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걷던 김석영이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내리깐 윤재하의 낯이 무표정했다. 영기를 타고난 만큼 감각 또한 예민한 편이라 저를 향한 시선을 귀신같이 눈치채는 편인데도 내리깐 눈꺼풀은 올라올 기미가 안 보였다. 생각에 잠긴 것을 방해할 마음은 없었기에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지만, 자꾸만 신경이 뒤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을 마무리하고 경계에 돌아온 김석영은 아이와 함께 있는 윤재하를 발견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조잘거리는 아이의 옆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심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무탈한 모습을 확인하자 안도감이 일었다. 비록,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그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헛, 전령 나리!」
제 앞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에 고개를 든 아이가 화들짝 몸을 떨었다. 슬쩍 김석영의 눈치를 보던 아이는 윤재하에게 손을 흔들더니 후다닥 달아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 윤재하는 아무런 말 없이 김석영을 응시했다. 경직된 입매가 긴장했음을 나타냈다. 제가 주의를 준 대로 긴장을 놓지 않는 행동에 만족감을 느낀 김석영이 입을 열었다.
"야옹."
잔뜩 굳어 있던 윤재하의 얼굴에 균열이 생겨났다.
「.......」
다갈색의 눈동자가 혼란을 머금고 흔들렸다. 야옹이라니. 저게 저 건조한 낯을 한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인가. 윤재하는 이게 바로 김석영이 주의했던 망령들의 장난질이라는 걸 깨달았다. 단번에 날을 세운 그가 눈을 치켜뜨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거린 김석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야옹."
「.......」
대꾸도 없이 인상을 구기는 윤재하의 모습에 도리어 의아해진 건 김석영이었다. 신호를 못 알아듣나 싶어서 이번엔 대놓고 말했다.
"신호 말이야. 신호."
「......아.」
얼빠진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비를 가리키던 신호였구나. 비로소 당황을 갈무리한 윤재하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나, 비.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김석영이 손을 내밀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의성어를 뱉었다는 자각조차 없는지 평연한 표정이었다. 설핏 웃은 윤재하는 서늘한 체온을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
"......."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신호를 주고받을 때만 해도 짧게나마 웃던 윤재하는 금세 기운이 가라앉았다. 이승의 입구로 돌아가는 내내 말도 없이 잠잠했다. 빛이 쏟아지는 문을 지나 고택에 도착하고서도 윤재하의 낯은 여러 감정에 물든 채였다. 복잡한 마음이 육체에도 전달됐는지 눈을 감은 육신의 입매 또한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깊은 상념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으나 언제까지고 육체가 분리된 상태로 있을 수도 없기에, 김석영은 멍하니 서 있는 윤재하를 이끌었다.
"돌아가야지."
「아....... 네.」
육체의 입술을 벌린 김석영이 입안의 환을 확인했다. 새하얗던 기체가 사라지고 빈 유리 환만이 존재했다. 일회성의 용도를 다한 그것이 자연스레 혼쥐의 기운을 이끌었다. 분리된 육체가 원래대로 돌아가고, 굳게 닫힌 눈꺼풀이 조심스럽게 벌어졌다.
깜박, 깜박.
눈을 든 윤재하가 입안의 유리 환을 뱉어냈다.
"......까매졌네요."
"일회성이라 그래. 쓸모를 다했다는 의미야. 이제 없애야 하니까 이리 줘."
"아......."
내민 손을 멀뚱히 바라보던 윤재하가 제 손에 올려진 환에 시선을 옮겼다. 줄곧 입안에 있었던 탓에 표면이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당황한 윤재하가 황급히 소매로 환을 닦아내자, 김석영으로부터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별스럽긴. 바로 태워버릴 건데 뭐 하러 그래."
"그래도 침 묻었으니까......."
대꾸한 대상이 제 침을 삼킨 상대라는 걸 깨달은 윤재하가 돌연 입술을 짓눌렀다. 왜 저런 얼굴이 되었는지 단번에 눈치챈 김석영이 옅게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윤재하는 결국 환을 넘겨주었다.
손에 쥔 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석영이 손끝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살아 있는 자는 온기조차 느낄 수 없는 푸른 불꽃이 손끝을 타고 올랐다. 곧 아스라한 연기의 형태가 되어 환을 감싼 그것은 단숨에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가볍게 손을 털어낸 김석영이 육체로 돌아온 윤재하를 살폈다.
"몸은 어때?"
"괜찮아요."
"다행이네. 나중에라도 어딘가 이상하면 말해줘야 해. 사소한 증상도 가벼이 여기지 마. 너 혼자 속단은 금물이야."
"네."
"좋아. 나가자."
고택을 빠져나오자 안채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청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던 윤재하의 분신이 인기척을 느끼곤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다녀오셨어요."
"아, 윤재하."
"......."
분신을 향한 이름에 몸을 움찔한 윤재하가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무언의 불만을 고스란히 받아낸 김석영이 분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윤재하를 바라본 그가 불퉁한 낯의 원인을 파악해냈다.
"왜, 불쾌해?"
"......조금요."
"그래. 조심할게."
당사자가 불쾌하다면 어쩔 수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을 수용한 김석영이 안채의 대청으로 향했다. 밤하늘을 응시하며 얌전하게 앉아 있던 분신이 제 앞에 선 남자를 응시했다.
"역시."
다시 봐도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다. 이대로 없애버리기엔 아쉬울 만큼. 분신의 곳곳을 뜯어보며 생각에 잠긴 김석영이 돌연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수신목록의 최상단에 자리한 대상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을 넘기기도 전에 연결된 대상은 의외로운 투로 말을 건넸다.
―전화가 잦네. 내가 보고 싶기라도 한가?
"설마요."
―그럼 또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을까. 지금 당장 방편 내놓으라는 말이면 끊을 거야.
"분신 이야기에요. 내버려두면 얼마나 가나 싶어서."
―흠, 글쎄. 대체로 분신은 사용 용도나 방법에 따라 기한이 다르지만, 그 녀석이면 못해도 닷새는 갈 듯한데. 아해의 손톱으로 만들었으니 더 오래 갈 수도 있고. 워낙 기운이 좋은 아이다 보니.
"사후 처리는요."
―때가 되면 저 알아서 몸을 태워 멸할 거야. 왜, 더 쓰려고?
"생각해보니 악귀의 눈속임으로 쓰면 되겠다 싶어서요. 아무튼 용건은 끝났어요.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재촉하긴.
통화를 끝내자 윤재하가 바짝 다가왔다. 흘끔 분신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린 그가 물었다.
"눈속임이라뇨?"
"잘 만들어졌는데 아깝잖아. 널 대신해서 이 아이를 저택에 둘 생각이야. 신체 일부를 깎아 만든 것이니, 미약하지만 네 기운도 묻어나서 눈속임으로 쓰기 좋아 보이거든. 여기에 내 기운을 묻혀둔다면 저택 내에서의 행동 정도는 파악할 수 있어. 누군가가 다가와 손을 뻗으면 알아차릴 수 있겠지. 악귀뿐만 아니라 네가 찾아 헤매는 망자까지도."
망자가 언급되자 다갈색의 눈동자에 빛이 스쳤다. 제 앞에선 아닌 척을 해도 줄곧 조급하고 불안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참아준 윤재하에게 김석영은 내심 대견함을 느꼈다.
"언뜻 눈치챘겠지만 네 몸엔 구멍이 나 있는 것과도 같아. 악귀가 몸을 빼앗은 흔적이지. 네 영기가 억누른 탓에 완벽하게 몸을 빼앗긴 건 아니지만, 얕게나마 길이 나버린 이상 두 번째는 더 쉬울 거야."
"의식을 잃었을 때도 영기가 거부했다면....... 의식을 잃지 않게, 제가 중심을 잘 잡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맞아. 네 의지가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말했다시피, 아무리 네 영기가 뛰어나다 해도 너는 인간이야. 한계는 반드시 와. 그때를 대비해서 영기의 틈새를 막아야 하는데, 어느 정도 방안은 나왔어. 네 안에 막을 세울 거거든."
