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는 거리를 헤맸다. 눈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향하고 봤다. 골목, 거리, 차도, 심지어는 낯선 집마저도.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가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딨어, 어디 갔어.......」
어디 있을까, 가엾은 우리 재하. 어디 있을까, 가엾은 우리 아이. 도대체 어딜 헤매고 있을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찾아보자. 그렇게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수록 마음은 애가 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희망은 사라졌고 형체의 마음속엔 악(惡)이 자랐다.
"아이가 엄마를 찾아 헤매고 있어. 가엾어라....... 정처 없이 홀로 떠도는구나."
「안돼....... 가만 안 둘 거야. 그 인간을 죽여버릴 거야.......」
아이를 찾을 수가 없자, 아이를 떠돌게 만든 원인에게 분노가 향했다.
죽여야지. 죽여버려야지. 내가 소멸되어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자는 죽이고 사라져야지.
분노는 원동력이 되어 형체를 이끌었다. 그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경사의 초입에 다다랐다. 온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은 더 이상 그에게 두려움이 될 수 없었다.
「죽여야지. 죽여야지. 죽여버려야지. 죽여.......」
별안간, 주문처럼 읊조리던 말이 멈췄다. 경사의 중앙에 멈춰선 형체가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을 때면 더욱 밝아지는 다갈색의 머리칼. 말간 얼굴.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아.......」
형체가 찾아 헤매던 대상이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사무치게 그리웠던 그의 아이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하, 재하야....... 재하야.......」
육체가 있다면 눈물이 흘렀을까. 이토록 선명한 마음을 느끼는데도 온기와 눈물을 흘릴 수 없다는 게 문득 씁쓸해졌지만, 형체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아이를 다시 만났으니까.
「재하야!」
그를 바라보는 아이를 향해 형체가 달려갔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형처럼 굳어져 있다는 건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움과 애틋함에 눈이 멀어버린 탓이다. 그렇게 다가가 상대를 품에 안았을 때.
「......재하야?」
형체는 육신의 껍데기 안으로 흘러들어가버렸다.
* * *
띠링, 문자 알림음에 윤재하의 시선이 휴대폰 액정으로 향했다.
―Web 발신
한국 대학교: 윤재하님 20xx―1학기 휴학 승인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 승인됐네."
휴학을 신청한 건 진중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형체나 악귀, 그리고 거주와 관련해서도 뭐 하나 해결된 게 없는 상황에서 학업에 집중하기 어려울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혹여 학교 내에서 악귀에게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더 큰 문제가 될 게 분명하고, 결국 김석영에게도 피해가 될 것이다.
악귀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의 도움이 절실하다. 최대한 그와 멀어지지 않는 거리를 유지해야, 만일의 경우에 처해도 그가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학교에 가게 돼버린다면 멀어진 거리만큼이나 김석영에게 피해를 줄 일이 많아진다. 휴학을 결정한 데에는 제 안위와 학업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그에게 불편을 주고 싶지 않은 것도 컸다.
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마음의 여유 또한 늘어난 건 아니었다. 윤재하에겐 감당해야 할 현실이 있고 시간은 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주어진 한계 조건 같은 것이므로.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훗날의 생활 또한 변할 것이다.
윤재하는 빈 노트 위에 펜을 움직였다. 일 년 안에 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우선은 형체를 되찾는 것. 그리고 그 뒤엔 반드시 악귀를 처리한다는 결심이 뒤따랐다. 순서가 뒤바뀌어도 상관없다. 사실 악귀를 먼저 처리하고 형체를 찾는 것이 지금의 계획이긴 했다. 버겁기는 하지만 최악의 가정 역시 머릿속에 담아두려 노력하는 중이었고.
마음을 다잡는 데엔 경계의 틈새에 휘말린 일이 크게 기여했다. 영귀가 보여준 과거의 기억을 마주한 후로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바깥을 방황할 때를 제외하곤 조부는 언제나 안방의 옷장을 감시하듯이 자리를 지켰다는 것. 모친 역시 그에게 수많은 당부를 했었다는 것을.
보여도 보지 말 것.
들려도 귀를 닫을 것.
안방에 들어가지 말 것.
안방의 옷장을 건드리지 말 것.
염주를 빼지 말 것.
귀신을 본다는 윤재하의 특성이 염려된 것일 수도 있으나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같았다. 만약 그 옷장이 판도라의 상자라면. 그 옷장 안에 무언가 있었던 거라면,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조부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그 무언가가 지금 제 몸을 노리고 있는 악귀일 경우, 줄곧 주변을 맴돌다가 귀어가 사라진 순간을 노린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악연이 닿아 있는 악귀라면 그 과거 속에 존재했던 형체 역시 휘말렸을 가능성이 컸다. 표적이 되기 쉬웠을 테지.
"......."
그런데 만약. 형체가 모친이 아니라면.
「......삼도천을 건너기 전에 손에서 떨어졌어. 다시 돌아와서 잡으려고 했는데 도중에 돌아오진 못했어. 내가 대신 주워서 보고 있으니까 웃어줬던 것 같은데 표정이 좀 슬퍼 보였던 것 같아. 엄마가 우는 것 같아서 나도 좀 슬퍼졌었어.」
"네 곁을 지킨 건 너의 어머니이고. 저승의 경계에서 아이를 통해 들었던 대상도 여성이지. 한번 떨어트린 것을 다시 붙잡으려고 할 정도로 미련을 가진. 소중한 물건을 가진 자가 할법한 행동이고."
