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 시험을 거하게 말아먹은 탓에 요 며칠 넋이 나간 이상현은 한눈에 보아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야.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건데. 그럴 시간 있으면 교수님한테 메일이라도 보내보던가. 혹시 알아? 불쌍하다고 플러스라도 주실지."
쯧쯧 혀를 차며 조언한 녀석은 늘 학년 수석을 놓치지 않는 놈이었다. 머리 좋아서 좋겠다. 잘난 친우의 낯짝을 우울하게 바라보던 이상현은 고개를 저으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소용없다. 지난 학기에 해봤는데, 괘씸하다고 욕만 더 먹었어."
"......그럼 이번엔 공부 좀 하지 그랬냐."
"전공 잘못 선택했어. 시히발......."
"아, 전공만 문제였어? 그럼 전과하시던가."
"......성적 안 돼서 못해."
"그냥 때려쳐, 새끼야. 넌 답도 없어."
한심한 것도 모자라 질린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이상현이 입술을 삐죽였다. 나도 알거든.......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꼬락서니가 퍽 처량했다.
어휴, 한숨을 내쉰 친우가 이상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야, 괜찮아. 공부 머리가 없으면 좀 어때. 다른 거로 먹고살면 되지."
귀가 솔깃한 이상현이 눈을 빛내며 묻는다.
"그게 뭔데?"
"자리 깔고 방울이나 흔들면서 대충 사주나 봐. 요새 애들 환장하던데. 1억? 존나 금방 번다더라."
왜, 너 좀 보인다며. 덧붙이는 말에 눈을 모로 뜬 이상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나는 그냥 조금 느낄 뿐이라고! 제대로 보는 것도 아니라고!
"장난인데 발작하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모습에 뒷목을 부여잡은 이상현이 성난 숨을 다스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 싸가지 없는 새끼의 어깨에 붙은 거 쫓아주지 말 걸 그랬다. 괜히 생색내기 싫어서 비밀리에 부쳤건만 은혜도 모르고 사람 속을 긁는다.
......물론 없애버린 건 제가 아닌 사촌 형이었지만 그에게 사정사정하면서 겨우 부탁한 것은 자신이 아니던가. 제가 아니었다면 평생을 붙이고 다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깨가 무겁다고 징징댈 땐 언제고, 떼어내기 무섭게 자기 자세를 탓하면서 목을 돌리던 게 어찌나 얄밉던지.
"야야, 진정하고. 내년에 잘하면 되잖아. 종강인데 언제까지 여기서 뻗댈 거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가 사, 새끼야."
"허, 이거 웃기는 놈이네? 내가 왜 사?"
"아, 사라면 좀 사! 넌 나한테 밥 사야 해."
"......뭐라는 거야."
우악스럽게 옷깃을 끌고 가는 이상현의 모습에 포기한 친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먹고 싶은데' 하고 묻자 쌈박하게 답한다. 고구마 치즈 돈까스 정식.
"야, 그거 학식 메뉴잖아."
"방학 되면 못 먹잖아. 학식 먹자."
"집에 돈도 많은 놈이 이렇게 궁상맞아서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따르던 친우는 갑작스레 걸음을 멈춰선 이상현의 모습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왜 멈추는데. 뭐 있어?"
그는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흰자를 번들거리며 입을 쩍 벌린 모양새가 퍽 기괴했다. 안 그래도 뭐 좀 본다는 놈이 넋 나간 표정까지 지으며 무언가를 응시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발, 뭔데. 왜 그러는데....... 께름칙한 기분으로 이상현의 등짝을 콕콕 찌른 친우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려던 찰나, 휙! 하고 뒤를 돈 이상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저 사람 알아?"
누군가를 가리키며 발을 동동 굴리는 이상현은 잔뜩 상기된 채였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이상현이 가리키는 대상을 확인한 친우는 되려 신기하다는 낯이 되어 되물었다.
"너 몰라?"
"아니, 시발, 알면 묻겠냐?"
"진짜 모른다고? 저 유명인을?"
"아, 모른다니깐?"
버럭 화를 내자 멋쩍은 듯 얼굴을 긁적인 친우가 말을 이었다. 쟤 걔잖아.
"귀신 보는 애."
나는 너도 당연히 알 줄 알았는데. 동류는 동류끼리 알아보는 거 아니었어? 의아하게 묻는 말에 이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 알아보니까 누군지 물어본 것 아니겠나. 터벅터벅, 점차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상현이 황급히 말했다.
"따라가자."
"뭐? 야, 설마 쟤 따라가자는 건 아니지?"