"막이라면......."
"일종의 보호막을 세우는 거지. 몸에 다 겹의 보호막을 세워서 악귀가 단번에 몸을 빼앗지 못하게 하는 거야. 하나를 부수더라도 또 다른 막을 부숴야 하니 버틸 시간을 벌 수 있을 테지. 그 안에 내가 악귀를 꺼내서 없애버리면 돼."
아, 인두겁을 뒤집어쓴 도깨비의 방문은 이것을 위한 거였나보다. 예기치도 못한 상황의 진전에 놀란 눈을 깜박거렸다.
"아......."
악귀의 위협에서 잠시나마 버틸 힘이 주어진다는 건 지금처럼 안채에만 갇혀 있지 않아도 되는 걸 의미했다. 이제부턴 형체를 찾기 위해 직접 움직일 수 있다. 가슴께에 불쑥 차오르는 것을 억누른 윤재하가 떨리는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보호막을 건드는 동시에 내가 알 수 있어야 하니까 아마 너와의 연결 수단을 만들 거야. 그건 그자가 오면 확인할 수 있겠지. 어찌 됐든 그땐 네 망자를 찾으러 다녀도 돼. 단 네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내가 달려갈 수 있도록 최대한 가까운 동선 안에서만. 그리고 내가 이승에 없을 때도 안 돼. 널 도울 수 없으니까."
"네. 이해했어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말끝에 떨림이 묻어났다. 윤재하는 못내 안도하고 마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덤덤하게 뱉어내는 김석영의 말들을 주워 담으며 그가 만들어주는 위안에 기대어 마음을 놓으면서도,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움만 받게 되는 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저는 또 이렇게, 받고만 있다.
"잠깐 표정이 풀리는가 싶더니. 또 무슨 생각을 하길래 굳어졌을까."
물끄러미 응시하던 김석영이 말했다.
"아....... 아니, 아니에요."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젓자 바라보는 시선의 무게가 더해졌다. 제 속을 낱낱이 파헤쳐버릴 것 같은 시선에 눈길을 피한 윤재하는 끝내 입을 열고야 말았다.
"......그냥, 왜 그렇게까지 해주는 걸까, 싶었어요. 난 형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갚기는커녕 자꾸만......."
"말했던 것 같은데."
"......"
"내가 있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고, 네 몸을 빼앗은 악귀가 날 아는 듯이 굴었어. 나로 인해 네가 휘말린 걸 수도 있으니 너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 내 영역 안에 나타났는데 어떻게 무시하지?"
너라면 그럴 수 있겠냐고 묻는 말에 윤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러니까 일방적인 도움을 받기만 한다고 생각하지 마. 나 역시 네가 있어야 그걸 잡을 수 있으니."
"......네, 고마워요."
"자, 그럼 이제 이 아이를 저택에 데려다 놓자. 혹시 오늘은 네 망자도 와있을지 모르잖아. 확인해야지."
말을 끝낸 동시에 고개를 돌린 김석영이 분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자. 나직하게 읊조린 말에 시선을 든 분신의 표정이 어딘가 오묘했다. 멀거니 바라보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며 손을 까딱 움직이자 진짜 윤재하와는 달리 서늘한 체온이 부딪혔다.
'......굳이 손까지 잡을 필요가 있나?'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는 두 인영에 윤재하의 기분이 언짢아졌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껍데기가 왜 저런 얼굴로 김석영을 바라보는 건지. 도대체 왜 저런 눈을 하는 건지.......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단순히 가짜라는 거부감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속을 빠듯하게 조여오는 이 불쾌감의 원인을 헤아리는 게 아직은 어렵기만 했다. 그때, 가슴께에 콕콕 박힌 거슬림에 미간을 찌푸리던 윤재하가 불쑥 몸을 굳혔다. 잠시 잊고 있던 말을 상기한 것이다.
"잠깐, ......기운을 묻힌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그래야 내가 알 테니까."
"......."
그는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기운을 묻힌다는 건 입맞춤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제게 그러했듯 저 분신에게.......
"......입 맞추는 거예요?"
"음?"
"기운을 묻힌다는 건....... 입 맞추겠다는 거 아니에요?"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던 김석영이 제 앞의 분신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윤재하는 시선을 제게 돌리려는 것처럼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낯을 굳힌 채 바라보는 표정은 마치 김석영의 눈길이 원래 있어야 할 장소는 여기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기분이 오묘해진 김석영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윤재하는 입술을 잘근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요."
"뭐를. 키스를?"
"네. 하지 마세요."
"왜?"
"그야......."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달싹거리던 윤재하가 미약하게 가슴을 들썩였다. 호흡이 흐트러진 모양이다. 평소였다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을 그가 고집스레 김석영을 마주 보았다.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 삐쭉이는 입술 너머로 미약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건 지푸라기로 만든 가짜에요."
"나도 알아."
"지푸라기로 만든 가짜라니까요? 짚은 따갑고 무엇보다 위생이......."
아, 진짜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혼란한 마음과는 달리 이성만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건만, 둘 다 엉망진창이라 입 밖으로 내뱉는 말도 곤죽이었다.
다갈색의 말간 눈 근처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바라본 김석영이 맞잡은 분신의 손을 엄지 끝으로 문질렀다. 가짜라는 걸 증명하는 듯 온기 하나 없이 차갑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윤재하의 말처럼 따갑지는 않았다. 제게 시선이 비껴가자 옷소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길을 되돌린 김석영이 부러 가볍게 대답했다.
"위생까지는 모르겠지만 따갑지는 않은데."
"아, 그냥, 그냥 좀......."
하지 마요....... 말끝을 늘어뜨려서인지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 같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도 안쓰러우리만치 조급해 보였다. 결국 한숨을 삼킨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보고 싶진 않겠네. 네 얼굴이니까 더더욱."
"......."
"그럼 내 옷이라도 입혀야겠어. 손 좀 놔봐."
"......네."
고집스레 꾹 쥐었다가 손을 놓은 윤재하가 가만한 태도의 분신을 바라보았다. 카디건을 벗는 김석영에게 향하던 분신의 시선이 그에게 옮겨왔다.
"......."
왜일까. 저 가짜는 왜 저런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윤재하를 마주하는 분신의 표정이 오묘했다. 경직된 듯한 입매는 언뜻 적대시하는 듯하다가도 바라보는 눈길엔 애한이 서려 있는 것만 같았다. 모순되는 감정이 뒤섞인 낯에 덩달아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윤재하는 분신의 눈길을 말없이 피했다.
김석영의 카디건을 입힌 분신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적어둔 메모는 여전했고 형체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분신은 늘 윤재하가 앉던 식탁 자리에 앉았다. 김석영의 당부를 들으며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재하는 미묘하게 갉작이는 기분을 애써 털어내야만 했다.
"혼자 둬서 미안하지만 잘 부탁할게."
"네. 걱정 마세요."
온공한 태도에 입매를 올린 김석영이 분신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배웅이라도 하려는 듯 일어서는 분신을 만류하고 두 사람은 저택을 나섰다. 함께 숲길을 오르며 앙상한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던 윤재하가 물었다.
"왜 혼자 둬서 미안하다고 했던 거예요?"
그러자 김석영이 말했다.
"그냥. 혼자니까. 외로울 수도 있잖아."
"분신도 외로움을 느끼나요?"
"그렇다기보단.......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저건 네 일부를 넣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너의 기억 역시 가지고 있을 거야. 완벽한 이지를 가진 건 아니지만 내재된 기억을 통해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거지. 꽤 잘 만들어진 분신이야."
"......."
윤재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껍데기만 그럴싸한 분신인 줄 알았는데 제 기억을 지니고 있다니. 이래선 가짜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기억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면 위험한 거 아닌가요? 혹시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글쎄. 주어진 상황에 반응은 하겠지만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리는 없어."
"......그래도 좀 꺼림칙한데요."
"너로부터 비롯된 아이야. 넌 너 자신을 못 믿어? 아, 물론 네가 사고를 좀 치고 다니긴 했지만."
