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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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숲속의 한가운데서 눈을 뜬 그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제 볼을 꼬집었다.
"......아픈 건지, 안 아픈 건지."
아픈 것 같다가도 아프지 않은 듯한, 모순적이면서도 이상한 감각이었다.
'거참 별 희한한 꿈을 다 꾸네.'
가볍게 생각하며 안개가 자욱한 숲속을 살펴보던 그는 어느 순간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고택을 발견하곤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소담한 고택은 예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 내부에선 빛 한 조각 흘러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위가 은은히 밝은 것에 의아함을 느낀 그는 문득 제 주변을 확인하고서야 감탄을 터뜨렸다. 빛의 꼬리를 매단 겹꽃잎 같은 형체들이 허공을 유영하고 있던 것이다. 물가에 띄워진 꽃처럼 둥실둥실 움직이는 모양새에 저도 모르게 손이 갔다. 톡― 손끝을 가까이 대보자 미세한 빛 가루를 흩뿌리며 도망친다. 어쩐지 미안해진 그는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신묘한 곳이네.'
멍하니 생각하며 고택의 현관 앞까지 다가가자 무언가 그의 눈에 띄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얇은 종이가 현관문에 붙어 있었다.
"......포스트잇?"
[喪中]
"이건......."
침침한 눈을 비비며 포스트잇에 휘갈긴 한자를 재차 살펴보려던 순간이었다. 눈앞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불쑥 문이 열렸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황급히 뒷걸음질하자 열린 문 너머로 웬 남자가 멀뚱히 서 있는 게 보였다.
"아......."
시선을 한참이나 높여야 할 만큼 키가 큰 그 남자는 검은 양복과 검은 고수머리에 건조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저승사자 같다'고 무심결에 생각함과 동시에, 포스트잇에 적혀 있던 한자가 눈앞을 스친 건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상중(喪中)"
기묘한 분위기의 숲속 한가운데에 있는 알 수 없는 고택. 죽음을 의미하는 한자어. 그리고 고택의 문 너머에서 나타난 검은 양복을 입은 창백한 남자.
"......저승사자?"
삽시간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지탱하던 두 다리 역시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세상에, 나 죽었구나. 죽은 거구나. 이렇게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납빛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허망하게 읊조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툭 내뱉었다.
"안 죽었어요."
"......예? 안 죽, 아, 안 죽었다고요?"
"네. 살아 계세요."
죽음을 앞두다 가까스로 구조받은 기분이 이러할까. 남자의 말에 막혀 있던 숨이 트이고 괴이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허으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말에 남자가 제 턱 끝을 긁적였다. 그걸 왜 저한테 감사해하냐고 대꾸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사이, 떨리는 두 손을 맞잡으며 황급히 정신을 추스른 상대가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그, 그럼 이건 다 무슨 상황이에요? 꿈인가......?"
"네. 비슷해요."
"아니, 꿈이면 꿈인 거지, 비슷하다는 건 무슨......."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진 마세요. 일단 들어오실까요."
주저앉은 몸을 일으켜주며 맞닿은 남자의 피부에선 의외의 온기가 느껴졌다. 정말 저승사자는 아니었나 보다. 그 미약한 온기에 안심하며 남자의 부축을 받아 내부로 향하니, 열린 문이 저 혼자 스르륵 닫혔다. 죽다 살아난 기분이라 그런지 놀라기도 지쳐서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여기 앉으세요."
"......아, 예. 고맙습니다."
안내에 따라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건조한 얼굴을 하고선 묘하게 친절한 태도다. 쉽사리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묘한 인상의 남자를 바라보던 손님, 김경희는 찬찬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오래됐나 보다.'
세월감이 느껴지는 격자무늬의 목조 천장이 정겨운 마음을 끌어냈다. 그가 어릴 적 살았던 구옥 주택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붉은 기가 맴도는 어두운 색의 목재는 자칫 답답해 보일 수도 있는 것이었으나, 높게 솟은 천장 덕에 도리어 예스러운 멋을 풍겼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조명 또한 그러했다.
공간을 빼곡하게 채운 고가구들은 한눈에 보아도 값을 매길 수 없는 진귀한 것임이 분명했고 비어 있는 곳곳에 자리한 그림과 서적에서는 신묘함이 느껴졌다. 겉보기에는 갤러리, 아니 골동품점처럼 보였으나 독특한 향내와 함께 감실감실 피어오르는 연기가 이곳이 일반적인 장소가 아니란 걸 나타내는 듯했다.
"시선을 너무 뺏기진 마세요. 홀릴 수도 있거든요."
여기 있는 게 썩 평범한 것들은 아니라서. 김경희의 앞을 가로막은 카운터에 앉은 남자가 느슨히 턱을 괴고선 말했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몽롱하던 김경희의 눈빛에 정기가 돌아왔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 김석영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 왔다는 건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는 걸 의미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김경희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해결소 같은 곳은 아니고. 저는 그냥 중간다리 역할이라고 할까요. 매개체를 전달해줄 수 있어요. 집배원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예요."
