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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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오려나."
요즘의 윤재하는 어딘가 이상했다. 부쩍 멍을 때리는 게 잦아졌고 무언가 조급한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곤 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도통 대답해주질 않았기에, 김석영은 그저 불안에 떠는 듯한 남자를 안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머리칼과 등을 쓰다듬어주면 잠시나마 불안이 가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오늘 아침엔 조금 나아진 낯을 하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 윤재하가 불쑥 말했다. 형체를 찾으러 나가봐도 되냐고.
"지금?"
왜 하필이면 오늘일까. 씁쓸함을 감추고 태연하게 물어보자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렇게 가버린 후로, 내내 마음이 걸려서요. 잠깐이라도 찾으러 가보려고요."
"꼭 지금일 필욘 없잖아. 오늘 말고 내일 가. 날이 많이 추워."
"괜찮아요. 잠깐이면 돼요."
저답지 않게 만류하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윤재하는 완강했다. 가지 말라고 막을 이유가 없어서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일찍 들어오라고 말을 덧붙였고 윤재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온다고 했으면서."
한숨처럼 읊조린 김석영이 방 안의 물품들을 정리하던 찰나였다. 줄곧 기다리던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옅게 웃음을 매단 그가 몸을 일으켰다. 곧장 앞마당으로 나가보니 외출하고 돌아온 윤재하가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낯빛이 기이하리만치 창백했다. 다급하게 다가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어깨를 붙들고 바라보자 받아치는 시선 역시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극한의 공포를 마주한 것처럼 두려움에 떠는 것 같기도 했고 분노에 휩싸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음이 조급해진 김석영이 창백한 뺨을 어루만지려던 순간이었다.
"명이 짧다는 게 사실이에요?"
목이 졸린 것처럼 내뱉는 음성에 움직임이 멎었다.
"......뭐?"
"사실이에요?"
"윤재하, 너 그거 어디서......."
"아니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잖아요. 그죠?"
애써 입꼬리를 올린 윤재하가 손을 붙잡았다. 맞물리는 시선이 절박했다. 저를 안심시켜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거짓말했구나. 엄마를 찾으러 간다더니."
"대답해요, 형. 아니잖아요."
네 말이 맞다고.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도깨비가 널 괴롭히기 위해서 만든 거짓말이라고.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늦게 배운 어리광을 놀리듯이 말하면서도 끝내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던 평소처럼. 그렇게 저를 안심시켜주길 바랐다. 하지만 되돌아온 건.
"맞아."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답변이었다.
"업을 이어받은 자는 명줄이 짧아."
"......얼마나요?"
"타고나게 주어진 기운에 따라 달라."
"......형은, 얼마나 남았는데요?"
참담한 눈을 마주한 김석영이 읊조렸다.
"글쎄."
"말해요!"
그의 어깨를 붙들고 소리친 윤재하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속이 타들어 가는 작열감에 숨을 쉴 수 없었다. 뒤틀린 호흡이 위태로운 소리를 냈다. 놀란 김석영이 손을 뻗었으나 거칠게 잡아챈 윤재하가 가슴을 들썩였다.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노려보면서 틀어막힌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말, 해요, 제발......!"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말해줘요, 제발, 제발......."
"말하면."
메마른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슬퍼할 거잖아."
지금도 이렇게 무너져내렸는데.
"......날짜까지 세면서 슬퍼할 필욘 없잖아. 네게 그런 고통까지 안겨줄 마음 없어."
"그럼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
"형을 보내야 한다고요?"
엉망으로 메인 목소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제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원망 어린 어조가 고통을 머금었다. 혼탁해진 눈이 김석영을 아프게 찔렀으나 그는 고통을 드러낼 자격이 없었다.
"괜찮을 거야."
그래서 부러 가볍게 말했다.
"어떻게 괜찮아요─!"
