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신경은 자꾸만 저택 어귀를 향했다. 보고 싶지 않아서 달아난 주제에 온 신경은 김석영이 있을 장소를 향했고, 그가 따라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김석영이 야속했다.
이런 혼란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따윈 모른다. 윤재하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내며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았다. 아무도 절 보지 못할 곳을 찾아 방황하던 발걸음은 개발에 들어서면서 허물기 시작한 노후주택 앞에서 멈춰 섰다.
문짝이 뜯어져 훤히 드러난 내부는 엉망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부서진 벽돌과 호스 따위를 지나쳐 삐걱대는 나무 계단에 걸터앉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서러운 숨이 흘렸다.
「괜찮니?」
어깨의 떨림이 잠잠해지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묵묵히 곁을 지키고 앉아 윤재하를 바라보던 형체가 물었다. 붉게 부르튼 눈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지만 윤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기력을 소모한 듯 지쳐 보이는 낯은 벼랑 끝에 선 자의 얼굴 같았다.
「.......」
이토록 처절하게 감정을 토해낸 적이 없었기에. 깊게 침잠된 눈으로 바라보던 형체가 입술을 짓씹었다. 무엇이 그를 절망에 빠트렸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자가 널 울게 했구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형체를 바라보던 윤재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뺨을 어루만진 형체가 시선을 맞대며 말했다.
「역시 그자는 너에게 해로운 존재야. 곁에 있으면 오늘처럼 아플 일만 생기겠지. 상처받을 길을 자처하지 말고 떠나자. 그게 맞아, 재하야.」
"......아니, 그건 안돼."
거칠게 갈라진 숨소리와 함께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낯을 굳힌 형체가 사납게 물었다.
「왜?」
"형을 보지 않는 게 더 아프니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데, 모든 시간이 아까운데 내가 어떻게......."
사실 지금 이 순간도 사무치게 아쉬운 기억으로 남을지 모른다. 그와 함께할 수 있었던 일분일초가 거대한 그리움이 되어 마음을 짓누르리라. 그런 제가 어떻게 김석영을 떠나갈 수 있을까.
「그럼 그자와 영원히 함께할 생각이니?」
비소를 머금은 말이 윤재하를 찔렀다. 감히 가당키나 하냐는 듯한 어조였다. 눈물의 무게에 짓눌린 눈을 깜박이며 아득한 시야를 걷어낸 윤재하가 되물었다.
"......그럼 안 돼요?"
「안돼. 그자만은 안돼.」
"왜요, 사람 명줄 잡아먹는 악귀나 다름없어서?"
「그래! 그자야말로 악귀나 다름없으니까. 산 사람 명줄로 제 목숨 연명하는 것들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언제 돌변해서 널 위협할지 몰라. 네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른다고!」
"하, ......하하─."
격양된 감정을 고스란히 마주한 윤재하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울음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일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몸을 굳힌 형체를 참담한 눈으로 마주한 그가 말했다.
"정작 목숨이라도 주고 싶은 건 난데."
「......뭐라고?」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게 그거라고요. 형한테 내 수명을 주는 거. 그래서 형이 살 수 있다면 난 기꺼이 그렇게 할 텐데."
도리어 수명을 받지 않는 그가 미련하고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너 미쳤구나. 어떻게 그런 말을......!」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게 분명했다. 육신이 있었다면 피가 식는 감각을 느꼈을 것이다. 순진한 아이를 홀려버린 자를 향한 분노가 치밀었다.
「정신 차려! 그자는 죽어 마땅한 자야, 너는 지금 그자에게 속고 있는 거라고!」
"감추는 것도 속인 거라면, ......그래요. 속고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그 모든 게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오히려 형은 날 위해서......!"
불현듯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을 부정하는 자로부터 그를 보호하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알게 됨으로써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영원히 모른 채로 아프지 않길 바라게 되는 마음을. 그가 내린 생의 결정은 영원히 저를 슬프게 할 테지만, 그렇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비록 그 결정이 제가 바라는 방향은 아니었을지라도.
"전부, 날 위해서......."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감정에 뒤엉킨 말을 잘라낸 형체가 실소를 터뜨렸다.
「모두 그자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널 속이고 있는 게 악의가 없다고?」
"......무슨 말이에요. 형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긴, 나도 이제 알았으니.」
"도대체 내가 뭘 모른다는 거예요. 그리고 엄,......."
시간이 쌓아놓은 습관은 불시에 터져 나왔으나 미처 끝맺어지지 못한 지칭이 허망하게 흩어졌다. 당연한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의 괴리감이 윤재하의 입을 막았다.
"......당신은 뭘 어쩌고 싶은 건데요."
「이젠 엄마라고 불러주지 않는구나.」
"대답부터 해요. 뭘 어쩌고 싶은 건지. 그렇게 가버리고, 왜 이제 나타나선......,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왜 내 곁에 있었는지. 왜 엄마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전부 다!"
「나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어. 늘 함께했던 때처럼.」
"......나는 당신 아이가 아니야. 이젠 돌아갈 수 없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아니, 넌 내 아이야. 네가 내 옷자락을......, 내 손을 붙들고 날 엄마라고 불렀던 순간부터 난 네 엄마였어. 나는 다 준비됐어. 너만 돌아오면 돼. 떠나자, 재하야.」
목 졸린 숨을 삼킨 윤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난 안 떠나요. 이젠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어.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내 곁이 아니에요."
