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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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김석영은 텅 빈 집안이 주는 고요함에 상체를 일으켰다. 홀로 잠들었으니 혼자인 게 당연하지만 기이하리만치 적막한 공기가 신경을 잡아끌었다. 잠시 눈을 감고 기운을 살피던 그는 허탈한 한숨을 뱉었다. 곧장 안방을 나서자, 그의 예상대로 훤히 열린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
결계라도 닫아놨어야 했는데. 그 빌어먹게도 말간 낯에 허술해지고 만 스스로가 우스웠다. 왜 윤재하가 제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건조한 눈으로 고개를 돌린 김석영이 마당을 바라보았다. 늦은 밤부터 얕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새벽 사이에 꽤 쌓여 있었다. 나부끼는 눈발과 마당을 바라보던 그는 깊게 파인 자취를 발견하곤 한숨을 삼켰다.
눈을 찌르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뗐다. 자국이 온전한 채인 것으로 보아 안채를 벗어난 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새벽이고, 눈까지 내리는 상황이니만큼 멀리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답지 않게 너무 봐준 거지.'
김석영이 건조하게 웃음을 삼키며 생각했다. 아직 저택에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윤재하에게 붙어 있는 영가를 없애고 녀석의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리겠다고 덧붙이면서.
발자국을 따라 사랑채에 다다른 그가 불쑥 걸음을 멈췄다. 대문 너머로 보이는 숲길에서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야."
건조한 목소리에 다가오던 남자가 몸을 굳혔다. 얼굴을 가로막은 손가락의 틈 사이로 번들거리는 시선을 보낸 윤재하가 낮게 욕설을 짓이겼다. 그것이 윤재하의 탈을 쓴 무언가라는 건 마주한 순간부터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애 몸에서 나와."
말을 내뱉기 무섭게 윤재하의 영기가 김석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육체를 강제로 빼앗으려는 부정을 억누르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숲길로 몸을 이끈 것이다. 몸을 지키려는 영기와 맞지도 않는 육체를 힘으로 붙든 존재가 비틀린 웃음을 토해내며 몸을 떨었다. 발작하듯 꺾어대는 육체로부터 코를 찌르는 비릿한 악취가 풍겨왔다. 그 속에 갇힌 영가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김석영에게 손을 뻗었다. 빠져나오기 위해 허우적거리던 영가들은 이미 형태가 뒤엉켜버린 상태였으나 김석영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터의 영가들이란 사실을.
'저것이구나.'
「안채에만 있지 말고, 종종 내려가보렴. 내가 없는 사이에, 이곳에 머물던 영가들이 많이 사라졌더구나. 쉽사리 이곳을 떠날 이들이 아닌데 말이지.」
'이곳의 영가를 씹어 먹은 것이.'
가히 지독한 악귀였다. 설마 저게 윤재하가 달고 다닌다던 영가일까. 김석영은 제 생각이 틀리길 바랐다. 악귀인 걸 알고도 달고 다녔던 것이라면 윤재하 역시 머리가 돌아버린 걸 증명하는 것이므로.
어찌 됐건 저대로 두었다간 윤재하가 위험해질 게 분명했다. 염주를 매만지며 힘을 불어넣은 김석영이 악귀에게 다가갔다. 그의 푸른 영기가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윤재하의 탈을 쓴 것이 힘겹게 몸을 떨며 히죽 웃었다.
"......이상하다. 분명 숨이 붙어 있는데, 네게서 저승의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너도 이상해. 명줄 끊어진 잡귀가 이승의 냄새를 묻히고 다니는 게."
건조하게 내뱉은 김석영이 말간 낯의 탈을 쓴 악귀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많은 수의 영가들을 삼켜버린 건지, 형태가 뒤섞여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 속에 스며든 영가들의 처절한 비명이 귓가에 질척거리며 달라붙었다.
"아, 그래....... 알 것 같아."
