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박수무당인 아비의 삶과 환경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무속신앙이라면 지긋지긋했고 제 아비가 부끄러웠다. 그런 아비의 뒷바라지를 감당하는 어미가 미련해 보였고, 날 때부터 제게 주어진 환경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둔 곳은 동생이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은 부모보다도 언니인 그를 잘 따랐다. 어린 동생의 온기를 끌어안다 보면 불안정하던 마음이 곧잘 잠잠해지곤 했다.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동생이 아비처럼 귀신을 본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절망했던 것도 같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는데, 귀신 따위를 본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소름 끼치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제 가족을 버렸다. 악착같이 공부한 덕분에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잠을 아껴가며 공부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는 마치 하루를 마지막인 것처럼 보냈다. 그만큼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직장을 갖게 되었고 생활도 안정을 찾아갔다. 여유를 갖게 된 후로 불쑥불쑥 제 어린 동생의 얼굴이 생각났으나 애써 삼켜버렸다. 가족을 버린 언니 따윈 동생 역시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소소하게 시작한 사업은 나날이 성장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아이는 다소 힘겹게 낳았지만 그에게 큰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남편이 사고로 죽기 전까지는.
자의로 가족을 버린 것과 타의로 가족을 잃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그는 말도 떼지 못한 어린아이를 붙들고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누군가의 세상은 끝나버렸는데, 남겨진 자들은 매일 같이 아침을 맞이한다. 그 사실이 사무치게 괴롭게만 느껴졌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러한 순리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
아이는 그에게 살아갈 힘이 되어주었다. 아침을 맞아도 괴롭지 않게 해주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삶 역시 행복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가 행복해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이마저 그에게서 빼앗아버렸다. 아이는 손 쓸 수 없는 지독한 병을 앓고 떠나버렸다.
가족을 버린 벌을 받는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내게 직접 벌을 주시지, 왜 죄 없는 사람들에게 벌을 주나. 원통하게 흐느끼던 그는 불쑥 깨달았다.
아, 사랑하는 사람들을 건드는 게 가장 괴로운 형벌인 거구나. 그렇다면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게 맞구나.
아침이 밝아오는 게 괴로웠다. 눈을 감으면 찾아오는 어둠이 죽음의 형태가 되어 그를 집어삼키길 바랐다. 하지만 그를 찾아온 건 지독한 꿈의 형태였다.
엄마. 엄마아.......
아이가 그를 찾아 헤맸다. 끝없는 어둠 속을 허우적거리며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여기 있어. 엄마 여기에 있어.
아무리 외쳐도 들리지 않았고, 있는 힘껏 달려도 아이에게 닿지 못했다. 지독한 제자리걸음만 하염없이 이어졌다. 아이를 집어삼키는 어둠에조차 도달하지 못한 채,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다. 정말, 참담한 꿈이었다.
"......아이가, 죽은 아이가 자꾸만 꿈에 나와요. 어둠 속에서 울어요."
벼랑 끝에 몰린 그가 매달린 것은 그토록 원망하던 무속신앙이었다. 용하다는 무속인을 찾아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가 버린 가족과 그를 떠나간 가족. 화려한 화장으로 치장한 무속인은 버럭 호통을 쳤다. 업보를 맞는 것이라 말하면서.
"노잣돈이 쓸모없어졌구나, 쯧쯧. 아이가 엄마를 찾아 헤매고 있어. 가엾어라....... 정처 없이 홀로 떠도는구나. 외로이 구천을 떠돌며 제 어미를 찾고 있구나. 가여운 것. 가여운 것 같으니......."
"어, 어떡해, 어떡해....... 아, 제발, 제발 좀 도와주세요. 우리 아이 좀 구해주세요......."
흐느끼는 그를 향해 무속인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이의 혼을 찾아서 달래야 해."
그는 무속인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하자는 대로 할 테니 아이를 구해달라고 애원했다. 구천을 떠도는 혼령을 찾아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한 천도굿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그들의 의식을 따랐고 어느새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굿을 치르고 난 후로도 아이의 꿈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정신 차려. 굿이 잘못된 게 아니라, 애초에 그건 네 마음의 문제였어. 꿈에 의미 부여하지 마. 다들 잘 갔을 거라고 믿어줘야지."
부적과 무속인의 연락처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친우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부친을 찾아가 보았으나 그가 떠나기 전에 살았던 집은 이미 허물어진 지 오래였다. 마음의 병은 그를 잠식시켰고 비로소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와주었다.
그는 구천을 떠돌았다. 저를 찾아 헤매고 있을 아이를 찾기 위해 떠돌았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는 떠돌았을 뿐이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그의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
「당신의 슬픔을 감히 이해해요. 나 역시 아이를 잃었거든요.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네요.」
따스하게 웃으며 말하지만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그의 곁에는 몇몇 망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실로 그는 아이들을 거느리는 선생님처럼 그들을 보호했고, 그 모습은 외로웠던 마음을 빠르게 허물어버렸다.
「아이를 찾고 있다고 했었죠?」
「네.」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신과 비슷한 느낌의 아이가 있어서요.」
「저, 정말요? 어디서요? 어디에 있어요?」
다급하게 쏟아지는 질문에 쓴웃음을 지은 그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런데 사실, ......망자는 아니에요.」
「......내 아이는 죽었어요.」
「알아요.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당신과 비슷한 느낌이 들더군요. 상성이 맞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산 자와 상성이 맞아봤자 뭘 할 수 있다고.」
힘없이 읊조리는 말에 웃음을 터뜨린 그가 묘한 얼굴을 했다. 퍽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
「그래요. 그렇지만 뭐, 혹시 궁금하다면 한번 찾아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어미를 잃은 가여운 아이거든요.」
싱긋 웃은 그는 병원의 이름과 호수를 알려주었다. 무시하려 했으나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미를 잃은 가여운 아이거든요.」
그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결국 그는 저도 모르게 외워버린 병원과 호수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엄마, 엄마아....... 엄마, 미안해......, 미안해요, 잘못, 잘못했어......."
「.......」
아이를 만났다.
"가지 마, 엄마, 흐으, 가지 마아......."
