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지 말고 아예 본사 1층에 지점을 하나 둘까? 24시간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살짝 비틀린 눈썹.
꿈틀거림을 간신히 자제하는 눈꺼풀.
주름 잡힌 이마.
심호흡하듯 깊게 내쉰 숨에서부터 느껴지는 상황에 대한 거슬림.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어느 한구석도 마음에 들지 않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어때. 그럼 이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먹을 이유가 없어지나?”
태진은 고작 이깟 샌드위치 때문에 여길 또 오겠다는 수영의 말이 싫었다.
왠지 선우를 보러 이 가게에 다시 오겠다고 하는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제 귀로 똑똑히 들어 놓고도 그는 이미 질투에 눈이 멀어 있었다.
“미…… 친.”
미친놈.
그가 나타나자마자 줄줄 읊은 말들에 수영이 떠올린 단어였다.
이게 뭐라고 눈을 부릅뜨고 저를 노려보는지. 아주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올 기세였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곤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양 턱에도 주름을 잡았다.
“뭐라는…….”
“152번 고객님. 주문하신 음료와 샌드위치 나왔습니다.”
그때, 분위기를 순식간에 깨트리는 직원의 부름이 귓전을 때렸다.
수영은 눈으로 ‘입도 벙긋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한 후 사라졌다.
“……풉.”
그와 동시에 선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아 참고 있다가 겨우 쏟아 낸 웃음이었다.
“아……. 흠흠. 죄송해요.”
그는 뒤늦게나마 진정한 뒤 태진을 마주했다.
“본부장님께서 직원을 되게 많이 아끼시나 봐요.”
“다른 사람보다도 최수영 팀장을 아낍니다. 우리 부서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라.”
“아, 그러시구나. 최 팀장님 좋으시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부장님이 각별히 챙겨 주시는 거니까요.”
“당연하죠. 아마 좋은데 표현을 못 하는 걸 겁니다. 원래 최 팀장이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거든요.”
절대 이 싸움에서 지지 않으리라.
같은 말이라도 누가 듣느냐에 따라 다른 법이니, 그는 선우의 말을 시비로 받아들였다.
상대방이 웃으면 같이 웃고, 짧게 물으면 짧게, 길게 물으면 길게 대답해 주었다.
덕분에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네. 그러신 것 같더라고요.”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제 마지막 말에 수긍하는 선우의 대답에 태진은 입이 다물어졌다.
‘그런 것 같다고?’
수영이 평소엔 부끄러움이 단 1%도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게 태진인데.
그걸 벌써 안다고?
‘어디까지 간 거지?’
태진의 눈이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 속도 모르고 생글거리는 낯을 보니 더더욱.
“대…….”
“이 과장님. 여기요.”
아, 타이밍도 좋지. 입을 열 때에 맞추어 잘도 수영이 나타났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 커피 하나를 선우에게 건네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더불어 친절하게 웃어 주기까지 했다.
“뭘요. 최 팀장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커피는 잘 마시겠습니다.”
선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는 태진에게도 환한 얼굴로 인사한 뒤 가게를 빠져나갔다.
둘만 남은 상황.
수영이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뗐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찾아 들어왔대?”
꽤 크게 이야기했으니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못 들은 척 말을 잇지 않는 그에게 수영이 가까이 다가가 재차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냐고요, 본부장님.”
“……봤어. 들어가는 거.”
“그럼 그냥 밖에서 기다리면 되지, 왜 들어와요? 갑자기 성질은 왜 내?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녀는 기가 찬다는 웃음을 내비쳤다.
그가 화내는 타당한 이유를 찾지 못한 듯했다.
“그야…….”
“이거나 받으세요. 무거우니까.”
그 역시 적당한 변명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하여 대충 얼버무리려 입술을 뗀 찰나, 수영이 심드렁한 얼굴로 그에게 커피 캐리어를 건네었다.
무작정 내미는 탓에 얼떨결에 받기는 했으나 기분이 풀린 건 아닌지라 수영에게서 반응은 없었다.
태진이 멀뚱멀뚱 서 있자 그녀가 목을 가다듬은 뒤 넌지시 말했다.
“……아메리카노, 본부장님 거예요.”
그러면서 제가 든 봉투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 안에 샌드위치도 있고요.”
“이건 왜…….”
“점심 먹을 시간 없으니까 제 거 사는 김에 샀어요.”
혼자 먹을 수가 없어서. 이 행동의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뭐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회사에서 같은 사무실 직원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매너 같은 거다.
