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안녕! 잘 지냈.......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사랑채에 점심을 가져다 놓고 오는 길이었다. 숲길에 올라서던 이상현이 윤재하를 마주 보고 경악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인영에 놀란 건 매한가지였던 윤재하가 숨을 삼키며 멈춰 섰다.
"야 너 괜찮아?"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온 이상현이 울긋불긋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윤재하가 몸을 틀어 발걸음을 뗐다.
"어? 잠깐, 잠깐만!"
무심하게 지나치려는 걸 온몸으로 막아선 이상현이 아랫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어쩌다 그랬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대답 안 해줄 거 같으니까 그냥 내가 참을게. 병원은 다녀왔어?"
"어."
"그래. 다행이네. 어, 근데 혹시 그거 밥이야? 아침?"
품 안에 들고 있던 아침 분의 보온 박스에 시선을 던진 이상현이 눈을 빛냈다.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두 눈을 부릅떴다.
"먹었어?"
"어."
"그 인간이 아침을 먹는다고? 정말 네가 만든 걸 먹었어?"
"......."
먹었으니까 비어 있겠지. 표정으로 전해지는 대답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린 이상현이 '미안. 네 요리를 우습게 보고 한 말은 아니었어'라며 사과했다. 그러다 불쑥 고급스러워 보이는 종이 가방을 건넸다.
"점심 두고 오는 길인가 봐? 안 그래도 여기 올라오기 전에 저택에 들렀는데 안 보인다 했지. 사실 이거 주고 싶었거든. 빵 좋아해? 안 좋아해도 이건 한번 먹어봐. 엄청 유명한 맛집이라 아침부터 줄 서서 산 거야."
"필요 없어."
"하, 거참. 사람 성의인데....... 야박하게 굴지 말고 좀 받아주라. 일 잘해주는 것 같아 고마워서 그러는 건데."
"잘하고 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 너는 뭘 또 묻고 그러냐. 연락 안 오는 거면 잘하고 있는 거지 뭐."
대체로 하루 이틀이면 못하겠다고 연락 오는 것을 무려 한 달 가까이 버텨줬는데. 그게 잘한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요리 실력이야 직접 맛본 적 없으니 평가할 순 없지만 아무렴 어떻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종이 가방을 흔들어댔다. 오두방정을 무감하게 바라본 윤재하가 한숨처럼 말했다.
"받을 자격 없어. 잘한 적 없으니까."
"아니 뭐 이런 거로 자격을 운운해? 그냥 선물이야."
"됐어. 너나 먹어."
예의 그 위압적인 키와 어깨가 남들에겐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줄도 모르는지, 윤재하는 무감한 낯으로 성큼성큼 직진했다. 황급히 몸을 틀어 비켜준 이상현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성질머리하고는. 쟤도 누구 못지않게 사회성이 심각하네.......'
쯧쯧, 재차 혀를 찬 그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사랑채를 지나쳐 곧장 안채로 향하니 언제나처럼 대청에 늘어진 사촌의 모습이 그를 반겨주었다.
"형. 살아 있냐. 살아 있으면 손가락 움직여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불 틈에 삐져나온 다섯 손가락 중 가운데를 까딱 움직인다. 인상을 와락 구긴 이상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갔다.
"유치해서 진짜."
온몸을 늘리며 기지개를 켠 김석영이 이불 속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눈가가 짓무른 제 사촌의 낯을 바라본 그가 깊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웬일로 빨리 극복했네."
"......아직 극복 못했어. 진행 중이야."
노인의 장례식이 끝난 지 고작 이틀이었다. 온전하게 떨쳐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 장례식이 이어지는 내내 선잠 한 번 못 들었던 김석영이 생각났다. 억지로라도 집에 데려와 밥 한 끼 먹일 걸 그랬다는 모친의 한숨에 덩달아 이상현의 마음도 불편해진 것이다. 겸사겸사 윤재하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할 겸, 선물까지 사 왔으나 매몰차게 무시당했지만.
한숨과 함께 종이가방에서 빵 하나를 꺼내 포장지를 벗긴 이상현이 나른하게 늘어진 김석영의 눈앞에 흔들었다.
"먹을래? 이거 아무나 못 먹는 거야. 새벽부터 줄 서야 겨우 살 수 있는 걸 내가 해냈지."
"됐어. 너나 먹어."
"......."
이거 내가 어디서 들었더라. 멈칫하던 이상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사람 성의 개무시하는 거 기 센 인간들의 특징인가? 아니면 뭐, 여기 기운이 사람을 싸가지 없게 만드는......."
"뭐라는 거야."
"'됐어. 너나 먹어'라고, 형 말고 다른 영험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더라고.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단 두 입 만에 빵 하나를 해치운 이상현이 불퉁하게 투덜거렸다. 저 말고 다른 영험한 분이라니. 누구를 지칭하는지 단번에 눈치챈 김석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윤재하라도 만났나 보지?"
"어. 맞아. 윤재하....... 아니, 잠깐. 형, 윤재하랑 마주쳤어?"
두 눈을 부릅뜨고 의아하게 묻는 것에 김석영이 여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칠 일이 뭐가 있어서? 내가 분명히 밥만 두고 오면 된다고 얘기했는데......."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남 이름도 잘 기억 못하는 인간이 어쩌다 마주친 도우미의 이름까지 알고 계신다? 뭔가 수상한데. 설마 둘이 아는 사이는 아니지?"
에이, 설마. 제 입으로 뱉어놓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이상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제 사촌을 바라보던 김석영이 '아는 사이 맞는데'라고 툭 내뱉자 벙찐 낯으로 되물었다.
"윤재하랑 아는 사이라고......?"
"응."
"......어떻게?"
아니 뭔 이런 인연이 다 있지? 신기하단 낯으로 중얼거리는 것에 김석영은 더한 말을 이었다.
"한때는 친구가 될 뻔도 했었지."
"......뭐라고?"
가볍게 웃음을 머금은 김석영이 어린 날의 윤재하를 떠올렸다.
"형. 형은 왜 맨날 혼자 다녀요?"
말간 낯으로 퍽 맹랑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악의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침없는 돌직구가 재밌어서 김석영은 선뜻 대답해주었다.
"친구 없어서."
그러자 아이가 잔뜩 상기된 얼굴이 되어 히죽 웃었다.
"그럼, 그러면 있잖아요."
"응."
"......내가 친구 해줄까요?"
그건 예상치도 못한 제안이었다. 잠시 말문이 막힌 김석영이 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답을 기다리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낯엔 약간의 부끄러움과 커다란 설렘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다. 제가 거절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하는 표정에 불쑥 못된 장난기가 솟구쳤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아니."
"......."
아이는 반짝거리는 말간 눈을 크게 홉 뜨고 김석영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정말 거절이 돌아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한 듯, 다갈색의 말간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언뜻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아서 울음을 터뜨리진 않을까 했는데 도리어 왈칵 미간을 찌푸리곤 아이가 되물었다.
"왜요?"
초등학교 졸업도 못 한 열세 살짜리가 곧 스물을 앞둔 저랑 왜 친구를 안 하느냐 묻는 모양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간신히 억누른 김석영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너만 한 사촌 동생이 있어. 너랑 친구 하면 걔랑도 친구 해야 하지 않을까."
"......."
아이, 윤재하는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당한 것처럼 반응한 것치곤 너무 쉽게 납득해버린다. 똑똑한 건지, 맹한 건지.
"야, 형. 뭔데, 그게 무슨 말인데."
"......."
