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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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일수록 생각은 깊어지기 마련이다. 윤재하는 부러 김석영의 생각을 억눌렀다. 그러자 상념의 흐름은 자연스레 형체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저택의 식탁에는 윤재하가 적어놓은 쪽지만이 존재할 뿐, 기다리던 대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은은하게 형체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으나 그게 정말 형체의 것인지, 제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낸 착각인지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함께한 세월만 해도 십 년인데 고작 며칠 사라졌다고 해서 그의 기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윤재하는 이런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껴야만 했다.
막연하게 그가 무사히 존재하길 바라며 동네를 헤집는 것만 벌써 며칠째였다. 거리를 떠도는 영가들에게 물어보아도 그를 찾는 것에 대한 진전은 없었고, 기억을 헤집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의문만 커져갔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가 사고가 났더라?'
사고가 만들어낸 결괏값에만 매몰되어 있었던 스스로를 발견한 순간, 윤재하는 제 기억이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어지러운 기억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잔상들이 존재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인지하는 것도, 정의를 내리는 것도 어렵기만 했다.
무언가에 쫓기듯 달렸던 기억은 있는데, 그렇게 달려야만 했던 이유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두려움에 질렸던 것은 분명한데 도대체 무엇이 어린 저를 그토록 두렵게 했는지도. 그러다 불쑥 저를 찾는 모친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과 그를 향해 달려가던 순간을 끝으로 모든 기억이 끊겼다. 눈을 떴을 땐 온몸을 부술 것 같은 고통과 낯선 병원의 천장, 그리고 착잡한 얼굴의 고모만이 그를 반겼다.
"......엄마, ......엄마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간절하게 뻐끔거렸다. 아이의 입술을 주시하던 고모는 숨을 삼키곤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채지 못하기엔 열셋이란 나이는 결코 어리지 않았다.
연달아 조부와 모친을 잃었다. 유일한 가족을 모두 잃고 말았다. 괴로움에 잠식되어 눈물만 흘려대길 여러 날. 차마 어린아이를 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었던 걸까. 어느샌가 주변을 맴돌며 모습을 드러낸 형체는 모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졸도할 듯 설움을 토해냈던 그 날, 붙들린 제 옷자락을 바라보던 형체가 몸을 감싸주던 순간의 감촉만은 아직도 생생했다.
「안 갈게. 가지 않을게. 옆에 있을게.」
그렇게 그들은 함께했다. 그건 발신자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그들의 사연보다 훨씬 오랜 기간이었다.
함께한 세월 동안 그는 제 육체가 탐이 났던 적은 없을까. 살아 있는 육체의 온기가 그립지는 않았을까.
연인을 떠나보낸 발신자가 다른 영가를 몸에 담아냈던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육체의 온기를 맛본 영가가 날뛰기 시작하고, 그에게 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뒤늦게 몸부림을 치던 장면에선 두려움마저 느꼈다. 제게 일어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연중에 상상하고 말았다. 형체가 몸을 빼앗는 순간을.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실제 장면을 기반한 상상력은 꽤나 그럴듯해서 감정을 들쑤셔댔다. 그렇게 들쑤셔진 감정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체는 정말 단 한 순간이라도 육체를 바랐던 적이 없을까? 아니면 정말.......
"......귀어(鬼語)."
제약이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던 건 아닐까.
"내가 봤을 때부터 그건 이미 희미해져 가고 있었어. 그것에 깃든 힘 역시 약해지고 있던 거겠지. 하물며 저승의 경계에 다녀오기까지 했으니, 분명 그게 영향을 끼쳤을 거야. 넌 귀어가 사라진 동시에 몸을 빼앗겼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게 네게서 악귀를 보호해주던 장치였을 수도 있어."
힘을 잃어가던 귀신의 말. 그것이 사라짐과 동시에 모습을 감춘 모친의 형체와 육체를 빼앗겼던 새벽. 정신을 잃기 전에 느꼈던 형체의 희미한 기운.
"너는 아니라고 믿고 있지만, 만약 그게 정말 네 몸을 빼앗았던 악귀라면, 나는 없애는 수밖에 없어."
"나는 그게 악귀가 아닐 거라고 확신하지 않거든. 네 마음이 어떻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둘 거야."
"......가능성."
"눈앞에서 사고를 겪은 아이가 제게 닥친 현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때때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볼 때도 있어. 무언가를 투영해서. 의외로 그런 경우의 사연을 많이 겪었거든 나는."
"......."
손끝이 떨려왔다. 윤재하는 염주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금줄을 붙들었다. 힘을 주어 떨림을 잠재우고 흐트러진 숨을 내쉬었다.
가능성....... 그래, 모두 가정일 뿐이다. 아직 그 무엇도 확실한 건 없다. 확신을 얻기 위해선 형체를 찾아야만 하지만 그를 찾지 못하는 지금, 언제까지고 형체만을 찾아 헤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악귀라도 먼저 찾아야 해. 찾아서 없앨 수만 있다면.......'
악귀를 찾는다면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형체가 정말 그것에게 흡수되었는지, 김석영의 가정대로 정말 형체가 그 악귀와 연관이 있는 것인지.
'그전에 아이를 만나서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입술을 짓씹은 윤재하가 몸을 일으켰다. 제가 있던 지점과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고 발걸음을 떼었다. 신발 밑창이 닿을 때마다 사그락거리는 자갈밭을 벗어나 경계의 초원을 거닐며 아이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넋을 놓고 앞만 바라보며 걷는 망자들의 행렬이 보일 땐 몸을 숙이고 숨조차 참아냈다. 혹여 차사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해질 테니까.
'아이야. 아이야.'
윤재하는 입안에서 구르는 단어를 반복하며 주변을 살폈다. 아이의 이름을 모르는 데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기이한 기운을 감지한 동시에 윤재하는 마침내 찾아 헤매던 대상을 발견했다.
"......뭐야, 저거."
아이는 찢어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벌어지던 균열은 어느새 금방이라도 아이를 집어삼킬 만큼 거대해졌다. 허공에 생겨난 영역은 마치 투명한 수면(水面) 같았다.
잔잔한 수면의 영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는 돌연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맞이하는 것처럼 두 팔을 뻗은 아이가 수면을 건드렸다. 잔잔하던 표면에 파동이 일어나고 맞닿은 영역은 아이를 끌어당겼다. 동시에 거대하던 영역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심연에 잠긴 아이의 몸이 서서히 사라져갈 때쯤.
"......안 돼."
우두커니 멈춰 서 있던 윤재하가 지면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저것이 바로 언젠가의 김석영이 말했던 저승의 틈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정신 차려! 끌려가면 안 돼......!"
아이의 허리를 낚아챈 윤재하가 소리쳤다. 효과가 있었는지 아이의 몸이 움찔했으나 끌어당기는 힘이 거세졌다. 안간힘을 다해 벗어나 보려 했지만 결국 윤재하의 몸마저 속절없이 끌려갈 뿐이었다.
"네 몸을 지킬 수 있는 건 너라는 걸 잊지 마. 위협을 느낀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널 지켜."
육신과 명이 남은 그와는 달리 아이는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한 혼에 불과하다. 아이를 놓고 제 몸을 건사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알지만 윤재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이대로 보냈다가 영영 마주할 수 없게 된다면 후회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의 감은 때때로 이성이 내린 선택보다도 정확했다.
입술을 짓씹은 윤재하가 황급히 카디건을 벗었다. 빠르게 닫혀가는 영역의 틈새에 던지자, 이내 완전히 닫혀버린 허공에서 검은 옷감이 휘날렸다. 흐려지는 정신을 붙들고 김석영의 카디건을 바라보던 윤재하는 분리된 세상에 끼어버린 저것이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 * *
뚝―
차가운 물방울이 눈꺼풀을 건드렸다. 수면에 가라앉은 의식이 떠오르자 황급히 눈을 뜬 윤재하가 사위를 살폈다. 밤의 장막이 내린 듯한 동굴 안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아무리 집중해도 인간의 두 눈은 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할 듯했다. 한숨을 내쉰 윤재하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몸을 일으켰다. 벽면을 어루만지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어냈다. 미세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하자, 마침내 빛무리가 쏟아지며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
공간의 한가운데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두 팔을 뻗어도 다 담을 수 없을 너비를 가진 그 나무는 감히 세월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신묘했다. 신록의 나뭇가지는 천장에 가득 뻗쳐 있어 마치 나무에게 감싸인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울창한 잎사귀 사이로 어른거리는 빛무리는 어두운 사위를 밝혀주었다.
'......신목(神木)인 걸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영롱한 기운과 위압감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바라볼수록 시야가 몽롱해지고 온몸에 힘이 풀려갔다.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저릿함이 나른한 쾌락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다갈색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풀어져갔다.
「이리로 와.」
나무가 윤재하를 불렀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묘한 음색에 이끌려 발걸음을 뗐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래. 좀 더 가까이, 이리로 와.」
거부할 수 없는 음색이었다. 발끝에 치이는 무언가와 흐릿한 시야 어귀로 비친 것이 없었다면 발걸음이 멈추지 않았을 테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희뿌연 막이 한 꺼풀 벗겨지듯 시야가 선명해졌다.