윤재하의 영기를 간신히 억누르며 몸을 버티고 있는 주제에, 김석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악귀가 언뜻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양쪽을 오가는 존재가 있었지. 이제야 기억이 난다. 그게 이번에 너로구나."
"잘도 알고 계시네."
어깨를 으쓱한 김석영이 손을 뻗었다. 단번에 모가지가 붙들린 것이 히죽 웃으며 눈앞의 낯을 훑었다. 윤재하의 눈으로 더러운 시선을 보내는 것에 김석영의 입매가 굳었다. 지체 없이 혈을 엄지로 짓누르고 손끝에 힘을 가한 그가 손에 잡히는 것을 단숨에 빼냈다.
하지만 정작 떨궈진 것은 악귀가 아니었다. 상체가 반토막 난 영가였다. 몸을 잡아채려는 찰나에 흡수한 것 중 가장 하찮은 것을 떨쳐낸 악귀가 히죽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알겠다. 이제 기억났어. 그래, 너였구나. 너였어."
"뭐라는 거야."
굳은 얼굴을 뜯어보는 악귀의 낯 위로 즐거움이 감돌았다. 날카로워진 신경을 대변하듯 김석영의 손에 힘이 깃들었다. 숨통을 조이며 거칠게 윤재하의 몸을 바닥에 내리꽂은 그가 단번에 악귀를 잡아채려던 순간, 번들거리던 눈이 아닌 굳게 닫힌 눈꺼풀이 그를 맞았다. 붙잡히기 직전에 악귀가 스스로 윤재하의 몸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아. 짜증 나게."
맥없이 널브러진 윤재하를 마주 본 김석영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의 뒤로 세상의 잡음을 응축시켜놓은 듯한 기이한 음색이 말을 이었다.
「재밌구나. 그래, 몸을 갖는 게, 꼭 지금일 필요는 없겠어.」
지독한 악취를 내뿜은 검은 존재가 먹이를 던져주듯이 제 안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것들을 흘리며 모습을 감추었다. 남은 것은 결국 악이 뱉어낸 토사물뿐이었다.
「끄어, 흐어어.......」
말이 되지 못한 구슬픈 신음을 낸 영가들이 바닥을 기었다. 뒤엉킨 형태가 꿈틀거릴 때마다 사지가 조각조각 나뒹굴었다. 그들의 신음 속에서 원통함과 서러움을 온전하게 느낀 김석영은 악귀가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둠만이 자리한 텅 빈 숲길을 응시하는 흑안이 깊게 가라앉았다.
바닥에 쓰러진 윤재하를 일으켜 담장에 기대어준 그가 곧장 영가들에게 다가갔다. 집어삼켜져 흡수된 지 오래된 듯, 이지조차 닳아버려 의미 없는 신음만을 내고 있었다. 이 상태론 얻어낼 수 있는 게 없었다.
무감한 눈으로 응시하던 김석영이 산 자들은 타지 않는 불을 붙여 그들을 재로 만들었다. 재가 되어서도 원통함을 잊지 못한 그것들은 바람결에도 흩날리지 않은 채 눈바닥에 쌓여갔다. 고개를 숙인 김석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비로소 그의 숨결을 타고 흩어져버렸다. 연약해진 잿더미는 차가운 겨울바람보다도 미약한 온기가 담긴 숨결에나마 몸을 맡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김석영은 재가 되어 흩날려버린 것들을 가엾게 여기진 않았다. 한번 악귀에게 흡수된 순간부터 그것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 영가 따위가 온전할 리 없으므로. 그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것에 대한 일말의 연민과 주저 또한 없었다. 지금 그에겐 소멸해버린 것들보다 윤재하가 더 중했기 때문이다.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음울한 탄내를 가볍게 털어낸 김석영이 윤재하에게로 향했다. 악귀를 담아낸 탓에 기력이 소모된 듯, 늘 따뜻한 생기로 가득하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것이 드나든 틈새를 살핀 김석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윤재하는 이미 귀문이 개방된 자였다. 영기가 문지기의 역할로서 육체를 지켜주고 있긴 하나 완벽한 것은 없었다. 언제나 한계와 허점은 존재한다. 그의 귀문을 닫겠다는 건 영기 또한 건드리겠다는 것이고, 몸을 지켜줄 수 있는 수단을 막아버리겠다는 것과도 같았다. 보고, 들을 수 없다면 오늘 같은 일은 보다 빈번해질 게 분명하다.
