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뜨니 인자한 낯의 노인이 보였다. 아....... 입술을 달싹이다 굳게 다문 김석영이 몸을 일으켰다.
「살이 올랐구나.」
"잘 먹거든요."
「오기 전에 살짝 보고 왔단다. 꼭 나 어릴 때를 보는 것 같았어. 상현이가 애를 많이 썼겠어.」
"그냥 우연히 얻어걸린 거라던데."
「우연도 때때론 능력과도 같단다. 칭찬 많이 해줘.」
설핏 웃은 김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얼굴을 보니 안심이 돼.」
서늘한 손을 꾹 잡아 쥔 노인의 얼굴이 실로 편안했다. 고개를 끄덕인 김석영이 물었다.
"편안하셨어요?"
이따금,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에서야 읊조리던 망향가를 기억한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던 노인의 옆모습. 담담하게 이어지는 곡조를 따라 쪼르르 옆에 앉으면 뚝, 끊어졌던 노래에 아쉬운 마음이 들곤 했다.
그 서운한 낯에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준 노인은 희미한 고향의 기억 한 조각을 내주었었다. 물가에 있는 갯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따스히 잡아주던 어미의 손과 걱정 어린 시선에 마음이 풍만하게 차올랐던 기억. 이제는 너무 아득해서 실제로 존재하는 기억인지, 꿈인지 헷갈린다며 말하던 표정도.
창백하지만 커다란 손이 세월을 담아낸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제는 그 미약하던 온기조차 느낄 수 없는 김석영의 손을 바라보며 노인이 스러질 듯 말했다.
「뭣도 모르는 나이에 고향을 떠나 날 거둬준 이곳에 평생을 바치기로 했었지. 그 결정에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지만, 유년의 기억이라는 게 뭔지. 희미하기만 한 기억의 잔상일 뿐인데, 가끔은 사무치게 그립곤 했더랬지.」
세월의 한 부분을 바라보느라 비껴간 노인의 시선이 김석영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석영아. 내가 틀렸더라. 그 오랜 세월 동안 허상만을 좇았다는걸, 그토록 그리던 곳에 가고서야 깨달았다.」
석영아, 하고 부르는 노인의 나직한 음성에 김석영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고향은 그곳이 아니었더라. 여기가 내 고향이더라. ......그걸 너무 뒤늦게 알아버렸어.」
쓰게,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게 웃은 김석영이 나직하게 말했다.
"당장 모시고 올게요."
노인이 웃었다.
저승의 문턱까지 노인을 배웅한 김석영은 곧장 친지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이어 비행기의 시간표를 확인한 그는 포스트잇을 찾아 무언가를 메모하곤 사랑채로 향했다. 툇마루에 붙이고 내려와 저택에 다다랐을 때. 돌연 걸음을 멈춘 김석영은 고요함이 흐르는 사위와 저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정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낯 위로 기묘한 빛이 스친 듯했으나 찰나에 불과했다. 시린 바람이 불어와 검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시선을 거둔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평안한 잠을 자듯 생을 마감한 노인의 시신을 서울에 옮겨 장례를 치렀다. 온 얼굴이 퉁퉁 불어 터지도록 우는 이상현을 물리고 김석영은 밤을 새우며 자리를 지켰다. 조부 때와는 달리 상을 치르는 동안 고택을 방문한 손님이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각자의 거처로 돌아갈 때, 밤낮 가리지 않고 고생한 김석영이 걱정된 이상현의 어머니가 함께 갈 것을 권했으나 김석영은 거절했다. 한 핏줄이라 할지라도 결코 쉽사리 곁을 내어주지 않는 조카를 알기에 그 역시 두 번은 권하지 않았다.
목을 압박하는 검은 넥타이를 느슨히 푼 김석영이 좌석 시트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은 손님을 배려한 택시 기사가 라디오의 음향을 줄였다.
* * *
[일이 있어서 며칠 비워. 식사 준비 안 해도 돼.]