"......아."
몽롱한 낯을 한 아이가 저처럼 나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불시에 찬물을 끼얹은 듯 의식이 돌아온 그가 고개를 돌렸다.
"......."
신령스럽고 아름답던 신목은 없었다. 뒤엉킨 망자들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나무만 있을 뿐. 찬란하던 신록의 잎사귀들은 힘없이 늘어진 망자들의 모가지와 손가락 따위였다. 기력을 빼앗긴 것처럼 늘어져 있으나 표정만큼은 달콤한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발끝에 치인 것 역시 이지를 잃은 망자였다.
'......홀린 거구나.'
일말의 의심도 못한 채 이끌렸다. 실체를 보고 나자 시린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주먹을 쥔 손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마른침을 삼킨 윤재하가 아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안돼."
혈관처럼 뻗어난 나무의 뿌리 역시 망자들로 이루어진 형상이었다. 아이는 그것을 더듬어가며 나무의 몸통으로 향하고 있었다. 황급히 달려가 뒷덜미를 낚아채고 눈을 가렸으나, 이미 홀려버린 아이는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안돼, 보지 마. 정신 차려야 해."
「으으....... 놔아.......」
"정신 차려......!"
아이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강하게 껴안은 순간이었다.
별안간 시야가 점멸되더니 장소가 바뀌었다. 질척한 어둠이 내려앉은 동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후의 햇살이 들어선 공간에 서 있었다.
"......뭐야, 여긴......."
포근함이 느껴지는 집 안 한가운데에 선 윤재하는 벌컥 열리는 현관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신발을 벗은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엄마!"
스으윽―
아이의 형상은 당황한 윤재하를 정통으로 스쳐 갔다.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와 면 반바지를 입은 아이는 저승의 경계에서와는 달리 말끔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목석처럼 굳어서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꼼꼼하게 씻고 왔어?"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일까. 왜 어디서 들어본 것만 같을까. 아득한 기분에 잠긴 윤재하가 소리가 시작된 주방 어귀에 시선을 던졌다. 냉장고에 가려져 어슴푸레한 형태만 보이는 인영의 뒷모습이 망막에 꽂혔다.
"응. 때 밀었어. 머리도 두 번 감았어."
"머리를 두 번씩이나 감을 필욘 없는데."
웃음기가 어린 말로 가볍게 타박을 건넨 사람은 보드라운 아이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덜 말라 뭉쳐진 머리를 풀어주며 웃음을 머금었다.
"나 이제 요거트 먹어도 되지? 혼자 목욕탕 잘 갔다 왔잖아."
"하나만이야. 저번처럼 엄마 몰래 네 통 다 먹고 토하면 혼날 줄 알아."
"알았어!"
히죽 웃은 아이가 냉장고로 향했다. 문을 열고 요거트를 꺼낸 아이는 얌전히 식탁에 앉았다. 플라스틱 스푼으로 조그마한 요거트를 순식간에 해치운 아이가 만족스러운 숨을 토해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은 귀엽고 어여뻤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윤재하가 고개를 돌렸다. 등을 진 뒷모습만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아이와 시선이 부딪혔다.
"아......."
"......."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아이였다. 찰나에 이어지던 눈 맞춤에서 윤재하는 아이가 일부러 그를 외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
"다 먹었어?"
"응. 하나만 먹었어!"
애정 어린 음성에 활짝 웃은 아이가 힘차게 대답했다. 텅 빈 요거트 통과 스푼을 가지런히 손에 쥔 아이가 식탁에서 내려왔다. 멍하니 굳어버린 윤재하를 지나치던 아이가 불쑥 걸음을 멈췄다. 손안에 든 것을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
울망한 표정을 마주한 윤재하는 달싹이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에게 설핏 웃은 아이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여긴 내 기억이잖아."
"......."
"나가줘."
툭.
현실에서 아이를 감싸던 두 팔에 힘이 풀렸다. 동시에 아이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윤재하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뒤로 넘어가버렸다. 무언의 압력이 그를 밀어버렸고 어느새 칠흑 같은 우물에 낙하하고 있었다.
풍덩―
수면에 부딪히는 소음이 들렸으나, 물속에 가라앉는 감각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로 한없이 가라앉아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질 무렵,
깜빡―
눈을 뜨니 돌변한 세상에 홀로 서 있었다.
"......."
누런 먼지가 낀 벽지와 비좁은 현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
헛웃음을 터뜨린 입술 끝이 경련했다. 형편없이 떨리는 한숨을 삼켜낸 윤재하가 눈을 감았다.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부디 다른 풍경이 그를 맞아주길 바랐다.
"......."
하지만 결국 헛된 바람이었다. 윤재하는 제 앞에 펼쳐진 풍경을 속절없이 바라보았다.
오래된 벽지와 사람 한 명만 설 수 있는 비좁은 현관. 고작 네다섯 걸음 만에 다다르는 주방은 식탁 하나를 놓기도 애매했다. 협소한 주방의 공간은 때에 따라 거실의 용도로 쓰이기도 했고 공부방이 되기도 했다. 냉장고 옆에 가지런히 세워둔 4인용의 접이식 밥상도 밥상의 역할 뿐만 아니라 책상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방은 두 칸이었다. 안방과 작은 방. 커다란 옷장으로 한 면을 채운 안방은 조부가 사용하는 공간이었고, 작은 방은 모자(母子)가 잠을 청하는 방이었다. 세탁기가 빼곡하게 들어선 화장실은 당연하게도 욕조나 세면대 따윈 없었다.
오래되고 낡아 벌어진 몰딩의 틈 사이로 벌레가 득실거렸다. 수압도 불규칙해서 언제나 쫓기듯이 씻어야만 했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반나절이면 먼지로 뒤덮이고 청소한 티가 나지 않는 집이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겐 아늑하고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집이다."
이곳은 세 가족이 온전하게 함께했던 집이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떨리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망자들을 양분 삼아 형태를 이루던 나무가 보여주는 환상이란 건 알고 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기억을 보여주며 영원히 꿈을 꾸게 하려는 거다. 아이의 기억을 통해 깨달았고 지금 눈앞의 환경을 마주한 순간 확신이 되었다.
'빠져나가야 해.'
기억에서 빠져나가는 방법 따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가만히 있다간 휘말려버릴 게 분명했다.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입술을 강하게 짓씹은 윤재하가 허공을 내려쳤다. 수면처럼 파동만 일어날 뿐 이렇다 할 감각이나 변화는 없었다. 일렁이던 파동은 순식간에 갈무리되었고 기억 속의 공간은 여전했다.
"......나가자."
차라리 집을 나가는 게 나을 듯했다. 조금이라도 그를 뒤흔들만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뒤를 돌아 현관으로 벗어나려던 그때였다.
"......, ....... ......, ......."
불쑥 들여오는 중얼거림이 윤재하의 걸음을 붙잡았다.
"......."
집안의 풍경 따위에 정신이 붙들려선 안 되는 거였는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경계하며 조금이라도 빠르게 장소를 벗어났어야 했는데. 그래서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했는데.......
"......할아버지."
언제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조부의 목소리는 한순간에 그를 무너뜨렸다.
"할아버지......."
반쯤 열린 안방의 문틈 사이로 조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쇳소리가 섞인 낮은 목소리와 주문 같은 말들. 조금은 무섭고, 어색하던. 가끔은 안쓰럽고, 애처롭고. 이따금, ......어린 마음에 귀찮기도 했던 존재.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떠나보냈고, 모친의 사고에 가려져 잊고 살았던 가족.
"할아, 할아버지....... 할아버지."
슬픔과 그리움, 죄책감이 뒤엉켜 가슴 속을 헤집었다. 머릿속을 맴도는 경고음에도 윤재하는 차마 안방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끼익―
낡은 경첩이 내는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노인의 등이 보였다. 옷장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는 잊고 있던 기억 속의 가족이었다. 어릴 땐 한없이 크게만 느껴졌던 노인의 마른 등이 지금은 볼품없이 작아 보였다.
"......, ....... ......, ......."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 같은 웅얼거림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릴 때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을까? 윤재하는 조급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쿵― 쿠웅―
"......."
옷장에서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려왔다. 일순간, 영문 모를 두려움과 조급함이 전신을 강타했다. 조부를 옷장에서 떨어뜨려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할......."
하지만 생각한 행동이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끼이익, 철컥.
불시에 등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안방의 문을 닫아버렸다. 칙칙한 색상의 나무 문이 노인의 모습을 가렸다. 조부에게 다가가려던 몸짓을 저지당한 윤재하가 뒤를 돌았다. 그러자 그곳엔.
"......엄마."
문고리를 쥔 모친이 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재하. 엄마가 뭐라 했지?"
모친의 목소리와 동시에, 육체의 시간이 역행했다. 눈높이 아래에 있던 얼굴과 시선을 맞추게 되고 이내 그를 올려다보기까지는 찰나에 불과했다. 기이한 변화의 흐름이었으나 아무런 인지조차 하지 못한 윤재하가 솜털이 보송한 낯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혼자서 안방 문 함부로 열지 않기."
