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0 0 0
                                    

"누누이 말하지만, 여기선 누군가가 네 이름을 불러도......."
"절대 대답하지 말 것. 형의 목소리를 들어도 흔들리지 말 것. 위험할 것 같으면 도망은 가도 되지만 다시 돌아올 것. 그래야 형이 나를 찾을 수 있으니까. 아, 그리고 물가에 가는 것도 조심해야 하고요."
술술 읊는 말에 앞서 걷던 김석영의 걸음이 멈췄다. 뒤를 돌아보자 말간 낯의 윤재하가 유순한 눈으로 그를 마주 봤다. 어쩐지 헛웃음이 나와 웃고 있으니, 영문도 모르는 윤재하는 따라 미소 지을 뿐이다.
"왜 웃어?"
"......어, 형이 웃으니까....... 나도 모르게요."
김석영이 말하고서야 제가 웃고 있다는 걸 깨달은 윤재하가 귀를 붉혔다. 저 풋내 나는 청년의 싱그러움에 잠시 할 말을 잃은 김석영이 부러 건조한 투로 내뱉었다.
"네 몸을 지킬 수 있는 건 너라는 걸 잊지 마. 잘 버티고 있어줘. 아무래도 오늘은 좀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네. 걱정 마요."
풋사과 같은 청년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건조한 가면을 떨치고 옅게 웃음을 흘린 김석영이 제 몸에 걸친 카디건을 벗어 건넸다.
"걸치고 있어. 내 냄새가 묻어 있어서 도움이 될 거야. 팔찌도 함께니까 그 정도면 별일 없이 지나가겠지."
"......."
윤재하는 제게 건네진 카디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 없이 검은 옷감을 응시하던 그가 내리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정면으로 마주한 윤재하의 낯이 퍽 오묘하다고 느끼던 순간, 찰나의 정적을 부순 말이 김석영의 귓전을 때렸다.
"......오늘은 입 맞춰주지 않으려고요?"
"......."
'이것 봐라.'
카디건을 챙기면서 혹시나 했던 생각이 현실이 되었다. 별스러운 상상을 다 하는 스스로에게 코웃음 쳤건만. 김석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현된 상황에 헛숨을 삼켰다. 황당함을 감추지 않은 그가 윤재하를 응시했다.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내뱉은 주제에, 온전하게 뻔뻔해지진 못했는지 화르륵 얼굴을 붉힌다.
"......그, 지푸라기에는 입 맞춰 줬잖아요."
불퉁한 읊조림에 심드렁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윤재하. 나는 입맞춤을 해준 게 아니라 당한 거야."
"가만히 있었잖아요."
"가만히 있지 않으려던 순간에 네가 끼어든 거고."
"......그래서."
눈앞에서 간식을 빼앗겨 시무룩해진 아이처럼 특유의 말간 눈을 늘어뜨린 윤재하가 말했다.
"안 해줄 거예요?"
"......."
할 말을 잃어버린 마른 입술이 방황하듯 달싹였다. 그러기도 잠시, 곧 단념한 것처럼 옅게 한숨을 내쉰 김석영이 시선으로 그를 옭아매는 상대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김석영의 향이 코끝을 스치기 무섭게 호흡은 형편없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런 제 어리숙함이 부끄러웠던 윤재하가 재빨리 숨을 삼켜버렸으나 실로 부질없는 발악이었다. 그의 손끝이 얼굴에 닿은 순간, 막힌 숨은 찰나도 채우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줄곧 잡고 있어 미지근한 온도를 품은 오른손과는 달리, 서늘한 왼 손바닥에 뺨을 기댄 윤재하가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동시에 김석영의 고개가 기울여졌다. 맞닿을 감촉을 기다리며 빠르게 숨을 삼킨 그때.
빠악―
"아......!"
이마에서부터 묵직한 통증이 번져오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윤재하가 제 이마에 머리를 박아버린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꿈 깨시지."
"박치기는......."
서러움을 삼켜내듯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이내 잠깐의 시차를 두고 작은 원망이 흘러나왔다.