"......모든 게."
정말 다 거짓된 것이라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떨리는 한숨과 함께 펜을 툭, 떨어트린 윤재하가 마른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숨결이 다소 흐트러졌다. 불안과 두려움이 한데 뒤엉켜 숨통을 막는듯한 기분이었다. 속을 쥐어짜는 듯한 감각에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도 모르고 숨만 삼키던 찰나,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어느새 곁에 선 김석영이 굳은 낯으로 윤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이마에 맺힌 식은땀과 멍한 표정에 혀를 찼다. 시린 손등을 손으로 문지르고 호오, 입김을 불어 열을 올린 그가 뺨과 이마에 차례로 갖다 대었다.
"열이 있나? 평소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체온이 워낙 낮은 탓에 타인의 체온 역시 온전하게 판단할 수 없는 김석영이었으나 윤재하의 온기만큼은 제법 익숙했다. 맞닿을 때마다 전해져오는 온기를 기억하는 그가 의아하게 읊조리자 윤재하가 설핏 웃었다.
"......형."
"응."
"안겨도 돼요?"
이마와 뺨을 만지던 손을 끌어와 붙든 윤재하가 미약한 음성으로 허락을 구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석영이 윤재하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안기기 편하도록 가까워진 거리에, 허락을 깨달은 윤재하가 그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서 있는 김석영과는 달리 의자에 앉아 있던 터라 그의 가슴께에 이마를 기댔다. 보드라운 머리칼을 손가락에 휘감던 김석영이 설핏 웃었다.
"어리광이 늘었지."
"......좋아서요."
결국은 그런 제 어리광을 받아주는 김석영이 좋아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에게 기대고 만다.
긴 잠에서 깨어나 곁을 지키던 겁쟁이에게 입맞춤을 선사한 그는 그날부로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무엇이 그의 벽을 허물었는지는 모르나, 제 마음을 무시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기껍고 달가웠다. 김석영이 소중해진 만큼 그를 향한 제 감정도 소중했다.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싶은 감정이 상처를 받을지언정 무너지지 않고 단단해지기를 바랐다.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은 희망이었고 윤재하는 지금 그에게서 희망을 엿보았다.
"아픈 건 아니야?"
"안 아파요."
"그럼 이 식은땀은 뭔데."
앞머리칼을 파헤친 김석영이 타박했다.
"그냥....... 휴학 계획 세우느라 잠깐 머리를 썼더니."
"졸업 미뤄지는 건데 정말 후회 안 하겠어?"
"후회 안 해요."
단호한 어조에서 진심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됐어."
"아, 배고프지 않아요? 아침 걸렀잖아요. 지금 바로 식사할까요?"
어제도 일하고 돌아온 탓에 아침까지 푹 잔 김석영이다. 윤재하는 그때처럼 제 영기를 나눠주려 했으나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아무리 그의 영기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강제적인 소모는 반드시 몸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었다. 김석영은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처럼 윤재하의 영기를 빼앗고 싶진 않았고, 그 완강함 앞에서 윤재하도 차마 더 권할 수 없었다.
"아니. 좀 이르니까 평소대로 먹자."
어깨를 톡톡 두드린 신호에 윤재하가 몸을 떼어냈다. 옆자리에 앉은 김석영이 식탁에 몸을 늘어뜨리며 턱을 괴었다. 그의 시선이 노트와 기타 자격증 서적에 향했다.
"왜 어른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애들을 기특하게 여기는지 알겠어."
"내가 기특해요?"
"응. 이상현도 널 좀 본받으면 좋을 텐데."
설핏 웃은 윤재하가 말했다.
"안 그래도 어젯밤에 잘 지내냐고 연락 왔어요. 형한테 연락해도 답이 없어서 연락했대요. 놀러 가도 되냐고 물어보던데요."
식탁 위로 길게 뻗은 왼팔에 얼굴을 묻은 김석영이 코웃음을 쳤다.
"안 된다고 해. 걔 오면 기 빨려."
"네. 그럴 것 같아서 이미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
고개를 돌린 김석영은 묘한 눈으로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바라보는 것에 고개를 저은 그가 설핏 웃었다. 이따금 저 말간 낯을 하고서 앙큼하게 군다 싶다가도, 순수하기 짝이 없는 저 얼굴을 바라보면 헛웃음이 터지고 만다. 정말 뭘 알고 저러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된 이후부턴 더더욱.
"잘했어."
건조한 칭찬에도 배시시 웃은 윤재하는 그를 따라 식탁 위에 몸을 늘어뜨렸다. 가만히 시선을 맞추던 김석영이 눈을 감았다 뜨자, 윤재하 역시 눈을 감았다 떴다. 메마른 입술을 한번 훑으니 모양 좋은 입술을 따라 훑는다. 눈을 가늘게 좁힌 김석영이 웃음기가 어린 어조로 말했다.
"네가 고양이야?"
퍽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얼굴이 된 윤재하에게 김석영이 덧붙였다.