"......."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괜찮을 수 있어요?"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었는데. 사랑을 꿈꾸고, 행복이란 감정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대상을 영영 만날 수 없게 될 텐데, 도대체 제가 어떻게 괜찮을 수 있단 말인가.
"내 마음 알잖아요, 형은 다 알잖아요......!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이대로 말도 없이 떠날 생각이었어요? 나를 버릴 거였어요?!"
"아니야, 윤재하. 그런 게 아니......!"
"그럼 뭔데! 이게 날 버리려던 게 아니면 뭔데? 이럴 거면 왜 날 받아줬어요. 이렇게 두고 떠나버릴 거면, 그날 왜......!"
격양된 숨을 터뜨린 윤재하가 돌연 숨이 멎어버린 것처럼 아득하게 읊조렸다.
"......안아줬어요?"
"......."
"나는 형도......, 나한테 마음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부 내 착각이에요?"
"아니, 아니야."
김석영은 목이 졸린 듯한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이 맞다고, 착각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말라고....... 애처롭게 떨리는 뺨에 입을 맞추고 등을 쓸어내리고 싶었으나 고작 고개를 젓는 게 전부였다.
"그럼 나를 버리려고 했어요?"
"아니야."
"그럼 설명해봐요....... 다 들을 테니까, 전부 다 들어줄 테니까......."
붙잡은 손을 끌어와 얼굴을 묻은 윤재하가 속삭였다. 뜨거운 눈물이 얽힌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감정의 둑이 무너져 흐르는 것 같았다. 창백하게 굳은 낯으로 숨을 삼키던 김석영이 읊조렸다.
"기억을."
"......."
"지우려고 했어."
뻣뻣하게 고개를 든 윤재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악귀를 없애고, 이곳에서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려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
"기억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일도 없을 테니까."
위태롭게 고인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김석영이 눈가를 어루만졌다.
"지금 이 순간의 고통도 사라질 허상이 될 거야."
"......그럼 형은요."
미약한 음성이 숨결을 타고 흘렀다.
"형의 기억은요."
"가지고 떠날 거야."
"왜요?"
"......소중하니까."
지독하게 이기적인 말이었다.
"나에게도 소중해요."
"......."
"모조리 잊어서 편안해지는 것보다, 차라리 고통에 허덕이다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소중한 기억이에요."
"그러니까 더더욱 지워야 하는 거야."
"대체 왜요? 내가 왜 형을 잊어야......!"
"안 그러면 이렇게 최악만을 생각할 테니까!"
서늘하게 낯을 굳힌 김석영이 성마른 숨을 토했다. 처연한 얼굴로 설핏 웃어 보인 윤재하가 읊조렸다.
"내가 죽는 게 무서워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나도 그래요! 나도 형이 죽는 게 무섭다고요! 그러니까 죽지 말고 내 옆에 있어요. 내 수명을 줄 테니까."
숨이 턱 막힌 김석영이 아득한 눈을 했다. 집요하게 부딪히는 시선에 목이 졸린 그가 내뱉었다.
"......입 다물어."
"왜요. 사는 게 무서워요?"
"윤재하!"
"무서운 게 아니면 왜!"
처절하게 소리친 윤재하가 김석영의 어깨를 붙들었다. 슬픔을 넘어 악에 받친 듯한 얼굴로 제 울분을 토해냈다.
"도대체 왜 명을 가져가지 않는 건데요. 왜, 도대체 왜 형만!"
혼자서만 그리 미련하게 구는 걸까. 왜 좀 더.
"......주어진 삶을 받아들였을 뿐이야."
욕심내지 않는 걸까.
"늘릴 수 있는 삶이었어요."
"남 수명 깎아가면서까지 살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도대체 왜 살고 싶지 않은데요!"
철옹성을 마주하며 절규하는 이를 향해 비겁한 이기주의자가 말했다.
"......이승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니까."
"......."
이 사람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망연한 낯이 된 윤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어깨를 붙든 손이 떨려온다.