아이는 숨이 모자랄 만큼 설피 울었다. 끅끅거리는 숨소리가 위태로웠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우악스럽게 옷자락을 붙들었다. 절망과 외로움이라는 낭떠러지에 선 그에게, 아이의 손은 구원처럼 다가왔다.
「안 갈게.......」
그는 옷자락을 쥔 손등에 손을 얹고 작은 아이의 몸을 감싸 안았다.
「안 갈게. 가지 않을게. 옆에 있을게.」
아이의 온기는 느낄 수 없었지만 형체감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이는 늘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하루를 살았다. 마음에 여유 따윈 없어 보였다. 아마 평범함을 포기한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하긴,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 얹혀사는 삶만으로도 벅찰 텐데 귀신을 보는 영안까지 지녔으니, 아이의 삶은 평범할 수 없는 조건이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진짜 제 아이처럼 느껴졌다. 사실 나의 진짜 아이는 이 아이가 아닐까. 이제는 희미하기만 한 삶의 기억은 조작된 꿈이 아닐까. 그렇게 여겨질 정도로 아이, 윤재하는 그에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정말 고향에 가도 되겠어요......?"
제안받은 일거리의 허락을 묻는 윤재하는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숙식이 제공되는 일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 왜 저렇게 뜸을 들일까 고민하던 그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일자리의 장소가 윤재하의 고향이라는 것을. 고향은 가족을 잃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라는 것을.
고민에 잠긴 그는 선생에게 의견을 구했다.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려다 더 큰 아픔을 끌어안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일자리의 장소를 입에 담자 선생은 묘한 얼굴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결론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거절할 상황이 아닌 것 같네요.」
「......그래도 그곳은 가족을 잃게 된 곳이잖아요. 괜찮을까요?」
「언제까지고 과거에 얽매일 순 없지요. 산 자는 당장의 안위도 중요하니까요. 그 친구에게 필요한 건 잠시라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에요. 숙식이 제공되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선생이 인자하게 웃으며 다독여주었다. 괜찮다고.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정 불안하다면 저도 함께 가겠다고. 선생의 말은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힘이 있었다. 그래,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되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게 된 저택은 그가 생활하기엔 너무나도 강한 힘을 지닌 터였다. 윤재하와 함께하면서 맞물려진 상성이 아니었다면 참지 못하고 달아났을 것이다. 윤재하가 터에 적응하는 만큼 그 역시 기운에 감응하여 혹독한 터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는 윤재하가 안정적인 잠자리를 얻고 규칙적인 식사를 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보다 끝은 빠르게 다가왔고, 그들이 저택을 떠나려던 날.
"......나 마지막으로 인사만 하고 올게."
윤재하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재, 재하가 사라졌어요. 기운 자체가 통째로 사라졌어요......!」
「일단 진정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알려줘요.」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숨을 가다듬은 그가 말했다.
「떠, 떠나는 날이었는데, 재하가 인사를 하겠다고 올라가버렸어요. 집주인이 있는 곳으로요. 그러다 불쑥 재하의 기운이 사라져서, 숲길을 가봤는데, 저로선 도저히 앞으로 갈 수가 없어서.......」
「......기운 자체가 사라지다니. 죽었다는 건가요?」
「모르, 모르겠어요.......」
두려움에 흐느끼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선생이 읊조렸다.
「혹시 모르니, 당신은 일단 밖을 찾아보세요. 저택과 숲길은 제가 가서 지켜보죠. 하루는 좀 이를 것 같고, ......사흘 후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요.」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곧장 바깥을 헤집었다. 동네를 벗어나 윤재하가 한 번이라도 발길이 닿았던 곳이라면 닥치는 대로 향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윤재하는 없었다. 약속한 사흘이 되고 선생을 만난 그는 침잠된 낯을 마주하곤 덜컥 표정을 굳혔다.
「왜, 왜 그러세요?」
「......재하의 명줄이 끊긴 것 같아요.」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선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숲길을 지나 그곳의 주인을 마주쳤어요. 정작 그자를 만나러 갔다던 재하는 옆에 없더군요. 하지만 분명 그자에게서 재하의 기운이 묻어나 있었어요. 마치 잡아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안광이 붉게 타올랐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선생이 침잠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자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더군요. 미안해요, 달아날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에 그곳에 대해 조금 알아봤는데.......」
「.......」
「그 터는 저승으로 가는 입구였어요. 그곳의 주인은 저승을 오가는 존재고, 산 자들의 명줄을 대가로 일을 해요. 분명 재하의 명줄을 빼앗아 저승으로 끌고 간 거겠죠. 그래서 기운이 사라졌던 거고.」
「......죽여, 죽여버릴 거야.......」
일렁이는 검은 기운과 함께 뚝뚝 떨어지는 피눈물을 손으로 훔친 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진정해요. 희소식이 있으니까.」
「......희소식?」
「명줄이 끊겨서 저승길을 오른 건 맞지만 영혼만은 달아난 모양이에요. 저택을 벗어난 재하의 영혼을 봤다는 자들이 있어요. 그 아이의 영기는 워낙 특별하니까 혼동할 수도 없죠.」
「그, 그럼.......」
「이승을 떠돌고 있을 거예요. 당신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하염없이 이승을 떠돌았다. 하지만 윤재하를 찾을 순 없었다. 한 줄기의 희망은 새롭게 피어오른 악(惡)에 의해 타들어갔다. 모든 것이 타들어 가고 난 자리에 남은 건 김석영을 향한 증오뿐이었다.
그래서 그를 죽여버리기 위해 돌아갔다.
「그런데 네가 있었던 거야. 정확히는 네 모습을 한 껍데기가.」
"......."
일그러진 낯에 연신 눈물이 흘렀다. 형체의 손을 붙든 손이 떨렸다.
"엄마의 얼굴을 하고 있던 게......."
모친과 피를 이은 자매였기 때문이었나.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그의 핏줄이었던 것이다.
