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느낀 것은 안도감이었다. 살아있다. 맙소사, 나는 살아있었다. 한 겨울에 산 속의
연못에 빠졌는데도 나는 살아있었다. 따듯하고 기분좋은 이불에 파고들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어떻게 된 건가 싶어서 일어났을 때,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내 인생에 이렇게 화려한 방은 본 적이 없었다. 화려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인지도 의심스럽다.
아니, 정확히는 이것을 ‘방’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른 건 다 둘째치고라도, 방 안에 폭포가 있다. 인공 폭포로 보이지만 여하간 폭포라는 것에는 의심을
둘 수가 없었다.. 나는 그 폭포를 따라 위로 고개를 올렸고,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벌렸다. 롯데월드가 생각났다. 아니, 롯데월드 유리는 그냥 사각형의 유리였지만 이 방의 천장은
창살에 세심한 조각이 들어가 있었다. ‘세심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뭘 조각했는지는 모르겠다.삼층정도의 높이일까. 천장이 상당히 높았다. 천장의 유리와 발코니로 이어지는 창에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햇살을 등지고 외국인 아주머니가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가 선해보이는 분이었지만,
고상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옅은 화장을 하고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으신 분이 나를 쳐다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나는 이 방에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방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전부 여자였다. 그리고 아주머니를 제외한 여자들은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유니폼일지도 모르겠다.
갈색 머리카락도 있고 붉은 머리카락도 있고 검은 머리카락도 있었다. 파란색 눈도 초록색 눈도 있었다.
맙소사, 전부 외국인이다.
“익스큐으지 미.”
빌어먹을, 영어로 내가 몇마디나 지껄일 수 있을까. 나는 재빨리 나 자신에 대해 할 말을 정리해보았다.
그러나 내가 미처 머릿속에서 단어들을 찾아내기도 전에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나이다.」
내가 놀란 것은, 저 아주머니가 한국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것은 한국어가 아니었다. 귀에
들어오는 생경한 발음은, 이것이 한국어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아, 저기, 안녕하세요.」
혹시나 싶었는데, 나는 이 생소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맙소사, 이건 영어도 아니고 일어도 아니다.
독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도 아닌 것 같다. 맙소사, 이게 어느 나라 말이지? 그리고 나는 왜 이 말을 이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유브라데어를 하시는군요. 다행입니다. 혹시나, 월인께서 달의 언어로 말씀하시면 어쩌나 무척 걱정했었는데,
한시름 놓았습니다. 처음뵙겠습니다, 황비마마. 저는 오늘부터 마마를 모시게 될 시녀장 라프라 라 데인입니다.
라프라라고 불러주십시오.」
유브라데어 - 라는 것은 이 나라의 이름이 ‘유브라데’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유브라데? 그런 나라가 있었어?
아주머니는 상냥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월인. 달의 언어. 그리고, 황비. 황비?
「죄송한데……」
내 말에 아주머니가 싱긋 웃으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눈을 뜨신 것이 너무나 기뻐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뭐가 결례라는 거지? 아주머니는 마치 패밀리 레스토랑 점원이 주문받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나보다 눈높이가 낮아져서 나도 안절부절하게 되었지만 아주머니는
당연한 것처럼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이러신거니 우선은 넘어가자.
「죄송합니다만, 여기가 어딘가요?」
내 말에 아주머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예?」
뭐야, 나는 저 쪽 말을 알아듣는데 왜 저쪽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 혹시나 싶어서 다시 한번 시도했다.
「여기가 어디냐고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놀랐던 것 같다. 아주머니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유……브라데입니다. 마마, 기억 아니 나십니까?」
그 마마 소리 안하시면 안되요? - 그렇게 말을 할까 하다 우선 제쳐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것은
‘마마’가 아니다. ‘호한’이면 또 어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유브라데요? 그게, 어디 있는 나라죠? 아시아는 아니죠?」
「아시아가 어딘지요? 드와나 안에 있는 곳인가요?」
「드와나요?」
상당히 불안해졌다. 맙소사, 그 펜션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관심이 없이 흘려 들었지만 기억하기로는
충청북도인지 충청남도인지였던 것 같았는데. 여하간 충청도였던 것 같은데. 어디든 그곳이 대한민국일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움직인 것이 아니라 친구 찬성이의 차를 얻어탔으니까.
「예, 드와나 대륙의 유브라데입니다. 아래 대륙의 가장 위쪽에 있는, 현재 신의 길을 가지고 있는 나라지요.
모르시겠습니까?」
전-혀 모르겠는데요.
내가 이 아주머니와 말이 통하고 있는걸까? 아니, 말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
어쩌면 ‘통하고 있다’는 것은 내쪽의 착각일지도 모르지. 딱 봐도 외국인인데 나와 말이 통할 리가 있느냔 말이지.
내 표정만으로도 대답을 알아들었는지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났다.
「자,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황망한 걸음걸이로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여자 몇은 그녀를 따라나갔고, 몇은 남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다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댄 모습이었다. 내가 동상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뭐라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아야 말을 할 것 아닌가.
일단 방을 둘러보았다. 크다. 내 고등학교 운동장만 하다. 도대체 이렇게 큰 방이 누구의 방인 걸까?
아름다운 장미가 여기저기 장식되어 있다. 그러고보니 전체적으로 디자인이 여성의 방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식한 크기를 제쳐두고 부분 부분을 보면 분명히 여성스러운 느낌이 난다. 가구들도 상당히 고급스러워보이고
무엇보다 크지만, 사주식 침대에 장식된 레이스라던가……전체적으로 여성의 방같다.
그러고보니 아까 분명히 ‘황비마마’라고.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나는 일단, 가장 시급한 걸 먼저 알아내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는 어디냐? 그리고 집에는 어떻게 가야 하느냐. - 이 두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