"그게 왜 끝이 아니에요?"
"윤재......."
"이후의 삶은 이후의 것이잖아요. 지금의 삶은 지금만 누릴 수 있는데, 왜....... 이승에서의 삶을 욕심 내지 않아요?"
"......."
"그건 인정이 아니라 회피잖아요."
무표정하게 굳어버린 남자는 고장 난 인형 같았다. 툭, 그의 심장께에 얼굴을 묻은 윤재하가 애원했다.
"......욕심내주면 안 돼요?"
"......."
"나랑 같이 살면 안 돼요?"
"......."
서럽게 흐느끼면서 매달렸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져줘요. 한 번만 꺾어줘요, 내 말 들어줘요. 제발......."
사랑한다고. 이번 한 번만 제게 져달라고. 그럼 앞으로 뭐든지 하겠다고. 처절하게 애원하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옷자락을 썩은 동아줄처럼 붙들고 살려달라며 애걸했다.
그 목소리, 숨결, 몸짓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김석영을 난도질했다. 파도처럼 덮쳐오는 슬픔의 무게에 덜컥 숨이 막혔다. 기묘하게 일그러진 낯으로 어깨를 움츠린 김석영은 저도 모르게 윤재하를 밀쳐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의 세상이 무너져내린 걸 마주했다. 본능이 앞선 행동의 대가는 가혹했다.
"아......."
목 졸린 숨이 터졌다. 상처받은 얼굴을 본 순간, 비겁한 이기주의자의 두려움은 진정한 두려움 앞에서 무너졌다. 빛을 잃은 눈은 이미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걸 마주한 김석영의 심장도 멎어버렸다.
......재하야.
소리가 되지 못한 이름을 뻐끔거리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허공에 멈췄다. 손길을 피해 몸을 일으킨 윤재하가 마른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
"지금은 형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
윤재하는 우두커니 멎어버린 남자를 두고 떠났다.
* * *
부릅뜬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염없이 흐르는 물기는 턱 끝에 고이지도 못하고 추락했다. 안구가 빠질 것처럼 아려왔고 머릿속은 진창이 된 것만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발걸음이 저택을 지나쳤다. 그렇게 가파른 경사를 내려가던 그때.
"......."
담벼락 아래에서 웅크린 형체가 고개를 들었다.
「......재하야.」
비록 제 괴로움의 일부분일지라도. 기나긴 시간을 함께 해온 그 얼굴을 본 순간, 윤재하는 맥없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다. 주저앉아 설움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 * *
망막에 맺힌 건 누군가가 떠나간 빈자리였다. 홀로 시간이 멈춰버린 남자의 곁에서 발걸음이 멎었다. 메마른 입술을 벌린 김석영이 목소리를 냈다.
"왜 그랬어요."
갈라진 숨소리에서 지독한 원망이 어렸다.
"왜 말했어요."
서리 낀 낯을 덤덤하게 바라보던 남자가 말했다.
"처음엔 그저."
"......."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아이가 안타까워 적선한 친절이었으나."
"......."
"불현듯, 친절을 걷어찬 아이에게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해두지."
호선을 그리는 입매와는 달리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아이가 널 이곳에 붙들어둘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넌 그 아이에게 약하니까. 애원하고 매달리는 그 아이를 외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
"......."
"나는 네 생각보다 정이 많아서. 제법 너를 아끼거든."
"입 닥쳐요."
뒤틀린 목소리가 허공에 맺혔다. 형형하게 일그러진 눈이 칼날처럼 쏟아졌다.
"당신의 그 어리석은 입놀림 때문에."
"......."
"윤재하는 또다시 혼자가 된 고통을 떠안게 된 거야."
"네가 없으면 어차피 그 앤 혼자야."
속 모를 웃음을 지은 남자가 말했다.
"적어도 지금처럼 고통받진 않았겠지. 버려졌다는 기분을 느끼지도 않았겠지!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갈 수 있었어. 슬픔도 고통도 모른 채로 평범하게 살 수 있었는데......!"
