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을 자고 일어나서인지 입안이 꺼끌꺼끌했다.
살기 위한 본능이었던 건지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틈틈이 수분은 섭취한 것 같은데. 꿈인지 현실인지는 잘 분간이 안 갔다. 오랜 공복 탓에 속이 쓰려 입맛이 없었지만 이미 이상현이 구해놓은 도우미가 밥을 두고 갔기에. 사람 된 도의로서 한술 떴건만 영 입맛에 안 맞았다.
밥은 너무 질었고 콩나물국은 짰다. 소시지는 평소엔 입에도 안 대는 것인 데다가, 김치의 맛도 영 미묘했다. 그나마 먹을만한 건 계란프라이 정도일까. 아, 노른자가 적당히 반숙인 건 그나마 맘에 들었다. 정말, 그나마.
떡 씹는다 생각하고 밥만 몇 술 더 뜬 김석영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툇마루에 보온 박스를 내려놓고 안채로 돌아와 뻐근해진 몸을 풀고 있자니 벌써 점심이었다. 허기보다는 메뉴의 구성이 궁금해져 확인해 본 김석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급식 구성 아닌가, 이거."
묘하게 낯이 익다 했더니, 고등학생 때 주구장창 나왔던 급식 구성이었다. 학교 영양사 출신인가 보지, 뭐.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석영이 젓가락을 들었다.
캔 참치의 향이 밴 야채를 피해 나머지만 조금 씹었다. 밥은 역시 질었고, 대체로 간이 짰다. 기미 상궁처럼 맛만 본 김석영은 가차 없이 보온 박스를 덮어버렸다. 아마, 이번 도우미도 얼마 못 갈 듯싶었다.
하지만 웬걸.
그의 예상과는 달리 이번 도우미는 제법 끈기가 있었다. 터의 기운을 견디며 오가는 것도 대단한데 까다로운 그의 입맛까지 분석하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손이 가지 않은 찬은 내오지 않았고, 손이 많이 갔던 찬은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해서 올려본다. 입이 짧은 걸 알았는지 음식의 양을 줄이는 대신에 반찬의 가짓수가 늘어났다. 간 역시 대체로 담백해지더니 날이 갈수록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덕분에 김석영의 살도 보기 좋게 오르는 중이었다. 잘 먹어서인지 일을 하고 돌아와도 부쩍 피로감이 줄었다. 밥심이 최고라고 염불을 외고 다니던 사촌의 낯짝이 떠오른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바라보다 지루해지면 책 한 장을, 활자를 읽다가 지루해지면 또다시 순백의 세상을 구경하던 김석영에게 나비가 다가왔다. 새벽부터 안 보이더니, 불쑥 기분이 좋아 보여서 이유를 묻자 비밀이라 한다.
"왜 비밀인데."
애옹―
"곧 알게 될 거면 그냥 말해줘."
질척이는 게 성가셨던 모양인지 손길을 피해 훌쩍 사라져버렸다. 빈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자연스레 페이지를 넘긴 김석영이 남은 활자들을 읽어갔다. 그대로 책 한 권을 완독하고 나니 부쩍 눈이 피로했다. 세상마저 새하얘서 그런지 괜히 더 시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베개 대신 방석을 접어 벤 김석영이 두꺼운 이불을 끌어와 눈을 가렸다.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시원했다.
「냐아―」
음악까지 틀어놓고 오후의 나른함을 즐기던 김석영의 곁으로 마실 나간 나비가 돌아왔다. 이불 속에서 가늘게 눈을 뜬 그는 제 상체 위에 자리 잡은 형체를 쓰다듬었다.
'어떻게 할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민에 잠기던 김석영은, 음악이 멈추고 나서야 화들짝 달아나는 기척에 마른 웃음을 삼켰다. 반쪽짜리 용기가 싱겁다.
제 위에 누워 있든 말든 훌쩍 상체를 일으킨 김석영이 바닥에 나뒹구는 나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알게 될 거란 게 저거야?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제 몸을 떨쳐낸 것에 기분이 상한 나비가 대답 없이 떠나버렸다. 오른 무릎에 턱을 괴고 무료하게 눈을 깜박이던 김석영이 피식 웃어 보였다.
"설마."
* * *
헐레벌떡 도망가던 침입자가 돌탑을 건드렸다는 건 진즉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결계에 손을 보지 않은 건 침입자의 정체가 궁금해서였다. 나비의 행동도 묘하고 말이다.