"......할 말이 없네요."
가볍게 웃은 김석영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한숨을 삼킨 윤재하는 미약하게 일렁이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늦은 저녁을 먹고 자정이 넘어서야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다. 포근한 이불에 낯을 묻은 윤재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몸 위를 미약하게 맴도는 저승의 기운이 느껴졌다. 제게서 흐르는 영기가 그것을 천천히 떨쳐내고 있는 것 역시.
「누구더라. 누구....... 아, 엄마. 엄마구나. 맞아. 엄마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삼도천을 건너기 전에 손에서 떨어졌어. 다시 돌아와서 잡으려고 했는데 도중에 돌아오진 못했어. 내가 대신 주워서 보고 있으니까 웃어줬던 것 같은데 표정이 좀 슬퍼 보였던 것 같아. 엄마가 우는 것 같아서 나도 좀 슬퍼졌었어.」
감은 눈을 뜬 윤재하가 한숨을 삼켰다.
......도대체 누구이길래 제 염주를 쥐고 저승에 간 걸까. 온전한 형태도 아닌, 고작 한 알을.
영가들이 특정 물건에 깃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렸을 때라 미약하긴 해도, 오래도록 착용을 해왔던 것이라 제 영기가 깃들었을 것이다. 그 기운에 이끌린 영가가 몸을 의탁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애초에 염주가 사라진 시점은 사고 당시였나, 그 이후였나. 알 방법이 없으니 답답함만 깊어졌다.
"......염주라."
텅 빈 제 왼쪽 손목을 바라보며 윤재하는 생각에 잠겼다. 곧 묵직한 눈꺼풀을 감고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명심해. 절대, 절대 빼면 안 돼. 알겠니?"
기억이 시작되는 모든 장면엔 늘 무언가가 잔뜩 있었다. 그 무언가가 이승을 떠난 망자들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아마 여섯 살 때였을 것이다.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던 아이는 늘 모친과 함께했다. 조부는 이미 그 당시에도 정신을 가누지 못했기에 모친은 늘 어린 윤재하의 손을 잡고 일터로 향했다. 주방은 아이에게 위험했으므로 아이는 대체로 카운터의 너머, 혹은 가게의 가장 구석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수신자의 기억에서처럼 평상이 딸린 곳도 있었다.
그 나이의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몇 번이고 읽어 손때가 묻은 동화책을 읽거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것 정도였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제 나름의 시간을 보내던 날이었다.
「뭐 그려?」
연한 청색의 멜빵바지를 입은 아이가 불쑥 말을 걸었다.
「용사님이야?」
"양철 나무꾼......."
「그게 뭔데?」
가방에서 동화책을 꺼낸 윤재하가 양철 나무꾼을 가리켰다.
"얘가 양철 나무꾼이야."
「와, 못생겼다.」
"......멋있는데."
어린 눈에는 양철 나무꾼의 외향이 갑옷을 두른 것 같아서 멋져 보였을 것이다. 멜빵바지를 입은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화책을 바라보았다. 이해해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바라봐도 이해할 수 없었는지 결국은 '못생겼어......'라고 말하긴 했지만.
아이는 모친이 일하는 가게의 건너편에 있는 떡집에 산다고 했다. 윤재하가 올 때마다 몰래 숨어서 보곤 했는데, 친구가 되고 싶어서 용기를 냈다며 웃었다. 윤재하는 아이의 용기가 기뻐서 마주 웃었다.
모친이 일하던 가게는 늘 손님으로 북적거렸기 때문에 어린 윤재하를 챙겨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틈이 날 때마다 주방에서 나와 아이를 확인하던 모친으로 인해 윤재하는 늘 착하게 자리를 지켰다. 무료하기만 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맛있는 반찬을 가져와 입에 쏙쏙 넣어주는 모친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너편 떡집에 사는 상냥한 아이와 친구가 된 이후로 윤재하는 더 이상 그 시간이 무료하지 않았다. 버티는 것이 아닌 기다림의 시간이 되었다.
"우리 아가. 잘 놀고 있어?"
"엄마!"
노란 계란에 부친 분홍색의 소시지를 가지고 온 모친이 윤재하를 꽉 껴안았다.
"우리 재하의 분홍 볼때기."
분홍색의 동그란 소시지를 윤재하의 양 볼에 가져다 댄 모친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양손에 소시지를 집은 윤재하가 꺄르르 웃자 모친의 눈이 사르르 휘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에 번뜩 정신을 차린 윤재하가 오른손에 쥔 소시지를 건넸다.
"자, 이건 너 먹어."
아이는 멀뚱멀뚱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맛있어. 먹어."
소시지를 들이밀며 살랑살랑 흔들어 보아도 아이는 바라보기만 할 뿐 받지 않았다. 덜컥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내민 손을 주춤거리던 찰나, 몸을 잡아 돌리는 힘에 손에 쥔 소시지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어, 내 소시지......!"
"윤재하."
"엄마아, 내 소시지가......."
"너 지금 누구랑 대화했어?"
그건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얼굴이었다. 잔뜩 굳어져 입술을 파르르 떠는 모친의 표정에 어린 윤재하가 덜컥 겁을 먹었을 정도였으니. 무섭게 바라보며 다그치는 것에 눈물을 왈칵 터뜨렸으나 모친은 반드시 아이의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치, 친구....... 친구랑, 앞에 떡집 친구랑 얘기한 거잖아......."
"친구가 어디 있는데."
서러움에 끅끅거린 윤재하가 작은 손끝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여기 있잖아......."
그곳에 산 사람은 없었다.
"이 빌어먹을 핏줄 때문에 재하까지, 우리 재하까지 이게 뭐냐고요! 애가 영가들을 바라보면서 웃어요. 툭툭 치면서 괴롭히는 것도 모르고 저랑 놀아준다고, 재밌다고 웃는다고요. 재하만은, 재하만큼은 평범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는데....... 설마설마했었는데,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는데......."
잠결에 들린 모친의 목소리엔 물기가 가득했다.
"엄마?"
텅 빈 이부자리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킨 윤재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빛이 새어나오는 조부의 방 앞에 서서 눈을 비비는데, 모친의 흐느낌 너머로 조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하는 괜찮을 거다. 우리와는 다르게 강한 아이야."
윤재하에게 조부는 무서운 존재였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때때로 윤재하를 기묘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건 결코 제 손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재하를 많이 사랑하셔. 그런데 할아버지는 기억이 많이 아프신 거야. 아야! 알지? 지난번에 재하, 엄마 말 안 듣고 뛰어다니다가 넘어졌잖아. 그때 무릎이 아야 했지? 아팠지?"
"응."
"그때 어땠어? 얼굴이 막 찡그려졌지? 서러워서 눈물도 나고 엄마 생각도 났지? 할아버지도 지금 많이 아프셔서 표정이 안 좋으신 거야. 재하한테 화난 거 아니야."
"정말?"
"그럼. 그러니까 재하야. 할아버지가 무서워도 미워하지는 마. 알았지?"
"응!"
언제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조부가 그토록 또렷하게 말하는 것을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윤영아, 수첩에 연락처가 있을 거다. 내 정신이 이렇게 돼서 힘들지만, 네가 도움을 청하면 분명 도와줄 거야. 평생 막아놓을 순 없어도 머리가 커질 때까진 눈이라도 가려놔야지. 그래야 저 어린 것이 잠이라도 편히 자지."
"아버지 정신 놨다고 버리고 간 사람들을 동료라고, 제자라고 감싸지 마세요. 도움을 준다고요? 과연 그럴까요?"
"내가 네 가슴에 대못을 박은 거 안다. 다 내 죄야. 그래도 영아. 이번 한 번만 아비 말 듣고 연락해보아. 분명 도와줄 거야. 그리고 너무 걱정할 거 없다. 재하는 네 생각보다 강한 아이야."
