보았다. 그 유리알 같은 다갈색의 눈을 보니 좀 전의 생각을 정정하게 된다.
"......왜 그렇게 봐요."
내리쬐는 햇살 같은 게, 봄이 아니라 여름인가.
"그냥. 구경할 게 너밖에 없잖아."
"......적당히 봐주면 좋겠어요."
신경 쓰여서 움직이기가 힘드니까. 뒷말을 삼킨 윤재하가 고개를 돌리곤 이불을 밟았다. 등에 닿는 시선은 여전했으나 낮은 웃음소리만이 더해졌다.
"윤재하."
"......네."
"꼭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 같은데, 음악이라도 틀어줄까?"
또, 또 놀린다. 얼굴을 붉힌 윤재하가 매섭게 쏘아보자 시치미를 떼며 어깨를 으쓱인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줄곧 닫혀 있던 방에 들어간 그는 원목 수납장에 빼곡히 진열된 LP 음반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윤재하가 빼꼼 고개를 내밀던 찰나, 열린 문 너머에서 고개를 내민 김석영이 불쑥 물었다.
"윤재하. 무슨 색 좋아해."
"......색이요?"
"좋아하는 색 없어?"
좋아하는 색이라.......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에 말문이 막혔다. 색감이라는 것을 의식해본 적도 없었고,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색상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좋아하는 색이라는 게 있었던가.'
간단한 질문인데도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당황과 고민이 어린 낯에 김석영의 시선이 진열장으로 향했다. 다양한 음반의 색상을 눈으로 훑은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파란색과 검은색 중 뭐가 끌려?"
"파란색과 검은색......."
파란색은 하늘과 바다의 색. 검은색은 김석영의 머리칼, 그리고 눈의 색. 색상이 연상하는 것을 떠올린 윤재하가 김석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검은색이요."
"그래?"
묘한 얼굴을 한 김석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피식 웃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윤재하의 시선을 뒤로하고 방 안에 들어간 그는 검은색의 음반을 꺼냈다. 능숙한 손길로 레코드판을 꺼낸 김석영이 턴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톤암의 위치를 조절하고 레버를 내리자 카트리지의 바늘이 소리골에 안착했다.
'음악 틀어준다면서 왜 방에 들어가는 거지? 색은 또 왜.......'
영문 모를 질문만 던지고 사라져버린 것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부지런히 이불을 밟으며 상체를 쭉 빼서 방 안을 확인하려던 윤재하는 때마침 밖으로 나오는 김석영을 마주했다. 어째, 그의 표정이 묘했다.
"음악은......."
―Gimme Fuel, Gimme Fire, Gimme that which I desire, Ooh!
불쑥 울려 퍼지는 남자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현란한 메탈 사운드에 윤재하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놀란 심장이 형편없이 벌렁거렸다. 가옥에서 울려 퍼지리라곤 상상조차 못해본 메탈 밴드의 음악에 한껏 굳어버린 윤재하를 확인한 김석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손엔 색이 다른 음반이 쥐어져 있었는데 각각 파란색과 검은색이었다.
"냇 킹 콜과 메탈리카 중에 뭘 고를까 했더니."
"......."
"뭐, 발로 짓밟는 게 퍽 잘 어울리는 음악이긴 하네."
코끝이 빨개진 채로 이불을 밟고 있는 윤재하의 얼빠진 얼굴과 강렬한 음악의 조화가 우스웠다. 눈을 끔벅이며 시원스레 웃는 김석영을 바라보던 윤재하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곧 그의 입에서도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줄곧 굳어 있던 낯이 허물어지자, 숨어 있던 인디언 보조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비의 수염 같은 보조개가 팬 그 얼굴은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늘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가려져 있었으나, 윤재하는 웃음이 퍽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LP 음반을 통해 음악을 듣는 건 조부의 취미라고 했다. 방 한편에 자리한 원목 서랍장엔 얇은 책과 같은 음반들이 수직으로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오래된 듯한 턴테이블과 다양한 기기들은 무지한 윤재하의 눈으로 보아도 귀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이 많은 걸 전부 조부께서 모으신 거예요?"
"99%는. 나머지 1%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것에 김석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던 것 치곤 관심이 적은 편이지. 사실 난 관리도 잘 못해.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먼지를 털어주거나 바늘 끝을 점검했지만, 내 귀는 그렇게 섬세하지 않아서 애지중지 관리하던 때나 지금이나 소리에 별다른 차이를 못 느끼겠더라고. 아마 할아버지가 지금 상태를 보시면 날 죽이려 드실걸."
"......손이 많이 가는 취미네요."
"애정이 가는 것엔 굳이 손길 한 번 더 가는 법이니까."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윤재하가 원목 서랍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양한 색의 향연에 눈길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이래서 좋아하는 색을 물어봤던 거였구나.
