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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침을 몇 번이고 삼킨 후에야 슬그머니 입술을 뗐다.
“그래도 본부장님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에요.”
“…….”
“그냥 저 모른 척해 주세요.”
“못 해요. 그렇게.”
“본부장님.”
“그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요?”
태진은 단호히 대꾸하다 끝내 허탈하게 웃었다.
“안 보고 싶어도 눈이 저절로 간다고요. 나도 모르게.”
마치 자신도 노력은 해 보았다는 듯한, 그는 그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우리 그냥 모르는 척 말고, 대놓고 아는 척하면 안 돼요? 어차피 내가 최 팀장 좋아하는 거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직원들도 그렇고……. 최 팀장도.”
“뭐라고요?”
“아니에요?”
어쩜, 태진은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눈웃음을 치면서 이런 말을 잘도 내뱉었다.
아주 사람을 자기 손에 쥐고 흔들고 싶어서 작정을 했나 보다.
“허…….”
청산유수처럼 쏟아 내는 말에 수영이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벙긋거렸다.
목소리가 나올 듯 말 듯 애매하게 쇳소리가 나다가 목에 힘을 주고 나서야 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씀드렸잖아요. 직원들 앞에서 본부장님이랑 자꾸 엮이는 거 싫다고.”
“그럼 뒤에서는 가능하단 소린가?”
“제가 실언했네요. 앞에서도, 뒤에서도 아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진짜 까다로워졌네.”
예전엔 안 그랬는데, 하고 지나가듯 하는 말이 귀에 콕 박혔다.
그에 수영이 한쪽 입꼬리를 실룩였다.
“10년이 넘었는데 저도 까다로워질 때 됐죠.”
“최 팀장 계속 이렇게 나 피해 다닐 자신 있어요?”
“요 며칠 내내 잘만 피해 다닌걸요.”
“이젠 대놓고 인정하네요.”
“…….”
이런. 이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오가는 대화 속에 그만 진심을 내비친 수영은 민망함에 부러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알았어요. 그럼.”
이후 다시 말을 하려던 찰나, 태진이 수영의 말을 낚아챘다.
“최 팀장이 그렇다는데 어쩔 수 없죠.”
그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와중에 매력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최 팀장 의견을 존중해 줄게요. 내 나름대로 다른 방법을 찾아보죠.”
“무슨…….”
“대신, 나는 정말 ‘내 나름대로’ 할 거니까 최 팀장도 딴말 안 하기.”
“…….”
“그렇다고 해서 최 팀장 일에 지장이 생기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너무 매력적이어서 홀릴 만큼.
그가 한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몰라 혼란이 생겨 물어볼 정신도 없도록.
그렇게 어영부영 둘의 사소한 언쟁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 * *

아침부터 수영은 물론, 3팀 모두가 제자리에 없었다.
일찍이 뮤즈넷에서 온 이와 회의가 잡힌 탓이었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회의가 끝나려는지 회의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윽고 3팀 직원들이 우르르 인사하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수영 역시 모처럼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었다.
“네. 팀장님도요.”
하나 그에 대답하는 건 3팀의 어떤 이도 아니었다.
직원들 뒤를 이어 회의실에서 나온 그녀를 웃으면서 따라 나오는 남자.
부드러운 인상에 이렇다 할 특별한 매력은 없지만 묘하게 시선을 끄는 외모였다.
그의 표정과 언행 또한 그랬다.
이선우.
한없이 친절할 것만 같은 이 남자는 목소리마저 부드러웠다.
“아, 이선우 과장님.”
이제 막 회의실 문을 닫고 나오는 때, 수영이 앞서간 선우를 급히 따라왔다.
“여기, 펜이요. 하마터면 제가 가질 뻔했네요.”
“아……. 하하하.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펜이 정말 좋더라고요. 부드럽고.”
“그렇죠? 원하시면 가지셔도 돼요.”
“어? 정말요?”
뜻밖의 횡재에 수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네. 아, 혹시.”
누가 보아도 신이 난 얼굴이 웃긴지 키득거리던 선우는 이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점심은 어떻게 하세요? 이제 여기도 곧 점심시간 같은데,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라도…….”
“아, 죄송해요. 오늘은 점심시간에 어딜 좀 다녀와야 해서요.”
“그렇군요. 아쉽네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거절이 되돌아와 선우가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아쉬움 가득한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던 그는 곧 다시금 환하게 웃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한번 식사 같이 해요.”
“네. 안녕히 가세요.”
“가 보겠습니다.”
마지막까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던 선우는 회의가 끝난 지 10여 분이 넘고 나서야 모습을 감추었다.
둘의 대화는 평화로웠고, 길었다.
누가 보면 묘한 기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품을 만큼 사이가 꽤 가까워 보였다.