아시죠? 우체국 집배원. 태연하게 덧붙이는 말에 김경희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집배원이라니, 그게 무슨......."
"완전한 소멸을 맞은 자만 아니라면 저승에 있는 모든 이에게 대신 전달해줄 수 있습니다. 대체로 편지를 많이 쓰긴 하는데, 간혹 물건을 보내는 분들도 계―"
"아니, 잠깐, 잠깐만요."
남자의 말을 끊었다. 당황스러운 듯 제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김경희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방금 저승이라고 말한 거 맞죠? 그러니까 지금, 저승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거예요?"
"네. 맞아요."
"정말 저승이라는 거죠? 사후세계라 일컬어지는."
"네. 맞아요."
단조로운 김석영의 대답에 헛웃음을 터뜨린 김경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이런 개꿈이 다 있어.'
그때,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김석영이 말했다.
"이 꿈을 간절히 바란 건 손님이세요.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여긴 아주 간절히 바라는 자들만 올 수 있는 곳이거든요."
"......간절히 바라는 것이요?"
"네. 간절히 바라는 것이요. 있을 텐데요, 분명히."
그 순간, 김경희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답을 찾은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그래, 남자의 말이 맞다. 사실 그는 아주 간절히 바라는 게 있었다.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리던 김석영을 향해 김경희가 입을 열었다.
"......그쪽 말대로, 바라는 게 있긴 해요. 그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전하고픈 마음이요."
"네. 알아요."
그런 자들만 이곳에 오죠.
"편지나 물건을 보낼 수 있다고 했던가요?"
"네. 맞아요."
간결한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긴 김경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직접 갈...... 수는 없겠지요."
"네. 안 돼요."
마치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단칼에 대답한 김석영이 말을 이었다.
"흔히들 아시다시피 산 자는 저승에 갈 수 없어요. 뭐, 간혹 저승 체험을 하고 오신 분들이 있긴 한데, 그건 아주 특별한 극소수의 경우니까요. 본인에게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진 마세요. 좋은 꼴 못 봐요."
"......아, 예에. 아무래도 그렇겠죠."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저승에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게 있는데요."
"뭔데요?"
"수신인의 물건이요."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한 김석영이 재차 말을 잇는다.
"수신인을 찾기 위해선 살아생전 수신인이 가장 아끼던 것. 혹은 손때가 묻은 물건이 필요하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왜 필요한 건데요?"
"음. 살면서 이런 말 종종 들어보셨을 텐데요. 물건에 혼이 깃든다고. 자기 몸처럼 아끼고 손이 가던 물건엔 그 주인의 정신과 혼의 일부가 깃들어요. 그렇다고 물건이 하나의 생명체로서 살아 숨 쉬게 된다는 건 아니고, 주인의 에너지가 스며든다고만 이해하시죠. 저는 그걸 통해 망자를 찾아갈 수 있어요. 주소를 대신해서."
"......망자."
"아, 미안합니다. 수신인이요."
씁쓸하게 웃은 김경희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해했어요. 그럼....... 수신인의 물건이 없다면 우편을 보낼 수 없다는 거네요?"
"네. 맞아요."
"그런데 저는 지금 아무것도 없고. 게다가, 값은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세상만사, 대가 없이 이뤄지는 게 있던가. 사소한 것이든 중한 것이든, 옳은 일이든 그른 일이든.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되는 게 세상살이 아니던가. 저승이라고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중하지 않을까. 만약 우편을 보내는 대신 목숨이라도 요구한다면.......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을 드리거든요. 우편물과 수신인의 물건을 찾게 되었을 땐 지금 이곳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우편값은 다시 방문하실 때 이야기 나누고요. 참고로 전 목숨을 요구하진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 예에......."
마치 생각을 읽은 듯한 답변이었다. 기묘한 곳이니만큼 혹 사람의 속마음도 들리는 게 아닐까. 지레 움찔한 김경희는 괜스레 헛기침하며 제 무안함을 달랬다. 기실 시시각각 드러나던 표정에서 생각을 유추한 것뿐이었으나, 제 낯을 보지 못한 김경희로선 알 리가 없었다. 속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지던 그때. 문득 의아함을 느낀 김경희가 물었다.
"아, 저기 그런데, 상상이라니요?"
"손님이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곳은 손님과의 연결고리가 생겼거든요. 여기에 오는 상상 정도면 충분해요. 그럼 다시 방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편이 무사히 전달되고 제가 수신인의 물건을 되돌려드리는 순간 연결고리는 끊기게 되니 찝찝해하진 마시고요."
"아......."
일방적인 상식으론 설명할 수 없는 신묘한 곳이니, 더 이상의 이해와 의문을 접기로 한 김경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럼."