「왜 그런 말을 해. 아, 그자가 그러든? 나를 보내라고? 나를 버리라고?」
"이건 내가 내린 결정이에요. 형이랑은 상관없어!"
「아니. 넌 그자에게 세뇌당한 거야. 속고 있는 거라고. 안 그러면 네가 이럴 리 없잖아. 그자가 널 망치고 있어!」
"제발 그만......."
「모든 건 그자 때문이야! 네 가족이 죽은 건 모두 그자 때문이라고!」
악에 받친 고함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귓전에 꽂힌 말을 이해하지 못한 윤재하가 멍하니 형체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네 가족이 죽은 건 그자 때문이라고.」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가족들의 죽음에 왜 김석영이 나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가 네 몸을 노리고 있다 했지? 네 말이 사실이었어. 널 노리는 악귀가 있어.」
"......그게 형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자의 기운이 잠들어 있던 악귀를 깨워버렸으니까. 그 악귀가 네 가족을 해치고 이젠 널 노리고 있으니까!」
"......뭐?"
「재하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이야. 그자의 기운이 네 인생을 망친 거나 다름없어.」
불쑥 손을 뻗은 형체가 무언가를 건넸다. 흔들리는 시선이 알에 닿았다. 녹색이 맴도는 흑요석의 구슬.
"이건......."
사고 이후 잃어버린 염주의 알이었다.
「네가 차고 다니던 염주야. 여기에 모든 기억이 맺혀 있어. 나도 이걸 통해 본 거고. 네가, 재하 네가 나의.......」
달싹이는 입술에선 흐느낌만 새어나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너무 어릴 때 헤어져서, 잊고 살아서.......」
"......이게 왜 당신에게 있어요?"
저승의 경계에서나 보았던 염주의 알을 현실에서 마주할 거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하물며 형체를 통해서라면 더더욱. 쉬이 혼란을 거두지 못한 윤재하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선생님이 주셨어. 사고에서 주운 후로 줄곧 지니고 계셨대. 널 지켜봐 오면서 날 너에게 인도한 거였어.」
"그게 무슨 말이야. 선생님이라니?"
「내가 종종 만나는 친구 알지? 그 친구가 바로 선생님이야. 선생님이 모든 걸 지켜봐 오셨던 거야. 염주를 만져서 기억을 봐. 그러면 모든 걸 알 수 있어.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믿어줘.」
"......."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형체가 줄곧 왕래하던 친구의 존재가 왜 지금 튀어나오는 것인지부터 도대체 그 존재는 왜 염주의 알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형체는 무슨 기억을 본 것인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혹시 함정은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해답을 바라는 충동이 자꾸만 머리를 치켜들었다.
"......정말 기억을 볼 수 있는 거예요?"
「응. 기억에 감응할 수 있도록 선생님이 힘을 불어넣어주셨거든. 염주의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끊어진 마지막까지 모두 볼 수 있어.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게 되겠지.」
가라앉은 눈이 염주의 알을 담았다.
"......."
후회하게 될까.
「손을 가져다 대면 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후회하지 않고 돌아갈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선택지가 주어지기나 했던가.
「기억해내야 해, 재하야.」
하나의 방향만을 가리키는 선택지를 진정 선택지라 부를 수 있는 걸까. 모든 상황과 모든 의문이 과거의 기억을 향해 가고 있는데.
"......."
윤재하는 손을 뻗었다.
* * *
쿵― 쿠웅―
무언가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윤재하가 굳게 닫힌 안방 문을 바라보았다. 분명 안방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할아버지?"
나비를 제 방으로 들여보내고 문 앞에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쿵, 쿵, 쿵. 문보다 더 먼 곳에서 나는 소리의 근원은 옷장이었다. 이따금, 종종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지만 근래에 들어 그 빈도수가 부쩍 잦아지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염주가 끊어지고 나서부터 영가의 존재와 기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는 물론이고 길거리에서도 수많은 영가를 보았지만 집안에서만큼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물론 영가와 같은 형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뿐,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는 건 아니었다.
안방의 옷장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 미세한 기운이 느껴졌고 종종 들려오는 소리가 그 증거였다. 결정적으로 옷장을 걸어 잠근 자물쇠가 확신을 부추겼다. 비록 그 기운과 소리가 아주 미약했던 탓에 윤재하의 신경을 오래 끌진 못했다.
근래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옷장의 소리가 잦아지고 있었다. 쿵. 한 번에 그쳤던 소리가 연달아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마치 무언의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때론 신경질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모친이 집에 돌아오면 잠잠해지고 말아, 윤재하는 쉽사리 내색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종종 밖을 서성이던 조부는 온종일 안방에만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윤재하로선 직접 찾으러 다니는 수고가 덜었기 때문에 다행인 일이었다.
"나비야, 이거 봐. 맛있는 거다?"
그날은 간만에 형을 만난 날이었다. 함께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헤어지는 길에 나비가 먹을 캔을 선물 받았다. 책가방에 가득 찬 캔의 무게가 여린 어깨를 짓눌렀지만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숨이 찬 줄도 모르고 곧장 집으로 달려간 윤재하는 신발도 벗지 않고 가방을 뒤졌다.
"이거 봐. 색이 다양해. 맛이 조금씩 다른가 봐. 나비는 뭐가 좋아?"
냐아―
온몸을 부딪쳐오는 나비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윤재하가 헤실헤실 미소 지었다. 색색의 캔을 바닥에 늘어놓고 나비의 선택을 지켜보던 순간이었다.
