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가 어디신데요? 근처세요?]
다짜고짜 오겠다는 말에 수영이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저기요.]
하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저기요?]
읽고, 씹었다.
“뭐야…….”
사기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읽기만 하고 대답이 없어?
수영의 눈이 가늘어지고 아랫입술은 삐죽 나왔다. 남자의 뜻대로만 흘러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으나 당장은 대안이 없었다.
“뭐, 나가 보면 알겠지.”
다른 으슥한 곳도 아니고 호텔 로비로 오라는데 무슨 일이 있겠는가.
여차하면 자기 짐도 못 찾을 판에 해코지를 하는 바보는 아니겠지 싶었다.
수영은 그저 자신의 짐을 찾았다는 사실이 기뻐 히죽거리며 널브러진 캐리어를 포갰다.* * *
기다리고 기다리던 30분이 지났다.
10분 일찍 로비로 나와 기다리던 수영은 30분이 지났음을 확인하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있지?’
앞, 뒤, 양옆 어디를 보아도 아까 보았던 인물과 비슷한 체격의 남자는 보이질 않았다.
“30분은 아까 지났는데.”
다시 한 번 연락해 봐?
“안 오는 거 아니…….”
“최수영 씨?”
미심쩍은 눈빛으로 로비를 훑고 있노라니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영은 곧바로 뒤를 돌았다.
“네. 제가…….”
어쨌든 물건을 돌려주려는 사람이니 나름대로 영업용 미소와 함께 남자를 반기려 했다.
“맞네. 최수영.”
뒤를 돌아 제가 들고 있는 캐리어의 주인이라는 남자를 보기 전까지는.
“너…….”
반듯한 이마에 짙은 눈썹.
매서운 눈매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반쯤 접어 휜, 매력적으로 지은 눈웃음.
마치 빚어낸 것같이 오뚝 솟은 콧대.
매끄럽게 날 선 턱과 시원스레 올라간 입꼬리.
하나씩 차근히 뜯어보면 차갑기 그지없는 이목구비가 오롯이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수영은 당황하여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끝을 흐렸다.
얼핏 수영도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에 태진이 흡족하게 입매를 휘었다.
“오랜만이다?”
“진태진…….”
수영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네가 왜…….”
그러나 그 말조차도 다 못 하고 벙긋거렸다.
‘얘가 왜 여기서 나타나? 대체 왜? 어째서?’
수영의 갈 곳 잃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10년. 10년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처음 만나 3년 남짓을 같이 지낸 이후 10년.
10년이 지나도 태진은 여전했다.
“뭐야.”
그런 그녀의 행동에 태진이 픽, 실소를 터트렸다.
“내가 안 반가운가 봐?”
표정이 영 안 좋네, 하는 말에 퍽 서운함이 담겼다.
“아니…….”
당연히 안 반갑지.
“그냥 좀……. 놀라서.”
수영은 그와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태진이 끌고 온 같은 모양의 캐리어를 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공항에서 봤던 그 남자가 얘였어?
“캐리어 줘.”
수영은 짐만 찾고 빨리 자리를 뜰 심산으로 제가 끌고 온 캐리어를 태진 앞에 두고 반대편 손을 내밀었다.
“에이.”
한데 태진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는지 오히려 앞에 두었던 캐리어를 살짝 뒤로 빼었다.
그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지.”
“…….”
“안 그래?”
두근.
정말, 누가 보면 유혹이라도 하는 줄 알 만큼 매력적이었다.
문제는 저 미소에 심장은 두근거릴지언정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곱지 못한 반응뿐이라는 거였지만.
“미안한데.”
수영은 단호히 그가 쥐고 있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내가 여기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거든?”
이건 진담.
“나도 정말 네가 반갑기는 한데, 우리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이건 거짓이었다.
그녀는 피곤하고 태진이 반갑지 않았다.
오죽하면 졸업 후 유학 간다는 소리에 서운함보다 후련함이 앞섰을까.
학창 시절, 유독 저에게만 장난이 심했던 그는 수영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대상 1호였다.
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려 했다.
“그만 가 볼게.”
수영이 힘주어 캐리어를 잡아끌었다.
“…….”
캐리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더 주어 당겼다.
그래도 캐리어는 바닥에 박히기라도 한 양 미동도 없었다.
‘이게 왜 안 끌어져?’
일부러 힘을 주고 있는가 싶어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헤헤 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태진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얘 지금 힘주고 있는 거야?’
“지금 힘주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단 표정이네.”
“…….”
마치 속을 다 읽기라도 한 것처럼.
수영의 찌푸림을 캐치해 낸 듯 태진이 입을 열었다.