훗날 그 사촌 동생이 이렇게 맞먹을 줄 알았더라면 그냥 그러자고 고개라도 끄덕여줄 걸 그랬나 보다.
"넌 알 거 없어."
"......지금 둘이서 나 따돌려?"
"사서 상처받으려고 하네. 정말 답변이 듣고 싶어?"
"아, 됐어. 그냥 말하지 마."
하여간 성격하고는....... 그냥 장난이라고 넘기면 될 일을 꼭 저렇게 얄밉게 받아쳐서 사람 열불 나게 만든다. 불퉁하게 투덜댄 이상현이 늘어진 김석영을 툭툭 건드렸다.
"점심 두고 가던데 가서 밥이나 먹어."
"아. 벌써 점심땐가."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넘긴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먹기 귀찮다고 미적거리는 데에만 삼십 분을 잡아먹는 인간이 웬일로 단번에 일어났다.
'이젠 끼니를 안 거르나 보네. 윤재하의 손맛이 좋은가?'
그러고 보니 장례식장에서 얼굴을 봤을 때에도 묘하게 살이 오른 것 같다고 느끼긴 했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것에 이상현이 덩달아 따라나섰다.
"새 도우미님이 잘 챙겨주시나 봐?"
"애쓰고 있긴 하지."
"와, 나 보는 눈이 좀 타고났나 봐. 형이랑도 아는 사이였다니. 어쩐지 보는 순간 그냥 끌리더라."
히죽 웃으며 으스대는 걸 흘끔 바라본 김석영이 입을 열었다.
"넌 어쩌다 만났는데."
"아, 내가 제대로 말 안 해줬었지? 학교에서 만났어. 종강일에 처음 봤는데....... 어흐, 미치겠네. 생각하니까 또 소름 돋았어."
"왜."
"아니, 웬 영가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잖아. 딱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더라고. 그래도 오늘 보니까 다 떨구어냈는지 어깨가 가벼워 보이더라. 얼굴은 엉망이었지만. 형도 걔 얼굴 봤어?"
"뭐, 어쩌다 보니."
고개를 끄덕인 김석영이 이상현이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았다.
"근데 영가를 달고 다녔다고."
심지어 주렁주렁이라. 탐색하듯 가늘어진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이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까 나름 유명 인사더만. 그 잘나고 예쁜 얼굴로 귀신이랑만 대화한다고."
"윤재하가?"
의외로움을 숨기지 않고 되묻자 '몰라, 나도. 내가 직접 본건 아니라서'라며 어깨를 으쓱인다.
"물론 소문이라 과장되게 부풀린 거겠지만, 내가 볼 땐 본인도 혼자 있기를 자초하는 것 같긴 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랑채에 다다랐다. 곧장 툇마루로 달려간 이상현이 보온 박스를 들고 안에 들어섰다. 좌식 식탁을 펼친 그가 음식을 놓으며 감탄을 터뜨렸다.
"뭐냐. 엄청 그럴싸한데? 맛있겠는데?"
슬쩍 눈치를 보며 계란말이를 몰래 집어 먹은 이상현이 두 눈을 홉떴다. 제 입맛엔 조금 싱겁긴 했지만 김석영이 먹기엔 담백해서 딱 좋은 정도였다. 제법 집주인의 입맛을 파악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웃기는 새끼네, 이거. 이렇게 잘하면서 왜 자격을 운운해?"
"자격?"
물로 목을 축이던 김석영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반찬들을 하나씩 맛보던 이상현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윤재하 주려고 빵 사 온 거거든? 마침 오는 길에 마주쳐서 건네주려니까 받을 자격 없다고 휑 가버리잖아."
"그래?"
날을 세우며 경계하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 김석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고 보면 윤재하는 쓸데없이 정직한 구석이 있었다. 아니, 일종의 결벽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받는 것에 대한 면역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타인의 가벼운 호의조차도 스스로를 잣대 삼아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그 기준에 통과하지 못하면 별거 아닌 호의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상현에게 그런 말을 뱉은 거겠지. 한순간의 실수로 잘리게 된 상황이 온 순간, 그는 결국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제게 주어진 호의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언젠가 저 또한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날도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매 순간 모든 상황과 감정에 앞뒤 관계를 분석하고 행동에 자격을 부여하는 삶은 너무 고달프지 않은가. 자기 학대적인 행동이라고, 김석영은 생각했다.
"기분은 좀 어때 보였어."
"기분? 글쎄. 모르겠는데. 좀 안 좋아 보였나? 근데 볼 때마다 그런 얼굴이긴 하던데, 걔는."
"모르면 됐고. 이참에 손도 좀 치우고."
계란말이 하나를 더 집던 이상현이 냉큼 입안에 욱여넣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흘긴 김석영이 식사를 시작했다. 담백하고 뒤끝이 깔끔한 게 역시 그의 취향이었다.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이토록 제 기준에 맞춘 식사를 하게 되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윤재하가 떠나고 나면 내심 그리워질 것 같기도 했다.
"......맛있어?"
"응."
주린 배를 부여잡은 이상현이 입맛을 다셨다. 이른 오후만 되어도 모든 빵이 매진이라는 유명 제과점에 들르느라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던 탓이다. 물론 눈앞에 있는 그의 사촌은 이런 제 사정을 헤아려주긴커녕, 사람 사이의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상현은 내심 기대했다. 시간대를 봐서라도 한 번쯤은 권유해주겠지. 하지만 김석영은 끝내 한 수저 권하지도 않았다.
"......형 진짜 소시오패스 같아."
"너 근데 왜 왔더라."
"이거 봐, 이거. 제 할 말만 하는 거. 다시 한번 말하는데, 형 너 같은 사람을 세간에선 소시오패스라고 말......."
"꿈자리 사나워지고 싶나 봐."
"......엄마가 형한테 가보라고 해서 왔어. 밥이라도 한 끼 먹이고 보낼 걸 그랬다면서. 겸사겸사 윤재하 얼굴도 볼 겸......."
반찬통을 차곡차곡 정리한 김석영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네가 걔 얼굴을 왜 봐."
"......좀 보면 안 돼?"
"굳이 볼 이유도 없지."
"이유가 왜 없어? 내 제안에 승낙해준 거나 지금까지 잘 버텨주는 거 고마워서 인사하려는 건데."
"그래?"
기가 차서 대꾸하는 이상현에게 김석영이 보온 박스를 안겨주었다. 저도 모르게 부둥켜안은 이상현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까딱이는 고갯짓으로 저택을 가리켰다.
"그럼 그거 가져다주면서 인사해."
"또 은근슬쩍 부려 먹지......."
하긴 이 인간한테 뭘 바라냐만. 속으로 혀를 쯧쯧 찬 이상현이 몸을 일으켰다. 김석영도 덩달아 일어나길래 웬일로 배웅을 해주나 했더니 홀라당 안채로 걸음을 틀었다.
그럼 그렇지....... 한껏 투덜거리며 저택으로 향한 이상현이 벨을 눌렀다. 통 잠잠한 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새 나갔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윤재하의 이름을 불렀다.
"윤재하! 집에 없....... 뭐야. 왜 이제 나오냐. 없는 줄 알았잖아."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덜컥 문이 열렸다. 손잡이를 잡고 서서 시선을 내리깐 낯엔 귀찮음이 역력하다. 괜스레 울컥한 이상현이 보란 듯이 보온 박스를 들어 올렸다.
"집주인께서 이거 가져다주라고 해서 온 거거든?"