"......, ......, ......!"
안방에서부터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는 다른 기묘한 느낌이 윤재하의 신경을 붙들었다.
"할아버지?"
신발을 벗고 방문 앞에 다가서자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찢어질 듯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오지 마. 오면 안 돼!"
"할아버......!"
콰득, 쿠웅─!
커다란 굉음과 함께 집안의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나갔다. 반쯤 뜯어져 나간 문에 맞아 쓰러진 윤재하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흐릿해진 시야로 너덜거리는 문 너머의 안방이 비쳤다.
"커흑, 끅......!"
통째로 뜯겨나간 옷장 속에서 흘러나온 검은 안개가 형상을 만들어냈다. 산산이 조각난 함(函)을 짓밟은 형상이 널브러진 조부의 몸을 짓눌렀다. 노쇠한 팔다리는 암흑에 뒤엉켜 힘 한번 쓰지 못하고 경련했다. 고통에 허덕이며 바닥을 긁는 마른 손톱이 뿌드득 뜯겨나갔다. 물밖에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꿈틀거리던 움직임이 멎은 순간, 툭― 힘없이 돌아간 조부의 낯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윤재하는 그대로 졸도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하얀 천장이었고, 신경을 끌어올린 것은 손을 붙든 온기였다.
"엄마......."
"재하야!"
정신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모친은 아이를 끌어안았다. 물기 어린 숨을 토하며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주문처럼 괜찮다는 말을 속삭이며 어린 몸을 품에 안았다. 영문 모를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윤재하는 모친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나 왜 병원에 있어요?"
"......기억 안 나니?"
"응. 나 분명 집에 있었는데, 왜......."
낮게 가라앉은 눈을 한 모친이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해? 기억나는 부분이라도 말해봐."
"......학교 마치고 집에 와서 나비한테 밥을 주려고, 형한테 받은 캔을......."
불쑥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 소리가 귓속을 어지럽혔다. 식은땀이 맺힌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한이 들었는지 파르르 몸을 떤 윤재하가 입술을 뻐금거렸다.
"이상한 소리가, 소리가 났는데......."
"그만. 그만해, 재하야. 생각하지 마. 힘들면 생각 안 해도 돼."
다시금 강하게 끌어안아준 모친이 떨리는 숨과 함께 읊조렸다.
"괜찮아. 잊어도 돼. 괜찮아......."
그 말은 마치 주술처럼 윤재하의 아픈 기억을 앗아갔다. 혼절하듯 의식을 잃고 일어났을 땐 안방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조부의 죽음은 영문 모를 사고로 다가왔다. 비록 기억은 엉망일지라도 연이어 자극받은 몸뚱이는 고통을 수반했다. 열감기를 앓아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조부의 장례식을 치렀다. 비극의 첫 시작이었다.
쨍그랑!
"세상에, 얘! 너 괜찮니?!"
근처를 지나치던 행인이 비명을 지르며 다가왔다. 불쑥 낙하한 화분의 잔해가 말간 피부를 스친 뒤였다. 다행히 그리 깊게 베이진 않아 옅은 피가 고인 정도였으나, 한 걸음만 더 내디뎠다면 머리통이 깨졌을 것이다. 망부석처럼 굳어서 처참하게 깨진 잔해들을 바라보던 윤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화분이 있었을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대체 어디서 떨어진 거야. 얘, 괜찮니? 얼굴에 피 고였는데, 아줌마랑 병원에 갈까?"
"......아니요. 괜찮아요."
행인의 손을 뿌리친 윤재하는 쫓기듯이 자리를 떠났다. 그때부터 자꾸만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쿠당당!
"헉! 야! 너 괜찮아?"
중앙계단을 오르던 아이가 불쑥 바닥에 나뒹구는 형체를 향해 소리쳤다. 내려가던 계단에서 구른 윤재하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파르르 떠는 입술과 창백한 낯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던 아이가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보니 발을 헛디딘 모양이다.
"어떡해....... 일어날 수 있겠어? 선생님 불러올까?"
"......괜찮아."
아이의 부축을 받아 상체를 일으킨 윤재하가 입술을 짓씹었다. 흘끔 계단을 바라보는 눈이 흔들렸다. 분명 등을 밀치는 손길을 느꼈으나 사람은커녕 영가조차 보이지 않았다. 퉁퉁 부어오른 발목과 손목의 통증에 질끈 눈을 감은 윤재하는 떨리는 한숨을 삼켜냈다.
담임의 호출로 찾아온 모친은 윤재하를 데리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붓기만 요란할 뿐, 다행히 가벼운 염좌였다. 하지만 모친의 굳은 얼굴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굳게 닫힌 입이 열린 것은 집에 들어선 후였다.
"윤재하."
낮게 잠긴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떤 윤재하가 모친을 바라보았다.
"......."
"이번엔 변명할 생각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왜 이런 거야."
"......그냥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거예요."
"윤재하!"
"......."
흠칫 몸을 굳힌 윤재하가 숨을 삼켰다. 매섭게 쏘아지는 눈빛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밀랍 인형처럼 굳어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가슴이 미어지는 비통함에 입술을 짓씹은 모친이 숨을 갈무리했다.
"......재하야."
"......."
"그냥, ......그냥 넘어진 거 아니잖아. 엄마한테 거짓말 그만해."
"아니야. 진짜야. 진짜 잘못 넘어진 거 맞아요......."