"왜 아니겠어. 가자."
이상현은 적당한 선의 거리를 유지한 채 남자를 뒤따랐다. 그러다 느낀 것이 하나 있다면, 그를 지나치는 모두가 흘끗 곁눈질을 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유명인이라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네.'
심상찮은 기운으로 점철된 뒷모습만 확인한 거라 정면이 궁금한데, 차마 앞서 나갈 수는 없어 답답했다.
"어? 야. 쟤도 학식 먹으려나 본데?"
인상을 와락 구긴 채 이상현에게 끌려가던 친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말했다. 어쩐지 방향이 익숙하다 싶더니, 남자 또한 그들의 원래 목적지인 학생 식당을 향해 가고 있었나 보다. 이상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종강을 앞두었음에도 학생 식당은 제법 북적였다. 그 속에서 남들보다 머리통 하나 우뚝 솟아 있는 남자는 단연 눈에 띄었다. 티가 나지 않게 거리를 유지하며 남자를 주시한 이상현은, 남자가 가장 외진 곳에 홀로 앉은 것을 확인하곤 걸음을 옮겼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친우를 방패 삼아 몸을 숨긴 이상현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조심스레 남자의 외관을 살피던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곤 입을 벌렸다.
"와, 뭐야. 뭐 저렇게 생긴 게 다 있어?"
"이제 봤어? 그래서 더 유명한 거야. 껍데기는 예쁘게 생겼는데 귀신이나 본다고 하니까. 쟤 막 허공이랑 대화도 한다던데?"
"대화도 한다고?"
영가와 대화가 가능할 정도라. 범상찮은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기에 평범하지 않을 거란 건 예상했던 일이다. 한평생을 가문을 위해 일해왔다던 할머니의 기운과도 흡사했다. 다만, 너무.......
미간을 문지르며 끙, 신음을 삼킨 이상현이 재차 남자를 훑었다. 저런 상황이면 보통 제정신이 아닐 텐데, 남자의 얼굴은 티끌 하나 없이 맑았다. 무표정한 낯 위에 쉽사리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혼을 빼앗긴 자들처럼 이지가 없어 보이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주 단단해 보였다.
저 정도면 그곳을 충분히 견딜 것 같은데....... 남자를 가늠하던 이상현이 친우에게 물었다.
"야야. 너 뭐 아는 거 더 없어?"
"......너 뭐야. 왜 그렇게 관심 가져? 동지애 뭐 그런 건가?"
"비슷해. 그래서, 아는 거 더 없어?"
흐음, 고개를 돌려 힐끔 남자를 확인한 친우가 턱 끝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랑 동갑이야. 쟤랑 같은 과에 내 친구 있거든. 입학했을 때부터 생긴 거로 유명했는데 며칠 안 돼선 다른 의미로 더 유명해졌지. 쟤, 허공이랑 대화는 하는데 그 외엔 아무랑도 대화를 안 한대. 아, 교수님은 예외고."
"벽치는 건가?"
"그런가 봐. 그래도 낯짝이 잘났으니까 다가가는 사람들은 꾸준히 있는데, 그냥 다 개무시한다던데."
"아, 그래?"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부류는 아닌 만큼, 타인에게 벽을 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 뭐랬더라. 아, 맞아. 쟤한테 다가간 애들은 항상 뒤탈이 생겼댔나. 왜, 그런 거 있잖아. 가위를 눌린다거나 자잘한 사고가 생긴다거나."
"......기분 탓 아니야?"
"모르지, 난. 겪어본 것도 아닌데. 그냥 그런 소문이 돌더라고."
"뭐, ......그래."
모자의 챙에 가려진 작은 얼굴을 살펴보던 이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식판을 말끔하게 비운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 뭘 저렇게 빨리 먹어......!'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음식을 욱여넣고 있자니 남자가 곁을 스쳐 갔다.
"어? 간다."
"야야, 미안한데 이거 식판 좀. 나 먼저 가야겠다.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멀뚱하니 눈만 깜박이는 친우를 뒤로하고 헐레벌떡 몸을 일으킨 이상현이 남자의 뒤를 쫓았다.
야, 이 개자식아! 남겨진 친우가 뒤에서 욕을 퍼부었으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디 가는 거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남자는 학교 밖이 아닌 내부로 들어섰다. 긴 목을 푹 꺾은 채 화면을 응시하더니, 게시판마다 멈춰 서곤 뚫어지게 바라본다. 곧 원하는 게 없었는지 가볍게 돌아서며 걸음을 이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남자의 걸음이 멎었다. 교수실의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가 손을 들어 노크를 했다. 그 너머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려보았으나 철컥이며 잠긴 소리만 울렸다. 한숨을 토해낸 남자가 걸음을 뗐다.
