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나라를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도의 성문을 지나쳐 나와 조금 후에 도착한 숲을 보고 나는 한숨을
삼켰다. 맙소사, 이게 숲이야?
그 곳만 빛이 없다…… 굉장히 어두웠다. 하늘까지 자랄 생각인 것 같은, 끝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거목들이 즐비한 숲은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었다.
황제는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갔다. 문득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어 뒤를 돌아보았더니 다들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왜 이런 거지? 황제를 올려다보니, 황제의 표정도 차가웠다.
「들어라, 신관.」
황제가 냉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신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는 병이라는 명목을 달지 못하리라.」
‘이번에는’이라는 건, 저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황제가 대놓고 협박을 하자, 신관이 몸을 파르르 떨고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이 동네 사람치고는 참 작구나. 신관은 나보다 조금 작았다. 웬만한 시녀 누나들도 나보다 큰 이 나라에서, 이 남자는 신관을 안 했으면 여자와 사귀기 힘들었겠다.
「물론입니다, 폐하. 여섯시간의 제례가 끝나면, 비 마마께서는 곧 폐하의 곁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신관은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했지만, 황제는 그가 아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내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대었다.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어서 나도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주머니속의 보석이 아프다. 다리를 찌르고 있나보다. 뾰족하게 가공되어 있었더랬지……아니, ‘가공’이라는 말 보다는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대는 나와 운명으로 이어져있다.」
황제가 뜬금없이 말했다. 로맨틱한 언어기는 한데 너무 뜬금없어서, 나는 다소 당황한 얼굴이었을 것 같다. 내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황제가 부드럽게 내 이마에 키스했다.
「그러니 그대가 없는 나의 삶은 삶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대가 없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
마음이 아팠다.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고작 ‘하늘에서 떨어졌다’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이유로 좋아했든간에, 그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신관, 들었나? 나는 나의 비가 사라지면 죽어도 좋다. 무슨 뜻인지 알 것이라 믿겠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
신관이 더욱 허리를 숙였다. 내게 말하는 사랑인지, 신관을 얼르는 협박인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나는 황제에게 웃어주었다.
황제도 내게 웃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그래봐야 소용 없는 것일테니까. 도망치다 잡히면 당신은 나를 죽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이 길이 옳다고 나는 믿어.
네가 무슨 이유로든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싫어.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그래서 혹시나 너와 정말 그런 사이가 된다 해도, 너는 내게 영원히 평온을 줄 수 없을테니까. 나는 싫어. 나는 나만을 바라보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싶어.
내게는 너를 위할 의리도 없어. 어차피 너도 나를 속였으니, 결국 하나씩 저지른 사이가 되는 거지. 너는 속여서 나를 잡았고, 나는 속여서 너를 떠나고.
「마마, 곧 재례가 시작됩니다.」
신관이 나를 재촉했다.
나는 다시 한번 황제에게 미소를 짓고 몸을 돌렸다. 황제의 시선이 느껴졌다. 염려로만 가득한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뒤돌아볼 생각이 없었다.
안녕.
나 혼자, 마음 속으로만 그 인사를 건넸다.신이 있다면 그는 정말 내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관이 내게 말을 건네주었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신성지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태양이 뜨지 않은 것처럼 어두웠다. 신관은 내게 램프를 하나 건넸고, 자신도 램프에 불을 붙였다.
아직 해가 떠 있는데 불이 없으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니, 정말 숲이 울창하구나. 지구에도 이런 시절이 있었을까? 아니, 아직 아프리카라던가 아마존 밀림같은데는 이럴까?
「마마, 말을 타실 수 있으신지요?」
안장도 있고하니 탈 수 있겠지.
「탈 수 있어요.」
「그럼, 저 나무를 향해서 달려주십시오.」
유난히 큰 나무였다. 이 거목들 틈에서도 보일 정도로. 잠깐, 아까 입구쪽에도 분명히…… 뒤를 돌아보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저건 반대쪽 출구인가보죠?」
내 말에 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마. 그렇기에 저쪽으로 가다보면 중심부인 제단에 도착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렇구나.
‘달로 돌아갈 수 있다.’ 그 말은 무슨뜻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을 달리자 조금 불편했지만, 곧 요령이 생겼다. 승마를 배워둔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조기교육에 감사할 뿐이다.
이십여분 말을 달려서, 신관이 멈췄다. 나도 그에 맞춰 멈추면서 재빨리 이곳을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곳이구나. 이제 지구에서 이런 숲은 밀림이 아니면 볼 수 없을 거야.
「여기서부터는 걸으셔야 합니다.」
말에서 내리고 고삐를 쥐었다. 내가 하는 것을 보더니 신관이 먼저 길 안내를 했다. 아까부터 팔목에 달랑거렸던 램프 때문에 팔목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자박자박, 풀을 밟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리는 새소리, 그리고 물소리.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곳은 별도 보이지 않겠구나. 나무가 정말 많다.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담쟁이덩쿨로 뒤덮인 곳은, 아름답지만 을씨년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들어가십시오.」
신관이 옆으로 비켜서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 ‘귀신의 집’같은 곳에 혼자 들어가라고? 어이가 없어서 신관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진심인 듯 그대로 고개만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달도 돌아갈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가면 다시는 이쪽으로 올 수 없겠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초라한 신관 하나가 말 두 마리를 데리고 허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인사는 충분히 했지.
나는 육중한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보인 것은, 희미한 향 냄새가 나는 어두운 실내였다. 그리고 그 어둠에 눈이 익자 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계단위에 서서 어둠같은 검은 천으로 온 몸을 가린 사람이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지만, 저 사람이 전설의 ‘라브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그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서오십시오, 여행자여.」
‘황비’가 아니다. 갑작스럽게 실감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안도가 되었다. 그 동안 이 곳에서 여러모로 마음 고생을 많이 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툭하면 사람을 죽인다는 전쟁광 황제와 사람 머릿속을 드나드는 드래곤, 그리고 죽어버린 작은 여자아이.
「안녕하세요.」
내 말에 그가 스르륵 걸어왔다. 귀신같은 몸놀림이었다. 계단아래까지 내려오는데 마치 그 움직임이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호러류에 한없이 약한 나는 몸이 움찔거렸다.
「달로 돌아가고 싶으신겝니까?」
목소리는 남자임이 분명했다. 키도 황제만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랑 체구가 비슷해서, 혹시 황제면 어쩌지 - 라고 걱정했지만 (왜 이런 걱정을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올려다 본 그의 눈동자는 녹색이었다.
「돌아가고 싶어요.」
내 말에 그가 싱긋 웃었다. 그것과 동시에 몸이 허물어졌다. 맙소사, 정신은 멀쩡한데 몸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지는데도, 남자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뺨에서 아주 희미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것이 바닥에 닿았기 때문이라는 걸, 바닥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시작해볼까요?」
남자의 말에 숨어있었던 사람들이 나타났다. 뭐야, 왜 숨어있었던 거지? 하나같이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람들이 나를 사냥에서 잡은 짐승을 운반하듯 사지를 하나씩 잡고 움직였다.
아픈 것보다도,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좋은 일 같지는 않다. ‘달로 보내주겠다’는 건 헛소리였나. 빌어먹을, 나 또 속은 거야?
그들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와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사이, 아까 나를 데리고 왔던 신관은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이 데리고 간 실내에는 해부대같기도 하고 진찰대 같기도 한 제단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그 곳에 올려놓고 단검을 꺼내들었다.
설마.
오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