한없이 크게만 느껴졌던 모친의 등이, 떨리는 손으로 토닥이는 조부의 앞에선 참 작아 보였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토닥임은 불시에 끊겼다. 주름살이 도드라진 손등이 모친의 등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을 바라보는 조부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모친은 눈물을 닦아내며 노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자식이 아닌 보호자로 돌아간 것이다. 고작해야 여섯 살.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윤재하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날이 있었던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날 갑자기 주인집에 윤재하를 맡긴 모친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두 손엔 무언가를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 호기심에 몸을 들썩이며 바라보자 설핏 웃은 모친이 보자기에 감싼 것을 보여주었다.
"이건 염주라고 하는 거야."
새카만 구슬로 만든 팔찌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나뭇잎처럼 녹색 빛이 맴돌고 알 수 없는 문양 같은 게 세공된 예쁜 구슬.
"명심해. 절대, 절대 빼면 안 돼. 알겠니?"
손목을 단단하게 붙든 모친이 무섭게 당부했다. 염주를 빼지 말라는 말 외에도 무언가 이야기를 했지만, 윤재하는 제 손목을 감싸는 염주의 존재에 온 신경을 빼앗긴 채였다.
"......응."
그리고 그날 이후로, 아이가 바라보던 요란한 세상은 지극히 평범하고 고요한 세상으로 변모했다.
"우리 똥강아지. 표정이 왜 그래?"
"......아니야."
"왜, 혹시 지난번에 봤던 그 애가 괴롭혀? 민재라고 했었나?"
입술을 달싹이던 윤재하가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걘 원래 그래. 성격 진짜 이상해요. 다른 애들도 싫어해."
"왜 그럴까. 우리 똥강아지 속상하게."
말랑한 볼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서 벗어난 윤재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도 안 속상해."
"정말?"
"정말."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왜냐면 그를 괴롭히는 건 김민재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심통을 부리는 아이들의 괴롭힘은 윤재하에겐 너무나도 익숙했다. 속상함을 느끼기엔 이미 무뎌진 채였다.
3학년이 되었을 무렵, 아이들 사이에 윤재하는 무당 집안의 아이라고 소문이 났다. 무당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부정적인 느낌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우리 반에 재하라는 애가 있는데 걔네 엄마랑 할아버지가 무당이래요. 아빠도 없대요."
자녀의 말을 들은 부모들의 반응은 대개가 그러했다.
"그 아이랑 놀지 말렴."
물론 그중에서도 아이의 이야기에 개의치 않은 부모들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몇몇은 거리낌 없이 윤재하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쉽사리 멀리하기엔 아이의 외양이 너무 뛰어났고 공부도 잘했다. 조용하긴 했지만 상냥하게 웃어줄 줄도 알았다. 소문이 돌기 전만 해도 윤재하는 누구나 친해지고 싶어 하던 아이였다.
"야아. 너 왜 쟤한테 말 걸어?"
"왜. 난 재하 좋은데."
"쟤네 엄마 무당이라잖아. 가까이 가지 마."
"무당이 뭔데?"
"귀신 보는 거야."
"그럼 재하도 귀신을 봐?"
"그렇지 않을까?"
"진짜? 야, 그럼 여기도 귀신 있을까? 나 얼마 전에 무서운 거 봤는데, 거기 학교에 나오는 귀신이 진짜 웃기게 생겼었어. 우리 반에도 있지 않을까? 나 재하한테 물어볼래."
"야 귀신 보는 게 뭐가 멋있어? 우리 아빠가 그랬는데 그거 엄청 안 좋은 거니까 쟤랑 놀지 말랬어. 너도 쟤한테 말 건 거 부모님이 아시면 혼날걸?"
"......아, 혼나는 건 싫은데."
진실을 알려는 마음보단 상황이 주는 유흥에 시선을 뺏기기 마련이다. 호의적인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해갔다. 한두 명에서 시작된 따돌림은 점차 수를 키워갔다. 몰래 말을 걸어주던 아이들도 있었으나 따돌리는 아이들에게 맞서는 용기까지 갖진 못했다.
그렇게 윤재하는 열두 살이 되었고 5학년이 된 반에서 김민재를 만났다.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같은 반이 된 건 처음이었다. 또래의 아이 중에서도 덩치가 컸던 김민재는 제힘을 과시하고 으스대길 좋아했다. 중학생이던 형에게 배운 거친 욕설을 입에 담기도 하고, 최신 휴대폰이나 게임기 같은 것을 가져와 과시하기도 했다.
또래보다 큰 김민재에겐 또래보다 작았던 윤재하가 한없이 작고 우스워 보였을 것이다. 곱상한 얼굴 역시 덜 자란 증거라며 비웃고, 손목에 자리한 염주를 보곤 계집애라고 할 정도였으니. 윤재하 역시 시끄러운 김민재가 거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다 때 이른 장마가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 부쩍 집안에서 뛰쳐나가는 경우가 많아진 조부로 인해 날이 서 있던 시기였다. 이날 역시 물웅덩이를 잘못 디뎌 흠뻑 젖은 윤재하가 하교했을 땐 조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또 시작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찾아보고 올걸."
한숨을 폭 내쉬고 책가방을 내려놓은 윤재하가 비를 막아줄 비옷과 우산을 챙기고 밖을 나섰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대체로 조부는 집에서 멀지 않는 골목에 있었다. 그곳은 시장으로 향하는 길목이기도 했는데, 청과점과 떡집이 나란하게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조부는 언제나처럼 색색의 과일과 떡을 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할아버지."
"......."
"...할아버지. 감기 걸려요. 집에 가요."
"......."
달싹이는 입술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흠뻑 젖은 몸 위로 성인용 우비를 두른 윤재하가 조부의 손을 쥐었다. 힘을 주어 이끌면 잠시 버티는 듯해도 끝내 손길을 따라와 주었으나, 왜인지 그날은 굳건히 버티고 섰다.
"할아버지. 감기 걸리신다니까요. 집에 가......."
"어? 쟤 우리 반 왕딴데."
아버지로 보이는 남성의 손을 잡고 청과점을 지나던 김민재가 윤재하를 확인하곤 소리쳤다. 그의 부친이 인상을 찌푸리며 골목 어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섞인 혐오에, 어린 윤재하는 몸을 움찔 떨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조부의 손을 힘껏 끌었다. 당장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빠. 쟤가 내가 말했던 귀신 보는 집 애야. 저 할아버지가 그 무당인가 봐!"
"......말 걸지 마라. 상대하지도 말고."
쯧, 혀를 참과 동시에 김민재를 끌어당긴 남자가 걸음을 떼던 순간이었다.
"자네."
조부의 입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차를 조심해야 해."
"저 노인네가 뭐라는 거야."
"차....... 차를....... 아니, 술을......."
"......빨리 가요!"
묵직한 장 우산을 떨치고 조부의 팔을 온몸으로 껴안은 윤재하가 힘껏 그 몸을 끌었다. 아이의 힘에 끌려가면서도 노인은 남자를 향해 읊조렸다. 당장이라도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으나 작은 팔다리는 노인의 몸을 이끄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음울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윤재하는 내일 닥쳐올 김민재의 반응에 미리 피로감을 느껴야 했다.
"어제 아빠랑 시장에 갔는데, 골목에 귀신 같은 할아버지가 서 있는 거야. 그런데 그 옆에 누가 있었는지 줄 알아? 윤재하가 있었어. 나 어제 무당 할아버지 본 거라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모험담을 들려주듯 으스대는 것에 한숨을 내쉰 윤재하가 교과서를 펼쳤다.
"민재 이제 귀신 붙는다."
킬킬 웃은 무리를 향해 발길질한 김민재가 목청을 높였다.
"어제 쟤네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 보고 차 조심하랬다니까? 존나 기분 나빠."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제각각 저를 흘끔흘끔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가족과 얽힌 직접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평소처럼 무시하기 힘들었던 윤재하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연필을 쥐었다. 뭐라도 쥐고 있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무렵, 김민재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빗길에 음주 운전으로 인한 충돌 사고였다. 그날 이후 김민재는 한동안 학교에 나오질 않았고, 그 애가 다시 나타난 건 긴 장마의 끝이 보일쯤이었다.