"얼굴이 베이고 불에 덴 것도? 자전거에 치이고 계단에서 구른 게 전부 다 실수라고? 아니잖아, 재하야. 아니잖아. 사실대로만 말해줘. 왜 그런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끝까지 참아보려 했는데. 떨리는 모친의 음성에 덜컥 서러움이 치솟고 말았다.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던 윤재하가 입을 열었다.
"나도 몰라....... 그냥 자꾸만 갑자기 사고가 생겨요......."
조부의 장례식 이후로 자잘한 사고가 일어나고 있었다. 목숨을 위협할 수준은 아니었으나 반드시 물리적인 고통이 뒤따랐다. 괴롭힘이라면 질리도록 익숙하지만 이토록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엔 면역이 없었다. 염주가 끊어진 후로 사람뿐만 아니라 영가 또한 경계의 대상이었으나 그들에게 직접적인 적의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의아한 것이다. 모습을 숨긴 채 괴롭힘을 이어가는 존재와 그 이유에 대해서.
"......분명 노리고 있는 거야."
불쑥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한 윤재하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모친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왼쪽 손목에 자리한 염주를 바라보았다.
"혹시 무언가가 보이니?"
흠칫 놀란 윤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염주가 끊어졌다는 걸 털어놨다가 혼나고 싶진 않았다.
"아니요. 왜요......?"
"......아니야. 안 보이면 됐어."
쓰게 웃은 모친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학교는 쉬는 게 좋겠다. 엄마도 함께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일 쉬고 나랑 같이 있을 거예요?"
"응. 한동안 쉴 거야. 우리 재하 몸도 안 좋으니까 엄마가 곁에서 지켜줄게. 엄마가 다 알아서 해줄 거야."
다 해줄게. 꼭 지켜줄게. 또래에 비해 작은 몸을 끌어안으며 모친은 다짐하듯 읊조렸다.
"......네. ......고맙습니다, 정말......."
잠결에 들린 모친의 목소리에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눈을 비비며 방을 나서자 때마침 통화를 끝낸 모친이 윤재하를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엄마 목소리가 깨웠어?"
"아니. 그냥 눈이 떠졌어."
배시시 웃는 아들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준 모친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윤재하는 나비의 밥을 먼저 챙겨준 뒤 수저를 놓았다. 아침은 전날 끓여놓은 맑은 콩나물국과 김치 그리고 계란프라이가 전부였으나 윤재하는 두 볼이 터질 듯이 우물거리며 미소 지었다.
제 몫으로 부쳐놓은 계란프라이를 넘겨주며 씩 웃은 모친이 문득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키가 조금 자랐나?"
"정말?"
"응. 자란 것 같은데? 나중에 재볼까?"
"응. 좋아."
고개를 붕붕 끄덕인 윤재하가 밥 한술을 크게 떠 입안에 욱여넣었다.
"얘도 참.......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지. 체하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요. 천천히 먹으면 많이 못 먹고 배만 부르단 말이야. 빨리, 많이 먹어서 발이라도 살찌울 거야. 발바닥에 살찌면 키 커 보인다고 했어."
"글쎄. 물론 그것도 누군가에겐 좋은 방법이겠지만 엄마는 추천하지 않겠어. 우리 재하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키 클 테니까. 엄마 키 큰 거 보면 모르겠니?"
흘끔 모친을 바라본 윤재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입안에 든 것을 빠르게 삼켜내곤 중얼거렸다.
"나만 돌연변이면 어떡해.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뒷자리에 앉아본 적 없단 말이야."
"세상에, 별걱정을 다하네. 너 그 돌연변이 발언은 엄마의 우월한 유전자를 무시하거나 다름없다? 엄마가 장담하는데 곧 질리도록 뒷자리에만 앉게 될 거야. 그땐 앞에 앉고 싶다고 애원해도 못 앉게 될걸? 멀리서도 칠판 잘 볼 수 있도록 미리미리 눈 관리 잘해야 해."
"......응."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확정 지어 말하는 것에 내심 안심한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웃음을 삼킨 모친이 음식물을 천천히 오물거리는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순한 성정은 제 아비를 쏙 빼닮았다. 웃을 때만 드러나는 인디언 보조개와 남들보다 색소가 옅은 점도.
하지만 이목구비만큼은 저를 닮았다. 두 얼굴이 유려하게 조화된 결실을 볼 때마다 모친은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 제 아이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네 아빠는 입이 짧았는데. 우리 재하는 잘 먹어서 좋다."
"입이 짧다는 게 뭐야? 많이 안 먹는다는 거예요?"
"똑똑한 내 새끼. 맞아, 그런 뜻이야. 밥 한 공기를 다 비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어, 네 아빠는."
"나는 밥 안 남기는데. 급식도 남겨본 적 없어."
엄마 닮아서 그런가? 말을 덧붙인 윤재하는 해사하게 웃었다.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린 모친이 보드라운 머리칼을 흩트렸다.
"우리 재하마저 입이 짧았으면 엄마는 애간장이 다 타들어 갔을 거야."
"왜? 많이 안 먹으면 돈 많이 안 들고 좋잖아요."
아이의 말은 예기치 못하게 마음을 후벼 파는 경우가 있었다.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이 굳어지는 줄도 모르고 윤재하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까 키는 안 커도 될 것 같아. 덩치가 커지면 많이 먹겠지?"
"......그런 걱정을 왜 해."
"걱정한 거 아닌데. 그냥 생각해본 거예요."