「몸을 갖는 게, 꼭 지금일 필요는 없겠어.」
"......지금일 필요가 없다는 건, 나중에는 갖겠다는 거겠지."
괜히 귀문과 영기에 손을 댔다간 더욱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하물며 윤재하의 귀문과 영기를 닫아버리는 건 하루 이틀로 끝날 일도 아니었다. 차라리 기운 자체는 온전하게 유지하되 보호막을 덧씌우는 게 나을 것이다. 이럴 때 부를만한 자가 있었다.
"윤재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긴 하나 굳게 닫힌 두 눈은 뜨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윤재하를 안아 든 김석영이 곧장 안채로 향했다.
언뜻 보기엔 말라보여서 가벼운 줄 알았는데. 주방에서 옮길 때와는 달리 온전하게 안아 든 몸은 무겁고 단단했다. 곧게 뻗은 팔다리와 뼈대는 그가 보아왔던 것보다도 크고 다부졌다. 그의 몸에 반도 안 되던 아이가 어느새 같은 시야를 공유할 만큼 자란 것이다.
안채에 다다른 김석영은 흐트러진 윤재하를 추슬러 안고 조심스레 몸을 눕혔다. 목을 들어 베개 위에 뉘어주던 그는 선명하게 남은 제 손자국에 한숨을 삼켰다. 멍이 들 것 같았다.
"......뭘 달고 다니는 거야, 너."
말을 들을 것처럼 굴더니, 기어코 도망가선 한낱 잡귀도 아닌 고약한 악귀에게 홀린 채 돌아왔다. 아무리 윤재하의 영기라 할지라도 그만한 것을 단번에 떨쳐내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윤재하가 달고 다니던 영가라면 상성 또한 맞춰가고 있었을 터. 저승의 경계까지 다녀와 기운이 흐트러진 시점이니 분명 손도 쓰지 못하고 몸을 빼앗겼겠지. 하지만 육체가 거부 반응을 일으킨 걸로 봐선 상성이 깊어 보이진 않았다. 뒤늦게 몸을 지키기 위해 상성을 억누른 영기가 날뛴 걸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확실한 건, 윤재하가 지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그건 김석영의 예상보다 훨씬 지독한 것임을. 게다가 줄곧 윤재하의 곁을 맴돌았다면 은연중에라도 기운이 묻어났을 텐데. 혹여 모습과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는 정도의 악귀라면 결코 쉽지 않은 대상이다. 저승의 기운을 정화하던 걸로 보아 윤재하의 영기가 악귀의 기운 역시 정화한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모든 가정을 열어둬야 했다.
"이래선 기억을 지우고 보낼 수가 없잖아."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분명 윤재하의 곁을 맴돌며 기회를 노릴 것이니.
그때였다.
"......설마."
불쑥 무언가가 떠오른 김석영이 윤재하의 팔을 끌어와 손목을 확인했다. 곧 그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버렸다.
손목에 적힌 귀어가 사라졌다.
* * *
"......그래요. ......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특유의 무감한 어조로 이어가는 목소리가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윤재하의 의식을 끌어올렸다. 또다시 낯선 천장을 향해 눈을 뜬 그는 묵직하게 조여오는 목의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목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대니 아릿함이 느껴졌다.
'뭐지. 왜 목에 통증이.......'
의아함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킨 윤재하가 문 앞으로 향했다. 불쑥 창호지 너머로 어른거리는 인영에 몸을 굳히던 찰나, 드르륵― 문이 열렸다.
"......."