점심시간에 불쑥 교실에 나타난 김민재는 책가방 하나 없는 맨몸이었다. 놀란 아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윤재하의 앞에 다가선 김민재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있었다. 한없이 일그러진 낯을 마주한 윤재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 괜찮......."
"......때문이야."
"......."
"......건, 너네 할아버지 때문이야."
"......김민재."
"너네 할아버지 때문이야! 너네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아빠가 죽은 거야!"
김민재가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책상이 뒤로 넘어가고 바닥에 널브러진 윤재하는 제 몸에 올라탄 아이의 주먹질을 피할 수 없었다. 벗어나기엔 너무 무거웠고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힌 탓에 온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너네 할아버지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우리 아빠가 죽은 건 다 너네 가족 때문이라고!"
선생님을 찾으며 교실 밖을 뛰쳐나가는 아이들의 소리와 김민재의 고함이 귓속에 뒤섞였다. 가까스로 팔을 들어 몸뚱이를 밀쳐보려 했지만, 잔인할 만큼 힘의 차이가 컸다. 왈칵 터진 눈물에 흐려진 시야로 김민재의 손이 보였다. 맞고 싶지 않았다. 너무 아팠다.
그때 힘없이 널브러진 손끝에 의자의 다리가 잡혔다. 그것을 있는 힘껏 휘두른 건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의자에 몸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김민재가 옆으로 쓰려졌다. 그 틈에 상체를 일으키고 뒤로 기었으나 단번에 몸을 일으킨 김민재가 손을 뻗었다. 붙들린 팔을 휘두르며 떨쳐내도 또다시 붙들렸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팔등이 주욱 긁히던 순간.
톡, 토도독, 톡―
김민재의 손끝에 걸린 염주의 줄이 끊어졌다. 교실 바닥 위를 나뒹구는 염주의 구슬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그 작은 구슬의 궤적을 눈으로 좇던 찰나에 드는 생각은,
"명심해. 절대, 절대 빼면 안 돼. 알겠니?"
두려움이었다.
아, 안 되는데....... 혼날 텐데.......
"절대 빼면 안 돼."
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달려드는 김민재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애의 우악스러운 손길도 더는 아프지 않았다. 다만 염주가 끊어져버렸다는 당황, 그리고 분명 혼이 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잠식될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불쑥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선뜩함에 윤재하는 숨을 멈췄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인식했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세상을 좀 더 온전하게 가려주었던 마법이 사라지고, 막혀 있던 감각이 단번에 증폭했다.
「끼기기긱끼익」
「속닥속닥속닥」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를 빨리 감은 듯한 알 수 없는 소리와 시야를 어른거리는 형상들. 악을 지르며 제게 달려드는 아이의 등 너머로 떠다니는 것들이 저를 향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찰나,
윤재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세상을 다시 마주하고 말았다.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때마침 교실에 달려온 선생님으로 인해 김민재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래보다 큰 덩치를 가졌다 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제압하는 어른을 막아낼 순 없었다. 선생님이 발악하는 김민재를 붙든 틈을 타, 윤재하는 영가들의 눈을 피하며 교실 바닥 위를 더듬더듬 기었다. 눈에 보이는 염주의 알을 닥치는 대로 주웠다. 끊어진 줄을 간신히 찾아 끼워 넣었다. 서툰 손짓으로 매듭을 묶고 왼쪽 손목에 끼우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염주를 다시 착용해보아도 영가들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열두 살의 윤재하는 다시 귀신을 보게 되었다.
* * *
아무것도 없는 손목을 흘끔 바라보길 한 번. 반찬을 집어 먹기를 또 한 번. 의식하지도 못한 채 번거로운 식사를 이어가는 윤재하를 김석영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평소와는 달리, 내리깐 눈매는 올라올 기미가 안 보였다. 요 며칠 동안 계속 저 상태지만 왜 저러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갔다.
"윤재하."
"......."
"재하야."
"......네?"
뒤늦게 상념에서 벗어난 윤재하가 시선을 보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그게......."
"그 아이에게서 단서를 얻었니?"
역시 정곡이었는지 몸을 움찔한다. 잠시 제 밥알을 휘적이다 한숨을 삼킨 그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염주의 알을 흘리고 간 사람에 대해선 기억하고 있다고 했어요."
"다행이네."
쓰게 웃은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가 엄마라고 착각한 사람이었대요. 줄곧 기다리던 엄마가 이제 와주었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자세히 보니 엄마가 아니어서 내심 실망했는데, 그럼에도 향하는 시선을 막을 순 없었다고 했어요."
김석영은 이야기에 집중한 듯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윤재하가 말을 이었다.
"그날은 유독 망자들이 많아 경계가 북적였는데, 삼도천을 건너기 전에 다른 망자와 부딪혔던 모양인지 그 사람의 손에서 무언가 떨어졌대요. 망자들의 발길질에 점점 멀어지는 알을 확인하고 어떻게든 그걸 붙잡으려고 했지만, 도중에 돌아오진 못했다고....... 그래서 그 아이가 대신 주웠대요. 그걸 확인한 그 사람이 아이를 향해 웃어주었는데, 그 표정이 슬퍼 보여서 아이도 덩달아 슬퍼졌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손에 쥔 구슬을 살펴보았는데, 그 생김새가 너무도 예뻐서 보물처럼 보관했다고 아이는 말했다. 그게 다라고 말하자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는 거야?"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냥, ......자꾸만 신경이 쓰여요."
"떨어트리고 나서 다시 붙잡으려고 할 정도면, 그 망자에게도 꽤나 소중한 물건이었다는 건데. 그토록 소중한 것은 공유할 수 없지."
"......그렇죠."
"어릴 때 늘 차고 다녔던 거라면 네 기억이 묻어나 있었겠지. 끊어진 알에 불과해도 너와의 상성이 맞는 영가의 눈에 띄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글쎄. 나는 이쪽보단 분명 너와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는 영가가 아닐까 싶은데. 예를 들면."
눈을 내리깔며 말을 잇던 김석영이 윤재하를 직시했다. 속을 알 수 없이 새카만 눈을 마주한 다갈색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네게 염주를 쥐여준 사람이라든지."
"......그건 아닐 거예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목소리 끝이 떨려왔다. 제 바짓자락을 쥔 윤재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윤재하가 마른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이었다.
"잠깐."
돌연 미간을 찌푸린 김석영이 허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분신이 저택을 나갔어."
"......네?"
"분신이 저택을 나갔다고. 며칠 동안 별 탈 없이 잘 있더니. 안일했네."
물로 입가심을 한 김석영이 몸을 일으키자 윤재하가 그 뒤를 따랐다. 그의 말처럼 저택엔 아무도 없었다. 다급하게 밖을 나섰으나 분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글쎄. 그건 찾아봐야 알겠지."
사람들의 틈 속에서 기운이 흐려지기 전에 최대한 거리를 좁혀야 했다. 제 기운의 흔적을 주시하던 김석영이 걸음을 뗐다. 가파른 경사를 성큼성큼 내려간 그는 건널목의 소형 마트로 곧장 향했다.
'여긴.......'
그곳은 윤재하가 자주 장을 보던 곳이었다. 늘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주던 카운터의 직원이 가위를 눌린다는 말을 듣고부턴 일부러 찾지 않던 곳이기도 했다. 저택을 벗어나서 곧장 향한 곳이 마트라니.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린 윤재하가 김석영의 뒤를 착실히 따랐다.
"어서 오세....... 어머, 학생 또 왔네요?"
밝게 웃은 점원이 윤재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황한 윤재하가 입술을 달싹이며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한 그는 자연스레 물건을 확인하며 분신의 흔적을 쫓았다. 카운터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윤재하에게 점원이 살갑게 말했다.
"왜, 뭐 두고 갔어요?"
"아, 그게......."
"아유, 참. 왜 또 그렇게 굳어 있어요? 아까 활짝 웃으니까 너무 보기 좋던데. 고새 무슨 일 생겼어?"
"......."
점원의 말에 멈칫한 윤재하가 의아하게 시선을 돌렸다.