"그리고 또."
"......또?"
말을 어물거리자, 부러 눈에 힘을 준 모친이 다그쳤다.
"또 있잖아."
"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윤재하가 답을 말했다.
"뭔가 보여도 아는 척하지 않기. 들려도 반응하지 않기. 안방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옷장은 건드리지 않기. 또......."
"절대 염주를 빼지 않기."
"아, 맞다! 염주 빼지 않기."
"그래. 절대 잊으면 안 돼. 어겨서도 안 되고. 알았지?"
"응. 알았어요."
힘차게 끄덕이는 고갯짓에 모친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밥 먹자. 배고프지?"
"응."
불쑥 고소한 냄새가 났다. 두부를 가득 넣은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도 함께였다. 어느새 가스레인지 앞에선 모친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윤재하는 자연스럽게 좌식 밥상을 펼쳤다. 수저와 물컵을 놓고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을 정갈하게 올려두었다. 찌개가 올려질 가운데에 냄비 받침을 올려둔 윤재하가 쪼르르 모친의 곁으로 다가섰다.
"자, 재하가 좋아하는 계란말이."
"위에 케첩 뿌려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그건 재하가 다 먹으면 돼. 할아버지 거는 따로 빼놨으니까."
해사하게 웃은 윤재하가 두 손으로 그릇을 건네받았다. 다시 쪼르르 밥상으로 다가가 올려두곤 심혈을 기울여 케첩을 뿌렸다. 흘끔 바라본 모친이 웃음을 터뜨렸다. 곧 찌개와 함께 잡곡밥까지 올라가자 금세 상차림이 완성되었다.
"아버지, 식사하세요."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간 모친이 조부를 모시고 왔다. 큰 어른이 한술을 뜨고 나서야 식사가 시작됐다. 뜨거운 밥을 한입 가득 넣은 윤재하는 짭짤하고 얼큰한 된장찌개를 후루룩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부지런히 씹다가 꿀꺽 삼키기 무섭게 계란말이를 베어 물었다. 그 속도가 퍽 빠르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커다란 손이 등을 어루만진다.
"급하게 먹으면 체해. 천천히 먹어야지."
뭐가 그리 급하냐며 손주의 등을 토닥거린 조부의 표정이 따뜻했다. 저를 향한 걱정의 말에서 윤재하는 사랑을 느꼈다. 가슴속에 퍼져나가는 충만함에 배시시 웃자 '혼이 나도 좋은가 봐요, 얘는' 하며 모친이 웃었다.
"그나저나 재하 내일 운동회인데. 도시락으로 뭐 먹고 싶어?"
크게 밥을 뜨던 손이 움찔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윤재하가 모친을 향해 물었다.
"......내일 오려고요?"
"응. 엄마 내일 일 뺐어. 도시락 싸서 갈 거야. 그러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정말?"
"그래. 정말."
"......."
확고한 대답에 일순 목이 메어왔다. 마음이 들뜨고 설레는데 왜 울컥할까. 눈가에 열이 몰리고 시야가 빠르게 흐릿해졌다. 윤재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밥그릇에 시선을 두고 입에 한가득 욱여넣자 또다시 다정한 타박이 이어졌다.
"천천히 먹으래도. 내일 운동회인데 탈 나면 안 되잖아."
"......응."
"유부초밥보단 김밥이 맛있지? 아니다, 그냥 둘 다 할까?"
울컥 치미는 것을 삼켜낸 윤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유부초밥이 좋아."
아무래도 김밥은 유부초밥보다 손이 많이 갈 테니까. 기껏 빼낸 소중한 휴일에 저 때문에 고생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래? 알겠어. 그럼 밥 다 먹고 같이 마트에 가자. 내일 마실 음료수랑 과자도 사게."
"응."
"아, 엄마가 다 기대된다. 우리 재하 내일 계주로 뛴다고 했지?"
고개를 붕붕 끄덕이자 흐뭇한 표정을 지은 모친이 말을 이었다.
"엄마 닮은 거야. 엄마도 학생 때 항상 계주 주자였거든. 알림장 보니까 학부모 달리기도 있던데 기대해. 엄마가 백팀 이기게 해줄 테니까."
"늙은 할아버지는 열심히 응원할게, 재하야."
사랑이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간질거리는 울대를 꾹 눌러 삼킨 윤재하가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와아아아아―!"
운동회의 시작을 알리는 방송과 함께 아이들의 함성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아이들을 향한 학부모의 열띤 박수갈채 역시 분위기를 잔뜩 고조시켰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운동장의 외곽에 자리한 놀이기구와 나무 밑의 그늘엔 옹기종기 모인 돗자리로 가득했다. 새하얀 티셔츠를 입은 윤재하가 분주히 외곽을 살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자 시선은 점점 뒤로 향했고, 운동회를 알리는 현수막 아래로 정문을 통과하는 모친과 조부가 보였다. 그제야 줄곧 불안하던 마음이 잠잠해졌다.
"재하, 파이팅!"
꽤나 먼 거리였는데도 단번에 윤재하를 찾아낸 모친이 소리쳤다. 설핏 웃으며 손을 흔들자 모친과 조부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좋은 자리를 잡기엔 이미 늦은 감이 있었기에 그들은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 돗자리를 펼쳤다. '더울 텐데......' 하고 걱정하기 무섭게 양산을 펼친 모친이 싱긋 웃어 보였다. 집주인 할머니에게 빌려온 듯했다.
운동장의 공간을 부지런히 나누며 학년별로 다른 행사가 이어졌다. 틈틈이 비는 시간엔 어김없이 가족들이 있는 자리로 넘어가 간식을 먹고 함께 응원했다. 햇볕을 가려주는 양산은 세 가족이 함께하기엔 턱없이 작았다. 그럼에도 윤재하는 가족들과 바짝 달라붙어서 웃음 짓는 순간이 마냥 좋았다.
참가하는 종목이 늘어날수록 뽀얀 손등엔 도장이 가득 찍혔다. 상품으로 받아낸 공책과 연필도 쌓여갔다. 아이의 뛰어난 운동신경에 모친과 조부는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상기된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게 윤재하의 기쁨이 되었다.
―지금부터 학부모 달리기 경주를 시작하겠습니다. 출전하시는 모든 학부모께서는 준비된 장소로 이동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엄마가 나설 차례다!"
씩 웃은 모친이 윤재하를 한 번 꽉 껴안은 뒤 몸을 일으켰다. 운동화의 끈을 꼼꼼히 확인하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친 모친이 운동장으로 나섰다. 선생님의 안내를 듣고 지정된 선 앞에 자리한 그는 백팀의 마지막 주자였다. 대미를 장식할 주자가 모친이라는 것에 윤재하는 들뜨고 말았다. 게다가 그는 유독 키가 큰 편이었다. 다른 부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우뚝 서 있어서인지 무리의 대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역시 우리 엄마가 제일 멋있어. 윤재하는 자랑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반짝였다. 몸을 풀던 모친이 그 말간 낯을 향해 환히 웃어주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됐다.
탕―!
"와아아아아―!"
신호총 소리와 함께 선발주자가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부모를 향한 아이들의 열띤 응원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엇비슷하던 경주는 하나둘 바통을 넘겨받으며 격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윤재하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앞서나가던 백팀의 주자가 넘어진 것이다. 안타까운 함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빠르게 일어선 주자가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그 사이, 곁에 선 청군의 주자가 바통을 넘겨받는 걸 확인한 모친이 거리를 가늠했다. 자세를 정비하고 달려오는 바통을 낚아챈 그가 달려나갔다.
"와, 와아아아―!"
환호의 함성이 교정을 뒤흔들었다. 결과가 정해진 것 같던 경기가 뒤집히고 있었다. 격차가 단숨에 좁혀진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가 바람이 되어 주자의 등을 밀어주었다. 결국 빠르게 청군을 따라잡은 백군이 결승점을 향해 앞서나갔다. 승자가 가려졌다.
"백군, 승리!"
모친의 승리였다.
"엄마!"
"거봐. 넌 나 닮았다니까?"
활짝 웃은 모친이 단번에 달려온 윤재하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응. 난 엄마 닮았어!"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할까?"
"운동회는 무조건 일등!"
모친이 거머쥔 승리에 기합이 단단히 들었다. 즐거움과 뿌듯함이 고조되어 상기된 붉은 뺨을 톡톡 건드린 모친이 말했다.
"기합은 좋지만 다치는 건 안 돼."
"응. 걱정 마요!"
다양한 행사가 이어지면서 운동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애타게 기다려온 점심시간에는 유부초밥뿐만 아니라 김밥과 주전부리를 준비해 온 모친으로 인해 배 터지도록 먹을 수 있었다.
주린 배를 채우고 시작된 행사는 오전보다 다양한 구성들로 이루어졌다. 햇살이 강해져서 피부가 따가웠지만 마른 목을 채우는 음료는 달콤했고, 흥겨운 음악은 기분을 고조시켰다.
하지만 어느 결엔가.
"누구 올 사람이라도 있어? 교문을 자꾸 보네?"
"아....... 아니, 그냥. 밖에 뭐가 많길래......."
