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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맞추려 숙인 고개와 작게 짓는 미소가 태국에서의 만남을 연상케 했다. 꿍꿍이 가득한 태진의 말에 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뭔가 떠보려는 것 같기는 한데 뭘 떠보려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장난치는 건가?’
원래도 이런 장난을 줄곧 쳐 왔으니까. 아마 태국에서의 만남을 빌미로 시비라도 걸고 싶은 모양이었다.
수영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의도치 않게 일주일 먼저 만난 거로 진한 사이라뇨.”
“…….”
“누가 들으면 대단한 일이라도 있었던 줄 알겠네요.”
그게 통한 걸까. 반짝거리던 태진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그라드는 게 보였다.
그는 조금은 서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진짜 기억 못 하는구나.”
“네?”
한데 그마저도 수영의 귀에는 닿지 못했고 태진은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
“그건 그렇고. 기특하네, 최수영. 나 없다고 울지도 않고 잘 살았다?”
“…….”
“어떻게 넌 반가운 티가 없냐. 태국에서도 날 피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하, 참 나.”
그럼 그렇지. 다 장난이었지.
수영은 기가 찬다는 웃음을 내비쳤다.
“반갑긴 누가 반가워? 하나도 안 반가워, 너.”
네가 유학 갔을 때 축배를 들지 않은 게 아직까지 아쉬울 정도로.
“부탁인데, 우리 회사에서는 아는 척하지 말자. 10년 동안 서로 존재 모르고 살았잖아.”
“누가 먼저 연락을 끊었는데.”
순간, 태진의 눈이 번득였다.
단호하게 말을 이어 나가던 수영은 갑작스러운 그의 무표정에 움찔했다.
“난 연락 끊고 싶다고 한 적 없어. 네가 일방적으로 날 피했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음성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의 낯은 서늘함이 감돌아 제 숨을 얼어붙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너 못 가.”
“…….”
“내가 안 놔줄 거거든.”
‘하필이면’이라는 단어가 강렬하게 생각나는 단둘밖에 없는 공간.
그의 올곧은 시선을 온전히 받아 내던 수영은 꿈에서 봤던 것처럼 열망 가득한 그의 눈빛에 꿀꺽, 침을 삼켰다.
“풉.”
왠지 모르게 심각해져만 가는 그때. 긴장감을 만들던 태진의 입술 사이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 방금 겁먹었지?”
툭, 쓰다듬듯 머리를 가볍게 문지른 그의 손이 멀어졌다.
“뭐…….”
순식간에 풀어진 분위기에 그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 겁?
“너는 아직도 이런 장난에 속냐?”
장나안? 이게 미쳤나!
“너……! 너……!”
수영은 바들바들 떨리는 검지로 그를 가리켰다.
하고 싶은 말은 가득한데 어쩐지 마음처럼 입이 벌어지질 않아 인상이 구겨졌다.
“상사한테 삿대질하네. 최 팀장은 연말 사원 평가가 별로 두렵지 않은가 봐?”
“…….”
이 망할 진태진. 수영이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연말 사원 평가. 성과급과 월급이 좌우되는 그거. 그게 잘못되면 앞으로의 회사 생활 자체가 문제였다.
그걸 진태진이 판단하는 건 더 문제였고.
‘참자. 참아.’
“휴…….”
그녀가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금 고개를 드니 히죽히죽 웃는 낯이 바로 눈앞에 선명하게 들어찼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수영이 어금니를 악물고 말했다.
“제가 미처 본부장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같네요.”
내가 재작년에 그 말똥 같은 김 과장 밑에서도 버텼는데 이놈이라고 못 버틸까.
수영은 이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선처 부탁드립니다.”
“흐음.”
급격한 태세 전환에 태진이 흥미로운 듯 말끝을 흐렸다.
“자본주의에 굴복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에 좋군요, 최수영 팀장.”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니까요. 그것에 맞게 행동해야죠. 더 할 말씀 없으시면…….”
“있어요. 할 말.”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몸을 돌려 버리려는 찰나. 태진이 곧장 말꼬리를 이었다.
“하세요, 그럼.”
“남자 친구 있어요?”
“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없죠? 없어야 되는데. 있어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람.
“그런 거…….”
없다. 관심도 없고, 있던 적도 없고.
한데 그렇다고 그걸 굳이 얘한테 말해 줄 필요가 있나?
수영은 말끝을 흐리다 말고 새침하게 답했다.
“제가 왜 본부장님한테 말씀드려야 하죠?”
“왜겠어요.”
“왠데요?”
“나랑 사귀자고 하려고?”
“무…….”
“최 팀장, 나랑 사귈 생각 없어요?”
허어?
“최 팀장이라면 기꺼이 다 맞춰 줄 자신 있는데.”
설마 그럼 내가 자기랑 사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진짜 이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지?
수영이 입을 벌린 채 콧등과 이마에 주름을 깊게 잡았다. 그런 뒤 또다시 밀착한 그를 두 팔로 조금 밀어 떨어트려 놓았다.