휴대폰에 귀를 맞대고 문 앞에 선 김석영이 무감한 표정으로 윤재하의 얼굴을 훑었다. 이목구비를 타고 내려간 눈길은 손자국이 남은 목에 멈췄다. 통증이 느껴지는 부분을 응시하는 것에 윤재하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그사이, 비스듬히 대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목에서 시선을 거둬간 김석영이 윤재하를 스치고 들어왔다. 오래된 듯하지만 진귀해 보이는 서랍장에서 열쇠를 꺼낸 그는 저를 바라보는 윤재하에게 고갯짓을 하며 방을 나섰다.
"그래요. 모쪼록, 밑지는 장사가 아니길 바라죠."
언뜻 작은 기계 너머로 비웃음 같은 게 들려왔다. 통화를 종료하고 손안에서 한 번 굴린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김석영이 뒤에 선 윤재하를 살폈다. 새벽에 일어난 일로 인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온몸에 배어 있던 저승의 냄새와 기운이 전부 가셨다. 가히 경이로울 정도의 영기다.
"몸은 좀 어때."
"아....... 목이 좀 아픈 것 외엔 괜찮아요. 그런데 제가 왜......."
"어디까지 기억해?"
일순 날카롭게 느껴지는 음성에 잠시 숨을 삼킨 윤재하가 목이 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벽에 저택으로 내려갔던 것까지요."
"몸을 빼앗겼던 건."
"......몸을, 빼앗겼다고요? 제가요?"
말간 낯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속내를 파악하려는 듯 무감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던 김석영이 말했다.
"그래. 그 상태로 여기까지 올라왔지."
"그게 무슨....... 전혀 기억이 안 나요. 도대체 뭐가......."
"새벽에 왜 내려갔어."
"......."
이제 와 숨긴들 감출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잠시 말문이 막혔다. 윤재하는 직설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걱정돼서....... 확인만이라도 하고 싶었어요."
"뭐가. 네가 달고 다닌다는 그 망자?"
"......네."
"윤재하."
"......네."
"그게 네 몸을 빼앗았어."
윤재하의 눈이 커졌다. 물기가 어린 듯한 말간 눈이 잘게 떨려왔다.
"지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혹시라도 무언가 내 몸을 뺏는다면......, 그건 분명 다른 놈일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
"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기운조차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어요. 그러다 저택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무언가를 느끼던 찰나에, ......기억이 끊겼어요."
흔들리는 눈빛에서 혼란이 가득했다.
"말이 겉돌잖아. 그게 네가 찾아 헤매던 망자라고는 생각 못해?"
"네. 네, 절대요. 그럴 리가 없어요."
"왜 그렇게 확신하는데."
"......."
엄마가 내게 그럴 리가 없으니까. 내 곁을 맴도는 것은 나를 구하다 목숨을 잃은 엄마니까. 나의 하나뿐인 가족이니까.......
어떻게 해야 그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확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어지럽게 뒤엉키는 말들이 목구멍을 턱 막아버렸다.
죽은 가족을 편히 보내주지 못할망정, 차마 함께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다가올 시선과 반응이, 줄곧 외면하고 있었던 현실을 마주 보게 하는 김석영이 두려웠다. 그의 직설적인 시선과 말을 들을수록 윤재하는 스스로의 이기성을 깨닫곤 했으므로. 제 미련과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해 발목을 붙잡힌 모친을 줄곧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이 윤재하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냥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될까요."
아직은 털어놓을 준비가 안 됐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이젠, ......정말 알아요. 이곳에 있는 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하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해요. 당장은 힘들어요."
하지만 외면해왔던 현실을 마주하게 된 이상, 윤재하는 이제 형체와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가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도록 제가 더 의연해져야만 한다는 것도. 이젠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도.
"보내주겠다는 말이야?"
"네. 그래야 하니까요. 너무 늦었지만......."
"너는 아니라고 믿고 있지만, 만약 그게 정말 네 몸을 빼앗았던 악귀라면. 나는 없애는 수밖에 없어."
"......그럴 일 없을 거예요."