기껏 손바닥만 한 포스트잇에 적혀져 있기엔 아까울 정도로 유려한 필체였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얹어진 돌멩이를 치우고 흙먼지를 털어낸 윤재하가 감탄을 내뱉었다. 명필가의 편지같이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한 번, 두 번 고이 접어 패딩에 넣어두었다.
이날 김석영의 아침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 되었다. 아침을 차리다 남은 것들로 대충 배를 채우고, 돌아온 아침은 점심으로 해치웠다. 갑작스레 주어진 여유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순 없기에 윤재하는 미리 찾아두었던 고시원을 비롯해 혹시 모를 저렴한 월세방을 알아보는 데에 열중했다.
쥐꼬리만 한 보증금과 희망 월세 금액대엔 이만한 방이 없고, 눈독 들이는 학생들이 많으니 빨리 선택하라며 으스대는 부동산 주인의 눈칫밥은 동네 불문이다. 자주 듣는 레퍼토리라 딱히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후보군을 골라낸 윤재하는 곧 연락을 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장소를 벗어났다.
이후엔 미리 연락을 넣어두었던 아르바이트의 면접을 보았다. 결과는 단번에 합격이었으나 오래 갈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우선은 다음 달부터 근무하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이 모든 것을 알아보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였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될 일을 줄곧 회피하고 있었던 거다. 안락한 공간과 시간적인 여유, 그리고 단순한 도우미의 일이 너무나도 편하고 좋아서. 그리고 김석영을 마주한 것이 내심 반가워서.
왜냐면 그는 윤재하보다도 특별한 사람이기에. 저보다 강한 기운을 가진 사람 앞에선 저의 특이성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그게 참 안심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주제에 누군가의 곁에서 과거의 인연을 빌미 삼아 제 생활의 안위를 이어가고 싶어 했다니. 윤재하는 그런 스스로가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헛된 억지와 일말의 바람을 버리고 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당장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배달이 제격이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몰래 공용 자전거를 빌려 배달 일을 하다 보니 하루가 금방이었다.
본의 아니게 동네를 휘젓고 다녀서인지 며칠 전 마트 앞에서 마주한 김민재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지나가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헐레벌떡 따라붙어 말을 걸었고, 우연을 가장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침이 이어졌다. 그는 멍청할 정도로 불순한 의도를 감추지 못했다.
'언제 돌아왔어? 윗동네에 사는 것 같은데 맞지?'
'어떻게 살았냐. 대학은 다니고 있고?'
'요즘 같은 세상에, 왜 자전거로 배달 일을 하냐. 괜찮은 일자리 한번 알아봐 줄까? 아는 형님이 장사하시거든. 내 친구라고 말하면 잘 대해주실 텐데.'
'날이 추운데 카페라도 가자. 따뜻한 것 좀 마시면서 회포나 좀 풀게. 너한테 돈 내라고 안 해. 내가 쏘는 거야.'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 피하는 건 윤재하의 몫이었다. 하지만 만남은 의도치 않게 일어났다. 음료 배달 건으로 향한 건물에서 김민재를 마주한 것이다.
"여기서 다 만나네?"
한숨을 삼킨 윤재하가 음료를 내려두고 돌아섰다.
"아, 재하야. 윤재하. 그러지 말고 잠깐만 들어와. 들어와서 좀 쉬다 가라."
김민재가 다급하게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어깨를 밀치고 계단을 내려가려 하자 버럭 소리쳤다.
"야, 너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얘기 한번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자. 반가워서 인사하는 건데 이런 식은 좀 너무하잖아."
"하─."
반갑다니. 네가 나를 반가워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런 속마음이 낯에 드러났는지, 기름진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긴 김민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나도 네가 나 안 좋아하는 거 알아, 인마. 그런데 그때는 나도 그럴 만하지 않았냐? 너나 나나, 둘 다 어렸잖아.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나는 네가 너무 반갑고 오랜만에 회포도 좀 풀고 싶어서 그런 건데. 이런 식의 태도는 솔직히 좀 섭섭하다."