「......염주의 기억을 보고서, 나도 깜짝 놀랐어. 그 애가 아주 어릴 때 내가 떠나버려서....... 그 애가 자란 모습을 본 적이 없거든. 나와 그렇게 닮았을 줄.......」
누가 봐도 피를 이은 가족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정하고 싶어서 떠나버렸던 혈연은 결코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귀신을 보는 아비와 귀신을 보는 동생. 끔찍하게만 느껴졌던 그들이 이제 와 사무치도록 애처롭고, 괴롭도록 가여웠다.
「어떻게 너를 보고도 몰랐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미안해, 재하야. 미안해.......」
서글프게 흐느끼는 형체를 끌어안은 윤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나는 당신으로 인해 삶을 버틸 수 있었다고. 오히려 내 곁을 지켜주어서 고맙다고. 그렇게 끊임없이 속삭인 윤재하가 옅게 웃었다. 끌어안은 몸을 떼어낸 형체가 괴로운 얼굴을 하며 침통하게 읊조렸다.
「재하야, 미안해. 나는, ......나는 그자가 미워. 가족을 버린 주제에, 잊고 살아가던 주제에 할 말이 아니란 걸 알아. 하지만 그자가 아니었다면, 너희가 만나지 않았다면 아버지도, 윤영이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자꾸 그 생각만 나. 그자가 너무 미워.......」
원망의 어조와 고통의 낯을 마주한 윤재하가 속삭였다.
"어릴 때의 나는 많이 외로웠어요."
「.......」
"엄마의 사랑을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죠. 하지만 충족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요.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나는 하루의 끝만을 상상했어요.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건 하루가 끝나는 시점에서만 가능했으니까. 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시간이요."
「재하야.......」
"그런데 형을 만났어요. 물론 호의가 처음이었던 건 아니에요. 어린아이를 향한 어른들의 호의로 버틸 수 있었던 부분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형이 달랐던 건,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던 걸지도 몰라요. 그저 생활이 여의치 않아 가여운 아이, 겉돌아 안쓰러운 아이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태어난 호의가 아니라."
「.......」
"같은 세상을 공유한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그 눈이 날 허물었던 거예요. 나는 형으로 인해 하루를 시작하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기대감이 생겼어요. 오늘은 형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기억이 보여준 아이의 세상을 떠올렸다. 슬픔 어린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형체의 손을 잡은 윤재하가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형을 만날 거예요."
「.......」
"그렇게 된다면 엄마도, 할아버지도 반드시 지킬 거예요. 나에게 형은, 그만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존재예요. 그러니까, 원망의 대상이 필요하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형이 아닌 나로 하면 안 될까요?"
커다란 손안에 감춰진 형체의 손끝이 움찔했다. 감정이 응집된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
「재하야, 내가 어떻게, 너를 원망하겠어. 못해, ......그런 거.」
부모는 아이를 이기지 못한다. 아니, 차마 사랑하는 존재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리라. 형체는 커다란 손을 마주 잡으며 윤재하를 눈에 담았다. 설피 울던 연약한 아이는 없다. 지켜줘야 할 것만 같았던 아이 역시 없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스스로의 몫을 감당할 줄 아는 남자가 되었다. 제 삶의 방향을 선택할 줄 아는 용기를 지닌.
「.......」
윤영아.
생각해보면 너는 참 강한 아이였었지. 비겁한 언니를 따스하게 바라봐주는 아이였지. 새벽빛이 내려앉은 작은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길을 느끼면서도, 혹여 주저하게 될까 봐 자는 척을 하던. 멀어지는 길목에서 몸을 숨기고 저를 버린 도망자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아이.
그런 너의 아이는 너를 닮아 강인하고도 다정한 성정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을 했구나. 미련에 허덕이던 어리석은 나와는 달리, 네가 왜 그 먼 길을 떠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다. 분명, 네 아이를 믿은 거겠지. 너의 믿음을 나 역시 이어받아야 하겠지?
「원망하지 않아. 그러지 않을게. 이제 더 이상, 네가 아픈 일 하지 않을게.」
"고마워요. ......엄마."
모든 게 무너지는 것만 같았던 어린 날. 또 다른 엄마가 제게 찾아와주었다. 삶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곁을 지켜주는 그 존재 덕분이었다. 그는 분명 저의 '엄마'였다.
활짝 웃은 형체가 커다란 몸을 안아주었다. 머리칼을 쓸어주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작은 품에서 온기가 느껴진 게 비록 그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윤재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 *
"인사하러 갔던 그때, 멋대로 형의 영역을 침범했던 탓에 저승의 경계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한 아이를 만났는데......."
「아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한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온몸에 쓸모없는 잡동사니를 달고 있었는데, 망자들의 물건을 제 노잣돈과 교환하면서 경계에 머물고 있었어요."
「......노잣돈.」
표정이 기묘해진 형체가 단어를 읊조렸다.
"아이가 지니고 있던 잡동사니 중엔, 이 염주 알이 있었고요."
「네 염주 알을? 어떻게?」
"누군가가 떨어뜨린 걸 주웠대요. 엄마라고 착각할 만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삼도천을 건너기 전에 손에서 떨어졌다고. 다시 돌아와서 잡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아이가 대신 주웠다고 했어요."
「.......」
"염주 알을 주운 아이는 저승 삯을 등에 업고 나타났대요. 삼도천을 건너는 건 무리도 아니었을 텐데, 고집스럽게 경계에 남았다고.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려는 것처럼."
형체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손을 꽉 붙잡은 윤재하가 설핏 미소 지었다.
"그 아이가 엄마라고 착각했던 사람은 진짜 돌아가신 엄마였던 거겠죠. 그리고 그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나구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내가 말했죠?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고."
아이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래 헤맸으니, 이제 만나야죠. 형에게 가요. 형이 도와줄 거예요."
「응. 응.......」
환희가 형체를 찾아왔다. 기쁨에 허물어진 얼굴은 보는 이도 미소를 짓게 해주었다. 그를 마주하자 윤재하는 참을 수 없이 김석영이 보고 싶었다. 그를 끌어안고, 마음을 속삭이고, 설득하고 싶었다. 곁에 있어 달라고. 함께 살아보자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형체의 손을 꼭 잡은 윤재하가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커헉......!」
불쑥 튀어나온 검은 손이 형체의 목을 조였다.
