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예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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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그녀는 울고 있었다. ‘평생’이라고 어린 입이 무절제하게 저주어린 말을 뱉었다. 아니, 그 입이 어리다 할지라도
그 말은 무절제하게 뱉은 것이 아니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잘못했어,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내가 말을 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등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서둘러 소리쳐보아도 그 등은 꼿꼿하게 세워진 채로 멀어졌다. 미안해,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아무리 말해도 멀어지기만하는 등. 오랜만에 꾸는 꿈은 차갑고 슬펐다.
-누구야?
이 뻔뻔스러운 작자가 안 나타났다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이사.
-화난거야?
시오엔과 닮았는데 왜 이 남자는 이토록 그와 알맹이가 다른 걸까? 끈질기고, 못됐고, 이기적이다. 잔인하지만 묘하게 상냥한 시오엔과는 여러모로 틀리다. 쌍둥이와 결혼하는 사람들은 좀 찝찝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를 보면 껍데기보다 그 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드래곤이 한발짝 앞으로 다가와서 나는 두걸음 물러났다.
황금색 눈이 가늘어지고, 코 끝에 주름이 잡힌다. 곤란한 미소를 입에 달고 그는 잠시 다른 곳을 쳐다보다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내게 화난건가?
-그럼 내가 누구에게 화가 났을 것 같으신데요?
혹시 바보냐?
대놓고 말하기에는 그 피와, 성기가 잘려진채 기어가던 남자와, ‘아이를 낳아’라고 강요하던 드래곤의 목소리가 걸려서 나는 조금 소심한 태도로 쏘아붙였다.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물라서 물어보는 거잖아.
바보 맞구나.
말할 가치가 없다. 그런데 내 꿈이기는 한데 내 맘대로 깰 수 없는 꿈속에서 나는 이 자리를 피하지도 못하고 여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드래곤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정의 여지는 없다.
그는 살인자다.
-나한테 화난 거라는 건 알겠는데. 아니, 그 이유도 아는데.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 눈치라도 챈 것일까?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고 횡설수설했다. 그것이 내 눈치를 보는 행동이라는 것을 나는 좀 뒤에야 깨달았다. 그는 조금 더 황망하게 말도 안되는 단어들을 늘어놓다가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이마위를 덮은 앞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난 드래곤이니까, 이게 당연한거야.
-뭐가 당연한데요? 그 죽은 사람들이 그쪽에게 죽여달라고 했어요? 그쪽의 일용한 양식이 되고 싶대요?
-그런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닌데?
그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먹이사슬이라는 게 있잖아.
힘 없는 변명조의 어투에 잠시 정신이 팔렸다.
-드래곤은 인간보다 위란 말이야. 그러니까 드래곤은……
-식인 드래곤,이라는 건가요?
-일단은.
거짓말.
골드 드래곤은 인간을 먹지 않는다고 비서관이 말했었는데! 초식동물이라매, 초식동물! 비서관에게 화를 내야 할지 눈앞의 드래곤에게 화를 내야할지 모르겠다. 내 안색이 어떻게 변했는지, 드래곤이 갑자기 두 손을 들었다.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드래곤은 사람을 먹이로 쓰지 않아.
-방금은 식인이라며!
-‘일단’이랬잖아, 일단.
내가 그를 노려보자 그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눈썹을 내려트렸다.
-사람을 안 먹는다고요?
-아니, 먹기는 하는데.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고함을 지르자 드래곤이 당황하더니 갑자기 뭐라고 주문을 왼다. 그러자마자 나는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입도 열 수가 없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드래곤이 천천히 다가와서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는 사람을 죽였다. 성교를 한 뒤 죽이는게 그네들의 버릇이든 습관이든 습성이든 그건 내 알바 아니다. 그는 사람을 죽였다.
살인자.
눈을 떼지 않은 채 속으로 비난했다.
살인자.
가까이 다가온 드래곤이 내 표정을 보고 미간을 좁히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싫어.
-그렇게 싫다는 얼굴로 거부하지 말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드래곤이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시간이 꼬여버린거야. 민후, 넌 나의 연인이지 시오엔 녀석 것이 아니라고. 그와 합방식을 생각하다니, 말도 안돼.
그거야 네 사정이고! 그리고 너보다야 시오엔이 낫지. 아니 무엇보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걸 정하고 지랄이야! 감은 눈을
뜨지 않고, 표정도 마치 못 들었다는 것처럼 무표정을 고수한채 나는 속으로만 욕했다.
-미치겠네. 정말이야. 너는 나의 연인이야. 시오엔이 너에게 이런저런 짓을 해서 지금 많이 혼잡해졌지만, 최종적으로는
너는 나의 것이 될거다.
그 순간, 체온이 올라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드래곤의 뺨을 갈겼다. 뺨에 주먹이 닿는 그 순간 몸이 풀렸다는
것을 깨닫고 드래곤과 마주본채로 ‘아’라고 내뱉었다.
화를 낼까? 혹시 나를 죽일까? 좋아, 와봐. - 이런 기분이었던 나를 드래곤이 끌어안았다. 벼락치는 밤에 어린아이가 인형을
끌어안듯이 절박하게.
솔직히, 별로 애틋하지 않았다. 살인자잖아.
-운명은 나에게 너를 준거야.
드래곤이 내 주먹을 잡고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그가 무섭지 않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와 이 드래곤의
관계에서만큼은 내가 더 힘이 있는 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드래곤의 호의때문이든 뭐든간에. 아니, 내가
역학관계에서 밀리는 쪽이라 할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에게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없으므로.
