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생일이었지.’
태진은 재차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옷가지를 전부 벗고 화장실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비틀자 물줄기가 쏟아졌다.
새삼 그는 그때가 떠올랐다.
〈여기서 뭐 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찬 비가 내리던.
〈너 괜찮아?〉
초면인 제게 수영이 말을 걸던 그날이.
〈이거 너 가져.〉
빗속에서 우산을 건네며 웃던 모습이 기억 속에서 잊히질 않았다.
비록 그게 잠깐의 호기심과 오지랖으로 똘똘 뭉친 행동일지언정 그에겐 더없이 진심 어린 ‘무언가’였다.
지금도 말로 표현하라고 하면 쉽게 꺼내지 못할, 그 무언가.
끼릭.
태진이 수도꼭지를 다시 비틀어 잠갔다.
화장실을 나온 그는 옷을 한 꺼풀씩 입기 시작했다.
〈어? 어어?〉
그러다 떠오른 건 고등학교 1학년, 수영과 다시 마주했을 때였다.
예상과 달리 단번에 알아봐 신기하기도, 기쁘기도 했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안녕?〉
그때도 수영은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었다.
‘그게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긴 했지만.’
태진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시간은 벌써 10시. 수영이 슬슬 잠에서 깰 시간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켜 통화 목록 가장 위를 꾹 눌렀다.
신호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으응.
잠에서 덜 깬 수영의 목소리였다. 태진은 보고 있지 않음에도 그녀가 보이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일어났어?”
그의 음성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녹일 것처럼 부드러웠다.
- 아니…….
하나 잠에 취한 수영을 이기지는 못하겠는지 되레 자신이 녹을 것처럼 그의 입꼬리가 저항 없이 올라갔다.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어. 데리러 갈게.”
- 으응…….
삐릭. 이마저도 잠결이겠지만 조금은 매정하게 통화를 끝내 버리는 게 아쉬웠다.
조금 더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그는 마지막으로 재킷을 집어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출발하여 밖으로 나오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참 수영의 집으로 달리던 차는 모처럼의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미처 치우지 못한 화이트데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사탕…….’
저놈의 사탕. 태진이 실소를 터트렸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라며 비싸지도 않은 사탕을 건네던 수영이 기억에 남아 눈앞에 아른거렸다.
특별히 주는 거라면서.
사탕 같은 인위적인 단맛은 질색하던 태진은 그때 자신의 입맛을 바꾸었다.
그래야 또 줄까 봐.
그러면 한 번이라도 더 수영을 정면으로 볼 수 있으니까.
그것도 그녀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물론 지금도 인위적인 맛은 싫어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건넨 건 괜찮았다.
‘중증이라니까.’
태진은 스스로를 향해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었다.
다시 차가 움직였다.
수영의 집은 그의 집에서 거리가 조금 있었다. 그럼에도 그다지 멀지 않게 느껴지는 건 그녀를 만나러 가기 때문이라는 게 그가 남몰래 하는 생각이었다.
얼마쯤 갔을까.
분홍색과 흰색의 벚꽃으로 물든 가로수가 눈에 들어왔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꽃잎이 휘날렸고, 그게 또 장관이라 걸어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어 댔다.
“꽃이라…….”
그러고 보니 수영에게 꽃을 줘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지금 한창 예쁘고 어울릴 때 아닌가. 그의 생각은 그랬다.
‘꽃을 사 갈까.’
태진은 즉시 꽃 가게를 본 적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다닥다닥 줄지어 붙어 있는 가게 중 꽃집을 발견한 그는 지체 없이 차에서 내려 가게 앞에 섰다.
“어서 오세요.”
주인의 인사에 태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누구 주려고?”
“여자 친구요.”
“기념일이에요?”
“아뇨. 생일이에요.”
매 순간순간이 기념일 같기는 하지만.
태진은 하고 싶은 말을 꾹 눌러 담았다.
“여자 친구가 좋아하겠네. 잠깐만 기다려요. 예쁘게 해 줄게.”
가게 주인은 실없는 소리와 함께 가게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기다리는 동안의 햇볕은 따사로웠고, 하늘은 굉장히 맑았다.
왠지 오늘은 수영이 날씨가 좋다며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보고 싶다.’
태진은 연신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게 주인이 나와 꽃다발을 건네었다.
“예쁘게 사랑하세요.”
꽃다발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수영에게 어울릴 만큼이었다.
주인의 인사에 그 역시 화답하며 돈을 쥐여 준 뒤 다시 차에 올라탔다.
이제는 수영에게 가는 길에 꽃 내음이 함께했다.