"그래. 나 역시 그러길 바라고 있어."
마음이 흔들려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끝끝내 떠나보내지 못해 제 손으로 보내버리지 않기를. 김석영 역시 바랐다.
"하지만 네 말만 믿고 있을 순 없어. 나는 그게 악귀가 아닐 거라고 확신하지 않거든. 네 마음이 어떻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둘 거야.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네 몸을 뺏었던 놈은 가볍게 넘길 만한 존재가 아니었어. 이곳의 영가를 흡수한 것도 그놈이었고."
아, 등줄기를 타고 오르던 서늘함의 주인이 김석영이 말하는 악귀였던 거구나. 그런데 언뜻 형체의 기운이 묻어나고 있었던 건....... 어렴풋하게 떠오른 기억에 윤재하의 낯이 사색이 되었다.
"......."
그래, 미약하긴 했으나 분명 형체의 기운이 느껴졌었다. 그때 나타난 게 형체가 아니라 악귀였다면, 정말 터의 영가들을 삼켰던 악귀가 나타난 것이라면 그 속에 형체도 포함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방금...... 영가들을 흡수했다고 했죠. 얼마나 삼킨 건지, 어떤 영가들인지 알 수 있어요?"
"비교적 최근에 삼킨 거라면 어느 정도는 구별이 되지만, 이미 형태를 잃고 흡수된 것들은 알 수 없어. 그보다 왜 그래. 너, 표정이......."
"의식을 잃기 전에 언뜻 기운이 느껴졌어요."
"무슨 기운."
"제 곁에 있어 주던 사람의 기운이었어요. 미약해서 확실하진 않지만, 영가를 집어삼켰다면, 그렇다면......."
공황이 온 듯 제 옷자락을 쥔 손끝이 덜덜 떨렸다. 두려움에 질린 얼굴을 바라보며 숨을 삼킨 김석영이 윤재하의 어깨를 쥐었다. 단단한 어깨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네 말대로일 수도 있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화, 확인해봐야겠어요. 저를 찾아 돌아다닌 걸 수도 있으니까, 저택에 내려가서 확인해볼래요. 돌아왔을 수도 있어요."
제 어깨를 감싼 손을 부여잡은 윤재하가 다급하게 말했다. 절박하게 붙잡는 손길을 응시하던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려가서 확인해보면 돼."
"그럼 지금......."
"하지만."
말을 끊어낸 김석영이 제 손등을 덮은 온기를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설령 그것이 정말 악귀에게 삼켜졌다면, 나는 그걸 없애버릴 거야. 없애지 못한다면 저승에 보내서라도 이승에서 사라지게 만들 거야."
"......."
"그러니 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거야. 모든 게 너와 나의 기우였고 그 역시 온전하게 존재해서 네 손으로 직접 보낼 수 있길 바라지만,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나는 분명 그렇게 할 테니까."
흔들리는 시선을 마주하며 김석영은 말했다.
"모른 채 넘어가주기엔 너는 이미 너무 많은 걸 침범했고, 내가 있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니 나는 그냥 너를 내버려둘 수 없어."
"......."
"대답은 필요 없어. 통보하는 거니까."
이제 가자. 단단히 얽매인 손을 잡아끌며 김석영이 말했다. 윤재하는 온갖 감정에 뒤엉킨 마음을 헤아려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제 손에 닿는 미약한 온기를 의지하며 걸음을 뗐다.
* * *
저택엔 아무것도 없었다. 저로 인해 숨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며 김석영이 잠시 자리를 비워주었으나 형체는 윤재하의 애타는 부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운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사이 김석영은 남은 영가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악귀에게 삼켜진 것인지, 도망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저택을 떠돌던 영가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이곳은 저승으로 향하는 입구이기에 터의 기운이 강하다. 자연스레 망자들을 그들이 향해야 할 곳으로 이끌기에, 떠날 준비가 된 망자들은 터의 기운을 견뎌내며 저승으로 떠났다. 그렇지 못한 것들은 이승에서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달아나기만 했다.