"꺼내서 구경해도 돼. 커버 구경하는 재미가 있거든."
"그래도 돼요?"
"그럼. 왜 안 되겠어."
서점에서 책을 꺼내 보듯, 그저 손길이 이끄는 대로 선택해서 앨범을 꺼내 보았다. 트럼펫을 불고 있는 연주자의 모습, 씁쓸해 보이는 흑백 도시의 풍경, 색색의 꽃이 바람결에 휘날리는 그림 등 다양한 이미지가 존재했다.
"아까 그 시끄러운 음악은 누구 취향이에요?"
"누구일 것 같아?"
"......사실, 조부님은 아니실 것 같아요."
그리 말하자 김석영이 씩 웃었다.
"땡, 놀랍게도 할아버지."
"정말요?"
"네. 정말요."
김석영이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갈 때쯤일까. 갑작스레 헤비메탈에 빠진 조부는 틈날 때마다 음악을 틀었다. 그땐 이미 가업을 이어받아 시작하는 단계였기에 대학은 그의 목표가 아니었으나, 매일같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음악은 김석영에게도 꽤나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3 수험생의 앞에서는 재채기도 조심스럽게 한다던데. 여러모로 손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양반이셨다.
"근데 나도 싫어하진 않아. 너는 어땠어."
"처음엔 조금 놀랐는데, ......기타나 드럼 소리가 멋지긴 했어요."
"맞아. 이불 빨래에 제격이었지."
피식 웃은 윤재하가 눈가를 찌르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불쑥 방을 나선 그는 무언가를 쥔 채로 돌아와 윤재하의 앞에 섰다.
"왜요?"
"가만히 있어봐."
무릎을 굽히고 앉은 그가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윤재하는 앞 머리칼을 가로지르는 딱딱한 촉감에 눈을 떴다. 간질거리던 이마가 시원해졌다. 저를 보고 있던 김석영의 낯 위론 언뜻 장난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뭐예요?"
"눈 찌르는 거 같길래."
피식 웃음을 흘린 그가 휴대폰의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불쑥 마주하게 된 제 정수리에는 분홍색의 빨래집게가 앞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왜. 잘 어울리기만 하는데. 시원하고 좋잖아."
"별로예요.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말은 퉁명스럽게 내뱉어도 빨래집게를 빼내는 순간엔 눈치를 보듯이 시선을 보냈다.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대수롭잖은 태도로 어깨를 으쓱인 김석영이 LP 음반에 시선을 돌렸다. 엉망이 된 머리를 툭툭 정리한 윤재하가 분홍색의 빨래집게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청량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가옥의 기운이 거세졌다. 염주의 진동을 바라본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다갈색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또 저승에 가는 거예요?"
"당장은 아니지만, 곧 가야겠지. 오늘은 손님만 맞으면 돼."
"손님이요?"
"음......."
잠시 고민에 잠긴 김석영이 말을 골랐다. 윤재하는 이미 저승의 경계에 다녀온 데다 당장에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숨겨봤자 괜한 호기심만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해소되지 못한 호기심은 종종 사고를 치게 하므로 미연에 방지하기로 했다.
"그래. 나는 손님의 의뢰를 받고 저승에 매개체를 전달해. 집배원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 손님이라는 건, ......설마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 맞아."
"살아 있는 사람이 저승에 물건을 보내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 아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들만."
말문이 막혔다. 그가 저승을 오가는 이유가 살아 있는 의뢰자의 매개체를 전달해주기 위해서였다니.
"궁금해 죽겠다는 건 아는데 잠시만 참아. 지금 네 궁금증 해소해줬다간 손님 떠날 것 같거든."
사실 떠날 리가 없지만. 김석영은 부러 말했다.
"아....... 네.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진 없고. 여긴 결계로 막아둘 테니까 안채에서 벗어나지 말고 조용히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올 테니까."
"네. 그럴게요."
재촉이라도 하는 듯 염주의 진동이 강해졌다. 혀를 찬 김석영이 곧장 고택으로 향했다. 숲에 어른거리는 안개가 안채를 숨겨주었다.
"......."
김석영이 사라지자 텅 빈 안채가 낯설었다.
혼자 남게 되니 기껏 억누르고 있던 상념이 머릿속을 비집고 나왔다. 모친에 대한 걱정과 불안함이었다. 바로 어제, 적어둔 메모 속 약속에 맞춰 김석영과 저택으로 향했으나 모친의 기운은 어디에도 없었다.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마음속의 조급함과 불안함은 쉬이 가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악귀가 나타나기 전에 모친만은 달아났기를, 집어삼켜진 게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그가 멀쩡하게 존재한다 해도 제 주변에 악귀가 맴돈다면 모친 또한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하루라도 빨리 악귀를 처리해야 하지만 윤재하는 그 방법을 몰랐다. 퇴마는 그에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었으니까. 박수무당이었던 조부의 신 줄이 제게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그랬다면 윤재하는 모친과 함께할 수 없지 않았을까. ......그에겐 차라리 그게 나았을 테지만.