"너무하잖아요......."
"너무하긴. 안 깬 걸 다행으로 여겨도 모자랄 판에."
하지만 김석영은 어린 청년의 원망을 가볍게 튕겨냈다. 짓씹느라 붉어진 입술을 불퉁하게 움찔거린 윤재하가 이마를 매만졌다.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말고 네 몸이나 잘 지키고 있어."
"......."
"윤재하. 대답 안 해?"
"허튼수작이라니......."
퍽 억울한 낯의 윤재하가 말을 중얼거렸다. 도리어 황당해진 건 김석영이었다.
"뭘 억울해하고 그래."
"왜 수작이라고 표현을 해요?"
그저 좋아하는 사람에게 닿고 싶었을 뿐인데. 제 마음을 수작질이라 표현한 김석영에게 서운해진 윤재하가 표정을 흐렸다. 멈칫한 김석영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네 행동을 돌이켜 봐. 그게 수작질이 아니면 뭘까, 재하야."
"수작질이 아니라 나는 그냥, 그냥......."
잠시 말을 고르던 윤재하가 맥없는 한숨을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형이랑 닿고 싶어서, 그 마음이 너무 커서 그랬던 거예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말해버리면 내 마음이 너무 가볍고 하찮은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말을 하면 할수록 목멘 소리가 흘러나왔다. 끝내 아픈 듯이 일그러진 얼굴이 김석영의 두 눈을 붙들었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그랬어?"
"......네."
내리깐 속눈썹과 굳어진 입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석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그의 얼굴에 야속한 마음을 억누른 윤재하가 표정을 갈무리하려던 순간이었다.
"상처가 됐다면 미안해."
그가 사과를 건넸다.
"하찮게 여긴다거나 구태여 상처를 주려던 건 아니었어. 그런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가볍게 생각하고 싶었던 건 맞아."
"......왜 가볍게 생각하고 싶었는데요. 받아줄 수 없어서?"
"그래. 받아줄 수 없어서."
윤재하는 속이 옥죄이는 듯한 통증에 입술을 짓이겼다. 불긋해진 눈가 어귀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감도는 것을 담담하게 바라보던 김석영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네 마음이 단순한 착각이길 바라."
"받아줄 수 없으니까?"
"그래. 받아줄 수 없으니까."
서러운 마음을 삼켜내며 호흡을 갈무리한 윤재하가 물었다.
"받아줄 수 없는 이유에, ......내가 남자라는 게 포함돼요?"
"성별을 따지자는 게 아니야. 네 문제도 아니고. 그냥, 나 때문이야."
"무슨 말이에요?"
가벼운 말 한마디에 섞인 숨결에도 꺼져버릴 듯한 촛불처럼.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작은 목소리가 물었다. 잠시 침묵을 머금은 김석영이 여상한 투로 대꾸했다.
"말 그대로야. 나는 곁에 사람을 둘 생각 자체가 없어. 그래서 그래."
김석영은 제 의지로 타인을 곁에 둔 적이 없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도 없다. 고작해야 서른이라는 짧은 생을 살아왔지만, 그 누구도 저보다 우선일 순 없었다. 타인에게 감정을 내어줄 만큼 관계에 있어 여유롭지도 절실하지도 않았던 탓이다. 그건 늘 마주하는 것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형태여서 일지도 모른다.
그가 마주해온 세상에서 사랑이라 표현하는 것의 형태는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영원을 꿈꾸는 감정의 고조 역시 헛된 바람에 가까웠다. 관계, 사랑, 영원. 이 모든 걸 감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저 그에겐 필요치 않은 영역이라 여겨졌을 뿐이다.
"......그럼."
말을 머금은 윤재하의 입술은 경직된 채였다. 만면에 번진 감정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헤아려볼 순 없으나, 적어도 그가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나도 보낼 거예요?"
잔떨림이 묻어난 말이 귓가에 박히기 무섭게 김석영의 속이 조여왔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인데도 윤재하의 입을 통한 순간 새삼스러운 기분에 휩싸이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그리고 깨달음은 해일처럼 밀려왔다.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지난 제 행동의 자각이었다.
