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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이잉.
얼마쯤 더 갔을까. 손에 쥐고 있던 수영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언니네?”
수영은 별다른 생각 없이 통화 버튼을 눌러 귓가에 가져다 댔다.
“어, 언니.”
- 너 어디야?
“나 이제 퇴근했지. 밥 먹고 들어가려고.”
- 아…… 그래?
수영은 수진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언니의 반응이 영 평소와 다름을 깨달아 곧장 되물었다.
“왜?”
- 태진이랑 같이 먹고 와?
“어. 왜, 무슨 일인데?”
전화해 봤자 올 때 뭐 먹을 거나 좀 사다 달라는 말이나 할 줄 알았건만.
왜인지 눈치를 보는 듯한 어조였다.
수영이 거듭 묻자 수진이 “어…….” 하고 말끝을 흐리며 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 아니, 집에 엄마랑 아빠 왔는데…….
“지금?”
- 어. 근데……. 야, 너 태진이네 집안이 강성그룹인 거 얘기 안 했어?
“어? 어. 안 했지. 그게 왜?”
왜 수진이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양 군단 말인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자 수진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 아니……. 엄마가 네 방 들어갔다가 그 쇼핑백들 봤거든. 난 당연히 네가 얘기한 줄 알고 말했는데, 지금 둘 다 놀라서 난리도 아니야.
“뭐?”
- 너 왜 말 안 했어? 나 말 잘못한 거야? 아니지?
“아니지, 당연히.”
- 그래……?
수영의 단호함에 그녀는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았는지 안도의 한숨이 연달아 이어졌다.
수진이 재차 입을 열었다.
- 아무튼, 웬만하면 일찍 들어와. 부모님 오셨으니까.
“알았어.”
수영의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수영은 꺼진 휴대폰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그래?”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수영의 입에서 나온 말로만 상황을 파악해야 했던 태진은 궁금증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영이 그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멋쩍게 답해 주었다.
“엄마랑 아빠 집에 왔대.”
“지금?”
“응. 근데 회장님이 주신 선물 봤나 봐. 언니가 엄마랑 아빠한테 네 집안 얘기를 했대. 그래서 좀 놀라신 것 같아.”
“말씀 안 드렸어?”
“안 했지. 뭐 하러 해.”
저조차도 안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말할 타이밍도 없었을뿐더러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꼈다.
태진은 어떨지 몰라도 수영은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나 어쩌다 사귀게 되어 여기까지 왔다. 그 틈에 부모님께 태진의 집안 사정을 말할 정신은 없었다.
말한다고 달라질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수영은 그랬다.
그런데 그게 부모의 입장에선 꽤나 충격이었던 듯싶었다.
‘하긴…….’
저 같아도 제 자식이 내로라하는 대기업 자제와 사귄다 하면 놀랄 것 같기는 하다.
수영은 후에 집에 들어가면 벌어질 일을 떠올리며 눈을 또르르 굴렸다.
“미리 말씀드리지 그랬어. 많이 놀라셨겠네.”
태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따 같이 가자.”
“왜?”
“직접 가서 다시 말씀드리게. 지금은 누나한테만 전해 들은 걸 거 아냐.”
“…….”
그러곤 이어서 살포시 눈웃음을 치는 얼굴이 환했다.
수영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다 뒤늦게 돌아온 정신에 몸을 들썩였다.
“그러든가…….”