"어미 행동 따라 하는 새끼처럼 굴잖아."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김석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비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굳이 분류하자면.......
"칭찬인가."
귀엽다고 느꼈으니까.
"그럼 됐어요."
청량한 웃음소리를 흘린 윤재하가 눈을 휘었다. 그는 제가 이럴 때마다 허탈한 얼굴을 하면서도 끝내 웃어버리는 김석영의 얼굴이 좋았다.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검은 고수 머리칼의 남자는 언뜻 보기엔 무표정이 잘 어울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렇게 나른하게 풀린 표정이 더 잘 어울렸다. 의외로 입꼬리가 올라간 탓일지도 모른다. 다만 웃을 때나 하품할 때마다 뜯어지는 입술은 조금 염려스러웠다.
"입술 또 텄네....... 립밤 안 발랐어요?"
매일같이 피를 달고 있는 입술은 보는 것만으로도 따가워 보였으나 정작 당사자인 김석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별 대수롭잖은 태도로 입술을 훑거나 잘근거리기만 했다. 그러면 더 악화된다고 말해도 어깨만 으쓱일 뿐이다. 부러 약국까지 가서 립밤을 사 왔건만, 습관이 들지 않아서인지 직접 말해주지 않으면 바르는 법이 없었다.
"찝찝해. 미끌거리는 것도 영 별로고."
"그래도 참아야죠. 습관 들여야 해요."
어린아이에게 할법한 단호한 어조였다. 김석영은 여분으로 준비한 립밤을 건넨 윤재하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오묘해서 멀뚱하게 눈만 깜빡이는 그에게 툭 내뱉었다.
"왜. 키스할 때 입술이 따갑기라도 했나 보지?"
그래서 립밤 주는 거 아니냐고 덧붙이는 말에 윤재하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이내 눈가가 화르륵 붉어지며 변명한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면 왜 자꾸 남의 입술에 참견이야."
무심한 어조에 윤재하가 입술을 삐죽였다. 약간의 불만스러움이 어린 다갈색의 눈이 흑안을 응시했다. 잠시간 이어지던 눈싸움에 백기를 든 건 윤재하였다. 돌연 눈을 내리깔며 얕은 웃음을 터뜨린 그가 말했다.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어요."
"내가 뭘."
"난 사실."
별안간 상체를 내민 윤재하가 김석영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살짝 고개를 틀어 문지르는 행동은 뜯어진 입술 상처의 감촉을 느끼기 위한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장난 같은 그 행동은 꽤나 간지러운 감각을 퍼뜨렸다. 마지막으로 꾹 입술을 누른 윤재하가 살포시 얼굴을 떼어냈다.
"건조한 입술 감촉 좋아요. 부딪히고 있는 감각이 더 생생해서."
"허......."
그 건조한 입술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굳이 립밤을 강요하는 건 형의 입술이 아파 보여서지, 내 욕심 때문은 아니에요."
"......앙큼한 구석이 다 있네."
멋쩍게 웃는 낯의 입술을 손끝으로 튕긴 김석영이 읊조렸다.
"분신도 앙큼하려나."
"분신요?"
"응. 분신. 네 아랫도리 말고, 손톱으로 만든 분신 말이야."
"굳이 설명 안 해도 알아요. 그 분신인 거......."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손으로 가린 윤재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분신 얘기는 왜 나온 거냐 묻는 것에, 어깨를 떨며 웃던 김석영이 답했다.
"좀 전에 임무 수행하러 밖에 나간 것 같길래."
"......아. 벌써 나갈 시간 됐어요?"
시계를 확인해보니 눈속임을 위한 분신이 밖을 나설 시간이긴 했다. 새로 만든 분신은 이전처럼 윤재하를 본뜬 껍데기였으나, 미끼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만큼 정교한 술수가 더해진 것이었다.
본체의 기운을 흡사하게 풍기면서도 이지는 없었다. 지난번과 같은 예측불허한 상황을 미연에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오직 주입된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몸을 건드리는 영가를 봉해버릴 그릇이기도 했다. 더 이상 행방이 묘연한 형체를 찾는 데에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악귀를 대비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분신도 일하러 갔겠다, 나는 좀 씻고 올 테니까 편히 쉬고 있어."
새로운 분신과의 결속 증표인 팔찌를 살랑살랑 흔든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아, 그럼 저도 잠깐 서재에 갔다 올게요. 책 다 읽었거든요."
"벌써? 빠르네."
안채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면서부터 윤재하의 일 역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애초에 집주인이 요구한 것은 세 끼 식사가 전부였으나, 숙식까지 지원받는 주제에 통장에 찍히는 액수가 과했다. 사전에 합의한 것보다도 높은 금액이라는 게 문제였다. 새파랗게 질려 항의해보았지만, 김석영은 특유의 건조한 얼굴로 콧방귀나 뀔 뿐이었다.
결국 윤재하가 찾아낸 대안은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늘 비어 있는 사랑채의 관리도 시작됐다. 김석영은 그런 그를 굳이 말리진 않았다. 그래야 저 속에 담겨 있을 부담감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칼에 베인 손가락을 치료하면서 봤던 것처럼, 사랑채는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자 큰 어른의 서재로 쓰이는 곳이었다. 공간 한 켠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오래된 것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 발행된 책들도 가득했다. 김석영의 말에 따르면 독서가 취미였던 조부의 유산이라고 했다.