"......웃었다고요?"
"아까 웃으면서 인사받아줬잖아요. 늘 모자 푹 눌러쓰고 다녔던 학생 맞죠? 나는 학생 얼굴이 이렇게 예쁜 줄도 몰랐네. 웃으니까 더 예쁘더라. 혹시 그건가? 탤런트? 배우?"
"아니, 그......."
"네. 맞아요. 곧 데뷔해서 조심해야 하거든요."
마트 안을 한 바퀴 돌고 온 김석영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화들짝 놀란 점원이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세상에, 세상에. 그랬구나. 어유, 우리 동네에 탤런트가 다 있었네?"
"아직은 지망생이지만요. 근데 저희 회사 지침이 좀 엄격해서요. 비밀로 해주세요. 아, 상현아. 어쩌지? 네가 찾는 거 없더라."
"어머, 뭐 찾아요? 말해주면 내가 알려줄게요."
벙찐 윤재하를 바라보며 후드를 뒤집어 씌워준 김석영이 말했다.
"코코넛 워터요."
점원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는다.
"아....... 그건 없는데......."
"네. 그런 것 같더라고요. 수고하세요."
윤재하를 이끌고 마트를 벗어난 김석영이 곧장 기운을 쫓았다. 분신은 마치 향하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듯, 헤맨 흔적도 없이 자취를 남긴 채였다. 희미하게 남은 자취를 따라가니 작은 미끄럼틀과 그네가 전부인 놀이터가 있었다. 그곳엔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아이들과 휴식을 취하러 온 몇몇의 노인이 있었는데, 개중에 분신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잠시 머무르긴 했는지 흔적이 남아 있는 벤치를 흘끔 바라보던 김석영은 여태 미묘한 표정의 윤재하를 돌아보았다.
"표정이 왜 그래? 미래의 탤런트 씨."
"......거짓말 잘하던데요."
"그랬나?"
어깨를 으쓱한 김석영이 불쑥 나무 벤치를 가리켰다.
"그보다 분신이 저기에 앉아 있다 간 것 같은데."
"......저기요?"
"그래. 저기.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마트에서도 그렇고 이곳도 그렇고, 분신이 지나간 흔적만 있을 뿐 별다른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혹여 악귀가 접근하여 끌려다닌 거라면 제 기운에 부정한 것이 섞여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는 건 제 의지를 갖추고 돌아다녔다는 것인데, 무엇이 그것을 움직이게 했는지가 의문이었다.
기운의 자취를 보아 또렷한 목적지가 있는 건 분명했다. 도중에 헤맨 흔적이라고는 없었으니까. 윤재하의 손톱에서 비롯된 것이니 분신이 스쳐 간 장소의 흔적 역시 윤재하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김석영의 예상은 엇나가지 않은 듯했다. 줄곧 미묘한 낯을 유지하던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네. 장을 보고 틈이 날 때면 종종 들렀다 간 곳이에요."
"장을 본 곳도 아까의 마트였고?"
"네."
"그럼 답 나왔네. 분신은 네 흔적을 따라다니고 있는 거야."
미간을 찌푸린 윤재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는 걸까요."
"그러게. 나도 좀 궁금하네. 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이든 기운을 따라 분신을 찾아내긴 해야 한다. 그들은 또다시 기운을 따라 움직였다. 이번엔 꽤 거리가 먼 곳이었는데, 묘하게 낯이 익은 듯한 골목 어귀의 풍경에 윤재하가 단번에 인상을 구겼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악,......으아! ......놈아, 그만......!"
골목에 가까워지자 요란한 고성이 들려왔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윤재하를 바라본 김석영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뭔 일 났나 본데."
그의 말대로였다. 거하게 일이 터졌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나 어딘가 음산함이 느껴지는 건물 앞에서 그들은 윤재하의 분신을 발견했다. 무감한 표정으로 무차별적인 행위를 이어가던 분신은 제 앞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고개를 들었다. 곧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하고선 움찔 몸을 굳혔다. 물리적인 행위가 멈추자 분신에게 깔려 아스팔트에 널브러져 있던 남자가 서러운 눈물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시바, 시발, 어흑, 어흐으....... 미친, 미친 새끼야악! 왜 이러는 건데......."
"......김민재."
"......어?"
제 몸 위에서가 아닌, 어딘가 빗나간 듯한 음성의 방향에 의아함을 느낀 김민재가 눈을 떴다. 머리맡에 서서 내려다보는 두 인영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제 몸을 깔아뭉갠 인영을 확인한 김민재는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유, 윤재하가 둘......!"
"넌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그렇게 당하고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다니. 엉망이 된 몰골에 대한 염려보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표정에도 드러났는지 옆에서 피식 웃은 김석영이 귓가에 속삭였다.
"쟤 기억 없애서 보냈잖아. 다시 되풀이한 거겠지. 저것도 제 팔자야."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잊고 있었다. 그럼 김민재는 저와 있었던 일을 모두 잊은 상태에서 분신을 마주한 건데....... 십 년이 넘어서 만난 이가 다짜고짜 폭력을 행사하니 퍽 억울하고 황당할 테다. 게다가 똑같은 인물마저 등장했으니 대낮에 귀신한테 홀린 느낌이지 않을까.
차라리 정말 귀신한테 홀리거나 꿈이라고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이게 대관절 무슨 상황인지....... 답답함에 한숨을 삼킨 윤재하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이게 뭔......!"
경악이 가시지 않은 김민재의 낯 위로 공포마저 맴돌았다. 이걸 어쩐다, 김석영이 고민하던 찰나였다.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피던 분신이 제 아래에 깔린 김민재의 머리통을 불시에 후려쳤다.
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김민재의 사지가 힘없이 늘어졌다. 기절한 것이다. 당황한 윤재하와 미묘한 표정의 김석영을 바라보던 분신이 몸을 일으켰다. 주먹에 묻은 핏물과 침 따위를 탈탈 털어낸 그것이 미적미적 다가왔다. 탐색하듯 바라보던 김석영이 물었다.
"왜 멋대로 움직였지?"
"그러고 싶어서요."
"그러고 싶다고 그래선 안 되지. 애초에 넌 뭘 위한 존잰데?"
"......."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엔 이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존재 의의에 대한 답은 하지 못하면서 행동에 대한 이유엔 답을 내린다. 그러고 싶었다는 대답은 이성보단 감정에 가까운 것이었고 자아를 성찰하지 못한다는 건 완전한 이지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분신은 제게 새겨진 기억에 기반한 감정을 따라 행동하는 걸까. 널브러진 사내를 보아하니 꽤 그럴듯한 생각인 듯했다. 그와 윤재하는 제법 악연이 깊은 듯했으니, 마음속 깊은 곳에 김민재를 향한 격노가 억눌러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황한 듯하지만 미묘하게 일그러진 윤재하의 표정이 이러한 짐작을 뒷받침해주었다.
"일단 돌아가자."
"......김민재를 저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염려 섞인 말에 김석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도플갱어를 본 거잖아. 꿈이라고 생각하겠지. 귀신한테 홀렸다거나."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떳떳하게 행동할 처지도 아닐 테니까. 보아하니 이 골목엔 CCTV도 없는 것 같고, 괜히 수습하다가 지문 묻히지 말자고."
가벼운 대꾸와 함께 멀뚱하게 서 있는 분신에게 시선을 돌린 김석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온기 없는 손목을 붙들고 윤재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 되겠다. 너네 너무 눈에 띄어. 윤재하, 너라도 최대한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려. 얜 가릴 게 없으니까."
가뜩이나 눈에 띄는 외양인데 둘씩이나 있으니 시선이 집중될 게 뻔했다. 불만스레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 한숨을 삼킨 윤재하가 후드를 깊게 뒤집어썼다. 분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손목을 단단히 붙든 김석영이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걸음을 뗐다.
'왜 저렇게.......'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가며 연결된 손을 응시하던 윤재하는 뻐근해지는 명치에 숨을 달싹였다. 목울대를 일렁이는 것이 답답하기만 했다.