"그만 생각해. 그만 생각해. 그만......."
불안에 잠식되지 말자. 내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것이다. 엉망으로 뒤섞인 마음을 억누른 윤재하가 시간을 확인했다. 김석영이 돌아오기 전에 식사를 준비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부러 유난히 손이 많이 갔던 메뉴를 골랐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면 잠시나마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곧장 쌀을 씻어 안치고 쌀뜨물을 준비했다. 저택에서 가져온 냉이의 뿌리와 잎 사이에 낀 흙 역시 꼼꼼히 제거했다. 저녁 메뉴는 냉이가 듬뿍 들어간 된장국과 잡채였다. 특별히 잡채는 기름기가 많이 돌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틈틈이 뒷정리하며 식사 준비를 마칠 때쯤에 고택을 둘러싼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황급히 주방에서 나온 윤재하가 안채로 걸어오는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피로가 묻어난 낯을 향해 '고생하셨어요'라고 말하자 김석영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왜 그래요?"
"아니. 그냥."
노인이 아닌 누군가가 저를 맞아주는 게 신기해서. 굳이 뱉어낼 필요가 없기에 삼켜버린 김석영이 코끝에 맴도는 냄새에 웃음을 흘렸다. 새색시도 아니고, 제가 일을 보는 사이 저녁을 준비한 모양이다.
"향긋한 냄새가 나네."
"아, 냉이된장국 끓였거든요. 지금 막 차렸으니까 얼른 들어와요."
긍정적인 표정에 안도한 윤재하가 황급히 주방으로 들어섰다. 적당량의 밥을 푸고 수저를 놓자 김석영이 손에 물기를 닦아내며 들어왔다. 고슬고슬한 흰쌀밥과 냉이의 향긋함이 올라오는 된장국, 푹 익은 김치와 윤기가 흐르는 잡채를 확인한 김석영이 느릿하게 눈을 끔벅였다.
"오늘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손 빠르네, 윤재하."
"혼자 있으려니 좀 적적해서, 그냥 집중하다 보니까......."
멋쩍게 웃은 윤재하가 수저를 들고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자리에 앉은 김석영이 찌개를 맛보았다. 표정을 살핀 윤재하는 곧장 이어지는 부지런한 수저의 움직임에 안도했다.
"뭐든 빨리 배우는 편인가?"
"네?"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어 의아하게 바라보자 김석영이 느른하게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식사 말이야. 첫날엔 최악이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금방 늘길래. 다른 것도 금방 배우는 편인가 싶어서."
"......좀 그런 편이긴 해요."
긍정하는 스스로가 퍽 쑥스러웠는지 시선을 내리깔았다.
"공부도 잘하겠네. 이상현이랑 같은 대학이라며. 그 애가 고등학생 땐 의외로 성적이 좋았거든."
지금은 맞지도 않는 전공 선택해서 공부를 놓아버렸지만. 아마 평생 치의 공부 머리를 고등학생 때 전부 소비해버린 모양이다.
"아....... 그냥, 등록금은 전액 면제받으려고 노력해요."
공부라도 하지 않으면 붙잡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과는 다르게, 공부는 노력을 배신하지 않았으므로. 성적은 그가 유일하게 느껴볼 수 있는 성과였다.
"기특하네."
담백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귓가가 붉어진 윤재하가 애꿎은 밥알을 헤집었다. 칭찬에 면역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자리는 어떻게 됐어. 제대로 구하고 나가려던 게 맞아?"
"......아, 맞다."
윤재하의 얼굴이 덜컥 굳었다.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표정 보니 제대로 구하긴 했나 본데."
"......그렇긴 한데, 생각해보니까 모레가 근무 첫 날이에요. 어떡하죠?"
"어쩌겠어. 못 나간다고 연락해. 지금은 되도록 혼자 있을 상황을 만들지 마."
대수로운 투에 윤재하가 침음을 삼켰다.
"아르바이트도 아르바이트지만, 고시원 계약이......."
"고시원?"
김석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괜스레 멋쩍어진 윤재하가 시선을 피했다.
"그냥 한 달만 단기로 지내려고 했던 거예요. 근데 월세를 이미 내버려서......."
"해지해."
"......네."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불쑥 아까의 일이 떠오른 윤재하가 물었다.
"그런데 아까 살아 있는 사람이 의뢰자라고 했잖아요. 산 사람이 왜 저승에 무언가를 보내죠?"
"왜긴. 잊지 못해서겠지."