“네. 없는데요.”
“조금도?”
“조금도.”
그녀는 단호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되묻는 그의 물음에도 칼같이 끊어 냈다.
“회사 관련 질문은 다른 분들께 물어보시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용건 다 끝나셨으면 나가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홱 하니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그녀의 어조만큼이나 단조로웠다.
“하하하.”
이미 가고 없는 그녀의 자리를 빤히 보던 태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망했어.’
자리로 돌아와 주저앉듯 앉은 그녀는 그대로 얼굴을 테이블에 처박았다.
‘최악이야.’
첫발이 개끗발이랬다.
제 능력껏 노력해 남들보다 빨리 팀장직을 달아 좋아했건만 이게 이렇게 틀어지나. 그것도 평생 최악의 시나리오로.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평생 살아온 30년. 30살의 첫 줄을 팀장으로 시작한 그녀의 빛나는 인생은 열흘 만에 끝나 버렸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짜증 나.’
제가 오죽하면 휴가에서 처음 만나자마자 피하려 했을까.
어릴 적 하는 장난이 심해 봤자 얼마나 심하냐 하겠지만, 진태진이 벌인 짓들은 그녀가 감당 못 할 장난들이었다.
제멋대로 청소 당번을 바꾸질 않나, 숙제를 베낀답시고 허락도 없이 가져가 돌려주질 않았다.
아니, 돌려주기는 했다. 그 숙제를 내야 하는 수업이 끝난 이후에.
〈나 보건실 다녀올게.〉
또 언젠가는 아픈 날 보건실에 가기 전 선생님께 말해 달라 부탁했더니 말하지 않아 벌점을 받았다.
〈내가 말해 달라고 했잖아!〉
〈담임이 내 눈에 안 보이는 걸 어떡하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애초에 해 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뻔히 선생님이 교무실에 있는 걸 알면서도.
“하아…….”
그나마 학교생활은 상대적으로 짧았지, 이곳은 어쩌면 평생 다닐지도 모르는 회사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궈 낸 제 위치와 이미지, 업적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였다.
진태진이라는 인간 1명 때문에.
“최 팀장,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수분기 가득한 한숨 소리에 주희가 슬쩍 다가와 수영의 팔을 툭 건드렸다.
“네?”
“아이, 깜짝이야.”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린 채로 고개를 들자 주희가 몸을 들썩였다.
대낮에 귀신을 본 기분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그녀는 재차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자기 괜찮아?”
“네……. 괜찮아요…….”
조금도 괜찮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시선을 한 몸에 받았는데 또다시 튈 수는 없었다.
한데 누가 봐도 심각한 기색인 탓에 주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안 괜찮아 보이는데?”
“네. 저 괜…….”
“그새 얼굴이 많이 상했네…….”
“사…….”
상했다니. 표정은 너무나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말은 어딘가 모르게 듣는 사람을 슬프게 했다.
진심으로 하는 걱정이겠지.
그만큼 내가 안쓰러워서 하시는 소리겠지.
근데 왜 이렇게 착잡하냐.
“네……. 괜찮아요.”
에이, 모르겠다.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다. 진태진이 문제지.
‘하필이면 여기서 걔를 만나냐.’
수영은 축 늘어진 어깨를 펼 생각도 없이 거듭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았다.
“저기…… 최 팀장.”
그런 수영의 속을 알 턱이 없는 주희는 재차 입을 열었다.
“혹시 본부장님이랑 아는 사이야?”
“……네?”
그 갑작스러운 물음에 또다시 상체가 급하게 들렸다.
“왜, 왜요?”
“아니…… 아까 같이 출근한 것도 그렇고.”
그건 어쩔 수 없이 아침부터 재수가 없어서.
“오자마자 본부장님이 자기 되게 친근하게 부른 것도 그렇고.”
그건 저를 놀려 먹으려고 모른 척하고 있다가 말하느라 그런 거고.
‘그러고 보니 걔는 왜 거기서 아는 척을 해서!’
태진이 ‘쟤’라는 말만 꺼내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싸한 반응은 아니었을 거다. 그냥 잘못 알았구나 했겠지.
문득 떠오른 조금 전 상황에 수영이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바로 자기 불러서 제일 먼저 회의실로 들어갔잖아?”
그러는 사이, 주희가 계속해서 그녀를 추궁했다.
“뭔데? 어떤 사인데? 혹시…….”
이내 눈이 가늘어지면서 미묘하게 톤이 올라가고 말끝이 늘어졌다.
그러자 수영이 즉답했다.
“아니에요. 아무 사이도.”
“그래?”
“네. 그럼요.”
단호하게 선을 긋지 않으면 행여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하여 괜히 더 과하게 대답했고, 덕분인지 주희는 멋쩍어하는 눈치였다.
“그렇구나. 난 또. 둘이 무슨 썸씽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하하…….”
목덜미를 매만지는 주희에게 얼핏 아쉬워하는 기색이 있었으나 수영은 모른 척 웃기만 했다.

밀당하는 사이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