원래는 혼자 먹고 갈 셈이었지만 때마침 그가 보낸 메시지를 본 게 화근이었다.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왕 먹는 거, 하나 더 산 것뿐이다.
수영은 스스로를 온갖 변명으로 치장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괜히 샀어. 과장님 앞에서 이상한 소리나 하고. 사람 무안하게 진짜.”
괜한 트집은 일부러 내뱉었다.
왠지 모르게 드는 민망함과 행여나 그가 제멋대로 할 상상이 싫었다.
태진은 내내 얼빠진 표정이었다.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캐리어만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희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점심 먹을 시간 없으니까…….〉
‘내가 보낸 걸 봤다는 소리네. 바로.’
태진의 입매는 금세 배시시 호선을 그렸다.
그러곤 냅다 그녀가 들고 있는 봉투를 빼앗아 들었다.
“이리 줘요. 내가 들게.”
“뭔…….”
“이런 거 살 거면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요. 최 팀장 끝날 때 맞춰 앞에서 기다렸을 텐데.”
“왜 이러세요?”
수영이 눈살을 찌푸리고 상체를 뒤로 뺀 채 묻자 태진이 곧장 대답했다.
“나? 왜요? 나 뭐 이상해요?”
“네. 엄청.”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같이 정신이 이상해질 만큼.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 굉장히 기분 좋은데.”
“그래서 이상한데요.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아까는 성질을 내더니 이제는 또 싱글벙글 좋아 죽는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어떨 땐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미친놈 같다가 어떨 땐 다르게 미친놈 같았다.
수영이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시죠?”
머리라든가, 머리 같은 거.
“아프긴요. 아프면 안 되죠. 아프면 최 팀장이 사 준 거 못 먹잖아요.”
“아. 네에.”
‘맞네. 머리 아픈 거.’
그녀는 장담했다.
절레절레.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내젓는 고갯짓이 느릿했다.
“가죠. 얼른.”
그러거나 말거나 태진은 기분이 들뜬 상태였다.
“가서 같이 먹을까요?”
“아뇨? 혼자 먹고 싶은데요.”
“그럴래요?”
평소 같은 딱딱한 거절을 들어도 좋아했다.
“저한테서 좀 떨어져 주실래요?”
“그럴까요?”
눈으로 욕하는 것도 좋아했다.
수영이 하는 거라면 뭐든.
조금 전 선우와 있었던 일은 깨끗하게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왜 그러는지 누가 묻는다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되물을 자신까지 있었다.
그는 이토록 한없이 단순한 남자였다.* * *
어느 날인가부터 태진이 이상해졌다.
묘하게 수영을 주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그는 수영이 전화를 하거나 밥을 먹을 때 주로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번득였다.
꼭 누군가와의 연락을 감시하는 것 같은 분위기.
원래도 수영을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었으니 궁금한 게 많겠거니, 관심이 많겠거니, 그렇게 넘겼다.
하나 주희는 점점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러신대…….’
급기야 그가 수영을 따라다니기 시작한 탓이었다.
‘와중에 본인만 모르는 것도 신기하다.’
성 대리나 주희가 수영과 다닐 때마다 느껴지는 시선에 난감하다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다.
카페에서 나와 앞서 걸어가는 수영의 눈치를 살피던 주희가 슬쩍 성 대리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아직도 따라오시지?”
그에 성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기 따라오고 계시네요.”
앞에 세워진 차량의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숨겨지지 않는 몸뚱어리.
제아무리 아닌 척 고개를 돌려도 유독 눈에 띄는 외모가 감춰질 리 만무했다.
주희가 황당하다는 낯을 띠었다.
“진짜 왜 저러시는 거야?”
“모르겠어요, 저도.”
성 대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사자의 속을 어찌 알랴. 그저 감히 짐작해 보건대 수영에게 할 말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 걸까요?”
“근데 저렇게 좀도둑처럼 숨어서 쫓아와? 그냥 평소처럼 당당하게 물어보면 되잖아? 원래 본부장님이 저런 이미지였니?”
“그럴 리가요. 가서 여쭤보는 게 좋으려나요?”
“뭐? 아휴, 됐어. 민망하시겠다.”
“넵. 알겠습니다.”
주희는 그의 행동의 이유가 궁금했지만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수영의 눈치를 볼까.
“본부장님, 꼭 주인 쫓아다니는 강아지 같지 않아?”
“……네?”
이따금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딱 주인 몰래 쫓아온 강아지 같았다.
저렇게 덩치 큰 강아지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가 종종 보이는 표정과 눈빛이 그랬다.
“…….”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알 리 없는 태진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