"어차피 기억을 지울 거라면 지금의 고통도 사라질 텐데 뭐가 걱정이지?"
남자가 말을 잘랐다. 격양된 감정을 쏘아대던 혀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정말 네가 기억을 지우기로 마음먹었다면 그저 지우면 그만인 것을. 그럼 네 바람대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데 왜 그렇게 화를 내지?"
멈춰버린 낯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남자가 비소를 머금었다.
"아, 네 마지막 추억이 엉망이 되어서 화가 난 건가?"
혀끝으로 만든 칼날이 김석영을 관통했다.
"......."
사고의 회로가 멈춰버린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막상 짓눌려보니 숨이 막히던? 타인의 애정이 네 예상보다 무거워서 감당하기 벅차던가?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기를 바랐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어서 화가 난 건가?"
"......."
타인에게 속내를 들키는 건 뼈아픈 일이었다. 감추고 싶은 것일수록 더 그랬다. 하지만 들쑤셔진 자리를 직면함으로써 뒤엉킨 마음이 선명해지기도 한다. 김석영은 인정해야만 했다.
"......감당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어요."
메마른 얼굴을 바라보던 남자가 물었다.
"무엇을?"
"그 아이의 애정이요."
시간이 정해진 삶에 불행을 느껴 본 적은 없다. 삶보다 죽음이 더 익숙해서일지도 모른다.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에도 부모의 영혼부터 보았고, 죽음을 인지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만 가득한 환경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는다. 명줄의 길이만 다를 뿐, 그 끝은 모두 죽음이란 형태를 띤다. 하지만 죽음이란 건 어디까지나 이승에서의 기준일 뿐이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한다는 걸 아는 김석영으로선 현재 주어진 제 삶을 절박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그건 그에게 주어진 환경의 탓도 있었으나 타고난 성향도 컸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죄인의 핏줄이란 업(業)을 등에 진 이들이 대가로 수명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주어진 삶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이의 피를 빨아가면서까지 생을 연장하는 것을. 김석영은 그것이 삶의 규율을 어긋내는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다짐했다. 저는 그러지 않겠다고. 애초에 그는 제 수명에 만족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죽음이란 공포와도 같고, 이별은 슬픔을 동반했다. 가업으로 인해 남겨진 자들의 삶을 배운 김석영은 인정해야만 했다. 이른 여행을 떠날 그로 인해 슬퍼할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것을. 가족의 연으로 묶인 이들은 어쩔 수 없으나 그 외에는 제가 조절하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곁을 주지 않으면 될 일이니까.
다행히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제 상황이 우선이었고, 관계의 희로애락은 굳이 직접 겪지 않아도 늘 마주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문득 곁을 바라보니 한 사람이 있었다. 하필 생에 처음으로 호의를 부려본 대상이었다. 쉽사리 지나쳐 보내지 못한 건 그래서였을까.
이끌리던 눈길과 불쑥 찾아온 동질감과 호기심. 안쓰러움과 사랑스러움. 이 모든 걸 처음 느끼게 해준 한 아이. 그에 대한 기억은 김석영의 생에서 가장 특별한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거였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지나갈 바람을 붙든 게 저일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은연중에 느껴지는 애정을 달게 받아 마시면서도 외면하고 싶었고, 내 온 신경이 그 녀석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억누르지 못했어요. 그 애가 예쁘고, 사랑스럽고, 애틋하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애초에 나는 거부할 수 없었던 거예요."
창백하게 메마른 낯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욕심이 생기더군요. 죽기 전에 한 번쯤은 타인의 애정을 온전하게 느껴봐도 괜찮지 않을까. 애틋한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가도 되지 않을까. 한 번도 무언가를 욕심내본 적 없으니 이번만큼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게 그 애한테 희망처럼 여겨질 거란 거 알고 있으면서도, 헛된 희망이었다는 걸 깨닫기 전에 기억을 지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결국은 그 이기적인 욕심이 윤재하를 상처입혔다.