"......."
하아,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윤재하가 걸음을 멈춰서고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모자의 그늘에 가려진 눈빛이 서늘했다.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한 김민재가 마른침을 삼키고 시선을 받아쳤다. 무감한 낯으로 상대를 내려보던 윤재하의 입이 열렸다.
"한가하게 회포나 나누자고."
"......하아. 알아, 아는데....... 그때, 너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나도 후회 많이 했어. 못되게 굴고 괴롭혔던 거, 늘 가슴 한편에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다고. 그런데 여기서 널 다시 만나니까, 꼭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서......."
말이 채 끝맺어지기 전이었다. 불쑥 다가오는 윤재하로 인해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김민재가 벽면에 몰렸다.
"야 너 이게 뭐 하는 짓......."
"같잖은 이유 대지 말고 본론을 말해."
내려보는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선 한껏 목을 꺾어야만 했다. 기억 속의 작고 왜소하던 어린아이는 없었다.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키 차이에 욕설을 삼킨 김민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이야. 본론이라니....... 계속 설명했잖아. 다시 만난 게 반갑고, 또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서......."
"그 기억은 안 나나 봐."
"무슨......."
"저 새끼 귀신 보잖아. 쟤네 집안 다 귀신 본대. 소름 끼치게."
"내가 귀신 보는 거."
윤재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김민재의 온몸에 닭살이 일었다. 동시에 무언가 짓누르는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덜컥 굳어진 얼굴로 마른 입술을 달싹이는 것에, 윤재하의 손길이 김민재의 오른쪽 어깨에 닿았다.
"여기."
목을 가로질러 왼쪽 어깨로.
"여기."
왼쪽 어깨를 꾸욱, 누르던 손끝이 머리로 향했다.
"여기."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굳어 있는 상대에게 윤재하가 읊조렸다.
"귀신 붙었어, 너."
히이이익! 경기를 일으키며 제 어깨와 머리를 터는 김민재를 무감하게 바라보던 윤재하가 반쯤 열린 문 너머에 시선을 던졌다. 문틈에 달라붙어 바라보던 시선이 황급히 모습을 숨겼다. 눈을 돌려 아래를 바라보자 지하층에서부터 지독한 냄새가 들끓었다.
"정신 차리고 여기서 나와."
돌이킬 수 없이 빠져들기 전에. 진심을 담아 충고한 윤재하가 걸음을 뗐다. 뒤늦게 정신이 든 김민재가 따라붙으며 해명했다.
"야,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지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 정식으로 운영되는 심리 상담소야. 왜, 종종 티브이에 나오잖아.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마음을 위로하는 거. 그런 곳이야. 나 여기 와서 많이 도움받았어. 정신도 많이 차렸고. 널 보니까 예전의 나 같아서 그래. 솔직히 너도 힘들잖아. 안 그래?"
부르튼 손끝과 낡고 헤진 패딩을 가리키며 김민재가 말했다. 흡사 필사적이기까지 한 행동이었으나 상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정신 차려."
모멸감으로 일그러진 남자를 두고 윤재하가 자리를 벗어났다.
* * *
어릴 때의 꿈은 뒤끝이 안 좋다. 연달아 김민재를 마주해서인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던 시절의 꿈을 꿨다. 단편적인 부분일 뿐이었지만 이후에 이어질 일을 상기시킨다는 게 악몽과 다름없었다. 식은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숨을 몰아쉬었다. 쉽사리 호흡이 가라앉지 않았다.
「왜 그래. 악몽이라도 꿨니?」
걱정이 어린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깐 윤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괜찮긴. 낯빛이 창백한데.」
"진짜 괜찮아요."