곧 뵙죠. 여상히 인사하는 김석영의 얼굴이 흐려지고 김경희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손님이 떠나간 빈 의자를 확인한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까딱, 가볍게 손짓하자 현관문이 잠겼다. 소리만으로 확인을 마친 그는 빼곡하게 자리한 가구들을 지나쳐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섰다.
그가 내딛는 한걸음에 붉은 벽돌 건물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두 걸음엔 사위를 둘러싼 안개가 걷혔다. 세 걸음엔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고, 네 걸음엔 이제껏 보이지 않던 가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같지만 다른 공간을 오간 김석영은 물밀듯이 몰려오는 피로에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피곤해.'
쓰러지듯 툇마루에 몸을 늘어뜨린 그는 멍하니 처마 끝의 선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긴 하품을 하기 무섭게 투둑― 입술이 뜯어졌다. 근래에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몸이 건조하더라니, 올겨울도 어김없이 피를 보고 만다.
'그러게, 립밤 좀 챙겨 다니라니까.'
더럽게 말 안 듣는다며 매년 잔소리를 퍼붓는 사촌의 얼굴이 절로 그려졌다. 그 시끄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짜증스레 귀를 후빈 김석영의 곁으로 저벅저벅 느린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날도 추운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니."
나이 지긋한 노인이 쯧쯧 혀를 차며 그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거친 피부 위를 맴도는 물기에 미간을 찌푸린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곧장 노인의 손에 묻은 물기를 제 소매 끝으로 꼼꼼히 닦아내며 말했다.
"일하지 마시래도."
"끼니는 챙겨야 할 거 아니야."
"알아서 해요. 내가 애도 아니고."
피가 맺힌 입술을 바라보던 노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제 주름진 손을 마사지해주는 커다란 손에선 서늘한 냉기가 맴돌았다. 늙은 저보다도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였다. 그 시린 체온에 절로 한숨이 흘렀다.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도 낮은 체온이다. 제 삼촌이나 조부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김석영은 유독 그 정도가 심했다. 여름이면 모를까 이렇듯 찬 기운이 기승을 부리는 겨울이 되면 노인은 김석영의 낮은 체온에 마음이 시리곤 했다. 그에게 주어진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못내 신경이 쓰였다. 제 피가 섞인 아이도 아니었건만 갓난쟁이 시절부터 돌봐와서인지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따로 가족도 만들지 않고 이 집안에서 평생을 몸 바쳐 일한 노인은 어느새 이들의 핏줄을 제 가족이라 여겼다.
조부가 먼 길을 떠나 이젠 정말 혼자 남아버린 김석영이 걱정이었다. 노쇠해진 몸만 아니었다면 힘이 닿는 대로 곁에 있어 줄 것이나, 노인은 당신 또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피가 고인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김석영을 가볍게 타박한 노인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새로운 사람을 구해야 하지 않겠니."
"구하면 되죠."
"쉽지 않을 텐데."
긴 한숨이 섞인 염려의 말에 김석영은 대수롭잖게도 대꾸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돼요."
그러니 내 걱정일랑 마시고 늘 그리워했던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편하게 보내시라고. 기운 사나운 곳에서 한평생을 버티며 살아오셨으니 이제는 몸과 마음 편하게 지내시라고.
"......."
한번 정한 제 고집은 절대 굽히는 법 없는 김석영을 알기에. 입을 달싹이던 노인은 결국 한숨을 내쉬곤 미약한 온기를 지닌 손에 제 온기를 더해주었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지만, 김석영의 말마따나 그는 이제 마냥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므로.
벌써 삼순을 앞둔 김석영을 새삼스럽게 살펴본 노인은 차오르는 말들을 꾹 눌러 담고 한마디만을 당부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밥은 잘 챙겨 먹어."
"네. 그럴게요."
김석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야, 형. 밥 먹었어?"
대청마루에 녹아 있는 인영을 향해 이상현이 물었다.
"어."
"뭐 먹었어?"
"뭐 먹었어."
"......."
성의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답이었다. 참자, 참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을 간신히 억누른 이상현은 김석영이 뒤집어쓴 이불을 단숨에 걷어냈다. 눈을 찌르는 햇살과 살을 에는 찬바람에 인상을 구긴 김석영이 살벌하게 읊조렸다.
"......야. 원위치."
"뭘 먹었냐고.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희번덕한 눈알을 질린 듯이 흘긴 김석영이 어느 한 편을 가리켰다. 길쭉한 손가락의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먹다 남은 레토르트 컵밥이 떡하니 있었다. 한껏 메마른 밥알과 건더기가 수북한 거로 보아 고작 한두 입 먹은 게 분명했다.
"아니, 이거 양이 얼마나 된다고....... 어떻게 이걸 남겨?"
"맛없으니까 남기겠지."
"아니, 맛이 없으면 내려가서 사 먹던가. 아니면 시켜 먹기라도 하던가!"
"귀찮아요. 아버지."
"......."