언젠가부터인지도 모르게, 윤재하를 보내는 것보단 지켜줘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 그리고 곁을 줄 생각이 없다고 말한 주제에 그를 제 곁에 둔 게 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만 것이다.
'왜 그랬지?'
깊게 의식하지 않았던 제 행동에 이유를 물었다. 모호한 범위에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질문을 축소해보기로 했다.
'왜 곁에 두었지?'
그러자 답은 금방 나왔다. 윤재하가 제 영역 안에서 사고를 겪었으니까. 사귀가 빙의된 자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 사귀를 꼬드긴 대상이 제 영역에 있었다고 했다. 크게 보면 그가 터를 돌보지 않아서 생긴 일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직접적으로 몸을 빼앗겼던 장소도 저택이 아니던가.
과연 이 모든 게 망자를 달고 다닌 윤재하의 업보인 걸까? 오히려 삿된 기운을 달고 다니는 저로 인해서 악연에 휘말린 건 아닐까.
그렇다면 더더욱 지금 당장은 윤재하를 곁에 두어야 했다. 그가 있어야 악귀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으므로. 그러기 위해선 윤재하가 온전해야 했다. 다치지 않게 지켜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지키기 위해서 했던 행동이 유난스러웠다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그게 새삼스레 김석영을 당황스럽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정이 무섭긴 하네.'
헛웃음을 삼켜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알고 있었잖아."
서로 합의된 사안이 아니었냐고 덧붙이자 윤재하의 낯이 일그러졌다.
"단순히 집을 나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모든 게 끝난 후에, 영영 나 안 볼 거예요?"
찰나의 침묵이 맴돌았다. 설핏 웃음을 머금은 김석영이 대답했다.
"아마도?"
"내가 형을 찾아와도요?"
모호한 대답에 집요한 되물음이 이어졌다. 김석영은 잠시 말을 삼키고 눈앞의 상대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앞을 지키는 청년은 넘실거리는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는 서툰 아이 같았다. 그 애처로운 모양새가 자꾸만 그의 시선과 신경을 붙든다. 뻐근해진 가슴께의 통증을 견뎌낸 김석영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너는 날 찾아올 수 없을 텐데.'
그가 결정한 윤재하의 끝은 기억을 지운 채 일상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이었다. 십 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만나게 된 순간과 함께 보냈던 시간 자체를 지워버릴 텐데. 기억이 사라진 윤재하가 어떻게 저를 찾아올 수 있을까. 하물며 자신은.......
김석영은 입안에 맴도는 말을 집어삼켰다. 평소와는 달리 쉽사리 말할 수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윤재하의 표정이 이보다 더한 슬픔으로 물들 것이기 때문이다. 시선을 돌린 그는 제 팔에 걸쳐둔 카디건을 윤재하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이제 가야 해.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기다림만 길어질 테니까. 그러다 육신이 버티지 못하고 흐려지면 영영 돌아가지 못한 채 여기서 머물게 되는 거야."
"......."
윤재하는 부러 화제를 돌린 김석영의 태도에서 숨겨진 대답을 간파했다. 명치가 조여와 잠시 숨을 삼킨 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적인 대답을 듣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무언가 매달릴 것이 필요했던 걸까. 윤재하는 제 어깨에 걸쳐진 카디건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구겨진 소매와 힘을 준 엄지손톱의 끝이 하얗게 변해가는 걸 바라본 김석영이 시선을 돌렸다. 가라앉은 시선은 손목으로 흘러갔다. 그곳에 자리한 금줄과 그로부터 이어진 기운의 흐름을 눈에 새겨넣은 김석영이 입을 열었다.
"일에 묶여 있을 땐 네게 무슨 일이 생겨도 달려올 수 없어. 네 몸을 지킬 수 있는 건 너라는 걸 잊지 마. 위협을 느낀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널 지켜."
"......네. 알겠어요."