대답도 없이 박스를 넘겨받은 윤재하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문을 닫았다. 아주 문전박대가 따로 없다. 위로 가나 아래로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제 신세를 한탄한 이상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커튼 사이로 이상현이 떠나는 걸 확인한 윤재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있다 갈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일찍 떠났다. 김석영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던 찰나였기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미루지 못해 아쉬워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점심 분의 보온 박스를 돌려주었으니 식사를 끝마친 건 확인된 사실이고, 저녁보다는 낮에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좋을 테니 슬슬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니 다행히도 붓기가 제법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봤자 못난 건 매한가지라 괜스레 곳곳을 살핀 윤재하는 끝내 세수까지 더하고서야 걸음을 뗐다.
오늘따라 김석영의 가옥을 가로지르는 숲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거리의 문제가 아닌 제 마음의 문제라는 걸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더딘 보폭으로 사랑채를 가로질러 안채에 다다랐다. 그새 긴장했는지 입술이 바짝 말랐다. 너울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너 번의 심호흡을 반복했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렇다고 더는 지체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윤재하는 제 몸을 숨긴 기둥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팔꿈치를 지탱하며 턱을 괸 김석영과 시선이 맞닿았다. 줄곧 그곳에 서성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언제부터 알았냐는 표정인데."
"......."
"숨기고 싶었으면 발소리를 죽이려는 성의부터 보여봐."
"......숨기려던 거 아니었어요. 만나러 온 거니까."
"아닌 거 치곤 너무 놀라잖아."
웃음을 흘린 김석영이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앉아. 시선이 안 맞아서 목 아프거든."
고개를 끄덕인 윤재하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근처에 널브러진 종이 가방에서 빵 하나를 꺼낸 김석영이 불쑥 건넸다. 이상현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받아들이자 피식 웃은 그가 입을 열었다.
"못 미더워 보여도 먹는 거로 장난칠 놈은 아니야. 먹어도 안 죽어. 빵 싫어하는 게 아니면 나중에 가져가."
"......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좀 더 걸릴 줄 알았더니."
멋쩍은 웃음을 매단 윤재하가 잠시 머뭇거렸다.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고 말했다.
"저 내일 나가볼게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이밍 좋네."
첫 화두가 나가겠다는 말일 줄은 몰랐는데. 묘한 얼굴로 김석영이 말하자 윤재하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네가 나간다고 해도, 여기서 있었던 일을 묵인할 생각은 없는데 어쩌지."
"네. 알아요."
"각오는 한 모양이니 물어볼게. 너 뭘 달고 다니는 거야."
"......."
직구였다.
움찔한 윤재하가 마른침을 삼키며 김석영의 흑안을 마주 보았다.
"네가 온 이후로 이곳의 영가들이 대거 줄어들었어. 누구 말에 의하면 영가들을 달고 다녔다던데. 어때. 네가 듣기에도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 않나?"
"......영가가 줄어들다니,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애초에 일부러 달고 다닌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귀찮아서 내버려 둔 게 다라고요."
"너처럼 영기를 강하게 타고난 인간에겐 영가들이 쉽사리 달라붙을 수 없어. 알고 있을 텐데. 귀찮아서 내버려 뒀다는 말은 대답이 못 돼."
"......."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피부에 닿는 김석영의 직설적인 시선이 마치 숨통을 조이는 손길 같았다. 미약한 숨을 내쉬며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은 윤재하가 억눌린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그렇다고 일부러 끌어모은 건 아니에요. 그저, 종종 상성이 맞는 영가들이 있었고 게 중에 악의를 가진 것들은 없었어요. 몸에 달라붙는다고 한들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것들도 아니라 신경 안 쓴 게 다예요."
"그럼 지금은."
"터의 기운이 워낙 강해서....... 버티지 못하겠다고 떨어져 나갔어요."
"전부?"
심장이 철렁했다. 떨리는 손끝을 둥글게 말아 쥐며 힘을 주었다. 그렇다고 해야 하는데, 목구멍을 비집고 내뱉은 말은 결국 진실이었다. 그에겐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든 것이다.
"전부, 는....... 아니에요."
"얼마나 남겨뒀어."
"한 명뿐이에요."
"그게 지금 여기에 있고?"
윤재하가 다급하게 말을 잇는다.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냥 갈 곳이 없어서 곁에 있는 것뿐이에요. 이제 곧 함께 나갈 거고, 그럼 여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니까......!"
"그게 왜 사람이야."
건조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이어지던 말을 끊어냈다. 색소 옅은 다갈색의 말간 눈이 흔들렸다.
"착각하면 안 되지, 윤재하. 이승에서의 명이 끊어진 것은 망자라고 불러. 사람이 아니라.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네가 망자를 달고 다닌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야."
단조로운 어조였음에도 그가 내뱉은 말은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말문이 막히고 목마저 메어와서, 윤재하는 말하는 방법을 잊은 것처럼 하염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궁지에 몰린 쥐가 된 기분이었다.
"망자를 부릴 생각이야?"
"......아니, 아니에요."
"그럼 됐네. 지금이라도 떨쳐내. 이왕이면 내 눈앞에서."
간단한 답을 제시한 김석영이 대답을 종용했다. 표정이라곤 없는 그 무감한 낯에, 일순 윤재하의 마음속에서 거센 반발이 솟았다.
"제가 알아서 해요."
"알아서 달고 다니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윤재하의 눈가가 붉어졌다. 잘근거리는 입술 또한 그러했다. 울컥 치미는 화를 눌러 삼키며 질끈 눈을 감은 그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안 돼요?"
"진심으로 묻는 말이야?"
"진심으로 묻는 말이에요."
시원스레 뻗은 눈매가 가늘어지며 잔뜩 굳어버린 낯을 직시했다. 시선을 되받아치는 눈가와 굳게 닫힌 입술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 얼굴에서 어린 시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제게 향하는 부정적인 감정과 악의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내던 열세 살의 윤재하가.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널 화나게 해?"
"......."
굳어 있던 얼굴이 일순 무너졌다. 균열이 일어난 틈 사이로 당황이 스쳐 갔다.
"명줄이 다한 존재가 저승이 아닌 이승을 맴도는 건,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야. 게 중엔 제가 미련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떠돌아다니기도 하지. 모든 것에는 제 자리라는 게 있고, 망자의 자리는 이승이 아닌 저승이야. 존재해선 안 될 곳에 존재하는 건 그들에게도 고통일 뿐이고."
"......."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와 함께할 순 없어. 결국 서로에게 희망 고문이 될 거야. 네가 왜 망자에게 곁을 내어줬는지는....... 그래, 더는 묻지 않을게. 다만 그게 비정상적이라는 건 네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어야 해. 돌이킬 수 없기 전에 정리하는 게 좋아."
나 역시 나비가 맴도는 걸 방치하는 처지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자조적으로 덧붙인 김석영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받아들이는 건 네 몫이야. 내가 개입하는 건 여기까지. 그 외의 것도 그냥 묵인해줄게. 마지막이니까."
붓기가 제법 가라앉은 말간 낯을 바라보며 김석영이 말했다.
"내일 간다고 했지."
"......네."
"그래. 그동안 수고 많았어. 잘 가."
날 선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단조로운 인사였다.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던 윤재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 맞다. 귀어(鬼語)."
윤재하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손목에 새겨져 있던 귀어가 떠올랐다. 흐릿하던 귀신의 언어가 왜 그의 손목에 자리하고 있는지 미리 알아봤어야 하는데. 혹시 영가를 달고 다니는 것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싶지만, 이제 와서 김석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한때나마 인연이 닿았던 존재가 무탈하게 잘 살아가길 기원하는 수밖에.