손을 거둔 모친이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어. 엄마는 우리 재하가 많이 먹고 쑥쑥 자랐으면 좋겠거든."
"노력 안 해도 자랄 거라고 했으면서."
"발에 살찌우려고 급하게 먹는 노력은 필요 없다는 말이었어. 이왕이면 밥은 천천히, 잘 먹는 게 좋지. 이해했나, 어린이?"
"음....... 응. 이해했어."
"좋아. 그럼 마저 먹어. 천천히, 꼭꼭 씹어서."
누가 누가 더 오래 씹나, 대결하듯 모자는 조촐한 아침 식사를 오래도 이어갔다. 이후엔 서로 힘을 합쳐 나비를 씻겼고 잔뜩 성이 난 나비를 달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잠시 낮잠에 빠졌다. 눈을 뜨고 보니 모친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
적막한 집안은 늘 익숙하던 것이었는데. 한동안 모친과 함께 지내서인지 텅 빈 집이 주는 적막함이 낯설게 느껴졌다. 괜스레 나비를 끌어안은 윤재하는 때마침 들려오는 현관문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엄마!"
"아, 재하 일어났어? 엄마 잠시 2층 할머니한테 다녀왔어."
"......그랬구나."
품 안이 답답했던 모양인지 나비가 온몸을 버둥거렸다.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주자 2층에서 얻어온 주전부리를 손에 쥐여준 모친이 넌지시 말했다.
"재하야."
"응?"
"내일, 엄마가 어디를 좀 가야 할 것 같아. 아마 하루 정도 걸릴 것 같은데, 내일 하루만 2층 주인 할머니 댁에서 지낼래?"
"......어디 가는데? 나도 가면 안 돼요?"
"재하가 가기엔 너무 멀어. 힘들어서 안 돼. 내일 하루만 2층에서 지내자. 응?"
"알겠어요......."
포장된 떡을 조물거리던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모친은 안심하고 웃을 수 있었다.
"늦어도 내일 점심까지는 돌아올게. 오늘 하루만 불편해도 참아줘."
"응. 걱정 마요. 잘 있을 수 있어."
"그래. 엄마는 재하 믿어."
다갈색의 머리칼을 보드랍게 쓸어 넘겨준 모친이 주인댁에 인사를 건네고 길을 나섰다.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모든 생을 살아온 곳이기에 주인집과의 왕래는 종종 있던 일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노인은 냉담한 구석이 있었지만 윤재하는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편하고 좋았다. 각자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식사 때가 되면 노인을 도와 끼니를 해결했다. 그렇게 하루는 빠르게 지나갔다.
"엄마가 오면 가지 그러니."
"나비......, 저희 고양이가 걱정돼서요. 아마 지금쯤이면 밥 다 떨어졌을 거예요. 엄마도 오늘 오시니까 이젠 집에서 기다릴게요.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러렴."
무심한 얼굴로 돌아서는 노인에게 꾸벅 인사를 건넨 윤재하는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나비는 혼자서 잘 놀고 있었고 준비해둔 밥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부자리에 누워 나비와 눈을 맞춘 윤재하가 말했다.
"엄마 언제 올까, 나비야."
냐아―
"그러고 보니 요즘 형을 못 만났어. ......형 보고 싶다. 나비도 알지? 석영이 형."
냐아―
김석영의 생각에 히죽 웃은 윤재하가 조잘조잘 말을 이어갔다.
"나 처음엔 형이 귀신인 줄 알았다? 형한테선 되게 이상한 기운이 풍겼거든. 엄청 무섭고 숨이 턱 막히기도 했는데 점점 괜찮아졌어."
냐아―
"형도 나처럼 귀신을 본대. 귀신들도 형만 보면 자리를 피한다? 대단하지?"
냐아― 사람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건지, 신기하게도 나비는 말이 끝날 때마다 대꾸해주었다. 그 순수한 교감에 마음이 허물어진 윤재하가 나비를 향해 미소 지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는 나비를 따라 하던 윤재하는 어느새 스르륵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엄마."
모친이 죽는 장면을 보았다. 선연한 감각이 윤재하를 꿈에서 끌어냈다. 현실이 아닌 꿈에 불과하단 걸 알면서도 두려움이 엄습했다.
"늦어도 내일 점심까지는 돌아올게".
"......."
이미 시간은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덜컥 숨이 막힌 윤재하가 집을 뛰쳐나왔다. 늘 함께 오가던 길목과 상점, 버스 정류장을 오가며 모친의 형상을 찾아 헤맸다. 혹여 길이 엇갈렸을까,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향해보아도 모친을 마주할 순 없었다. 뒤늦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왈칵 눈물이 차오른 윤재하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거리를 서성였다. 사고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스쳐 간 오토바이. 도로로 밀치는 무언의 손길. 불쑥 떨어지는 공사 자재. 이 모든 것들은 간발의 차이로 그쳐 목숨을 앗아가진 않았으나 숨통을 조이기엔 충분했다.
지독한 꿈과 돌아오지 않는 모친. 연달아 이어지는 알 수 없는 괴롭힘.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듯한 아득함 속에서 불쑥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형."
가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 강인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 김석영, 그라면 이 알 수 없는 현상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윤재하는 생각했다. 무작정 그의 교복이 가리키는 학교를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앞두던 때였다.
"재하야!"
사색이 된 얼굴의 모친이 맞은편의 길목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모친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인 윤재하가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초조한 기분으로 신호등을 주시했다. 마침내 초록 불이 번쩍 빛을 내었고 윤재하는 모친을 향해 힘껏 달려나갔다. 모친 역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다다른 순간.