때마침 손님의 방문과 동시에 무언가가 공간에 침범했다.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누구일진 뻔했다. 어떻게 할까, 턱 끝을 긁적이며 잠시 고민하던 김석영이 공간을 닫아버렸다. 멋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흐아아악!"
"진정하세요."
낯선 상황에 겁을 먹은 손님 너머로 한껏 웅크린 존재감이 느껴졌다. 온몸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가볍게 웃은 김석영이 손님을 부축하며 안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비슷한 반응을 내보이는 손님을 상대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손님이 떠나간 빈자리를 확인한 김석영이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나비의 존재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가 끌어와 놓고선 나 몰라라 내버려 두다니. 은근 성격이 고약한 녀석이다.
저벅, 저벅―
김석영은 기척을 향해 걸어갔다. 결계의 막에 기대어 몸을 웅크린 남자의 모습 위로 그의 그림자가 덮쳤다.
'의외네.'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으로 제 입을 막고 있는 남자는, 김석영의 생각보다 체구가 컸다. 얼핏 봐도 그와 비슷한 정도일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도 겁에 질린 상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시선이 자연스레 남자의 정수리로 향했다. 다갈색의 동그란 정수리로부터 결이 얇고 건조한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눈길은 그대로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여긴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추위에 노출된 귀가 새빨갛다.
"불청객이 있다는 건 결계가 흐트러졌다는 뜻이고."
남자의 몸을 집어삼키던 그림자의 길이가 줄어들었다. 상체를 숙여 무릎을 굽힌 김석영이 흐트러진 머리칼에 가려진 코끝을 바라보았다. 그 언저리에서 입을 막고 있는 손끝 역시 붉었다.
"그 결계를 무너뜨린 범인이, 때마침 내 앞에 있네요."
남자의 몸이 움찔했다. 작은 숨결 하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 눈으로 좇은 김석영이 말했다.
"손 떼고, 고개 들어."
마치 언령(言令)처럼,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음성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입을 가린 두 손을 떼어내고 고개를 든 남자가 김석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
울다 지친 아이처럼 물기 어린 눈이 삭막하고 건조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 속에 비치는 혼란스러운 낯.
크게 뜨여진 다갈색 눈동자에 어린 당황과 혼란스러움을 읽어간 김석영이 헛웃음을 토해냈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네."
읊조리는 건조한 음성에 침입자의 입이 달싹였다.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다갈색의 시선에 김석영 역시 시선으로 화답했다.
윤재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믿어지지 않는 듯, 김석영의 얼굴을 뜯어보던 윤재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 맞아요?"
김석영은 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도리어 확실한 대답이 되었다.
애옹―
어느새 다가온 나비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었다.
* * *
"형. 형은 왜 맨날 혼자 다녀요?"
"친구 없어서."
나도 없는데. 아이가 히죽 웃었다. 그럼, 그러면 있잖아요.
"......내가 친구 해줄까요?"
입술을 달싹이다 용기 내어 내뱉은 말에, 교복을 입은 소년이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왔다. 손끝을 꼼지락대며 답을 기다리던 아이가 소년의 시선을 맞받았다. 웃는 듯, 아닌 듯, 도통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묘한 얼굴을 한 소년이 아이를 향해 답을 주었다.
"아니."
"여기."
남자의 모든 움직임을 눈으로 좇은 윤재하가 찻잔을 건네받았다. ......감사합니다. 나지막이 읊조린 대답에 상대가 피식 웃었다.
맞은편에 앉아 제 몫의 차를 마시며 침입자의 낯을 찬찬히 훑어본 김석영이 잔을 내려놓았다. 딸각, 잔의 굽이 내는 소리에 움찔한 침입자, 윤재하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차 식겠는데."
"......아, 죄송합니다."
"본인이 마실 텐데 나한테 죄송할 것까지야."
단조로운 어조였으나 묘하게 웃음기가 느껴졌다. 입술을 달싹이다 내리깐 눈을 든 윤재하가 남자를 이루는 모든 선을 훑었다. 찻잔에 가려졌다 드러난 도드라진 턱 끝 어귀로부터, 단정한 손끝을 타고 올라 곧은 선을 이루는 중심. 그 언저리에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검은 머리칼과 속눈썹. 그러다 불쑥, 내리깐 눈매에서 만들어진 얕은 쌍꺼풀이 사라지고 검은 동공과 마주했다.