"엄마─!"
등줄기가 뻣뻣해지는 선득한 감각과 비릿한 혈 향이 뒤엉킨 악취. 앙상한 검은손이 형체의 몸을 옭아맸다. 끅, 끄흑......! 동공이 수 갈래로 갈라진 형체가 괴로움에 발버둥 쳤다. 눈앞이 새카매진 윤재하가 달려들었다.
"엄마, 엄마......! 놔, 놔─!"
검은 형상에게서부터 흘러나온 원혼의 손들이 윤재하의 발목을 붙잡았다. 거세게 날뛰는 영기에 귀곡성을 내지르며 타들어 갔으나, 검은 형상은 끊임없이 원혼을 뱉어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이지러진 원혼은 질척한 독을 내뿜으며 온몸을 옭아맸다.
거칠게 몸부림치며 원혼들을 떨쳐내는 윤재하의 망막 위로 어둠에 집어삼켜진 형체가 맺혔다.
"엄마──!"
「응. 재하야.」
형체를 집어삼킨 악귀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그 순간,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걸 느꼈다. 온몸을 옭아매던 원혼들이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영기에 타들어갔다. 발목을 잡아채며 걸음을 방해하는 것들을 짓밟고 뛰쳐나간 윤재하가 검은 형상의 목을 붙들었다.
"내놔!"
「뭘? 아, 이거?」
형체의 얼굴로 낯가죽을 갈아 끼운 악귀가 환히 웃었다.
「안녕, 재하야.」
* * *
딸랑―
금줄에 매달린 은색의 종이 울렸다.
"윤재하......."
단단하던 기운이 빠르게 흩어졌다. 몸 안에 만들어놓은 막이 깨지고 있었다. 낯을 굳힌 김석영이 욕을 짓씹었다. 흐려지는 기운의 자취를 향해 달렸다. 실낱같은 기운이 멈춘 곳은 허물어진 저택이었다.
"하."
검은 안개에 뒤덮인 건물에선 지독한 악취가 흐르고 있었다. 한번 맡아본 것이었다. 무저갱과 같은 흑안에 이채가 스몄다. 으득, 이가 갈린 턱 끝에 힘이 들어갔다. 서늘한 낯의 남자는 악취의 소굴을 향했다.
저벅―
무너진 콘크리트의 잔해와 뒤엉키고 녹아 흐른 원혼들이 발아래에 짓이겨졌다. 칼날처럼 벼려진 기운에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타들어 간 원혼의 잔해가 바닥에 가라앉았다. 기이한 적요가 내려앉은 공간의 한가운데에 선 김석영은 삐걱대는 나무 계단에 앉은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무릎에 묻은 얼굴을 드러낸 윤재하가 싱긋 웃었다.
"안녕? 또 보네."
대꾸 없이 단번에 다가간 김석영이 그의 멱살을 쥐고 손을 뻗었다. 푹, 몸 안에 꽂혀 들어간 손이 내부를 헤집었다. 웃는 낯으로 제 가슴께를 바라보던 윤재하가 속삭였다.
"아파. 꺼내지 마."
"닥쳐."
콰드득, 손에 잡힌 것을 단번에 끄집어낸 순간이었다.
"쿨럭─!"
몸을 숙인 윤재하가 울컥 피를 토했다. 이지를 잃은 채 나뒹군 영가의 잔해와 핏덩어리를 바라보던 김석영이 몸을 굳혔다.
"쿨럭, 그러게, 내가 꺼내지 말라고 했잖아."
"......무슨 짓을 한 거야."
"함부로 꺼내면 죽을 수도 있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잖아!"
멱살이 조인 윤재하가 눈매를 늘어뜨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없어. 상성을 완벽하게 맞췄을 뿐이야."
"뭐?"
"완벽하게 완성된 상성이 육체와 일치했다는 말이야. 몸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데, 함부로 꺼내면 상처가 나지 않겠어?"
완성된 상성. 윤재하와 상성을 맞출만한 대상은 모친으로 여긴 그 망자뿐이었다. 그가 진짜 모친이 아닌 것을 깨닫고 헤어진 그 날 이후로, 다시 만난 적이 있던 걸까. 그렇다 해도 이미 가짜라는 걸 깨달은 이후인데 어떻게 상성을 올릴 수 있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 내가 알려줄까?"
윤재하의 탈을 쓴 악귀가 은밀한 어조로 속삭였다. 사납게 노려보던 시선에서 찰나의 틈을 발견한 그것이 히죽 웃었다.
"네가 보았던 그 망자는 진짜 윤재하 모친의 누이였어."
"......뭐라고?"
김석영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윤재하의 곁을 지킨 망자가 피가 이어진 이모였다는 말이야. 서로 모르고 있었지만."
"알아듣게 제대로 설명해."
"이런, 서로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좀 어려웠나 보지?"
비소를 머금은 악귀가 히죽거리며 말을 잇는다.
"말 그대로야. 그 둘은 서로를 만난 적이 없어. 살아생전의 그 망자는 가차 없이 제 가족을 버렸거든. 성인이 되기 무섭게 떠났으니, 윤재하가 제가 버린 동생의 아이란 걸 모를 만도 하지. 아, 물론 윤재하도 마찬가지고."
멱살을 잡아 쥔 손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굳어버린 낯짝을 물끄러미 뜯어보던 악귀가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서로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핏줄이란 걸 알게 됐으니, 상성이 채워질 수밖에 없지. 안 그래? 덕분에 몸을 뺏는 게 한결 수월해졌어. 지켜보다가 눈물이 다 날 뻔했지 뭐야."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몸뚱이를 눌러버린 김석영이 손을 뻗었다. 기운을 실은 손끝이 육체를 파고들었다. 내부를 휘젓는 푸른 영기에 미간을 찌푸린 악귀가 쿨럭, 피를 토했다.
"뭐야, 쿨럭......, 이 애가 죽어도, ......상관없나 보지?"