몸을 늘어뜨린 그가 건조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자리 잡은 나비가 시선을 보냈다.
"......너도 이제 가야지."
「냐아―」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시선이다. 녀석이 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맴돌았는지 알고 있는 김석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첫정이 무섭긴 해. 그렇지?"
나비가 웃었다. 약간의 미안함이 맴도는 것을 모른 척하고 조심스레 몸을 쓸어내려 주었다. 투박하기만 했던 손길에 힘이 빠지고 부드러워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윤재하의 품 안에 갇혀 꼬물거리던 새끼 고양이가 길거리를 헤매며 울고 있던 때를 기억한다. 갑작스레 사라진 제 어린 가족을 찾아 헤매던 나비를 발견한 건 천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두었으면 분명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손바닥만 한 존재를 품에 안고 가옥으로 향했을 때만 해도, 그때의 김석영은 손에 힘을 푸는 방법 따윈 몰랐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며 오랜 대거리를 하고 나서야 하나둘씩 알아가고 배워나갔다. 그렇게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살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꽤 좋은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이제 좀 알겠다 싶을 때, 이승에서의 명이 끊어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마중 나온 이를 따돌리고 고집스레 머무르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았을 땐 꽤 황당하기도 했다.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잊지 못하는 건지. 그로선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 마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난감하게 서서 끙끙거리는 차사를 설득한 것도 김석영의 몫이었다. 미련이 심해져 이승에서의 뿌리를 내리기 전엔 제가 반드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인사라도 하고 와."
이젠 아주 먼 훗날에나 만날 수 있을 테니.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하자 몸을 일으키며 어딘가로 향한다. 아직 윤재하가 남아 있을 저택이 아닌 고택의 방향이었다. 미련을 둘 만큼 그리워했던 것치곤 지나치게 담백한 태도였다. 그 속을 다 알 것 같다가도 알 수 없는 게 나비의 마음이다. 피식 웃은 김석영이 나비의 뒤를 따랐다.
* * *
짐 정리하기 바쁠 테니 저녁은 됐다고 김석영이 말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것과는 달리 마음 한편에선 불편한 감정이 일었다. 그건 걱정과도 비슷했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끝내놓고, 내가 뭐라고......."
앞으로의 생활을 걱정하기도 바쁜데 누군가의 끼니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제가 생각해도 퍽 우스워서 자조적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재하, 저녁 안 먹니?」
"......입맛이 없어서."
남은 식자재가 아깝긴 해도 구태여 제 입에 넣을 생각은 없었다. 실로 입맛이 없기도 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촐한 짐가방을 바라보며 몸을 뉜 윤재하가 한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어수선한지 모르겠다.
고작 한 달이었지만,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많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나비와 만났고 이상한 고택에 휘말리면서 김석영과도 마주했으니까. 기묘한 공간과 처한 상황을 이해해보기도 전에 기억을 빼앗길 뻔한 데다 잘리기까지 했다.
억지를 부려 유예기간을 얻었지만 악연이라 할 수 있는 김민재와 만났고, 이성을 잃은 것도 모자라 김석영에게 제 추한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하나하나 기억을 나열하고 보니 이 모든 일이 고작 한 달 안에 일어난 일이라는 게 우스웠다. 역시 이곳에 돌아온 게 문제였던 걸까.
하아, 한숨을 쉬며 반쯤 베개에 얼굴을 묻던 윤재하가 널브러진 손끝을 바라보았다. 의미 없이 머물던 시선이 손목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무언가 그려져 있다고 했는데. 그로선 도통 뭐가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엄마."
「응?」
형체를 부른 윤재하가 제 손목을 보이며 물었다.
"뭔가 보여?"
「어디에? 손목에?」
"응. ......뭐가 그려져 있다던가."
깜박이지 않는 눈으로 뚫어지게 손목을 바라보던 형체가 윤재하에게 눈길을 옮기며 말했다.
「아니? 내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래요?"
「왜? 거기에 뭐가 있대?」
고개를 끄덕이려던 윤재하가 멈칫했다. 왜인지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냥. 기분 탓인가 봐."
대수롭잖게 대꾸하며 손을 내리자 시선이 따라온다. 괜스레 이불을 끌어와 움켜쥐며 몸을 틀었다.
"나 잘게요. 잘 자."
「그래. 잘 자.」
둥글게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선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고, 나비가 나왔다.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
어미를 잃고 혼자 골목을 헤매던 새끼 고양이는 고작 바라보는 시선에도 잔뜩 날을 세웠다. 여러 학원에 다니던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윤재하의 하루는 길었다. 남는 게 시간이라 얼마든지 구경할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으나 혹여 겁을 먹고 도망갈까, 윤재하는 멀찍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몸을 숙였다. 포복하는 자세로 눈높이를 맞추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시선의 향연은 마치 눈싸움과도 같았다. 그렇게 이어지던 맹렬한 기 싸움의 승자는 새끼 고양이도, 윤재하도 아니었다. 불쑥 나타난 인기척으로 인해 둘 다 시선을 놓아버린 탓이었다.
"야!"
제 무리와 함께 주변을 지나가던 김민재는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윤재하를 노려보았다.
......또 시작이다. 한숨을 삼킨 윤재하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있던 새끼 고양이는 이미 도망간 후였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제가 관심을 보이는 것이면 언제나 김민재가 탐을 내며 괴롭히곤 했으니까.
부친이 돌아가신 작년부터 녀석의 괴롭힘은 더욱 지독해졌고, 아이치곤 우악스러운 손길을 감당하기엔 새끼 고양이는 너무도 여렸다. 차라리 저가 좀 귀찮은 게 나았다. 이젠 너무나 익숙했으므로.
그날, 김민재 때문에 아쉽게 헤어진 이후로 윤재하는 늘 그 골목을 지나쳤다.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열에 아홉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감을 파악하며 거리감을 좁혀간 지 열흘쯤 지나서였나. 제법 서늘해진 가을의 밤공기가 걱정된 윤재하는 조부의 눈을 피해 담요를 챙겨 들고 골목으로 향했다.
"나비야. 나비야."
더러운 실외기의 틈 사이에서 새끼 고양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저를 부르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말이다. 고양이의 이름은 나비가 당연했던 시기라 아무런 고민의 여지도 없이 부른 거였는데, 다행히 영민했던 나비는 제게 주어진 이름을 받아들였다.
축축한 길바닥에 담요를 곱게 깔아준 윤재하가 비닐봉지에 몰래 넣어온 식은 밥을 내밀었다.
"배 안 고파? 밥 먹어."
나비는 냄새를 맡기만 할 뿐 식은 밥을 입안에 넣지 않았다. 기껏 가져왔는데 먹지 않는 게 못내 서운했다.
"너도 콩밥은 싫어? 근데 우리 집은 대체로 콩밥이라 어쩔 수 없어."
냐아―
"내일은 엄마한테 흰쌀밥 해도 되냐고 물어볼게. 흰쌀밥은 맛있을 거야. 내일 봐."
소곤거리며 약속하자 나비가 고운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그게 기뻐서 헤실헤실 웃은 윤재하가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모친에게 빨리 허락을 받고 싶었다.
천근 같은 눈꺼풀을 참기 위해 팔목을 연신 꼬집으며 모친의 퇴근 시간까지 버텼다. 보상은 그의 염원대로 흰쌀밥이었다. 고양이에게 먹이겠다는 말은 홀랑 빼먹어서, 모친이 내심 마음 아파했다는 걸 윤재하는 몰랐다.