윤재하는 교문 어귀로 향하는 시선을 붙들고 멋쩍게 웃어 보였다.
―다음은 6학년 미션 달리기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재하 차례네."
울려 퍼지는 안내 음성에 모친이 윤재하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개를 끄덕인 윤재하가 황급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준비된 구역으로 향했다.
미션 달리기는 바구니에 담긴 쪽지를 골라 해당 쪽지에 적힌 미션을 수행하면서 달리는 게임이었다. 주로 구체적인 대상을 적어놓은 것이긴 하지만 급박한 상황에선 까다로울 수 있는 미션이었다. 바구니가 있는 지정 구역까지 빠르게 달려서 최대한 상황을 파악할 시간을 확보해야 했다.
"재하, 파이팅!"
"와아아―! 파이팅―!"
설핏 웃은 윤재하가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세를 정돈하면서 교문 어귀를 바라보았으나 운동회의 이탈자들만 가득했다. 얕은 한숨을 토하며 정면을 바라보던 동시에.
탕―!
시합이 시작됐다.
"하아, 하아."
빠르게 앞서나간 윤재하가 일등으로 쪽지를 꺼냈다.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쳐 문자를 확인한 그가 주변을 살폈다. 흔들리는 다갈색의 눈이 정처 없이 헤맸다. 그 사이 차례로 도착한 아이들이 쪽지를 꺼내기 시작했고 윤재하의 초조함은 커져만 갔다.
그때였다.
"아......!"
누군가를 확인한 윤재하가 빠르게 달려나갔다. 교문 앞에 선 청년이 제게 달려오는 상대를 마주 보았다. 윤재하의 작은 손이 청년의 커다란 손을 잡아끌었다. 맞지 않는 키 차이로 엉거주춤하게 달려가던 청년, 김석영이 돌연 멈춰 섰다. 다급하게 돌아본 윤재하는 불쑥 높아진 시야에 숨을 삼켰다.
"급한 거지?"
귓가에 속삭인 김석영이 아이를 들쳐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감에 놀란 윤재하가 목을 감싸 안고 방향을 가리켰다. 조그마한 손끝이 가리킨 레이스로 달려간 김석영이 단숨에 아이를 내렸고, 단단하게 맞잡은 손으로 주어진 길을 달려나갔다.
앞서간 페어를 가볍게 제친 그들은 가장 먼저 결승선을 넘었다. 선을 지키고 있던 선생님이 미션 쪽지를 받아들었다. 김석영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선생은 어깨를 으쓱이며 두 사람의 손등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1등이네."
저 멀리서 모친이 환호하는 게 느껴졌다. 김석영의 손등에 찍힌 '1'과 제 손등에 적힌 '1'을 번갈아 바라보던 윤재하가 환하게 웃었다.
* * *
「저게 뭐야?"」
"......."
차사가 가리키는 카디건은 누군가의 몸에 걸쳐져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저렇게 허공의 틈새에 끼어 있을 게 아니었다. 반쪽짜리 옷감을 바라보던 김석영이 읊조렸다.
"열어요."
「저게 뭔....... 응? 뭐라고?」
"틈새를 열라고요."
평소보다 서늘해진 낯짝의 김석영이 옷감을 향해 다가갔다. 귓전에 닿은 말을 곱씹던 차사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잠깐, 이걸 열라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시죠. 피차 바쁜 사람끼리."
애초에 틈새를 찾기 위해 파견된 거잖냐며 덧붙이는 것에 차사의 입이 합 다물렸다.
"이게 망자가 흘러 들어간 틈새인지 아닌지는 확인해보면 알 테고. 열어요. 지금 당장."
「아니, 오늘은 상황만 파악하러 나온 거라고. 애초에 공간의 틈을 여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란 말이야. 기운을 얼마나 소모하는 줄 아나? 제대로 열려면 나 혼자서는.......」
"도와줄게요."
말을 자른 김석영이 차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약간의 틈새 정도면 됩니다. 벌리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배짱 한번 두둑하군그래. 그래봤자 인간 주제에.」
혀를 찬 차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알아서 하신다니 말릴 이유는 없지.」
친히 공간을 벌려주신다면 저야 편한 일이니.
카디건 앞에 선 차사가 손을 뻗었다. 서서히 귀기를 실어 넣자 잔잔하던 표면에 파동이 일어났다. 일렁이기 시작한 허공의 표면에서 미세한 틈새가 벌어졌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의 공간에 손을 비집어 넣고 틈새를 벌리던 차사가 고개를 돌렸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석영이 차사의 손끝에 있는 틈새로 손을 뻗었다. 꾸드득― 비집고 들어간 틈새에 왼손마저 쑤셔 넣자, 억지로 벌린 것에 반발하듯 틈을 닫으려는 기운이 거세졌다. 김석영은 압박하는 기운을 붙들고 힘을 주었다.
「버거울 것 같으면 그냥 포기.......」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차사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좌아아악―!
짐승의 아가리를 강제로 벌리듯, 그가 단번에 공간을 찢어버린 탓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틈새의 공간에 차사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아, 아니, 이게.......」
"아....... 더럽게 힘드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김석영이 뇌까렸다. 기운을 집중시켜 공간의 악력을 막아낸 것도 모자라 힘으로 뜯어버린 양손 또한 저릿한 건 마찬가지였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린 그가 눈가를 짓눌렀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야 현기증이 잠잠해졌다. 불안정하게 일렁이던 영기 또한 안정적인 흐름으로 돌아왔을 때, 떨어진 카디건을 주운 김석영은 수면(水面)처럼 일렁이는 공간에 몸을 내디뎠다.
「자, 잠깐! 같이 가!」
놀란 차사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톡, 토옥―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낙하했다. 깊은 산중의 동굴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빛 한점 들지 않는 암흑의 영역이었으나 차사의 눈은 어둠에 익숙했다. 그건 김석영도 마찬가지였다. 제약이 걸린 이승과는 달리 저승의 영역에선 기운을 펼치기 쉬운 데다 감각마저 예민해져서 이 정도의 어둠 따윈 방해물도 못됐다. 그는 곧장 금줄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지독하군그래.」
넓게 트인 공간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망자의 나무가 그들을 반겼다.
「사라진 망자가 여기에 다 모여 있....... 아, 이봐. 같이 좀 가세!」
뒤엉킨 망자들의 형상이 만들어낸 나무로 다가간 김석영이 몸통의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수백의 망자와 이형의 존재들이 한데 뭉친 중심에서 날 선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쯧, 물령화(物靈化)로군.」
뒤따른 차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고작 물건 따위에 기생하는 영귀(靈鬼)가 주제도 모르고 꿈을 꾸는군. 어찌나 오래 묵었는지 비린내가 진동하는구나.」
「나가....... 나가. 나가!」
서슬 퍼런 음성이 귓전에 내리박혔다. 영역을 침범당한 영귀의 분노가 울창하게 뻗은 가지들을 움직이게 했다. 사지가 뒤엉킨 채 뻣뻣하게 굳어버린 망자들의 가지가 김석영의 다리를 붙들었다. 그것들은 빠르게 육체를 타고 올라와 온 사지를 옥죄기 시작했다. 수십의 망자가 올라탄 김석영은 본연의 옷자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재빨리 몸을 띄워 망자들을 피한 차사가 혀를 찼다.
'틈새를 벌리느라 힘을 다 써버렸나. 허망하게 당해버렸구먼.'
망자에게 뒤덮인 김석영은 정신을 잃었는지 미동도 없었다. 혼자서는 이 모든 걸 감당하기 벅찬데, 이를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던 차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김석영을 두고 빠져나와 윗전에 상황을 전달하는 게 나을 듯했다.
'미안하게 됐군, 김가(金家). 그러게 되도 않는 객기를 부리진 말았어야지.'
성의 없는 애도를 표하며 제게 뻗어오는 망자들의 손길을 발로 걷어찬 차사가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뚜벅, 뚜벅.
불현듯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걸음이 떼어질 때마다 투두둑, 떨쳐지는 망자들의 소리도 함께였다.
「허!」
눈을 의심할 광경이었다. 떡 벌어진 입에서 기가 찬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꼼짝없이 기절한 줄만 알았던 김석영이 망자들을 매단 채 걸어가고 있던 것이다.
「......미쳤구먼.」
「나가! 나가란 말이야! 여긴 내 영역이야!」
천둥 같은 노기가 터져 나왔다. 천장을 가득 메운 가지에서부터 망자들의 사지가 후두득 떨어져 나갔다. 쿠웅― 쿵, 굉음과 함께 진동하는 지면은 귀(鬼)의 분노를 여실히 나타냈다. 비틀거리면서도 중심을 잡고 나무의 주축 앞에 다다른 김석영이 손을 뻗었다.
콰득, 콰드득―
단단한 표면을 비집고 들어간 두 손이 내부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무언가를 찾아 헤매듯 거침없이 손을 집어넣던 김석영이 피부를 물어뜯는 망자들을 짓이겼다.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사방을 메웠다.