"멋진 분이셨을 것 같아요. LP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생을 즐길 줄 아는 분이셨지. 취미도 많고 재주도 많으셨어."
청소하는 윤재하를 구경하러 뒤따라온 김석영이 평연한 어조로 말했다.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봐."
"정말요?"
"응. 정말로."
마침 읽고 싶었던 책을 발견한 윤재하는 눈을 빛내며 웃어 보였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였다.
"그래. 그렇게 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김석영이 욕실로 향했다. 식탁 위를 정리하고 책을 챙긴 윤재하는 곧장 안채를 나섰다. 사랑채에 도착한 그는 흩날리는 먼지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새 먼지 쌓였네."
직접적인 생활을 하는 공간도 아닌데, 먼지 쌓이는 속도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쓴웃음을 지은 그는 큼직한 먼지만 해치우고 책장으로 직행했다. 책의 모서리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이후의 시선은 자연스레 책등의 향연으로 이어졌다. 가지각색의 제목을 훑는 것만으로도 책 한 권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집중했던 모양이다. 무심결에 시간을 확인하니 꽤 지나 있었다. 슬슬 올라가서 점심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오늘따라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보자.'
늘 느긋하게 씻는 김석영의 습관을 빌미 삼아 빼곡한 책장의 언어들을 훑어갔다. 마침내 이끌리는 제목이 있어 책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애꿎게도 바로 옆에 있던 책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노트?"
다급하게 줍고 보니 그것은 책이 아닌 오래된 노트였다. 손때가 묻어 있는 데다 군데군데 색 바랜 물감 또한 묻어 있었다. 그림을 그린 연습장이기라도 한 걸까. 호기심을 참지 못한 손이 노트를 펼쳤다.
"......동화?"
무선 노트의 안에는 직접 적어 내려간 듯한 문장과 함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펜으로 그려진 그림은 선의 느낌이 다소 거칠었으나, 자세히 보면 꽤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펜 선의 구조 안으론 수채화 물감이 은은하게 채색되어 있었고 곳곳엔 마르지 않은 선에 물감이 번지기도 했다. 실수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계산된 효과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묘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그림은 외국의 서적에나 볼법한 느낌이었다.
땅 아래는 밤이, 땅 위로는 낮이 시작되는 경계엔 알 수 없는 동그란 형태가 그려져 있었다. 눈 코 입 하나 없는 동그란 구체는 고양이의 털을 뭉친 공 같기도 하고 도깨비불처럼 보이기도 했다. 윤재하는 시선을 돌려 종이의 한편에 적혀진 글을 읽어 내려갔다.
"아주 먼 옛날,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곳에서 태어난 존재가 있었습니다."
경계의 지점에서 태어난 그 존재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탓에, 이리저리 떠돌며 살아갔습니다.
하늘의 구름처럼 둥둥. 바다의 물결처럼 일렁일렁.
외롭지만 자유롭게 세상을 유영하던 존재는 어느 날. 낮의 세상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그마한 방에 갇혀 있던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름도, 형체도 없는 존재는 무언가를 손에 쥔 채 누워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슬퍼하는가.'
여인이 말했습니다.
"마음을 전하지 못하여서 그렇다."
'왜 전하지 못하였는가.'
"몸을 움직이지 못해서 그렇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거든."
온몸에 붉은 반점이 오른 여인은 비쩍 말라 숨을 쉴 힘도 없어 보였습니다. 이름도, 형체도 없는 존재가 또다시 물었습니다.
'다른 이에게 시키면 되지 않은가.'
"아무도 전해주지 못할 거다."
왜 그런 것이냐 묻는 존재에게 여인은 그저 슬픈 듯이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여인이 말했습니다.
"너는 도깨비냐."
'아니다.'
"너는 나를 데리러 온 저승차사냐."
'아니다.'
"그럼 너는 무엇인데?"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눈을 끔뻑거리며 대답하였습니다.
'모른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인이 말했습니다.
"내 손을 잡아보겠느냐."
존재가 여인의 손을 잡자 존재의 일부가 여인의 손끝으로 스며들었습니다. 화들짝 놀라는 존재에게 여인이 말했습니다.
"움직일 수 있겠느냐."
머뭇거리던 존재가 여인의 말대로 손을 움직였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존재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혼은 곧 이승을 떠날 것이다. 혼이 떠난 육신은 빈껍데기에 불과하지. 점차 썩어갈 것이고 끝내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렇구나.'
존재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인이 물었습니다.
'춥지 않으냐.'
추운 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존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육신은 따뜻하단다. 나의 혼이 육신을 떠나거든 네가 나의 육신으로 들어가렴."
'그래도 되는 것인가?'
무언가를 받아보는 게 처음이었던 존재는 덩실덩실 몸을 흔들며 기뻐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무엇이지?'
"나 대신 서신을 전해 다오. 살아 숨 쉬는 모습으로, 곱게 단장하여. 그렇게 내 마음을 전해 다오."