"......왜 안 먹어? 이건 맛있는 밥이야."
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나비에게 향한 윤재하는 책가방 속에 챙겨둔 용기를 꺼냈다. 동글게 만 주먹밥을 흔들며 유혹해보았는데 정작 나비는 관심도 없었다. 잔뜩 풀이 죽은 윤재하가 무릎에 얼굴을 묻던 순간, 커다랗고 긴 그림자가 들어섰다.
"그런 건 안 먹지."
조퇴 상습범이던 김석영이 무릎을 굽히고 앉으며 말했다. 며칠 전 친구 요청을 거절한 그에게 내심 서운한 마음을 간직하던 윤재하가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그럼 뭘 먹는데요?"
"음, 아무래도 고양이는 생선이지."
"생선은 없는데......."
시무룩한 대답에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휘둥그레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을 마주하며 기다리라고 말했다. 긴 다리만큼이나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돌아왔을 땐 양손에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멀뚱하게 바라보는 윤재하에게 김석영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쥐여주었다.
"네가 줘. 널 따르니까."
얼떨떨하게 받아든 윤재하가 비릿한 냄새가 올라오는 비닐봉지를 열었다. 잘게 토막 낸 생선이 한가득이었다. '우와!' 감탄을 터뜨리며 초롱초롱 빛나는 말간 눈동자를 무심히 바라본 김석영이 고갯짓을 했다. 때마침 냄새를 맡은 나비도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어서 줘. 애탄다."
"응!"
맑게 웃은 윤재하가 생선 한 토막을 손바닥에 올리고 내밀었다. 혀를 찬 김석영이 아이의 손을 잡아 뒤집었다. 툭 떨어지는 것에 달려나간 나비가 코를 박고 먹기 시작했다.
"내가 주라고 했으면서......."
"그렇다고 손에 올려서 먹일 필욘 없지. 생선 가시에 손 찔리고 싶어?"
"아, 가시......."
고개를 저으며 멋쩍게 웃은 윤재하가 쩝쩝거리며 생선을 뜯어 먹는 나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표정이었다. 피식 웃은 김석영이 나머지 비닐봉지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불쑥 시야를 가리며 흔들거리는 것에 놀란 윤재하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스크림."
"......형은요?"
"나도 있지."
김석영이 제 몫의 팥 아이스크림을 보여주자 윤재하가 안심하고 받아들였다. 비싸서 사 먹지 못하던 콘 아이스크림이었다. 껍질을 뜯으며 각기 다른 두 개를 번갈아 보던 윤재하가 불쑥 제 것을 내밀었다.
"이게 더 맛있는 건데. 이거 먹어요."
팥이 송송 박힌 갈색 아이스크림보단 달콤한 크림색의 콘 아이스크림이 훨씬 맛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석영은 칙칙한 갈색 아이스크림을 제 품에 숨기며 말했다.
"싫어. 이게 더 맛있거든."
"......거짓말하지 마요."
"진짠데. 너한테 일부러 맛없는 거 준 거야. 넌 맛없는 거나 먹어."
"......말도 안 돼."
"의심 많은 건 좋은데, 지금은 좀 거둬봐. 이러다 아이스크림 사망하시겠어."
"아, 안돼......."
녹기 시작하는 것에 서둘러 입을 가져다 댄 윤재하가 슬금슬금 멋쩍은 눈길을 보냈다. 눈매를 늘어뜨리며 시선을 맞받아친 김석영도 한입 베어 물었다. 입매가 시원스러워서 크게 벌릴 줄 알았는데 쥐똥만큼만 먹는다.
"......그렇게 먹으면 다 먹기도 전에 녹을 것 같은데......."
"그래. 네 나이 땐 이가 시리다는 감각조차도 모르겠지."
부쩍 서늘해진 날씨에 굳이 아이스크림을 사 온 건 본인이면서. 누가 들으면 나이 지긋한 노인이 말한 줄 알았을 것이다. 아무리 김석영이 윤재하에겐 한참 어른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게, 그때에도 퍽 이상하긴 했다. 무어라 한마디 대꾸하고 싶었으나 입안에 맴도는 것이 너무 달콤해서 금세 뒷전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어린 새끼 고양이와 열세 살의 소년과 열아홉의 고등학생이 모인 만찬은 금방 끝이 났다. 볼록해진 배를 보며 희미한 행복감에 젖어 든 윤재하가 김석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얘 이름은 나비인데, 내가 이름 붙여줬으니까 내가 데려가서 키울 거예요."
"나비도 좋대?"
"......아."
놀란 얼굴로 멈칫하던 윤재하가 한껏 진지해진 표정으로 나비를 바라보았다. 곧 몸을 숙이고 두 손바닥을 나란히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우리 집에 가자, 나비야. 엄마는 내가 설득할게. 할아버지는....... 괜찮을 거야."
눈을 맞춘 나비가 천천히 다가와 작은 손안에 제 몸을 부딪혔다. 품에 안아 올린 윤재하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김석영을 바라봤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열세 살의 윤재하는 생전 처음으로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랑 우리 집에 가자, 나비야."
"......."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눈물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던 윤재하는 불쑥 치미는 감정에 입술을 짓씹었다. 꿈을 통해 과거를 보면서도 은연중에 느껴졌다. 나비가 떠났다는 걸.
바스락거리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꿈의 여운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방안을 비추는 빛의 농도가 진해졌을 때가 돼서야, 윤재하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갈 채비를 모두 마치고 조촐한 짐가방과 함께 현관을 나섰다. 눈길이 자연스레 숲길로 향했다. 새하얀 눈으로 가득했던 순백의 세상에서 저 혼자 이질적인 색채를 띠며 바라보던 시선과 뒤이어진 만남을 떠올리니,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 가?」
의아한 눈과 마주한 윤재하는 결국 짐가방을 내려놓았다.
"......나 마지막으로 인사만 하고 올게."
잠시만 저택 안에서 기다려달라고 덧붙이며 걸음을 뗀 윤재하는 저를 부르는 형체의 외침을 뒤로한 채 숲길로 향했다.
일정하던 보폭이 점차 빨라졌다. 뒤이어 숨이 가빠온 걸 인식했을 무렵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만들어낸 동굴을 지나치고,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대문을 넘어 사랑채를 마주했다.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안채가 있을 곳을 바라보았다. 둥근 돔 형태의 결계가 있었으나, 냉정해야 할 이성은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주는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안채에 다다르자 일렁이는 막이 보였다. 한번 출입했던 영향일까. 조심스레 손끝을 가져다대어보니 아무런 저항도 없이 스며들었다. 마른 숨을 삼킨 윤재하가 한 걸음 내디뎠다.
처음 몸을 담았던 그때와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현관이 아닌 뒤쪽으로 향했다. 그때처럼 누군가가 나타날지 모를 일이고, 멋대로 들이닥친 것도 모자라 제 모습까지 들켜서 좋을 게 없었다. 다행히 그의 예상대로 뒷문이 존재했다.
"......."
멋대로 들어왔다고 화를 낼까. 겁도 없이 침범한 주제에 이제야 뒷일을 상상하지만 그래도 제 행동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줄곧 붙잡고 있던 충동에 힘을 풀어버리니 그조차 감당할 수 없어져 버렸다.
숨을 삼키고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번쩍이는 빛이 보였다. 미처 머리로 의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튀어 나갔다.