“맞아. 힘주고 있는 거.”
휙!
그와 동시에 그녀를 골탕 먹이기라도 하려는 건지 순간의 힘으로 캐리어를 잡아당겼다.
지금까지 주었던 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했다.
“어……!”
당연하게도 수영은 그에게 이끌려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대로 태진의 품 안에 골인했다.
때마침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것처럼 느껴진 건 아마도 기분 탓일 것이다.
수영은 의도치 않게 그에게 안긴 상황에 숨을 들이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1초, 2초, 3초.
짧은 시간이지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고가 정지했다.
“괜찮냐?”
수영이 좀처럼 미동도 없자 입을 연 태진의 물음에 수영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태연함 가득한 얼굴로 묻는 게 묘하게 얄미웠다.
“비, 비켜!”
수영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민망함에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단단하여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그의 몸은 우려와 달리 너무도 손쉽게 그녀가 빠져나가는 걸 허락했다.
“흠흠.”
수영은 곧 목을 가다듬어 언제 그랬냐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장난치지 말고 그거 빨리 줘.”
“싫어.”
그는 당당했다.
“이거 네 거 아닌데.”
그리고 아주 소름이 돋을 만큼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뭐?”
수영이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묻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슬그머니 주었던 힘을 풀어 수영에게 전시하듯 보여 주며 말했다.
“봐. 네 네임 태그가 없잖아.”
그의 말은 정확했다.
수영이 알고 있는, 사진으로 본 캐리어와 같지만 달랐다.
분명 같은 형태의 캐리어는 맞는데 사진에는 멀쩡히 있던 네임 태그가 없었다.
“너 또 제대로 안 보고 그냥 가져가려고 했지?”
“…….”
웃음을 참는 듯한 태진의 목소리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끝났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하고 끝에 덧붙이는 말에는 이성이 끊어질 정도로 약이 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수영이 “씨이…….” 하고 중얼거리며 캐리어를 내팽개치듯 놓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장난치지 말고 내 거 줘.”
“싫은데.”
“싫…… 뭐?”
싫은데? 싫은데에?
‘이게 미쳤나!’
10년 만이라느니 어쩐다느니 하면서 10년 만에 만난 사람한테 이딴 장난을 쳐?
수영이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빨리 안 내놔? 준다고 먼저 연락할 땐 언제고. 내가 안 받으면 너도 못 받는 거 몰라?”
“줄 거야. 줄 건데.”
“줄 건데, 뭐.”
줄 거면 그냥 주면 되지,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데?
욕을 한 바가지나 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대신 그의 말에 빈틈이 없도록 계속 따져 묻자 태진이 뒤늦게 대답했다.
“말했잖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다고.”
어깨를 으쓱이는 폼이 수영과는 다르게 캐리어쯤은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나랑 오늘 같이 밥 먹으면 돌려줄게.”
“뭐?”
하, 참 나. 수영이 기가 찬다는 웃음을 토했다.
“내가 왜 너랑…….”
“캐리어, 가져가려고 왔다며?”
“…….”
“내 숙소에 있는데. 혹시 아냐? 나랑 밥 먹으면 내가 또 마음 약해져서 바로 너한테 갖다 줄지.”
절대 태진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지가 언제인데, 왜 시간이 흘러도 이 자식이랑 얽히면 이렇게 되는 걸까.
수영에게 있어 태진은 거부할 수 없는 너무나도 강력한 한 방이 있는 사람이었다.
캐리어.
‘젠장…….’
그놈의 캐리어.
“후우…….”
이렇다 할 방법도 없고, 떠오르지도 않는다. 무슨 수를 써도 진태진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고.
수영은 방도가 없는 상황에 애써 짜증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가. 가면 되잖아.”
“아주 좋은 생각이야.”
“대신.”
물론,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에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 밥 먹으면 캐리어는 돌려줘.”
또다시 이런 장난은 사양이었다.
수영은 나름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그게 먹혔는지 태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돌려줄 거니까.”
“…….”
“가자. 배 안 고프냐?”
그러곤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수영은 끝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서, 10년 만에 쟤를 만나다니. 그것도 이런 외국에서, 휴가 때.
‘다시는 안 만날 줄 알았는데.’
안 만나기를 바랐는데. 어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지.
수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더니 이내 결심에 찬 표정으로 콧바람을 흥, 불었다.
“그래. 밥만 먹으면 돌려준다잖아. 믿어 보자고.”
그래도 두 번이나 말했을 때 안 지킨 적은 없었던 것 같으니까.
‘그때도 안 주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 버리지, 뭐.’
어떻게든 될 것이다.
수영의 발걸음이 느릿하게 그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