설핏 웃으며 마른세수를 하다가 손에 얼굴을 묻었다. 뒷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감각에 입술을 짓씹은 윤재하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호흡을 멈추고 긴 한숨을 한 번. 재차 호흡을 삼키고 길게 숨을 내쉬어 일렁이는 심박수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윤재하가 형체를 바라보았다. 제 얼굴을 뜯어보는 형체의 낯빛에 걱정이 가득했다. 목을 조여오는 감정에 잠시 숨을 삼킨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미안해."
「갑자기 뭐가 미안해.」
......그냥. 그냥 다 미안해. 한참 동안 입안에서 맴돈 사죄의 언어를 깊숙이 삼킨 윤재하가 이불을 걷고 일어섰다.
「아침 준비하려고? 집주인 돌아왔니?」
"잠도 깰 겸, 산책 삼아 확인해보고 오려고요."
「같이 가자. 너 혼자 보내기 싫어.」
"왜. 무슨 일 있어?"
걱정과 함께 의아하게 바라보자 형체가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
「사실 얼마 전에 무서운 할머니가 왔었거든. 불쑥 나타나더니 널 보고 갔었어. 들키면 안 될 것 같아서 숨어 있긴 했는데.......」
"찾아서 해코지를 했어?"
낯을 구기고 묻자 쓰게 웃은 형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네 얼굴만 보더니 조용히 가셨어. 다른 분들한테 물어보니까, 여기에 오래 있던 사람이래. 그런데 숲으로 가는 것 같아서, 재하 너 혼자 보내려니까 마음에 걸리는데.......」
"그 이후에 본 적은?"
「아니. 없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
여기에 오래 있던 사람. 숲속. ......혹시 김석영의 가족, 아니면 손님일까.
"아니야. 나 혼자 다녀올게. 엄만 여기 있어."
「괜찮겠어?」
"나는 늘 괜찮지. 걱정 마요."
곧장 패딩을 걸치고 저택을 나선 윤재하가 숲길로 향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어둡고 고요하기만 했다. 숲이 그의 출입을 허가하면서부터 귓가에 소곤거리던 현혹의 목소리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온몸을 짓누르기만 하던 압박감도 사그라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위는 한결같이 고즈넉하기만 하였다.
새벽의 시린 공기를 마시며 사랑채에 다다른 윤재하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형체가 말한 영가의 기운이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기대했던 포스트잇 역시 없었다.
꿈의 잔여물을 억누르며 삭막한 나무숲을 바라보고 있자니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어둠을 벗어던지고 색채를 입어가는 세상을 눈으로 담다가, 문득 제 왼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며칠 사이 상처가 아문 자리엔 미세한 흔적만이 남았고 분명히 존재하던 아릿한 통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불쑥, 언젠가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라고. 동의하는 바였으나 윤재하는 때때로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시간의 가치와 더불어 시간을 누리는 환경이 모두 평등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불평은 아니다. 그냥, 그렇게나마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말만큼은 인정한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는 것. 윤재하로선 이곳에 돌아온 것부터가 그 말을 증명한 셈이었다.
그런데 제가 그래도 되는 걸까 싶어졌다. 어쩌면 이곳에 돌아온 것은 무뎌지지 말고 도망치지도 말고 절대 잊지 말라고. 그렇게 상기시켜주기 위한 이끌림이 아닐까. 그게 제게 주어진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터다.
"하아......."
상념이 길어진 모양이었다. 날이 점점 더 밝아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윤재하가 저택으로 향했다.
「오늘도 배달 일 하려고?」
"요즘은 건수를 골라가며 할 수 있어서 편해. 시간 날 때 해두면 좋아."
「오늘은 같이 갈까?」
"아니야, 뭐 하러. 집에서 쉬고 있어요."
「내가 쉴 게 뭐가 있겠니.」
살아 있는 사람과는 달리 피로를 느낄 육체도 없는 망자가 아니던가. 희끗한 형체의 말에 윤재하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그냥."
「혼자 있고 싶구나. 알겠어. 조심히 다녀와.」
"고마워요."