단번에 고택 안에 들어서서 걸음을 막는 것들을 무너뜨리다시피 달렸다. 그러자 일그러진 공간의 틈에 서 있는 김석영이 보였다. 줄곧 느슨하기만 흑안이 동그랗게 커지며 침입자를 마주 보았다.
"......너―"
공간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균열을 일으키며 일그러지고 있었다. 견고하게 완성된 퍼즐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듯, 후두둑 붕괴하는 공간의 틈 사이로 무언의 형상들이 흘러들었다. 붉은 목조 천장의 장식과 은은한 빛을 내뿜는 조명이 낙하하려는 순간, 윤재하는 눈앞이 새카매지는 것만 같았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줄곧 위태롭게 서 있던 남자를 단번에 끌어안았다. 품 안에 가둬지지도 않는 너른 어깨를 하염없이 감싸 안고 몸을 웅크렸다. 맞닿은 몸이 굳는 게 느껴졌으나 다가올 고통을 기다리며 김석영을 바투 당겨 안은 윤재하가 숨을 삼켰다.
"......윤재하."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되돌아온 것은 낙하하는 건물의 파편이 아닌 서늘한 김석영의 목소리였다.
"설마 했는데."
"윽―"
뒷머리통을 낚아채고 끌어내린 탓에 힘껏 옭아매던 상체가 떨어졌다. 농구공이라도 쥔 것처럼 손끝에 힘을 주자 혼란스러운 낯 위로 미약한 고통이 스몄다. 다갈색의 눈동자가 건조한 흑안을 마주했다.
"겁도 없이, 어딜 들어와."
"괜찮아요?"
"......"
"......."
동시에 내뱉어진 말은 서로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황당함에 일순 할 말을 잃은 김석영이 손을 풀었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은 윤재하가 황급히 주변을 확인했다.
"......여기 뭐예요?"
분명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는데 폐허가 되기는커녕 웬 낯선 길거리에 서 있다. 옆을 스쳐 가는 사람에 몸을 움찔한 윤재하의 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
미치겠네.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쉰 김석영이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수신자의 물건에 시선을 옮겼다. 단 한 번도 일을 중단해본 적이 없었는데....... 반신반의하며 물건에 깃든 힘을 풀어보았으나 사위를 에워싼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 일이 걸려 있는 상황에선 제약이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지......."
"어, 위험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되는 양,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확인하던 윤재하가 불쑥 김석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간발의 차로 자전거가 스쳐 지나갔다. 또다시 너른 어깨에 몸을 맞부딪히게 된 김석영의 낯이 서늘해졌다.
"윤재하."
들어본 것 중 가장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온 음성에 윤재하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얼굴을 간질이는 검은 머리칼에 정신이 돌아온 그가 황급히 몸을 떼어냈다.
"죄, 죄송......."
"뭐 하는 거야."
무감한 표정 위에 서늘함이 어른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에 숨이 턱 막혔다. 차라리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는 게 더 낫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 떠나기로 했던 사람이 왜 내 앞에 있을까."
"......."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싶었나? 그렇더라도 결계를 확인한 순간엔 포기하고 떠났어야지. 멋대로 넘어온 순간부터 넌 선을 넘은 거야. 처음은 실수로 봐줘도 두 번은 아니지."
"......죄송해요."
윤재하가 고택을 침범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저 혼자 고민하며 서성이기만 하다가 포기하고 돌아가겠거니 여겼던 제 실수였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누르며 머리를 쓸어 넘긴 김석영이 한숨을 뱉었다. 손끝을 움찔한 윤재하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돌려보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하물며 버리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일단은 할 일이 우선이다.
"윤재하."
"......네."
"굳이 네 기억을 지우지 않은 건 내 호의였지만, 애초에 기억을 앗아갔다면 이럴 일도 생기진 않았겠지. 이렇게 된 이상, 다시 돌아갈 땐 온전한 기억을 가져갈 생각 따윈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이건 눈감아줄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일이거든."
"......."
입술을 달싹이던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제 안일한 행동이 김석영에게 피해로 다가온다면 그건 온전히 제 잘못이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 없이 서운함이 밀려왔다. 이 상황에서 서운함이라니.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의 흐름이었다. 혹여 쓸데없는 감정의 조각이 하나라도 튀어나와 김석영에게 들킬까 두려워진 윤재하가 기를 쓰고 억눌렀다.
피딱지가 말끔하게 사라지지도 않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굳어 있는 모습에, 김석영이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윤재하의 손목을 잡았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가 말한다.
"일단 가자. 길을 잃을 수 있으니 잘 따라와. 내가 손 붙잡는 게 싫으면 옷이라도 잡고."
"아......."
윤재하의 시선이 제 손목에 닿았다. 강하게 붙잡고 있는 창백한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김석영의 나머지 손에 쥐고 있는 게 보였다. 제법 무게가 나가 보이는 액자였다.
"......제가 잡고 따라갈게요."
"그래, 그럼."
손을 놓은 그가 몸을 돌렸다. 머뭇거리며 다가서다 조심스럽게 상의 끝자락을 잡자 김석영이 걸음을 뗐다. 건조하게 나풀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바라보며 불규칙하게 일렁이는 호흡을 삼킨 윤재하가 시선을 돌렸다. 곁을 지나가던 사람과의 거리가 가까웠다. 부딪힌다고 느낄 무렵, 사람의 형체가 그의 몸을 통과했다. 그는 그제야 이곳이 현실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내 누군가의 기억이라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기억이었으나 두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북적이는 인파로 어지러운 길거리를 지나 불쑥 이어지는 다른 공간에서 두 연인의 모습과 상황, 그리고 감정까지 생생하게 전달됐다. 타인의 기억을 엿보는 기분에 마음이 불편해져서, 윤재하는 의식적으로 눈앞의 길잡이만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김석영이 한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눈만 돌리면 뭐 해. 귀로 다 들리는데."
"......한쪽이라도 막을까요?"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마. 그냥 받아들여. 스스로가 자초한 상황 탓에 마주하게 된 불편한 마음을 온전하게 느끼면서."
"......."
제법 뼈아픈 말이었다. 침음을 삼킨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저 사람의 기억인 거죠."
"그래."
"이 기억의 끝엔 뭐가 있는지....... 물어도 돼요?"
"이미 물었잖아."
"아......."
그렇네. 멋쩍은 기분에 눈가가 달아올랐다. 뒤따라 걷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때, 불쑥 멈춰선 김석영이 고개를 돌렸다.
"기억의 끝엔 뭐가 있냐고, 방금 물었지."
"네."
"직접 봐. 뭐가 있는지."
그의 말대로 시선을 돌리자, 희미해지는 공간 너머로 낮과 밤이 공존하는 드넓은 강이 펼쳐졌다.
"......뭐예요, 여기."
당황한 빛이 역력한 낯에 김석영이 대꾸했다.
"삼도천.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경계점이지."
"삼도천....... 설마 지금 여기가 저승이라는 거예요?"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굳어버린 얼굴에서 유일하게 흔들리는 눈 위로 경악이 스쳐 갔다.
"그래. 네가 따라온 곳은 저승으로 가는 길이었어."
"......우린 안 죽었잖아요."
"누가 그래. 우리가 안 죽었다고."
무감한 어조로 김석영이 말했다. 흔들리는 시선이 서늘한 얼굴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내, 윤재하가 내린 결론은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는 순간, 단단한 손이 허리를 받쳐주었다. 간신히 몸을 지탱한 윤재하가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네가 겁도 없이 영역을 침범한 결과가 이거야."