김석영이 자리를 비우던 며칠간, 단기 배달 건으로 시간을 보내며 종종 스쳐 갔던 하천의 양안엔 공원길과 공공 체육 시설이 있었다. 잡초들이 우거져 빈말로도 깔끔하다고 할 순 없지만 동네 주민들에겐 소중한 쉼터일 것이다. 운동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공놀이를 하거나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외진 곳을 찾으려 했으나 길을 잘못 든 탓에 김석영, 그리고 분신과 함께 그곳을 지나치던 순간이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안전 펜스가 설치된 코트에서 날아온 농구공이 그들의 발 어귀에 부딪혔다.
야 너 뭐하냐!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농구공을 날려버린 아이를 향해 야유했다. 해맑게 웃으며 미안하다 소리친 아이가 펜스를 가로질러 달려오는데, 붙잡힌 손을 뿌리치고 불쑥 공을 잡아든 분신이 가볍게 던져주었다. 큰 포물선을 그리며 코트 안에 낙하하자 아이들이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형!"
활기 넘치는, 시끌벅적한 소리의 틈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분신의 얼굴이 윤재하의 눈에 고정됐다.
"......."
어째서인지 편안하게 웃고 있는 낯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깨닫고야 말았다. 제 얼굴을 하고서 저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분신을 향해 느꼈던 미묘한 감정의 정체와 분신이 행하는 모든 행동의 근원을.
아, 저건 제 근본적인 감정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철저히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자신과는 달리, 감정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아까 웃으면서 인사받아줬잖아요."
친절한 직원에게 미소로 화답하고 싶었던 마음.
"미친, 미친 새끼야악! 왜 이러는 건데......."
사실 줄곧 증오스러웠던 김민재를 향한 분노와 폭력성.
"고맙습니다, 형!"
일상의 즉흥성이 선사하는 순간에 합류하고 싶던 충동.
"......."
이 모두가 제 이면 속에 존재하던 모습이었던 거다.
"윤재하?"
의아하게 바라보는 김석영의 흑안에 낯을 굳힌 제 모습이 비쳤다.
"괜찮아?"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러게요."
줄곧 저를 바라보는 분신의 표정은 오묘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윤재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생명을 가진 것도 아닌 지푸라기로 만들어진 가짜 주제에, 왜 저런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까. 왜 저렇게 애잔하게 바라보는 걸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이유를 알겠다.
"윤재하."
그건 제가 저를 바라보는 감정이었던 거다.
"가자."
"......네."
한없이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연민을 느끼고 마는 마음의 이면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다 말고 뛰쳐나온 데다가 동네를 한참이나 돌아서인지 부쩍 허기가 졌다. 그러던 와중에 분식집을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태권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떡볶이를 먹고 있었는데, 연신 시간을 확인하는 걸 보아선 학원에 갈 시간이 다가오거나 집에 돌아갈 시간을 재고 있는 것일 터였다. 어찌 된 일이든 시간을 쪼개 군것질하는 아이들은 그 자체로도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에 시선이 절로 가는 걸 억누른 윤재하가 앞서 걸어가는 사람의 등을 바라보던 찰나였다. 김석영의 손과 연결된 분신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세우고 분식집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걸음을 멈춰선 김석영이 분신의 시선을 따랐다. 괜스레 민망해진 윤재하가 분신을 노려보며 그 등을 힘껏 밀었다. 불시에 떠밀린 분신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다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버티려는 것이다.
'쪽팔리게.......'
낯부끄러워 눈가가 붉어진 윤재하가 분신의 팔목을 잡아채고 끌어당기려 하자 김석영이 손을 뻗어 만류했다. 고개를 살짝 저은 그가 분식집을 흘끔 바라보더니 말했다.
"먹고 갈까."
"아, 아니에요. 안 그래도......."
"언제 돌아가서 밥하려고. 오늘 저녁은 휴가야. 귀찮으니까 여기서 때우고 가자. 마침 사람도 없는데."
"아니, 저는......!"
"먹고 가자. 떡볶이."
"......."
대답하지 못하는 윤재하와는 달리 김석영의 옆에 선 분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식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석영의 시선이 다시금 윤재하에게로 돌아왔다.
"오뎅."
"......."
옆에선 끄덕끄덕.
"튀김."
"......."
또다시 옆에선 끄덕끄덕.
짜증스레 분신을 노려보던 윤재하가 아랫입술을 짓뭉개며 김석영을 바라봤다. 그는 마치 떼를 쓰는 아이를 먹을 것으로 유혹하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얼굴로 제 행동의 다정함을 가린다는 걸 이제는 안다. 윤재하는 이런 식으로 그의 행동에서 다정함을 엿볼 때마다 가슴께가 조여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분식 같은 거 입에 안 맞잖아요."
"가끔은 좋잖아. 미각에도 일탈은 필요하지."
더는 버틸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김석영이 손을 잡아끌었다. 왼손엔 분신의 팔을, 오른손엔 윤재하의 팔을 쥔 그가 내부로 향했다. 두 개의 테이블이 전부인 분식집은 세 남자가 들어선 것만으로도 꽉 차버렸다. 멀대 같은 남자들이 들어오는 것에 놀란 사장이 너털웃음과 함께 다가왔다.
"다들 농구선수들인가? 키가 엄청 크네. 어머, 그런데 여기는 쌍둥이인가 보네? 똑같이 생겼어."
입매를 삐죽이는 윤재하를 보며 가볍게 웃은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간소한 메뉴판을 훑고 적당하게 주문을 마쳤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아이들의 입맛에 맞춘 듯한 달달한 떡볶이와 맑은 국물의 오뎅, 그리고 각각의 튀김과 라면은 잠시나마 잊고 있던 허기를 되살렸다.
"그런데 이거, ......얘도 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못 먹을 것도 없지. 봐, 벌써 포크 들었네."
"......그렇네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크를 쥔 분신이 떡볶이를 입에 물었다. 오물오물 씹으면서 김석영과 윤재하를 바라본 그것은 묘하게 만족스러운 낯을 하고 있었다. 그게 단순히 맛으로 인한 게 아니라는 걸 아는 윤재하는 민망해질 따름이었다.
그때, 돌연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린 김석영이 분식집의 내부와 제 곁에 둘러싼 인영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야."
"뭐가요?"
"누군가랑 같이 분식집에 와본 거."
"......정말요?"
윤재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응. 학생일 땐 지나가다 한두 번 먹어보긴 했지만."
"혼자서요?"
"응. 친구 없었거든. 넌 알잖아."
내뱉은 말이 의미하는 무게와는 달리 목소리나 태도는 한없이 단조로웠다.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닐 텐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니 덩달아 가볍게 수긍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자발적인 면이 있다 해도 윤재하 역시 줄곧 혼자였기에 내심 김석영의 말에 동질감이 들고 말았다. 입안에 맴도는 떡볶이의 잔해를 꼭꼭 씹어 삼킨 그가 넌지시 내뱉었다.
"저도요."
"뭐가. 너도 친구 없었다고?"
"네."
"왜 안 만들었는데."
외톨이로 살아가기엔 너무나도 눈에 띄는데. 곁을 주고자 했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을 것 같은데, 왜 홀로 살아가나. 사실 그 이유야 짐작은 갔지만 김석영은 윤재하가 혼자인 것에 너무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냥, ......친구가 있어서 좋은 것보다 불편한 게 더 많을 거란 걸 알아서요."
"사귀려는 도전은 해봤고?"
"음......."
설핏 웃으며 떡볶이를 입에 무는 걸 보니 도전은 해본 모양이다. 그 도전이 윤재하의 일생에서 마지막은 아니기를, 김석영은 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발걸음을 멈춰 세워 이곳으로 이끈 장본인은 먹는 행위가 목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한두 번의 포크 질을 끝으로 분신은 식사를 끝마쳤다. 제법 부지런히 움직이는 김석영과 그의 흐름에 맞춰 식사를 이어가는 윤재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것은 연신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친구도 없었다면서 분식집에서의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지. 다른 아이들을 보며 부러워하던 기억이 저것을 움직인 걸지도 모르겠다고, 김석영은 생각했다.