"다 봤어?"
윤재하의 낯에 열이 올랐다. 눈망울이 크고 맑아서일까, 조명 빛을 받은 눈에 물기가 어린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눈가와 귀 끝마저 붉게 달아오르니 마치 우는 것만 같았다. 시선을 떼어내기 힘든 낯짝이었다.
윤재하가 제게 그런 것처럼, 김석영 또한 윤재하를 이루는 모든 선을 훑어내렸다. 덩달아 눈가에 몰린 열의 농도가 진해졌다.
'투명하네.'
속웃음을 삼킨 김석영이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
"해고야."
건조한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윤재하의 낯이 덜컥 굳어졌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 중으로 떠나면 될 것 같은데."
"잠깐, 잠깐만요. 이렇게 갑자기 해고라니......!"
"이상하네. 예상 못한 일도 아니지 않나?"
규칙을 어기고 안채까지 무단침입에, 탑까지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 영업 중에 또다시 무단침입. 각오하고 벌인 일 아니었냐고 되묻는 것에 윤재하의 입이 다물렸다. 제 바지 자락을 꽉 쥐며 마른침을 넘겼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의 대가는 집을 비우는 즉시 처리해줄게."
"......저, 누군지 기억 안 나요?"
아랫입술을 짓씹던 윤재하가 힘없이 물었다. 이번엔 진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물기 어린 눈가를 바라본 김석영이 대꾸했다.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줄곧 여기서 살았어요? 그때도......."
"말 돌려봤자 소용없어."
매정한 대답에 윤재하의 말간 눈매가 경직됐다. 표정을 알 수 없는 그 무감한 낯에, 미세하게 일그러진 윤재하의 얼굴 위로 감정이 더해졌다. 해고를 선고받은 것보다 저와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남자의 태도가 씁쓸했다. 그 역시 자신을 기억하는 게 분명한데. 그 기억을 소중히 여겼던 건 저뿐이었나.
"......."
하긴, 자그마치 십 년이었다. 기억은 퇴색되기 마련이고 기억의 가치와 무게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제겐 몇 안 되는 소중한 추억이지만, 남자에겐 별거 아닌 나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인정하고 나니 감정의 동요를 느끼던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게 뭐라고. 과거의 접점을 떠올리며 저를 알아달라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울까.
바지 자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덩달아 윤재하의 낯이 점차 굳어지던 순간이었다.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김석영이 말했다.
"그게 뭐든지, 일단 멈춰볼래."
내 경험에 의하면 그런 얼굴은 대체로 저 혼자 우물을 파고 있더라고. 나지막이 덧붙이며 윤재하를 바라보던 김석영이 느슨히 턱을 괴었다.
"아는 얼굴이라는 건 둘째치고, 일의 규율을 어긴 대가는 치러야지. 그게 내 우선순위였을 뿐이야."
윤재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김석영을 바라보던 그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아는 얼굴."
"모른다고 한 적 없잖아."
그 대답에, 경직된 낯이 서서히 풀렸다. 한두 번 달싹이다가 이내 꾹 닫혀버린 입술을 바라보던 김석영이 웃음을 삼켰다. 그때, 마루 밑에서 두 사람을 훔쳐보던 나비가 넌지시 모습을 드러냈다. 뻔뻔하긴. 김석영의 눈매는 가늘어졌고, 윤재하의 눈은 커졌다. 어물어물 닫혀 있던 윤재하의 입술이 열렸다.
"나비,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여기서 살았으니까."
"......언제부터요?"
"글쎄."
언제부터였더라. 잠시 시간을 거슬러본 김석영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십 년 전쯤. 윤재하가 불쑥 사라졌을 무렵이다. 나비를 바라보는 다갈색의 시선이 애달프게 물들었다.
"......버리고 간 거 아니에요."
사고가 난 후, 윤재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며칠이나 흘러 있었고 모든 절차는 왕래도 없던 고모가 끝내놓은 후였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아이는 친척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고 겨우 그들의 눈을 피해 집에 돌아왔을 때 나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아이는 낫지도 않은 몸을 힘겹게 이끌고 동네 구석구석을 살폈다. 아이를 찾으러 온 친척이 발견하기 전까지, 윤재하는 그렇게 온 동네를 찾아 헤맸다. 사라진 나비와 가족을. 그리고 떠오르는 한 사람을.