"잊지 못해서요?"
"사실 제대로 설명하자면, 순서가 바뀌었어. 이곳을 찾는 의뢰자들은 뭘 알고 찾아오는 게 아니거든. 그저 먼저 떠나보낸 이들을 그리워하며 저들의 소망을 간절히 바란 자들이 선택되는 거야. 나는 그렇게 선택된 의뢰자들에게 이승과 저승을 연결할 수단을 제시해. 매개체를 저승에 전달할 기회를 주는 거지. 못다 이룬 미련이나 마음을 전달할 기회. 지독한 염원을 해소할 기회. 그들의 염원엔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 있고 해소할 방법도 다양하겠지만 사실 그 수단은 정해져 있는 편이야. 대체로 편지나 물건이거든. 집배원이라고 이해하면 된다는 게 그래서야. 이전까진 의뢰자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들을 발신자라고 부르고."
"아......."
그럼 그때 보았던 기억이 의뢰자의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손에 쥐고 있던 액자는 의뢰자가 저승에 보내는 물건이었던 걸까. 머릿속의 의문을 묻자 김석영이 선뜻 답을 내어줬다.
"아니. 그건 저승에 있을 수신자를 찾아가기 위한 수단이야. 나는 생전 수신자의 물건을 통해 그들을 찾아갈 수 있어. 물건에 깃든 자취가 수신자의 주소를 대신하는 거지."
"그럼 수신자의 물건이 없다면 의뢰를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거네요?"
"맞아. 종종 있어."
씁쓸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윤재하가 읊조렸다.
"허무하겠네요."
"그렇겠지."
망자의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괴로워져서 회피하듯 물건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이지 않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이 그렇지 못했던 자들이었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게 되는 자들을 김석영은 수없이 만나왔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기회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들은 더욱 처절하게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김석영은 저와 만났던 그들의 기억을 지웠다. 가업의 암묵적인 룰이기도 했다.
"그런데요."
생각에 잠겨 있던 윤재하가 시선을 들어 바라보았다.
"왜 남들의 바람을, 그쪽이 들어줘요?"
"......."
꽤나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의외로운 눈으로 말간 낯의 청년을 응시하던 김석영이 웃음기를 매달았다.
"뭐, 업(業) 같은 거야. 조상이 저지른 일에 대한 응보가 가업으로 이어지면서 업을 씻어가는 거지."
"얼굴도 모르는 조상이 저지른 일을 왜 현세의 내가 감당하죠?"
"큽......."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것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찌푸린 미간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왜 웃어요."
"아니, 뭐 동감하는 바이긴 한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니까 웃기잖아."
"진지한 게 왜 웃겨요?"
하물며 언제 적 연좌제란 말인가. 얼굴도 알지 못하는 먼 조상이 저지른 일을 왜 그 후손들이 감당해야 하는지. 후손들이라고 그 피를 이어받고 싶었던 것도 아닐 텐데.
"어쩌겠어. 거스를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리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일하는 건 아니야. 실제로 내 윗대들은 돈도 많이 모았어. 이만한 가옥과 저택을 두는 걸 보면 모르겠어?"
"아......."
퍽 당황한 듯한 얼빠진 탄성이었다. 재차 웃음을 흘린 김석영이 돌연 시선을 가늘게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윤재하."
"네?"
"나를 그쪽이라고 지칭하는 건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 안 해?"
다갈색의 눈이 당황하며 흔들렸다.
"......어, 그게......."
"호칭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기를 머금은 눈으로 윤재하를 응시한 김석영은 생각할 시간도 채 주지 않고 물었다.
"뭐라고 부를 거야."
"......집주인님."
"발음하기도 힘들겠네."
심드렁한 대꾸가 이어졌다. 다급하게 생각에 잠긴 윤재하가 눈을 크게 홉떴다.
"사장님?"
"살다 보니 사장님 소리도 다 들어보네."
"아, 맘에 들어요?"
화색을 띠며 묻자 김석영이 입매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들겠어?"
"......그럼 그냥 정해주든가요."
기세가 꺾인 윤재하가 불퉁하게 읊조렸다.
저게 지금 일부러 저러나?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괸 김석영이 윤재하의 얼굴을 훑었다. 노골적인 시선에 목석처럼 굳어진 그가 슬쩍 눈을 피했다. 결국 피식 웃음을 삼킨 김석영이 답을 내어주었다.
"형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정말 그렇게 불러도 돼요?"
예상치도 못한 호칭에 놀란 표정이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어 헛웃음을 터뜨린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쪽보다는 낫다고 봐."
빼곡하게 찬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눈을 깜빡이던 윤재하가 해사한 얼굴로 웃었다. 그 모습엔 그가 처음 만났던 어린 소년의 모습이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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