간절한 여인의 말에 존재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저승차사가 들이닥쳐 여인의 혼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별채에 홀로 남은 육신의 몸에 들어간 존재는 비로소 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달님마저 몸을 숨긴 깊은 밤. 여인의 몸을 차지한 존재가 별채를 나섰습니다. 그녀가 미리 알려준 대로 여행을 떠난 존재는 어느 깊은 숲속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칠흑 같은 머리칼을 지닌 여인은 그녀가 말했던 서신의 주인이었습니다.
"너는 그이가 아니구나."
단번에 기다리던 이가 아닌 걸 눈치챈 여인이 슬픈 듯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서신을 건넨 존재가 말했습니다.
'서신을 전해주기 위해 왔다.'
서신을 건네받은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구슬프게 흘리며 존재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전해주어서 고맙다. 고맙다......."
조건을 수행한 뒤, 존재는 여인의 몸으로 낮의 세상을 떠돌았습니다. 그사이, 영문 모를 병에 걸려 별채에 갇혀 있던 여인이 사라지자 동네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삶에 대한 미련에 한을 품은 여인이 시체가 되어서도 세상을 떠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밭에서 일하고 돌아가던 한 아낙네가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엉망으로 풀어 헤쳐진 머리며 더러워진 복장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습니다.
"대낮이니 귀신도 아닐 테고. 웬 정신 나간 미친년인 게로구나."
혀를 찬 아낙이 여인을 앞섰습니다. 고약한 냄새에 코를 막으며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습니다.
"에구머니나!"
얼굴이 썩어가던 여인을 확인한 아낙이 충격을 못 이기고 졸도하였습니다. 아낙의 비명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왔다가 하나같이 경기를 일으키며 뒤로 넘어갔습니다. 개중 유일하게 정신을 붙든 한 아이가 부리나케 도망가며 외쳤습니다.
"시체다! 시체가 움직인다!"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에 낮의 세상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시체를 보고 놀란 인간들의 혼까지 나가자, 그들을 데리러 온 저승차사의 귀에 닿게 되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차사는 지하 세계의 주인에게 이를 고했습니다.
「그것을 잡아 오너라!」
주인의 명을 받은 차사들이 살아 움직이는 시체를 잡았습니다. 차사의 손이 닿자 재가되어 사라진 육신의 안에는 형태가 없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이게 무어냐.」
「나도 모른다.」
「일단 끌고 가자!」
지하 세계로 끌려간 존재는 그곳의 주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지하 세계의 주인은 존재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너는 무엇이냐.」
'모른다.'
「왜 낮의 세상을 어지럽힌 것이냐.」
'어지럽힌 적 없다.'
존재의 뻔뻔한 말에 혀를 찬 지하 세계의 주인이 죽은 영혼들을 불러오라 일렀습니다. 많은 수의 영혼들이 존재를 둘러쌌습니다.
「이게 다 너로 인해 죽은 인간의 영혼이다. 이래도 낮의 세상을 어지럽힌 적 없다 발뺌할 것이냐.」
영혼의 수에 놀란 존재가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존재에게서 반성의 기미가 보이자 지하 세계의 주인이 물었습니다.
「왜 시체의 몸에 있었던 것이냐.」
'육신을 받아서 그랬다.'
「육신을 어떻게 받았느냐.」
존재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지하 세계의 주인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습니다.
「너는 신도 아니요, 도깨비도 아니요, 혼도 아니건만. 어찌 낮의 세상과 밤의 세상을 오갈 수 있을까. 악의는 없었다고 하나 인간들의 목숨을 앗아간 죗값은 치러야 할 것이다. 허나 네놈의 재주가 퍽 쓸만하니, 내 너에게 업(業)을 청산할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삐삐삐
"......아."
식사 시간을 맞춰놓은 알람이 정신을 일깨웠다. 다급하게 시간을 확인한 윤재하가 혀를 찼다. 이쯤이면 김석영도 씻고 나왔을 시간이었다. 노트를 덮은 그는 뒷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고 원래의 자리에 끼워두었다. 아무래도 진짜 책이 아닌 데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들춘 셈이니 안채에 들고 갈 순 없었다.
본래 빌리려고 했던 책만 챙겨 든 윤재하는 빠르게 안채로 향했다. 다행히 너무 늦지 않은 모양이다. 때마침 씻고 나온 김석영이 그를 맞아주었다.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낸 김석영이 멀뚱히 선 윤재하에게 말했다.
"잔소리 그만."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하려고 했잖아. 다 알아."
움찔한 윤재하가 시치미를 뗐다.
"내가 뭘요?"
"바닥에 물 떨어진다느니, 머리 제대로 안 말리면 감기 걸린다느니 그런 말 할거잖아."
"바닥에 떨어진 물은 닦으면 그만이지만 감기 걸리면 고생하잖아요. 아직은 날도 추운데 조심해야......."
"그래. 그런 거."
한숨과 함께 웃음을 흘린 김석영이 일부러 머리칼을 털어댔다. 우수수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다가 고개를 바로 하니, 느른하게 웃는 낯이 윤재하를 맞이했다. 가늘어진 눈매엔 장난기가 어려 있다. 입술을 삐죽인 윤재하가 마른걸레를 찾아 돌아올 때까지 김석영의 시선은 끈질기게 따라왔다. 부러 시선을 피한 그는 김석영의 발치에 앉아 물기를 닦아냈다.