아, 혈압....... 다급하게 제 목덜미를 움켜잡은 이상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열 내봤자 저만 손해였다. 저 인간이 이러는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스스로를 다독이며 열분을 가라앉힌 이상현이 두 손 가득 챙겨 온 보따리를 풀어 재꼈다.
"이거나 씹고 있어."
걷어낸 이불속으로 몸을 숨긴 김석영에게 갓 쪄온 떡을 던져주며 혀를 찼다. 추우면 방에 들어갈 것이지, 꼭 대청마루에 나와서 저러고 있다.
'......진짜 왜 저러고 사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 사촌을 흘긴 이상현이 반찬을 정리했다. 텅 빈 냉장고를 차곡차곡 채워 넣고, 어머니가 한솥 가득 끓여서 얼려놓은 곰국 역시 냉동실에 한가득 쑤셔 넣었다.
그래, 이래야 사람 사는 집이지. 식도락을 인생의 최대 기쁨 중 하나로 여기는 이상현이 뿌듯함에 한껏 미소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
다리 부근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이상현의 온몸이 굳어졌다. 나름대로 평범하지 않은 집에 태어나 조금이나마 업을 물려받은 탓에 삿된 기운을 느끼긴 하지만, 그 무엇도 섣불리 제게 다가온 적은 없었는데. 몸을 힘껏 부대끼는 것 같은 이 기묘한 감각은 무엇이란 말인가.
잔뜩 굳어져선 겨우 눈동자를 굴려 아래를 확인한 그는 제 오른 다리 주변을 에워싼 연기에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악! 형! 혀엉!"
그 소리에 질겅질겅 떡을 씹고 있던 김석영이 이불 속에서 머리만 드러냈다. 이상현의 비명에 놀란 존재가 헐레벌떡 제게로 향하고 있었다. 이불을 살짝 들어 올리자 폭 들어온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놀래잖아."
"그, 그거 뭐야? 그게 막, 나를 막 만졌단 말이야!"
"나비."
이상현에게 하악질을 하는 나비를 쓰다듬던 김석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너 이제 미운털 박혔다. 줄곧 지켜보기만 하다가 겨우 마음 연 건데."
"......나비? 설마, 고양이? 그게 형이 키우던 고양이였어? 아씨,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 그래도 갑자기 어른대면 당연히 놀라지....... 난 형처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삿된 것이 해코지를 한 게 아니었구나. 안심한 것과는 별개로, 정체를 알고부턴 미안한 마음이 든 이상현이 한껏 울상을 지었다. '그렇대'라고 김석영이 대신 말을 건네보았으나 나비는 이미 심기가 단단히 뒤틀린 모양이다. 김석영의 손에서도 벗어나 훌쩍 모습을 숨겨버렸다.
"삐졌다."
"......아씨, 난 몰라."
울상을 지으며 한숨을 내쉰 이상현이 비틀비틀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두툼한 이불을 끌어와 시린 발을 감싸며 잠시 고요 속에 잠기던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형."
대꾸 없이 시선만을 내어주는 사촌 형에게 이상현이 말을 이었다.
"형은 언제 알려줄 거야?"
"뭘."
"알잖아. 내가 뭘 묻는 건지."
낮게 잠긴 목소리에서 많은 감정이 묻어나왔다. 화를 내고, 놀라고, 불쑥 침울해하고. 김석영은 감정의 변화가 빠른 제 사촌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답을 내주었다.
"알려줄 생각 없는데."
"넌 진짜 왜 그러냐. 알아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거 아냐."
김석영이 비웃었다.
"안다고 준비가 되는 거였나."
"당연한 거 아니야?"
"준비됐다는 애가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눈알 빠지게 처울었구나."
웃음기 어린 말에 울컥한 이상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준비가 돼도 슬픈 건 슬픈 거지!"
"그래. 그러니까."
그러다 평이한 어조로 돌아온 대답에 일순 말문이 막힌 이상현이 제 사촌 형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슬픈 건데, 뭐 하러 날짜를 세면서 얽매이려고 해."
"......."
"그냥 모른 채로 슬퍼해. 어차피 슬퍼할 거잖아."
"......이기적인 건지, 배려심 넘치는 건지 모르겠네."
불퉁하게 말하면서도 킁, 하고 코를 들이키는 소리에 이상현을 질린 듯이 흘겨보는 김석영이다. 이쯤 되니 눈물샘이 고장 난 게 아닌지 진지하게 걱정될 정도였다.
"형. 그런데."
"......또 뭐."
말 더럽게 많네. 미간을 찌푸린 김석영이 한숨처럼 대꾸했다.
"가사도우미는 언제 구할 거야."
"......."
"할머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신가 봐. 형 너한테 말해봤자 소용없는 거 아니까, 자꾸 나한테 닦달하시잖아. 엄마도 자꾸만 형 얼굴 좀 보고 오라 하고. 굶어 죽은 건 아닌지 확인해보래."
......또 시작됐다. 단전에서부터 끌어온 긴 한숨을 내뱉은 김석영이 몸을 돌려 누웠다. 대화를 차단하겠다는 행동이었으나 이상현에겐 어림도 없었다.