"이제 가자."
식사가 끝났다. 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선 김석영이 분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더 이상 말썽을 부릴 것 같진 않지만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분신은 제게 내밀어진 손을 망설이지 않고 덥석 잡았다. 연결된 두 손을 바라보던 윤재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어린애도 아닌데.'
가짜라고 해도 겉모습은 어엿한 성인이다. 하물며 기억까지 스며든 것을 김석영은 왜 저렇게 감싸는 건지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인 윤재하가 단단히 맞잡은 손을 바라보며 발끝에 힘을 실었다. 다소 묵직하고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울렸지만 앞선 두 명분의 발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그렇게 경사를 오르던 무렵이었다. 돌연 무언가가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냄새가 이끄는 종착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분신에게서 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게, 왜......."
"수명이 다했나 보네."
서서히 재가 되어가는 발끝을 바라보며 김석영이 말했다. 덩달아 제 발끝을 응시한 분신은 묘하게 아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제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해 찬찬히 추궁할 생각이었으나 수명을 다해 소멸하는 상황에선 도루묵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악귀의 소행으로 움직인 게 아닌 건 확실하고 도깨비의 술식이 잘못되어 만들어진 돌연변이 같은데, 결과적으로 큰 손해를 끼친 것은 없으니 넘어가면 될 듯했다.
김석영은 분신과 맞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온기 따위 없는 차가운 손이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떨어지기 전에 다시 그 손을 맞붙잡은 분신이 김석영의 서늘한 체온을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붙든 손을 강하게 잡아당긴 분신이 김석영의 상체를 꽉 끌어안았다. 등을 가로지른 손이 그의 어깨를 단단하게 붙든다. 끌어당기는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맞닿은 팔에 가해지는 힘은 아릿했고, 제 온몸을 기대는 몸짓에 상체가 뒤로 밀려 허리가 휠 정도였다. 불시에 윤재하의 탈을 쓴 분신의 품에 안긴 김석영은 느릿하게 눈만 끔벅였다.
"너 지금 뭐 하는......!"
도리어 놀란 것은 당사자도 아닌 껍데기의 주인인, 윤재하였다. 저 미쳐버린 지푸라기가 다짜고짜 사람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경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얼굴을 굳히고 황급히 다가간 윤재하가 김석영을 옭아맨 팔을 떼어내려던 찰나, 돌연 몸을 떼어낸 분신이 고개를 내밀었다.
"......!"
그러더니 건조하게 부르튼 입술에 꾹 입을 맞췄다. 입술을 맞대고 무작정 들이미는 얼굴의 힘에 김석영의 고개가 절로 젖혀졌다. 꺾어지는 목을 붙들어주기 위해 손을 뻗은 분신의 행동은 침입자의 개입으로 인해 끝맺어지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분신의 뒷덜미를 낚아채 단번에 떨어뜨린 윤재하가 휘청이는 김석영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가 중심을 잡자 빠르게 앞을 가로막았다.
"미쳤어?"
뒤로 밀려나 눈만 끔벅이는 분신을 향해 윤재하가 쏘아붙였다. 형형한 눈빛을 정통으로 맞은 분신이 눈매를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누가 봐도 불만 있어 보이는 낯이었다. 그러다 윤재하의 어깨 너머로 저를 바라보는 김석영을 발견한 분신이 재가 되어 희미해진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줄곧 묘한 얼굴로 상황을 응시하던 김석영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자, 설핏 웃은 분신은 빠르게 재가 되어 허공에 바스러졌다.
"소멸했네."
"......."
빈 허공을 노려보던 윤재하가 몸을 돌렸다. 멀뚱하게 바라보는 김석영의 입술에 시선이 꽂혔다. 건조하던 입술이 마찰 때문에 붉어진 걸 눈으로 확인하자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 나갔다. 손등으로 그의 입술을 문질러낸 것 역시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일어난 일이었다. 이내 손등의 피부를 물어버린 김석영이 아니었다면 넋 나간 행동을 계속 이어갔을 것이다.
"......아."
거친 입술의 표면과 뭉근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정신이 돌아왔다. 웃는 듯 아닌 듯 오묘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김석영의 시선에 윤재하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아, 아니 이건......."
화르륵 붉어진 윤재하가 입술을 뻐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혼란이 가득한 눈망울은 애처로울 정도로 경련하고 있었다. 순간의 감정에 매몰되어 저지른 행위와 그것을 행하게 한 분신의 행동까지. 그 무엇 하나도 김석영을 이해시킬 만한 구실이 없었다. 상황을 모면할 핑곗거리도 없었다.
사고가 멎어버린 윤재하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윤재하?"
도망뿐이었다.
가파른 경사와 숲길을 거쳐 쉬지도 않고 달렸다. 숨이 차오르는 고통보다 어지러운 마음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 안채에 다다르고 나서야 뒤늦게 숨을 몰아쉰 윤재하는 쫓기는 사람처럼 방에 들어갔다. 문에 기대어 스르륵 주저앉은 그는 떨리는 한숨과 함께 땀이 배어 나온 손에 얼굴을 묻었다.
"......뭘 한 거야, 도대체."
손끝이 떨려왔다. 분신은 김석영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주입된 기억을 보며 자신의 흔적을 따라 한 게 아니었다. 단순히 기억을 따라갔더라면 저와 다른 행동 따위를 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것이 했던 모든 행동은 윤재하의 내면에 숨어 있던 감정을 따른 것이었다. 이성이 아닌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 거다.
정말 내재된 감정을 따른 거라면, 자신은 그토록 강하게 김석영을 껴안고 싶었다는 걸까. ......입을 맞추고 싶었던 걸까.
"......말도 안 돼."
'남자에게 왜?'라는 질문을 내린 순간, 그는 김석영이 제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윤재하."
"......네."
"불쾌했어?"
저승의 경계에서 묻던 그 질문. 그때 제가 내린 답변을 윤재하는 기억한다.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가 내린 대답 역시 기억한다.
"......아니요."
남자와의 입맞춤에 대한 거부감이나 불쾌함 따윈 없었다는 것. 놀라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끝내 그를 밀쳐내지 못했다는 것. 맞닿는 입술이 멀어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김석영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온몸을 잠식한 것은 그저 부끄러움과 울렁이는 심장께의 둔통뿐이었다는 것 역시.
김석영과의 입맞춤은 거북스럽지 않았다. 도리어 심장을 떨리게 했을 뿐이다. 그가 넌지시 건네는 장난스러운 말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편하게 대해주는 것 같아 은연중에 기뻤던 것도 같다. 사실을 저를 놓지 않고 도와주는 것도 기뻤다.
그의 입에서 뱉어지는 모진 말에 때때로 도망치고 싶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지만 그게 정말 불쾌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과 다정한 말이 아닌,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그의 말이 되려 달가웠다. 다정한 말보다 아픈 말이 위로될 수도 있다는 걸 그를 통해 깨달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게 필요했던 건 그런 말이었던 것 같다.
분신에게 유한 모습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뻐근해졌던 것. 맞잡은 손에 자꾸만 시선이 향했던 것. 김석영에게 포옹과 입맞춤을 건넨 분신을 향한 것은 분노와 질투였다는 것을 차례차례 깨닫고 말았다.
"윤재하."
놀란 숨을 흡 틀어막은 윤재하가 온몸을 굳혔다. 안채로 돌아온 김석영이 문 앞에 서 있는 게 느껴졌다. 입을 틀어막은 손을 내리면 형편없는 신음만이 터져 나올 게 분명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김석영의 얼굴을 직면하는 것도 두려워서 윤재하는 죽을힘을 다해 숨을 삼켰다.
"......."
문 너머에서 가볍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잘 자라'는 나지막한 인사와 함께 김석영이 멀어져 갔다. 곧장 씻으려는 듯 욕실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와 샤워기의 물소리를 듣고 나서야 막힌 숨을 토해낸 윤재하는 무릎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