형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윤재하가 저택을 나섰다. 며칠 사이 제법 오간 가게에서 음식을 픽업하고 배달지로 향했다. 동선을 따라 건수를 잡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기온이 그리 낮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줄곧 찬 바람을 쐰 탓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잠시 쉬고 올까 싶다가도 오늘따라 효율적인 동선의 배달 건이 많았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결국 패딩에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두 시간가량을 이어갔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건수가 잠잠해지고서야 윤재하는 짧은 휴식을 위해 저택으로 향했다. 제법 쏠쏠하게 금액이 쌓여서 발걸음이 가벼웠다.
분명 이대로면 기분 좋은 하루가 될 수 있었는데. 저택의 담 앞에 어슬렁거리는 인영을 확인한 순간 좋던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깊은 한숨을 내쉰 윤재하가 저를 보고 손을 흔드는 인영에게 다가갔다.
"또 배달 일? 어우, 코끝 빨개진 거 봐라. 많이 힘들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여길 어디라고 와."
"야. 친구 사이에 올 데 갈 데가 따로 있냐? 나 여기서 너 한참 기다렸어. 추운데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되냐? 차 한 잔만 주라."
이마를 짚고 짜증스레 눈을 감은 윤재하가 서늘하게 말했다.
"이젠 하다 하다 미행을 해?"
"야. 너 진짜 말 섭섭하게 한다? 미행이라니. 나는 그냥 지나가는 길에 네가 이쪽으로 올라가던 게 생각나서 한번 들러본 거지."
"그래서, 확실치도 않은 곳에서 한참을 기다렸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야, 재하야.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냐? 네가 단단히 오해하는 것 같아서, 제대로 알려주려고 하는 거야. 이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나랑 얘기 좀 하자."
기분 나쁘게 웃으며 대문으로 향하려는 걸 윤재하가 거칠게 잡아챘다. 어깨를 붙잡힌 김민재의 낯이 시퍼렇게 변했다.
"악, 시발, 야, 손 좀......!"
"내가 분명히 말했지. 정신 차리라고. 거기서 나오라고."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숨을 내쉴 때마다 삿된 기운이 진동을 했다. 몸 안에 숨어 있는 것에 혀를 찬 윤재하가 멱살을 낚아채며 읊조렸다.
"나가."
"야, 야. 재하야, 이것 좀 놓고 말해......!"
"나가라는 말 안 들려?"
강제로라도 끄집어내고 싶으나 그랬다간 김민재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영기만 타고났을 뿐 무속인이 될 팔자는 아니라더니, 빌어먹게도 이럴 때 실감하고 만다.
겁이라도 줘서 제 발로 나오게 해야 하는데, 보통 이쯤 되면 꽁지 빠지게 달아나던 녀석들과 달리 이번 사귀는 쉽지 않았다. 위협하면 할수록 더욱 깊게 동화되어 어느새 김민재의 동공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진동하고 있었다.
'심리 상담소 좋아하시네. 마음을 위로해? 더러운 악취가 진동할 때부터 알아봤다.'
욕을 짓씹은 윤재하가 김민재의 뺨을 갈겼다.
"정신 차려."
"악, 시바알! 그만, 그만 때려! 그만 때리라고!"
발버둥 치는 몸을 바닥에 쓰러트리고 올라탔다. 물결처럼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정신 차리라고."
"시발, 너 폭행죄로 신고할 거야. 시발, 사람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한번쯤은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집으로 들어가자고. 들어가서 얘기 좀 하자고......!"
"들어가면 넌 죽어. 정신 차려, 김민재."
부러 겁을 주며 이름을 읊조리자 악에 받친 듯 발버둥 치던 몸뚱이에 힘이 풀렸다. 수 갈래로 나뉘며 요동치던 눈동자도 멈췄다. 언뜻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였으나 윤재하는 이것이 단순한 눈속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서늘한 시선으로 쏘아지는 다갈색의 눈동자에 제 모습을 비춰보던 김민재가 욕설을 짓씹었다. '어렵네'라고 말하면서.