"지난번에 구한 도우미가 나한테 쌍욕한 거 알아? 양심 있으면 그따위로 살지 말래.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냐면서. 여기서 일한 이틀 동안 살이 2kg이나 빠졌다고 손해배상 청구하더라. 일하기 전엔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더니....... 그런데 뭐, 이틀이면 오래 버티긴 했지."
"......."
"지지난번 도우미는 방에서 기절한 거 기억하지? 하마터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고. 별일 없는지 연락해보길 잘했지. 답장이 없길래 영 불안해서 가봤더니, 어휴.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피가 바짝바짝 말라요. 이젠 그쪽 커뮤니티에 소문이 싹 돌았는지, 연락하면 죄다 피하더라. 그렇다고 만신 찾아가서 가정부 해달라고 할 순 없잖아. 급살 맞을 것 같아......."
이게 돌았나. 김석영이 살벌하게 읊조렸다.
"......하기만 해."
"설마 미쳤다고 그러겠냐. 나도 내 목숨 귀한 줄 알지. 그런데 형이 안 하니까 나라도 구해봐야지 어쩌겠어. 그나마 조금이라도 볼 줄 아는 사람이 이젠 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살 순 없잖아. 나도 도저히 여기선 못 살아. 무서워....... 학교랑도 멀고......."
"누가 너보고 여기서 살랬니."
"그럼 도우미를 빨리 구해보던가! 나보단 형이 제대로 살펴보고 구하는 게 낫지 않겠냐? 아니, 적어도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야 할 거 아냐. 굶어 뒤지려고 작정하셨어요?"
"뒤질 것 같으면 알아서 먹으니까 제발 신경 좀 꺼."
"아, 걱정돼서 그러지. 걱정돼서!"
어흐, 속 터져! 씩씩거리며 가슴을 후려치는 모양새에 안 그래도 없던 김석영의 식욕이 곤두박질쳤다. 걱정이란 왜 항상 잔소리를 달고 오는가. 그 둘의 연관성을 생각하며 김석영은 몇 입 먹지 않은 떡 그릇을 툭 치워버렸다. 괜히 꼴 보기가 싫었던 탓이다.
그런 김석영의 심술을 고스란히 두 눈으로 목격한 이상현이 '음식 귀한 줄 모르네. 천벌을 받을 것이네. 살아생전 남긴 음식들은 지옥에서 비벼 먹어야 하네. 그걸 당신의 콩만 한 위장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냐'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본래에도 혈색이라곤 없는 김석영의 안색이 빠르게 핏기를 잃어갔다.
"하아......."
그냥 제가 꺼지는 게 나을 성싶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김석영이 자리를 피하려던 순간이었다.
딸랑― 청량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따발총처럼 이어지던 잔소리가 멎었다. 아,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손님의 방문이 이토록 반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씩 웃은 김석영이 미세한 진동을 내는 제 염주를 보란 듯이 사촌의 낯짝에 들이댔다.
"보이지? 일해야 하니까 이만 가봐."
"......."
볼멘 얼굴을 한 이상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늘어져 있었냐는 듯 곧장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던 김석영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불쑥 고개를 돌렸다. 입이 근질근질한지, 아랫입술이 댓 발 튀어나온 사촌 동생을 향해 말했다.
"도우미 구할 필요 없으니까 괜히 애쓰지 마."
"도우미 없이 여길 어떻게 관리할......."
"알아서 잘살아 볼게. 넌 신경 끄고 네 인생 살자."
"허, 퍽도 알아서 살겠다. 잘살겠다는 사람이 냉장고에 반찬 하나 없냐? 저거 저, 저, 개무시하는 것 좀 봐. 기껏 생각해줘도 싫대요."
말 더럽게 많네, 진짜. 혀를 찬 김석영이 귀를 막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점차 희미해지는 뒷모습을 보며 잔뜩 투덜거린 이상현은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불만은 입만 다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툭 삐져나온 아랫입술이 소리 없이 불만의 언어를 대신했다. 어휴, 깊은 한숨은 덤이었다.
하여간에 나이를 헛먹는 게 분명하다. 여섯이나 어린 제가 서른 다 된 사촌 형이 굶어 죽을까 걱정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 태도라도 온순하면 모를까, 꼭 저렇게 귀찮은 티를 팍팍 내니 더 열불이 나고 만다.
'됐다. 굶어 죽든지 말든지. 지금 내 코가 석 잔데, 누가 누굴 걱정해? 이 빌어먹을 오지랖.'
한껏 불퉁하게 생각하면서도 이상현은 사촌이 사라진 자리를 흘끔 바라보았다.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김석영은 딱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챙겨 먹을 것 같다. 이러다 진짜 제 명대로도 못 살고 죽는 건 아닐까. 안 그래도 핏기라곤 없는 인간이 날이 갈수록 허여멀건해지는 게 심상치 않았다.