짓씹느라 부어오른 입술 너머에서 흘러나온 말은,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찾아 헤맸어요'라는 애처로운 변명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던 순간에 많은 기억의 과정이 삼켜지는 게 느껴졌다.
김석영은 말없이 빈 잔을 채워주었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찻잔의 온기를 매만지던 윤재하가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거두어줘서 고마워요."
"우연이었어."
"그래도요."
식도를 타고 흐르는 차의 온기가 가슴에 퍼져나갔다. 훤히 개폐된 대청에 앉아 눈 쌓인 마당을 바라보던 김석영을 따라 시선을 옮긴 윤재하가 고택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아지랑이처럼 고택의 형상이 어른거렸다. 빛을 내던 존재들 역시 희미하게나마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직도 저게 보이나 봐."
어느새 윤재하의 시선을 따라간 김석영이 말했다.
"네. 전보다 희미하긴 하지만."
"......그래, 저게 아직도 보인단 말이지."
김석영의 시선이 가늘게 윤재하를 훑었다. 공간을 닫아놨기 때문에 더는 안 보이는 게 정상일 텐데, 상성이 잘 맞았나. 눈앞의 남자가 타고난 기운을 가졌다는 건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지만, 터와의 상성은 꽤 의외였다. 단순히 견디는 정도가 아니라 터의 영향을 건드리기까지 했으니.
어지간히 트인 자들도 쉽사리 발견할 수 없는 돌탑을 건든 것도 모자라, 그가 닫아놓은 공간을 어렴풋이 뚫고 있다. 지금의 반만 하던 시절에도 어린아이답지 않더니, 자라면서 그릇이 더욱 견고해진 모양이다. 영가들이 미칠 듯이 탐낼 몸이다. 타고난 강함이 없더라면 진즉에 몸을 빼앗기고 말았을 테지.
'귀찮은 게 얽혀버렸네.'
짧게 혀를 찬 김석영이 뚫어질 듯 저를 바라보는 상대에게 손짓했다. 말간 눈을 한번 끔뻑거린 윤재하가 순순히 상체를 기울였다. 거리가 부쩍 가까워지면서, 보슬거리는 다갈색의 얇은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김석영이 머리칼에 가려진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탁―
"뭐 하는 거예요."
손목을 가로챈 윤재하가 원망스레 눈을 찌푸렸다. 그의 손끝이 이마에 닿던 순간, 윤재하는 그게 단순한 손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무언가를 빼앗는 손길이었다.
"......."
무방비하다가도 감이 좋아선. 얼얼하게 조여오는 손아귀에 시선을 던진 김석영이 대답했다.
"네 기억을 가져갈 생각이야."
"하─."
윤재하가 잡은 손을 거칠게 내쳤다. 붉은 손자국이 남은 손목을 가볍게 돌린 김석영이 시선을 맞댔다.
"누구 마음대로요."
"네 마음 따위 중요하지 않아."
고저 없는 음성에 윤재하의 낯이 굳어졌다.
"활개 치고 다녔던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해. 이곳에서의 기억을 지울 뿐이야. 그게 너한테도 좋을 텐데."
"......그걸 왜 그쪽이 판단하는데요. 내 기억은 내 건데, 내 마음도 내 건데."
꼴사납게도, 목소리의 끝이 갈라졌다. 붉어진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는 시선을 받아낸 김석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짧은 한숨에 움찔한 윤재하가 제 입술을 짓씹기 시작했다.
건조하고 메마른 김석영과는 달리 매끄러운 입술의 표면이 붉어졌다. 자학성을 띈 행위에 김석영이 손을 뻗었다. 흠칫 놀란 윤재하가 몸을 물렸으나 옷을 낚아채는 손짓이 더 빨랐다. 강하게 당겨오는 힘에 무너진 윤재하의 입술 위로 서늘한 손끝이 닿았다.
"씹지 마."
선명하게 새겨진 잇자국을 쓸어 넘긴 김석영이 잡아챈 옷에 힘을 풀었다. 상체를 물리고 테이블의 위로 느른하게 턱을 괸 그가 얼빠진 낯을 보며 말한다.
"그렇게 싫다 하니 기억은 손대지 않겠지만. 나가서도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얼빠진 낯 위로 붉은 색채가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손길이 닿은 제 입술을 옷소매 끝으로 벅벅 문지른 윤재하가 날 선 눈빛을 보냈다.