핏발 선 눈이 사납게 뒤엉켰다. 닥치는 대로 끌어모은 원혼을 단번에 빼냈다. 촤아악, 길게 뒤엉킨 원혼이 육신에서 빠져나왔다. 동시에 손안에서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그들을 단번에 태워버린다. 허공에 흩날리는 잿더미를 바라보던 악귀에게 김석영이 읊조렸다.
"네 놈을 빼낼 거야. 윤재하 역시 그걸 바랄 테니까."
"손상을 입을 텐데? 끝내 죽게 될지도 모르고."
"손상은 감수해야지. 껍데기를 빼앗기는 것보단 나을 테니."
이대로 두었다간 손도 쓰지 못하고 악귀에게 몸을 빼앗기게 된다. 저것이 윤재하의 몸과 일체화가 되기 전에 빼내야만 했다. 그로 인해 육체가 손상되는 건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김석영은 지체 없이 손을 뻗어 윤재하의 몸을 파고들었다. 최대한 많이, 한 번에 끌어내기 위해 힘을 불어넣고 원혼들을 붙들었다.
"냉정하긴. 봐주는 법이 없네."
피범벅이 된 입으로 웃음을 터뜨린 악귀가 내부를 파헤치는 손을 붙들었다. 꽈드득, 조여오는 거센 악력에도 김석영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붙들 수 없을 만큼 원혼을 모으고 나서야 단번에 손을 빼냈다.
촤아악─! 커다란 포물선을 그린 원혼들이 불꽃에 타들어갔다. 그때였다.
푸욱─!
"크흑!"
날카로운 무언가가 살갗을 후벼팠다. 콰득, 콰드득.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날것의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불에 탄 것처럼 번져오는 고통에 비틀거린 김석영이 제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뜯어진 나무 계단의 잔해가 칼날처럼 박혀 있었다. 쑤셔 넣은 나무 잔해를 단번에 비틀어 빼낸 악귀가 김석영의 몸을 밀쳤다.
"......!"
쿵, 바닥에 나뒹군 그가 숨을 삼켰다. 뚝뚝 떨어지는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물들여갔다. 잔가시가 박힌 손을 털어내던 악귀는 피 웅덩이를 발끝으로 문질렀다. 발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피의 흔적이 그림을 그려냈다.
"미안하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가만히 있었다간 내 그릇이 손상될 것 같아서."
하아, 하아. 옆구리를 붙든 김석영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벌어진 살갗으로 쉴 새 없이 피가 흘렀다.
"사실은 네 몸도 갖고 싶었는데, 명줄이 짧은 줄은 몰랐어. 수명 다한 빈껍데기는 쓸모가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지."
"큭─!"
웅크린 상체 위로 악귀가 털썩 주저앉았다. 벌어진 살점을 허벅지로 문지르자 김석영의 낯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식은땀이 밴 이마를 손등으로 훑은 악귀가 물었다.
"죽음을 앞둔 심경이 어때."
숨을 몰아쉬며 고통을 참아내던 김석영이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좆 같아."
힘없이 내뱉은 욕지기에 덩달아 웃음을 터뜨린 악귀가 눈을 휘었다. 퍽 탐나는 육체인데, 명을 다하고 썩어들어갈 생각 하니 아쉬웠다.
"우리도 꽤나 깊은 인연인데. 아쉽게 됐어."
창백하게 질린 낯에 의아함이 서렸다. 그제야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은 악귀가 눈썹을 늘어뜨린다. 짜증스레 헛숨을 터뜨린 김석영이 읊조렸다.
"그 애의 얼굴로 그딴 표정 짓지 마."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럼 알려주던가. 과다 출혈로 죽기 전에."
짜증 섞인 대꾸에 어깨를 떨며 웃음을 흘린 악귀가 묘한 낯으로 바라보았다.
"모르는 게 나을 텐데."
"그건 듣고 난 후에 판단하지."
"그렇다면, 뭐."
바라는 대로 해줘야지.
"이윤상. 그자가 날 가뒀지. 아, 이름은 낯선가? 윤재하의 조부라고 말하면 이해하려나?"
"하아, ......이봐. 죽기 전에 말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곧 숨넘어가겠는데."
출혈이 심해 정신이 혼곤해지고 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짓씹으며 호흡을 다스린 김석영이 손끝에 힘을 가했다. 윤재하의 육체에 자리 잡은 악귀의 기운을 헤아리며 조심스럽게 제 영기를 조절했다. 부러 짜증스레 투덜거리는 낯을 하고 본론을 요구하자 윤재하의 거죽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미안. 배려가 없었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 요약해서 말 해줘."
"요약이라......."
말을 정리하려는 듯 찰나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손끝으로 집중되는 영기가 완성되고, 흐릿한 시야로 불순한 기운이 뭉친 곳을 찾은 그때. 다문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본 김석영이 빠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하긴 했나 보구나."
손을 낚아챈 악귀가 가볍게 힘을 가했다. 뚜둑, 손목이 꺾였다. 벌어진 입술 너머로 소리가 되지 못한 숨소리만 터져 나왔다. 경직된 목에 핏대가 돋아났다. 가슴을 들썩이며 고통을 짓씹는 김석영을 무감하게 바라보던 악귀가 무릎으로 옆구리를 문질렀다.
"큿─!"
"허술한 걸 보니."
꺾여버린 손목을 달랑달랑 흔들며 말하는 어조엔 김이 샌 기색이 역력했다. 고통에 일그러진 낯을 향해 얼굴을 들이민 악귀가 속삭였다.
"실망스럽구나. 좀 더 재밌게 해줄 줄 알았는데."
"......그래?"
실핏줄이 터진 눈을 가늘게 뜬 김석영이 답했다.
"그럼 이건 어때."
푸욱─!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왼손이 빠르게 꽂혔다. 덜컥 몸을 굳힌 악귀가 시선을 돌렸다. 등가죽을 파고든 손에서 푸른빛의 영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휙, 상체를 일으킨 김석영이 윤재하의 몸을 단단하게 껴안고는 왼손을 강하게 비집어 넣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대체로 사람의 손은 두 개거든."