"야. 내가 죽는다고?"
찌푸린 눈가를 핥듯이 바라보던 김민재가 히죽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왜. 나도 네 엄마처럼 죽이려고?"
툭 내뱉어진 말을 주워 담던 윤재하의 낯에 균열이 생겼다. 김민재를 구속하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네가 병신같이 굴어서 네 엄마가 대신 죽은 거잖아. 너 구하려고 차에 치였다는 거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 이 살인자 새끼야. 네가 그런 쓰레기라도 내가 친구라고, 구원해주려는 거잖아. 안에서 얘기 좀 하자고, 내가 그렇게, 하 시발, 진짜 말이 안 통해서!"
"......."
뇌를 관통하는 듯한 이명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고 숨이 턱 막혔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는 김민재의 얼굴이 소용돌이처럼 휘감겼다. 이목구비가 분해된 낯 위로 둥둥 떠다니는 입술이 뻐끔거렸다.
'재하야.'
분명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경적과 매섭게 달려오던 기세.
"야."
다급하게 달려와 감싸 안던 너른 품.
"너 죽은 엄마랑 같이 지내지?"
순간, 윤재하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이 붉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피떡이 된 얼굴의 김민재는 제게 쏟아지는 주먹질을 받아내면서도 히죽 웃기만 하였다.
"끅, 흐흐......, 안에,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안으로 들어가자던 이유가 이거였다.
말갛던 눈에 핏발이 섰다. 버둥거리며 손톱을 세운 김민재가 윤재하의 턱을 긁어내렸다. 긴 상흔과 함께 핏물이 고였다. 사귀에 잡아먹힌 김민재가 제 목을 조르든 긁어내리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윤재하는 그저 저 입을 막아버리고만 싶었다. 저 입에서 나오는 불순물이 그의 이성을 갉아먹었다.
그때였다.
구두 굽이 지면을 내디딘 소리와 함께 긴 인영이 흐릿한 시야에 어른거렸다. 밀랍 인형처럼 굳어버린 윤재하가 저를 직시하는 흑안을 마주하며 숨을 멈췄다.
"......."
빛을 잃은 다갈색의 눈동자와 피가 묻은 주먹을 따라 김석영의 시선이 흘러갔다.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번들거리며 히죽이는 인간과 그 속에 융화된 사귀. 다시 시선을 움직여 말갛던 낯에 생긴 긴 상흔에 눈을 고정한 김석영이 걸음을 뗐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두 사람을 삼켰다. 삐걱거리는 목을 들어 올려 무감히 내려보는 시선을 마주한 윤재하가 손끝을 떨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무어라 말이라도 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여보아도 터져 나오는 것은 미약한 신음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간 김석영이 상체를 숙이며 손을 뻗었다. 질끈 눈을 감은 윤재하를 지나친 팔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남자의 멱살을 잡아채 단숨에 일으켰다. 히죽이던 낯짝이 흑안을 마주하는 순간 시퍼렇게 변해갔다. 김민재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쯧, 혀를 찬 김석영이 남자의 뺨을 후려갈겼다. 윤재하의 눈이 커졌다.
빠악―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뻐끔거리는 김민재의 입에서 검은 악취가 빠져나왔다. 눈을 까뒤집은 육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황급히 도망치려는 사귀를 단번에 낚아챈 김석영이 손아귀의 힘을 서서히 조이며 바라보았다.
"윤재하."
몸을 움찔한 윤재하가 멍하니 시선을 보냈다. 버둥거리는 사귀를 손에 쥔 채로 다가와 상체를 굽힌 김석영이 고갯짓을 하며 물었다.
"아는 사이야?"
"......아니요."