"나가는 거에 동의한 적 없어요."
"네 동의 필요 없대도."
근로법을 운운하고 싶었으나 고작해야 열흘을 넘긴 게 다라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또다시 입술을 짓씹으려던 그는 김석영의 손길이 닿았던 감촉을 떠올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피식, 웃는 소리에 울컥하여 내뱉었다.
"나 같은 사람 구하기 힘들 텐데요."
그건 그렇지. 속으로만 순순히 인정한 김석영이 대꾸했다.
"애초에 도우미를 구할 생각 없었어. 이상현이 괜한 짓 한 거야."
"정말 필요가 없었다면, 왜 열흘도 넘게 아무런 말도 없었는데요."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내버려 뒀던 거야.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 버텨서 안 그래도 신기해하던 참이야."
"그럼 그냥, 계속 내버려 두면......."
"그건 곤란하지."
"왜요?"
하아, 긴 한숨을 늘어뜨린 김석영이 건조한 눈으로 직시했다.
'아, 선 넘었구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 옷자락을 부여잡고 시선을 피한 윤재하가 숨을 삼켰다. 피부에 닿는 시선이 매섭고 날카롭다. 떼를 쓴 어린아이를 혼내는 눈빛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애초에 그가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 없는데. 알면서도 왜 이런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지. 저는 이제 그때의 어린아이가 아닌데.......
"죄송합니다."
눈을 질끈 감은 윤재하가 사과를 입에 올렸다. 동시에 의외롭다는 시선이 꽂혔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말을 이었다.
"억지 부리고 있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지금 당장은 갈 곳이 없어요. 다른 일을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에 있게 해주세요."
"왜 갈 곳이 없는데."
비꼬는 태도는 아니었다. 정말 순수한 의문이었다. 예민한 부분을 거침없게 파고드는데도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인지 대답 역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저 혼자예요."
그 말 한마디에 담긴 서사를 이해한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아닌 일반인, 뭐 그를 일반인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윤재하가 가업의 상황에 휘말린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기억을 지우면 그만이긴 하나 이토록 예민한 감을 지닌 자들은 손을 대기도 쉽지 않았다. 살짝 손끝만 가져다 댔을 뿐인데 행위의 의도를 은연중에 간파하여 경계한 것도 그렇고.
규율을 어긴 만큼 대가를 가져가는 건 당연한 일인데. 저렇게 예민한 이들은 억지로 뺏었다간 도리어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당장은 힘들어도 그의 경계심이 풀리는 시점에 기억을 회수해가면 되겠지. 생각을 마친 김석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해. 대신, 시간은 질질 끌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정말요? 정말 있어도 돼요?"
"일을 구할 때까지만. 그 이상은 없어."
단호한 대답이었으나 윤재하의 낯이 개었다. 네. 명심할게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경직된 눈매가 풀어졌다.
"그래. 이제 가봐."
팔랑팔랑 손짓하며 테이블에 상체를 늘어뜨린 김석영이 말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걸음을 옮기던 윤재하가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늘어진 채였다.
"......."
윤재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김석영을 이루는 형태를 눈에 담았다. 소식하길래 엄청나게 마른 사람일 줄 알았는데, 키는 물론이고 골격도 탄탄하다. 연비가 좋은 건가 싶다가도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저런 맥없는 모양새로 늘어져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묘하게 피곤해 보이는 게 영 신경 쓰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저녁도 못 먹었을 텐데.'
입술을 달싹이던 윤재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저녁은 어떻게......."
"알아서 먹을게."
"......차가워졌을 텐데. 다시 해올까요?"
이상현이 한 명 더 늘었나. 늘어뜨린 몸을 일으켜 턱을 괸 김석영의 시선이 엉성하게 서 있는 윤재하에게 닿았다. 달싹이던 입을 합 다무는 게, 눈치는 참 빠르다.
"......가볼게요."
나직하게 읊조리며 돌아서는 뒷모습이 낯설다. 많이 컸네. 묘한 감상이 충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너."
말간 눈망울이 시선을 마주했다.
"이름이 뭐더라?"
미묘한 표정에서 약간의 서운한 빛이 맴돌았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거두어졌다.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대답해 왔다.
"재하. 윤재하예요."
* * *
"야. 너네 엄마도 무당이라며? 그럼 너네 가족은 다 귀신 보는 거야?"