톡, 토독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등과 바닥 위로 새로운 물방울이 튀었다. 개의치 않고 쓱쓱 닦아내니 또다시 머리칼을 털어냈다. 어린애 같은 장난이었다. 웃음을 삼킨 윤재하가 부러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았다.
나른하게 웃은 김석영이 또 한 번 머리칼을 털어냈고, 토독 토독 떨어지는 물방울은 말간 낯 위에 안착했다. 빠르게 감은 눈꺼풀 위로 물기를 느낀 윤재하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자 서늘한 손끝이 눈 위를 훑어주었다.
"뭘 웃고 그래. 순해 빠져선."
"안 순해요."
"화도 안 내면서 안 순하긴."
"형한테 화를 왜 내요."
"그래. 그런 걸 순하다고 하는 거야."
시답잖은 대거리에 미소를 지은 김석영이 말했다.
"밥 먹자. 배고프다."
* * *
모처럼 날이 제법 따뜻했다. 대청 위에서 오수를 즐기고 일어나니 사위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자 식탁 위에 붙은 메모가 보였다. 윤재하의 글씨였다.
[장 보고 올게요.]
"악필이네."
생긴 것만 보아선 필체 역시 유려할 것 같은데 의외로 악필이었다. 글자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니, 과거의 저만은 못하지만.
"......야. 너 그렇게 쓰면 알아볼 수 있어?"
고3 어느 날이었다. 판서를 필기하던 김석영에게 옆자리의 동급생이 말했다. 늘 흘끔거리기만 하고 말 한번 못 걸더니 이날은 웬일로 말을 건다 했다. 노트를 채운 꼬부랑 글씨가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제 호기심을 못 이기고 물었다. 김석영은 동급생을 한번, 그리고 제 노트를 한번 보더니 여상한 투로 말했다.
"응."
"......그걸 알아본다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동급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트를 가리켰다.
"이거 뭐라고 적은 건데?"
손끝이 닿은 곳을 바라본 김석영이 문장을 읊었다. 칠판에 적힌 것과 똑같은 문장에 헛숨을 터뜨린 동급생이 다른 문장을 가리켰다.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내자 오기로 시작한 질문은 감탄으로 변해갔다.
"......아무리 악필이어도 직접 쓴 사람은 알아보는구나."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 쓰길래."
턱을 느슨하게 괸 김석영이 묻자 동급생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제가 먼저 말을 걸어놓고서도 김석영이 제게 말을 걸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는 태도였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그가 제 노트를 보여주었다. 꽤 정갈한 필체였다.
흐음. 눈을 가늘게 뜬 김석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칠판을 바라보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끝엔 여전히 악필이 생겨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백발의 노인이 고택의 손님으로 찾아왔다. 아주 오래전에 써놓은 듯한 편지를 건네받은 김석영은 봉투에 적힌 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탄이 나올만한 명필이었다.
"......아무리 악필이어도 직접 쓴 사람은 알아보는구나."
일순, 그는 동급생과의 일이 떠올랐다. 딱히 제 필체에 대해 신경을 써 본 적도 없으나 그날은 왜인지 묘한 충동이 생겨났다.
"내가 뭘 주면 되겠나."
대가를 묻는 노인에게 도리어 김석영이 물었다.
"어르신의 필체를 받을 수 있을까요?"
판서로 이름을 날리는 교사의 시간이 돌아왔다. 하암, 동급생은 연신 늘어지는 하품을 내뱉으며 노트를 꺼냈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에 나올 부분이라 강조하는 교사의 목소리는 한 귀로 흘리며 부지런히 펜만 놀렸다. 그러다 불쑥 옆에서 튀어나온 하얀 손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노트를 보여주는 것에 의아하게 바라보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어."
말도 안 돼. 기가 막힌 악필은 어디 가고 웬 끝내주는 명필이 노트를 채워가고 있었다. 제 눈을 비빈 동급생이 김석영을 한 번, 노트를 한 번 보더니 물었다.
"......네가 쓴 거 맞아?"
느슨하게 턱을 괸 김석영이 한쪽 어깨를 가볍게 추켜올렸다. 시선을 거둔 그가 칠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끝엔 근사한 필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때 그렇게 대가로 받은 필체는 김석영이 받아 온 것 중에서 유일하게 쓸만한 것이었다. 이제는 악필을 흉내 내기도 쉽지 않아 왼손으로 메모지에 끄적거려보던 그는 별안간 손을 멈췄다. 오른 손목에 추가된 팔찌에서 분신의 이상이 느껴진 것이다.
"......뭔가 걸렸구나."
술수에 걸려드는 즉시 안채로 오게끔 설계된 분신이 움직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안에 담긴 것이 거세게 날뛰고 있는 것도.
메모를 정리하고 마른 목을 축인 김석영이 대청마루로 향했다. 분신의 기운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가올 대상을 기다리던 그때. 고개를 숙인 채 비틀비틀 다가오는 분신이 고개를 들었다. 김석영을 확인하자 분신의 다갈색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너......, 너......! 죽일, 죽일 거야......!"
형형하게 노려보며 읊조리는 말이 퍽 사나웠다. 가볍게 웃은 김석영이 분신의 안에 있는 것을 응시했다. 원한에 뒤덮여 일그러진 형태가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것은 지난번의 그 악귀가 아니라는 것이다.