「아아아아아아악―!」
귀(鬼)의 나무가 몸을 허우적거렸다. 사방에서 튀어나와 사지를 붙드는 손길을 버틴 김석영이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그의 손안으로 익숙한 온기가 가득 찬 것이다.
"......찾았다."
투둑, 투두두둑―
웅크린 인영을 붙든 김석영이 강하게 끌어올렸다. 쩌저적, 갈라지는 나무의 몸통 속에서 뒤엉킨 망자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김석영은 제가 끄집어낸 대상의 목덜미를 당겨 품에 안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상대의 기억 속 세상이 흘러들어왔다.
"와아아―!"
펄럭이는 현수막과 색색의 옷을 입은 아이들이 운동장 안을 빼곡하게 채웠다. 외곽에 자리한 학부모들과 아이들의 우렁찬 함성이 열띤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화이팅―!"
탕―!
불쑥 터지는 신호총 소리가 김석영의 시선을 앗아갔다. 시합이 시작된 지점에서 일제히 달려나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개중에 눈에 띄게 앞서나간 한 아이가 있었다. 가장 먼저 바구니 앞에 다다라 쪽지를 꺼내 본 아이가 주변을 살폈다. 멀리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김석영은 그게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
눈이 마주치는 것 같다고 느낀 그때. 아이가 달려왔다. 두 뺨을 붉게 물들이고 활짝 웃은 아이, 윤재하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당장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차마 작은 손이 이끄는 힘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느새 어정쩡한 자세로 달리던 김석영은 불쑥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다급하게 돌아본 윤재하를 안아 든 건 충동이었다.
"급한 거지?"
높아진 시야에 놀란 윤재하가 작은 팔을 목에 둘렀다. 아이는 영민하게도 그들이 향해야 할 지점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인 김석영이 단숨에 달려나갔다. 시합의 레이스에 다다라 몸을 내려주자 윤재하의 손이 빠르게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렇게 작은 손을 맞잡고 앞서나간 페어를 제쳤다. 달리면 달릴수록 그들의 키 차이와 다리의 보폭은 자연스레 교점을 맞춰갔다. 마치 한 몸이 된 것 같은 순간, 결승선은 그들의 것이 되었고 함성은 거세졌다.
"쪽지 확인해볼게요."
윤재하가 줄곧 쥐고 있던 종이를 건넸다. 꼬깃해진 종이를 펼친 선생이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이내 어깨를 으쓱인 남자가 그들의 손등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1등이네."
서로의 손등에 적힌 '1'을 번갈아 바라보던 윤재하가 환하게 웃었다. 기쁨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덩달아 설핏 웃은 김석영이 손을 뻗었다. 보드라운 뺨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일어나야지."
어린 윤재하의 표정이 휘둥그레졌다. 반짝거리는 말간 눈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쓴웃음을 삼킨 김석영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윤재하."
"......."
말간 낯의 아이가 제 부름에 대답하려던 일순간.
"형."
아이가 아닌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불쑥 뒤에서부터 청량한 기운을 품은 두 팔이 뻗어나왔다. 상체를 옥죄어 끌어당기는 몸짓에선 익숙한 향기가 묻어났다. 등 뒤로 맞닿은 단단함은 이전에도 경험해본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눈앞에 존재하던 어린아이가 실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형태를 잃어갔다.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아이는 말갛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온도가 아릿하게 가슴께를 옥죄어 올 때, 툭― 어깨에 얼굴을 묻은 남자의 머리칼이 뺨을 간지럽혔다. 보드라운 머리칼의 감촉과 시야 끝에 걸린 색채 역시 익숙했다.
"......윤재하."
다시금 정면을 바라보자 아이는 사라진 후였다. 어깨를 감싼 손등에 제 손을 얹은 김석영이 한숨처럼 말했다.
"......깨어 있었구나."
묻은 얼굴을 떼지 않은 채,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그냥....... 어느 순간부터요."
기억에 빠져드는 것도, 헤어 나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조부를 마주한 순간부터 흔들린 정신은 모친을 마주하고부터 무너졌다. 그 시절엔 알지 못했던 순간의 소중함에 심취한 것도 잠시. 도리어 과도한 행복이 윤재하를 수면에서 끌어올렸다.
그의 조부는 단 한 번도 손주의 등을 어루만져준 적이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한 그랬다. 그의 모친 역시 운동회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저학년도 아닌 6학년 때는 더더욱. 아무것도 모른 척 믿고 싶을 만큼 달콤한 상황이긴 했지만 실제였다면 오히려 윤재하 스스로가 말렸을 것이다. 운동회 따위에 시간을 빼앗길 바엔 차라리 집에서 푹 쉬는 게 나으므로.
그렇기에 윤재하는 교묘하게 조작된 기억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다만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해 줄곧 어둠 속에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리고 계속 되뇌었다. 저건 거짓이라고. 이곳에 가둬놓기 위한 나무의 술수라고.
하지만 그에게 보여주는 이 거짓된 세상이 한때의 제가 사무치게 바랐던 그림이긴 했다. 그래서 바라보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만들어진 상황에 불과해도 저 어린아이가, 모친이, 그리고 조부가 환히 웃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바라보며 거짓된 충만을 느끼던 찰나.
'......형.'
김석영이 나타났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건 만들어진 환상이 아닌 진짜 김석영이라는 걸. 사라진 저를 찾아와주었다는 걸.
"기다렸어요."
사실 그가 찾아와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림은 외롭지 않았다.
"형만....... 기다렸어요."
힘껏 끌어안은 몸에 낯을 묻고 파고들었다. 윤재하는 마치 안기는 것처럼 그를 끌어안았다.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김석영은 그렇게 느꼈다.
"그래."
기이한 만족감이 가슴속에 퍼져나갔다. 웃음기가 어린 대답을 내놓으며 김석영은 제 어깨에 닿는 머리로 고개를 기울였다.
"잘했어. 앞으로도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면 내가 반드시 찾아갈 테니.
"이제 일어나자."
팔을 잡아 내리는 손길에 아쉬움이 일었으나 윤재하는 순순히 행동을 따랐다. 그리고 마주 보고 선 김석영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요?"
"눈을 감았다 떠. 그거면 돼."
김석영의 말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 윤재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눈을 감았다. 고른 숨을 내쉬며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보인 것은 그의 목덜미였다. 단단하게 끌어안아준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윤재하가 설핏 미소 지었다.
김석영은 제 목덜미를 파고드는 머리칼의 간지러운 감각을 통해 윤재하가 환영에서 벗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안도라고 해야 할지, 기특함이라고 해야 할지. 다소 모호한 기분에 휩싸인 그가 낮게 읊조렸다.
"넌 정말 나를 믿는구나."
의심은 독이 된다. 한 톨의 의심이 불안을 부추기고 끝내 부정에 휩싸이게 만든다. 꿈에서 깨어나는 데 필요한 건 깨어날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면 충분했다. 제 말 한마디에 눈을 뜬 윤재하가 몸소 증명했다.
"형을 안 믿으면 누굴 믿어요."
별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웃은 윤재하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두 사람을 에워싼 희미한 막 너머로 망자들이 우후죽순으로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무슨......."
당황한 윤재하를 뒤로 물린 김석영이 차사가 만들어낸 결계막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스으으, 혈류를 타고 흐른 기운이 손에 집중됐다. 피부와 맞닿은 원형의 결계막에 김석영의 기운이 뻗어나갔다. 그건 마치 푸른 피가 흐르는 혈관 같았다. 멍하니 바라보는 윤재하의 망막 위로 푸른 불꽃이 번져나갔다. 수천의 갈래로 타들어 간 결계막은 뒤엉켜 붙어 있던 망자들까지 태워버렸다.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날리는 잔여물들에 다갈색의 시선이 어지러이 움직였다.
「이봐! 다 태워버리면 어떡해!」
불쑥 들려오는 고성이 아니었다면 윤재하는 한없이 멈춰 있었을 것이다. 가볍게 손을 털어낸 김석영이 머리를 쥐어뜯는 차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하자 노기 섞인 고성이 이어졌다.
「기껏 도와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어차피 갱생 불가한 것들이었어요. 살릴 것만 살리자고요."
반쯤 무너져내린 나무의 형상을 바라본 김석영이 대꾸했다. 형태가 무너진 덕에, 비교적 끌려온 지 얼마 안 된 망자들은 이지를 되찾고 비틀거렸다. 개중엔 익숙한 인영도 있었다. 잡동사니의 아이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 아이를 확인한 윤재하가 조급한 듯 움찔거렸다.
그때, 끄응― 신음하며 이마를 부여잡은 차사의 시선이 윤재하에게로 꽂혔다. 도대체 무엇을 그리 절실하게 찾아 끌어안나 했더니만. 살아 있는 인간이었던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한 차사가 또다시 노기 섞인 고성을 터뜨렸다.
「김가, 자네! 살아 있는 인간을 데려와?!」
「나가아아아―! 나가―!」
동시에 튀어나온 고함에 지반이 요동쳤다. 나무의 몸통에 몸을 숨긴 영귀가 사방에 흩어진 망자들을 이끌었다. 삿된 속삭임에 홀린 것들이 하나같이 중심으로 향했다. 기이한 행렬을 바라보던 김석영이 차사에게 시선을 옮겼다.
