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모두를 지키는 건 불가능해 (3)

0 0 0
                                    

골드 드래곤에게는 예지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시오엔은 그 골드 드래곤의 수호를 받고 있다고 한다.(내가 아는한 그 용은 누구를 수호해줄 성격은 못될 것 같은데. 더욱이 상대가 시오엔이라면.)
-그렇다면 시오엔에게도 예지능력이 있다고 봐도 좋을까.
시오엔의 충고는 한없이 옳았다. 알현실에서 나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앉아도 편치가 않아서 뒤척이게 된다. 아직도 거기가 벌려져있는 느낌이었다. 안쪽에서 이물감이 느껴져 난처하게 입술을 깨물어야했다.
「그런 표정 좀 하지 마시고, 말씀을 해주십시오- 월인이시여! 정말로 황제의 곁에 있으실 겁니까? 그것이 월인의 의지시란 말입니까?!」
얼굴은 달라져도 내용은 비슷하다. 그리고 하나같이 열렬하다. 나도 평소 같았으면 악을 써주었을텐데 오늘은 만사 귀찮다.
「그래요.」
「어떻게, 어떻게 저희에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아아아!」
몸이 힘들어서 그런지, 상황에 좀 더 냉정하게 굴 수 있었다. 대답할 의무가 없다. 그러니까 하기 싫은 말, 할 말이 없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왜 그렇게 악을 써대었던 것이었을까.
아마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요,라고. 네가 잘못한거야-라고 밀어붙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내가 옳다고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뭐가 문제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월인이시여, 월인께서는……」
「황비에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아도 돼.’
시오엔은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도 구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데는 왜 당신같은 분을 보낸겁니까?」
신관이 절망으로 가득찬 목소리를 냈다. 이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어서, 당황스럽다. 왜 나같은 걸 보냈냐니. 왜냐하면-
신은 없기 때문이야.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같은 게 여기 있는 거야. 아니라면, 당신들이 원하는 그 월인은 없어. 나는 그냥 길을 잘못 든 인간일 뿐이야.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안됐네.
아니, 사실 남의 일이기도 하다.
「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겁니까?!」
「정말 조잘조잘 말 많네.」
나는 싸가지가 없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이 말은 알현실 뒷문으로 들어오던 국무대신이 한 소리였다. 아마도 이 신관이 마지막 알현자인 것 같다.
「그렇게 신병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면 네 발로 뛰어. 바보같은 자식아.」
나도 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인정사정 없구나.
신관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었다. 자세히 보니 이 신관, 나이가 그렇게 많아보이지는 않는다. 몇 살일까? 스무살? 스물두살? 여하간 나보다 조금 형이던가, 나와 동갑이던가. - 어쩌면 나보다 어릴지도 모르겠다.
「누, 누구시오, 무례한 말을 하는 당신은!」
「니타우 라 크리스티.」
「크리스티? 그 악마의 앞잡이인……」
그 말에 국무대신이 싸늘한 목소리로 「보초, 끌고 가.」라고 명령했다. 감정의 편린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 목소리에 오싹해졌다.
국무대신은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품평을 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섞어 물었다.
「일이 좀 급해져서,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알현 도중 난입한 무례한 행동은 후에 원하시는대로 처벌받겠습니다.」
빠르면서도 침착한 어조는, 사무적이다. 본능적으로 나는 이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의미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국무대신은 시선으로 알현실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내보냈다. 마지막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국무대신이 물었다.
「여쭙겠습니다. 유브라데를 구원하실 겁니까?」
……어이가 없어서 나는 국무대신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국무대신은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신중하고 진지했다.
「제가 월인이라는 거……그거 거짓말인거 아시잖아요.」
「아니요, 비 마마께오서는 월인이십니다.」
「아니, 아 그렇기는 한데-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저는 단순한 차원이동자일뿐이라고 전에 그랬잖아요.」
잠을 못 잔것이 분명한 얼굴로 국무대신은 턱을 긁었다.
「상처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폐하께서.」
「예?」
「전에 칼에 찔리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상처가 남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아아, 그거.
「골드 드래곤이 치료해준거에요.」
내 말에 국무대신이 그러셨군요,라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이상하단 말입니다. 물론 비 마마를 잡은 것이 저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이건 우연의 연속인걸까요? 신관을 족쳐서 알아낸 바로는 그 계시가, 정말이라고 하더군요. 깃털이니 뭐니 하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딱 그 보름에 그 순간에 어떻게 비 마마가 떨어지실 수 있는 걸까요? 왜 골드 드래곤은 비 마마의 목숨을 구하고, 비 마마에게 프러포즈하는 걸까요? 비 마마가 오시자마자 신병이 사그러들었습니다. 곪은 상처들이 일시에 터지는 이 모든 현상들이 그저 우연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걸까요? - 늘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습니다.」
국무대신이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모든 것이 어떻게 이토록 비 마마의 사정에 맞춰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비 마마, 아니 이계의 객이시여. 계약은 지킵니다. 이년이 조금 더 남았지요. 시간이 되고, 그 때에도 비 마마께서 귀환을 원하신다면 반역을 해서라도 돌려보내 드릴 겁니다. 제 목숨을 걸지요. 그러나 그 전에 여쭤보고 싶습니다. 비 마마께서는 유브라데를 구원하실건가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아도 돼.’
시오엔은 그렇게 말했다.
‘내 곁에만 있어.’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시오엔의 뜻이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내 말에 국무대신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예?」