"넌 뭐지?"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죽일 거야......!"
"말만 해봤자 무섭지도 않은걸. 그러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봐."
할 수 있다면. 비소를 매단 김석영이 분신의 몸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것에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기세가 흉포해졌으나 분신의 껍데기는 착실히 그에게 다가왔다. 마침내 김석영의 앞에 긴 그림자가 졌다. 눈앞에 선 분신을 물끄러미 바라본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넌 뭐지?"
"......죽일, 죽일 거야.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릴 거야......!"
"왜? 내가 당신한테 뭘 했길래."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길을 잃은 원한은 아니었다. 저것은 분명히 김석영을 향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분신의 껍데기에 가로막혀 있으나 어떻게 해서든 움직이기 위해 발악하는 의지가 지독했다. 이내 조금씩 올라가는 손이 그의 목으로 뻗어왔다. 그저 묵묵히 시선만을 보내는 김석영에게 분신이 말했다.
"......네가 내 아이를, ......내 아이를 죽였으니까."
"내가?"
"그래. 네가......! 네가 내 아이를, ......내, 아이, 재하를......!"
악에 받친 외침이 터졌다. 분신의 손이 순식간에 창백한 목을 붙들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에서는 억누르는 껍데기의 힘과 그 속에 갇힌 존재의 힘이 충돌하고 있었다. 모든 움직임에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은 김석영이 익숙한 이름을 입안에서 되뇌었다.
재하. 내 아이, 재하.
건조한 눈으로 분신을 응시하던 김석영이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손끝을 떨며 비틀거리던 분신의 목을 낚아챈 그는 제가 있던 자리에 육신을 처박았다. 대청 위로 쓰러져 목을 짓눌린 분신이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재하?"
"죽여버릴 거야!"
"당신이 윤재하의 어머니라고?"
이것이 윤재하가 찾아 헤매던 모친이라고? 목을 짓누른 손에 힘을 가하고 상체 위에 올라탄 김석영이 마주 닿는 시선 너머의 형체를 응시했다. 녹아 흐르는 타르처럼 검은 눈물에 가려진 이목구비는 쉽사리 형태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럼 확인해봐야지."
왼손으로 모가지의 혈을 짓누르고 움직임을 붙든 김석영이 오른손으로 분신의 심장께에 손을 집어넣었다. 꾸드득, 밀려 들어오는 손가락이 그 안에 있던 형체를 붙들었다. 손끝에 깃든 열기에 몸을 꿈틀대던 형체가 서슬 퍼런 시선을 보내며 고함을 질렀다. 귀를 찢을듯한 곡성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김석영이 형체를 단숨에 빼냈다.
「놔, 놔아―!」
분신의 몸을 찢고 억지로 빼내자 육신의 제약에서 벗어난 형체가 거세게 발악했다. 이제 막 쌓여가는 원한은 본연의 형태를 무너뜨리고 있지만 아직 완전한 악귀가 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원한 너머로 넘실거리는 슬픔은 어딘가 애처로운 구석이 있었다.
'살생을 저질렀다거나 사람을 해친 적은 없어 보이는데....... 내재된 기운도 묘하게 깨끗하고.'
확실히 지난번에 마주했던 악귀와는 달랐다. 하지만 묘하게 그것의 냄새를 풍기는 듯한 것은 제 기분 탓일까....... 형체를 마주한 김석영의 검은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이것이 윤재하의 모친으로 둔갑한 악귀의 수하일지도 모르나 확신이 서진 않았다. 단순히 악귀를 따라 윤재하의 곁을 지켰다고 하기엔 내뿜는 감정 역시 과했다.
"당신이 정말 윤재하의 어머니라면, 왜 나를 해치려는 거지?"
「네가, 네 놈이 우리 재하를 죽였으니까!」
"내가 윤재하를 죽였다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네 놈을 만나러 간 이후부터 재하의 기운이 사라졌으니까! 이승에서의 기운이 완전하게 사라졌어. 네가, 네 놈이 재하를 데리고 간 거잖아, 네가 재하를 죽인 거잖아!」
목을 옥죄는듯한 고성이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형체를 응시하던 김석영이 읊조렸다.
"당신이 진짜 윤재하의 어머니인지는 둘째치고, 윤재하가 찾아 헤매던 대상인 건 확실하네."
「너 때문에 재하가, 재하가......! 돌려줘, 내 아이를 돌려줘―!」
불시에 손을 뻗은 형체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혀를 찬 김석영이 손끝에 기운을 흘러 넣었다. 미세하게 흐르는 푸른 화기에 고통스러운 숨을 헐떡인 형체가 손을 떨궜다. 눈앞의 존재가 윤재하가 찾던 대상이란 게 확인된 이상, 함부로 소멸시킬 수 없었던 김석영이 널브러진 분신의 몸에 형체를 다시 집어넣으려던 순간이었다.
"......형?"
막 안채에 들어선 윤재하가 황급히 달려왔다.
"형!"
다급한 목소리에 김석영의 손아래에서 버둥거리던 형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움직인 형체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김석영을 붙든 대상을 바라보았다.
"아......."