"......돌아가요."
애처로울 정도로 손을 떠는 주제에 제법 뻔뻔한 말을 했다.
"삼도천이라면서요. 이승과 저승의 경계. 저 강을 건너지 않은 이상, 아직 이승에 속해 있다는 것 아니에요?"
"......이렇게 이성적으로 굴 거면 진작 좀 그렇게 하지 그랬어."
헛웃음을 지은 김석영이 허리춤에 손을 놓았다. 다행히 휘청이지 않는 윤재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맞아. 사실 너 안 죽었어."
앓는 숨을 토해낸 윤재하의 낯 위로 안도가 흘렀다.
"그런데 어쩌지. 지금 당장 돌아갈 순 없는데."
"......왜요?"
"나는 지금부터 저 강을 건너야 하거든."
"잠깐, 지금 뭐라고요?"
순간, 윤재하는 제 귀를 의심했다.
"장난하는 거죠?"
"아니. 아쉽게도 아니야."
"지금 죽겠다는 거예요?"
윤재하의 낯 위로 안도가 사라지고 혼란과 두려움이 어른거렸다. 생각해보니 눈앞에서 자살을 선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난감해진 김석영이 잠시 말을 골랐다.
"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어?"
흔들리는 시선을 단단히 붙든 그가 말을 이어갔다.
"네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해봐."
"그게 무슨......."
"날 따라왔잖아."
"......."
"나는 이승과 저승을 오갈 수 있어. 그게 내 능력이자 일이야."
귓가에 박힌 말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승과 저승을 오간다고? 도대체 왜?
"......왜요?"
"일일이 설명해줄 시간은 없고. 그냥 받아들여."
"그럼 정말 저 강을 건너겠다는 거예요? 정말 안 죽어요?"
"나는 늘 저 강을 건너왔어. 지금 내가 죽은 사람처럼 보여?"
"......"
물론 처음 만났을 땐 착각하기도 했지만, 그는 분명 살아 있다. 서늘하게 느껴졌어도 분명 미약한 온기가 존재했다.
"......아니요. 살아 있어요."
"그래. 난 살아 있을 수 있어. 하지만 너는 아니야. 삼도천을 건너는 즉시, 정말 죽게 되겠지."
윤재하가 숨을 멈췄다. 짧은 한숨을 내쉰 김석영이 주변을 살폈다. 낙오된 영가들과 중간 지점을 떠도는 존재들이 몸을 숨기고 그들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윤재하."
"......네."
"여기서 기다려야 해. 너 혼자서."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으나,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꾹 다문 윤재하가 김석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결연한 빛마저 맴도는 표정이었다.
"누군가가 말 걸어도 절대 대답하지 마. 뒤를 돌아보지도, 도망가지도 마. 내가 신호하지 않으면 내 모습조차 믿으면 안 돼. 알겠어?"
"네."
"신호는....... 그 아이의 이름으로 하자."
무엇을 말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비였다. 김석영 역시도 윤재하가 받아들였다는 걸 눈치챘다.
"잘 기다리고 있어."
"네. 걱정 마요."
입꼬리를 올린 김석영이 뒤를 돌았다. 걸음을 떼며 수신자의 물건에 힘을 불어넣으려던 찰나, 깊은 땅 밑에서 웅크리며 몸을 숨기고 있던 것들이 윤재하를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잠시 떨어진 순간조차 참지 못하고 침을 질질 흘리니,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 되겠네.'
한숨을 삼킨 김석영이 몸을 돌렸다. 휘둥그레진 말간 눈동자가 그를 맞이했다.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네 기억을 지울 거라던."
"......네."
"조치 없이 가버리기엔 조금 불안해져서.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엔 안 떠오르네."
영문 모를 말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윤재하를 향해 김석영이 다가갔다. 언뜻 물기가 어린것처럼 보이는 말간 눈동자 속에 무감한 얼굴을 한 제 모습이 비쳤다. 윤재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저갱의 색을 띤 검은 눈 너머로 멍하게 굳어버린 낯이 보였다. 그 얼빠진 얼굴이 제 얼굴이라는 걸 알아챈 순간, 닿는 것만으로도 몸을 떨게 하는 서늘한 손끝이 턱 끝을 타고 올라 볼을 감쌌다. 두 손안에 온기를 감싼 김석영이 속삭였다.
"첫 키스는 아니길 바랄게."
어차피 기억을 지우면 잊히겠지만.
상처로 얼룩진 건조한 입술이 윤재하의 숨을 집어삼켰다.
* * *
몸을 웅크리고 주저앉아 무릎에 이마를 묻은 인간의 귀가 빨갛다.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커다란 손으로 제 귀를 막고선 고개를 깊숙이 파묻었다.
「얘야. 얘야. 그러지 말고 고개 좀 들어보련? 헤치려는 게 아니야.」
"......."
도통 별다른 반응이 없자 혀를 찬 존재가 목소리를 바꿨다.
「윤재하.」
그러자 인간의 손끝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몸에서 풍겨오는 맑은 기운 역시 날카롭게 날뛴다. 에구머니! 화들짝 놀란 존재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주변을 얼쩡거리던 기척이 멀어지자 윤재하의 숨이 거칠게 터졌다. 귀를 막은 손을 내리고 웅크린 몸을 푼 그는 김석영이 사라진 방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첫 키스는 아니길 바랄게."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얼굴을 감싸던 너른 손바닥의 감촉과 입술이 맞부딪히던 감각이 상기됐다.
투둑―
무언가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 누구도 침범해본 적 없던 입술 너머로 서늘한 숨결이 넘어왔다. 저도 모르게 흘려보내는 윤재하의 가느다란 숨을 머금은 김석영이 손끝에 힘을 주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고 몸을 떼어낸 김석영의 입술엔 피가 묻어 있었다. 입안에 넘어온 침을 삼킨 윤재하는 덩달아 비릿한 쇠 맛을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열이 올라 농도가 짙어진 얼굴에서 가장 붉은 부분을 빤히 바라보던 김석영이 말했다.
"너 피난다."
그 평이하기 짝이 없는 어조에 윤재하는 졸도할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고 원망스레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한 김석영은 따끔거리는 통증을 깨닫곤 혀를 찼다. 윤재하가 아닌 제 입술이 터진 거였다. 여느 때처럼 입술을 훑고 갉작거린 그가 툭 말했다.
"내 냄새가 묻었으니 쉽게 건들진 못할 거야."
그러니 잘 버티고 기다리라 덧붙인 김석영은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 뒷모습을 형형하게 노려보던 윤재하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탓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김석영과 입을 맞춘 게 맞나? 설마 삿된 것들의 환상에 휘말리기라도 한 걸까? 그럼 그게 현실이 아니라고? 그렇다기엔 감촉이.......
"......."
아직도 생생한데.......
혼란스러움이 빚어낸 부정을 뒤로하고 현실을 받아들인 윤재하가 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앓는 소리에 반응한 존재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분명 살아 있는 인간인데 피투성이가 된 것처럼 드러난 피부가 붉었다.
「죽었나? 다쳤나?」
「피부가 빨간 건 피인가?」
「아냐. 살아 있어!」
「전령 나리랑 함께 있었잖아. 건들면 안 돼. 괴롭힐지도 몰라.」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던 것들은 멀찍이서 구경만 하였고, 게 중 몇몇 겁 없는 것들은 윤재하에게 다가갔다.