'키도 멀대처럼 커가지고 등치 관리는 더럽게 안 하는 걸 보면....... 아, 그냥 떡 한 입이라도 더 먹이고 보낼 걸 그랬나. 괜히 마음 쓰이게.......'
"아씨, 나 뭐하냐."
김석영이 빠져나간 이불 속에 몸을 뉘며 생각을 멈추려던 이상현은, 멈추기는커녕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확장에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도우미를 수소문해보자. 이번엔 정말 딱 맞는 사람을 찾아낼지 누가 알겠는가.
진짜 마지막. 다섯 글자를 되뇐 이상현이 굳게 다짐했다.
문을 열기에 앞서 제 옷매무새를 정리한 김석영이 혀를 찼다. 좀 전까지만 해도 늘어져 있던 탓에 잔 구김이 많았던 것이다.
'별수 없지, 뭐.'
빠르게 포기한 그는 간단한 손짓으로 조명의 밝기를 조절하곤 문을 열었다.
"오셨네요."
"아, 예에....... 안녕하세요."
정말 단순한 꿈이 아니었구나. 남자의 말대로 다시 이곳에 오게 된 김경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인사를 마주 건넸다.
"보내고 싶은 게 많으셨나 보네요."
김석영의 시선이 두 팔 가득 안고 있는 사과 상자에 고정됐다. 멋쩍은 웃음을 지은 김경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나 해서요. 안되는 게 있다면 뺄게요."
"그건 안에서 확인해볼게요. 들어오세요."
일전과 같이 단 하나뿐인 의자에 김경희를 안내한 김석영이 상자 속의 물품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소지품 검사를 받는 학생이 된 것 같아, 김경희는 괜스레 초조한 마음으로 손끝을 부여잡았다.
"딱히 문제 될 건 없네요."
아, 다행이다. 잔뜩 굳어 있던 김경희의 낯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김석영이 차례대로 물품을 기록하는 사이, 김경희는 미리 건네받은 종이에 발신인 정보를 적어갔다. 이름과 생년월일, 수신인과의 관계, 그리고 보내는 물품을 차례대로 기재했다. 펜을 내려놓기 무섭게 상자를 닫고 봉하던 김석영이 불쑥 물었다.
"수신인의 물건은 가져오셨나요."
"네? 아, 네. 가지고 왔어요. 잠시만요."
고개를 끄덕인 김경희가 상의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을 건넸다. 발신인 정보지도 함께 받아 간 김석영이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고기인가.'
살짝 힘을 주어 만져보니 삐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심하고 있다가 깜짝 놀란 김경희가 멋쩍게 말을 건넸다.
"삑삑이 인형이라 누르면 소리가 나요.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네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낯선 타인의 손에 아이의 물건이 쥐어지자 조금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으니 덜컥 불안한 마음마저 더해졌다. 흔들리는 눈길에서 그 불안감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김석영이 인형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설핏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요. 문제없습니다. 이건 우편이 잘 전달되면 돌려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아, 네. 그렇다고 하셨죠.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괜찮아요. 대체로 다들 그런 반응이거든요."
여상히 대꾸한 김석영이 상자 위로 수신인의 물건을 올려놓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경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잘 전달될까요?"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전달할게요' 하고 이어지는 단조로운 음성이 마음을 놓게 만들었다. 김경희는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값은 어떻게......."
"그러게요. 음, 값이라―."
찬찬히 김경희를 살피던 김석영의 시선이 문득 한곳에 머물렀다. 핏기 없이 건조한 얼굴의 남자가 일순 유하게 눈꼬리를 누그러뜨렸다. 찰나의 그 묘한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김경희에게 김석영이 답을 건넸다.
"거기 붙어 있는 털 뭉치면 되겠네요."
"예? 털 뭉치요? ......어머."
당황하여 제 몸을 살펴보던 김경희가 상의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털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개중에서도 크게 뭉쳐 있는 덩어리를 확인하곤 헛웃음을 삼킨다. 털을 빗겨주다가 붙어버린 모양인데, 평소엔 안 하던 실수를 남에게 보인 것이 민망했다. 솜사탕처럼 가는 털 뭉치를 살살 떼어내어 손에 쥔 그를 향해 김석영이 손을 내밀었다. 김경희가 일순 멈칫했다.
'아니, 근데 이 남자는 왜 이런 걸 가져간다는 거지?'
당혹감이 고스란히 드러난 낯에 김석영이 입을 열었다.
"우리 집 애랑 색이 비슷해서요."
"......고양이를 키워요?"
애초에 진짜 사람이었어? 미심쩍게 물으니 '네, 뭐' 하고 지극히 단조로운 대답을 내놓는다. 어쩐지 께름칙해서 머뭇거리자 얕은 코웃음을 친 김석영이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어? 어어―!"