"거래나 할까요."
윤재하의 손을 붙든 그가 영귀를 턱짓하며 말했다.
"내 일을 묵인해주는 대신에 저걸 처리하죠."
「허!」
뻔뻔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차사가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입 한 번만 다물면 성과가 온전하게 당신 몫인데. 고민할 필요가 있나."
「.......」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했다. 확실히 저만한 영귀를 상대하려면 그 혼자만으론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돌연변이 가문의 존재는 가능하다. 인간으로 태어난 주제에 비범한 능력이 주어진 것부터가 윗전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힘 한번 안 들이고 단번에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인데, 굳이 굴러온 기회를 걷어찰 필요가 있나. 결국 차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처리해야 할 거야.」
"그러죠."
「좋아. 나는 인간 따윈 못 본 거다.」
차사의 언령을 확인한 김석영이 윤재하를 돌아보았다. 다갈색의 말간 눈이 희미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걱정이었다.
"윤재하."
"......네."
"지금 당장 아이를 데리고 왔던 길로 돌아가."
"......."
불안과 함께 입술을 짓씹던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곁에 있어봤자 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될 걸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화가 나지만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뒤돌아보지 말고 기다려. 금방 갈 테니까."
"네. ......조심해요."
발밑이 거세게 진동했다. 영귀의 부름에 따르는 망자들의 행렬에 아이도 속한 걸 확인한 윤재하가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 동시에 뛰쳐나간 윤재하가 아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바둥거리는 아이를 품에 안고 그들이 왔던 길로 향했다.
하지만 땅속에 스며든 망자의 기척을 눈치챘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발목을 잡아채는 악력에 지면을 나뒹군 윤재하가 아이를 감쌌다.
"윽......!"
머리를 부딪힌 탓에 일순 시야가 흐려졌다. 몸에 고스란히 흡수된 충격이 통증을 수반했다. 그 사이, 망자가 몸을 타고 오르는 게 느껴졌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젠장, 욕을 뇌까린 윤재하가 안간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켰다. 날 선 기색과 함께 영기가 거세게 일렁이자 망자가 몸을 주춤했다. 하지만 곧장 머릿속을 헤집는 명령에 휩쓸리고야 말았다.
「몸을 뺏어. 뺏지 못하면 숨통을 끊어버려.」
이지를 잃고 영귀의 꼭두각시가 된 망자가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타들어갈 것 같은 기운을 헤집고, 빈틈을 찾기 위해 여린 살갗을 파고들었다. 투둑, 옷감을 뚫는 손을 간신히 붙든 윤재하가 악으로 버티던 순간이었다.
「끄하아악―!」
"......!"
단말마의 귀곡성과 함께 다갈색의 눈동자에 파란 불꽃이 뒤엉켰다. 불의 중심에 갇힌 윤재하는 서늘한 빛깔의 화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타들어 간 망자는 잿더미가 되어 흩날렸다. 그 모든 과정이 눈에 선명하게 닿았지만, 정작 윤재하는 마치 태풍의 눈에 있는 사람처럼 아무런 온도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문득, 푸른 화염이 시작되는 어귀가 제 근처라는 걸 깨닫고 시선을 내렸다.
"아......."
왼쪽 손목에 자리한 금줄에서부터 희미한 실낱이 보였다. 그 끝을 따라가니 김석영이 있었다.
발악하는 나무의 중심부에 손을 쑤셔 넣던 김석영이 금줄의 진동을 느낀 것이다. 곁에 선 차사 역시 그에게 집중하느라 인간의 안위를 살피지 못했다. 뒤늦게 아차, 한 차사를 사납게 노려본 김석영이 단번에 손을 빼냈다.
금줄에 스며든 제 기운을 붙들고 영기를 실어 넣었다. 길게 이어진 푸른 빛의 아지랑이가 윤재하의 금줄에 스며든 동시에, 거대한 화염이 되어 윤재하를 덮치던 망자를 불태웠다. 크게 뜬 다갈색의 눈을 마주한 김석영이 차사를 향해 짓씹듯 말했다.
"여기서 노닥거리지 말고 저 애나 지켜요."
「......알겠네.」
침음을 내뱉은 차사가 자리를 옮겼다.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고 아이를 끌어안은 윤재하가 다가오는 존재를 마주 보았다.
「허!」
차사의 시선이 인간의 품에 향했다. 팔 안에 갇혀 멍하니 늘어진 아이는 경계에서 버티고 있던 망자였다. 육신도 없는 혼 따위를 보호한 인간의 어리석음에 비웃음이 절로 터졌다. 대놓고 끌끌 혀를 찬 그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인간의 곳곳을 확인했다. 조금 비틀거리는 걸 보니, 약간의 뇌진탕이 온 듯하지만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리석긴. 저승 땅 밟았더니 예서 살고 싶기라도 한 게냐. 아무리 목숨줄이 질기다고 해도 뭣 모르고 맹신했다간 뒤통수 맞을 것이다. 감싸줄 게 따로 있지. 육신도 없는 혼을 감싸? 냉큼 버리고 달아나진 못할망정.」
품 안의 아이를 추스른 윤재하가 사납게 쏘아보았다. 기껏 걱정해줬더니만 눈빛하고는. 쯧, 혀를 차는 동시에 재빨리 손을 휘둘러 결계막을 씌워준 차사가 말했다.
「결계를 쳤으니 이젠 괜찮을 거다. 나가라.」
"......."
차사를 응시하던 시선이 김석영에게로 향했다. 온몸에 망자들을 매단 그가 숙주의 몸체를 헤집는 게 보였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른 윤재하가 몸을 일으키고 달려 나갔다.
멀어지는 기운을 확인한 김석영이 팔을 단번에 밀어 넣었다. 콰드득, 콰득. 몸을 헤집는 고통에 비명을 내지른 영귀가 망자들로 이루어진 뿌리를 요동쳤다.
쿵, 쿠웅.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지면과 함께 공간을 이루는 천장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사지를 붙들고 조여오는 망자들의 힘에 미간을 찌푸린 김석영이 손끝에 화염을 일으켰다. 불시에 솟아오르는 화염의 열기가 동굴을 환히 비추었다. 푸른빛의 장막에 몸을 맞부딪친 것들은 하나 같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마침내, 손안에 무언가를 낚아챈 김석영이 팔을 단번에 뽑아냈다.
「끼아아아아악―!」
고막을 터뜨릴 듯한 고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힘을 주었다. 서늘한 손안에 붙잡힌 검은 형상이 제 숨통을 조여오는 화염과 악력을 못 이기고 축 늘어졌다. 이내 사그라드는 불꽃이 남긴 것은 조그마한 목각(木刻)이었다. 신목(神木)을 꿈꾼 귀(鬼)의 본체였다.
파스스―
공간을 이루는 중심이 힘을 잃자 가지 역시 힘을 잃었다. 뒤엉켜 있던 망자들이 한 올 한 올 분해되는 실낱처럼 떨어져 나갔다. 귀의 힘으로 만들어진 틈새의 공간 역시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바스러지는 천장으로부터 경계의 빛이 쏟아져 내렸다. 빠르게 허물어지는 공간의 가운데에 선 김석영이 손에 쥔 목각을 던졌다. 흩어진 망자들을 회수하기 위해 봉귀함을 꺼내던 차사가 그것을 황급히 받아냈다. 실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작태였으나, 홀로 일을 해결해준 상대에게 볼멘소리를 할 순 없었기에. 쯧, 속으로 혀를 찬 차사는 부러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곧 보지, 김가(金家).」
건조한 낯짝 위로 의아한 기색이 스쳤지만, 그도 잠시뿐이었다. 가볍게 목례한 김석영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한 차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뒤처리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나비야."
어느 지점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던 청년이 어깨를 움찔했다. 잠든 아이의 가슴을 토닥이던 손길 또한 멎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돌아보고 싶지만 꾹 참아내는 듯했다. 연신 움찔거리며 들썩이는 것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 김석영이 걸음을 빨리했다.
그가 앞에 다다르기 무섭게 고개를 든 윤재하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힘없이 밀려나가는 몸을 단단히 붙들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형."
떨리는 숨결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뒷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불안정한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거봐. 금방 온댔잖아."
"......."
차마 찰나의 순간조차 억겁처럼 느껴졌다고 말할 수 없었던 윤재하는 하염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내 눈을 맞추고 물었다.
"괜찮아요?"
"아니. 힘썼더니 피곤해."
낮게 잠긴 목소리가 심장을 조였다. 마주한 낯에서 괴로움을 확인한 김석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인상 펴."
말간 미간에 새겨진 틈으로 손을 뻗은 그가 보드라운 피부를 문질렀다.
"......."
미간을 쓸어주는 손끝의 감촉은 달가웠으나, 윤재하는 그 손가락을 붙들고 조심스레 잡아 내렸다. 피부에 닿은 손에선 서늘한 정도를 넘어 냉기마저 맴돌았기 때문이다. 울컥 치미는 것을 삼켜내느라 턱 끝에 힘이 들어갔다. 차갑게 식은 손의 틈새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은 윤재하가 결합된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집에 가요."