"이후의 수습은 내가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김석영은 저도 모르게 불긋해진 눈가로 향하려는 시선을 붙들었다. 달래줄 수도 없었고,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었다. 오늘따라 윤재하를 등진 채 떼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구태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채 저만을 바라보는 말간 눈을 보게 된다면, 금방이라도 돌아가고 싶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
그렇게 멀어지는 김석영의 뒷모습을, 윤재하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다녀오세요."
혀끝에서 맴도는 문장은 그리 무거운 게 아닌데도, 남자의 뒷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꺼낼 수가 없었다. 결국 텅 빈 허공을 마주하고서야 터진 그 말은 볼품없이 흩날렸다.
속 안에서 번져오는 둔통에 윤재하는 제 가슴께를 꾹 눌렀다. 난생처음 느껴본 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흔들었다. 스스로를 뒤흔들 것 같다면 그게 무엇이든 거부하고 억누르고 감춰왔는데. 지금은 감추기는커녕 드러내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재하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당황스러울지언정 그런 스스로를 비웃고 싶진 않았다. 불시에 마음이 터져나가던 순간과 숨통이 조여오는 것만 같았던 감각을. 벅차오르던 마음과 설렘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출된 감정이 선사한 홀가분함은 실로 달콤했다.
그래. 결국은 터져버린 게 문제였다. 터져버린 틈새를 메꾸는 방법 따윈 몰라서 자꾸만 마음이 흘러나왔다. 그게 김석영을 당황스럽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조절이 안 됐다. 좀 더 성숙하고 근사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리숙한 마음은 표현하는 형태 또한 어리숙하기만 했다.
감정이 향하는 대상이 김석영이라서 좋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김석영이라서 어려웠다. 그의 건조한 태도와 여유를 보고 있노라면 무엇이든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게 좋았는데. 지금은 제 감정을 대하는 김석영의 태도가 여유롭지 않기를 바랐다.
그도 조금은 흔들리기를, 어렵기를. 바라고 마는 것이다.
* * *
김석영은 업(業)을 지닌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났다. 유례없이 강한 기운과 능력을 지닌 탓에 열아홉이라는 이른 나이부터 저승을 오갔다.
보고 자란 환경 때문일까. 그는 제게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겉보기와는 달리 부지런한 면모가 있어 주어진 의무에 충실했다. 그렇다고 투철한 사명감 따위가 있던 것은 아니다. 그냥 해야 하니 할 뿐이고, 하다 보니 제 선에서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뿐이다. 어중간한 건 뒤끝이 더럽다고 느끼는 성미를 지닌 탓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업(業)의 무게도 한 손가락을 꼽을 정도가 되었다. 십 년이 넘는 세월 간 산중에 처박혀 일만 해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긴 했다. 그는 무모할 정도로 저승을 오가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고, 타고나길 무심한 성정은 제 몸을 돌볼 줄 몰랐다. 하지만 세상의 규율을 어길 수 있는 특수성과 비범한 귀재(鬼才)로 태어났다 해도 인간은 인간이다.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타인의 눈을 피해 고택을 숨겨두는 것도, 손님을 받아들이고 저승을 오가는 것도 모두 김석영의 기운이 필요한 일이었다. 수신자의 물건에 스며든 기억을 끌어내고, 그 기억의 공간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 역시 그의 역할이었고.
시간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타인의 기억은 그 형태도, 무게도 다르다. 그를 찾아온 손님들의 대부분이 강한 염원을 지닌 자들이긴 하나, 그 염원의 무게에도 차이는 존재했다. 무겁고 독한 것일수록 김석영의 기운을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화수분처럼 넘쳐나던 기운도 예전만치 못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물며 이번은 어떠했던가. 지독할 정도의 염원이 담긴 의뢰가 아니었나. 자연히 먼 길을 돌아온 김석영의 걸음이 묵직해졌다. 비단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억만 개의 추를 단것처럼 무거웠고 두통 또한 일었다. 하지만 경계로 돌아가는 걸음이 늘어지진 않았다. 그가 피로감을 느낀 만큼 윤재하의 기다림도 길어졌음을 의미하므로.