뻐끔거리는 입술 사이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재하...? 재하니?」
윤재하의 몸이 덜컥 굳었다.
"......엄마?"
엄마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형체를 가리던 타르 같은 까만 기운이 스르륵 사라지고 본연의 모습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구정물을 씻어낸 것처럼 어느새 말간 낯을 한 여인이 일그러진 얼굴로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재하, 재하야!」
형체의 몸을 제압하던 김석영이 윤재하를 돌아보았다. 떨리는 눈 위로 물기가 차올랐다. 제게 손을 뻗는 형체를 바라보던 윤재하가 여전히 그의 목을 쥐고 있는 김석영의 손을 붙들었다.
"형, 손 좀....... 손 좀 놔줘요."
"......."
"형, 제발......!"
김석영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다급하게 빠져나온 형체가 윤재하를 붙들었다. 손을 뻗어 말간 낯을 어루만지고 곳곳을 확인하는 형체에게 윤재하의 시선 역시 고정되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서로를 마주한 그들은 제법 비슷한 외향을 하고 있었다.
「살아 있었어? 살아 있었던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런 말을......."
「저자를 만나러 간 이후로 네 기운이 사라져서. 죽었다고....... 죽어서 헤매고 있다고......!」
말갛던 낯이 불시에 일그러졌다. 또다시 형형한 기운을 내뿜으며 악이 서린 낯을 한 형체가 김석영을 노려보았다. 당황한 윤재하가 형체의 시선을 붙들었다.
"아니야, 엄마. 죽은 거 아니야. 나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그때는 사정이 좀 있어서......!"
「놔, 재하야. 난 저걸 죽일 거야.」
단 한 번도 형체의 입에서 누군가를 해치겠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었다. 제 귀를 의심한 윤재하가 형체의 앞을 가로막으며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저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릴 거라고.」
목석처럼 굳어버린 윤재하의 낯이 파리해졌다. 마주한 눈에 어린 살기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울분이 가득한 형체의 낯을 바라보던 윤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장난이지?"
장난? 비틀린 비소를 지은 형체가 김석영을 노려보았다.
「아니. 장난 아니야. 난 저걸 죽여버릴 거야. 그래야 네가 안전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형은 날 도와주는 사람이야. 해쳐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아니? 저건 널 해칠 거야. 내 말 들어. 넌 속고 있는 거야.」
잔뜩 일그러진 낯을 마주한 형체가 고개를 돌렸다. 줄곧 건조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던 김석영을 향해 말했다.
「저건 사람 명줄 잡아먹는 악귀니까.」
일순 김석영의 흑안 위로 이채가 맴돌았다. 형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숨을 삼킨 윤재하가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제가 바라볼 때면 언제나 기민하게 마주해주던 그의 시선은 형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얼굴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목이 졸린 사람 같은 음성이 허공에 흩어졌다. 악에 받친 눈이 두려움을 잃고 김석영을 마주 보았다. 곧 떨리는 숨결을 향해 고개를 돌린 형체가 속삭였다.
「말 그대로야. 저건 사람 명줄 잡아먹는 악귀나 다름없어.」
"......악귀라니, 형은 사람이야."
「그래? 산 사람 명줄로 살아가는 게 정말 사람이야?」
"......그게 무슨......."
"어떻게 알았지?"
불쑥 튀어나온 물음이 혼란스러운 음성을 가로막았다. 숨이 턱 막힌 윤재하가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여전히 부딪히지 않았다. 그는 형체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형."
"그건 저승 땅을 밟아본 적도 없는 망자가 알아내기엔 고급 정본데."
「하! 부정도 안 하는구나!」
"맞는 말이니까."
단조로운 어투로 읊조린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윤재하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의 앞에 선 그가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
「네놈이야말로 악귀나 다름없어. 그동안 산 사람의 명줄을 얼마나 잡아먹었지? 재하의 명줄도 빼앗을 셈이야?」
"......대답을 안 하네."
고개를 툭 떨구며 한숨을 내쉰 김석영이 읊조렸다. 동시에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날카로워졌다. 온몸을 태워버릴 것 같은 위압감에 비틀거린 형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본 김석영이 형체의 목을 붙들려던 그때.
"......안 돼요."
형체를 끌어안은 윤재하가 그를 응시했다. 물기 어린 눈에 두려움이 맺히자 김석영의 움직임이 멎었다.
"......약속했잖아요. 해치지 않기로."
목소리의 끝이 애처롭게 떨렸다. 비단 음성뿐만이 아니었다. 말간 눈과 입술, 그리고 손끝까지. 온몸을 떨면서 형체를 감싸 안은 윤재하가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김석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석영은 그저 윤재하의 떨림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마 해치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을 덧붙일 수조차 없었다.
"......엄마예요. 악귀가 아니에요. 지금은 놀라서....... 놀라서 그런 거니까, 오해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제발, ......해치지 말아요."
"......."
"부탁할게요......."
뿌옇게 차오른 눈물 때문에 김석영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움직임도, 거세게 짓누르던 위압감도 사라진 그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답을 내어주었다. 그래. 낮게 잠긴 목소리로 내뱉은 김석영이 등을 돌리고 나서야 차오른 눈물을 툭 떨군 윤재하는 선명해진 시야로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