드물게도 떠나지 않고 머무른 것들이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이 이곳에서 난 자들이거나 타고나게 기가 강한 망자들이었다. 개중에선 아주 오랜 세월을 보낸 것들이 있었고, 김석영은 새벽에 마주한 악귀에게서 그들을 보았다. 터와의 상성이 깊은 영가들을 집어삼켰으니 악귀 역시 상성을 지니게 됐을 가능성이 컸다. 골치 아픈 일이었다.
게다가 이승을 어지럽히며 산 자들을 해치려는 악귀들은 이곳을 기피할 터인데, 윤재하가 등장하면서 모든 일이 벌어졌다. 강한 힘을 가진 것들은 사람의 행세를 하며 산 자들의 눈을 어지럽히고 마음의 틈을 파고드는 데에 능숙하다. 빈틈은 누구에게나 있다. 아무리 강한 영기를 지닌 윤재하라 할지라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보다 불안정했을 어린 나이에 마주한 거라면.......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망자와 악귀가 서로 다른 이라면 악귀는 대체 언제부터 윤재하를 노린 걸까. 손목의 귀어가 사라진 시점에서 몸을 빼앗긴 게 단순한 우연일까. 희미해진 귀어는 분명 그곳에 깃든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고, 그것의 역할이 악귀를 막아주는 것이었다면.
악귀는 분명 윤재하의 주변을 맴돌며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귀어가 사라지기를.
그리고 분명,
「......이제 알겠다. 이제 기억났어. 그래, 너였구나. 너였어.」
저를 아는 듯한 말을 했었다. 그건 그저 달아나기 위한 혀 놀림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
침잠된 표정으로 한숨을 삼키던 윤재하가 저택을 나섰다. 시선은 자연스레 김석영을 찾았다. 새하얀 눈밭에 서 있는 그는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 흐트러진 머리칼에 가려져 있던 그의 표정이 밀려오는 삭풍에 의해 드러났다. 윤재하는 단번에 달려 나갔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
김석영은 시야를 침범한 주인을 마주 보았다. 분명 본인의 처지만 해도 감당하기 힘들 텐데, 윤재하는 어느새 걱정 어린 낯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어지간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나 보다. 옅은 한숨을 삼킨 김석영은 부러 평연한 어조로 되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해?"
"왜냐니, 표정이......."
굳어져 있다는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왼쪽 손목을 감싼 김석영의 서늘한 체온 때문이었다. 제게로 끌어와 혈관 어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새벽에 그 일이 있고 나서 너를 살폈을 때. 네 손목에 적혀 있던 귀어가 사라진 상태였어."
"......그게 뭔데요?"
"말 그대로야. 귀어(鬼語). 귀신의 말이야."
윤재하의 낯에서 핏기가 가셨다. 무언가 그려져 있다고 했던 게, ......귀신의 말이라고?
"그게 왜 내 손에......."
"글쎄. 나도 그게 궁금해."
"그런데 방금, 그게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어요?"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흐릿하던 문양을 떠올리며 엄지 끝으로 덧그려보았다.
"그래. 사라졌어. 아마 저승에 갔던 게 문제가 됐나 봐."
"아, 그래서......."
"이게 사라지자마자 몸을 빼앗겼지."
흠칫 굳어버린 낯을 바라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게 귀어라는 건 알지만 뭐라고 적혀 있는진 읽을 수 없었어. 말 같은 건 모르거든. 뜻을 알 수 없으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
"......네."
"내가 한번 물은 적 있을 거야. 영가에게 해코지를 당한 적 있는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적이 있는지."
"......네. 기억나요."
"다시 한번 물을게. 정말 없어?"
다갈색의 눈 위로 혼란이 깃들었다. 경직된 눈매를 흩트리며 숨을 삼킨 윤재하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모르겠어요, 이젠."
김민재도 그렇고, 오늘 새벽의 일만 해도 그렇다. 악의를 가진 접근을 연달아 겪고 나니 이젠 스스로의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제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속을 조여오던 감각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찰나, 김석영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없을 수도 있겠네."