“향 좋네.”
진즉 한 번이라도 더 줄걸. 태진은 아쉬운지 입맛 다시는 시늉을 하며 힐끔 조수석에 놓은 꽃다발을 쳐다보았다.
또다시 수영이 떠올랐다.
〈너 내가 왜 좋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때 진짜 고민 많이 했는데…….”
당시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신경 쓰였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내놓은 대답은 결국 생각한 대로 뱉은 말이었다.
아마 수영은 절대로 모를 거라며, 그는 또 한 번 실소를 터트렸다.
끼익!
어느샌가 차는 수영의 집 앞에 도착했다.
휴대폰을 보니 시간은 이제 막 11시를 넘긴 찰나였다.
태진은 차에서 나와 그녀의 번호를 눌렀다.
- 어디야?
수영이 전화를 받기 무섭게 물었다.
“집 앞.”
- 나갈게.
통화는 짧게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 후. 엘리베이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태진이 그녀가 나올 아파트 공동 현관 앞에 섰다.
그의 예상대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급하게 뛰어오는 이는 수영이었다.
“왔어?”
대각선으로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과 잔잔하게 부는 바람이 그의 뒤에 만개한 벚꽃 나무를 간질였다.
휘날린 꽃잎은 배경이 되었고, 그 앞에 태진이 꽃다발을 든 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게 오늘을 설레어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영이 몽글해진 기분에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멋쩍게 웃었다.
“웬 꽃이야?”
태진은 꽃다발을 수영에게 내밀었다.
“첫 번째 선물.”
“응?”
그가 주니 얼떨결에 받기는 했으나 의아함을 감추지는 못하였다.
수영의 되물음에 그가 말을 이어 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챙겨 주는 생일인데 하나로 끝낼 수는 없잖아.”
“아아…….”
그의 말투엔 여태껏 챙겨 주지 못한 생일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응?”
그런 그의 말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들으며 고개까지 끄덕이던 수영은 뒤늦게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숙였던 고개를 쳐들었다.
“근데, 내가 너한테 생일이 언제라고 얘기를 했던가?”
그녀의 기억으로는 사귄 이후 생일을 언급해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수영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에 태진이 담담히 대꾸했다.
“네 캐리어 비밀번호. 나랑 똑같잖아.”
“……아!”
그제야 수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응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잔뜩 흥분한 듯했다.
“내가 그때 캐리어 열어 보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당연히 잘 열려서 내 건 줄 알았는데, 내 옷은 없고 웬 남자 속옷이…… 헙.”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입이 한참을 움직이다가, 순식간에 딱 붙어 버렸다.
자신이 한 말이 여기서 꺼낼 말은 아니다 싶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듣고 있던 태진은 입꼬리를 실룩였다.
“왜. 더 말해도 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이거 너무 불공평한데.”
“뭐가?”
“만나기도 전부터 너무 많은 걸 보여 줬잖아. 난 네 캐리어 열어 보지도 않았었거든. 열기 전에 네임 태그를 발견해서.”
“그건……!”
어떻게든 시치미를 떼 보려던 수영을 태진은 바리케이드를 치듯 차단해 버렸고, 수영은 억울한 표정을 낯에 그려 넣었다.
“아, 그게 남의 것일 줄 알았나!”
“누가 뭐래.”
그 표정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음에 그가 환히 웃으며 소곤거리듯 말했다.
“너 혼자 당황하는 게 귀여워서 놀려 봤어.”
“씨이…….”
“아무렴 어때. 어쨌든 그 덕에 내가 널 다시 만난 거잖아.”
물론 이런 해프닝이 아니었어도 태진은 수영을 찾아낼 셈이었지만.
굳이 이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싶어, 그는 눈웃음을 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순간 울컥하려다가 잠자코 듣는 수영의 다문 입술이 살짝 짓이겨졌다. 실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 탓이었다.
“그건 그렇네.”
수영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살포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꽃 고마워. 정말 예쁘다.”
“…….”
태진은 수영의 말에 조용히 동의했다.
정말 숨 막히게 그녀가 예뻤다. 그러나 말을 얹기엔 마음이 급했다.
태진은 당장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이내 입술을 포개었다.
짧게나마 입을 맞춘 그는 다시금 멀어졌다.
뺨에 붉게 핀 열꽃이 바람에 사그라질 때쯤 태진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수영아.”
“…….”
“사랑해.”
그의 목소리가 귓속에 스며들어 가슴을 간질였다.
빠르게 뛰는 심장에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고, 수영은 불가항력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응. 나도.”〈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