드래곤이 내 손가락을  펴고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꿈에서라도 이런짓은 하지 말아. 전에도 말했잖아, 다칠 수도 있다고.
혀가 아닌 입술로 손바닥을 핥으며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운명이 점지한 너의 연인은 나야. 시오엔이 아냐. 그는 가짜이고, 그는 곧 죽을 것이며, 그는 아무것도 아니야.
죽어……?
누가, 죽는다고?
나와 눈이 마주친 드래곤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죽어. 시오엔은 죽을 것이다.
그 말에는 위엄이 있었다. 압도되고 있었다. 그 말은 간결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계시와 같았다. 그것은 당연하고,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거짓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그런 말이었다. 그가 드래곤이라서? 아니, 정신차리자. 그는 드래곤이지 아폴론이 아니다.
그는 신이 아니야.
-당연히 죽죠.
내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웃으려고 애를 썼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굴고 싶었다. 가능한 나는 무심하게 말하기 위해서-아마도 당황한 티가 역력했겠지만- 노력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내 말에 드래곤이 피식 웃었다.
-시오엔은 좀 더 빨리 죽을거야.
-무슨 소리야?
나는 드래곤의 무릎에 앉아있는채로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무슨 소리야, 시오엔이 왜 죽어? 왜, 언제 죽는다는 건데?
그의 멱살을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것을, 눈이 시큰거려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도 멱살을 놓을 수도 없었다.
누가 죽는다고?
누가?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던 드래곤이 입술을 가늘게 하고 내게 말했다.
-내 아이를 낳을래?
드래곤이 다시 물었다.
-시오엔이 왜 죽느냐니까! 뭔가 알고 있으니까 지금 이러는 거잖아, 시오엔이 왜?!
내가 그를 윽박지르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그 모습은 성인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기
보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선명히 느끼게 해주었다. 갸웃거리던 목을 바로 하고 그가 물었다.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시오엔이 죽는다며? 말을 정확히 해! 그가 왜……
-나와는 관계없어.
그 차가운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관계가 없어? 사람이 죽는데 관계가 없어?
마치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와는 관계없어.
-관계없는 이야기를 왜 꺼낸건데?
-마음이 뒤틀려서.
-마음?
-그래, 마음.
‘마음’?
지금 이 와중에 마음이 나와?
-무슨 마음?
-내 마음.
-그러니까, 그게 어떤 마음인데? 뒤틀린 마음이 뭔데?
-너를 사랑하고 있어.
제정신이 들었다. 나는 시오엔과 닮은 얼굴을 훑어보고 한숨을 뱉었다. 뱉으면서, 머리를 굴렸다. ‘시오엔이 죽는다’고
그는 말했다. 죽는다, 시오엔이 죽는다. 안돼, 나는 그를 지킬 것이다. 그를 하찮은 고깃덩어리로 만들지는 않겠어.
드래곤이 나에게 자신의 아이를 가지라고 했을 때를 기억해냈다. 그 피내음이 자욱한 동굴. 그리고 발 뒷꿈치에 밟히던
인체의 조각.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시오엔을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야.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드래곤의 입에서 시오엔이 죽는다고 말한 근거가 뭔지 캐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 천천히
말을 유도해야 한다. 넌 할 수 있어, 김민후. 넌 할 수 있어.
-나를요?
-그래.
-내 어디를요?
머리가 핑핑 돈다. 시야가 어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머릿속이 혼잡했다. 내 질문이 의외인지 그는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어디를?
그가 나에게 되물었다.
-네, 나의 어디를요.
실은 무슨 대답이 나오든 상관없었다. 일단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을 벌면서 나는 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노력뿐으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당장 들어내야 하는데 왜 모르겠는거야!
드래곤은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 물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유가 필요해?
-계기든 뭐든 있겠죠. 아, 좋아요. 제 장점이라도 말해보세요. 제 어디가 좋으신데요?
너무 빨리 말했다는 낭패감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드래곤은 생각에 빠지느라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생각을 하고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그럼 다른 사람과 제가 다를 바 없지 않나요?
-아니, 그건 아냐. 그건 아니야, 너는 틀려. 너는 특별해.
-그러니까, 어디가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떻게 그 이야기를 꺼내야 하지? 반드시 대답을 들어내야 한다. 그런데,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말을 해줄까? 저 드래곤이 내게 말을 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드래곤이 곰곰이 ‘나의 어디가 좋은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죽을 시오엔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쪽도 나를 좋아하는 건가요?
-아까부터 그쪽, 그쪽 하는데. 내게는 이름이 있어.
-이름?
-그래.
-그런게 무슨 상관이에요. 대답해보세요. 곧 죽을 시오엔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쪽도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럼 시오엔이 죽으면 나를 좋아하지 않겠군요. 저는 언제까지 이 일방적인 장난에 놀아나야 하나요? 한달? 두달?
하느님, 제발. 제발, 드래곤이 아니라고 말하게 해주세요. 제발, 제 말을 무시하거나 돌리거나 하지 말고 대답하게 해주세요.
제말, 제발.
드래곤이 잠시 나를 노려보다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빨리는 안 죽어. 시오엔의 생은 아직도 꽤 남아있다고.
그렇게 대답하고나서 드래곤이 비릿하게 웃었다.
-아하? 그대는 시오엔이 언제 죽는지가 궁금한 모양이군.
정곡을 찔려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군. 내 이름따위는 안중에도 없는거군. 그대가 궁금한건 오로지 시오엔의 남아있는 생이 얼마인지, 그것뿐이란 말이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알려줄까보냐.
그리고 바로 사라진 드래곤 때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리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드래곤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웬돌린] 구원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