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계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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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참 애매합니다만……」
국무대신은 그렇게 서두를 꺼내고 잠깐의 생각끝에 말을 이었다.
「삼십년 전부터 말씀드릴까합니다.」
30년전?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잖아. 내가 왜 황비가 되었는지-가 왜 삼십년전까지 튀어나오는 걸까?
「이야기가 그렇게 길지는 않습니다.」
내 얼굴을 보고 국무대신이 안심시키듯 말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길었다.
「삼십년 전, 유브라데의 작은 산골마을인 파데에서 보고서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파데를 관리하는
지방 도시는 당연히 관리를 보냈지요. 그런데, 파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670명이 사는 마을이
비어있었던 겁니다. 관리는 텅텅 빈 마을에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고, 가정집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가정집에는 시체뿐이었어요. 네, 모두가 시체였습니다. 모두 죽어있었던 겁니다. 」
나, 이토 준지류의 만화책은 절대 안 보는데. 소름이 끼쳤다. 이런 이야기는 질색이다. 허구인 만화책도
안 보는 판국에 ‘사실’로서 괴담을 듣다니.
그냥 ‘파데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라고 하면 되지, 뭐 저렇게 이야기하듯 말하고
그러는거냐. 가능한 아무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건너편에서 황제가 물었다.
「무서워?」
어, 어떻게 알았지? 그러나 대한민국 사나이 김민후, 무섭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요.」
「무서운 얼굴인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국무대신도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안색이 창백합니다. 이런, 아직 이야기 시작도 안했는데……다음에 할까요?」
요란스럽다느니 한거 미안해요. 국무대신, 좋은 사람이구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황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니, 말하기 전에 자신의 무릎을 툭툭 치고, 다음에 말했다.
「내가 안아줄까? 여기서 들을래?」
……너, 뭐 잘못 먹었니? 그건 일종의 성추행이라고.
「됐습니다.」
내 거절에 황제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옆에서 국무대신이 샘통이라는 듯이 진하게 미소짓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당황한 얼굴을 「흠!」하고, 기침을 하더니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계속하겠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 일은 유브라데 뿐만 아니라 드와나 전체를 시끄럽게 했죠. 그러나 학자들을 파견하고, 신관들을 파견해보아도,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제사를 지내게 됐습니다. 라브만이 주관하는 첫 제사인 셈이었죠. 그만큼
큰 일이었습니다.」
「라브만이요? 그게 누군데요?」
그러고보니 이 사람, 전에도 황제와 국무대신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나왔었던 것 같다. 누군지 궁금해져서 물었더니
황제가 쿠키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신 대답했다.
「신성지의 주인. 신관들의 두목.」
‘신관들의 두목’. 그 라브만이라는 사람과 황제는 사이가 좋지 못한가 보다.
「‘라브만’이라는 것은 직책의 이름입니다. 하아……이야기를 좀 더 파고들자면.」
아니, 안 파고들어도 되는데. 그냥 물어본거에요. 전 라브만이 누군지 몰라도 되는데…… 만류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여기 계시는 영광의 이름 나라연을 계승하셨으며 존귀……」
「한 골드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위대한 전사 시오엔 황제.」
그 말을 자기 입으로 하고 싶냐. 그러나 황제도 꼭 자기 PR을 할려고 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하지 말라니깐.」
나라도 싫겠다. 국무대신이 멋쩍은 얼굴을 했지만, 저 눈에 보이는 저 빛은……아무리 봐도 고의다.
「죄송합니다. 어릴때부터 받았던 교육이라 툭하면 튀어나옵니다.」
거짓말. 황제도 전혀 신용하지 않는 눈치다.
「여하간, 황제폐하께서는 유브라데 만물의 지배자이심에 틀림이 없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모두 가지고 계시고, 군의 원수이시기도 하시죠. 물론 신전도 유브라데의 국민인 만큼 황제 폐하를 섬기고 있습니다.」
정치과목 생각난다.
「그러나 신전이 복종하는 자는 폐하가 아니라 신입니다. 수천의 신들, 그 가운데서도 태양신 ‘레’와 달과 밤을
주관하는 여신 ‘데’을 중심으로 하지요. 그들은 신들이 남겨놓은 유적과 말, 계시를 통해서 현재를 반추하고
영원한 진리를 찾아 헤맵니다.」
호러물에서 판타지물로 대 전환. 호러물보다는 판타지가 낫긴 하지. 난 둘 다 별로이고, 사실 스포츠만화를 좋아하지만.
「라브만은 수많은 신전들의 통솔자입니다. 그는 이 궁을 중심으로 한 수도 디안의 교외에 있는 숲에서 은거하고 있는데,
세명의 대신관말고는 그를 본 자가 없습니다. 그는 유브라데의 국민이지만, 폐하를 섬기지 않습니다.」
대놓고 그런 말 해도 되나? 나는 슬쩍 황제의 눈치를 보려 했지만, 황제가 내 쪽을 쳐다보고 있는 바람에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예쁜 얼굴이 생긋 웃었다.
「안아줘?」
그리고 또 자신의 무릎을 탁탁 쳐보인다.
「……괜찮습니다.」
그래, 나라도 섬기기는 싫겠다. 대답을 하면서 국무대신을 쳐다보는데 황제가 갑자기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네 마음이 이해가 갈 것 같아, 니타우.」
국무대신은 민망한 얼굴로 황제에게 대답하지 않고 내게 말을 이었다.
「라브만이 어떤 전통을 가지고 이어지는지는 모릅니다. 신관은 결혼할 수 없으니 세습제는 아닐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실체는 아무도 모르지요. 라브만을 본 자는 세명의 신관뿐. 그러나 3인의 대신관은 종신직이므로 실제로 한 시대에
대여섯명정도만이 아는 존재일뿐입니다.그 라브만이 주관하는 첫 제사였습니다. 공개적인 자리에 라브만이 나온 것은,
라브만이라는 존재가 생긴지 천년만이었죠.」
「그럼 이제 라브만이 누군지 아시겠네요?」
「아니요. 알지 못합니다. 그는 검은 천을 쓰고 나왔습니다. 그 숲에서 나올당시, 그는 전전대의 황제 위미르께
미리 허락을 받고 나왔습니다. 자신의 베일을 벗기지 말라는 조건이었죠. 황제는 수락했고, 그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국무대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당히 냉혹해보이는 얼굴이다. 이제껏 푼수 떨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 보여지지
않을 정도로.
「제사는 성공적으로 치루어졌고, 그리고나서 멸망한 마을은 없었습니다. 제사가 이뤄지는 동안 파데를 제외한
마을을 두개나 더 말살시킨 병이 갑자기 사라진 것입니다. 라브만은 ‘신의 노여움이 풀렸다’고 선언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신병(神病)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웬돌린] 구원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