빠아아아앙―!
불쑥 귀를 찢을듯한 경적과 함께 거대한 트럭의 그림자가 닥쳐왔다. 뇌를 관통하는 소리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절망하는듯한 운전자의 얼굴 뒤로 검은 형상이 보였다.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멈춰버린 몸뚱어리는 닥쳐오는 트럭을 피할 수 없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질려 눈물이 흘러내리던 그때.
"재하야!"
강한 힘이 가슴을 밀쳤다. 아이의 작은 몸뚱어리는 한순간 허공을 갈랐고, 찰나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퍽, 머리를 부딪힘과 동시에 끼이이익―! 타이어가 마찰하는 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가물어지는 정신에 닿은 그 소리는 마치 귀곡성처럼 들렸다.
사람들의 비명과 무언가 타는듯한 매캐한 냄새,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흐려지는 망막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모친의 모습이 맺혔다.
"......마, 엄, ......마아......."
아이의 미약한 목소리는 소란한 상황에 묻혀버리는 듯했으나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이 꿈틀, 움직였다. 구급차를 부르는 사람들과 쓰러진 아이를 품에 안는 사람들. 모친은 핏물에 흐려진 시야로 기절한 아이를 눈에 담았다.
재하야. 재하야.
죽음의 내음이 몸에서 피가 빠져나간 자리를 메웠다.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을 필사적으로 붙든 모친은 오로지 아이만을 바라보며 꿈틀거렸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앞을 기어가는 여인의 모습은 실로 기괴했으나 몇몇 사람들은 행동의 이유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기절한 아이를 품에 안고 다가가자, 여인이 손을 뻗었다. 아이의 손목을 삶의 동아줄처럼 붙들었다. 우악스러운 힘에 아이의 염주가 툭, 끊겨버리고 말았다. 투두둑, 나뒹구는 소리가 이명처럼 여인의 귀에 닿았다. 손에 쥐어진 두 개의 알을 간신히 움켜쥔 여인이 아이의 손목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꺼져가는 생명을 끌어모아 손끝에 힘을 실었다. 그의 부친이 가둬놓은 저주의 존재를 막기 위해 알아 온 부적을 여린 피부 위에 써 내려갔다.
"......귀어(鬼語)라고요."
"그래. 귀신의 말로 그 존재를 속박하는 거야. 이름을 알아낸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선 모습을 표현하는 정도가 최선이다. 봉귀함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힘이 많이 약해졌을 거야. 이 정도면 당장 2, 3년 정도는 보호할 수 있을 거다. 늘 몸에 지니고 있으면 함부로 건들지 못할 거야."
부적의 문양을 물끄러미 눈에 그리던 여인이 부친의 동료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대체 그 존재는 뭐죠?"
"......."
"아버지는 제 자식에게조차 당신의 품 한번 내어준 적 없던 분이셨죠. 어렸을 땐 그게 어찌나 서러웠는지, 그러다 오기마저 생기더군요. 저 품이 뭐길래, 나는 이렇게 애정을 갈망할까. 한번 안아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워서 아버지는 내게 거리를 두는 걸까."
침묵하는 노인을 향해 여인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한번은 미친 듯이 돌진해봤어요. 그 품에 한 번 안겨보겠다고. 그러다가 아버지의 품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는데, 혹시나 귀한 것이 깨졌을까 봐 깜짝 놀라서 굳어버린 제게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내셨어요. 바닥에 나뒹구는 함을, 갓난아기를 대하듯 고이 안고 뒤돌아서 가버리시더군요."
"윤영아, 그건......."
"알아요. 제가 성인이 되고서야 말해주셨거든요. 그건 귀신을 봉인해둔 봉귀함이라고. 그 안에 담긴 귀신이 너무나도 악독해, 언제 풀려나올지 몰라 두려운 존재라고. 차라리 당신께서 지녀 지켜보는 게 낫겠다고 여길 정도로."
"......."
"난 또, 그 안에 금은보화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악귀라니. 나는 악귀에게조차 밀려버린 존재구나 생각하니 새삼스레 허탈했죠.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 아버지의 방식을 이해할 순 없어요.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결국 그 악귀의 존재를 끝까지 놓지 못해버려서 생겨난 일이니까. 그걸 품에 지녔던 탓에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된 거나 다름없잖아요."
침음을 삼킨 노인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를 향해 여인, 이윤영이 말했다.
"어떻게 봉귀함을 벗어났는지 따윈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저한테 가장 중요한 건 그 존재가 우리 재하를 위협하지 못하게 막는 거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타깃은 재하가 된 게 분명해요. 적어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정보는 알아야 하잖아요. 알려주세요. 돌아가신 아버지는 제게 알려줄 수 없으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너도 알 권리가 있지."
긴 한숨을 내쉰 노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먼 옛날, 악으로 가득 찬 귀(鬼)가 있었다. 교활하고 영악한 그것은 이승을 찾아온 차사의 신분을 가로챘고, 빼앗은 명부를 이용하며 산 자들의 영혼을 집어삼켰다. 악귀에게 신분을 빼앗긴 차사는 저승에 돌아가지 못하여 이승을 떠돌았다. 그렇게 제 모든 것을 앗아간 악귀의 자취를 쫓으며 구천을 맴돌던 어느 날. 차사는 한 노인을 만났다.