"얘 아빠는 없댔어. 그럼 너랑 너네 엄마는 아빠 귀신을 보는 거네?"
"......뭐야, 소름 끼쳐!"
"야야, 뭐해! 걔랑 같이 있으면 귀신 옮아!"
꺄르륵 웃는 소리가 해맑다. 제 몸을 밀치고 달아난 아이들을 응시하는 눈빛에 김석영의 시선이 머물렀다.
'어린 게 눈빛하고는.'
괴롭힘을 묵묵하게 견뎌내고 있으나 그 눈빛에는 독기가 가득하다. 그게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강인한 생기가 어린 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게다가 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과 생명력은 경이로울 수준이었다. 타고난 그릇으로 태어났으나 쉽사리 제 그릇을 빼앗기진 않을 것이다.
탁탁― 몸을 일으켜 흙먼지를 털어낸 아이가 잠시 앓는 소리를 냈다. 엉덩방아를 찧다가 지탱한 손바닥에 상처가 생겨버렸다. 호오― 미약한 바람으로 상처 위의 먼지를 털어내고 자리를 벗어났다.
왜일까. 김석영은 아이의 뒷모습에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뒤로도 김석영은 종종 아이를 마주했다. 아니, 그 혼자 아이를 발견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어찌 됐든 그가 발견할 때면 아이는 어김없이 또래로부터 일방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예의 그 눈빛도 여전했다. 몸은 가만히 견디고 있으나, 눈빛으로 싸움을 대신하는 것만 같은. 어린 게, 대처 방식이 퍽 신기했다. 저 나이 때의 김석영은 저를 향한 시비를 잠자코 받아주던 타입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저와 다른 아이의 태도에 눈길이 갔던 모양이다.
평소 인적이 드물었던 소규모의 낡은 놀이터엔 그네가 전부였다. 그 낡은 그네에 앉아 까진 무릎을 바라보던 아이가 또다시 김석영의 시야에 포착됐다. 어찌 된 게, 저 조그마한 몸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일이 아닌 타인의 개인적인 영역에 개입하는 건 질색인데도 그날은 왜인지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그러나 약국에 들러 밴드와 연고를 산 그가 돌아왔을 땐 이미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네.'
혀를 차며 약국의 상호가 새겨진 하얀 비닐봉지를 바라보던 김석영은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그날부로, 텅 비어 있던 교복의 바지 주머니 속엔 늘 밴드와 연고가 함께였다.
"......별일이네."
잠에서 깬 김석영이 헛웃음을 삼켰다. 어제의 영향 때문인지, 꿈을 잘 꾸는 편이 아닌데도 과거의 한 조각이 꿈을 빌려 나타났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꿈을 통해 유년이 떠오른 탓에, 성인이 된 윤재하의 모습에서 세월 또한 실감했다.
'그 조그맣던 아이가 완연한 성인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세월 동안, 나는 무얼 했더라.'
제 지난 인생을 돌이켜본 그가 건조하게 웃어 보였다. 일밖에 떠오르지 않은 탓이었다. 아무렴 어때. 개의치 않고 늘어지게 하품하던 김석영의 입술이 투둑, 뜯어졌다. 유독 건조한 입술은 겨울이 되면 성할 날이 없었다. 이젠 이 알싸한 고통도 삶의 일부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피를 핥으며 몸을 일으켰다.
곧장 샤워하고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막 아홉 시가 지나고 있었다. 어느 오지랖쟁이가 정해놓은 아침 시간이다.
"아....... 저녁."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는 걸 깜박했다. 실망하려나. 나직하게 혀를 찬 김석영이 옷을 갈아입고 사랑채에 향했다.
간밤에 눈이 많이 녹았다. 완완한 걸음으로 안채를 벗어나 사랑채의 뒤편에 도착한 그는 설핏 느껴지는 기척에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문의 담 너머에 인영이 숨어 있다. 보온 박스가 올려져 있는 툇마루에 다가간 김석영이 기척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얘기해."
몸을 움찔한 기척이 대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머쓱한 낯의 윤재하가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
툇마루에 걸터앉은 김석영이 박스를 열어보았다. 그의 취향대로 국물이 자작한 누룽지다. 아침 식사로 속 편하게 먹기 좋지. 만족스레 눈을 늘어뜨린 김석영이 멀뚱하게 서 있는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어제저녁 분의 보온 박스를 안고 있었다. 설마 저게 신경이 쓰여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마치 변명이라도 해줘야 떠날 기색이다.