한 가지에 시선이 가면 나머지 한 가지는 곧잘 잊히기 마련이다. 지금처럼 기력이 소모되는 상황에서 직접적인 전면전은 불리하기만 했고, 김석영에게 필요한 것은 찰나의 방심이었다. 부러 오른손에 불어넣은 기운으로 시선을 빼앗고, 왼손의 기운을 교묘하게 숨겼다. 애초에 손모가지 날아갈 것 정도는 예상했던 바다.
삿된 기운이 응집된 곳으로 영기를 불어넣은 김석영이 단번에 손을 빼냈다. 쿨럭! 역류한 피가 어깨와 등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끄집어낸 원혼은 악귀가 아니었으나, 그것과 가장 밀접한 종류의 것들이었다. 푸른 영기가 만들어낸 불꽃으로 빠르게 태워버린 김석영이 경련하는 육체를 끌어안고 옆으로 몸을 돌렸다.
쿵!
자세가 전복되었다. 상체에 올라탄 김석영이 육체의 모가지를 붙들었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낯으로 숨을 헐떡인 악귀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여기서, 더, 억지로 끄집어냈다간, ......영혼마저 상할 텐데."
"알아. 더 이상은 어렵다는걸. 하지만 육체의 주인이 직접 내보내면 상황은 달라지지."
"제 몸이, 뺏긴 것도 모른 채, 잠들어버린 녀석을, 무슨 수로?"
피범벅이 된 입술을 응시한 흑안이 가늘어졌다.
"이렇게."
모가지를 끌어온 김석영이 비릿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안으로 넘어오는 혈 향을 들이마시며 기운을 불어넣자, 꿈틀 상체가 경련했다. 육체 안에 자리한 악귀의 기운이 김석영의 기운을 거부한 것이다. 들썩이는 상체에 체중을 기울여 움직임을 압박한 김석영이 푸른 기운을 흘려보냈다. 눈을 뜨라고 속삭이면서.
* * *
서늘한 기운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마치 뺨을 쓰다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낯설지 않은 기운의 자취는 윤재하의 의식을 끌어올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이 그를 맞이했다. 눈을 뜬 것인지조차 헷갈릴 어둠이다.
여기가 어디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나는 분명.......
"윽......."
기억을 건드리는 순간 지끈거리는 통증이 꽂혔다. 칼로 머릿속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윤재하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어둠이 맺힌 시야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부러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 생긴 어둠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밝은 빛이 드리우길 바랐다.
그때였다. 또다시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쳐 갔다. 질끈 감은 눈을 뜬 윤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공간에 푸른 빛 한줄기가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아......."
몸을 일으킨 건 의식을 거치지 않은 행동이었다. 윤재하는 그의 앞을 아른거리는 빛줄기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감긴 빛줄기가 부드럽게 유영하며 움직였다. 피부를 스치고 간 서늘한 기운은 마음속의 불안을 다독여주는 손길이 되었다.
왈칵 눈물이 터진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윤재하는 푸른빛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움직임을 방해하는 검은 강물은 그가 반드시 헤쳐나가야 할 시련이었으나 두려움이 되진 못했다. 한(恨)의 무게를 지닌 검은 손들이 시야를 가리고 온몸을 옭아매어도 걸음은 멎지 않았다. 푸른빛의 길라잡이가 인도하는 끝이 그가 당도해야 할 도착지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믿음은 결실을 맺었다. 새하얀 문 앞으로 길을 안내한 푸른 빛이 윤재하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뺨을 쓰다듬어주던 그 누군가의 손길처럼, 애틋하고 조심스럽게.
아, 여기다. 제가 다다를 곳. 이 문을 열면, ......분명 그 사람이 웃어줄 것이다.
멈춰 있던 심장이 뛰는 걸 느낀 윤재하가 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빛무리가 어둠을 거둬갔다. 그 따스하고도 안온한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낸 윤재하가 눈을 떴다.
"......형."
어둠이 걷혀간 망막에 맺힌 것은, 무의식의 너머에서도 그리워하던 남자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혀, 형, 석영이 형......."
이렇게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시체의 낯빛처럼 창백한 몰골에 덜컥 숨을 멈춘 윤재하가 두 손에 담긴 것에 경기를 일으켰다. 숨을 압박하던 목에서 피 묻은 손이 떨어졌다. 막힌 숨을 몰아쉰 김석영이 설핏 미소 지었다. 드디어 그가 아는 말간 낯의 청년이 돌아왔다.
"......윤재하."
"혀, 형, 아, 이게....... 이게 대체......, 피가, 내가 무슨......."
기이하게 꺾인 오른손과 피로 물들인 옆구리. 당장이라도 숨을 멈출 것 같은 창백한 피부를 마주한 순간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미약한 숨마저 앗아가려 했던 손의 감각이 목을 졸랐다. 메마른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절규가 처절했다.
"어떡해, 어떡......, 아......!"
"재하야, 윤재하."
윤재하는 피 묻은 손을 어찌할 줄 모른 채 졸도할 것 같은 오열을 터뜨렸다. 한 손으로 떨리는 뺨을 매만진 김석영은 뜨거운 물기를 훔쳤다. 손도 대지 못하는 겁쟁이를 대신해 몸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재하야. 괜찮아."
"내가, 내가 형을......."
"아니야. 그건 네가 아니야. 네가 아니었어. 너는, 진짜 윤재하는, 지금 내가 안고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말라고. 떨지 말라고. 김석영은 끊임없이 속삭이며 애처롭게 흐느끼는 등을 쓰다듬었다.
"병원, 병원에 가요. 상처가......, 피가 너무 많이......."
흐트러진 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몸을 떼어낸 윤재하가 상처를 바라보았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데다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찾는 것을 저지한 김석영이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뭐가 괜찮아요! 안 돼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찾아낸 윤재하가 빠르게 화면을 매만졌다. 형편없이 떨리는 손끝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빨리, 빨리......! 마음이 조급해졌다. 핏물로 번져가는 화면에 숫자를 채워 넣던 순간이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어."
김석영의 말에 온몸의 움직임이 멎었다. 세상이 하얗게 점멸하는 것만 같았다. 표정이 사라진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금, 뭐라고......."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가. 하지만 네 안엔 아직 악귀가 있어. 시간이 없어. 빨리 해치워야......."