그때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김가(金家) 아닌가?」
서두르는 김석영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자넨 여전히 부지런하네. 그러다 제 명에 못 살고 오겠어.」
"그럴 리가요."
성의 없이 대꾸한 김석영이 은근슬쩍 어깨동무하려는 손을 쳐냈다. 혀를 찬 남자, 명계의 차사가 그의 속도를 따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어딜 그리 바삐 가나. 나만큼 바쁜 것도 아닐 텐데.」
"바쁘면 갈 길 가셔야지. 왜 따라오실까."
「이리 서두르는 걸 처음 보니 신기해서 말이지. 뭔데 그래. 어디 재미난 일이라도 있나? 좀 알려줘 봐. 요새 일이 너무 팍팍해서 환기할 게 필요해.」
"제 일상이 팍팍하다고 해서 남의 일에 위로받아서야 쓰나."
그러니 환기할 거리는 저 스스로 찾아내라고 덧붙이던 김석영은 잔뜩 찌푸린 남자를 돌아보며 혀를 차고 말았다. 입에 발린 투정은 아니었는지, 새카맣게 죽은 낯 위로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나 있었던 것이다.
"망자의 수가 늘기라도 했나 봐요."
「자네는 말을 참....... 아니다, 됐네. 자네랑 입씨름 해봤자 나만 열 오르겠지. 그리고 뭐, 망자의 수가 특별히 늘어난 건 아니야. 아슬아슬하게 평균치를 유지하고 있기는 한데.......」
단전부터 끌어온 한숨을 내쉰 차사가 구시렁거렸다.
「인도 과정에서 자꾸 구멍이 난단 말이지.」
"구멍?"
「그래, 구멍. 망자 몇몇이 불쑥 사라지고 있어서 명부에 구멍이 나버렸지. 아무래도 틈새에 휘말린 것 같아.」
"틈새......."
나직하게 읊조리는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인 차사가 투덜거렸다.
「근래 부쩍 자주 일어난다더군. 하아, 귀찮은 일을 떠맡아버렸어. 이 넓은 저승 경계를 언제 다 뒤지고 있냔 말이야.」
슬쩍 곁눈질로 김석영을 살핀 차사가 앓는 소리를 더했다.
「이럴 때 누구라도 도와주면 좀 수월할....... 뭐야, 왜 그래?」
"......."
불시에 걸음을 멈춰 세운 김석영이 제 오른 손목을 바라보았다. 경계에 가까워지기 무섭게 금줄에 달린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피로감에 둔해진 신경이 단번에 곤두섰다. 그의 날 선 기운이 차사에게까지 끼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리 무서운 낯을 하고 있나 싶은 정도였다.
「이봐, 무슨 일이냐니까.......」
"......그건 위험이 닥쳐올 때만 소리를 내."
욕설을 짓씹은 김석영이 뛰쳐나갔다. 서릿발 같은 기색에 당황한 차사가 그의 뒤를 따랐다.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 다다라서야 멈춰선 김석영을 붙들었으나, 굳은 낯을 한 그는 차사의 손을 떨쳐내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망각의 물거품이 찰랑이는 자갈밭과 푸른 초원.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을 버티지 못하고 땅 아래에 몸을 숨기는 존재들의 자취가 전부일 뿐.
그 어디에도,
"......."
윤재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삽시간에 빠져가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차가워진 김석영이 시선을 내렸다. 연결된 금줄에서 뻗어나간 자취에 온 신경을 집중하자 곧 희미한 줄기가 느껴졌다. 차사는 영문도 모른 채, 빠르게 발을 떼는 김석영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간 걸었을까. 불쑥 김석영의 걸음이 멈췄다. 메마른 낯을 한 그는 기운이 끊어진 지점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고정된 시선을 따라가던 차사는 의아한 숨을 토해냈다.
「저게 뭐야?」
"......."
허공의 틈에서 검은 카디건이 휘날리고 있었다.

তেওঁ মই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