이후에 다다른 장소는 학과 사무실이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내부를 확인하니 문과 가까운 거리에 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씨, 무슨 말 하는지 궁금한데. 들려라, 제발 들려라.......'
"어, 재하. 무슨 일이야?"
대화가 들린다. 속으로 안도한 이상현이 귀를 기울였다.
"이 교수님 연구실 근로 건으로 여쭤볼 게 있어서요. 면접까지 진행했는데, 별다른 답변이 없으셔서."
"아, 방학내 근로건 말이지? 그거 이미 일손 다 구해졌어. 연락 못 받았니?"
"아......."
조교의 말에 남자는 얕은 한숨을 삼켰다. 그런 그의 모습이 퍽 안쓰러웠는지 조교가 멋쩍은 위로를 건넸다.
"번번이 이런 결과만 알려주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혹시라도 자리 나는 게 있으면 알려줄게."
"네. 감사합니다."
대화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꾸벅 인사를 한 남자가 곧장 문을 향해 다가왔다. 당황한 이상현이 황급히 걸음을 뗐다. 재빨리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걷고 있으니 바로 뒤에서 남자의 기척이 느껴졌다. 바닥에 드리우는 긴 그림자를 확인하기 무섭게 남자는 이상현을 지나쳤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여기서 따라가면 너무 티 날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이상현은 때마침 무리 지어 계단을 내려오고 있던 인파에 몸을 숨기곤 남자의 뒤를 밟았다. 여러모로 운이 따라주고 있었다.
'형편이 안 좋은가.'
이전까지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으나,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남자를 따라가고 있자니 그를 감싼 것들에 시선이 갔다. 색이 조금 바랜 모자와 검은 패딩에서 세월감이 느껴진 것이다. 좀 전에 근로 아르바이트를 물어본 것도 추측에 근거를 더해주었다.
'역시, 이건 기회야.'
씩 웃은 이상현이 남자의 뒤를 따랐다. 정문을 벗어난 그는 원룸촌이 시작되는 건널목으로 향했다. 그러다 불쑥 걸음을 멈춰 서더니 부동산의 유리 벽을 빼곡하게 채운 매물 정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활자의 정보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눈에 담은 남자는 얕은 한숨을 토해내며 무거운 걸음을 뗐다. 그때, 이상현이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녕하세요?"
멈칫한 남자가 제 앞에 선 인영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막아서서 놀랐....... 어, 잠깐, 잠깐만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무심히 스쳐 가는 남자를 붙잡으며 이상현이 소리쳤다.
'......아씨, 이거 누가 봐도 이상한 놈들이 내뱉는 전매특허잖아.'
저 스스로 뱉어놓고 자괴감에 휩싸여 혀를 차는 사이, 남자는 붙잡힌 옷자락을 가볍게 빼내곤 걸음을 뗐다.
"아니, 저기, 잠깐만요.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한국대 학생 맞죠? 저도 한국대 다녀요!"
남자는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대꾸 한마디 없이 제 갈 길만을 걸었다. 긴 다리만큼이나 성큼성큼 걷는 보폭을 힘겹게 따라붙으며 이상현이 말을 건넸다.
"놀라는 것도 이해해요. 그런데 저 진짜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아니 제가 지금부터 하게 될 말이 좀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쪽은 잘 알아들으실 것 같고......!"
여전히 남자의 걸음은 멎을 기미가 없었다. 이렇게 따라붙으면서 말을 건네면 욕이라도 할법한데, 저 혼자 방음벽에 갇힌 사람처럼 굴었다.
'아하, 지금 개무시하겠다는 거지?'
오기가 생긴 이상현이 지지 않고 제 할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부동산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데, 혹시 자취방 구해요?"
"......."
"제가 그쪽을 보니까 딱 봐도 기운이 범상치 않으시더라고요."
이 말을 뱉었을 땐 남자의 시선이 짧게 닿았는데, 그 찰나의 시선에 담긴 온도가 너무 싸늘해서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제 사촌에 의해 어느 정도 단련이 된 이상현이다. 그는 보란 듯이 허허 웃어 보이며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귀신 보시죠?"
남자로부터 짧은 코웃음이 터졌다.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무슨 유난이냐는 듯.
"저도 보거든요. 기껏해야 기운을 보는 정도긴 하지만."