입을 뻐끔거리다 간신히 대답한 윤재하가 목소리를 내기 위해 숨을 몰아쉬었다. 악에 받친 사귀를 강한 힘으로 옭아매고 찬찬히 기다려준 김석영의 모습에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나를, 아는 것 같은데......, 그게 김민재의, 기억인지......, 하아, 아니면......."
"김민재? 아, 저거."
널브러진 남자를 바라본 김석영이 사귀에게 시선을 던진다.
"너 뭐야."
「놔줘! 놔줘! 놔줘!」
"얘한테 접근한 이유를 말하면 풀어줄게."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바라던 대답이 아니네."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쉰 김석영이 손에 힘을 주었다. 화르륵 타들어 가는 몸에 비명을 지른 사귀가 사지를 꿈틀거리며 소리쳤다. 말할게! 말할게!
「저, 저 인간이 쟤를 끌어들여서 해치고 싶어 했어! 저 인간이 먼저 날 받아들인 거야! 몸을 가지고 기억을 봤을 뿐이야! 쟤를 해치기보단 저 인간의 몸을 빼앗으려고 했던 거야!」
"그게, 다가 아니......!"
다급하게 말하던 윤재하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김석영의 시선을 피하며 손끝을 떨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했던 이유를 물으면 형체가, 그의 모친이 이곳에 있다는 걸 들키게 된다. 바로 전에 사귀를 소멸시키려 했던 김석영이라면 형체 역시.......
"왜 그래."
"......."
일그러진 낯으로 숨만 몰아쉬는 것에 한숨을 내쉰 김석영이 윤재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흠칫 놀라 바르작거리는 걸 힘을 주어 움켜잡은 그가 언뜻 보이는 손목의 형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
귀어가 희미해졌다. 흐릿해지는 흔적은 원래의 힘을 잃어가는 것을 뜻할 테고, 그로 인해 무언가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 사귀에게 시선을 돌린 김석영이 손목을 놓으려 하자 윤재하가 황급히 두 손으로 붙잡았다.
"왜."
"아......."
저도 모르게 일어난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는지, 한껏 당황스러운 낯의 윤재하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얕은 한숨을 내쉰 김석영이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 말했다.
"저거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가 있어."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들어가. 이 이상 소란 피우면 수습하기 힘들어져."
주먹을 꾹 쥐고 입술을 짓이긴 윤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널브러진 김민재의 상체를 부축하며 대문 앞에 서서 김석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감한 낯을 마주하자 고개를 푹 숙이곤 안으로 향했다.
쾅― 닫힌 문을 바라보던 김석영이 사귀에게 시선을 옮겼다.
"야."
「살려줘....... 살려줘.......」
"윤재하를 해쳐서 어쩔 생각이었어. 몸이라도 뺏으려고?"
「아니야! 나는 그냥 저 인간의 욕망대로 움직였을 뿐이야! 저건 감히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그릇도 아니라고! 그냥, 그냥 조금 겁만 주면 된다고 했단 말이야.......」
"겁을 주다니 누가. 김민재라던 인간이?"
날카로워진 시선을 숨기고 나직하게 묻자 사귀가 헐떡이며 호소했다.
「아니. 몰라, 몰라아....... 그냥 들렸어.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고! 날 저 인간한테 인도한 것도 그 목소리야. 아주 잘 맞는 그릇이 있을 테니, 꼬드겨서 육체가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기억을 들쑤셔서 겁을 주라고....... 그러면 육체를 완전히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고.......」
"그 목소리를 들은 장소가 어디야."
「그런데 말이다, 석영아.」
노인을 모시고 저승으로 향하던 중, 불쑥 그에게 한 말이 있다.
「안채에만 있지 말고, 종종 내려가 보렴. 내가 없는 사이에, 이곳에 머물던 영가들이 많이 사라졌더구나. 쉽사리 이곳을 떠날 이들이 아닌데 말이지. 그리고, 그 아이.......」
김석영의 시선이 담 너머의 저택을 향했다.
「영가를 달고 온 것 같았어.」
「여기, 여기서 들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