옅은 홍차의 빛깔을 띤 노란 털 뭉치가 김경희의 손에서 벗어나 허공에 넘실거렸다. 둥실둥실 제멋대로 움직인 그것은 천천히 김석영의 손아귀에 내려앉았다. 보드라운 촉감이 손 위의 피부를 간질거렸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뭘 망설이세요."
"바, 방금 그거 뭐예요?"
깜짝 놀라 묻는 김경희의 반응이 되레 놀랍다는 듯 김석영이 되묻는다.
"아직도 놀라시는 게 저는 더 신기하네요. 저승에 우편 보내는 것 자체가 일반적이진 않을 텐데요."
"......그건, 그렇죠. 네."
그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곳인데. 하나하나 놀래봤자 내 정신만 고달프지. 놀랐다는 말에 놀랐다는 말로 되받으니 되려 김이 샌 김경희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거면 되겠어요?"
"네. 이거면 됩니다."
서랍장에서 빈 유리함을 가지고 온 김석영이 털 뭉치를 고이 넣어두며 대꾸했다.
"대가 잘 받았습니다. 수신인의 물건은 우편이 배달 완료되는 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다음에 뵙죠."
"아, 저기, 다음이라면 어떻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흐려지는 시야에, 김경희가 다급하게 외쳤다.
"수신인의 물건이 발신인을 이곳에 이끌 거예요."
"아―"
눈앞이 점점 더 흐려졌다. 스르륵 감기는 눈꺼풀 너머로 김석영이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김경희의 형체가 사라지고, 떠나간 빈자리를 확인한 김석영이 곧장 제 손목을 감싼 염주를 매만졌다. 한 알, 두 알 손끝으로 돌리다가 적당한 것을 택했다. 톡톡, 가볍게 두드리자 제법 무게가 나가던 사과 상자가 단숨에 연기가 되어 염주 알에 스며들었다. 탄내와 함께 묵직해진 손목을 가볍게 털어낸 김석영이 수신인의 물건을 손에 쥐었다.
스르륵―
가볍게 힘을 불어넣자, 그를 둘러싼 환경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붕괴된 공간의 틈 사이로 기억의 조각들이 흘러든다. 찬란한 빛을 띤 조각들이 일렁이는 공간을 빠르게 메꾸어가고, 그 모든 과정을 눈에 담은 김석영이 눈꺼풀을 깜박이던 찰나.
"오늘부터 네 이름은 사랑이야."
오후의 햇살이 내어준 자리 한 편에, 현재보다 젊은 얼굴을 한 김경희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보드라운 타월과 담요로 어우러진 둥지에서 꼬물거리던 작은 생명체는 제게 속살거리는 음성과 냄새를 향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마치 화답이라도 해주듯 힘겹게 한쪽 눈꺼풀을 뜬 생명체를 보며 김경희는 큰 기쁨을 느꼈다. 벅찬 마음에 크게 반응하다가 행여 놀라기라도 할까, 제 설레는 마음을 꾹 참아낸 그는 속달거리는 목소리로 표현을 대신했다.
"행복하게 해줄게. 나랑 잘살아 보자."
가족의 연이 이어지는 광경을 담담히 바라보던 김석영이 손에 쥔 인형을 꾹 눌러보았다. 삐익― 소리가 나자 김경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랑이 꼬리를 흔들며 몸을 움직였다.
"이거 봐라, 사랑아. 삑삑이다, 삑삑이!"
어느새 훌쩍 자란 사랑이 김경희가 던지는 인형을 가볍게 물고 달려왔다. 툭, 뱉어내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총명한 눈동자에 김경희의 낯으로 한가득 웃음이 번졌다.
"또 할까? 또?"
이번엔 좀 더 멀리 인형을 던졌다.
큰 포물선을 그리며 툭 떨어진 인형을 낚아채는 사랑은 이전보다 힘이 없었다. 제게 다가오는 사랑을 품에 안은 김경희의 얼굴에도 세월이 묻어났다. 품 안에 가득한 온기를 끌어안으며 한참을 조심스레 매만지던 그는 자신을 마주하는 까만 눈을 바라보았다. 김경희는 그 맹목적인 시선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랑을 어떻게 갚아줄 수 있을까.
"사랑아."
사랑만 주고 싶어서 붙인 이름이건만 되려 사랑을 받고 만다. 김경희는 제 늙은 개를 감싸며 눈시울을 붉혔다.
뚜벅뚜벅, 김석영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풍경은 변해갔다. 물건이 이끄는 소로를 따라가면 그를 둘러싼 기억의 공간들이 시간대로 흘러갔다.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김경희의 구슬픈 오열이 점차 희미해지고, 빛을 잃은 보통의 일상이 하염없이 지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귓가를 맴도는 작은 울음소리에 김경희는 몸을 움직였다. 소리를 따라 더듬더듬 걸어가니, 그곳엔 눈도 뜨지 못한 새끼 고양이들이 서로의 체온에 기대고 있었다. 당황한 김경희가 주변을 살폈으나 어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언젠가 들은, 경계심 많은 어미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새끼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니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는 발걸음을 물리곤 황급히 사료와 캔을 사서 돌아와 그 근처에 두었다. 되도록 어미가 젖을 먹였으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는 마음에 물에 불린 사료 또한 근처에 두었다.