황급히 말을 내뱉으며 힐끔 남자를 바라본 이상현은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사실 남자를 발견한 순간부터 가까이 선 지금까지. 그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게 남자는,
"......그렇게 달고 다니면 안 무거워요?"
가지마다 풍성하게 맺은 열매처럼 검은 영가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 순간, 드디어 걸음이 멎었다.
동시에 남자의 몸을 에워싼 검은 연기들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차마 몸에 닿진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것들을 애써 무시한 이상현이 입을 열었다.
"잠시 저랑 얘기 좀 하실까요?"
* * *
띠링―
대가로 받아낸 고양이의 털로 나비를 유혹하려던 김석영은 불쑥 들려오는 문자음을 무시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뻔히 예상이라도 한 듯, 띠링― 문자가 연달아서 울리기 시작했다.
띠링―
"왜 도망가는데. 이거 싫어?"
띠링―
엄지손톱만 한 털 공을 재차 흔들어 보았으나 나비는 홀라당 사라져버렸다. 제 옷 색이랑 비슷해서 받아왔더니. 관심 한 톨 주지 않는 것에 저 역시 흥미가 떨어진 김석영은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상현 : 형은 진짜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음흉)
―이상현 : 세상에 나 같은 사촌 동생이 어딨나 몰라. 평생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도록. (으스대는 이모티콘)
―이상현 : 나 이번엔 진짜 제대로 된 도우미 구할 것 같거든?
―이상현 : 조만간일걸? 분명 연락 온다. 이번엔 진짜 대박이다. 나 밖에서 그런 인간 마주친 거 처음이야.
―이상현 : 암튼 조금만 기다려봐.^^
―이상현 : 아 근데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 알지? 대가는 잘 생각해놓고 있을게^^
"뭐라는 거야."
무감한 시선으로 메시지를 확인한 김석영이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보나 마나 귀신 좀 보는 인간을 골라내서 돈으로 유혹한 걸 테다. 그래봤자 늘 허탕만 쳐대면서 지치지도 않을까. 구할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기어이 찾아 나선 모양이다.
"쓸데없는 짓하긴."
혀를 찬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저승의 냄새가 어느 정도 걷혔으니 이젠 수신인의 물건을 돌려줘야 할 때였다.
고택에 들어선 그는 곧장 고비를 뒤져 선지를 찾았다. 염주 알에 담아온 기억을 꺼내서 붓을 쥔 손에 불어넣자 붓끝이 빈 선지 위를 거침없이 맴돌았다. 순식간에 기억을 옮겨놓은 그림이 믿을 수 없이 빠르게 말라갔다.
때마침, 딸랑―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벼운 손짓만으로 문을 연 김석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의 김경희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아, 네에. 안녕하세요."
이제는 알아서 내부로 들어온 김경희가 자연스레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저 지금 일하던 중이었는데, 어떻게......."
"물건 돌려드리려고 불렀어요. 다시 돌아가실 땐 이 모든 게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예. 이젠 놀랍지도 않네요."
설핏 웃은 김경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돌려드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네요. 저승의 냄새를 빼야 했거든요. 자칫하다간 삿된 것들이 꼬일 수 있는 터라."
"......예?"
삿된 것이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김경희의 낯이 파리해졌다. 피식 웃은 김석영이 물었다.
"무서우세요?"
"......당연한 거 아닐까요?"
그걸 말이라고 할까. 미간을 찌푸린 김경희가 대꾸하자 평이한 어조의 답변이 돌아온다. 저는 안 무서워하시길래요. 일순 김경희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제가 무서워해야 하나요? 설마 귀신이었어요?"
"아니요. 설마요."
"그럼 어떻게 이런 일을......."
"글쎄요."
궁금하게 만들어놓고서 정작 대꾸해 줄 맘은 없는 모양이다. 그래, 굳이 알아서 무엇하고 이해해서 무엇하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과도한 관심을 가져봤자 화만 불러일으킬 것이다. 특별한 경험은 특별한 기억으로만 남겨두면 된다. 그건 불혹을 넘기고 지천명을 앞둔 그가 살아오며 깨달은 진리였다.
'점잖은 손님이네.'
원래 이쯤 되면 이것저것 캐묻고 싶어지기 마련이건만, 김경희는 굳이 제 의문을 해소하려들지 않았다. 늘 이런 손님들만 있으면 편할 텐데.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의 모습에 느른한 미소를 지은 김석영이 손끝을 튕겼다.
"아."