"그래서 오늘, ......나가지 말라고 했던 거예요?"
꼭 나가야 하냐고 묻던 것. 늦지 말라고 당부하던 것. 그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재촉에 마음이 설레면서도 자꾸만 불안해졌던 건 이래서였구나. 비수의 형태를 띤 문장이 숨을 틀어막았다. 목이 졸린 어조로 읊조린 말에 김석영의 낯이 흐려졌다.
"재하야......."
"왜 이렇게 잔인해요, 나한테, 왜 이렇게 잔인해요......."
엉망으로 메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석영은 유순하던 눈에 슬픔이 쌓여가는 과정을 온몸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찢어진 옆구리도, 꺾여버린 손목의 고통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을 헤집는 고통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재하, ......."
"크, 흑─!"
떨리는 손이 뺨을 감싸기도 전이었다. 고통 어린 신음과 함께 머리를 부여잡은 윤재하가 털썩 주저앉았다. 영기가 불안정하게 일렁이더니 불쑥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뒤엉킨 두 기운이 사납게 일렁였다.
"아, 흐으."
"재하야, 윤재하. 정신 차려!"
마음이 무너져버린 순간을 비집고 나온 악귀가 영기를 억누르려 하고 있었다. 내부를 헤집으며 날뛰는 기운에 윤재하는 고통스럽게 흐느꼈다. 역류하는 피의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쿨럭, 검은 피를 토하기 무섭게 시야가 빠르게 흐려졌다. 몸 안을 난동하는 검은 기운이 정신을 흩트리고 있었다.
'안돼. 안돼......!'
다급하게 억누르려 했지만, 빈틈을 파고든 악귀는 멋대로 몸을 이용했다. 결국 김석영의 목을 낚아채고 바닥에 짓이겼다.
"죽어! 죽어!"
"크, 끅─!"
"너는 잔인해. 나를 가지고 놀고, 때가 되니 나를 버리지. 나는 사실 네가 죽기를 바라!"
역류한 피를 토해내며 사납게 소리쳤다. 독을 품은 말이 김석영을 향했다. 심장이 얼어붙은 윤재하는 의식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아니야......!"
목을 쥔 손이 경련했다. 숨통을 억누르는 손가락을 떼어내기 무섭게, 다시금 악귀의 힘이 날뛰며 그 목을 잡아챘다. 꾸욱, 강하게 목젖을 누르고 목을 쥔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힘줄이 돋아난 손을 잡아챈 김석영이 숨을 헐떡였다. 실핏줄이 터진 그의 눈에 피가 고였다.
"커, 흑......!"
"아니야. 나는 네가 죽기를 바라. 왜냐고? 넌 내 가족을 죽였으니까! 모든 건 네놈의 기운 때문이었으니까! 내가 아까 말했지?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손을 뜯어내던 김석영의 움직임이 멎었다. 흔들리는 눈을 마주한 윤재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손을 뗐다.
"크, 헉, 컥, 허억─!"
"혀, 형, 괜찮,......!"
윤재하는 거친 숨을 몰아쉰 그를 차마 어루만지지 못하고 흐느꼈다. 들썩이는 악귀의 기운을 억누르며 거리를 벌렸다. 그를 헤칠까 두려웠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김석영이 윤재하를 마주 보았다.
"......나, 때문이었구나."
"형, 아니, 아니에요. 아니야......."
윤재하는 두려움에 질린 낯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김석영에겐 닿지 않았다.
"......이제 알겠다. 이제 기억났어. 그래, 너였구나. 너였어."
"이윤상. 그자가 날 가뒀지. 아, 이름은 낯선가? 윤재하의 조부라고 말하면 이해하려나?"
깨닫고야 말았다. 기운을 완벽하게 갈무리하지 못했던 열아홉. 윤재하의 조부가 가둬놓은 악귀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제 기운이었다는걸.
하얗게 질린 낯으로 숨을 몰아쉰 그는 일렁이는 기운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 손으로 잡아가야지."
김석영은 잇새로 왼손의 염주를 벗겨내 단단히 쥐었다. 밑바닥부터 끌어올린 기운이 증폭되었다. 그의 푸른 영기가 거세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망막을 긁어내린 푸른 색채를 멍하니 응시한 윤재하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잡아간다, 고......."
"지체할 시간 없어. 빼내야 해. 그래야 네가 살아."
"산다니......."
당장이라도 죽을 각오를 하고 끌어낸 기운이었다.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김석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재하가 고개를 툭 떨구었다. 하, 하하. 어깨를 떨며 힘없이 웃음을 토해낸 그는 불쑥 고개를 들며 말했다. 입에 호선을 그린 채.
"그럼 같이 죽어요."
"뭐?"
"생각해보니까, 몸에 억누르고 죽으면 될 일 아닌가?"
"윤재하!"
벼락같은 호통에도 윤재하의 낯은 균열 하나 일지 않았다. 들썩이는 악귀의 기운을 억누르며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같이 가자고요."
어차피 제가 사랑한 것들은 전부 그곳에 있고, 김석영마저 없는 이승에 미련 따윈 없었다. 꿈틀, 가슴을 들썩이며 피를 토해낸 윤재하가 설핏 웃었다. 숨도 쉬지 못하고 붙박인 김석영이 고개를 저었다.
"안, ......안 돼."
"왜 안 돼요?"
"너는, 살아야 해."
육체를 빼앗는 걸 포기했는지 악귀의 날뜀이 거세지고 있다. 그릇을 깨트릴 작정이다. 단단한 결심이 발산하는 영기가 삿된 움직임을 억누르고 있지만, 방심했다간 육체와 영혼마저 갈기갈기 찢겨버릴지도 몰랐다. 구멍이 난 육체로 살아봤자 온전한 삶을 누릴 수나 있을까.
역류하는 피가 목울대를 적셨다. 쿨럭, 피를 토해낸 윤재하는 초연한 얼굴을 했다. 조급해진 김석영이 소리쳤다.
"안돼, 그러지 마! 내보내야 해, 억누르지 마! 더는 억누르면 안 돼!"