* * *

현관문 앞에 다다랐다.
삑, 삑, 도어 록 번호를 하나하나 누르는 손짓이 느릿했다.
이게 뭐라고, 여태껏 괜찮던 심장이 긴장감에 두근거렸다.
마지막 버튼까지 누른 후, 수영이 태진을 한 번 쳐다본 뒤 문고리를 잡아 비틀었다.
“나 왔어.”
“최수영! 너…….”
그와 동시에 수영의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다급하게 현관 앞까지 걸어왔다.
그녀가 집에 올 때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다짜고짜 이름부터 불렀다.
그러다 집 안으로 들어온 게 수영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곤 말을 멈추었다.
태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작은 꽃다발과 함께 쇼핑백을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도 왔어요.”
“어어……. 그래. 왔니? 아휴, 이게 다 뭐래.”
“어머니랑 아버지 계신다길래 뵙고 싶어서 왔죠. 오는 길에 생각나서 사 봤어요. 저번 명절에 너무 잘해 주셔 가지고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수영의 어미는 태진의 말에 어쩔 줄을 몰라 시선을 회피했다.
“고, 고맙다. 들어와.”
“감사합니다.”
수영은 단 한 번도 제 어미의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 없는 탓에 새삼 그녀가 낯설었다.
하여간 대단한 놈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곤 제 어미 뒤에서 알짱거리는 수진과 눈을 마주쳤다.
수진 역시 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는 듯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큼!”
그때, 수영의 아비가 헛기침 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동시에 모두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아갔고, 그제야 수영의 어미는 호다닥 그의 옆에 앉았다.
수영의 아비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너희 둘 다 이리 와 앉아 봐라.”
“…….”
“네.”
잔뜩 무게를 잡은 그는 태진과 수영이 앞에 앉자 말은커녕 되레 입을 꾹 다물었다.
한동안 이어지는 침묵에 서로가 눈치만 보던 찰나. 태진이 먼저 운을 뗐다.
“두 분이 많이 놀라셨다고 들었어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 뭐……. 꼭 말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에 수영의 어미가 멋쩍은 듯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렇지만 좀 놀라긴 했어. 수영이가 어쩜 한마디도 안 해서…….”
“저는 오히려 그게 더 좋았는걸요. 어머니가 저를 저 자체로도 마음에 들어 해 주셨잖아요.”
“크흠…….”
“그야 태진이 네가 어릴 때부터 워낙 수영이뿐만 아니라 어른들한테도 잘하니까.”
눈꺼풀이 눈을 반쯤 덮은 채로 눈매가 휘어졌다.
입꼬리는 시원스레 올라갔고, 나긋하게 속삭이듯 하는 음성은 적당히 차분했다.
‘미인계.’
수영은 태진을 힐끔 보며 속으로나마 중얼거렸다.
저게 바로 미인계지 별게 아니다. 자기 자신의 얼굴이 그녀의 부모에게 먹힐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쓰는 수법.
그리고 결과는 당연하게도 아주 좋았다. 수영의 부모는 저마다 다른 제스처로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까요.”
태진의 말이 이어졌다.
“저 잘 아시잖아요. 제가 어떤 집안이든 두 분께 실망 안 시켜 드릴 자신 있습니다.”
“…….”
“저 믿어 주세요.”
“우리야 태진이 네가 싫을 리 있겠니. 그렇지만 너무 차이가 나니까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희 둘만 좋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아, 우리 딸이 어때서!”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수영의 아비가 대뜸 버럭, 소리쳤다.
“어디에 내놔도 부족한 거 하나 없는 애야!”
“어휴, 나도 알아요. 아는데! 그냥 걱정하는 거지. 그렇게 오냐오냐하는 당신 딸이 혹시나 상처받을까 봐!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니 나는…….”
하나 그 성질은 얼마 안 가 그의 아내에 의해 사그라들었다. 몸까지 축 늘인 게 어쩐지 혼이 나 풀 죽은 모양새였다.
그럼에도 수영의 어미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갔다.
“태진이 너희 집안 어르신들은 우리 수영이 아시니?”
“네, 그럼요.”
다시금 원래의 페이스로 돌아온 듯한 그녀의 질문에 태진이 화답했다.
“아버지가 수영이 엄청 마음에 들어 하세요. 수영이가 저랑 안 사귈까 봐 선물도 주셨는걸요.”
“그, 그럼 네 방에 있는 게…….”
“회장님이 사 주셨어.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자꾸 가져가라고 하셔서.”
“…….”
꿈벅꿈벅. 수영이 말을 잇자 저들을 바라보는 두 명의 눈이 연신 끔벅였다.
자신들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눈에 비쳤다.
“그래……. 그랬구나. 다행이네.”
“진짜 다행 맞아?”
그러면서 왜 혼은 쏙 빠져 있는지. 수영이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으나 그녀의 부모는 대꾸가 없었다.
그 틈을 타 태진이 생글거리며 웃어 보였다.
“저 그럼, 허락해 주시는 거죠?”
“어? 어, 그럼……. 둘이 좋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겠니.”
“감사합니다.”
엉겁결에 한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거짓이 들어간 것은 아니었으니, 수영의 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이제 차츰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언제 주눅 들어 있었냐는 듯 수영의 아비가 급히 무게를 잡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교제까지만이야. 아직 결혼은 안 돼.”
“…….”
“연애랑 결혼은 달라. 자고로 결혼은 아빠 같은…….”
“어머, 이거 술이네?”
“…….”
“애 아빠 먹으라고 사 온 거구나? 어쩜, 센스도 좋아.”
물론 그게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뒤에 이어지는 그의 말이 그다지 영양가 있는 내용은 아니라는 듯, 수영의 어미는 듣다 말고 고개를 돌려 태진이 준 쇼핑백을 들추었다.
그에 그가 조금은 서운하다는 낯으로 제 아내를 쳐다보았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얘기인 줄 알아?”
“아이구, 얘들이 애도 아닌데 알아서 하겠지. 이거 봐 봐. 태진이가 당신 좋아하는 술 사 왔다니까? 마실 거지?”
“마시긴 할 건데…….”
“기다려. 안줏거리 좀 해 올게. 수영이 너 엄마 좀 거들어.”
“응? 응. 알았어.”
하필 수영까지 데리고 쌩하니 주방으로 사라졌다.
덕분에 둘만 남은 자리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태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적잖이 상처받은 얼굴을 한 그녀의 아비를 보며 멋쩍게 웃는 게 전부였다.

밀당하는 사이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