「시오엔이 유브라데를 구하라고 한다면, 그리고 제 능력이 되는 한도내에서 방법을 알려준다면 최선을 다할거에요.」
「폐하가 원치 않으시면요?」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대답을 회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안 구해요.」
사람이 죽는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간다. 신관들의 모습도 선명하다. 그래, 그들 모두는 잘못하지 않았어.
누구도 완벽한 죄인은 없다.
사실 이 상황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렇다면 보다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게 중요도 순위는 늘 시오엔이 최정상의 자리를 잡고 있다.
뒤는 돌아보지 마, 김민후.
어차피 과거로 갈 수 있는 길은 어느 곳에도 없다. 누구도, 신이라 할지라도 시간을 돌려서 뒤로 걸을 수는 없어.
깨끗하게, 경멸당하겠다. 자기 보호따위는 하지 않겠다.
그렇게 마음 먹은 나에게 국무대신은 피식 웃었다.
「이야, 열렬하신데요.」
굳게 먹은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아니, 그렇게 헤벌쭉 웃으면서 하실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아아 각오하고 있었던 내가 바보같다.
「뭐가요?」
「그냥……마음이, 라고 해야 할까요. 사랑이? 뭐 폐하쪽도 참 열렬하시지만.」
능글맞게 웃으며 국무대신이 덧붙였다.
「비 마마께서도 폐하를 좋아시긴 하시나보네요. 그것도 상당히. 다행입니다.」
그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가득했다. 그가 뭔가를 정말로 걱정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유브라데는 지금 흑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황궁은 특히 심하죠. 황제파와 신전파.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리는 말은 앞으로 달리거나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중립은 있을 수 없지요. 사람이 오백만명이나 죽었는데 탁상공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못합니다. 하루 하루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목표를 위해서는 뒤도 옆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야 할 판국입니다. 모든 이를 만족시키면서 어떤 것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다쳐야 합니다. 저는 비 마마를 황후로 추대했습니다. 이제 곧 유월이군요. 혼례식이 시작될겁니다. 그 전에, 비 마마의 각오를 듣고 싶었습니다.」
국무대신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해갔다.
「마마께오서는 굉장히 좋은 분입니다. 다정하고, 정의로우시죠.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서 다정함과 정의로움은 독과 같습니다. 비 마마의 모든 행동이 폐하에게 돌아옵니다. 비 마마 본인은 자신의 양심과 위배되지 않은 길을 가시고 싶으시겠지만, 그건 발밑에 시체를 깔아두고 홀로 고고하게 걸으시겠다는 것과 별 다를바가 없습니다. 모두가 비 마마를 주목하고, 모두가 비 마마 때문에 벌벌 떨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럴만한 여유가 전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국무대신이 물었다.
「비 마마는 악역을 자청하실 각오가 되어있으십니까?」
악역?
너무나 낯설어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악역이라고? 내가? - 그렇게 놀라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기도 했다. 정말 단 한번도 나는 ‘악역’을 생각해본 일이 없구나. 내가 하는 어떤 일도 악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옳다고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에만 주력해왔고, 그래서 후회도 뭐도 없었다.
그런 인생이었다 - 인생이라고 말하기에도 짧은 내 생은.
악역을 자청할 각오라니.
되어있지 않다. 할 수 있을리 없다. 악역이라고? 악역을 해야 한다고? 사람을 존경하는 것. 약자를 지키는 것.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하는 ‘지켜야 하는 것’들이.
내 혼란스러운 얼굴을 마주한 국무대신이 말했다.
「자신을 온전하게 지키면서, 타인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당연한거잖아.
「비 마마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마다, 폐하는 고립되게 됩니다. 게다가 폐하 본인도 비 마마를 사랑하시는지라 더욱 더 불안해하시죠. 어느 순간, 비 마마는 악역을 자청하셔야 할지도 몰라요. 그런 순간은 올겁니다. 비 마마께서는 그 때 악역이 될 각오가 되어있으신가요? 아니라면, 부디 상징적인 존재로 이곳에 남아주십시오. ……좀 더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곳에 남아있으신 동안에는 부디,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주십시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셨습니까?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아주십시오.」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악역하죠, 뭐.」
내가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이런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가 한심할 지경이었는데 그건 국무대신도 마찬가지인지, 국무대신이 아주 진지하게, 대놓고 물었다.
「아무 생각없이 하신 말씀인거죠, 이거?」
나는 자존심이 좀 높은 편이다.
「아뇨.」
나와 눈싸움을 하던 국무대신이 「진짜로 각오가 되어있으시다는 말이세요?」라고 다시 물었다. 여기서 아니,라고 해야 한다. 이봐, 각오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 마. 나처럼 까탈스러운 놈이 악역을 자청하는 각오라니-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요.」
허세 부릴 일이 아니야, 김민후. 너 왜 이래? 허세없이 정직하게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하는게 너의 장점이었다고. 왜 이러는 거냐고!
정말 속으로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대놓고 국무대신에게 ‘그런 각오 없어요’라고는 죽어도 말하기가 싫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울고 발광하는 지경이면서도 겉으로는 무심한 척 대답했다.
「비 마마. 마마, 지금 화나신거죠?」
그런걸까.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니요.」
우아아아 미치겠네, 라고 국무대신이 소리치더니 나에게 우는 목소리를 냈다.
「차라리 화를 내세요!」
「화 안났다니깐요.」
실은 났다. - 하지만 왠지 인정하기가 싫어졌다.
국무대신이 얼굴을 찌푸리고 나를 쳐다보다 다시 물었다.
「정말로, 각오가 되어있다-이 말씀이세요?」
「네.」
아뇨.
「정말이시죠?」
의심스러워하는 말투에 나는 옹골찬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이죠!」
내가 도대체 이 뒷감당을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진짜 모르겠다……

[그웬돌린] 구원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