"잠이 먼저였어. 미안하게 됐네."
"아......."
고개를 끄덕인 윤재하의 낯이 느슨하게 풀렸다. 정말 저녁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가볼게요. 나지막이 인사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석영이 사랑채로 향했다. 새로 오신 도우미 덕분에 부쩍 위가 늘어나 허기가 졌다.
* * *
'진짜 그 사람 맞아. 꿈이 아니었어.'
보온 박스를 안은 윤재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간밤에 일어난 일은 현실성이라곤 없어서, 새벽빛에 눈을 뜬 윤재하는 혼란스러움에 휩싸였다. 더군다나 이런 곳에서 과거의 인연을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기운이 가장 강하게 몰려 있는 숲의 한가운데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 늘 궁금증을 일으켰던 집주인의 정체가 김석영이었다니. 그리고 그 고택, 아니. 그 장소는 대체 뭐였을까. 불쑥 나타난 인영은 또 무엇이고. 분명, 왜소한 체구의 남자는 낯선 상황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김석영을 마주하기 무섭게 비명을 질렀던 걸 보면 서로 아는 사이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그는 제법 정중한 태도로 남자를 대했었지. 손님일까. 그렇다면 어떤 손님인 거지? 일반인의 눈길을 피하고자 결계까지 만들어서 맞이할 손님이라면.......
"......도대체 뭐 하는 곳이야."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엔 단순히 무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지내는 곳일 거라 여겼다. 세상엔 윤재하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일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굳이 관심을 두진 않았지만, 김석영과의 만남이 기폭제가 되어버렸다. 궁금증을 억눌러야 하는데 퍽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서 흐르는 기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건 감히 범접할 수 없이 기묘한 기운이었다. 도대체 김석영은 뭐 하는 사람인 걸까.
그를 향한 생각이 깊어지자 문득 과거의 한순간이 떠올랐다. 설핏 웃음이 터지고 마는, 그런 기억의 한순간이.
"으아악!"
"......."
달아나는 중학생 무리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던 김석영과 처음 시선이 마주했을 때. 아이였던 윤재하는 온몸을 짓누르는 거대한 공포를 느꼈었다.
"무슨 표정이야?"
고마워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덧붙이는 말의 억양은 그에게서 흐르는 거센 기운과는 다르게 부드러웠다.
"......사람 맞아요?"
윤재하가 그렇게 물어본 순간, 김석영이 맥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몸을 짓누르던 기운 역시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러곤 불쑥 몸을 굽히고 앉아 시선을 맞대며 말했다.
"아니었으면 쟤네가 날 봤을까?"
"몸만 사람이라면......."
머뭇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것에 또다시 김석영의 헛웃음이 터졌다.
"어린애가 별걸 다 아네."
칭찬이 아니란 건 알지만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그러다가 '아' 하는 소리를 낸 김석영이 윤재하의 이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몸부림을 치다가 벽에 부딪혀 생겨난 상처였다.
"......반창고."
별안간 제 바지 주머니를 뒤지던 김석영이 혀를 찼다. '......하복에 있겠네'라고 읊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곧 제 엄지에 침을 바르곤 이마의 상처를 닦아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윤재하의 몸이 덜컥 굳어버렸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김석영은 태연히도 말했었다.
"아, 더 덧나려나?"
"어제도 그러더니."
물론 어제는 침은 안 묻혔지만....... 윤재하는 저도 모르게 김석영의 서늘한 피부가 스친 입술을 매만졌다. 괜스레 저택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다녀왔어요."
「어서....... 음?」
현관에서 윤재하를 맞이한 형체의 시선이 따가웠다. 의아하게 되받아치자 그가 묘한 얼굴을 한 채 얼굴 곳곳을 바라보았다.
「밖이 많이 춥니?」
"아니. 별로 안 추웠는데. 왜요?"
「얼굴이 빨개서. 밖이 꽤 추운가 보다, 했지.」
"......."
잠시 내려둔 보온 박스를 들다가 황급히 제 귀를 만져본 윤재하가 숨을 삼켰다. 찬 공기가 닿아 서늘해진 손끝으로 귓가의 열이 번지는 것이다. 아, 꼴사납게....... 속으로 욕을 짓씹었으나, 부러 대수롭잖은 투로 변명했다.