「얘야. 얘야.」
아무리 불러대도 영 반응이 없다. 툭, 툭, 돌을 던지며 시선을 끌어보려 애썼으나 도통 파묻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고심하던 한 존재가 넌지시 김석영의 목소리를 흉내 내니 그제야 반응을 보이는데, 웬걸. 그 기색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함부로 건드렸다간 제가 된통 당할성싶었다. 어쩐지 전령 나리의 기운을 풍긴다 싶더니 만만찮은 인간이었다. 후환이 두려워 사색이 된 존재가 꽁지 빠지게 달아났다.
북적이던 주변이 빠르게 정리됐지만 마음은 어수선하기만 했다. 괜히 김석영이 사라진 삼도천 너머를 노려보던 윤재하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잔잔하기만 한 저 수면도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여긴 평범한 장소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았다. 이곳이 저승으로 향하는 경계라는 게. 그가, 김석영이 삼도천을 넘어갔다는 것 역시.
"나는 이승과 저승을 오갈 수 있어. 그게 내 능력이자 일이야."
살아 있는 자가 어떻게 이승과 저승을 오갈 수 있는 걸까. 김석영은 왜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거지? 하물며 그가 하는 일이라는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아. 기억."
그러고 보니, 그 기억들은 뭐였을까.
분명, 김석영을 따라 이곳에 다다른 건 누군가의 기억을 따라서였다. 저승으로 가는 길이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기억이라고? 당사자의 주마등이면 모를까, 남의 기억을 보며 저승으로 간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인물의 기억을 따라 걸었다. 분명 기억이 길을 만들어주었다.
"......설마 죽은 사람이었던 건가."
기억 속의 인물은 이미 이승을 떠난 망자이고, 김석영은 저승에 있을 망자를 찾아가려는 걸까.
고개를 든 윤재하가 삼도천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그때,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불쑥 시야를 가리며 나타났다. 별 희귀한 잡동사니로 온몸을 치장한 아이였다.
「야.」
"......."
「너 전령 나리랑 무슨 사이야?」
전령 나리? 혹시 김석영을 말하는 건가?
「나리가 여기에 사람 두고 가는 건 처음인데....... 게다가, 킁킁. 냄새까지 묻혀두고!」
"......."
애써 묻어둔 것을 상기시키는 말에 윤재하의 낯이 재차 붉어졌다.
「얼레? 빨개졌네? 혈색이 돈다는 건 정말 살아 있다는 건데.......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는 것도 아니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을 피해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야아. 왜 숨고 그래? 괴롭히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
「너. 나리 기다리고 있는 거지? 혼자서 기다리면 심심하지 않아? 나랑 놀자! 내가 놀아줄게.」
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더니, 정말 아이처럼 재잘거리며 말을 걸었다. 입술을 잘근 짓씹은 윤재하가 두 귀를 막았다. 아무리 무해한 것처럼 보여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치.」
경계하는 기색을 느낀 아이가 투덜거리며 한걸음 물러섰다. 나리의 냄새가 묻어 있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쉽사리 건들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해코지 한번 해보려는 다른 놈들과 달리 저는 정말 궁금해서 다가온 건데. 날을 세워도 너무 세웠다. 아랫입술을 삐죽인 아이가 불퉁하게 말했다.
「너 그러다 잠이라도 들면 바로 삼도천 건너는 거야. 정신 줄 꽉 붙잡아!」
윤재하의 몸이 움찔했다. 히죽 웃은 아이가 불쑥 시선을 돌렸다. 진짜 삼도천을 건너야 할 망자가 저 멀리서 배회하고 있었다.
「어! 잠깐, 잠까안!」
"......."
잘그락, 잘그락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기척에 슬쩍 고개를 든 윤재하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이의 몸에서 떨어진 듯한 구슬이었다. 어린 시절에나 하던 구슬치기용인 듯했는데, 군데군데 흠집이 있고 손때가 묻어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기척이 멀어진 발자취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구슬뿐만 아니라 끊어진 리본과 작은 조개껍데기 같은 잡동사니들이 하나둘 널브러져 있었다. 무엇 하나 온전하지 않은, 아주 볼품없는 모양새의 것들이었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나갔던 아이가 실실 웃으며 돌아오는 게 보였다.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듯, 익숙한 손길로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온 아이가 잔뜩 의기양양한 얼굴로 윤재하를 바라보았다. 황당한 마음에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자 아이가 손에 든 것을 흔들었다.
「짠! 이게 뭐게?」
"......."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 보이는 눈깔사탕이었다.
「맛있겠지? 이젠 내 거야!」
기쁜 듯이 웃은 아이가 옷에 매달린 낡은 리본에 사탕을 묶었다. 빙그르르 몸을 돌리는 게, 마치 잔뜩 치장한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 천진난만한 행동을 보고 있자니 윤재하는 저도 모르게 김새는 웃음을 매달고 말았다.
「어? 웃었다!」
"......."
「웃으니까 예쁜 도령이었네!」
황급히 입매를 갈무리한 윤재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히죽히죽 웃은 아이가 은근슬쩍 곁에 다가와 앉았다. 줄곧 매고 있던 봇짐을 펼쳐놓고 보니, 어른의 것처럼 보이는 낡은 셔츠였다. 그 속에 가득한 것들을 늘여놓으며 하나하나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건 구멍 난 고무신이야. 엄지발가락이 툭 튀어나와 있던 게 웃겨서 내 거랑 바꿨지. 이건 어떤 할머니의 손수건인데, 이젠 미련 없다고 흔쾌히 바꿔줬어. 음, 이건 뭐였더라. 아! 이건 장난감의 손인데, 어떤 욕심 많은 애가 한가득 안고 가더라고? 게 중 손만 툭 떨어지길래 몰래 주웠어.」
또 이건 이랬고, 저건 저랬고. 묻지도 않은 것들을 재잘거렸다. 넌지시 보고 있자니 심심하진 않아서, 윤재하도 아이가 가리키는 손길을 충실하게 따라갔다.
「아. 이건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예쁜 것만 모아놓은 거다?」
헝겊으로 만든 작은 조리개 주머니를 가리키며 아이가 말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뚫어지게 바라보자, 한껏 기분 좋아진 아이가 입술을 씰룩였다.
「원래 이건 잘 안 보여주는데, 너한테만 특별히 보여줄게. 너도 얘네들처럼 예쁘게 생겼으니까!」
기대하시라! 두구두구두구, 입으로 효과음을 만들어낸 아이가 조리개를 펼쳤다. 그 안엔 반질거리는 조개껍데기와 알록달록한 주사위, 투명한 플라스틱 반지 같은 비교적 모양이 온전한 것들이 가득했다. 분명 아이의 눈에는 값진 것들일 테다.
피식 웃은 윤재하가 무릎에 기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감상했다. 하나둘 꺼내서 설명하고 있으니, 통통하던 주머니가 금새 홀쭉해져갔다. 특별히 선정해놓은 소장품이 줄어드는 게 내심 아쉬웠던 윤재하가 헛웃음을 삼키려던 찰나였다. 그의 시선이 무언가에 고정되었다.
"......이건."
「응?」
주머니 속에서 언뜻 보이는 것에 눈을 크게 뜬 윤재하가 황급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힉!' 하고 놀란 아이가 주머니를 품에 안아 숨기던 순간, 서늘한 손끝이 윤재하의 손을 잡아당겼다. 조급해진 마음이 무색하게 단단한 손아귀에 이끌린 몸은 속수무책으로 뒤를 돌았다.
"뭐 하는 거야."
"......."
줄곧 기다렸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