"왜요?"
"이러다 진짜 죽어버린다고!"
김석영은 피를 토하는 것처럼 소리쳤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남자를 눈에 담은 윤재하가 물었다.
"내가 죽는 게 무서워요?"
"......."
핏발 선 눈이 흔들렸다. 붉은 눈에 물이 차올랐다. 툭, 흘러내린 눈물과 함께 처절한 목소리가 터졌다.
"......무서워."
찬란한 생을 살아가야 할 네가 죽는다는 게. 이토록 서글프게 삶을 끝마치는 게. 김석영은 너무 두려웠다.
"이승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다음의 삶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삶은 지금만이 누릴 수 있는 거니까."
"이후의 삶은 이후의 것이잖아요. 지금의 삶은 지금만이 누릴 수 있는데, 왜....... 이승에서의 삶을 욕심 내지 않아요?"
해사하게 웃은 윤재하가 김석영을 끌어안았다. 그걸 이제야 알았냐고 속삭이면서.
"나는 살고 싶어요."
찬란한 영기가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들썩인 윤재하가 피를 삼켜냈다.
"형과 함께."
"......재하야."
"나는 늘 형에게 받기만 했잖아요."
"......."
"받은 만큼 갚아줘야 한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냥. 다 주고 싶어요.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내가 느껴본 것 중에 가장 좋은 것들을 주고 싶어요. 그런데 나는 아직 시작도 못 했잖아요. 너무 불공평하잖아. ......그러니까."
따스한 빛이 스민 다갈색의 눈동자가 시린 껍데기에 갇힌 남자를 바라보았다.
"형에게, 함께하는 삶을 선물하게 해줘요."
"......."
"받아줄래요?"
누가 알았을까. 자그마한 몸에 상처가 마를 날이 없던 어린아이가 마음에 자리하게 될 줄을. 지친 낯의 애처로운 남자가 삶의 다짐을 깨부수게 될 줄을.
"......그래."
이 온기를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나락에 처박히는 것조차 기꺼운 행복이 될 것임을.
"함께 살자."
윤재하에게 눈물은 고통과 공허, 두려움과 같은 부정(不淨)의 증거와도 같았다. 가족을 잃고, 형체를 잃은 날. 부정한 기운에 목 졸려 두려움에 떨었던 날. 김석영을 잃어야 한단 걸 깨달은 오늘. 눈물은 부정의 감정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두 볼을 적시는 눈물은 행복의 산물이었다. 윤재하는 김석영을 통해 깨달았다. 행복이 찾아와주었을 때도 눈물이 터질 수 있다는 것을.
"염주에 담아낼 거야. 지금 상태로 소멸시키는 건 무리거든. 염주에 담아 봉인한 채 저승에 가져갈 거야."
떨리는 손으로 윤재하의 눈가를 훔친 김석영이 말했다.
"더 이상 내가 함부로 빼냈다간 육체가 망가져. 네 스스로 악귀를 밀어낼 수 있겠어?"
서늘한 손을 감싸고 뺨을 기댄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그래. 널 믿어."
툭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염주를 매만진 김석영이 숨을 가다듬었다. 찬란한 빛깔의 영기가 푸른 영기에 스며든다. 함께 살자던 말은 언약이 되어 잠시나마 그에게 생을 유지할 힘을 주었다.
"큭, 흐윽──!"
고통스러운 숨을 터뜨린 윤재하가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숙였다. 밀어내려는 의지를 거부한 악귀가 내부를 헤집었다. 육체의 흐름을 거스르는 기운에 내상이 더해졌다. 목구멍을 비집고 흐르는 피비린내를 삼켜낸 윤재하는 불온한 침입자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강인한 의지가 영기를 움직였다. 육체를 강탈한 부정을 에워싸고 날뛰는 기운을 억눌렀다. 악귀에게 응집된 수백의 원혼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타들어갔다. 힘의 근간이 되었던 원혼들이 줄어들자 악귀의 반항이 거세졌다.
「안돼, 안돼──!」
"쿨럭!"
독과도 같은 피를 뱉어낸 윤재하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들썩였다. 가슴께의 격통에 잠시 눈앞이 흐려진 사이, 틈을 놓치지 않은 악귀가 모든 원혼을 떨쳐내고 의식 아래로 몸을 숨기려 했다.
......안돼. 참담한 낯이 된 윤재하가 의식을 다잡으려던 그때.
「아아악! 놔, 이거 놔──!」
무언가가 악귀의 모가지를 붙든 채 파고드는 움직임을 막아냈다. 악귀에 스며들었던 형체였다. 육체의 상성이 높은 형체는 윤재하의 의지를 이어받아 영기와 함께 검은 기운을 밀어냈다. 원혼을 떨쳐낸 탓에 몸집과 힘이 줄어든 악귀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마침내 웅크린 등에서 악귀의 낯이 드러났다.
「싫어, 안돼──!」
귀를 찢을듯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쩌적, 금이 간 콘크리트의 잔해가 떨어졌다. 김석영은 푸른빛의 영기를 염주에 흘러 넣었다. 파르르 진동을 일으킨 염주는 주인의 기운을 빠르게 흡수했다. 동시에 부정한 존재 역시 빨아들였다.
「───!」
푸른 기운에 비루한 사지를 붙들린 악귀는 짐승과도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달아나기 위해 허우적거리지만 타들어 가는 속도를 이겨내진 못했다. 파스스, 형태를 잃은 검은 연기가 염주 속에 스며들었다.
경련하듯 들썩이던 염주가 멈추었을 때. 긴 세월을 거친 죄악을 증명하듯 지독한 악취를 내뿜던 존재는 비로소 끝을 맞이했다. 볼품없는 말로였다.
"하아, 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잠해진 염주를 확인한 김석영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뒤엉키기 무섭게 달려든 상대에게 온몸이 붙들렸다.
"형, 형......."
흐느끼며 읊조리는 목소리에서 무수한 감정이 쏟아졌다. 툭, 염주를 떨어뜨린 김석영은 떨리는 등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숨결에 스며드는 환희의 조각을 달게 받아마시며,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