타고난 명줄이 길어 죽지도 못한 채 살아가던 노인은 그의 사연을 가엾게 여겨 도움을 주기로 하였다. 차사는 명부에 적힌 이름 하나를 기억해냈고, 노인은 차사의 도움을 받아 미리 죽음을 앞둔 자의 곁에 숨어서 때를 노렸다.
마침내 그들이 기다리던 악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준비해둔 봉귀함에 악귀를 가둬버린 노인은 그것을 깊은 강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노인은 차사의 신분을 되돌려주었다. 빚을 진 차사는 원하는 것을 물었고 노인은 대답했다.
"나를 저승으로 인도해주시오."
긴 명줄 탓에 자식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것이. 모두를 떠나보내고 홀로 살아 숨 쉬는 삶이 노인에겐 지옥과도 같았다. 삶은 더 이상 노인에게 기쁨이 될 수 없었고, 차사는 그런 노인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노인은 바라던 대로 이승에서의 삶을 끝냈다. 차사 역시 본래의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강에 가라앉은 봉귀함이 깨져버린 것은 새카맣게 모른 채.
깊은 강의 아래에서 빠져나온 악귀는 저를 가둬버린 노인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노인의 혼은 이승을 떠난 지 오래였고, 악귀의 시선은 노인의 핏줄에게 향했다. 노인의 손자로부터 시작된 괴롭힘과 저주는 악귀의 즐거움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새 무당의 줄을 탄 핏줄이 도리어 악귀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기나긴 대에 걸쳐 또다시 봉귀함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대대로 내려오는 악귀를 간신히 봉인한 박수 이윤상은 봉귀함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를 타고 내려온 악귀의 존재와 저주로 인해 그의 인생은 박복했다. 그건 악귀를 봉인한 후에도 달라지지 않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불행할수록 행복을 갈망하지 않던가. 핏줄을 이어봤자 불행만 내려준다는 걸 알면서도 이윤상은 끝내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내심 생각하였다. 뒤를 이을 핏줄이 제 불행을 가져가지 않을까 하는. 그렇게 가정을 이룬 이윤상에게 첫 아이가 태어났고, 몇 년의 터울을 지나 둘째가 태어났다. 그게 이윤영이었다.
"깊은 강에 던졌다가 한번 실패했다는 걸 알기에, 윤상이는 두려웠던 거야. 차라리 제가 지켜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겠지."
"......결국 그건 저주 같은 거네요. 소멸하지 않는 한, 그것의 원한은 핏줄에게 향할 테니."
"그래. 하필 재하 같은 경우엔 그릇의 자질이 뛰어나서....... 그것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을 거다. 지금 당장은 힘을 쓸 수 없으니 곁을 맴돌며 괴롭히려 할 거야. 고립된 아이의 마음을 노릴 테지."
"이 부적을 쓰면, ......적어도 당분간은 안전한 거 맞죠?"
"그래. 그럴 거야."
"......고맙습니다."
"아버지 일은 유감이다. ......이렇게밖에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윤영아."
부적을 소중하게 쥔 이윤영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대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으나 그날따라 도로의 상황이 그의 사정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점심시간까지는 돌아가기로 약속했는데. 많이 기다릴 텐데. 조급한 마음은 자꾸만 타들어갔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겨우 먼 길을 돌아온 여인은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곧장 2층의 문을 두드리자 삶에 권태를 느끼는 낯의 노인이 말했다.
"아이는 아침 일찍부터 집에 내려갔어. 고양이가 걱정된다고."
"아,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붙들었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재하야?"
불안함은 현실이 되었다. 집안 어디에도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툭, 가방을 떨어뜨린 여인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헤집었고, 마침내 사거리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재하야!"
아이가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이의 표정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안심한 듯 허물어졌다. 발을 동동 굴리며 신호등을 바라보던 아이의 망막에 초록 불이 스며들었다. 힘차게 달려오는 아이에게 그 역시 달려가던 순간. 그들을 향해 돌진하는 트럭을 발견한 건 이윤영이 먼저였다. 운전자의 뒤에 숨은 검은 형체의 존재 역시.
"......안돼."
빠아아아앙―!
이윤영은 힘껏 아이를 밀쳤다. 바닥에 나뒹구는 아이를 눈에 담기 무섭게 거대한 고통이 온몸을 들이받았다. 허공을 가르고 튕겨 나간 몸이 아스팔트 위에 갈려나갔다. 그러면서도 온 신경은 아이에게 향했다. 온몸을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었고 마침내 아이의 손을 붙들었다.
기껏 받아 온 부적은 집에 던져두고 온 가방 속에 존재해서, 이윤영은 눈에 그려 넣은 문양을 상기했다. 제 모든 기력을 다 끌어모아 손끝에 집중했고, 염원을 담아 아이의 손목에 새겨나갔다. 제 피와 생명력이 부적의 효과가 되기를 바라면서.
손끝이 멈춘 건 구급차의 소리가 가까워진 후였다. 툭 떨어진 손아귀에서 하나의 알이 떨어져 나갔다. 나머지 한 알만큼은 강하게 붙든 이윤영이 눈을 감았다.
* * *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끝도 없이 차오르는 물기가 창백하게 질린 두 뺨을 적셨다. 조여오는 가슴께의 옷깃을 부여잡고 잡음 섞인 숨을 몰아쉬었다. 애통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짐승처럼 흐느꼈다.
「울지 마. 울지 마, 재하야.......」
애달프게 우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형체가 애원했다.