그럼에도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 정도는 아니었는지 제각기 할 일에만 몰두하기 바빴다.
“…….”
단 1명. 태진을 제외하고는.
처음엔 눈길도 주지 않던 그이지만 점점 길어지는 대화에 신경이 쓰였다.
하여 좀 듣다 보니 이따금 수영의 웃음소리까지 들려왔다.
업무적인 내용과 회의야 그럴 수 있다. 당연한 거고 회사와 제 커리어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기특하기만 한데.
그런데.
회의실에서 한세월, 나오는 데 한세월, 나와서도 한세월이다.
‘대체 둘이서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 건데?’
누가 볼까, 컴퓨터에 고정한 시선은 움직이지 않은 채 미세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고작 펜 갖고 몇 마디를 나누는 건지.
‘그냥 주고, 받고. 그러면 되는 일 아니냐고.’
못마땅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금 나간 그 남자가.
이선우였던가. 제겐 한 번도 웃어 주지 않은 수영이 웃음을 지어 준 남자가.
겨우 펜 1자루에 하이 톤 목소리를 내며 점심 약속까지 하는 남자가!
‘후우…….’
답답함에 한숨을 쉬고 싶어도 뻥 뚫린 사무실에서 티 내고 싶진 않아 속으로 삼켰다.
한데 그러면 그럴수록 태진의 이목구비는 점점 일그러졌고, 속에선 약간의 짜증이 솟구쳤다.
‘최수영…….’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드륵!
결국 태진은 결심에 찬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밀리면서 소리가 났지만 어느 누구도 쳐다보는 이가 없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여기저기서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린 덕이었다.
“정말 안 가?”
저 멀리 3팀 쪽에서 주희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네.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뒤이어 수영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래. 알았어. 밥 맛있게 먹어, 최 팀장.”
“네.”
항상 같이 밥을 먹던 주희와 성 대리가 사라지고 난 후.
그녀와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태진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점심.”
“아, 깜짝이야.”
“같이 먹죠.”
수영이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이는데도 그의 표정은 변할 줄을 몰랐다.
오직 그녀와 식사하면서 할 말이 아주 많다는 듯 태진은 올곧은 시선을 유지한 채 말했다.
“오늘 같이 먹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
그러자 수영이 가슴을 쓸어내리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얘가 왜 이래, 하는 눈빛으로 쏘아보았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태진이 적잖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대답 않고 그를 지나쳐 걸어가면서였다.
“회의는 잘했어요? 꽤 오래 하던데.”
“네. 뭐…….”
“뮤즈넷이라고 했던가요? 이번에 같이 하는 업체가.”
“네. 왜요?”
“그냥요. 이름이…… 이선우 과장이랬나?”
이렇다 할 용건 없이 자꾸만 선우의 존재를 묻는 듯했다.
그게 너무도 빤히 보이는 탓에 수영이 그와 멀어지려 대꾸 없이 걸음을 빨리했다.
무시하려는 속셈이었다.
“친해 보이는데. 많이 친해요?”
그런데도 태진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수영에게 연신 질문을 쏟아 냈다.
“펜은 왜 줬어요? 펜이 필요하면 말하지 그랬어요. 비품 좀 넉넉하게 채워 놨을 텐데.”
그러다가도 자기가 꺼낸 물음들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는지 시치미 떼는 말을 곁들였다.
“아니 뭐……. 협력사니까 업무 쪽으로 얘기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사적인 대화를 할 정도로 친해졌나 싶어서요.”
“……그 정도의 사적인 대화는 직원들이랑도 종종 하는데요.”
펜이 좋다는 대화 정도는 얼마든지.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새로 출시한 볼펜이거든요. 회의 동안 한번 써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게다가 자기네들 계열사에서 나온 신제품이라며 권했으니 후기 정도는 들려주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수영은 기브 앤 테이크를 실천했을 뿐이었다.
그랬을 뿐인 그녀에게 온갖 물음을 던졌으니, 수영은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정도는 본부장님도 하시잖아요?”
“난 그래도, 막 사적인 친밀감을 표시하면서 점심 먹자는 소리는 안 했어요.”
그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태진이 즉답했다. 그는 억울하다는 뉘앙스였다.
“나는 그게 다 비즈니스였다고요. 게다가 여자한테는 눈길도 안 줬고.”
“아. 그러세요?”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수영은 심드렁하게 대답해 주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을 하셨네요.”
“그렇죠. 내가 또 한 여자만 보는 타입이라. 그 여자가 내 마음을 아직 몰라줘서 그렇지.”
“아. 네에.”
“아무튼.”
태진은 나름대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지만 조금의 가망도 없어 보이는 대답에 이내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밀당하는 사이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