그날 이후, 종종 그 길목을 지나갈 때면 제법 성장한 새끼 고양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첫날엔 보이지 않던 어미 또한 발견할 수 있었기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그는 길목을 지날 때마다 사료와 물을 챙겨주었다.
몇 주가 흘렀을 때였다. 어느 순간부터 어미가 보이지 않았다. 걱정되었으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보지 못하는 것이겠거니 여기며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억눌렀다. 하지만 그 뒤로 우연히라도 어미를 마주치진 못했다.
키튼용 사료를 챙겨 그곳에 가니 두 마리의 새끼 중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제가 생각하는 일이 아니길 바라며, 김경희는 평소보다 사료의 양을 두둑하게 남겨두고 돌아섰다. 놀다 온 새끼가 주린 배를 든든히 챙기길 바라면서.
쏴아아―
긴 장마가 시작됐다. 세찬 빗발 소리에 잠에서 깬 김경희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면에 억세게 퍼붓는 비가 위협적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가방에 도톰한 수건과 담요를 챙겨 밖을 나섰다.
곧장 길목을 향해 달려간 김경희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하수구와 수로의 틈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자동차의 밑을 살피던 그의 시야로 타이어의 틈에 몸을 웅크린 새끼 고양이가 들어왔다. 미약한 울음소리를 내며 견디고 있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왈칵 울음이 터졌다. 더듬더듬 다가가 수건으로 새끼 고양이를 감싸곤 물기를 닦아내었다. 덜덜 떠는 작은 고양이를 담요로 조심스럽게 감싸 품에 안은 김경희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집으로 향했다.
고양이를 거둘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한 생명이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을 뿐이었고, 사랑을 떠나보낸 뒤론 그 아이가 제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는 건강해질 때까지만. 가족이 되어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날 때까지만 내가 돌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기운을 회복한 고양이는 김경희를 따르기 시작했다. 저보다 한참이나 큰 생명체에게 마음을 열고 제 연약한 체온을 기대는 걸 보며 김경희는 떠나보낸 사랑을 떠올렸다.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새끼 고양이가 사랑스럽다고 느껴질 때마다 미약한 죄책감과 싸워야만 했다.
사랑아, 나는 너 이외엔 아무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이 아이가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그게 너를 서운하게 할까 봐 두렵다. 이게 마치 너를 향한 마음이 퇴색되는 것 같아 보일까 봐. ......나조차도 그렇게 느끼게 될까 봐.
결국 김경희는 빠른 시일 내로 보호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그의 가까운 지인이 고양이를 입양하기로 하였고, 그라면 김경희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내기로 정해지고 나서야 그는 고양이에게 좀 더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어느덧 떠나보내는 날이 되었다. 낯선 이의 등장에 잔뜩 경계한 새끼 고양이가 구석에 숨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아. 나와 봐."
김경희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고양이는 곧 김경희에게 다가와 내민 손에 제 몸을 부딪쳤다. 피부에 닿는 여린 온기가 왜 그렇게 마음을 아리게 했는지. 그는 저도 모르게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작은 발톱이 토독― 옷감에 박혔다. 늘어난 올의 틈으로 애써 눌러두었던 것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김경희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 자그마한 아이가 제 마음에 박혀버렸다는 사실을.
"미안해요. 못 보낼 것 같아요."
결국 지인에게 사과를 건넸다. 모든 걸 지켜봐왔던 지인은 되려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집을 나섰다.
"......."
품 안에 그르렁거리는 작은 체온을 바라보면서. 김경희는 또 다른 사랑을 피어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날, 그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안개가 가득한 숲속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고택, 익숙한 장면에 흥미를 잃은 김석영이 걸음을 빨리했다. 그와의 만남 이후, 김경희가 우편물을 준비하는 과정이 빠르게 지나갔다. 물건에 스며든 발신자의 지나온 순간들이 안개처럼 희미해지고, 낮과 밤이 공존하는 드넓은 강이 시작되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부턴 물건에 깃든 수신자의 흔적이 길을 안내할 것이다.
수신자, 사랑의 기억과 흔적이 김석영이 가는 길을 안내했다. 아주 긴 시간이었다.
찰박, 수면 위에 존재하는 문 앞에 당도했다. 김석영은 염주에 담아온 물건을 확인하곤 망자들은 절대 스스로 열 수 없는 천근의 문을 열었다.
따스한 빛이 쏟아지는 문 너머엔 맑은 눈을 빛내는 존재가 있었다. 김경희의 마지막 기억에서처럼 아프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는, 생전의 가장 행복했던 모습 그대로.
반갑게 꼬리를 흔드는 사랑을 보면서 몸을 굽힌 김석영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 소포 왔어."

তেওঁ মই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