「괴로운 거 알아. 그래도 알아야만 했어. 네 가족이 죽은 게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걸.」
"......."
늘 모호하기만 했던 죽음의 형태가 비로소 선명해졌다. 기억을 마주한 윤재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괴로운 신음만 뱉을 뿐이었다.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알겠지? 네 가족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게 그자 때문이라는걸. 봉귀함에 갇혀 있던 악귀를 들쑤신 게 바로 그자의 기운이야. 그자의 기운만 아니었어도 잠들어 있던 악귀가 깨어나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형체의 말을 인정할 순 없었다. 윤재하는 하얗게 질린 낯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프게 잠긴 목소리가 형체를 향했다.
"......그건 형의 잘못이 아니야."
「뭐라고?」
형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으나 그를 마주한 상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할아버지와 엄마가 돌아가신 건, 형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왜 네 탓이야. 넌, 재하 넌 아무것도 몰랐잖아...! 너는 피해자야!」
"그건 형도 마찬가지야."
「......뭐?」
"아무것도 몰랐단 건 형도 마찬가지라고. 내가 몰랐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엄마를 죽음으로 이끈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면 형도 똑같잖아. 그래, 당신 말대로 형의 기운이 악귀를 건드린 걸 수도 있어. 하지만 할아버지와 엄마를 죽게 한 건 그 악귀야. 형이 아니라!"
「깨어나지 않았으면 죽을 일도 없었어!」
"애초에!"
벼락같은 음성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굳어버린 형체를 향해 울분 섞인 말을 토해낸다.
"애초에 악귀 따위가 존재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죽을 일이 없었다고? 과연 그게 영영 깨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 아니야. 애초에 악귀를 끌어안은 순간부터 우리 가족은 안전할 수 없었던 거야!"
「.......」
"원망의 화살을 형한테 돌리지 말아요. 기운 자체가 문제라면 그걸 묻혀간 나 역시 잘못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해요. 할아버지와 엄마를 죽인 건, 형도, ......나도 아니라 그 악귀라는 걸."
붉게 충혈된 눈을 가린 윤재하가 가슴을 들썩였다. 사실 모든 기억을 마주했음에도 모친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멍청하게 굳어버린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얻을 순 없었다.
하지만 그날의 사고는 악귀의 소행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 존재가 제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는 것도. 모친이 피로 새겨넣은 귀어의 자리를 어루만진 윤재하가 형체를 바라보았다.
"......기억을 봤다면 알겠죠. 악귀는 내 주변을 맴돌고 있을 거예요. 내 곁에 있으면 당신도 위험해져요."
「......그래서?」
"돌아가야죠. 원래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다니....... 네 곁이 아니면, ......내가 갈 곳이 있던가.」
형체가 무감하게 읊조렸다. 비껴가는 시선을 쫓은 윤재하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있어요."
「그게 어딘데?」
"그전에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입술을 달싹이던 윤재하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당신은 누구이길래, 내 기억을 마주하며 고통을 토하고 그 어린 날의 내 곁에 남아주었나.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길래 엄마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
"왜 내 곁에 있었어요?"
「......나는, 나는 재하야.......」
윤재하는 머뭇거리는 형체의 손을 잡았다. 커다랗게 감싸오는 손은 그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란 걸 증명했다. 아, 이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을 한 형체가 입을 열었다.
* * *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는 거겠지."
덤덤하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답을 읽은 남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 오늘이 마지막이겠군. 그렇지?"
"눈치도 빠르네요."
"내가 너를 한두 해 보나? 난 네가 태어나는 것도 보았는데."
설핏 웃은 김석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한 번쯤은 카네이션이라도 달아줄 걸 그랬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하나 달아줄 테냐?"
"미안하지만, 지금 꽃을 구할 수 있다면 내가 살 꽃은 카네이션이 아니라."
"......."
"튤립일 거예요."
우연히 알게 되었던 꽃말을 떠올리며 김석영이 말했다. 그 꽃이 향할 대상은 누구일지 뻔했다. 끝내 남는 건 지독한 사랑이구나. 한숨을 삼킨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저승으로 갈 맘이 생긴다면 그때 보도록 하지."
"고마웠습니다. 진심이에요. 그리고......."
"알아. 윤재하는 걱정하지 마. 어떻게 해서든 귀문을 닫아줄 테니까."
말을 빼앗겨 눈을 깜박이던 김석영이 눈매를 늘어뜨렸다.
"네, 고마워요."
남자가 떠난 빈자리에서 시선을 거둔 김석영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욕심내주면 안 돼요? 나랑 같이 살면 안 돼요?"
"......욕심."
이미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기한이 정해진 삶에 그를 들여놓았으니. 상황만 정리가 된다면 기억을 지우고 보내겠다는 다짐은 점차 잊혀만 갔고, 윤재하와 함께하는 생활에 온 신경을 빼앗겼으니.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진즉 기억을 없애고 보내버렸어야 했다.
악귀를 찾는 것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빠르게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기억을 지우고 일상으로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사실은 내심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도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끝을 향했다. 어둠의 농도가 지금보다 짙어지고, 푸른 새벽의 동이 트면 저는 떠나야만 한다. 남은 시간은 윤재하와 보내고 싶다. 이승에서의 마지막은 그와 함께이고 싶었다.
"아까운 시간 버릴 순 없잖아. 그렇지?"
윤재하와 결속된 금줄을 어루만진 김석영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내 이어진 기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