"아니요, 오히려 좀 더웠나 봐....... 움직였더니 열이 오르네."
「그랬어? 그래. 추운 것보단 낫지.」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한 윤재하가 곧장 부엌으로 향해 보온 박스를 정리했다. 해고를 예감하고 준비한 마지막 식사였기에 평소보다 정성스레 준비했던 음식들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날씨도 추웠던 데다가, 보온 박스에 고스란히 담겨 있던 것이기에 제 몫의 식사로 해결하면 될 것 같다. 아침 식사로 준비한 누룽지와 함께 음식들을 해치워낸 윤재하가 뒷정리를 이어갔다.
「참 바쁘다. 우리 재하.」
"그런가?"
생각해보면 오전은 늘 바쁘긴 하다. 분주히 준비한 아침 식사를 사랑채에 두고 오면 그제야 남은 찬으로 식사를 때웠고, 뒷정리를 끝낸 후엔 바로 점심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차 싶어 빠르게 시간을 확인한 윤재하가 장바구니를 챙겨 일어났다.
「장 보고 오려고?」
"응. 양파랑 계란이 없어서."
「그래? 그럼 나간 김에 일자리도 찾아보면 되겠다.」
"아......."
「어제 잘렸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엔 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니까. 장 보고 와서 찾아보지 뭐."
「아, 맞다. 그랬지. ......참 좋은 세상이야.」
"그런가."
좋은 세상인지는 잘 모르겠다. 뒷말을 삼킨 그가 형체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 고작 열흘이 지났을 뿐이지만 하루에 몇 번이나 오가서인지 길목을 향하는 발걸음이 익숙했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마트의 카운터에 살짝 인사를 한 윤재하가 장을 보기 시작했다. 덩달아 구경을 시작한 형체가 유제품 판매대에 멈춰 서선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요? 뭐 먹고 싶어?"
다가가서 묻자 설핏 웃은 그가 떠먹는 요거트를 가리켰다.
「언제 이렇게 맛이 다양해졌지?」
"그러게. 종류가 되게 많네."
「너도 이거 되게 좋아했었는데.」
"음, 그랬나?"
고개를 갸웃한 윤재하가 형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 살까?
「응. 너 먹는 거 보고 싶네.」
"그래요, 그럼."
가장 무난해 보이는 맛을 담고 발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언제부턴가 근처에 서 있던 아이와 시선이 부딪혔다. 윤재하를 바라보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그의 곁에 선 형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끝이 정확했다.
'......보이는구나.'
한숨을 삼킨 그가 몸을 숙였다. 마주 닿는 말간 눈망울과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저었다.
"보여도 안 보이는 척해야 해."
"왜요?"
아이가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
"그냥....... 그래야 편해."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쓰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위로 형체가 손을 얹어 함께 쓰다듬는다. 기분 좋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아이가 저를 찾는 부모를 찾아갔다. 덤덤히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는 윤재하의 머리칼에 형체의 손길이 닿았다. 쓰담쓰담, 부드러운 손길에 윤재하도 멋쩍게 웃었다.
"내가 앤가."
「애지, 뭐.」
"이렇게 큰 애가 어딨다고."
아직 저보다 큰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덧붙이려다 입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김석영, 그 사람도 저와 엇비슷했던 것 같은데.......
한때는 고개를 완전히 꺾어야만 눈을 마주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저는 또래에 비해 작았고, 그는 그 또래보다도 월등하게 컸으니까. 그가 몸을 둥글게 말아 숙여줘야만 마주할 수 있던 눈 맞춤. 하지만 이젠 동등한 위치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세월을 실감하고 설핏 웃은 윤재하가 제 곁에 선 형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키는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닮은 것이기도 했다. 평소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시선의 높낮이에 쓰게 웃은 그가 넌지시 말했다.
"내가 크긴 했나 봐."
「그렇긴 하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그냥. 엄마가 참 작게 느껴져서."
이렇게 작았었나, 하고. 새삼스러워서.
"아, 이제 가야겠다."
너무 지체한 모양이다.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빠듯했다. 서둘러 필요한 것을 담아 계산한 윤재하가 출구로 향했다.
툭― 때마침 내부로 들어선 인영이 그의 어깨와 부딪혔다. 아 씨발....... 짜증 섞인 음성에 사과를 건넨 윤재하가 빠르게 밖을 벗어났다. 스쳐 가던 옆모습과 멀어지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윤재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