"내 삶에 대한 다짐을 깨트리려는 그 아이가."
"......."
"상처 입은 그 아이의 마음이, 감히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무겁고 거대해서....... 문득 숨이 막히고 두려웠는데."
"......."
"그보다 두려운 건, 그 애의 마음을 영영 잃게 되는 거란 걸 깨달았어요."
"그런데도 순순히 죽겠다고?"
남자의 물음에 말을 잇지 못하던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의 무게를 감당하고 싶지 않아요. 그게 재하의 것이라면 더더욱."
스쳐 갈 사랑 따위에 그가 제 삶을 빼앗기길 원치 않았다. 생의 끝자락에 다다를 때가 되면 분명 후회할 테니까. 김석영은 제 존재가 윤재하의 후회는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니 당신은 괜한 짓을 한 거예요. 나는 절대 그 애의 생을 받지 않을 거고, 그로 인한 모든 원망은 다 감당할 거니까."
"결국 내가 네 마지막 기억을 망쳐버린 셈이 되는 거구나."
남자가 힘없이 읊조렸다. 말속에 가라앉은 자괴와 씁쓸함을 느낀 김석영이 말을 이었다.
"내게 미안하다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뭐지?"
"내가 완전히 떠난 후에, 나 대신 재하의 귀문을 닫아줘요."
"왜 기억을 지울 때 닫지 않고?"
"귀문을 닫게 되면 재하의 몸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더럭 낯을 굳힌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읊조렸다.
"얼마 전에 차사가 찾아왔거든요."
"곧 보자더니. 이런 의미였습니까."
「난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거든. 그러게, 내가 말했잖나.」
검은 그림자가 그에게 말했다.
「제 명에 못 살고 오겠다고 말이야.」
"......틈새에서의 일 때문입니까?"
「그래. 기운을 지나치게 소모했던 탓에 명줄이 타들어버렸어.」
"얼마나 남았는데요."
「지금으로부터 닷새.」
"명줄이 타들었다더군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온전한 형태일 때 악귀를 없애고 싶었지만, 그놈이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남자는 모든 의미를 파악했다. 형편없이 일그러진 입에서 기가 막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지금, 죽고 난 뒤에 윤재하의 몸에 들어가서 악귀를 유인하겠다?"
"최후의 방법인 거죠."
영가를 소멸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긴 했으나, 그게 김석영의 주된 역할은 아니었다. 하물며 신을 받는 자도 아니니 신의 기운을 빌려 생의 모든 영역을 파악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작정하고 모습을 숨겨버린 악귀를 유인할 방법도, 시간도 더는 없다.
하지만 주어진 생을 끝낸 후라면 방법이 생긴다. 혼의 형태로 육신에 빙의하는 것. 그렇게 육신과 혼에 새겨진 생의 기억을 느낀다면 악귀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악귀가 홀로 남은 윤재하의 앞에 나타날 때 함께 저승으로 끌어내면 되는 것이다.
"기억을 지워내도 한번 맞닿은 상성 때문에 날 거부하진 않을 거예요. 내 기운을 누르고 재하의 몸에 숨으면 악귀도 쉽사리 알아챌 순 없을 테고요. 분명 윤재하가 혼자가 되었을 때를 노리고 있을 테니까, 때를 노려서 함께 저승으로 끌고 가면 되는 거죠."
"그러니 악귀를 끌고 저승으로 떠난 후에 윤재하의 모든 귀문을 닫아달라? 그 아이가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정확해요."
침잠된 얼굴을 쓸어내린 남자가 한숨처럼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김석영은 흐린 얼굴로 희미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애정이 가는 것엔 굳이 손길 한 번 더 가는 법이니까."
비록 제 방식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나한텐 그게 윤재하인 것뿐이에요."

তেওঁ মই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