"그게 무슨......."
"직접적인 원한을 사지 않아도 그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고.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래, 그냥 눈에 띈 것이었을 수도 있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악의를 가진 것이 달라붙을 수 있어. 드문 일은 아니야. 운이 나쁜 거지. 게다가 그건 날 아는 것 같기도 했어. 나로 인해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단 걸 배제할 순 없지."
"......."
"그러니 벌써부터 네 탓으로 돌리지 마. 널 탓하려고 물었던 게 아니라 혹시 모를 단서를 찾으려던 것뿐이니까."
말을 마친 김석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제 말로 인해 말간 낯이 일그러지는 게 싫어서 말을 덧붙였는데 소용없었다. 윤재하는 이미 울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 눈이 크고 맑아, 빛을 받을 때마다 눈물이 어린 것 같은 착각을 주던 윤재하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 광경에 잠시 숨을 멈췄다. 넘칠 듯이 어른거리던 눈물은 김석영이 잡은 손을 놓는 순간, 또르륵 흘러내렸다. 뒤이어 잠시 떨어졌던 체온이 윤재하에게 단단히 붙잡혔다.
아직 미세하게 남아 있는 멍 위로 타고내린 눈물 자국을 따라가던 김석영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대목이 널 울린 건데."
한숨을 삼킨 그가 붙잡히지 않은 손을 뻗었다. 눈가를 향해 엄지를 가져다 대자, 아슬하게 달려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엄지 끝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눈가를 훔쳐주었다. 스쳐 간 손끝을 쫓아 얼굴을 기댄 윤재하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요."
"......."
존재 자체도 몰랐던 귀어와 악귀의 존재. 그리고 사라진 형체에 대한 불안감까지. 한꺼번에 감당하기엔 벅찬 일들이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 모든 게, 다 저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모친을 죽음으로 이끌고, 죽어서도 놓지 못한 것도. 김민재가 악의를 가진 것도, 의미를 알 수 없는 귀어도. 사실 제게 주어진 저주 같은 건 아닐까. 저의 존재 자체가 문제였던 건 아닐까.
비겁하게 도망치면서 화살을 돌리고 싶은데 돌릴 방향이 없었다. 화살의 끝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제게 향하고 있으므로. 그걸 마주하는 게 사실은 괴롭고 버거운데, 덤덤하게 토해낸 김석영의 말이 잠시나마 숨을 트여주었다. 그냥 큰 이유 없이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이, 운이 나쁜 거라는 성의 없는 문장이 한순간 큰 위로로 다가왔다.
그의 말처럼 그냥 운이 나빠서 일어난 일이기를, 제 잘못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꾸만 눈물이 맺혔다.
"......서럽게도 우네."
꼭 눈물샘이 고장 난 것 같았다. 끊임없이 차올라 흐르는 것에 손끝이 흥건하게 젖어버린 김석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옷소매를 끌어내린 그가 쉴 새 없이 흐르는 물기를 훔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던가."
"......."
"너 참, 손이 많이 가."
타박하는 말이 아니란 건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무시하면 그만인데, 문제는 무시가 안 된다는 거지."
"왜요?"
낮게 잠긴 목소리로 윤재하가 물었다. 바람 새는 웃음을 토해낸 김석영이 대꾸했다.
"글쎄. 밥 정이라도 들었나 보지."
옷소매의 표면이 따가웠던 건지 터진 눈물 탓인지,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것에 김석영이 손을 내렸다. 멀어지는 손끝을 애달프게 바라본 윤재하는 줄곧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이 깃드는 것을 느끼곤 시선을 들었다. 눈길이 맞닿자 김석영이 말했다.
"올라가자."
단단하게 이끄는 힘을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젠 익숙하게 느껴지는 김석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윤재하는 가빠오는 숨을 삼켜냈다.

তেওঁ মইOnde histórias criam vida. Descubra ago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