시린 손을 데우는 온기에 가슴께의 간지럼을 느낀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집에 가자."
* * *
남자는 이불 속에 파묻힌 김석영과 그의 손을 붙잡은 채 웅크리고 있는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한 놈은 시체처럼 시퍼렇고, 다른 한 놈은 당장이라도 죽을상을 하고 누워 있었다. 크흠, 부러 기척을 내며 한숨을 쉬니 줄곧 닫혀 있던 눈꺼풀이 단번에 올라갔다. 붉게 충혈된 다갈색의 눈동자가 남자에게 꽂혔다.
"아......."
오셨어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윤재하가 꾸벅 인사했다. 김석영의 머리맡에 다가온 남자가 털썩 자리에 앉았다.
"왜 갑자기 호출하나 했더니만. 무슨 일이 거하게 있었던 건 분명하군."
"......형이 이틀째 일어나질 않아요."
갈라진 숨소리를 비집고 나온 말이 애처롭게 떨려왔다. 목이 멘 윤재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낯을 떨군 그는 줄곧 붙잡고 있던 서늘한 손을 만지작거렸다.
"자는 건 확실한데, 형도 깨우지 말라고 한 걸 보면, 자는 게 맞는데.......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아요."
틈새에서의 소동이 휘몰아친 그 날. 이승으로 돌아와 막 고택을 벗어나던 순간이었다.
"윤재하."
불쑥 걸음을 멈춰선 김석영이 제 이마를 짚으며 읊조렸다.
"......나 잘 거니까, 깨우지 마."
그리곤 그대로 몸을 무너뜨렸다. 윤재하가 받아내지 않았다면 차가운 맨바닥을 나뒹굴었을 것이다. 김석영으로선 그가 저를 받아낼 거라 믿고 몸을 맡긴 것이었으나, 갑자기 쓰러지는 몸을 품에 안은 윤재하로선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상황이었다. 몸을 추스르는 사이 툭, 꺾이는 고개를 마주했을 땐 숨이 멎을 정도였다.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한기가 모든 움직임을 멎게 했다. 마비된 사고 회로가 움직인 건 미약한 숨소리를 듣고 나서부터다. 그제야 김석영이 읊조렸던 말을 상기한 윤재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안방으로 직행한 그는 김석영을 이부자리에 눕혔다. 창백한 낯빛은 평소와 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늘한 체온도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레 만져본 뺨은 냉골이었다. 생을 잃은 사람처럼 차가운 온기는 김석영이 쓰러져 있던 어느 날을 떠오르게 했으나,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양호한 거였다.
'나 때문에.......'
틈새에 휘말린 저로 인해 무리한 게 분명했다. 하물며 이번 일은 제게 당부할 만큼 한이 깊은 사연이 아니었던가. 분명 평소보다 기력 소모 또한 컸을 것이다.
김석영은 전혀 내색하려 하지 않았지만, 저승에 다녀올 때마다 피로에 휩싸인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온몸에서 풍겨오는 저승의 기운과 창백하게 질린 낯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제가 봐온 그의 상태 중에 이처럼 심각했던 적은 없었다.
불안과 자책에 휩싸인 윤재하는 온종일 김석영의 곁을 지켰다. 뜨거운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두 손과 두 다리를 하염없이 주물렀다. 마른 입술 새로 흐르는 숨소리가 갈라졌을 땐 직접 물을 먹여주었다. 컵으로는 모조리 흘려버려서 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서서히 무뎌졌다.
방 안의 온도를 최대로 높였다. 그조차도 마음에 차지 않아, 직접 김석영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 빌어먹게도 서늘한 냉기가 가실 수만 있다면 제 체온을 모조리 빼앗겨도 좋았다.
그렇게 틈틈이 손을 주무르고 안색을 살피길 이틀째.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창백한 안색을 비출 때, 윤재하는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곧장 김석영의 핸드폰을 뒤져 남자에게 연락했다. 날이 밝기 무섭게 찾아온 남자는 창백한 낯짝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승 기운은 확실히 가셨으니 됐고. 문제는 망종이의 기력인데.......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게......."
낯을 흐린 윤재하가 모든 일을 설명했다. 헛웃음을 터뜨린 남자가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망종은 망종이구나. 제 살 깎아 먹는 짓도 스스럼없이 하는 걸 보니."
"다 나 때문이에요. 나만 아니었어도, 형은......."
"너도 너지만, 이 자도 너를 지나치게 싸고도니. 내 눈엔 자업자득이다."
감싸고 도는 것도 정도가 있건만, 김석영은 윤재하만 관련된 일이라면 제 피 깎아 먹는 짓을 스스럼없이 해댔다. 이런 주제에 마음은 주지 않았다니. 이들을 지켜보는 남자의 입장으로선 퍽 기가 찬 말이었다. 정말 자각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김석영에게 윤재하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쩌려고 이러는지.......'
쯧. 혀를 찬 남자가 김석영의 체온을 확인했다. 보아하니 윤재하가 온종일 붙어 있었던 게 분명한데도 안색이 안 좋았다. 저승을 오가는 것 자체가 기운을 소모하는 일인데 능력까지 써가며 영귀를 처리했으니 멀쩡할 리가 있나.
저승에서야 기운과 능력을 사용하는데 제약이 풀리니 겁 없이 날뛰었겠지만 이승에 돌아오고 나서야 무리했던 결과를 맞는 것이다. 대충 어림잡아도 제 기운의 반 토막 정도는 소모한 듯하니 회복하려면 꽤나 걸릴성싶었다.
"기력을 너무 빼앗겼어.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잠을 자는 것이긴 해도, 육체의 한계란 존재하지. 회복하기도 전에 육체가 닳아버리면 무슨 소용 있겠어."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어떻게 해야......."
벼랑 끝에 선 아이처럼 위태로운 낯을 한 윤재하가 물었다. 붉게 충혈된 눈 위를 맴도는 건 공포였다.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영기와 함께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한 낯은 퍽 가련했다. 한숨과 동시에 혀를 찬 남자가 눈을 감은 김석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법이 있긴 한데."
윤재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급하게 상체를 들이밀고 물었다.
"뭔데요?"
"교접."
고대하던 대답은 간결했으나 단어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귓전에 파고든 단어를 이해하기 무섭게 윤재하는 덜컥 굳어버렸다. 당황을 고스란히 드러낸 윤재하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교접. 교접 말이야. 어디 보자, 그래. 요즘 말로는 섹스라고 하지?"
"......."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의문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남자는 굳이 친절을 베풀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보던 윤재하가 숨을 삼켰다. 남자는 가련할 정도로 당혹감에 휩싸인 윤재하를 봐주지 않고 술술 말을 이었다.
"기력을 회복시키는 것도, 식은 몸을 데우는 것도 교접이 가장 빠르지. 너의 영기는 양기와도 같으니, 음기를 지닌 망종이와도 궁합이 퍽 잘 맞다. 내부에 영기를 불어넣어 삿된 기운을 몰아내고 정화시키면 금방 회복할 거야."
"......."
"그런데 너희는 양물 달린 사내놈들이니 비역질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웃음기가 어린 말에 별안간 윤재하의 심기가 뒤틀렸다. 남자의 어투나 태도가 마치 그들을 농락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쾌감이 솟았다. 표정을 굳힌 그가 사납게 읊조렸다.
"지금 나더러 형을 강간하라는 거예요?"
"음."
남자는 콧방귀를 뀌며 어깨를 으쓱였다.
"가장 좋은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야. 그게 그렇게 들렸다면 나야 할 말은 없다만."
"의식도 없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나는 김석영의 몸을 회복시키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지만, 너는 오로지 '몸'에다 초점을 두는 것 같구나."
다갈색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리곤 머리를 한 대 후려 맞은 낯으로 숨도 쉬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비죽 삐져나온 웃음을 갈무리한 남자는 윤재하를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멈춰 있던 숨이 가빠올 때쯤, 야트막한 숨이 터져 나온 동시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초점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이미, ......마음이 있어서 안 돼요. 마음이 섞여버리는 순간, 행위는 변질되고 말테니까. 형을 돕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불순한 마음을 드러낼 테니까. 비겁하게......."
목소리의 끝이 형편없이 떨려왔다.
"나한테 형은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사람이에요. 아무리 방법이 그렇다고 해도, 형의 동의 없이는 못해요. 다른 대안을 알려줘요."
하지만 그 속엔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넘실거렸다. 지난번에 봤을 때만 해도 제 마음을 온전히 자각한 것 같진 않았는데. 너무 마음 주지 말라던 충고가 도리어 불을 지피기라도 한 걸까.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찌 됐건 윤재하는 제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교접이 어려우면 접문을 하는 수밖에. 그 정도는 가능한가?"
"아......."
접문이라면 입맞춤을 의미하는 걸 테다. 그러고 보니 저승의 경계에서도 입맞춤을 통해 기운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물을 넘겨줄 때도 입맞춤을 통했지만, 김석영의 차도는 별다르지 않았는데.......
"입맞춤으로는 나아지지 않았......."