수신인의 물건이 김경희의 무릎 위로 내려앉았다. 고작 몇 주가 흘렀을 뿐인데, 마치 아주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물건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김경희가 사랑의 인형을 애틋하게 어루만졌다.
"......잘 전해졌나요?"
사실 잘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두려운 마음에 돌려서 묻고 만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석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잘 전해졌어요.
"곧장 달려와 눈을 맞춰주더니 간식에 코를 박더라고요."
"아......."
그 대답에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달려왔다는 건 더는 다리가 아프지 않다는 것이고, 눈을 맞춰주었다는 건 또다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의미하며, 간식에 코를 박았다는 건 잃었던 식욕을 되찾았다는 것이니까.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고마워요, 정말."
"일을 했을 뿐일걸요."
무심히 내뱉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요'라고 덧붙이자 김석영이 눈을 한번 깜박였다. 마지못해 인사를 받아주듯이.
"아, 맞다."
느슨히 턱을 괴던 몸을 반듯하게 일으킨 김석영이 불쑥 종이를 찾아 김경희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펼쳐보세요."
의아한 기분으로 종이를 펼쳐보던 김경희가 온몸을 굳혔다.
"이건......."
"원래 답장은 잘 안 받아 오는데, 워낙 강경하셔서."
펼쳐진 종이에 그려진 것을 확인한 낯이 다시금 무너져버렸다.
"저승의 것은 함부로 가져올 수 없어요. 더군다나 함께 태워진 것은 이승에 가져와봤자 형태를 유지할 수 없고요."
그래서 그려 넣을 수밖에 없었다며, 김석영은 덧붙였다. 그림에 그려진 것은 사랑이 아주 자그마했을 때 즐겨 입었던 옷이었다. 몸체가 커지고부턴 맞지 않아 입을 수도 없던 것을, 사랑은 애착 인형처럼 제 곁에 두곤 했다. 아끼고 아끼던 것이라 함께 보내주었던 건데. 다시 제게 보내준 이유를 단번에 알아챈 김경희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름을 지어준 새 아이에게 딱 맞을 것 같은 사이즈.
김석영의 말대로였다. 이건 답장이었다. 김경희가 보낸 마음과 이야기에 대한 사랑의 답장. 변치 않는 마음을 간직할 것이라는 다짐과, 애틋한 그리움. 또 다른 가족을 맞는 것에 대한 사과와 허락을 구하던 김경희의 메시지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곳에선 눈물을 흘려도 젖지 않았다. 흐르기만 할 뿐, 턱 끝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증발하는 것을 바라보며 김경희는 제 감정을 마음껏 흘려보내기로 했다. 왜인지 이곳에선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저승의 기억이 오롯하게 전달되기 무섭게 그 그림은 태워졌지만, 김경희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곳의 규율을 이해한 것이다. 실체를 가지지 않아도 마음이 전달됐으니 개의치 않는다며 그는 웃었다. 손님은 홀가분한 낯으로 떠났다. 이젠 두 번 다시 이곳을 방문할 순 없을 것이다. 특별한 기회는 늘 한 번만 주어졌으므로.
* * *
손님이 떠나간 빈자리를 확인한 김석영은 잠시 노곤한 몸을 늘어뜨리며 한숨을 토했다. 요즘 들어 부쩍 기력을 회복하는 게 더뎠다.
'얼마나 남았더라.'
손가락 하나하나를 꼽아보던 김석영이 건조하게 웃었다. 조금만 더 하면 이 지긋지긋한 집안의 업도 그를 끝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늘어지는 하품을 하다가 또다시 터져버린 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곧장 가옥으로 돌아간 그는 핸드폰을 켜 제 사촌에게 문자를 보냈다. 며칠 동안 늘어지게 잘 것이니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을 보내곤 전원을 꺼버렸다. 그렇게 김석영은 긴 잠을 청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전보다 한결 몸이 개운했다. 곁을 어슬렁거리는 나비를 끌어안고 잠의 여운이 가시길 기다리던 김석영은 달라진 공기의 흐름을 느끼곤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곧 화면에 띄워진 날짜를 확인한 그가 짧은 헛웃음을 뱉는다.
"새해네."
연말에 잠이 들어,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일에 눈을 떴다.
오래도 잤네. 몸을 일으키며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김석영은 눈을 찌르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쌓여 있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보는 둥 마는 둥 대충 스크롤을 내리던 손길이 별안간 우뚝 멈춰 섰다. 느릿하게 문장을 읽어가던 그는 결국 짧은 한숨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이상현 : 형. 도우미 구했어.
―이상현 : 새해부터 출근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