"뭐야. 이미 했다는 말이야?"
"......."
어깨가 움찔하는 걸 확인한 남자가 가늘게 눈을 떴다.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다 한숨을 토한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이라도 마셔야 할 텐데 도통 넘기질 못해서. 틈틈이 입으로 넘겨주었어요. 그런데도 나아지지 않는 걸 보면......."
발갛게 달아오른 귓바퀴에 웃음을 삼킨 남자가 말을 이었다.
"뭐, 물만 넘겨주었지, 영기를 넘겨준 건 아니니까."
"영기를 불어넣어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우선 네 안의 영기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하는데, 너는 감각이 예민한 편이니까 기운에 집중하면 돼. 접문이 통하는 순간, 네 안의 기운을 숨결로 불어넣는다고 생각해봐. 대체로 너 같은 녀석들은 타고난 구석이 있어서 마음을 먹는 대로 행해질 거다. 직접 해보면 알게 될 거야."
김석영과 입을 맞추었을 때, 넘어오는 숨결을 통해 가득 차던 기운을 상기한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아지는 거 확실한 거죠?"
"그래. 네 영기는 특별하니까 삿된 기운을 밀어낼 거야. 지금도 보렴. 저승의 경계에 다녀온 게 무색하게 네게선 저승의 향이 나질 않잖아. 영기가 정화한 거지."
아, 다행이다. 단 한 번도 제 영기 따위에 고마움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영기의 존재와 그 힘에 감사했다. 비로소 안심한 마음에 표정이 풀렸다.
"교접을 대신하는 거니까 수시로 불어넣어줘야 할 거야."
"......네. 알겠어요."
손을 꾹꾹 만져주던 윤재하가 김석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퍽 애틋한 모양새에 헛웃음을 삼킨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덩달아 일어서려는 걸 말린 그는 곧장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잠시 멈춰선 남자가 뒤를 돌았다. 묘한 시선을 의아하게 받아친 윤재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남자가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했던 말 기억하나?"
"무슨......."
"너무 마음을 주지 말라던 말 말이다. 그 말 다시 한번 말하지. 뭐, ......이미 늦은 것 같긴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남자는 방을 나섰다. 몸을 일으켜 황급히 뒤따랐으나 이미 사라진 후였다. 텅 빈 마당을 바라보던 윤재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고 김석영의 곁으로 돌아왔다.
찬바람이 새어나오지 않게 방문을 닫고 이불에 감싸인 김석영의 목뒤로 팔을 끼워 넣었다. 그대로 몸을 끌어당기고 서늘한 목덜미에 얼굴은 묻은 윤재하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정신이 떠오르기 무섭게 김석영이 느낀 건 안온한 온기였다. 따스하면서도 청량한 감각은 이전에도 경험해본 것이었다.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몸을 옥죄이는 단단함과 보슬보슬한 머리칼의 감촉은 마음을 느슨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익숙해지기 시작한 기운과 향기. 같은 샴푸와 비누를 쓰는데도 왜 윤재하에게선 더욱 부드러운 향이 나는 걸까.
설핏 웃으며 눈을 뜨니 어김없이 다갈색의 머리칼이 보였다. 목덜미를 스치는 머리칼이 간지러웠다. 잠시 숨을 참았다가 조심스럽게 내쉬니 난색(暖色)의 실올 같은 머리칼이 하늘하늘 움직인다.
상체를 틀어 이불속에서 꺼낸 팔을 올린 김석영이 건조한 머리칼을 건드렸다. 그러자 머리통이 손을 향해 움직였다. 툭 기대어 잠시 비비적거리더니 돌연 굳어버렸다. 웃음을 흘리며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니 단번에 상체를 일으켰다.
"형?"
"응. 안녕."
"......이거 꿈 아니죠? 일어난 거, ......정말 일어난 거 맞죠?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데는......."
물기 어린 눈이 김석영의 곳곳을 살폈다. 손끝과 낯빛, 표정 그리고 이마의 체온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냉기가 가신 피부엔 부드러운 온기가 맴돌았다. 그런 제 뺨을 감싼 손에서 미약한 떨림을 느낀 김석영이 윤재하의 마른 손등 위로 손을 얹었다. 그제야 떨림이 멎었다.
"왜 떨고 그래. 난 괜찮은데."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형이 못 일어날까 봐....... 걱정했어요."
"그냥 깊게 잠든 것뿐이야. 너도 몇 번 봤잖아. 늘어지게 자는 거."
늘어지게 자봤자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는 정도였다. 며칠을 기절하듯 해놓고서 대수롭잖게 말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어떤 기분으로 자리를 지켰는데. 속에서 비집고 나오려는 투정을 한숨과 함께 삼켜버린 윤재하가 힘없이 속삭였다.
"이렇게 쓰러진 적은 처음이잖아요."
"그건 네가 있으니까. 알아서 잘 받아주겠지 싶어서 그랬던 거야. 원래라면 마루까진 갔을 텐데."
"......."
믿고 있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 몰랐던 윤재하가 발갛게 뺨을 붉혔다. 불퉁하던 입술이 움찔거린다. 설핏 웃은 김석영이 뻐근한 눈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나저나. 나 얼마나 잔 거야."
"나흘째에요."
상체를 일으키던 그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거밖에 안 됐다고?"
기운이 소모되어 정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으니 일주일은 족히 잤을 거라 생각했는데. 고작 나흘밖에 안 됐다는 것에 놀란 김석영이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수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말갛던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눈꺼풀엔 피로가 묻어났다. 그새 살이 내렸는지 날카로워진 얼굴선은 예민한 분위기를 풍겼다. 보아하니 밤낮 가리지 않고 저를 돌본 모양이었다.
"안 봐도 알겠네. 그냥 놔두면 되는데 뭐 하러 고생을 해."
"고생 안 했어요."
고개를 저으며 부정해봤자 드러난 낯이 사실을 증명했다. 배시시 웃는 얼굴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와중에 문득 윤재하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너."
"네?"
"왜 그렇게 입술이 부었어."
"......."
일순 시간이 멈추기라도 했나 싶었다. 말을 내뱉기 무섭게 윤재하가 굳어버린 것이다.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김석영은 묘하게 당겨오는 제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남들보다 유난히 건조한 입술은 늘 상처를 수반하지만, 오늘따라 더 따갑고 부어오른 것 같은 건 제 기분 탓일까.
"그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화르륵 달아오른 낯으로 어물쩍거리는 걸 보니 답이 나왔다. 눈매를 늘어뜨린 김석영이 제 입술을 만지며 말했다.
"자는 사람한테 키스를 다 하고."
"아니, 그게......."
"경계에서 안 해줘서 그런가."
"기운을......!"
느물거리는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윤재하가 가로막았다.
"기운을, 넘겨주려면....... 입맞춤으로 하면 된다고 해서......."
"누가."
"......도깨비요."
무릎을 세워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 김석영이 눈을 내리깐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빼곡한 속눈썹이 눈 아래에 그늘을 만들어냈다. 부어오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는 곧장 뒤엉키는 흑안에 마른침을 삼켰다. 어리숙한 숙맥을 마주한 김석영은 우습게도 애처로움을 느꼈다.
"무서웠구나."
제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게 뻔해서. 숨을 쉬는지 확인하고 손을 붙잡아 온기를 넘겨주었을 행동이 눈에 선해서. 그러다 끝내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도깨비를 불렀을 그의 행동이 안쓰러울 만치 사랑스럽다고 느껴서.
"무서워서 그랬구나."
김석영은 누그러진 어조로 말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불현듯 묻고 싶어졌다.
"윤재하."
김석영이 제 행동의 이유를 다정하게 말해준 순간부터 줄곧 흐드러진 얼굴을 하고 있던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김석영이 물었다.
"그때, 영귀가 보여준 기억의 환상 속에서."
"......."
"그 운동회의 쪽지엔 뭐가 적혀 있었어?"
경쾌한 신호총의 소리와 함께 운동장을 메우던 함성. 그 속에서 가장 눈에 띄던 아이.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느낀 찰나에, 환히 웃으며 달려오던 어린 윤재하. 그 작은 손안에서 소중하게 담고 있던 답은 무엇이었을까. 잠을 자면서도 계속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 가장......."
설핏 웃은 윤재하가 답을 말한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요."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
쪽지 속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아이는 저를 응원해주는 모친도, 조부도 아닌 김석영을 떠올렸다. 그리고 운동회의 기쁨이 선사하는 마법처럼 김석영이 나타났다. 그를 향해 달려가고 그와 함께 1등을 거머쥔 순간은 환상에 불과한 거짓이라 할지라도 윤재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재하야."
평소와 달리, 이름만을 불러주는 부드러운 어조에 다갈색의 눈이 크게 뜨였다.
타인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올 때면 덜컥 두려움을 느끼곤 했었는데. 김석영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은 달갑게만 느껴진단 생각을 하면서 윤재하는 시선으로 화답을 보냈다. 고양이의 인사처럼 다갈색의 눈이 한번 깜박이던 그때. 김석영은 살이 내린 얼굴을 두 손 가득 끌어와 입을 맞춰주었다. 불가항력의 충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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